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박판식 시 보기 (32편외 해설)-“밤의 피치카토”

시치 2018. 3. 13. 03:12


박판식 시 보기 (32편외 해설)

* 서시 - 박판식

눈물 속에 방생된 내 삶

삶이 진창과 같아
마른 가슴이 쩍 쩍 갈라지고
어리석은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내 가슴의 이끼를 뜯어먹고 비쩍 마른
한 여자

 

* 슬픔의 기원 - 박판식

 

발가벗고 춤추던 여자가 갑자기 암흑이 된다 포탈라 궁에도 봄이 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진실이 찾아온다 풀리지 않던 매듭이 풀리듯 새벽이 온다 겨울이면 비대칭의 바지를 입어야만 하는 다리 길이가 다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의지라는 것은 여러 개라도 좋고 하나라도 좋고 아예 없어도 좋다 진흙에 감싸여 껍질이 서서히 벗겨지는 여자를 상상하면 가을날의 매미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자신이 빠져나온 허물이 더 오래 살아남아 허물을 빠져나온 실체의 죽음을 보듯 쥐와 상어를 하나의 그림 속에 그려놓고 뭉갠다 진흙을 그 위에 덧바른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 진짜 이름은 모른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 눈인사로만 지나가도 좋을 텐데 우리는 굳이 악수를 한다 눈이 녹아 끈적거리는 밤거리에 빳빳하게 윤기 나는 고양이 수염이 여섯 개 나는 아무 곳으로나 가도 좋을 것만 같은 여섯 개의 갈래길을 만난다 한순간에 이해되어지는 거울 속의 나 고기냄새, 밴 소매 닮은 스웨터를 옷걸이에 걸어두다 문득 의수에도 지문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 여우 종족 - 박판식

 

너의 얼굴의 진흙과 빗물을 닦아내고
몇 번이나 다시 자라나는 덩굴 가지를 잘라내고
나는 너의 숨겨진 여자를 찾아냈다
그 속에는 아홉 개의 생명 중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너의 현생의 마지막 영혼이 괴롭게 몸을 뒤채고 있더라
나는 너의 피가 도는 혈관보다 더 좁은 너의 고뇌의 통로를 따라
마지막 잎사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너의 그 현생을 찢고
너의 최후의 여자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너의 최후의 여자는 죽지 않으려고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었어
난 너의 순진한 여자, 다른 남자의 여자, 아름다운 여자,
괴로움에 죽고 싶어 하던 여자, 하늘의 여자, 지옥의 여자,
어리석은 여자, 현명한 여자 모두를 거쳤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만 같던 너의 다른 여덟 개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너의 마지막 여자의 영혼은
반은 고혹스런 미소와 반은 냉담한 눈길로 나의 전진을 저지하려 했지
나는 가차 없이 너의 목을 물어뜯었어
그리고 곧장 내 목을 쳐버렸지

 

 

* 만질 수 없는 구름 - 박판식

 

나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새들은 이곳을 떠났다 남쪽으로 멀리
쇠약해진 나비들은 비열하게 시든 엉겅퀴 향기에 취해 있다
다정한 창문이 흔들리는 등불을 지켜주고
거미들은 여름밤의 균열속에 짝짓기를 하고 있다
문득 길에 쓰러져 죽지는 않으리라 각오를 했다
그 사이 제대할 때 신고 나온 군화는 신장 속에서 낡은 일가를 이루었다
메타세쿼이아 뿌리가 들어올린 힘없는 대지여
내가 그대 손에 더 이상 아무것도 쥐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대를 떠난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죽기 위해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 날개를 펼치고 드러누운 새여
굶주린 눈물샘 속에서 말라죽은 수목들이여
나는 구름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지만 그리움에 취해 떠도는 한낱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 단 하나의 오솔길 - 박판식

 

참을성 많은 여름, 터지는 석류, 심연의 구렁텅이
나는 유리창이 푸르른 틈새로 떨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계율보다 무서운 담쟁이의 덩굴손,
부화하지 못한, 냉혹한 음영의 무정란 두 개
나는 그 음영을 으스러져라 껴안은 이유로 찬란하게 눈이 멀었다
! 피로 엉켜 붙지도 못한, 심장도 없이 고동치는
부서진 두개골처럼 절규하는, 거위의 날개처럼 뻗어나오는,
그러나 대성당의 종소리처럼 홀로 어두워가는

 

 

* 그리움 - 박판식

 

