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시 보기 (5편) (네 번째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 김상미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다. 이곳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생겼다. 재미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에너지원이다. 재미는 사람을 재빨리, 단시간에 변화시킨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으며, 더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승진과 비(非)승진 사이로 부는 바람은 태풍 전야의 바람만큼이나 세차다. 이제 그 사이에 있던 모든 것들은 뽑혀나가거나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재미를 잃은 것들은 모두 시들시들 먼지로 변할 것이다. 먼지는 내가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비명들이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재미를 잃은 먼지는 비명들은 곧 누군가의 침묵으로 변하고 누군가의 절망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떠나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며 이어지는 저 아리따운 장례행렬들처럼!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 김상미|
변한다 모든 건 변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도 변하고 팀 버튼의 영화도 변하고
건장한 팔다리처럼 강직했던 내 의지도 변한다
아무리 연장자들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쳐도
젊은이들은 언제나 불 주위로 몰려들고 활활 타는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원상 복구라는 말은 이제 낡은 말이 되었다
그래도 늑대들과 노는 것, 아무리 외로워도 늑대들과 노는 것만은
아직도 꺼림칙하고 고통스러울 뿐
우연히 마주친 대선배의 냉랭하고 못마땅한 표정 안에 숨겨진 검은 의도쯤이야
꽃이 제일 슬플 땐 피지 못할 때라며
부드러운 가을바람처럼 무심으로 꽉 품어주면 그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하듯 인격도 변한다
개념 없는 시가 개념 있는 시보다 더 잘 먹히고
짧은 시가 긴 시보다 더 소통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네들의 자유
오답 속에 무참히 익사하는 게 어디 시뿐 이던가
양치기 소년은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고 더 얄팍한 자들은
미리 봐둔 서정적 비상구를 통과해 제집에서 편안히 히트작들을 써대고 있잖은가
지겹도록 순수를 양심을 본분을 지켜도
내 인생의 안뜰에 쌓이는 건 타인의 쓰레기들
다른 누구를 알게 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게 훨씬 험난한 세상이다
어딜 가도 포식자들은 에너지 넘치는 순한 이들의 문고리를 끊임없이 탐하고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흘러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자들은
눈동자 없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볼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내 팔목을 쓰윽 그어주렴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보고 싶다
그 붉은 피로 어제는 짧은 시를 쓰고
오늘은 긴 시를 쓰고
내일은 또 어떤 시를 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뭐래도 내 소원은
' 이 얼마나 멋진 날인가'로 시작하는 시를 써보는 것
그리고 그 시를 들여다보기 위해 온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황홀하게 빨려들어가는 것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밥의 힘 / 김상미
악몽에 가위 눌려 식은 땀 흘리다 깨어나 밥을 먹는다. 새벽 3시. 배추김치를 쭉 찢어 밥을 먹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새하얗다. 귀신같다. 귀신처럼 외롭다. 귀신보다 더 외롭다. 어두움을 틈타 창가로 몰려든 나무 그림자들이 낄낄거리며 유령 행세를 한다. 하지만 나는 밥과 함께 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절절 끓는공기를 무찌르는 데는 밥만한 장수가 없다. 밥도 그걸 알기에 꿀맛같이 든든한 자신을 귀신보다 더 외로운 내 뱃속으로 자꾸만 밀어넣는다. 희붐히 동쪽 지붕이 밝아온다. 뱃속이 꽉 찼으니 이제 악몽 퇴치는 시간 문제다. 창문을 열자 창가에 눈을 갖다붙이고 나를 염탐하던 나무들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시침을 뗀다. 나는 씨익 웃으며 씩씩하게 부엌으로 나가 다시 밥을 짓는다. 밥은 삶의 성기다. 그를 품기 위해 새아침이 빠르게 밝아오고 있다!
오렌지 /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시인 앨범 3/ 김상미
시를 우습게 보는 시인도 싫고, 시가 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시인도 싫고, 취미(장난)삼아 시를 쓴다는 시인도 싫고, 남의 시에 대해 핏대 올리는 시인도 싫고, 발표지면에 따라 시 계급을 매기며 으쓱해하는 시인도 싫다.
남의 시를 훔쳐와 제 것처럼 쓰는 시인도 싫고, 조금씩 마주보고 싶지 않은 시인이 생기는 것도 싫고, 文化林의 나뭇가지 위에서 원숭이처럼 재주 피우는 시인도 싫고, 밥먹듯 약속을 어기는 시인도 싫고, 말끝마다 한숨이 걸려 있는 시인도 싫다.
성질은 못돼 먹어도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시인도 싫고, 시는 못 쓰는 데 마음씨는 기차게 좋은 시인도 싫고, 학연, 지연을 후광처럼 업고 다니며 나풀대는 시인도 싫고, 앉았다 하면 거짓말만 해대는 시인도 싫고, 독버섯을 그냥 버섯이라고 우기는 시인도 싫고, 싫어…
2004년 마지막 달, 시인들만 모이는 송년회장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되어 시야 침을 뱉든 말든 술잔만 내리 꺾다 바람 쌩쌩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싫다, 싫다한 시인들 차례로 게워내고 나니
니체란 사나이, 내 뒤통수를 탁 치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같은 동류끼리는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벌써 그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까르르 웃어 제치더군. 바람 쌩쌩 부는 골목길에서
- 시집『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 시작, 2009)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재무시인의 시모음 (0) | 2017.10.21 |
---|---|
김중일-가문비냉장고 외 (0) | 2017.10.20 |
김해자 시 보기(7편) (0) | 2017.09.20 |
[스크랩] 동백에 투숙하다 (외 2편)/ 이관묵 (0) | 2017.09.04 |
김기림/咸鏡線(함경선)五百킬로旅行風景(여행풍경) (0) | 2017.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