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영감몰입법/이양우

시치 2006. 8. 31. 01:07
 

시의 진리. 시의 진실 그리고 시인의 진실 (1)

이양우(鯉洋雨)



1. 시인의 본질


시인은 생각하는 영물이다. 생각 하는 자로서 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지 못 한다면 시인이 아니다. 여기서는 시의 질적 수준에 관련된 의미 이다.

시인은 시를 생산해 내는 특수 존재 이다.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시인이 시 라는 진짜 명주실을 뽑아 내지 못 한다면 그건 시인이 아니다. 질 좋은 누에가 질 좋은 고치를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질 좋은 시인이 질 좋은 시를 잉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 이다. 시가 만일 요즈음 학교나 수강 단체 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방법의 것 이고 다분히 기술적이고 재료적인 것에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 에서나 성립 될 수 있는 것 이다. 미리 계산에 넣고 계획적으로 쓴 시는 창작 적인 것이 아니라 미필적 고의의 모방작 이라 할 수 있다. 본래 고대 사회에서의 시는 즉흥적인 영감의 산물이 대부분 이었다. 그것은 원시 적인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영감적인 초자연주의 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흥 적 영감 시는 일부러 멋을 부리기 위해 가식 적 이거나 장식을 가미한 꾸밈의 시가 아니다. 아주 감흥 적이고 솔직, 소박한 감정 이입, 그런 자연적인 진실성의 시인 것 이다. 물론 기초적인 시학교육이 불필요 한 건 아니다. 미술 교육처럼 데생을 먼저 터득해야 한다는 것은 배제 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적 시론에 들어가서는 시는 사유의 산물이며 고뇌의 산물 이고 아울러 명상과 대오의 경지에 이르러서 초자연적 대화 우주에 가까이 이르는 대화, 그런 자연스런 경지에 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시를 쓸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 못 하고 나온 시란 그저 모양 만 갖춘 시일 뿐 이다. 필자는 이런 시를 그저 보편적 문학의 산물 이라 지칭 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진가는 진리에 이르는 길, 그에 접 할 수 있는 신성 감의 문제, 즉 시를 쓰기 위한 명상과 묵상, 그 세계에서의 대화의 근본, 소의 영감몰입법의 터득이 아니고는 깊은 경지의 원음을 갖춘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의 문학으로서의 깨달음에 이른 작품은 따로 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해 세상의 온갖 문학이 다 문학 이라고 한다면 별천지의 문학은 그와 상이 하는 문학이며, 신성시 돼야 하는 문학 일 수 있을 것 이다.

몰입에서 얻어진 영감 깊은 시는 질적으로 어감이 다르다. 인스피레이션이 다른 것 이다. 교묘한 생각 자체로서 형성 된 산물이다.

일반적 기술이나 학문은 터득하면 익힌 대로 활용하며 되지만 시란 다른 문학 장르와도 별다르게 타고나야 한다.

이것이 시인 적 본성(本性)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방법론 적인 이해를 더 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 할 까 한다.

우리 가 흔히 불교 경전에 수양법에서 내세우는 108번뇌라는 말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다. 이 번뇌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벗어날 수 있는 것 일 까, 수리학적으로는 108은 9 X 12 =108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연산의 법칙에 의해서 수를 환산하면 이는 9는 우주의 원 숫자의 자리이다. 삼라만상이 채워진 자리를 9수라고 한다. 그래서 구구 구단은 1의 수 에서 9의 수 까지 모두 곱해도 제자리 수로 환원한다. 더 이상 나 갈 수 없는 으뜸 수이며, 12는 달수로는 12개월 이지만 날 수로는 365일 이다. 365일은 또 어떤 수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 며는 일 년 이라는 합치수로 귀결 된다. 이것을 소의 귀납적 수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옛 부터 백일 정성을 드리면 목적 하는 바의 효험을 얻을 수 가 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석 달 열흘 만 기도를 드리면 타성이 붙는 다는 뜻과 일치 하는데, 사실 그렇다. 백일 정성, 석 달 열흘은 108의 수효와 일치 한다. 이런 일정의 공을 들여야 108 번뇌 에서 벗어 날 수 가 있다는 뜻 이다. 그래야 타성이 붙는 다는 뜻 이다. 그래야, 신이 솟는 다는 뜻 이다. 그래야 다른 힘이 붙는 다는 것 이다.