치솟아 오르는 구름처럼 너의 얼굴은 내 앞에서 사라졌네
마치 소생이라도 하듯 획획 불어오는 봄바람
흐릿하고 방만한 나귀의 걸음걸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나 노력했네
침울한 바늘귀와 같은 집중력으로 나 어둠 속을 응시했네
한밤중 누군가 등불을 들고 안개 속을 내려오기라도 하듯
성 마르틴 성당의 분수처럼 어디로든 나 있는,
어디로도 나를 데려가지는 않는 길

 

  

* 밤의 피치카토 - 박판식

 

절친한 점쟁이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문지방에다 붙여주었다
장밋빛 손가락은 체온도 활기도 없는 내 소지품들 속에 섞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찾아와 그 손가락을 가리켜 이르길
더러운 샘은 왜 파놓았느냐
그러나 내 더운 피를 다 빨아먹고 생긴 더러운 샘인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는 보아야지.

 

 

* 봉헌 - 박판식

 

사랑하는 여자와 나는 혼례의 잠을 잘 수 없다
심장의 실뿌리들은 내 가장 깊은 근심에까지 뻗어 있다
여자는 내게 음악을 들고 왔느냐고 묻는다
당신 없는 곳에서는 음악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나는 음악이 싫어 침묵을 들고 왔다고 말한다
여자는 장난기가 돌아 침묵을 보여달라 조른다
나는 먼 훗날의 그리움이 엉겨붙어 괴롭다고
먼지투성이 주머니 뒤지는 시늉을 한다
당신이 내 사혈을 눌러주면 좋겠다고 말할까
아름다움을 섬기노라고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근심한다 고백할까,

 

 

*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박판식

 

촛대들은 드러누웠다. 변덕스런 구름은 흘러갔다
축대의 빗물 홈통은 기역자로 니은자로 혹은 리을자로 흘러내렸다
금가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홍등가의 미로 같은 골목처럼 무화과가 벌어졌다
엉켜서 뒹굴고 팔을 휘두르고 피를 쏟을 때만 삶은 절실했다
전리품을 싣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함대처럼
꽃과 칼은, 보석과 전염병은 짝을 이루어 돌아다녔다
나는 고통도 없이 살은 썩고 뼈가 녹아내리는 병에 걸렸고
너는 과리가 틀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전화를 붙잡고 지쳐 잠들었다
석양이 중얼중얼 촛대들을 일으켜 세웠다 변덕스런 구름이 흘러왔고
빗물 홈통이 터졌다 신음소리는 상형문자 이전으로 돌아가고
모래는 뼈로, 굶주림은 살로, 질병은 피로 되살아났다
우리는 그날처럼 입맞추고 사랑하고 울다가 껴안은 채 춤을 추었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수탉인 늙은 악사가 박자를 맞추었다

 

 

* 드라이브 - 박판식

 

우리는 분명히 길을 잘못들었는데 헛간으로 농장의 울타리로
어둠으로 우리의 예민해진 육체로 가까운 절벽의 파도소리로
여름밤의 전등 곁으로 오래된 불면증으로 방전된 헤드라이트로
터져버린 폐혈관으로
회오리치며 뻗어나가는 등나무의 생장점으로
우리의 인생과 무관한 비탈진 자갈길로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더
멀어져 가기를 바라면서

 


* - 박판식

어린 날 나는 실을 뽑아낸 누에들은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다
누에가 누에일 때만을 보았으니 난다는 것은 하나의 터무니 없는 환상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자꾸 자꾸 따고 싶었던 뽕잎
누에가 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중학교 교과서의 도판 속
그러나 놀랍게도 그 여름의 두려움은 관례를 치른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 다시, 백일몽 - 박판식

죽은 댓잎을 쓸어낸 마당이 한산하다
이 봄, 누군가 나를 말없이 마음에서 지웠나보다

공기는 갓 빵을 구워낸 오븐처럼 따뜻하고
축소되었던 플라타너스 잎이 부풀어오른다

달팽이가 녹아 내린 대숲 부근
바람에 바다냄새가 묻어 온다

 

* 서광 - 박판식

 

1979년의 겨울이 지나간다
불안한 위장처럼 꼬이고 풀리면서
생명의 의지도 죽음의 의지도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1979
나는 혼자서 흑백티비를 본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버릇, 짝 잃은 슬리퍼, 마개가 달아난 술병
위험한 창문,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골목으로
중요한 일과처럼 태양이 지나간다
고등어와 무 따위를 자르다가 삼베와 비로드 천을 자르는 손처럼
조금씩 과거가 부드러워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새로운 지층이 형성되는 곳에 박힌 삽과 곡괭이
그러나 과거의 내가 파내야 할 것은 사뿐히 쌓이는 미래의 먼지
잘린 팔다리가 꿈틀대는 것은 어디로 가기 위한 동작은 아니겠지
움푹 패인 곳에서 부풀어오르는 것이
물 고인 웅덩이라도 좋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라도 좋다
더 많은 열매를 확보하기 위해 앵두나무의 가지를 꺾는 사내처럼
가끔은 사지를 쭉 뻗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액체조차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는 법이니까

