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詩人/문인수

시치 2006. 9. 12. 01:05
 


 


1945. 6. 2.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아버지 문종협(文鍾協), 어머니

조묵단(曺默丹) 사이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58. 3. 초전초등학교 졸업.

1961. 3. 4. 성주중학교 졸업.

1962. 9. 성주농업고등학교에서 대구고등학교로 전학.

1964. 1. 31. 대구고등학교 졸업.

1966. 4. 동국대 국문과 중퇴.

1966. 4. 21 육군에 입대.

1966. 4. 5 만기 제대.

1975. 3. 23.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외동딸인 전정숙(田貞淑)과 결혼.

1975. 12. 23 아들 동섭(東燮)출생.

1978. 11. 5 딸 효원(孝媛)출생.

1985. 1.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 문단에 나옴.

1986.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를 심상사에서 냄.

1990. 두 번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를

문학아카데미에서 냄. 대구 영남일보 입사.

1992. 세 번째 시집『뿔』을 민음사에서 냄.

1996. 12.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1998. 5. 영남일보 퇴직.

1999.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을 대구 만인사에서 냄.

2000. 김달진문학상 수상



힘있는 서정시를 위하여 - 문인수론


/ 이성우 (문학평론가)




1. 유년의 집과 길과 끈



'길 위에서 집을 찾는 인간'이라는 테마는 동양과 서양, 혹은 옛날과 지금의 구분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학예술 작품에서 반복되어 왔다. 인류의 위대한 문학 유산으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y)』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오랜 시련과 방황의 길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집'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이다. 호메로스 이후로도 동서양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은 저마다의 '오디세우스'를 새롭게 창조해 왔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수없이 거듭되면서도, '길 위에서 집을 찾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문학적 창조성을 잃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삶이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두 축의 길항 작용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통찰은 인류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해,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의지로 집으로 가야 한다는 명제는 개인적 특수성을 가리킨다. 인류의 보편성과 개인적 특수성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문인수 시인의 다음과 같은 작품을 읽을 수 있다.




길이 막히거든 노숙을 해봐라.


달빛 아래

나무의 낯선낯선 이파리들이 눈앞을 저어 가면서 가장 먼 별들이 귓전으로 가슴으로 스며 내리면서 풀벌레 소리들 무수히 번져 에워싸면서

그대 겨드랑이에다가 하염없이 짜넣는

그 달빛이 무엇이 되는지


팔 벌리고 누우면 허수아비 같고

돌아누우면 좀 춥고

몸 웅크리면 섬같이 되어서


날고 싶을 것이다.


달빛 아래

그 어디로 길이 열리는지

먼 타관으로 가서 노숙을 해봐라.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전문(『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1990)



이 작품은 타향에서 삶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인이 들려주는 경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은 낯선 타관에서 기를 펴지 못하거나, 날씨나 풍토가 몸에 맞지 않아 탈이 나기 쉽다. 더욱이 고향을 떠났다는 의식 자체가 그에게는 커다란 부담이다. 이런 처지에 길마저 막혀 버렸다.


시인은 이처럼 객지에서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노숙을 할 것을 권한다. 일부러 이슬을 맞으며 한데에서 잠을 자는 행위는 고향을 떠나온 자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무장해제로부터 새로운 길을 찾는 실마리가 잡힌다는 것이 시인의 역설적인 생각이다. 타향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이 은연중에 지니기 쉬운 것이 필요 이상의 방어 본능과 비굴함 혹은 공격성이다.


이런 성향을 무기로 삼아 사람들은 고향 떠나 온 삶을 견디는 것이다. 타인을 향하던 그 무기는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거꾸로 자신을 향하게 된다. 시인이 권하는 노숙은 바로 이 단계에서 과도한 방어 본능과 공격성을 해제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 자연 속에서 본연의 순수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집으로 가는 길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비추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달빛이다. 이 달빛은 저 백제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시인으로 하여금 세상 모든 길은 마침내 집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가령 「정읍사의 돌」에서 시인은 고향의 달빛을 매개로 한 강렬한 귀소 의식을 이렇게 노래한다.


"벌써 몇 해가 지났건만/그대 여전히 삽짝 밖에 나와 서 있다./그대 뿜어 올리는 먼 달빛으로 보이나니/이 수렁을 지나 돌아가겠다." 고향집을 떠나온 자에게 현실은 한 번 발 디디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다. 그럼에도 그 수렁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적 화자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듯 현실을 수렁으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문인수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유년 시절의 고향이다. 시간을 거슬러 유년 시절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숱한 그리움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문인수 시의 뿌리를 이룬다.




마루 밑으로 장독대로 삽짝 뒤 헛간 속으로

달구지 밑이거나 오동나무 뒤 풀덤불 속 짚볏가리 뒤로

팽팽하게 땡기던 빨래줄 같은 거.

종록아 만효야 희천아 종호야

어머니들이 자꾸 불러들이던 저

저녁노을 속으로 또

팽팽하게 땡기는 빨래줄 같은 거.


-「술래」전문(『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1990)



어머니가 유년 시절의 시인을 집으로 불러들이던 그 목소리는 아직도 '팽팽하게 땡기는 빨래줄'로 시인의 의식을 고향 쪽으로, 어머니쪽으로 당긴다. 시적 화자는 세상 어디에 있든 자신을 고향으로 이끄는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어머니는 내 양손에다가 실타래의 한쪽씩을 걸고/그걸 또 당신 쪽으로 마저 다 감았을 때/나는 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실」,『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고 진술한 것과 같은 맥락에 속한다.


