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나라에서 우리/이규리
식상하게 이유를 길게 말 할 필요가 없어요
대신
레고 블록을 주세요
레고나라에도 이합집산이 있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일찍 철이 드는지
빨강과 파랑을 달리 끼워도
살짝 돌아보고 웃음 지을 뿐이에요
앞바퀴와 뒤 바퀴를 바꾸면 조금 투덜거리지만 이내
굴러 가고 있으니까요
리 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바꾸어 사용하더라도 이유를 모르지는 마세요
이유를 말하지 않더라도 늦지는 마세요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야 하니까요
블록과 블록, 새와 구름
화면과 화면을 터치 터치
상상을 끼우고 빼고 조립하며서
어느 별은 태어나고 어느 별은 추락해도 끄떡없어요
이별도 다시 끼우면 되니까요
빨강은 다 타버린단 말이야 파랑을 줘 그런 동안
꿈이 착착 도착 중이랍니다
내색/이규리
꽃은 그렇게 해마다 오지만
그들이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있는데
자꾸 웃으라 했네
거듭, 웃으라 주문을 했네
울고 싶었네
아니라 아리라는데 내 말을 나만 듣고 있었네
뜰의 능수매화가 2년째 체면 유지하듯 겨우 몇 송이 피었다
너도 마지못해 웃은 거니?
간유리 안의 그림자처럼, 누가 심중을 다 보겠는가마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소 친절’ 띠를 두른 관공서 직원처럼
뭐 이렇게까지
미소를 꺼내려 하시는지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허공은 가지를/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저, 저 하는 사이에/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제라늄/이규리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도 이젠 꿈인데
닫아두어도 남는 마음이란 게 뭐라고
꽃은 붉고
비 맞는 화분에 물도 주면서 말입니다
입술
당신은 좀 다른 줄 알았어요
제주 말고기가 부드러워졌다지만
그렇다고 먹고 싶지는 않아요
여자들은 아무도 그걸 먹지 않았어요
점점 멀어지는 실어 대신
붉은 남자들의
입술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번들거리는 입술
그토록 큰 면적이 있을까요
피해 달아나던 밤은 암울했지요
입술은 어두웠던 날을 떠돈 의기양양들이지만
우스운 믿음이었을 뿐
제 생을 말고기 살점인 듯 씹고
또 씹으며
허무는 동맹처럼 씩씩했어요
그러나 입술은 역사가 되지 못하죠
문 밖을 나서면 생각도 안 나는 이유들끼리
말고기가 왜 질겨야 했는지
어떤 사람은 알았다 해요
그러므로 그래서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아무 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
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낯낯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다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아름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다가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이규리 시인 약력>>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당신은 첫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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