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제1회 박상륭상]-아비뇽의 다리 위에서 (외 2편)/장 현

시치 2019. 11. 9. 00:07

[제1회 박상륭상]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 (외 2편)/




날개를 먹어버린 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새를 따라 움직인 것이 인간의 춤이라는 것이다

발레를 배웠다던 애인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애인은 우리가 처음 춤을 춘다고 했다 나도 애인과 추는 춤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이 손을 잡고 있다

애인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 나는 턱을 붙이며 끌어당긴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슬프다고 했는데 애인은 반듯한 원을 그리며 스텝을 밟는다 그래도 슬프다 했다

나는 그 손을 놓친다 애인은 끊어진 손으로도 미소를 짓는다 하얗게 보였는데 자꾸 하얘지다 보면

저러다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나 모르게 예쁜 사람이 되어 혼자와 춤을 연습한 것이 틀림없다 내 손에 남은 드레스 슬리브를 날개처럼 흔들었다 애인이 저리도 하얬나 투명했나, 나를 다 출 때까지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처음 춤을 춘다고 했고 애인도 나와 추는 춤은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구름다리에서 내가 속으로 했던 나쁜 말을 애인이 기억할까 봐 발을 빨리 굴렸다

지칠 때가 되었는데 계속 춤을 춘다 내게서 태어난 나쁜 말들은 날개 안에 숨기고 하얀 새 이야기를 쓰자 새가 태어나고 날고 마지막엔 땅에 내려와 인간에게 투명한 춤을 가르치는 이야기

날개와 새를 따로 적는다 흰과 춤을 붙여 쓴다 애인이 옆으로 온다 이야기가 아직도 슬퍼?




내일의 미미



사랑이 많은 주인은 어젯밤 미미를 버렸다

미미는 짖었고 주인은 짖는 미미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 일로 미미는 다리를 절고 주인 없이 혼자 살아간다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

미미는 요리를 해 밥을 먹는다 속까지 따뜻해지는 계란말이와 호박볶음 양배추볶음을 즐겨 먹는다 눈이 다 녹으면 사람들은 책을 버렸는데 미미는 그 책들을 주워 읽었다 눈을 멈추고 눈을 감고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생각하곤 했다

주인은 미미와 닮은 미미와 산책한다 미미와 호텔에도 간다 미미를 꼭 껴안고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한다 주인과 미미는 기쁘고 사랑한다

미미는 책에서 ‘죄와 벌’ ‘해와 밤’ ‘죽음’이라는 말을 배웠다 소리 내서 읽고 오래도록 머물렀다 쾅쾅 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주인을 닮은 주인들이 창에 눈을 붙이고 안을 살핀다 미미는 오늘 내다 버릴 쓰레기를 내일로 미룬다

어느 날 미미는 혼자 밤 산책을 나섰다 미미를 닮은 미미가 다리를 절며 미미를 지나친다 저기서 주인이 걸어온다 팔에는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의 미미를 닮은 미미가 꼭 안겨 있다 짖으며 주인을 핥는다

미미는 죄와 벌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신이 지은 죄가 뭘까 생각했다 미미는 죄와 벌이 자꾸 헷갈린다



누드 크로키


사물처럼
앉아 있다
너는 조금 늦을 것이다
나는 앉은 채로 조금 빠를 것이다
앉아 있기 때문에

의자에서 티브이까지의 거리
티브이에는
감옥에 간 여자들이 대화한다
밥을 잘 먹고
운동을 해

엄마처럼

사물처럼
앉아 있을 뿐
그 누구도 엄마로 태어나지 않고
나도 사물로 태어나지 않고
아이 낳은 것을 잊어버리고
의자를 잊어버리고
눈만
껌뻑 앉아 있기 때문에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게 인사할 뻔

방에는 한가득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나는 너를 낳은 걸 후회함

엄마처럼

너는 미안하다는 말만 똑같이 세 번째
방에 들어온 빛
정지하지 않을래?
의자에 함께 앉아
같이 위험해질까?

나는 사물처럼
이 방에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앉아 있다
뮈랭처럼

한 아이가 엄마를 위해
사물에 입을 그려주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 <제1회 박상륭상> 수상작 40편 중에서 여기 3편을 소개합니다.

--------------
장현 / 1994년 출생. 서울 거주. 추계 예술대학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