또한 그것은, 「칼국수」(『홰치는 산』,1999)에서처럼 성인이 되어 타향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칼국수 가닥을 이어 붙여 고향과 통화하려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시인을 유년의 고향으로 이끄는 어머니의 존재는 빨래줄, 실, 칼국수 등 '끈'의 형태를 띤 이미지로 표출된다. 마찬가지로, 시인과 아버지를 잇고 있는 것 역시 '끈'의 이미지이다.




하관을 하고 어허, 달구 마쳤다.

야트막한 산, 산세 흘러내리는 대로 따라 내려오니,

산 아래 오니 오줌 마렵다.

(아버지!)붉은 봉분 올려다보며 오줌 눈다.

  끝, 예까지 흘러내리는 산,

이 길고 긴, 뜨신 끈이여.


-「오줌-아버지」전문(『홰치는 산』1999)



아버지는 아들의 '뿌리'[ ]이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땅에 묻는 행위는 곧 자신의 뿌리를 땅에 묻는 것과 같다. 땅에 묻힌 그 뿌리에서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싹이 움틀 것이다. 오줌이 마려운 것은 일상에서 자연스런 생리 현상이지만, 이 작품 속에서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  끝"에서 나오는 것은 생리 현상으로서의 오줌일 뿐 아니라, 시적 화자와 아버지와 고향을 이어 주는 '끈'이다.


또한 그 '끈'은 온기를 간직한 '길'이기도 하다. "오줌발은, 그 길고 긴 뜨신 끈은 어디까지 닿았을까요, 밤중에도 소의 고삐는 이랴, 이랴, 아버지에게 닿아 있었던 걸까요"(「오줌-겨울소」)라는 구절은 물론 시집『홰치는 산』(1999)에 실린 여러 편의 '오줌' 시편들도 같은 이미지의 변주이다. 따라서 문인수의 시편들에서 반복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끈'의 이미지들은, 유년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이미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2. 빈 집 혹은 움직이는 달팽이집



어머니와 아버지와 유년기 추억이 동거하는 '유년의 집'은, 현실의 수렁을 지나야 하는 시인을 위무하는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회고적인 자기 안주의 세계라는 한계를 지닌다. 오디세우스가 오랜 시련과 방황을 거쳐 어렵사리 찾은 '집'을, 시인 문인수는 너무도 쉽게 추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 무엇보다 현실의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갈 집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시인 역시 이 점에 대해 일찍부터 고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시집『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1990)에 실린 '빈 집' 시편들은 그 고심의 흔적으로 보인다.




싸릿대 삽짝 풀썩 허물어진다 누구요

오두막 헛간채의 삭은 디딜방아가 쿵더쿵 쿵덕 오래 쌓인 먼지를 찧고 있다 누구요

봉당에 매달린 솔비 짚소쿠리 함지박서껀 쿵덕쿵 쿵덕 한꺼번에 흔들린다 누구요

쪽 마루 밑 삽살개 소리도 자지러지게 굴러 나와서 앞마당 수북이 강아지풀 개밥풀들이 바람 밑으로 뒤곁으로 달아난다 누구요

방문 정지문이 쿵덕쿵 쿵덕 여닫히며 허물어지며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전문



시인 자신이 추억하는 유년의 집이 현실적으로는 '빈 집'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이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각 행의 길이를 두드러지게 길게 배치한 것은, 그 빈 집에서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희망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 희망의 끝에는 "누구요"하는 환청만이 자리할 뿐이다.


자신이 찾아낸 현실의 집에서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하는, 시인의 실존에 대한 진지한 자기 질문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이 "감흥시 몇 개를 파먹고, 저 까마귀 휘적휘적 물 따라 이 마을을 떠난다"(「두메, 빈 집을 떠나며」)라는 구절에서는, '빈 집'의 의미 영역이 '빈 마을'로 확대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시집 『뿔』(1992)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선' 시편들 역시 현실 속에서 '유년의 집'을 찾으려는 노력의 한 부분으로 읽힌다.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새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속으로 가는가


-「정선 가는 길」부분(『뿔』1992)



정선읍 들어설 때는 뒤돌아보지 마라.

저 쇄재가 자물통같이 철커덕, 저문다.


생각하면 여러 재, 재 넘어 넘어왔다.

조양강 물굽이가 또한 여러 굽이 몸에 차게 감긴다.


돌아눕지 마라, 돌아눕지 마라.

저 소쩍새 밤새도록 재 넘어간다, 못 같다.


-「정선 1박」전문(『문학과창작』2000. 3)




시인이 여러 번에 걸쳐 정선을 찾는 내면적인 이유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집을 찾으려는 욕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선 가는 길」에서 보듯, 시인에게 있어서 정선을 찾아가는 길은, "내 마음속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정선은 현실에 실재하는 지명인 동시에 시인의 마음속에 추억의 한 공간처럼 자리하는 곳이다. "정선읍 들어설 때는 뒤돌아보지 마라"는 설화적 금기를 맨 앞에 내세우고 있는 「정선 1박」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단 하룻밤을 묵더라도 "쇄재가 자물통같이 철커덕" 외부 세계의 힘을 차단하는 공간인 정선은 그 만큼 현실성을 상실한다. 소쩍새가 밤새도록 우는 그곳은 슬픔 혹은 한(恨)을 머금은 곳이기도 하지만, 현실성이 결핍된 만큼 역으로 시적 화자에게는 위안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회상적인 자기 안주의 세계가 아닐 것이다. 실재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이 거세된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일찍이 달팽이의 빈 껍질을 들여다보며 "또 엉뚱한 구름이나 낚다가//그대/단칸 움집마저 비웠구나."(「그대 움집」,『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라고 탄식한 바 있다. 아무리 작고 누추한 집이라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미 빈집이 아니다. 더욱이, 달팽이집 이미지는 시인의 집 찾기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검은 수렁 한복판을 느릿느릿 간다 저런 절 한 채를 뒤집어쓰고 살 수 있다면……동해안 아름다운 길 길게 풀린다.


