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④ 시 - 김혜순
[중앙일보]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열린시학 2006년 여름호 발표) ◆ 김혜순 약력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81년) '나의 우파니샤드'(94년) '한 잔의 붉은 거울'(2004년) 등 다수 ▶김수영문학상(97년) 소월시문학상(2000년) 현대시작품상(2000년) ▶2006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칼과 칼' 외 14편 '전사에서 푸근한 어미로' 여백 넓혀 시의 영토 재편 '기스바! 네 할머니 톤으로 너 불러보자. 노래의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와서는 이승을 저승처럼 살다가 노래의 나라로, 그 아득한 곳으로 가버렸구나… 네가 그리 시 속에서 찾아 헤맸던 죽음 속에 깃든 삶의 나라로 날아가버렸구나…' 지난해 눈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갓 등단한 스물일곱 살 시인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요절한 시인 명부에 이름을 올린 이는 고(故) 신기섭(1979~2005). 김혜순 시인의 서울예대 제자다. 제자의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이 출간되자 스승은 추천사 대신 한 편의 애도사를 바친다. 거기서 시인은 할머니 손에서 자란 제자의 이름을 "네 할머니 톤으로""기스바!"라고 부른다. 죽은 시인에게 할머니는 어머니는 아니되 어머니였던 것처럼, 김혜순 시인은 어머니는 아니되 어머니 같은 스승이었을 게다. 시인은 20여 년간 우리 시의 전위와 실험정신의 대모였다. 언어에 대한 첨예한 자의식과 전투적인 상상력으로 여성 시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의 시어는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으로 치열한 실험정신과 전위의식을 지켜왔다. 특히 90년대에는 김혜순의 앞에 나설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김수이 예심위원) 이제는 '김혜순의 계보'를 여러 각도로 잇는 젊은 시인들도 등장했다. 요절한 신기섭, 올해 스승과 나란히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오른 황병승, 랩으로 부르는 시를 발표한 이승원도 김혜순 시인의 서울예대 제자다. 모두 요즘 한국문단이 주목하는 신예들이다. 그런데 전투적이던 시인에게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 예심위원들은 "또 다른 자기갱신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이광호 예심위원은 "여백을 만들면서 시의 영토를 재편하고 있다. 여성적 상상력과 모성에 대한 관념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를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슬 퍼런 여성 전사에서 푸근한 어미로 변모하고 있다면 억측일까. 시인은 '칼과 칼'에서 칼과 칼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장면을 칼과 칼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처절한 몸짓을 끔찍한 사랑이라고 노래한 대목에서 세상의 어떠한 대결도 보듬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읽힌다. '귀신들은 언제나 투덜투덜, 그래요/그중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이 제일 시끄럽죠/첫사랑에 빠진 귀신은 의외로 추적추적 조용하게 오고요' 장맛비 내리는 소리를 한 맺힌 여자 귀신들의 소리에 비유해 재미있는 화법으로 표현한 시 '장마'다. 이렇듯 시인은 이전보다 조금 더 풍요롭고 정서적인 시의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그 소금 한 알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면/혀 대신 두 눈이 먼저 짜다 짜다/찬 물 두 줄기 주르륵 흘리네' ('엄마는 왜 짤까'에서) 주름이 하나씩 더해가는 동안 자식 같은 제자를 먼저 보내는 일 따위를 겪으면서 눈물이 쌓여, 시인의 품도 소금 바다 만큼 넓고 깊어진 때문일까. 이경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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