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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젊은평론가가 뽑은 2006 젊은 시 강성은 편

시치 2006. 10. 3. 20:40


젊은평론가가 뽑은 2006 젊은 시 강성은 편

12월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등단작[문학동네]. 2005.




아름다운 계단/강성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여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 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흘러가는 기차를 탄
사내의 담배 연기를 따라
붉은 달이 떠 있는
검은 딸기밭 아래
곱게 화장한 미친 여자 뱃속에
숨겨진 계단 사이로
길을 잃은 아이가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
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가고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로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계단은 점점 더 느려져
잠이 든 채 연주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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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아이들

한쪽 눈이 먼 소녀는 여름 내내 명태 눈알만 파 먹었다
성난 태양이 회초리를 들고 쫓아와서
소녀는 한 쪽 눈을 찡그리고
색 없는 것들을 발로 차며 도망 다녔다
눈 안에서 어리석고 예쁘게 청유리가 자라났다

소년은 닭장 속에서 잠들었다
눈 내리는 밤 깃털들은 따뜻하게 휘파람을 분다
착한 닭들이 소년의 감은 눈을 쪼았다
커다란 알들이 닭장 가득 태어났고
어느 날 소년은 오토바이를 타고 늙은 알들을 팔러 나왔다

호주머니 속에서 터진 눈알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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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몽유

정수리의 태양이 일순간 검게 변해 흘러내리는데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을 나뭇잎처럼 똑똑 따는데
나쁜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잠옷 차림의 나는 운동화 끈을 씹으며 다리 위를 걸어간다
이곳은 마녀의 젖꼭지처럼 추워*
잠옷 속으로 얼음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이내 녹아지고
다리 위로 계절들은 달려가고 애인들은 흩어지고
나는 열두 살 때 입었던 잠옷을 입은 채로 다리 위를 걸어간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동전들
늙은 개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작은 눈에서 나는 개와 입맞춘다
청소부의 커다란 빗자루가 내 맨발을 부지런히 쓸어내린다
강물 위로 물고기의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나는 다리 위를 걸어간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태양이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토니 모리슨

기 발표작
젊은평론가가 뽑은 2006 젊은 시 강성은 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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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강성은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그 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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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강성은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자줏빛 스카프가
내가 아름다운 두 팔로
그녀를 목 졸랐네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가 죽는 것을 보았지?
마룻바닥이
내 커다란 눈으로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보았네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피를 가져갔지?
영탄자가
내 고운 실들이
그녀의 피를 먹었지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운반하지?
가위가
그녀가 종이처럼 얇게 마른다면
내가 자르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말리지?
먼지가
그녀가 기억마저 잃었다면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까맣게 말리지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기억을 가져가지?
그림자가
그녀가 쓴 노트들을 태운다면
내가 모든 기억을 데리고 달의 뒤편으로 가지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노트들을 태우지?
태양이
그녀의 눈알들을 준다면
내가 노트들을 불살라버리자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감은 눈꺼풒을 열고 눈알을 뽑지?
음악이
그녀의 목소리를 준다면
내가 그녀를 눈뜨게 하지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깨워 노래 부르게 하지?
고통이
그녀가 지금도 나를 기억한다면
내가 그녀를 일으켜세워 노래 부르게 핮디라고 말했네
그레텔 부인은 하루 온종일 노래 부르네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내 사랑스런 그녀를 죽였나


― 〈창작과비평〉2006년 여름호







아름다운 불



파란 산불이 났다 사람들이 산 아래 모여들어 불을 구경했다 오래 된 나무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보랏빛 연기가 길게 저 너머 도시로 옮겨가고 있었다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연기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모두가 바라보기만 했다 파란 불 속에서 산짐승들이 뛰쳐나왔다 모두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저건 불이 아니야 이건 꿈이야 사람들이 서로의 불안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불은 파도처럼 일렁이며 흐르는 물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보랏빛 연기가 자욱하게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누군가는 악을 쓰며 기도했고 누군가는 난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라며 태연히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급해진 사람들이 보랏빛 연기를 헤치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하지만 달려도 달려도 파란 불의 흐느낌은 멀어지지 않았다 온통 보랏빛 연기만 자욱할 뿐이었다 불은 사방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파란 불은 슬픈 얼굴로 그들을 지나갔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을 모두 태우고 나서도 파란 불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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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듬떠듬 치느라 한 참을 애 먹었네요 ㅎ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피닉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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