-「달팽이」전문『뿔』1992)



집도 절도 없는 타관에서 '움직이는 집'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 경지에 이른다면 세상의 모든 길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집이 가는 모든 곳이 길이 될 것이다. "동해안 아름다운 길 길게 풀린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정황을 내포할 것이다. 인용 시에서는 '집'이 아니라 '절'[寺]로 되어 있어 미심쩍은 데가 없지 않지만, 나는 이 작품이 시인의 집 찾기에서 새로운 경지를 배태하고 있다고 여긴다.



3. 슬픔의 미학을 넘어서



시집 『뿔』(1992)의 해설에서 이하석은 문인수의 시와 가장 잘 이어지는 시인으로 박용래를 꼽고, 문인수 시의 아름다움을 '눈물의 미학'으로 이름했다. 이승하 역시 문인수의 시 「풀뽑기」를 분석하는 자리에서 문인수를 김영랑 이래 김종삼, 박용래, 박재삼 들의 '슬픔의 미학'을 계승하는 시인으로 보았다(『현대시학』, 1997. 11). 실제로 문인수의 시편들은 밖으로 절제되고 안으로 응축된 서정시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그 밑바탕에는 슬픔 혹은 한(恨)이랄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뿔의 뿌리는 슬프다」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단단하고 뾰족해서 어떤 적의를 지닌 뿔처럼 보이는 돌의 밑바닥을 들춰보고는, "슬픔으로 된 뿌리인 것 같다"고 인식한다. 이는 타인의 적의마저 슬픔으로 무화시키는 법을 체득한 시인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하석과 이승하가 앞서 행한 평가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평가들이 문인수의 모든 시에 적용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1) 어느 처마 낮은 대폿집에 들고 싶다.

따순, 분통 같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분냄새 자욱하여 불콰히 취기가 오른다면

육자배기로, 흘러간 유행가로 질펀 흘러갔으면 좋겠다.

젓가락 장단으로 아, 뚝 뚝 꺾어낸 억수장대비의 북채로

동백 동백 같은, 늙은 작부의 상처 또한 붉게 씹으리.

다시 한 사발, 여자의 과거사를 가득 부어 마시면

지리산, 악산 산 거칠수록 더 여러 굽이 굽이굽이 풀려서

그러나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가는 섬진강.

저 긴 긴 목울대 치받치며 끄윽 끅 꺾이며 흘러가는 거

보라, 逆鱗 떨며 떨리며 대숲은 섧고

또 섧다 난분분난분분 매화 뿌린다.


-「매화」전문(『홰치는 산』,1999)



2)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 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전문(『시안』1999. 여름)



위의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지리산, 섬진강, 북채, 매화, 동백' 등의 중심 이미지를 축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다수의 동일한 중심 이미지가 연작 형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변주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렇지만 나는 같은 이미지를 활용한 두 작품이 산출하는 시적 의미와 효과가 매우 다르다는 데 주목한다.


1)에서는 무엇보다 늙은 작부의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는 육자배기나 흘러간 유행가에서 서러움이 묻어난다. 늙은 작부의 삶의 아픔에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화자를 통해 독자는 서러움이나 한(恨)의 정조에 쉽게 젖어들게 된다. 그 서러움의 정조는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가는 섬진강"처럼 연원이 깊은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슬픔의 미학'이라는 기존의 평가를 재확인할 수 있다.


2)에서는 그러나 사정이 다르다. 삼엄한 지리산 산자락과 유장한 섬진강의 흐름이 만나 이루는 한바탕의 소리마당에서 꿈틀거리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지리산은 고수처럼 앉고 섬진강은 소리꾼이 되어 유장하게 소리한다는 첫 연의 표현은 절묘하다. 더욱이 지리산 같은 고수와 섬진강 같은 소리꾼이라는 설정은, "참 긴 소리"를 하면서도 서러움의 정조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의연함을 예비한다. 떠오르는 달을 보고 소리북이 걸렸다고 묘사한 것 역시 예사롭지 않으며, 숨어 춤추는 북채, 폭발하는 매화, 뚝 뚝 선혈처럼 떨어지는 동백 대가리 등은 서러움을 안으로 응축시키는 동시에 밖으로 힘차게 발산되는 정신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 이미지들이 너무 강렬해 작품 안에서 사람의 체취를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이 작품은 문인수의 다른 시편들이 보여주었던 슬픔의 미학을 한 차원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 '힘있는 서정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문인수는 슬픔이나 한(恨)의 정조를 통해 길 위에 선 인간의 본원적인 귀향의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익숙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 그의 시편들의 독자에게 주는 감동은 상당 부분 슬픔이라는 인간의 본원적 정서에 기반을 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에서 익숙함이란 자칫 잘못하면 상투성에 안주하는 위험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구체적인 생활 체험과 힘있는 서정을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슬픔, 자연 그리고 북채


강희근


1.


문인수의 시는 물끼 젖은, 그런 슬픔을 깔거나 슬픔인 정서를 감고 있다 .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이 보인다.// 길게 풀리면서 오래 감기는 빗소리" (<실>에서)나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젖어 하염없이 옹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비>에서)이나 "누가 만리 밖에서 도 젖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에서) 같은 대목이 그렇다. 슬픔이나 젖은 대목이 나오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자연 자체가 비교적 객관적인 상태로 놓여 있으면서 그 '상태'는 표명 없는 슬픔, 그런 얼굴임을 드러내 준다.