 

 

* 겨울날 - 박판식

 

죽은 새 한 무리를 남겨 놓고
겨울새들은 모두 늪지를 떠났다
어린 새들을 죽인 추위는 두꺼운 얼음으로 다시 새들을 매장했다

 

엄마 잃은 조카들을 데리고 강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들의 불행을 다스릴까
아이들이 주워온,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새들의 이름을 생각하는 동안
한 녀석은 딱딱한 깃털 속의 날개를 만지작거렸고
한 녀석은 새들을 묻어주자고 졸랐다

 

결국 물을 빼낸 질퍽거리는 미나리꽝에 새들을 밀어 넣고
추위에 벌려진 딱딱한 두 손을 모으고 침묵했다
죽음이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퍼 올렸을까
우리는 진흙 구덩이에서 뽑아내는
우리의 짓궂은 발소리에 놀라 웃었다
그리고 곧장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박판식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식기를 잊었다
쓸모 없는 장식물처럼 여름과 겨울이 가고
공교롭게도 후송열차는 수도와 위성도시를 모조리 거쳐
최후방의 해변으로 환자들을 데려 갔다
정원을 독점한 가지 뻗은 동백나무의 기쁨처럼
교묘한 패배감이 환자들을 도취시켰다
전염성 있는 병, 미친 절규, 위생과 결함을 격리시키는 일이
환자들의 유일한 일과였다
고행을 자처하는 승려도 이와 같지는 않았으리라
불침번, 장교의 차 닦기, 번거러운 집결, 점호
수술 혹은 약물치료를 요하는 명찰과 순번
죽을 운명과 완치는 이들의 가장 순수한 곡예였다
그러나 그것도 칼과 수술조명, 먼지보다 하찮은 의술에 매달려
조용히 피를 흘리거나 반응이 없는 체하거나
예상 외로 큰 비명을 지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운이 좋다면 병을 반납하고 생식기를 되찾아 가는 정도
그것도 자신의 운명을 도약하기에는 가소로운 비웃음

 

 

* 화남풍경 - 박판식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 처마 아래 작은 집 - 박판식

이제 비가 오면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도
겨울이면 내달리던 고드름도 없이

문밖만 내다보는 흙 묻은 내 신발코를 가슴 쪽으로 돌려놓으시고
어머니는 철없이 싹이 돋은 감자를 수저로 긁고 계신다

새로 집을 수리하고 어머니는 반이나 쪼그라들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없어지고
툇마루가 없어지는 동안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옛이야기를 조르면 어머니는 돋보기를 쓰고
오히려 내게 귀를 기울이신다

생각나세요
겨울이면 제비들이 날아가 행복하게 산다던 멀고 아름다운 나라
그런데도 봄이면 곧잘 돌아오는 새들을 보며
우리는 처마 아래를 조심스레 뒤져보곤 했어요

해마다 높은 곳에 푸른 잎을 매달던 마당의 오동나무
아침이면 커다란 잎들이 마당 가득 쏟아지곤 했지요

어머니는 동생과 나를 낳고 반이나 쪼그라들었다
우리가 빠져나온 어머니의 몸은
힘겹게 집을 이고 있는 비오는 날의 달팽이 같고

달팽이 같은 어머니는 돋보기를 쓰고 내게 귀를 기울이신다
어머니 오늘은 옛집에 다녀왔어요
섬돌에 얹힌 낯선 신발들이 어찌나 커다랗게 보이는지
아는 척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답니다

 

* 사육 - 박판식

 

잘려진 다리는 다시 자랄 것이다 삶의 필연성이 없다면 허깨비도 없었을 것이다
너는 한 번 잘리면 두 개가 자라나고 두 번 잘리면 네 개가 자라나는
머리를 갖고 있다 발끝으로 생활을 찾는 정직한 해달이 너를 뒤집으려고 애쓴다
다리와 머리를 다 내주고 너의 의지는 미끈미끈한 구형의 돌에 가까워진다
명상하는 불타의 머리 위에서 수천 개의 머리와 다리를 내뻗는 보리수 허깨비
반인반수의 수수께끼는 너무도 자명하다 너의 육체를 짜고 또 푸는 잔인한 어머니


  

* 그리운 가족 - 박판식

 

