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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무늬 (외 2편)/홍성란

시치 2022. 3. 25. 00:59

낭만의 무늬 (외 2편)/홍성란

 

 

같은 악기를 쓰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이 한창 전쟁 중일 때

 

포로가 된 악사가 총구를 들이댄 병사에게 죽기 전 소원이라고 꼭 한 번 연주하게 해달라고 ‘자만차’를 가리켰다

총구를 거두자 어릴 적 흥겨운 마을 축제 음악이 가늘게 흐르고 눈물을 흘리던 병사는 포로를 도망치게 했다

 

명분을 이긴 건 무얼까, 눈물일까 소리일까

 

 

 

갈잎 사원

 

 

 

늘 다니던 길에서 처음 만난 빈집

 

쥐똥나무 가는 가지에 둥지를 단 뱁새는

 

알 낳고 새끼 키우고 어디 멀리 갔을까

 

긴 겨울 버리고 허공으로 드는 꽃

 

저 허술한 궤도 이탈하지 않기를

 

가다가 돌아보면 한 채, 손짓하는 신의 집

 

 

 

곡우穀雨

 

 

지렁이도 물이 올라

여린 풀은 머리 빗고

 

잘 견디었네 고생 많았네 어제보다 의젓하네

 

온 들녘

물 마시는 소리 가지런한 빗소리

 

 

              ⸻ 시조집 『매혹』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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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시조집 『춤』 『애인 있어요』 『소풍』 『바람의 머리카락』 『매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