돌 들은 단단하고도 뾰족하게 밟힌다.

유심히 내려다 보이는 돌들의 이마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있다.


적의의 뿔일까


돌들을 하나씩 뒤집어 본다.

그 뺨엔 마를 날 없는 날짜들이 깊이 젖어 있다.

슬픔으로 된 뿌리인 것 같다.


-<뿔의 뿌리는 슬프다> 전문



문인수의 슬픔은 "마를 날 없는 날짜들" 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물의 역사나 본질적인 흐름에 닿아 있다. 이것은 인간 삶의 본원 내지 본질이 슬픔이라는 유전자를 내포해 갖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문인수는 따옴시에서 볼 때 슬픔 캐기의 선수권을 줄 만하다 여겨진다.


'돌'→'돌들의 이마'→'적의의 뿔' 로 이어내는 상상력에서 그러하고 '돌들을 뒤집어' 보고 그 뺨에서 '날짜들이 깊이 젖어 있다' 는 것을 캐내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사의 환기에 '슬픔으로 된 뿌리'를 연결해 놓는 비약도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아니다. 슬픔을 가슴에 찔러 넣게 만든다.



2.


문인수 시의 글감은 자연이다. 자연이면서 닮기 위한 자연이 아니라 함께 있는 자연임이 눈에 띈다.


그의 자연은 '고향','오징어','비','나무','돌','산','강','담쟁이넝쿨','매화','정선',

'가시연꽃','동백','달' 등이다. 누구나 대할 수 있는 평범한 사물이다.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산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홰치는 산>에서



따옴시에서 아버지 (화자와 다르지 않다)는 '북벽',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엄동의 산협' 등과 동격으로 자연에 참여하고 있다. 한 치도 기울거나 왕따가 되어 있거나 주눅이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 참여하고 있다.



다시 한 사발, 여자의 과거사를 가득 부어 마시면

지리산, 악산 산 거칠수록 더 여러 굽이 굽이굽이 풀려서

그러나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지는 섬진강.

저 긴 긴 목울대 치받치며 끄윽 끅 꺾이며 흘러가는 거

보라, 逆鱗 떨며 떨리며 대숲은 넓고 또 넓다 난분분 난분분 매화 뿌린다


-<매화> 후반



여기서도 아버지처럼 화자는 여자의 과거사를 마시고 깊어지는 섬진강 목울대 치받는, 끄윽 끅 꺾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러운 대숲과 난분분 매화에 어울려 있기도 하다. 이쯤이면 시인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달관을 넘어 자연의 섭리 속으로 들어가 있는 셈이다. 동일성이나 동일 지향이 아니라 동일격(同一格) 으로 존재하는 세계, 그런 시인의 자유로운 세계를 열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산에,산에 살던 엄청난 고요가 컹 컹 컹 컹 나를 구경하였네 컹 컹 컹 ... 꼬리 감추었네 비 뿌렸네


내 몸 젖는 소리만 소란스러웠네


-<다시 정선, 또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전문



화자는 산마을 앞에 서 있고 산의 고요가 화자를 구경하고 있다는 요지이다.고요와 화자의 대칭 그 거리감을 느낄수 있으면서도 '몸에 젖는'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동일격의 실현이 '젖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3.


문인수 시인 시의 강점은 <채와 북 사이,동백 진다>에서 세밀히 드러난 것 처럼 시에서 자연공간이 유기적으로 놓여 움직이는 교향악 체계를 보여준다. 교향악 체계는 자연의 소단위가 각기 협연으로 참여한다는 의미인데 <채와 북 사이,동백 진다>는 국악 한마당이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채와 북사이,동백 진다>전문



자연의 소단위들이 이렇게 하나로 모여 집회를 이루는 시를 달리 볼 수 있었던가.

지리산,저녁노을, 달, 매화, 동백들이 섬진강을 중심으로 몰려나와 한마당 판소리 공연을 연출해 낸다. 소리북은 달, 소리는 섬진강, 고수는 지리산이다. 그리고 북채의 경우 괄호로 남겨 둔, 아니 대표 엔트리 가운데서 후보선수 경쟁붙이기와 같은 그때 그때 컨디션 좋은 소단위를 독자가 선발해 넣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여유의 기법을 쓰고 있다, 시인은 색채공간의 자연을 일거에 소리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주술사 역활을 하고 있는데 때로는 시인이 저승과 이승을 내왕하는 사제 (司祭)의 역할을 했던 것을 떠올려 주기도 한다.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까마득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꼭지>전문



시 <꼭지>는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붙인 이름인데, 꼬부라진 할머니가 된 꼭지를 그리고 있다. 꼭지 할머니의 배고픈 서러움을 테마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교향악적 체계가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림을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화자는 독거노인 꼭지 할머니가 동사무소로 가는 것을 달팽이 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재의 꼭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봇대 아래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서 젖배 곯아 노오란 꼭지의 과거를 일깨워 준다. 또한 꼭지가 하늘 꼭대기로 언제나 넘어갈 것인가 하고 미래의 꼭지를 말하고 있다.


화자는 젖배 곯았떤 꼭지의 과거를 '민들레 꽃'으로 말하고 고픈 배 접고 있는 꼭지의 현재를 '달팽이'로 말하고 하늘 꼭대기로 넘어가는 꼭지를 '새'로 말하여 시간적 경과를 포괄하는 시간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화자 →민들레꽃 →달팽이 →새'는 동일격(同一格)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시인의 시야는 그만큼 거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미시적인 원근 조망의 거리 조절이 자유자재롭다 하겠다.