결점투성이 피와 피를 잇는 꽃과 나뭇잎
엉겨붙은 혈관을 풀어 여덟 갈래고 소생하는 기적은 너무도 사소한 일
나뭇잎은 자라지 않는다 나뭇잎은 본래의 모양을 찾은 것뿐이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나뭇잎들의 뼈가 서걱거린다 피다 도는 푸른 혈관이 보인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처럼 나는 희망의 기후를 촉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균을 저울질하며 눈물이 부풀어오르진 않는다
바람은 나뭇잎들의 위태로운 차양을 찢어놓는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좀처럼 한가지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한랭의 기후를 견뎌낸 나무들을 누군가 전지하고 있다
그것은 갈고리 달린 창으로 발목을 끊어내는 고대의 살육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피가 솟구치는 일은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잘 여문 나뭇잎이 불가분의 운명으로 떨어져내릴 때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분명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테니까

 

 

* 장지 - 박판식

입벌리고 잠든 아버지

힘없이 누워 있는,
사실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엉뚱하게도 감자 캐던 날들을 생각한다
쭈글쭈글한 반쪽의 감자 대신
산비탈에 할머니를 묻고
플라스틱 도시락 그릇이며 젓가락을 파묻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꼭꼭 밟아도 검은 연기가 땅 위로 새어나온다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먹는 저녁
(불쌍한 내 식욕을 부디 용서하길)
기름 먹은 누런 봉지가 뜯겨지고
노릇노릇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지나간 신문에 눕혀진다
아무 말 없이 통닭껍질에 묻은 활자를 뜯어내는 어머니
지친 아버지의 턱이 아래위로 삐뚤삐뚤 움직인다

경북 능금상자 하나를 겨우 채운 옷가지들
팔다리 모양대로 잘 접은
가벼워진 할머니의 영혼이 한 줌 연기로 사라진다
나는 어떤 미풍이 할머니를 데려가는지 모르고 싶다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
집을 뒤덮은 어지러운 줄기들이 받침대도 없이
자꾸만 공중으로 올라간다

 

 

* 탈피 - 박판식

 

노인은 누워 있다 가족은 울거나 미쳤거나 쿵쾅쿵쾅 뛰어다니고 있다
노인의 골격은 다소 움츠러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가 빠져나갔다
내 방은 병풍 뒤의 노인과 같은 방향이다
그렇다고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과거를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을 보고 있다
누가 먼저 탈피할 것인가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스물아홉이 넘었는데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삐죽삐죽 자라고
노인은 노쇠한 육체를 버렸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백치가 되어버린 막 고아가 된 그의 사십 된 아들이
나비를 좇아 옥상의 화분 사이를 쿵쾅쿵쾅 날아다니고 있다
모두 각자 분주하다

 

 

* 가을장마 - 박판식

 

지난 여름, 주인집 할머니는 장독 하나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가을 장마가 할머니를 대신해 물을 채워 놓았다
자꾸만 출렁거리는 수심이 불편하여 마침내 장독을 뒤집었다
세찬 물줄기는 가닥가닥 얽힌 한 여자의 몸뚱이 같은 장독의 물을
실타래처럼 뽑으며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기도 하다,
새들의 울음소리로 문득 가을장마가 지나갔음을 안다는 것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물방울들이 휘어진 전선에 매딜려
이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 골목 - 박판식

한 사람이 죽고 나니 온통 버릴 것 투성이다

아프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옆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오늘 골목엔 때묻은 살림살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곧 떠날 준비들 하고 앉았다

비라도 내릴 듯 꾸물꾸물한 날씨에
몇 달째 치우지 않았던
할머니 집 연탄재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결국 오늘

 

 

* 하관 - 박판식

 

사람을 떠나보내고 잃는 것은 그 영혼의 무게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보내고,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한낮에
번쩍이는 둥근 돌멩이 하나를 공동우물 속에 던져넣고는
되돌아오지 않는 울림에 매혹되곤 했었다
그 깊이 모를 메아리가 오늘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흙 한 줌을 관 위로 던진다
미끄러져 관 속으로 자꾸만 빠져버릴 것만 같은 두 다리를 뽑아내며
죽기 직전 치매를 앓던 할머니의 눈을 떠올린다
어떤 질문에는 확실히 답이 없다
인생의 바닥을 잴 수 있는 추도 없다
바위를 파낸 산역꾼들이 다시 파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연신 막걸리를 들이켜며 뒷짐지고 서 있었다

 

 

 

 

* - 박판식

 