그래야 껍질을 벗는 다는 의미 이다. 환골탈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눈이 밝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야 영감이 떠 오른 다는 뜻 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런 공로 즉 인고, 그런 몰입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 이치를 터득 하고 시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쓰는 사람의 시와는 천양지판 인 것 이다. 옛 희랍 시대에는 시는 성스런 것 이고, 예언적 인 것이고, 계율적인 것 이었다.

오늘 날의 시는 어떠한 가, 매우 비관적 인 표현 이지만 예언이 없고 성스러움이 없다. 그래서 시성이 나올 수 가 없다. 그래서 시성이 나오지를 않는다. 앞으로 옳은 시인이 나와야 한다. 시성이 나와 한다는 말 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시성은 죽었다. 노벨상 수상자는 시성이 아니다. 시성이 되려면 이렇게 해라.

명상만이 영감몰입의 지름 길 이다. 명상에 들어간 상태에서 깨닫고서 시를 써라. 영감을 얻어서 시를 써라. 영감을 얻는 방법의 경지는 이러하다.

고요의 경지 가 당신의 뇌리를 시어로서 장식 되게 한다. 예로서 호숫가에 나가서 그 물위를 한 번 드려다 보라. 맑고 고요 한 물위에 잔잔한 수면을 들여다보라. 그 물위 에서 어떠한 현상을 볼 수 있는 가, 분명 코 자기 얼굴을 선명 하게 볼 수 있을 것 이다. 거울 속 같이 비춰 보일 것 이다. 그러나 흐리고 바람이 부는 상태에서의 흔들리는 물 위를 보면 이와는 정 반대의 현상만 나타나는 것을 확 인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을 자아반영현상 이라고 한다. 나르시스적 현상 이라고도 한다. 고요의 경지 가 당신의 시어를 창출 시켜 주는 첫 단계임을 감지하라.

양파릐 껍질을 벗겨 들어가듯 종내에 이르러서는 제로가 된다는 것, 무념무상의 현상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가 고요의 경지이고, 물결이 잠들듯 한다. 그렇기에 뇌파의 미세한 상태, 거칠고 뭉둥한 생각이 아니라 자잘한 평온 상태에 이르렀을 때 떠오른 영상화가 곧 영감이다.

무턱 대고 인공적으로 시를 쓴 다고해서 시인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유치 한 일이다. 받는 것도 몰지각 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시 잘 썼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 시는 기가 없고, 영혼이 없는 시일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술적으로 쓴 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위대 한 시인이 되려면 영감적인 시를 써야 한다. 대자연의 모든 이치와 결부된 깨달음의 시를 써야 한다는 말 이다.


2. 영감몰입과정은 시창작의 최고경지 이다.


2.시의 본질


시란 무엇 인가?

시인은 언어의 미술품, 또는 언어의 연금술, 언어의 세공품, 뭐 여러 가지로 비유 할 수 있을 것 이다.

언어란 이 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언어를 통하여 인간의 의사를 표시, 그 내용을 전달하는 표현수단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적 작용을 통하여 미세화 하고 이를 다듬어서 아름다운 소통의 장식으로 사용하려는

작업이 시 창작 작업 이다.

시는 언어의 최대한의 축소판 이다. 언어의 소통 자판이 다른 문장에서 100% 이라고 한다면 시는 100을 10,000 으로 축소 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함축 물인 것 이다.

시는 문학에서의 정의하기를 물질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문학 에서 장문 장르와의 대비를 축소지향적인 상대로 본다.

그건 당연 한 것이다. 아무리 산문 적인 시의 장르 가 있다 손 쳐도 시는 어디 까지나 산문의 반대적 구조 물이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는 운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긴 문장은 언어적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이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설명 이다.