<가시연꽃>도 우표늪을 채우고 있는 잎, 뿌리, 꽃대궁 ,피칠갑의 꽃봉오리,줄기 등이 이루어내는 교향악 체계이다.



그러나 누가 말할 수 있으리.

마침내 고요히 올라앉은 滿 開, 만개의 캄캄한 문, 만 번은 또 무너지며 신음하며 열어제쳤겠다 악의 꽃, 저 길의



오,저 고운 웃음에 대해 숨죽여라 지금

소신공양중이다.

-<가시연꽃>후반



우포늪의 신비는 결국 '악의 꽃' 이기도 한 '저 고운 웃음'의 만개를 위해 벌이는 굿판인 것이다. 만개의 북채는 무엇이며 누가 잡고 있는가. 그것이 누구이든 성스럽기 짝이 없다. 소신공양을 위한 빨랑카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정선 깊숙히 유폐되듯이 들어가는 것이나 객지에서 여윈 몸이 한없이 젖고있는 것이나 '냅다, 불위에 눕는 마른 오징어'의 처지가 되는 것이나 폭발하는 나무이거나 난타가 지나가는 것이나 모두 문시인 시의 소신공양으로 읽힌다.



4.


문인수의 시가 슬픔의 정서라는 점은 서정의 본질에 그의 시가 착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글감이나 사색이 궁구의 끝점까지 가 닿으면 비늘처럼 이는 것은 젖은 슬픔일 것이다. 화자가 자연 장치들에 동일 지향으로 놓이지 않고 동일격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여늬 서정시인과 문시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터이다.


동일격으로 북을 바라보고 소리내는 강을 바라보며 그때마다 북채를 골라 쥐게 하거나 골라 쥐는 화자를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문시인은 자연을 알고 그 속성에 따라 적절히 놀아주면서 자연의 장치들과 동격을 이루는 것이다. 자연의 장치들을 닮거나 따르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연을 경우에 맞게 활용하거나 부리는 , 북채 잡히기의 서정은 아무나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고르고 수를 뜨고 무늬를 앉히는 탄력이 연주가의 난타 수준이라 할만하다. 문시인의 장래를 이 모든 것들이 약속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필자로서는 다만 문시인이 한국시 전반의 스케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더 큰 궁량과 세계를 통해 이루어내는 '위대한 격(格)'을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 만남- 문인수 시인 편 / 유 현 숙 ◀



● 자료 출처 ; 시산맥 (초대시인과의 데이트)


오늘은 문인수 시인과 심야의 전화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다. 며칠 전 선생님과 첫 통화를 하였다. 그 날은 선생님께서 예식장에 참석하신 시간이었고 월요일 오전에 전화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또 업무시간 중에 긴 통화는 신경이 쓰이는지라 망설였더니, 선생님께서 혼쾌히 화요일 심야데이트를 하자고 하셔서 내심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먼저 찾아 뵙고 인사 여쭘이 마땅한데 도리가 아닌 듯 하다.


업무마감을 하고 나는 일찌감치 탈의실에 가서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 입고 나왔다. 하루 종일 조직적인 사무실 분위기에서의 딱딱한 심리상태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위한 워밍업이라고나 할까. 밀린 殘務를 정리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나는 9시가 넘어서 전화를 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시인의 목소리는 참으로 다정다감하며 편안하게 느껴젔다. 그만큼 낯모르는 상대방에 대한 시인님의 깊은 배려인 것 같다. 아직 퇴근을 안했냐며 늦은 길 보디가드로는 이덕규시인이나 김왕로시인이 제격이라는 말씀과(웃음), 그리고 유씨 성을 가진 시인들로 유춘희 시인과 류인서(발음상?)시인을 거론하셨다. 모두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이시다.


지난 12월 수원과학대에서 있었던 <노작문학상 수상식>에 참석하여 문인수 시인의 수상모습을 지켜 보았다. 내가 워낙 낯가림이 심하여 그 때 살갑게 인사 드리지 못했던 게 내내 아쉬웠다. 이 자리를 빌어 노작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다음은 몇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1. 시를 쓰시게 된 구체적 동기라고 한다면 굳이 어떤 것들을 들 수 있으신지요?


답변]초등학교 4학년때 삼촌이 소설 김삿갓을 읽고 있었는데 그 걸 옆에서 보다가 마침 학교에서<문예반>-휴전 직후 ('55년 경)학교가는 것 보다 일손을 덜어 주어야 하는 농촌 사정에서 문학을 생각하기엔 벅찬 현실. 그 땐 국어책만 또랑또랑하게 읽어도 문예반에 들었다. -시를 써 가지고 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 때 김삿갓을 주제로 썼지요. 아마 제목은 '흰구름'이었던 것 같고 내용은/

둥둥 흰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 옷자락인가

둥둥 흰구름 어디로 가나/ 라는 3행의 짧은 시인데 이걸 보신 선생님께서 칭찬을 해 주셨지요. 아마 그 칭찬이 동기가 되어 시를 썼는데, 청년시절엔 시를 쓰노라며 객기를 많이 부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40대에 등단을 하여 지금까지 시를 써 오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분별력없는 칭찬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이며 웃으셨다. 내 생각으로는 그때 그 선생님이야말로 시인을 발굴해 내시는 안목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2. 세계사에서 출간된 <동강의 높은 새>는 온통 여행을 통한 시라는 느낌을 받는데 '여행과 시'에 대한 상관관계를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은 계획하여 떠나시는지? 또 동행자가 있으신지요?