세이지는 내가 손톱으로 잘라낸 부분부터 다시 썩어간다
세이지를 말라죽게 한 건 지나친 물기였다
조금씩 부스러지면서 화분 밑동에서부터
모래를 뱉어내고 있다
가망 없이 내게 도착한 이래로
나와 공기로 살을 섞었던, 잎사귀가 단맛의 자두 같은 이 식물은
세이지를 심어놓은 집에는 ?죽을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라는
플라스틱 팻말을 비문으로 바꾸며 죽어가고 있다
운명은 뒤섞이며 그 주인을 바꾼다
죽어야 할 것은 세이지가 아니라 어쩌면 나였을지 모른다
화분을 갈아주지 않으면 식물은 더 자라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자라는 대신 무엇을 각오하는가
사계의 끝에는 얼굴을 잃어버리는 계절이 있다
먼지 냄새를 맡은 구름은 잔혹해지는 법
자신이 담긴 그릇을 깨뜨리는 식물은 휘어지기에
너무도 많은 죽음의 뿌리를 갖고 있다
도끼를 쥔 사나이조차 끊어낼 수 없는 살의가
그의 피 속을 돌고 있다


 

* 오래된 정원 - 박판식

세이지는 툴툴거리며 내가 손톱으로 잘라낸 부분부터 다시 썩어간다
지나친 물기가 말죽게 했으니, 할말이 없다
사흘 전부터 부스러지면서 화분 밑동에서부터
조금씩 푸른빛의 이끼를 뱉어내고 있다
가망 없이 내게 도착했던 그날 이후
나와 공기로 살을 섞었던, 잎사귀가 단맛의 자두 같은 이 식물은
(세이지를 심어놓은 집에는 "죽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플라스틱 팻말을 비문으로 바꾸며 죽어가고 있다
운명은 뒤섞이며 그 주인을 바꾼다
어쩌면 죽어야 할 것은 세이지가 아니라 나였을지 모른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화분을 갈아주지 않으면 식물들은 더 자라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자라는 대신 무엇을 각오하는가
지나고 나면 모든 과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는 여전히 몸에 밴 습관대로 밤이면
내가 죽어 누울 관 크기로 담요를 접는다
꽃답게 피어라 화분 속의 내가 자꾸만 속삭인다
내달리는 꽃들의 심장, 두근거림
그러나 꿈 속에서도 나는 안다
막다른 골목, 달포짜리 여인숙 뜰 안
세 잎 클로버 노란꽃도 밤이면 스르르 눈을 감는다

 

 

* 칠월 - 박판식

 

고통으로 물집 잡힌 포도들, 여름의 나무들은 손가락을 얻었다
비록 아무것도 쥘 수 없지만
방직공장의 처녀들은 실을 잣고 오솔길은 굽이치는 향기를 풀어낸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는 믿어지지 않는 햇빛의 손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감춰두었던 조개껍데기를 내민다
아홉 가닥 연뿌리가 진흙을 빠져나온다
아홉 가닥 푸른 피라고 여자가 말한다
강의 금빛 모래, 흙을 토해 내는 조개의 입술에 작은 여자들이 매달린다
즐거움은 손 안에 있다
일곱번 색을 바꾼 꽃이 있다
그러나 이제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 심장의 타종 - 박판식

사랑하는 일이 드물다는 혹성에서
철공소의 쇠망치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눈물이 흘렀다
철컥철컥, 얼어붙은 심장을 뚫고 밤과 낮이 바뀔 때마다
한 뼘씩 자라나 총성 없이 쏟아지는 탄환 같은 잎사귀
우리는 오래 전에 죽지 않았을까
무엇을 맞췄다는 느낌도 무엇을 잃었다는 느낌도 없이
죽은 나무 둥치에서 쿵쿵, 뛰어오르는
매번 새로 태어나는 잎사귀
무엇을 믿어야 하나
나무들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어도 잡히는 신비는 없는데
가지를 구부려 물방울은 씨앗으로 들어가고
햇볕은 가장 먼 뿌리까지 스며드는데
누가 죽어도 누가 태어나도
조금도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법 없는 혹성에서
철공소의 쇠망치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눈물이 흘렀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강철 팽이처럼 돌아가는 혹성 위에서
한없이 먼 곳을 떠돌다 되돌아온 종소리

 

 

* 윤회 - 박판식

 

고대 범어에서 윤회는 수레바퀴를 뜻했다
선선에서 윤회란 목숨을 빚진 사람은 반드시 다음 생애라도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이었다
중국의 연나라에서는 연꽃 속에서 영원히 몸 섞는 연인이라는 뜻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한 거란의 떠돌이 부족에게는
그녀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으러 나선다라는 뜻이었다
유마경에 나오는 향기의 나라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원전 그리스의 한 상인이 서역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윤회였다
불꽃과 얼음의 거대한 산을 넘어 먼지의 집들을 지나, 그는
서역의 한 작은 오아시스에 만들어진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다섯 번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섯 번을 태어나는 동안 네 번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었군요"
침착해라 변하지 않는 형상이란 없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어
어디로 가든 결국 네가 만나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니까

