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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고은진주, 이원석

시치 2018. 9. 30. 13:13

2018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고은진주

 

 

 

   막 피기 시작한 장미가 문을 열어 주었네탁상용으로 주조된 여름이었네어떻게 야만과 측은을 딱 떼어 놓을 수 있는지 장미 넝쿨 속에서 나는 울었네.

 

   여름의 날짜가 하나씩 또는 무더기로 관에 넣어지고 있을 때우리는 동그라미를 치고 날짜가 이탈하지 않도록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네예고도 없이 아무 데나 던져지고 파헤쳐져 소품에 불과한 숫자가 쓰러지고 있었네.

 

   1에서부터 10까지 똑같은 검지손가락으로 똑같은 사투리를 섞어 똑같은 알굴을 하나씩 하나씩 가지 치는 중에도질서가 없는 듯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는 달력은 제 입으로 여름을 말한 적이 없었네넝쿨로 엉키고 닫힌 골목문 여럿이 쾅쾅 울었네.

 

   휴교령이 내려진 책상마다 먼지의 꽃다발이 놓여졌네달력의 숫자가 팔목에 박히고 루트의 공식 안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꽃봉오리여름의 냄새를 맡은 파리 떼가 몰려들었네파리약 같은 장미 꽃송이가 두개골을 비집고 들어왔네훌쩍훌쩍 쏟아져 나가는 하루 이틀 열흘넝쿨이 잘린 채 기념식장으로 가는 숫자를 기록할 수가 없었네.

 

   밟히고 긁힌 자국은 모두 어둠의 달력에 친친 감아 놓았네대체휴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만들어졌으나 검은 장미가 피고 달력의 빨간 숫자가 모두 빠진여름휴가를 반납하지 않겠네.

 

   쓰레기 치우듯 숫자를 몽땅 쓸어 낼 수 없어서 날짜 몇 개를 상실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네발밑으로 떨어진 매운 연기를 애도하다 달력 한 귀퉁이에 막 지기 시작한 구호 하나를 메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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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리 올리버.

 

 

 

 

손목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를 내는 곳이거나 톡톡 튀는 피의 압력이 움켜쥐는 힘을 손으로 보내는 곳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의 골  깊은 주름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을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부리는 곳 또는 소매를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햇살을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자질구레한 일상의 맥박이 또박또박한 지점.

 

   겨울과 여름을 경계 지어 주던 날씨 같은 것.

 

   부질없이 걷어붙여 오해를 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때로 가늘어서 만만하게 다가가게 되는 곳.

 

   어떤 우악스러운 손에 잡힌

   내 두근거리던 처녀 적 같은 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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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진주 / 본명 고은희. 1967년 전남 무안 출생현 방송작가(KBS ‘6시 내고향’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8년 시인수첩》 신인상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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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볼

 

   이원석

 

 

 

   너에게 커다란 수박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하얗고 줄무늬가 무성한 달이다 두려움처럼 명멸하는 달을 너에게 도로 건네준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내게 굴러온다 나는 이걸 안아도 보고 굴려도 보건만 차마 먹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점점 여물고 울창해지는 달 너희 집 앞까지 굴려 가는 이것이 내가 건네는 마지막 겸양이리라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피 흘리는 너의 호의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커튼을 드리운다 웅얼거리는 달의 뱃속에 검은 초록들이 흔들리고 이따금 손발을 높이 치켜세운다 너를 행복한 불면으로 빠뜨리는 울림그것을 차마 너에게 돌려줄 겨를이 없도록 부풀어 오르는 구석으로 나는 떠내려간다

 

 


감색 청바지

 

 

 

남자들이 우리 집 천장을 뜯는다

사다리를 타고

남동생이 구멍 난 천장을 향해

기다란 전선을 질질 끌고 간다

다른 남자들은 사다리 밑에서

감색 청바지

하반신만 남은 남동생을 지켜본다

그는 구멍 속의 작업에 대해 말하고

남자들이 묵묵히 듣는 동안

전선이 조금씩 줄어든다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대화 속에서

남동생은 더 깊이 들어가고 남자들은

전선을 붙잡는다

천장에서 나사못이 떨어진다

나사못이 마룻바닥을

검은 소파 위를

스테인리스 그릇 속을 굴러다닌다

나는 책상 밑에 쭈그려 앉는다

우리 집에는 작업하는 남자들이 많고

전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천장으로 들어간다

식구들은 검은 비닐봉지를 끌고 집을 나서고

알록달록 피복을 입은 전선들

부스스 판넬 가루가 떨어지고

웅성거리는 그곳을 향해 전선들이

끝을 모르고 몰려가고

책상에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는

나는 어두운 하반신을 붙들고

남자란 무엇인지

묻고 남동생은 천장에

전선과 함께

남자들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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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석 / 1990년 출생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같은 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2018년 시인수첩》 신인상 시 당선.

 

 

※ 당선작은 각 5편씩 발표되었으나 여기엔 두 편씩만 올립니다.


 

 심사위원 전동균유성호김병호

 

              ⸺계간 시인수첩》 2018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