답변]여행은 계획도 하지만 훌쩍 떠나기도 합니다. 물론 혼자입니다.

내 시에서 '여행시'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여행시라 하면 여행을 통해서 그 지역의 문화나 유적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해야하는데 제 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체질에 스며 든 일상을 발견해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강원의 어느 산악을 떠돌면서 그리고 여인숙 방에 혼자 팔을 베고 누워 있다보면 그 절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선의 아라리에서 정선이 가지고 있는 한과 그것을 통하여 내 안의 한과 절망과 암흑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깥에서 내 일상, 내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지요. 정선이 갖고 있는 한의 문제와 내 한의 문제에서 촉발돼 오는 그런 요소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자극찾기지요.


나는 시인의 말씀을 들으며 문득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 시인님의 여행길에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잠깐 시간을 두시다가 웃으시면서 '그러지요~'하고 짧게 답하셨다.(건성으로) 정말로 함께 여행을 해 보고 싶은데......이렇게 전화선을 통한 대화말고 눈빛과 제스처까지 함께 읽으며 공간이동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3. 너무 딱딱한 질문만 한 것 같은데 선생님의 주량은 어느 정도이신지요? 그리고 건강은 여전하신지요?



답변] 주량은 소주 2병입니다. 술을 좋아한다기보다 분위기를 좋아해서 거절을 못하지요. 아직은 건강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4. 시집이 나온지 벌써 햇수로 4년째인데 다음 시집은 언제쯤 묶어실 계획이신지요? 그리고 근래 시단에서 선생님만큼 서정의 본질에 충실한 시인도 없다라는 말씀들을 하는데 시를 쓰시면서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천착해 오신 맑고 투명한 전통서정성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 바탕에 두실 것인지요?


답변] 시집은 내년 5~6월경에 나올 예정입니다. 내 시의 세계는 그 연장선상에 있겠지만 여행시 라는 냄새가 덜 날 것입니다. 좀 더 내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가 될 것입니다.




5. 어느 순간에 시의 영감을 받으시며 슬럼프가 있으시다면 어떻게 극복을 하시는지요?


답변] 주로 여행을 통해서 내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극복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하루 한 가지 대상에 대하여 고민하기, 어떤 대상에 대하여 시비걸기, 딴청부리기, 상황. 사건. 인물. 이야기에 대하여 유심히 들여다 보기-그리고 이런 것들을 반드시 노트에 메모할 것 등입니다.


그리고 문단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그는 박용래시인을 들었다. 그의 시에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설명된 그런 점이 좋다는 말씀과 더불어(이와 비슷한 말씀은 신경림시인이 문인수시인의 시에 대하여 하신 평이기도 하다) 시산맥동인들의 시들도 좋으며 그리고 나희덕, 이정록 같은 시인들을 들었다. 능청스럽게 힘 안들이고 말하고자 하는 목표점에 가는 점이 좋다는 말씀.


이어서 그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원론적으로는 대동소이하지만 <자기용서>라고 하셨다.


자기정화와도 상통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건, 시를 쓸때는 그 욕망을 감추기도 하고 부릴 줄도 알며 정당화시킨다는 측면에서 볼 때 시란 자기용서라고 말씀하셨다. 자백처럼 까발리던 위악적이기조차 하는 자기변명을 합리화 시키는 자기용서같은 것,-자기 상처나 자기 암흑, 고독같은 것을 비집고 나와 자기세계를 확립할 때까지 구체적인 시로 쓸 것. 그리고 말조심을 해야할 것 등,- 이 말은 즉 6개월~1년 정도 시를 푹 묵혀야한다는 뜻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섣부른 자기 감동이 자기 함정일 수 있으니 자기검열을 엄격히 해야한다는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그만큼 퇴고의 중요성을 일깨우시는 것일게다.


우리는 한 시간여 동안의 통화를 했다. 어느새 10시가 되었고 사무실안은 텅 비어 있었다. 더 많은 궁금증을 풀지 못하여 조갑증이 났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입춘이 며칠 지난 밤공기가 상쾌했다.


-2004년 2월 10일-


문인수 시인과의 '심야의 데이트' 중에서





"문인수 시인, 초청의 시간" 지상중계 / 김연근님 작성(시산맥)



* 참석하지 못한 회원여러분을 위해 주요내용만 옮겼습니다. 속기사가 아닌 관계로 모든 내용을 옮기지 못했음을 이해바랍니다. 분위기만이라도 젖어 보시길.......




문) 여행과 시의 관계를 말한다면?



답) 내가 사는 대구에서의 풍경과 강원도에서 보는 풍경은 다르다. 여행이 주는 유익한 점은,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 특별히 여행시 라고 따로 떼어서 보는 건 적절치 않다.




문) 시를 쓰시게 된 동기를 말해달라.



답) 아주 멀리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까지....(전쟁후의 당시 사회상을 잠깐 언급함).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을 담당하던 선생님을 만난 계기로 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문예반을 들어가게 된 동기도 단지, 국어책 하나 잘 읽는다는 이유였다. 전기소설과 만화책을 많이 봤다. 문예반 선생님이 들려 준 싯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본인이 느낀 가장 감동적인 표현이었다(이 부분에서 문 시인은 "그 때까지만 해도"를 염두에 두고 들어달라는 주문을 했다). 물론, 문예반 선생님도 표절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 헌 고무신처럼 날 버리고 간 님이시여!" (장내는 잠시 웃음으로......)