이 설명이 앞에 붙어야 하는 이유는 시의 창작 적인 기초 이론은 이론대로 필요 한 것인 동시에, 영감 몰입경지는 기초 과정을 터득 하고 나면 보다 중간 적인 과정을 터득해야 하고 중간 적인 과정을 터득 하고 나면 고급적 인 과정을 터득해야 한다.

고급적인 과정을 터득 하고 나면 달인 적인 과정의 경지로 들어서게 된다. 적어도 시인이란 칭호를 가지려면 달인의 경지에 서야 되지 않을 까, 달인의 경지에 서고 나면 그 후로는 필자 가 말하는 영감의 대과과정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우주와 소통하는 신선의 경지, 시각의 깊은 경지, 시야의 넓은 경지, 영감의 몰입 적 경지에 도달 하는 이른바 수행과정 으로 유도되어 스스로 유유자적하기에 이르는 것 이다.

시가 쉽게 말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기술적 이고 방법적으로만 써져 가는 것이라고 착가하는 단견은 금물이다. 만약에

그런 생각으로 시를 쓰려 한다면 그건 유치한 생각 이다.

영감은 어디서 오는 가에 대한 질문은 쉽게 대답 하기는 어렵다. 스스로 수행하는 방법에 따라서 용이해 지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언어와 영감은 다른 한계의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위한 산물 일 뿐이고, 영감 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의 이치에서 부터 자연과 우주에 이르는 일체의 사유를 축출하고, 이를 여과해서 철학 이상의 내용물로 세분화 하고 이를 재료로 하여 의사를 전달하거나, 시로서 작업 하는 표출 물인 것이다. 글은 이해하기 쉽도록 써야하고, 그 의미는 깊은 샘물과 같도록 하여야 한다.

영감을 받기 위해서는 몰입의 기초 방법을 숙지해야만 한다. 물론 각자의 심성에 따라서 다르다.

그것은 선 수행과 같은 방식이나 시를 창작하기 위한 영감 적 작업임으로 주문 같은 것을 외워서 미신적인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를 수행자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되고, 그 생활 자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만 가지고 수행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시어를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항시 묵상을 통하여 깨치고, 명상을 통하여 통찰하는 터득 과정 이다.

명상은 묵상과 다른 각도 에서 보는 게 상식인데 묵상과 명상은 동시적 인거고 한데 원용되는 것 이다.

명상이 아니면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가 없는 것 이다. 영감 몰입과정은 시창작의 최고의 경지 이다.



3. 시는 환상적 사유물




시를 창작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두뇌 파운드에 100%라고 한다.

시는 기술혁신에 의해 산물 되는 생성체가 아니다.

시는 고답적 지식으로 이룩되는 산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미신처럼 샤머니즘 적으로 신 솟아서 사술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지와 철학과 이상향의 영감체를 밀착시켜서 영혼적인 필름을 촬영해내는 독특한 산물이다.

내면적이고 극히 환상적인 자기성찰과 각의 경지에서 이룩되는 산물이다.

목적적이고 진리를 통찰하므로 각의 경지를 올바르게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목적이 없으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세계으로 전락되고 만다. 누구나 이 카테고리를 벗어날 수 는 없다.

암석을 뚫고저 징을 박고 무수한 고뇌의 진행을 통하여 저 켠의 세계가 뻥 둘릴 때까지 파들어가야 하난 것이다.

그 세계에 이르고 보면 담이 열린다.

험란고투의 과정을 넘어선 경지는 명경지수의 세계가 활짝 열려 보이고,

계곡의 흐르는 물가에 발을 담그고, 도원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영감은 자연에서 축출해내는 산물이다. 사물을 직시하고 그 직시된 요소를 그대로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시로서 표출시키는 것이다.

영감 표출방법은 색 다른 전대미문의 작시 시론인데, 고로 나는 이 작시법을 고안한 사람으로 실제 체험하고 발표하는 글임을 강조한다. 그렇다 고해서 내가 다른 누구 보다 시를 특출하게 잘 쓴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거와는 다른 각도의 이론이다.