 

 

* 피크닉 상자 - 박판식

 

피크닉 상자 속에는
불치와 피로의 병력이 빼곡이 들어 있다
헝겊으로 고름을 감싼
겨울을 가렸던 열두 개의 발톱과
불안과 딱딱함으로 가득 찬 스물 여덟의 이가 모여 있고
언제나 순간으로, 노래로, 가능성의 번뜩임으로 흐르던 심장은
굳은 용암으로 숭숭 구멍이 뚫려 있다
나는 어린 날 어둠 속에서 불쑥 뛰쳐나오길 좋아했었다
삶이 그러하듯 죽음이 그러하길 얼마나 원했던가
한밤중 어머니의 흐느낌에 잠을 깬 적이 있다
그것은 다만 앓던 내가 꾼 얇은 백일몽이었을까
어머니는 피크닉 이야기를 꺼냈다
볼록한 구름의 요철과 은빛 돛대에 실려
바다와 강의 경계로 끝없이 내달리던 삼각주
우리는 조각배를 타고 그곳에 도달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병을 앓고 난 후로 딴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0.2의 시력 탓도 아니고
무릎과 어깨의 관절이 녹아내려서도 아니다
불쑥 죽음 속에서 뛰쳐나온 천진한 아이의 얼굴로
단순한 졸음과
달짝지근한 음식과
야채와 꽃을 맘껏 키울 수 있는 집을 우리에게 원했다
어머니는 피크닉 상자를 열어 우리에게
오랜 여름의 나날과 유폐된 가장 아름다운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 야간 합숙소 - 박판식

 

성당의 종소리가 천장에 거미줄을 친다
야근 마치고 돌아온 여자의 손톱 깎는 소리가 날아가다 걸리고
독신자의 체념이 거꾸로 낚인 채 발버둥친다
우리는 각자의 피로와 고독의 최면술에 사로잡혀
동서로 남북으로 다리를 뻗고 기념비적으로 누워 있다
근사한 전망과 식사를 알리는 벨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
어디로든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와
받침대가 딸려 있는 주전자와 컵이 하나씩,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와 샤워기가 갖춰진 목욕실마저 있으니
지혜와 장수마저 바라는 것은 사치
우리는 모두 시골에 두고 온 처자식과 노모를 걱정하고 있으나
돌아갈 작정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격리된 사각의 방에 누워 각자의 보잘것없는 운명을 점치며
야윈 이두박근과 저린 발바닥을 주무르고 있다

 

 

* , 다시 꿈 - 박판식

 

철로에 귀를 대 본 적이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차가 달려오면 철로는 무거운 저음으로 윙윙 울어대기 시작한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면 가슴이 졸아들면서도 그 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기차는 나를 박살낼 듯이 달려와서는 무정하게 지나치곤 했다. 나는 기차의 육중한 몸체와 날렵한 속도에 매혹되었다. 나에게 기차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였으며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아직도 야간열차를 타고 싶을 때가 있다.


이십대 초반에는 자주, 서울을 오르내리는 여섯 시간을 입석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군복무 시절에도 그랬었다. 부대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어,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경계근무를 처음으로 나가던 날이었다. 야산으로 고참을 따라 올라가서 캄캄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데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렸다. 어떤 노선이냐고 물었을 때 고참은 경춘선이라고 했고 나는 낯선 타향에서도 잠시 집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 순간 기차는 내 꿈의 길이자 내 꿈의 집이었다.


