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연보
▲1922년 11월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46~1951년 통영중, 마산중·고 교사
▲1946년 ‘애가’ 발표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펴냄
▲1950년 시집 ‘늪’ 펴냄
▲1959년 시집 ‘꽃의 소묘’,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펴냄
▲1961년 ‘시론’ 펴냄
▲1977년 시선집 ‘꽃의 소묘’, 시집 ‘남천(南天)’ 펴냄
▲1979~1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2년 시선집 ‘처용 이후’ 펴냄
▲1986~19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1989년 시론집 ‘시의 이해와 작법’ 펴냄
▲1990년 시선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펴냄
▲1991년 시론집 ‘시의 위상’, 시집 ‘처용단장’ 펴냄
▲1993년 시집 ‘서서 잠자는 숲’,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 펴냄
▲1999년 시집 ‘의자와 계단’ 펴냄, 부인 명숙경 여사와 사별
▲2001년 시집 ‘거울 속의 천사’ 펴냄
▲2002 년 사화집 ‘김춘수 사색사화집’, 시집 ‘쉰한 편의 비가’ 펴냄
▲2004 ‘김춘수 전집’(현대문학) 펴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나의 문학 실험> - 시인 김춘수의 말
40년대 후반은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습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암중모색의 시기다. 남의 시를 모방하면서 어떻게 쓰면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나대로 습득해가는 과정이었다. 50년대로 접어들자 나에게 비로소 길이 열리는 듯 했다.
나는 남의 시의 압력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러자 내가 시도하게 된 시는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몹시도 과작이 되어갔다. 1년에 한 편 정도가 고작이었다.
꽃 연작시에 있어서의 꽃은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꽃에 빗대어 관념(사상이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다. 나는 그때 실존주의 철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학생때 읽은 릴케의 관념시가 새삼 새로운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60년대로 접어들자 시에 대한 또 한번의 회의와 반성이 왔다. 한 3∼4년동안 새로운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무렵 시는 관념으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아닐까 하는 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관념을 의미의 세계라고 한다면 시는 의미로 응고되기 전의 존재 그 자체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시에서 관념을 빼는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한 3∼4년 걸렸다.
시에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빼자니 문체가 설명체가 아니고 묘사체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존재의 모습)을 그린다. 흡사 물질시의 그것처럼 된다.묘사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때의 이미지는 서술적이다. 나는 이미지를 비유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서술적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를 위한 이미지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무엇을 비유하지 않는 이미지다.
무엇을 비유한다고 할 적의 무엇은 사상이나 철학, 즉 관념이 된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는 그 배후에 관념이 없기 때문에 존재의 모습(사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즉 그 이미지는 순수하다.이리하여 나는 이런 따위의 이미지로 된 시를 순수시라고도 하고, 무의미의 시라고도 하게 되었다.
무의미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1차적으로는 시에서 빼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미지가 아무리 순수하게, 즉 서술적으로 쓰인다 해도 이미지는 늘 의미, 즉 관념의 그림자를 거느리게 된다. 이리하여 이미지도 없애야 되겠다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내 무의미 시의 둘쨋번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없애고 리듬만이 남게 한다. 흡사
주문과 같은 상태가 빚어진다. 음악을 듣듯 리듬이 빚는 어떤 분위기에 잠기면 된다.
--- [중앙일보] 1996. 3. 23
1. 약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스스로 퇴학하고 40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으나 42년 12월 사상 혐의로 퇴학 처분 당하였다.
이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통영중학 교사로 재직 시절인 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49년 다시 마산중학으로 옮기고 제2시집 <늪>, 제3시집 <旗>, 제4시집 <隣人>을 차례로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60년대부터 해인대, 경북대, 영남대 교수를 차례로 거쳐 81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시인협회상, 자유아세아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82년에는 문장사에서 詩와 詩論에 대한 <김춘수 전집>을 출간하여 회갑 맞이 작품 정리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무의미 시를 다져 가고 있다.