이를테면 시를 쓰는 감성에 환상적인 세계를 곁들여 들여다 볼 수 있을 때 그 작품의도가 신비경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삶에 무엇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 되도록 하는 작업이다.

명상에 의한 작품은 일부러 꾸며낸 생소한 작품과는 전연 다른 점이 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마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을 것이다.

영감은 반수면 상태에서 스쳐가는 기이한 영물이다.

명상은 아니라 해도 어떤 연유로든 우연찮게 좋은 발상이 일어나 감동적인 작품을 술술 자신도 모르게 써내려 갈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안 되는 작품은 일 년이 가도록 매달려도 끝을 못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반하여 영감적인 작품은 금세라도 펜을 잡으면 훤히 그 전면이 화면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누구에게나 수시로 가능하고, 그것은 자기 수행능력 여하에 따라서 발휘되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함축성의 미학은 절대적이지만 이런 함축미조차도 영감적인 이슬이 없이는 촉촉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편의상 이를 영감미학 이라고 한다. 영감미학이란? 정신집중에 의하여 아름답고 찬란한 그림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같은 색소라도 사용하는 이의 기술과 사용하려는 의도의 정신적 착안에 의한 지시요소가 따라야 만족한 영감을 자아낸 작품이라 할 것이 아닌가,

상상력의 발단이 기법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환상적인 화면을 끌어 업 시키는 것은 영감몰입에 의한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환상을 보려거든 묵상을 하라. 묵상은 목적을 근거로 눈을 감고 생각하며 수행하는 일종의 선수행과 같은 것이다.

나는 평소 시창작 수행을 하기전에 원형(原形)을 채집하는 준비수행을 한다. 시간은 내 나름 적절하게 벼려한다.



4. 시는 순간 포착으로 낚아 올려지는 금빛 은빛 물고기




시는 어떻게 써지는 가,

나 같은 경우는 순간 포착으로 낚아 올려지는 순은 빛 물고기, 그렇게 물면 아래 깊은 곳에 떠도는 존재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시를 어떻게 포착 합니까, 그냥 공사 하듯이 기소를 하고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처럼, 아니면 어느 물건을 만들 때처럼 재료를 가지고, 깎거나 부어 빼거나, 익혀 내거나, 구워 내거나, 그런 다음 다듬고, 반죽하고,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작지기의 손길, 그것도 아니면 곡예사 피에로의 손 발 몸놀림이련 가, 그것도 아니면 음악가의 목청, 기악 가의 손놀림 입놀림, 아니면 무용가의 춤사위, 아니면 과학적인 분석과 실험실의 두뇌 파, 아니, 나는 그건 몰라요. 그냥 순간 포착으로 영감만을 가지고 낚아 올려져요. 나의 시는 모두가 그렇게 끌어올린 물고기 떼, 시는 그렇게 올려야 신선감이 있을까 하여, 짜 맞추는 기계적인 방법으론 나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언어를 갖다 맞추기 그런 걸 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퍼즐 맞추기, 미로 찾기, 끝 말 잇기, 도형 퍼즐, 놀이 제목 찾기, 도형 글자 넣기, 숫자 채우기, 마방진 퍼즐, 숨은 단어 찾기, 그림 짜 맞추기, 한자 풀이, 같은 그림 찾기, 문자 가두기, 숫자 잇기, 지그재그 숫자 잇기, 영어연상퍼즐, 로직 퍼즐, 점 조각 색칠하기, 낱말 맞추기, 상식풀이, 크로스 워드, 역사풀이, 시사 풀이, 부화풀이, 등등 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저 물면 속에 영혼(靈氣)의 낚시를 집어넣어 시를 끌어 올리는 어부라. 대자연의 낚시꾼이라.

시는 그렇게 써야 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라.



5. -단독수행의 법칙에 대하여, 시인은 평소에 령성수련(鈴性修鍊)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맑은 시가 창출된다.


1. 나는 이런 체험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몰입을 위한 몰입 경에 들어서기 위해서 나는 오늘 홀로 있을 시간을 정하고, 외부와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나 자신을 어느 목표물로 설정한다.