우리는 흔하디 흔한 변두리의 아이들이었다. 친구 아버지들의 직업은 대개 공장노동자이거나 일용직 잡부, 가게 주인이었다. 처음 시골에서 내려온 아버지가 가게를 차린 곳도 공장지대였다. 그곳에서 나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고 대학을 졸업하고 일없이 빈둥거리던 시기에도 그랬다. 나는 기차역 부근의 허름한 집에서 자랐다. 그리고 철길가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과 한없이 머물고 싶은 충동의 떨림 속에서 어른이 되어갔다. 이제 친구 몇몇은 그곳에 남았고 몇몇은 그곳을 떠났다. 나도 지금은 떠나온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는 적어도 나의 기억 속에서 최초의 꿈은 아니었다. 당연히 꿈을 이루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떠나고 보니 꿈이 생겼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날이 생각난다. 주산학원 선생님을 따라 친구들과 떠난 여행이었는데, 한여름이라 철로가 녹았었다. 우리는 비둘기호에서 철로가 복구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지루해할까 여러 가지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지루했지만 그 지루함을 즐기고 있었다. 철로가 복구되면 우리의 여행은 곧 끝날 것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늦어지는 작업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었다. 시작된다는 것은 곧 끝난다는 뜻이라는 걸 그 때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글쓰기가 그 기차여행 같다고 느낀다. 나는 언제 글쓰기를 원하는가? 내 글은 시간 속을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은 거대한 댐과 같이 추억을 가두고 있다가, 무서운 낙차로 추억들을 쏟아낸다. 나는 그 속을 헤엄쳐 올라 꼭대기에 오르고 싶다. 그리고 고요해지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원히 없을 것만 같다. 나는 그 불안함 속에서 글을 쓴다. 내게 꿈은 그 도달할 수 없는 추억의 정점에 있다.
그렇다면 꿈은, 꿈을 향한 글쓰기는 내 것일까? 기차는 나를 싣고 달린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간 속의 나다. 나는 멈추고 싶은 것일까, 달리고 싶은 것일까. 알 수 없다. 어딘가 도착하고 싶은 욕망과 그러나 그 곳에 영원히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시간을 한없이 지연하고 싶은 욕망이 나의 꿈이다. (월간 불광 200210월호)

 

 

* 박판식 시집 밤의 피치카토” - 김백겸

 

샴쌍둥이

나는 산양의 털 속에 누워 잠을 잔다 산양의 털은
죽음을 건너뛰는 구름의 부력을 지녔다
저울의 바늘을 휘어잡듯 흰뱀이 나를 휘감고 올라탄다
나의 고뇌는 타고난 천성
나는 뱀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흰뱀은 뇌 속까지 파고들어 떨어지지 않는다
달리다 지친 내가 마침내 뱀에 올라탄다 뱀은 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친다
뱀은 탈피 중이라 눈이 멀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친근함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뱀은 산양의 뿔과 희고 부드러운 털과
우주와 죽음의 비의를 꿰뚫는 혀를 지녔다
그러나 나는 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것은
뱀이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주인과 하인이 되어 운명의 짐을 번갈아 짊어진다
열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인동초무늬의 우주가 우리를 감싼다
천지사방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운명을 뛰어넘기 위해 서로의 몸을 끝없이 얽는다

 

알 수 없는 것을 신비라 하던가? 시는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이크 정정해야겠다.... 알지 못하는 것은 드러낼 수가 없지... 분별의 이전 상태에서 알음알이로 느낀 포에지를 지시가 아닌 상징과 은유로 드러내는 것이지. 이런 관점에서는 시는 바다 위에 뜬 하나의 섬이며 부표이지..시인의 욕망과 꿈이 긴 어둠 속을 항해하다가 육지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 내는 신기루 혹은 어떤 좌표이지. 그 섬은 남해 위도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로 넘치는 명소가 있는가 하면 이어도처럼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섬도 있지. 위도야 한번 갔다 오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언제나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섬은 끝없는 갈망을 만들어내지... 한번도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내면의 Anima/여신처럼... 그래서 시는 독자의 수준이 만드는 수평선으로부터 멀고 아스라할수록 좋고 그 섬이 대양의
꿈과 욕망이 띄운 부표임을 알게 하는 인식의 시가 좋은데.. 말이야 쉽지....평생에 이런 시 한편을 쓸 수 있다면 행복한 시인이지... 이런 시를 쓸 수 없어서 시인은 불행한데 높이 뛰기 선수처럼 평생토록 행복을 연습하면 기록이 높아지는 만큼 행복도 높아질까. 아니면 불행한 연습이 축적이 되어서 고뇌가 깊어질까?

 

밤의 피치카토... 출판사가 아닌 시인 스스로 제목을 정했다면 이 시인은 아폴로적인 인식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도취를 좋아하겠구나. 태양의 시인이 아닌 밤의 시인들은 태양에 대한 갈망으로 스스로 어둠의 마약을 만들고 그 마약의 힘으로 시를 쓰는 부류이지. 좋아하는 마약의 종류가 코카인인지 lsd인지 해시시인지 아편인지 궁굼하네

 

