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승희 시 보기 (8편)

시치 2018. 10. 12. 00:42

김승희 시 보기 (8편)


꽃들의 제사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흰 구름을 밀고 가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돌멩이에게 중력을 잊고 뜨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 매미에게 17년 동안의 지하생활을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 매미에게 한 여름 대낮의 절명가를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떨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오른편 심장 하나 주세요

 

사랑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
손으로 잡으면 늘 다치는 것
사랑은 가슴 위로 떨어지는 피
피하려고 해도 꼭 적시는 것

 
세상은 온통 배롱나무 꽃 천지
지금은 꽃의 피가
사방 공기에 다 물들었다


앞으로 갈 길에는 주유소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다음 주유소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여기서부터다
주유소가 안 나오면
꽃의 피로 가야지,
못 박힌 자리에서 쏟아지는 피,
오른편 심장 하나 구하려고 배롱나무 꽃그늘에

 


좌파/우파/허파 / 


시곗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까지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나서 말해라


세수는 두 손바닥으로 우편항 한 번 좌편향 한 번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 낯바닥을 온전히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시곗바늘도 세수도 구두도 스트레칭도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세상은 돌아간다

필히 구두의 한쪽은 좌파이고 또다른 한쪽은 우파이다

그렇게 좌우는 홀로 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구는 돈다


좌와 우의 사이에는

청초하고도 서늘한, 다사롭고도 풍성한

평형수가 흐르는 정원이 있다


에덴의 동쪽도 에덴의 서쪽도

다 숨은 샘이 흐르는 인간의 땅

허파도 그곳에서 살아 숨쉰다



노숙의 일가친척


해골의 윤곽이 그려진 초안에

밤이 내리면

꽃들도 꽃잎을 접고 노숙할 준비를 하고

나무들도 날개를 접고 노숙을 하고

새들도

묘지도 노숙을 하고

달도 노숙을 하고

강과 하늘이 서로 거울이 되는 양

별들도 강물 안에 노숙을 하러 멀리서 내려온다

아름다운 것들은 다 노숙을 하고 있다

무한한 것들은 다 노숙을 한다


노숙을 하는 묘지의 별 위로

노숙을 하는 새들이 잠시 새벽을 스치고

이슬이 몸을 털고 일어나는 아침

질경이 달개비 민들레 들이

너희들도 함께 노숙을 했구나

무비자 속에 비자가 있고

무조건 속에 조건이 있고

무연고 속에 연고가 있듯이

노숙이 노숙을 위로하는구나


노숙의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오늘밤이 또 묘지 곁으로 무한 속으로 나온다

 

 

 

가슴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가슴’이라고 고르겠어요,
평생을 가슴으로 살았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가슴이 부풀었어요
가슴으로 몇 아이 먹였어요
가슴으로 산 사람
가슴이란 말 가져가요
그러면 다른 오는 사람
가슴이란 말 들고 와야겠네요,
한 가슴이 가고 또 한 가슴이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가슴이에요
새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맥박 쳐요


작년의 달력

12장의 그림 달력을 다 넘겼을 때
그 순간
속수무책이다
손써볼 도리가 없다
지구를 들어올리고 있던 힘줄이 일시에 다 끊어졌다

마지막 달력엔 이방의 성당 그림이 있었다
성당 안에는 가느다란 촛불들이 자작자작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하나에 천사 하나씩
흰 뼈가 다 드러난 양초의 향기와 반짝임이 가득했다
그 많은 촛불은 무슨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까

단 한 개의 숫자만으로도 가슴을 깨뜨릴 수가 있는 곳
속수무책인 곳
지구상의 모든 악기의 줄이 일시에 다 끊어지고
심장을 포함한 모든 악기 소리가 금지된 한순간
화들짝 가슴을 깨뜨리는
작년의 달력

인간의 눈물이 있었고

아름다운 호소로 가득찬 호수가 있었고
다친 손이 있었고

그림 속에 날개 달린 천사도 있었다



 


장미와 가시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가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저 슬픔 으리으리하다


복숭아 한가운데

핏빛 가슴이 선홍빛 광배를 키우고 있어요
​저 살결, 참 살가워요

배달이 오래 왔는지 복숭아 살결이 좀 뭉그러졌어요
불행에서 불멸이 나온다는데

뭉그러지면서 향기가 너무 현란한데요

그래요, 다치면서 깊어지는 저 마음

뭉그러질 때 향기는 더 진해지고 낙원은 더 가까워요

저 슬픔, 참 으리으리하네요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을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등

          산문집: <33세의 팡세> 소설집:<산타페로 가는 사람>

          연구서: <이상시 연구> <현대시 텍스트 읽기> <코라 기호학과 한국시> 등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