구름이라도 좋고 죽음이라도 좋다. 무엇이던지 자신이 설정하고 자신이 그 속으로 단계적으로 계단을 올라가듯이 한걸음 씩 빠져들어 간다. 깊숙이 아주 깊숙이 자아의 큰 물체에서 아주 미세한 단계로 아주 무의식의 단계로 빠져들어간다. 무념으로 불필요한 상을 지워버리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목표의 문을 들어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수행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예로서 구름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대로 한가지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실제의 행동으로 방울 소리로 길을 트면서 영감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일단 들어가게 되면 자아는 말끔히 소멸되고 존재는 무의식 상태로서 공(空)이라는 위치에 둥둥 떠서 자신을 무중력의 증기에 지나지 않는 상태로 몰입한다.

중요한 것은 나를 어떻게 쉽게 소멸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령음(鈴音)으로 계속해서 반복 반복하면 끝내는 가음(加音)이 일어나고 자아는 상념의 고요 안에 안착한다.

그래서 시가 태어나는 영혼을 이끌어낸다.

수행자의 마음에 따라서 쉽게 어렵게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영혼의 결정체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서 영감의 결정체(結晶體)라 하는 것인데, 이는 만상이 다 마음 속에 구름 한 쪼가리 같은 이치이다.

몰입 경에 빠져들면 그 세계의 모든 것은 자유자제로 운행된다. 자아가 되어 타아를 보는 눈도 열리고 타아가 되어 자아를 보는 눈도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지혜의 눈이라고 부른다.

영감 몰입은 막힌 장벽, 저 암석덩이를 꿰뚫고 그 밖의 세계를 넘어다보는 아름움의 혜안이다.

안 보일 듯 하다 그 세계에 빠지면 훤히 보이는 것이 마음속의 환상적 최면안(催眠眼)이다. 일상 심에서 벗어나서 평안 심으로 들어서면 그만한 인간의 내면심이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는 것이다.

존재 한다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변한다는 것은 언제나 변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변치 않는다.


2. 죽음은 존재 한다. 그는 실제이고 필연이다.


당연한 논리를 되씹어 그 자체를 들여다 볼 수가 있는 법이 있다.

이것이 가상죽음이 아니라. 실제라고 마음속으로 결정한다. 나를 소멸하는 법칙이다. 몸의 정체성을 버리고 내 영혼의 유체성(流體性)으로 빠져들어 간다.

서서히 나는 죽었다. 나라는 물체를 무시해 버리고 자아를 그윽한 유체(流體)로 바꿔치는 수행이다.

이는 자기 사고 체면법(思考催眠法), 자아수련으로 가능하다. 죽음의 경지를 넘나들면서 자아의 유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반듯이 자아의 마음 결정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다.

죽음의 환상에 빠지면 무엇을 보는가?

그것은 각자의 사념 정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보이는 것이다.

쉽게 설명 한다면 잠속의 현몽상태(現夢)라고 보며는 이해가 가능 할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상의 생각을 쉬게 하여, 꿈속으로 빠뜨리는 것이되, 이는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진행되는 목표설정을 가지고 출발 수행되는 과정임으로, 잠속의 현몽과는 목표 확인의 결과가 다를 뿐이다.

이 수련들은 어떤 큰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냥 체험만 가지고는 아니 되며 그 체험을 시로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영감 적 연결 고리를 놓치면 아니 된다.

스스로 체험하고 느낀 결과물이 놀랍게도 시어로 형성되어질 때, 창작의 문은 열리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하여 작업된 문학작품은 뭐가 다를 것인지 이해될 것이다.

가끔 이미지 축출에 헤맬 때 마다 나는 이러한 영감몰입과정에 들어가서 시적 영혼을 다스리고 난 연후에 창작과정을 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시를 쓰는 수행의 오랜 밑바탕인 것이다.



6. 시창작 영감몰입법 소강


1. 수행의 마음 원칙


시창작의 원칙론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엄격한 운율원칙은 자유시에서도 부정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영감 몰입과정에서도 운율적 템포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창작 영감몰입범<5>강에서 언급한 논리는 수행의 내용이고, 지금 이 장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방법에 속한다.