그 날 이후로 시에 빠져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다음 문예시간까지 작품 한 편을 제출하라는 숙제를 받고 시를 써서 제출했는데, 그 때의 시는 그 전에 읽었던 전기소설의 김삿갓에 관한 시였다.


"둥둥둥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 따라 둥둥둥 어디로 가나".

선생님의 황홀한 칭찬을 받았는데, 가끔 주부들을 대상으로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하는 말이(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첫째는, "너무 꾸중하지 마라".는 것이고 둘째는, "칭찬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가지고 있는 자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 2003년의 노작 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소월 문학상 최종후보로 올랐을 때 김남조 시인의 충고(?)-반 박자 느리고, 빠름에 대한 것과, 행과 행사이의 넓음-에 대한 생각과, 개인적으로 욕심이 가는 상이 있다면 말해달라.



답) 써지는 대로 쓸 수밖에 없다. 프로다운 면모다. 개성이기도 하고 그것이 곧 한계이기도 하다. 나이 많아서 최종후보에 자주 오르는 것도 보기 안 좋다는 어느 선배시인의 말씀도 맞는 말인 것 같고...... 10년만 일찍 후보에 올랐어도 하는 생각도 있고..... 의식하지 않고 작품에 몰두해야 하는데, 최종후보에 든 후에는 출판사의 분위기가 다름을 느낀다. 소월 문학상이 끌린다.




문) -잠시 놓침-(옮긴이) 이젠 김남조 시인을 선생님이 심사해야 할 것 같다(장내 웃음. 박수도 나옴). 본인의 시작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인선 시인의 질문이다. 선생님의 시는 나무에서 줄기들을 쫘악 훑어 낸 둥치만 보는 것 같다. 시에 있어서의 직관력과 구체적인 시 쓰기의 방법론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답) 정도(正道)는 없다. 개별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김남조 시인의 말씀을 인정한다. 개성이면서 한계이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를 넣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칭찬에 고마워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자기 것의 시를 써라. 이 버릇은 박용래. 김소월. 박목월 세 사람의 시집에 영향을 받았다. 시가 안 될 때는 첫 줄을 쓰고 대상을 깊이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라.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집에서, 밖으로, 직장으로. 알사탕 굴리듯이 대상을 굴려보는 일이 필요하다. 유사성이 없으면 안 된다. 사물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하기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인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메모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메모를 하지 않았다. 메모를 하게되면 메모된 걸, 작품에 넣지 않으면 미안할 것 같아서.....제목만 20여 편을 정해왔는데,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을 작품으로 쓰면 된다. 여행을 하되 관광지 보다 자기와 궁합이 맞는 곳을 찾아 여행을 하라. 본인의 궁합에 맞는 여행지로는 국내는 강원도 정선. 국외로는 인도다.




문) 여행을 할 때, 목적을 갖고 하시는가?



답) 목적이기 보다 관심이다. 끌리는 마음 때문이다. 끌리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다. 목적이 아니라 속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속셈과 저의. 작품과의 연계성이기도 하다. 이번 인도 여행 전에, 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을 때 바람을 맞힌 적이 있는데,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보고 정서와 감정이 통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여행은 너무 일렀다는 결론을 내린 적도 있다. 중국 여행 후, 원고 청착을 받았을 때 안내에 불과한 글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제를 정한 여행도 좋을 것이다. 대구의 시인들이 계획하고 있는 여행- 실크로드(돈황에서 파키스탄까지)처럼.




문) 시집 중에 관심사를 다룬 것이 있다면?


[이 질문은 시산맥 동인이신 서안나 시인께서 하셨는데, <동강의 높은 새>를 엮으시면서 특별히 의도하셨던 바가 있으셨는지, 거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이 소박한 자리에서 말씀해 주신면 감사하겠다는 요지의 주문으로 기억됨.]



답) 첨에 "동강의 높은 새"는 정선에 관련된 시만 묶어서 낼 참이었다. 출판사에서 시집이 너무 얊다고 해서 편수가 조금 늘었다. 50여 편만 수록하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여행시를 넣게 된 것이다. '강원도 정선'이 땡기는 이유는 정선아리랑 하면 한의 정서, 우리만이 갖고 있는 한의 발원지가 정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도나 밀양 아리랑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정선 아리랑에 비해 한이 깊지 않다. 정선에 도착했을 때, 정선에 갇혔다기 보다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에게 돌아온 느낌. 전생이 여기였던가 하는...... 관광자원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남루함과 비루함을 통한 관심과 느낌이 더 가는 인도의 경우처럼(다 옮기지 못해 죄송). 시집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시인을 분류할 수는 없어도 굳이 분류를 한다면 심정적인 잣대는 있다. 1류 시인은 전집을 갖고 싶어하고, 2류 시인은 선집을 갖고 싶어한다. 본인은 선집을 좋아한다. 아직 시집을 내지 않는 시인들은, 데뷔 후 첫 시집은 함부로 내지 마라. 세월이 지나면 후회한다. 똑 부러진 시집을 내라. 미당의 경우는 위대한 시인이다. 첫 째, 일관성 있는 작품이면 높낮이를 구별말라. 둘째, 작품성 있는 작품을 실어야한다. 셋째, 객관적인 평을 받아보고 실어야한다.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가더라도.


▣ 대표시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한다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하는 물에 달빛이 풀린다. 달빛에 널어 말리는, 잘 마르지 않는 어둠은 전반적으로 많이 묽어졌으나 저 산, 저 산, 그리고 둑의 몇 그루 왕버들이며 발 아래 물갈대 숲엔 지금 시꺼멓게 몰린 고뇌가 오히려 더욱 깊다. 응혈처럼 그러헥 거뭇거뭇 팬 데가 숱하지만 아랑곳없이 물오리는 또 어디서 비명을 꽥 꽥 질어대는지 여기 저기 끊임없이 이는 둥근 물이랑은 그러나 허퍼 아무것도 묶지 않고 다만 저 무수한 중심의 水生, 水棲여. 그 흘레의 기미가 다투어 번져 나간다. 좀더 잘 보이는 세계는 그만큼 널리 젖어 있구나, 칠십만 평에 달한다.