2. 김춘수 詩의 변천사(意味에서 無意味까지)
김춘수의 詩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큰 변화의 단계가 있다.
그 첫번째가 첫 시집이 나오던 47년 무렵부터 50년대의 <꽃>에 대한 일련의 詩가 생산되던 시기까지로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를 시인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自己內 世界'의 시절이라고 한다.
두번째 단계는 57년의 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로 시작되는 `말의 트레이닝' 단계이다. 이때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의 詩作에서의 상관 관계에 천착하게 된다.
마지막 변화의 단계는 두번째 단계의 시도가 거의 완성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처용단장 2부>를 시작하던 무렵부터로 본다. 이때부터 시인은 완벽하게 보통 시 속에서 보여지는 통일된 image를 버리고 일정하고 보편적인 세계관에서 이탈하며 철저한 허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가) 意味의 시기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을 보면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도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따라서 장미를 노래한 것은 하나의 이국 취미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시인은 하나의 시적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촉각'에 의지한 詩를 썼으며 그것은 意味(말)보다 먼저 tone이 앞섰다.
시인의 발상은 서구의 관념 철학으로 접근해 갔으며, 그가 사숙(私淑)했던 릴케의 영향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로 침잠하여 선험의 세계를 떠돌기에 이른다. 그러다 결국 시인은 '실제 감각' 따위를 잃어버리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의 바닥에서 끝내는 '허무'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존재의 허무함 앞에서 시인은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의 詩를 남기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詩들을 고비로 시인은 의식적으로 '말의 트레이닝' 곧 '데생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나) 意味에서 無意味로
시인은 50년 말에서 60년 전반에 걸쳐 이른바 '말의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것은 관습적인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물의 의미와 질서에 대한 시적 재구성을 해가는 작업이었다. 그에 의하면 비유적 image를 버리고 image를 위한 image로써 詩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세잔이 사생(寫生)을 거쳐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확신하고, 詩로 이 과정을 대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사생이라고해서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기도하고, 과장되게도 하고, 실제와 전혀 다르게 재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상의 재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 연상이 끼이게 되는 것이다. <처용단장 제 1부>는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시이다.
여기서 '말의 트레이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일종의 '언어 유희'이다. 李箱의 시가 '말의 장난'이었던 것처럼 이 시기의 김춘수의 시를 '예술=장난'이라는 오락 예술론의 재시도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무엇이가를 말하려는 시가 아니라 무념무상의 세계로서, 의미가 없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어떤 '연상(聯想)의 순간'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무의미 시'로 지칭한다.
다) 無意味詩
김춘수는 image를 image 그 자체가 목적인 서술적 심상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인 비유적 심상으로 나누고, 서술적 심상을 다시 대상을 가진 서술적 심상과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으로 나누면서, 바로 이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에서 無意味시가 탄생한다고 하였다.
시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의미시는 관습이나 기성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고 하여 그의 시를 지탱시키는 현상학적 에너지가 '허무'임을 이야기한다. 즉 李箱의 경우처럼 대상과 사물과 관념을 제거시키고난 어떤 방심상태, 그 자유스러운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미시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image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시킨 대상을 놓친 절대 심상인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image를 얻으려는데 비해 김춘수는 image를 버리려 한다. image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image의 명중성, 의미성, 상징성 따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대상의 구속을 받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 행위와 사고 행위가 빚어내는 무의미시, 곧 탈image의 리듬과 쾌감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3. 김춘수 詩에 있어서의 개인적 상징
김춘수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기법상의 초현대성과 함께 보편성이 없는 개인적 상징을 그의 시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꽃> 같은 시어들은 그의 시 속에서 특수한 의미로 표현되는데 특히 <처용단장>의 주된 맥을 이루는 <바다>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회복'이고 '부활'이기도 하다. 바다는 내 '유년'(幼年)이고 또한 내 '무덤'이다.]
라고 했다. 곧 시인은 <바다>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의미간의 무상관성 때문에 시는 자연히 보편성을 잃고 난해해지는 것이다.