방법이나 요령이 모호하면 수행의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죽음을 그리려면 죽어봐야 알 수가 있을 법하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도 죽음의 한계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저쪽(彼岸)이 죽음의 세계라고 보는 거니까, 실로 그게 사실이고, 나에 있어서 그래서 가사현상으로 자아를 이끌어가는 수행을 하는 거다.

아주, 진실해야 이룩된다.

수행에 양심의 오류가 있으면 실행과정에서 무념무상에 도입되기 전에 현실 밖으로 이탈되어지고 만다.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아주, 결론적이어야 한다.

오늘 나는 죽는다.(상상으로 결론을 내려본다.)

친구에게 유언을 쓴다.

구체적 생 체험을 자아에게 고백한다.

살면서 이런 것을 사랑했고(사랑이 초점이면 미움은 생각지 않는다. 즉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는 자아최면에 들어서지를 못한다. 혼돈이 와서 상이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맛본 것…….

냄새 맡은 것…….

들은 것…….

만져 본 것…….

아주, 소중한 체험들을 연상한다.

이제 나는 그것들과는 이별이다.

나는 죽었다.

그러므로 관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갔다. 로 계속적으로 생각의 끝을 이룰 때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결심을 내리고는 서서히 점점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자신의 생각하는 상을 한 꺼풀씩 한 꺼풀씩 지워져 나간다. 앞서 언급한 양파의 꺼질 벗기기 순으로 가면 갈수록 상은 멀어지고 자아 적 존재성은 시야에서 흐려진다.

급기야는 소멸해버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거기서 차안의 세계를 넘어서 피안의 세계를 맛보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에 접근이 바로 무아의 경지, 환상 환각 영감으로 젖어드는 자유로운 만상에 내 발길이 이르는 단계이다.


2. 수행의 생각 요령(방법)


이 거룩한 수행은 누워서나 서서는 아니 되고, 정좌(가부좌)를 해야 하고, 혈액의 이완을 돕는 기복(氣腹)호흡에 먼저 착수한다.

아랫배에다가 코를 열고 호흡을 조절하여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때 가슴으로 숨을 몰아쉬어서는 아니 된다.

단순히 코를 통해서 마음으로 아랫배에 길게 들이 마시고, 채우면 다시 비운다는 마음으로 힘없이 소리 내지 않고 내뱉는다.

반복해서 많이하면 건강 혈액순환에 좋아지니 정신이 맑아지고 두뇌활동이 원만해짐으로 몰입가경에 준비 운동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목표하는 하나의 상을 잡고 늘어지듯이 서서히 나를 이끌려 피안에 내어준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생각만 가지고 수행을 이행해 가는 것이다. 그 단계까지가 몰입경의 입문이다. 무아경에 빠진다는 것은 깊은 잠속에 잠긴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나, 이 수행에서 다른 점은 내가 목표하는 죽음의 생각을 동반하고 긍정적으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는데 촛점이 다르다.

생각이 자아를 유도해서 꿈속으로 들어가는 이치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면 영감최면(靈感催眠) 상태에 성공하는 두 번째 관문이다.

거기서 영감을 얻고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영감최면을 풀어가는 요령인바, 이에 관하여는 소강<7>에서 설명키로 한다.

나의 이와 같은 영감 몰 입법은 개인적이지마는 고도의 단련에서 반복되는 시창작론 이라고 생각하고 나로서는 수시로 수행하여 건강에도 시 창작에도 크게 힘을 얻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몰입(沒入)의 힘에 대하여




모든 힘은 신으로부터 주어진다오.

그대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性)

무한력(無限力)한 매장량을 파내십시오.

깨달음으로부터 깨달음이 이어지는 힘,

마음에 보이는 것을 모두 잡아당기십시오.

그것을 완전히 독파하는 깨달음!

자아를 소멸하고 신성에 몰입하는

완전한 수동태(手動態) 입니다.

게으름뱅이의 타(他)의 의존이 아닙니다.

믿음의 의존입니다.

무진장(無盡藏)한 의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