10월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나방



갈색나방 한 마리가 이틀째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한 쪽 벽에,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에 납작 붙어 있다.

오체투지하는 것 같다.

천장에서 방바닥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

그렇게 날개를 쫙 펴 붙이고 있다.

그러다 잠든 걸까, 숨조차 멎은 것 같다. 그새

문밖엔, 뜰엔 목련꽃 더 많이 터져 올라 눈부신데

절방에 들앉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득한 하늘 아래, 어둔 땅 위에

나도 양팔을 벌린 채 힘껏, 가만히 누워 배긴다.

풍경소리, 대바람소리, 잘 마르지 않는 과거가, 슬픔이 있다.





-빗소리 모아 듣다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




폭우 그치다




자욱하게 내리꽂힌 저 흰 빗줄기는 하늘뿌리였을까.

폭우 아래, 천둥 번개 아래 흠뻑 뒹군

매맞은 공포는 어딜 갔나

암흑은 녹아 거름이 되었나

비 갠 뒤

새파랗게 새로 돋는 듯한 풀들은 다만 새파랗다

젖은 풀밭에선 온몸 하늘냄새가 난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가오리연



겨울, 황량한 변두라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없는

생각과 빛 바랜, 찢어진 종이와 저녁노을과 노을 속의 사내와 사내의 마흔, 마흔의-얼레, 얼레실 풀

어 올리는, 언 손엔 논두렁볕, 그 볕 아래 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냉이, 냉이들

같이 울지 않는 언 손, 언 손의 아이들, 아이들 속의 그 아이, 그 아이의- 실업, 실업의 겨울, 황량한

변두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 없는 생각과 빛 바

랜, 찢어진 종이와

하늘 한 귀퉁이로 만든 것이 가오리연이다.

저문 가슴 언덕 위를 푸득 푸드득거린다.


달에게


우리는 늘 오랜만이다.

슬 슬 어깨 닿으며 걸으며 우리는

저, 아파트 옥상에 우거져 있는 텔레비전 안테나 가지나 바람으로 간헐적으로 흔들어 밤 이슥한 곳으로 끌며 오동나무 열매 소리 괴괴히 달그락거리게 할줄아는 놈, 그리하여 수심 깊이 잠길줄 아는 놈, 우리말고 달리 또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하며서


내가, 어이 촌놈! 하니까

저도, 어이 촌놈! 한다.


깡통을 두들기며


저녁노을 속으로 깡통 소리 날아 간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논물에 빠지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새떼는 여러 번 날아 오른다 한삽 퍼 던진 자갈돌들처럼 한꺼번에 새까맣게 요란하게 날아 오른다 휘영청 헌 보자기 내려 덮이듯 논빼미 저쪽 끄트머리로 다시 가 내려 앉는다 쥑이뿔고 싶도록 얄밉게 또 내려 앉는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땡볕에 악 받히며 종아리 긁히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며 지친다 어느덧 거물거물 해 늘어지고 마지막으로 두어 바퀴 휘이 나락논을 돌아 서천 붉은 구름 속으로 팍팍팍팍팍 꽂히는 새떼 자욱하게 스민 노을의 측백나무 울타리 속으로 씻은 듯이 나도 집에 돌아가곤 했다.



섬의 새


섬의새들이하루종일한꺼번에여러번날아오릅니다.

가장커다랗게멀리나는것이섬인듯싶습니다.

생각은저리무수하고간절합니다.

그러나발목너무

깊은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


싸릿대 삽짝 풀썩 허물어진다 누구요

오두막 헛간채의 삭은 디딜방아가 쿵더쿵 쿵덕 오래 쌓인 먼지를 찧고 있다 누구요

봉당에 매달린 솔비 짚소쿠리 함지박서껀 쿵덕쿵 쿵덕 한꺼번에 흔들린다 누구요

쪽 마루 밑 삽살개 소리도 자지러지게 굴러 나와서 앞마당 수북이 강아지풀 개밥풀들이 바람 밑으로 뒷곁으로 달아난다 누구요

방문 정지문이 쿵덕쿵 쿵덕 여닫히며 허물어지며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정읍사의 돌



목침만한

강원도 정선에서 주워온 돌은 구멍이 숭 숭 뚫리고 시꺼멓게 찌그러져 영락없는 산골 화전의 초가 한 채가 되었다.

송편만한

경상도 영천에서 주워온 돌은 한 남루한 아낙네가 보채는 아이를 들쳐업고 뉘엿거리는 햇발에 서산 고갯마루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이 돌들을 짝지어 놓아 보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났건만

그대 여전히 삽짝 밖에 나와 서 있다.

그대 뿜어 올리는 먼 달빛으로 보이나니

이 수렁을 지나 돌아 가겠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녀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출처 : 좋은시
글쓴이 : 詩人의 마을 원글보기
메모 :

'시관련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詩人/이문재  (0) 2006.09.21
[스크랩] 詩人황지우  (0) 2006.09.18
[스크랩] 詩評/이문재/詩쓰기  (0) 2006.09.12
[스크랩] 분석/김석규시집  (0) 2006.09.12
[스크랩] 詩 창작 핵심 강의  (0) 2006.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