4. 인간 김춘수
김춘수는 충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자전적인 그의 소설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한 그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이후에도 그를 현실에서 좀 떨어진 고고한 위치에 서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선별적으로 사귈 만큼 성격에 융통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허약해 보이는 체구와 여자의 손처럼 희고 깨끗한 손, 거울 같은 구두에 드러나는 그의 결벽성은, 여러 제자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제자들이 술집 여자로 접대하려하면 가차없이 내쫓아버리는 공선생 같은 면모와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신체의 결정적 결함이었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한 때는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딸들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쳐, 계절에 맞게 여러 개의 모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한때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전증까지 일으켰지만 수술 후에는 오히려 몸이 불어나 얼굴에는 윤기가 나고 배가 앞으로 나올 만큼 풍체가 좋아졌으며 자연히 수전증도 사라졌다. 그의 결단력 또한 대단해 수술 후에 결연히 금연을 해 동료 흡연가들을 놀라게 했다.
집안에서 그는 전기 휴즈도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7,8년간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할 만큼 세상살이에는 무관했으며 심지어 카메라의 셔터가 어느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는 고소 공포증이 심각해서 74년에 새로 집을 지을 당시 2층 계단에도 올라서지 못할 정도여서 옆집에 살던 동료 교수가 대신 감독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 시절 의원 사절단으로 세계 일주를 다녀오면서 그 심각한 고소 공포증을 고쳤다고 하니 국회의원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는 예술가답게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8년간 제자 양성에 정성을 기울인 경북대를 떠나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악명높던 K총장과 그 주변 인물이 무슨 심의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직,간접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는 시인이지만 그림에도, 조각에도, 꽃에도 조예가 깊다. 벽에 걸린 탈이나 그림을 늘 즐거이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한다. 지금도 그의 집 안마당에는 전라(全裸)의 여인상이 자리하고 있고 수많은 기화요초가 향기를 품고 있으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구입하는 분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다. 국문학과 전공 강의인 <시론>시간에는 학년 정원의 3배를 웃도는 수강생으로 북적였으며 늘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해 다음 시간의 교수를 복도에 오래 세워 놓기도 했다.
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로 진출한 뒤 그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와는 관련이 없던 시인이 의원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게 있어 시는 최선의 도덕적 결백을 위한 윤리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란 최선을 우선하다 차선, 삼선의 여지로서 운영되는 현실에 대한 나의 참여이다."라고 자신의 견해와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요, 교수요,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인간 김춘수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냉담한 느낌의 외모를 가졌지만, 드넓은 통영 앞바다를 사계절 지켜 보며 자란 까닭에 깊고 담담한 인품과 경상도 남자답게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참고자료>
김준오, {시론}
김준오 <처용시학> - 김춘수의 무의미시. {부대논문집} 1980
조남익 {한국 현대시 해설} 미래문화사
권기호 외 {김춘수 시 연구} 흐름사
부산대 {국어국문학지} 1986년호
{김춘수 시선집} 문학세계사
김춘수론 - 의미와 무의미의 공간 <이승훈> 시인/ 한양대 교수
김 춘수는 1948년 시집 [구름과 薔薇(색미)]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초기시를 대상으로 한 평가이긴 하지만, 김현과 김 윤식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같이 말한 바 있다.
김 춘수는 서구의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한 희귀한 시인이다. 대부분의 서구 취향 시인들이 영미 계통의 모더니즘에 세례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상징주의 취향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의 상징주의 취향은 초기에는 무한탐구로, 후기에는 순수시 절대시로 나타난다. 그의 무한탐구는 릴케류의 기도에서 시작하여 절대에의 동경, 하늘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는 투쟁보다는 화해를, 고통보다는 안정을, 탐구보다는 신앙을 오히려 희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여성적이다. 그의 여성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르지만, 그러나 살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는 험난한 사회에서의 기도의 자세이다.