죽음이 삶의 신비이듯이 수평아래에 있는 바다의 어둠이 시의 신비이지. 인식이 얕은 시인들은 수평너머의 풍경에 대한 동경이나 낭만으로 시를 그리지. 그 그림들은 이발소 그림처럼 혹은 위도처럼 한번 보면 다시 볼 일이 없지. 인식의 저 바닥까지 가려는 시인은 좋은 장비의 잠수복을 준비하고 심장과 몸이 허락하는 곳까지 어둠으로 내려가지. 그 잠수의 깊이가 욕망과 환상의 깊이 이라네. 감정과 사유의 파도에 뜬 부표로서의 섬, 한 마리 갈매기처럼 앉아 있는 시

 

이 시집에서 내 취향으로 읽힌 몇 편의 시중에서 샴 쌍둥이가 제일 마음에 드는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청도가는 길” “심장의 타종” “여우종족” “윤회도 좋지만 시평이 청탁한 괴로운 글쓰기의 주제를 삼 쌍둥이가 제일 많이 포함하고있어서 그래도 오리무중의 서툰 글이나마 써볼 엄두가 나는구나. 흰 뱀은 우주적 시간과 인과가 얽힌 뱀이네. ‘깃털 달린 뱀인 마야의 창조신인 케찰코아틀과 에집트의 밤의 신 누트가 생각나네. 모두 시간과 공간을 만든 주범들이니 만물이 생과 사를 윤회하도록 만든 원흉이네. 피조물들은 짧은 생의 기쁨과 긴 죽음의 고뇌를 감옥의 피의자처럼 견딜 수밖에 없는데 이 치욕을 계산 빠른 누구는 원죄라 덮어씌우고 창조신들에게는 면죄부를 주었지. 법은 강자편이라 종교도 신에게 아부해야하겠지만...

 

그 고뇌를 모르고 사는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이 행복이지.. 인간만이 prediction하는 뇌의
과잉설계 때문에 고민하는구나. 그 중에서도 시인과 예언가들이 제일 불행이지. 이 시인은
뱀 같은 고뇌와 동거하느라 어둠의 동굴 속에서 빛의 세계로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네
그 뱀이 어디 보통 뱀인가? “산양의 털은 죽음을 건너뛰는 구름의 부력을 지녔다는 묘한 털인데 뱀은 산양의 희고 부드러운 털과 우주와 죽음의 비의를 궤뚫는 혀를 지녔다는 표현처럼 시공간에 얽힌 뱀이니 말이지. 삶은 두부에 파고든 미꾸라지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미꾸라지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 칼로 두부를 잘라놓으니까 도막난 미꾸라지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어서 그 단절과 추함의 상실감이라니... 젓가락질이 한참이나 망설여졌네... 이런 상상력을 가진 시인은 천형의 저주를 받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남다른 축복을 받았다해야 할까? 해석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숙명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제 입맛의 철학가들에게 돌아가는 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지. 아무렴 많다 뿐인가. 하늘을 찌를 듯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산더미 같은 상품이 공장에서 생산되어서 바다는 화물선으로 가득하니 욕망의
괴시를 할만하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한 인구는 에너지만 받쳐준다면 아마 21세기에 백 억도 가능할 걸. 유전자조작으로 수명도 백살을 넘을 모양이니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환호성을 받을만하지. 그러나 역사상 큰 숙명을 벗어난 어디 목숨이 있었나. 지진한번이면 몇 십만의 욕망이 탈곡기의 볍씨처럼 추수되고 공룡처럼 단숨에 멸종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 시인은 뱀의 숙명과 자아의 자유의지가 같은 뿌리라고 말하고 있네. “삼 쌍둥이는 몸은 같으나 자아는 다른 아이/인간이 어머니인 우주로부터 같은 원형과 힘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하네. “운명의 짐이란 서로가 주인과 하인이 되어번갈아 나누어지는 유희/윤회
를 말씀하네. 슬프고도 아름답지. “운명을 뛰어넘기 위해뱀과 자아가 서로의 몸을 끝없이 얽는 인연과 성의 그물은. 도튼 자들은 모두가 이요 망상이니라가부좌를 틀고 의 동굴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시인은 동굴 밖을 걸어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네. 신비와 아름다움에 휩싸여서....“열 두개의 달이 떠 있는 인동초무늬의 우주가 우리를 감싼다는 첩첩산중의 시공간 속에서. (시평 봄호)

 

 

* 박판식

 

1973년 함양 출생.
2001화남풍경등으로 동서문학 신인상
2003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시집 <밤의 피치카도>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옥관 시 보기(5편)  (0) 2018.11.08
김승희 시 보기 (8편)  (0) 2018.10.12
심재휘 시 보기 (12편)   (0) 2018.01.08
[스크랩] 시인 함민복 시 모음  (0) 2017.12.08
[스크랩] 함민복 시 모음  (0) 2017.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