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모음

(제20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2003 )

시치 2022. 5. 5. 11:12

 

 

*바람 외 5편* /  강 호 인                            

 

황막한 골짜구니 빈 수레 몰아가다
별빛 저민 가락 풀어 영원을 비질하는
형해도 자취도 없이 뒤척이는 넋이다.

 

나울 미쁜 파도 위에 갈매기 나래칠 때
펄럭이는 깃발 아래 목쉰 고동 부리면서
때로는 사공이 되어 망망대해 노를 젓고

 

청산 오르다가 숨이 차 잠시 쉬면
이름 모를 풀꽃망울 살며시 귀를 열어
한 말씀 새겨들을 듯이 반기면서 모신다.

 

능금알 익어가는 과원 들러 정을 주어
갈햇살 볕여울로 속살 헹궈 꿈 쟁이고
단풍잎 품에 안기면 춤사위도 황홀해.

 

천심 지심 깨울 소명 신탁 받은 숙명이거나
행여의 고된 사역 못 떨칠 천형이든간에
내민 손 아랑곳 않는 그 무위 거룩하네.


 

*안개論 . 3*

 

몽타아즈 한 장 못뜰 범인들의 천국인가
겹겹의 가면 쓰고 탈춤 추듯 능청 떠는
지금은 몇 과장쯤이냐
밤이 오나 날이 새나.

 

깨어진 거울 조각 난반사로 쏘는 빛 속
대답 못할 물음표가 도처에 널렸지만
자존의 막장을 뚫는
탐조등을 켜야할 땅.

 

풀밭에 풀들 잠깨는 그 기미를 놓쳤는지
한 줌 햇살
한 올 바람
행방 정녕 묘연하고
냉정히 돌아앉은 건
빌딩들만 아니다.


 

*가을 소망*

 

바래고 성긴 허울
황황히 벗어 던지고
해맑은 사유의 강
회한 띄워 보내면
한가위
둥근 달 같이
진실뿐인 벌거숭이.

 

섧도록 짧게 잘리어
포개지는 갈 햇살 속
영혼에 스며드는
가람줄기 야위어가도
속죄의 불꽃을 지펴
투영하는 그림자여.

 

살을 깎는 몌별(袂別)의 아픔
가라앉는 망각의 늪
질화로 불씨처럼
간직하는 그리움은
대물릴
고전 갈피에
꽂혀지는 낙엽일레.


 

*세월 속에서*

 

작설차를 달이면서 미명의 하늘을 연다.
그리움의 섬을 향한 바람의 깃털처럼
뜨물빛 안개를 밟고
하얀 별들 떠난다.

 

물굽이 차오르는 해를 바라 서있으면
심장의 뜨거운 피 힘찬 박동 시작하고
꽃이슬 반짝임 같은
까치울음 떨어진다.

 

소망을 퍼올리는 가없는 두레박질
손 터져 짓무르고 관절 꺾여 휘청이는
또 하루 노동을 실어다
건네주는 붉은 해여.

 

우리는 그 무엇을 이 세월에 물어보나
흘러서 물인 여울 제소리 제가 듣듯
가슴을 적시는 곡조도
제 부르는 노래인걸.

 

영겁 속 헤아리면 한 생은 짧은 찰나
마셔버린 찻잔처럼 잎 지운 나목처럼
빌수록 차오르는 영혼
온 우주가 들어앉네.


 

*교실에서*

 

스무 평 남짓 작은 공간 그나마 벅찬 영토
창 열면 청하늘도 손짓하는 나날이었지만
찬찬히 거울을 보면 흐려지는 자화상
동심은 천심이라 그대로 자연이었고
동심은 또 천진이라 언제나 난만했느니
하이얀 백묵 같은 일월 그리움의 탑은 높고

 

어린 혼의 광맥이야 무한의 보고인 걸
서투른 석수장이의 정도 끌도 무뎠고나
저만치 돌아간 지축
그 화두도 잊음이여

 

봄 여름 가을 겨울 물레 돌린 사계를
채우고 비워내며 단풍물 든 사유의 숲
생계를 탁발하느라 길은 아직 멀다 할까
애초에 텅 빈 곳간 마음의 문 열어 놓고
무소유 가벼움으로 강물 따라 흘렀느니
해맑은 심지마다에 불꽃이나 켤 일이다


 

*종 . 1*

 

난 이제
한 개의 종
돌종(石鐘)쯤 되어
울고 싶다

 

세상 허허롭기가 하늘보다 깊은 날도
사람 무심하여 눈물 절로 어리는 날도
새벽녘 까치처럼 가야 할 은혜로운 땅에서
삼생을 삼천 번쯤 윤회로 돈다해도
목숨 삼긴 날이면 살아서 푸른 세월
혼신의 열정을 다해 스스로를 조탁(彫琢)하는
전설 속 석수장이 명품 빚는 석수장이
그 아린 정과 끌에 살과 뼈를 깎아낸 뒤
장엄히 또한 은은히 빛살 같은 울음 우는

 

나는야
그 떨리는 여운
천년 만년
끌고 싶다.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271∼276)


 

◐강호인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50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출생
 * 진주고, 진주교육대학, 경남대교육대학원(논문 :『李鎬雨時調硏究』)졸업
 *『현대시조』('85).『시조문학』('86)추천과
  『시대문학』('88).『월간문학』('89)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 시집 :『山天齋에 신끈 풀고』('90), 『따뜻한 등불 하나』('91),
         『그리운 집』('96)
 * 마산문협(89-90), 경남문협(94-95) 사무국장과 마산문협(98-99)부회장, 경남문협 이사(2000-2001) 역임
 * 제1회 南冥文學賞('89), 제19회 마산시문화상('96),
   제20회 성파시조문학상('03)
 * 제4회 馬山敎育賞('95)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