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냉장고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
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
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
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
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
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
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
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
분 하나가 있다는,
-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박쥐
1
순간, 비닐봉지에서, 몇 개의 귤이 굴러, 떨어진다 한 남자, 쓰러
진 소금기둥처럼, 바람에 날리고,
전봇대에 걸려, 펄럭거린다, 소망아파트 벽면, 소망까지 가는 길
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나뭇가지 위로, 아스팔트 바닥에서, 숨을
고른다, 숨을 놓친다, 승용차 검은, 비닐 봉지를 밟고, 지나간다 뭉
클, 터질 내장은, 없다 악성, 빈혈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수혈된다,
납작해진 몸피는, 부풀어오른다, 클, 클, 클, 썩지 않는, 웃음이 둥
둥, 떠다닌다, 허공에 이빨을, 박는다 계속, 박는다,
한 마리 박쥐가, 아파트 벽면을 가파르게 훑고, 올라간다
2
소망아파트 단지, 검은 비닐봉지 속에 담겨, 흔들거린다 밤새, 흔
들리다 새벽,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한 마리 박쥐로, 化해 부스럭
거리는, 남자가 있다,환한 쓰레기통, 헤집던 남자, 비닐봉지를 건져
올린다, 뒤집는다, 소망아파트가 툭, 떨어졌다 창백하게, 일어선다,
잠시 봄, 햇살이 머물던 자리, 무수히 쉼표가, 떨어져있다 아직도,
허공에서, 부스럭거린다 그만, 쉬고싶다 박쥐는, (,)를 송곳니처럼,
자꾸 박고싶다, 지금은 잠시 봄, 화단은 붉은 사막,
-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중에서 -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이야기의 끝
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
일만이천사십오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
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고 흔드는 건
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
피가 침에 섞이듯
자다 깨 겸연쩍은 그의 웃음에 달빛이 뒤섞였습니다
어젯밤의 토사물이 말라붙은 변기 같은 창문에는
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처럼,
추접스러운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반복 재생되는 레코드의 노이즈 같았습니다
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수련의가 내게 일만이천사십오번째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랑 이야기하는 걸 멈춰도 된다는 뜻입니다
삭신이 쑤시네요 저는 아직도 이렇게 아픕니다
수련의는 만지작거리던 호두를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당신의 뇌는 여기 이 녀석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기름지고 윤기가 흐릅니다
그게 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효과입니다
무중력 속에서의 가벼운 핑퐁처럼 무한정 반복되는
비가 눈으로 바뀝니다 농담같이 슬그머니
세계는 조금 느려집니다
단 오분 간의 폭설로
시커먼 적설이 병원 옥상까지 쌓였습니다
수련의와 제가 있는 진료실은
심해 속의 기포처럼
우주 속의 작은 공기주머니처럼
한 점 공기보다 작은 소형 우주선처럼
어둑어둑하고 희박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들이
우리가 흡입해야할 공기를 다 들이켜고 있습니다
활자들이 배고픈 병정처럼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우리는 폭설의 한가운데 있었고
폭설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침묵과 이야기는 세팅된 일정 비율로 혼합되었습니다
축축한 손아귀처럼 비바람이 우리의 머리와 사지를 깍지 끼듯 붙잡고
그리고 수억년 전부터 계속되었던 합창 연습 시간에 따라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일정하고 힘차게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이곳에선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의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여긴 희박하고 어둑하고 아늑하고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정전.
돌팔이 詩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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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절뚝거리는 예언자 가끔은 맞고 자주 기울었다 양팔 저울로 별들의 몸뭬를 재면서도 하얗게 지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밀실에서 검게 태어난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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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벽지에 나비의 울음소리를 그린다 촛농을 문지르고 흰색으로 덧칠한다 새치같은 더듬이를 들추고 날개를 들추면 울거나 잠든 네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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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핀 복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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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자리마다 발자국이 선명하다 아픈 꽃들은 이별의 방식을 노래한다 실컷 원망하고 떠났더 문장이 내 두 손에서 우치를 바꾸고 또 바꾼다 같은 노래를 다시 듣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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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의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가루약 같은 권태가 펄펄 흩날이는 것은 부드러운 바람이 잠깐 내 몸을 스쳐 지났기 때문이다 발을 헛디딘 봄바람이 내 왼손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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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찾아온 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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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절은 시차를 조정하며 수평을 잡았다 너의 부재로 너만 기억하는 바람이 분다 기우뚱거리는 문장 사이로 저울추 같은 고요가 반짝거린다 기우뚱거리는 문장 사이로 저울추 같은 고요가 반짝거린다 운이 좋으면 가운 대신 시스루를 입을 수도 있겠다
<포지션 17년 여름호>
김중일 시인
02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씨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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