김 춘수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단서는 위의 글에서 주장되는 것처럼 그가 초기에 서구의 상징주의의 시이론을 소화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말라르메나 발레리류의 그것보다는 릴케류의 그것과 통한다.
김 춘수의 초기시는 사실 릴케의 초기시에 많은 영향을 입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김 춘수는 이런 영향 속에서 시 쓰기를 출발하지만, 우리 시의 역사에서는 특이한 시세계를 발전시킨다. 특이하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는 지적 모험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 춘수의 시세계를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그 특성을 해명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네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 그의 시적 특성을 간단히 요약하고, 그후의 작품들에 대해서
도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序詩] [나목과 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으로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들 수 있다. 많은 이론가들은 그것을 존재와 언어의 탐구 혹은 존재의 조명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꽃]...
이 시행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꽃>이라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시 속의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꽃은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관념적 실체,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이 시에서 꽃이란 화자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좀더 부연하면 꽃은 인간의 명명행위 이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꽃이라는 사물이 인간의 명명행위, 곧 언어행위에 의해서만 꽃이라는 사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시적 통찰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모든 사물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김 춘수는 대체로 이런 인식론의 세계를 노래하며, 그것은 존재의 탐구, 그러니까 사물이 존재한다고 할 때의 그 존재문제에 관심을 둔다. 하이데거의 용어에 의하면 사물현상(being)이 은폐하고 있는 존재현상(Being)을 해명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忍冬 잎]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난다.
50년대말에서 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이 그렇다. 물론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지는 [打令調(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서술적 이미지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다시 말하면 이미지를 어떤 관념의 수단으로도 사용치 않는 그러한 이미지의 세계를 일컫는다.
어떤 관념의 수단이 되는 이미지를 그는 비유적 이미지라고 부르며,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의 수단도 되지 않는, 그러니까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그는 서술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가 말하는 서술적(descriptive) 이미지란, 번역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로서는 묘사적 이미지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處容斷章 第一部(처용단장 제일부)]에서는 이러한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한결 심화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무의미의 시가 태어난다. 그가 말하는 무의미시의 개념은
1)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될 때는 이미지가 대상이 된다.
2) 그때 나타나는 시가 무의미시이다.
3) 그러나 무의미는 기호론이나 의미론의 용어와는 다르게 사용된다.
4) 그것은 자유와 불안의 논리를 띤다.
5) 남는 것은 시의 방법론적 긴장이다.
처럼 요약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는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부두에서] 전문..
같은 시행들이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이미지는 어떤 관념도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읽는 것은 이른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런 이미지는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될 때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바로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의 세계, 곧 무의미의 시는 예컨대
날이 저물자 /내 肋骨(늑골)과 肋骨(늑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處容斷章 第一部(처용단장 제일부)]...
같은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어린 시절의 무의식의 실체는 [肋骨(늑골)] 사이에서 <날이 저물자><거머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세계이다.
셋째 시기는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런 이미지가 마침내 소멸되는 [處容斷章 第二部(처용단장 제이부)]를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60년대말에서 70년대 전반까지가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의 소멸, 그러니까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를 뭉개버릴 때 태어난다.
그의 시론에 의하면 그것은 한 이미지를 다른 한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케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이미지에 의하여 꺼져가는 그런 세계이다. 따라서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되풀이가 낳는 리듬이다.
이런 세계를 나는 <적나라한 실존의 현기>라고 부른 바 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유와 불안의 논리를 띤다. 이런 탈이미지의 세계는 예컨대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살똥이 앗아간 것, /女子(여자)가 앗아가고 男子(남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女子(여자)를 돌려주고 男子(남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돌려다오. /[處容斷章 第二部(처용단장 제이부)]...
같은 시행들이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모든 대상이 소멸한 다음 우리가 겪게 되는 불안의 세계이다. 그것은 라공의 표현처럼 <존재하지 않는 오브제의 감성이 번지는 현혹> 속에서 울려나오는 실존의 투사이다.
넷째 시기는 70년대말부터 80년대초까지 그가 보여주는 시들로 집약된다. 시집 [비에 젖은 달], 시선 [처용 이후] 등의 세계가 그렇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탈이미지의 세계, 곧 어지러운 실존의 리듬이 아니라 [李仲燮(이중섭)] 시리즈, [예수] 시리즈, [중국 유적지]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담담한 성찰이다. 이런 성찰은 예컨대
바람아 불어라. /西歸浦(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쏠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西歸浦(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李仲燮(이중섭)] ....
같은 시행들로 노래된다.
이 시는 이중섭이라는 구체적 인물의 어떤 정황과 관련되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어떤 정황은 <바람아 불어라>라고 호소하는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따라서 가장 깊은 충동과 결합된 비탄의 세계를 뜻한다. 이런 비탄의 세계는 화가 이중섭의 내면과 시인 김 춘수의 내면이 중첩되는 양상을 띠고, 이 시대의 예술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이상 네 시기에 걸쳐 드러나는 김 춘수의 시세계는 다시 간추리면 인상파풍의 데생과 릴케류의 감성에서 출발한 그의 시가 첫째로 존재탐구, 둘째로 서술적 이미지, 셋째로 탈이미지, 넷째로 미적, 종교적 성찰의 세계로 전개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80년대말에 나온 시집 [라틴 點描(점묘) 기타] 그리고 연작시 [處容斷章 第三部(처용단장 제삼부)]가 보여주는 시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시집 [라틴 點描(점묘) 기타]의 세계를 다른 글에서. 체념과 해학 혹은 동양정신의 문맥에서 해명한 바 있다. 이 시기의 시와 [處容斷章 第三部(처용단장 제삼부)]의 시는 별도의 글을 요구하기에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
“꽃의 시인,하늘의 꽃밭으로 떠나다!”
한국 시단의 원로 김춘수 시인이 29일 오전 9시쯤 타계했다. 향년 82세. 지난 8월4일 기도 폐색으로 쓰러져 호흡곤란 증상과 함께 뇌가 손상된 김 시인은 분당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넉 달째 투병생활을 해왔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고인은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등 20여권의 시집을 발표하면서 우리 시단에 모더니스트로서의 굵은 획을 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꽃’ 전문)통영 만석꾼 집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조선 어투’의 관습에서 일찌감치 벗어났다. 초기시에는 금발에 눈이 파란 외국인 아이가 조선의 참외를 먹던 것에 대한 놀라움이 자주 표현돼 있다.
경기중학에 다니던 열 다섯 무렵 그는 ‘내가 왜 여기 와 있지?’하는 형이상학적 물음과 싸워야 했고 일본인 선생과 다툰 나머지 졸업 직전에 자퇴서를 던지고 일본대학 예술과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일왕을 비방한 혐의로 연행돼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일본으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된 그는 해방과 더불어 자신의 내면에 간직된 언어마저해방시켰다.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꽃’을 소재로 한 초기시부터,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무의미시’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한국 시단에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왔다.
헝가리 사태 당시 소련군의 침공으로 피살당한 소녀를 노래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열화와 같은 시를 쓸만큼 현실참여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70년대에 절정을 이루던 순수와 참여 논쟁에서 ‘무의미시’를 주창하며 비켜선 이래 시의 예술성에 몰두했다.
1981년에 신군부에 의해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 소회와 관련,그는 생전에 “내 의지가 아니었던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말했으며 투병중인 지난 11일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상금 3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고인은 경북대·영남대 교수,제11대 국회의원,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예술원상,대한민국문학상,은관문화훈장,인촌상,대산문학상,청마문학상 등을 받았다. 고인의 근작 시편들은 다음달 초 ‘달맞이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장례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김종길 정진규씨 등 후배들이 주축이 된 시인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영희(59) 영애(57) 용목(56·신명건설 현장소장) 용옥(54·지질연구소연구원) 용삼(52·조각가)씨 등 3남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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