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관련

司馬試

시치 2016. 9. 19. 01:20

     司馬試                 

   

   


 

조선조의 과거제도이다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소과(小科),·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경서(經書)와 사서(四書)로, 진사시는 문예창작에 관한 재능을 시(詩)와 부(賦)로써 시험했다(→ 생원과). 1032년(덕종 1) 고려의 국자감 입학시험인 국자감시(國子監試)가 실시되었는데, 이에 합격된 자를 진사라 불렀다. 따라서 〈고려사〉 선거지에는 국자감시를 진사시라 했는데, 진사시라는 명칭이 실제 사용된 것은 고려말이다. 1369년(공민왕 18) 과거제도 개혁 때 원나라의 과거 삼층법(三層法:향시·회시·전시)을 도입하면서 국자감시를 없앴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반대로 1376년(우왕 2) 다시 국자감시가 부활되었는데 이때부터 진사시라는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생원시는 〈고려사〉 선거지에 승보시(升補試)가 생원시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의 승보시를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승보시는 1147년(의종 1)에 설치되었는데, 1369년의 과거제도 개혁시 국자감시를 폐지하는 대신 승보시를 대폭 강화하면서 명칭도 생원시로 바꾸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경서보다는 시부의 소양을 중시하여 생원보다 진사를 더 우위에 두었으며, 그결과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대거 진사시로 몰려들었다. 이는 당시 파행적인 정치운영과도 연관되어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를 양산하게 했다.


조선시대의 진사시와 생원시는 고려의 것을 이어받았으나, 내용은 약간 달라졌다.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이 정책을 주도했는데, 그는 사장을 배격하고 경학 중심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전의 폐습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진사시를 혁파하고 생원시를 성균관 입학시험으로 정했다. 1393년(태조 2)에 감시(진사시)를 실시한 바 있으나, 곧 진사시를 혁파하고 생원시만을 계속 시행했다. 태종대에 정도전이 제거된 뒤 경학과 아울러 사장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짐에 따라 1438년(세종 20) 진사시가 복구되었고, 1444년에 혁파되기도했으나 1453년(단종 1)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생원시를 진사시보다 중요시했으나, 후기에 이르러 진사시가 오히려 중요시되었다. 응시자는 생원시와 진사시 중에 하나를 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양자에 모두 응시할 수도 있었다. 시험일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모두 마찬가지로, 첫날에 진사시를 행하고 1~2일 뒤에 다시 생원시를 실시했다. 시험과목으로는 생원시가 오경(五經)과 사서,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로 각각 2과목씩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진사시와 생원시는 각각 2과목을 다 보기로 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양자택일하게 했다. 생원진사시의 시험장소는 초시를 한성과 각 도에서, 복시를 한성에서만 실시했다. 이중 한성에서의 초시인 한성시와 복시는 1소(所)와 2소로 나누어서 실시했으며, 지방에서의 초시인 향시는 각 도별로 좌우 또는 남북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한성시의 시험관으로는 예문관·성균관·숭문관·교서관의 7품 이하관 각 1명씩이었으며, 향시의 시험관은 관찰사가 임명하는 자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시험관에 관한 규정이 변경되었다. 시험문제는 초시와 복시 모두 각 시험장소에 따라 달랐으며, 시험일시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의 경우 초시는 식년의 전년 가을에 복시는 식년의 봄에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초시와 복시의 사이에 중간시험이 있었는데, 모든 응시자는 〈소학 小學〉과 〈주자가례〉에 대한 강(講)시험을 보아야 했으며, 향리 출신일 경우에는 사서와 일경에 대한 강시험이 추가 실시되었다. 이에 실패하면 복시를 볼 수 없었다. 복시의 시험과목은 초시와 같았다. 복시의 시험관은 의정부와 6조의 관리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각 소마다 종2품 이상 2명, 정3품 이하 3명이 파견되었으며, 감찰 1명이 감시관으로 참여했다. 초시의 합격인원은 한성 및 각 도별로 배정되어 있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생원·진사의 수가 각각 한성 200명, 경기도 60명, 경상도 10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강원도 45명, 황해도 35명, 평안도 45명, 함경도 35명이다. 그 수는 각 지역간의 균형을 고려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복시에서는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뽑았다. 합격자는 등급이 매겨져 1등(等)은 5명, 2등 25명, 3등 70명으로 정해졌고, 수석은 장원(壯元)이라 불렸다. 합격자의 결정과 발표는 초시일 경우 한성의 양소와 각 도에서 각각 행했으며, 복시는 양소가 합동으로 했다. 복시 출방 후에 최종합격자에게 국왕이 백패(白牌:합격증)를 수여했다.



조선 초기의 생원진사시는 관료후보자를 선발하는 문과(文科)에 나가기 위한 예비단계로서, 이에 합격한 생원·진사는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圓點:성균관·사학에 재학중인 유생들의 출결석표인 到記에 찍던 점) 300점을 따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서 문과에 뜻이 없거나, 문과를 단념하여 생원·진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생원진사시를 택했다. 그들은 하급관직을 위해서나 관직에 관계없이 사류(士類)로서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 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원진사시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다른 과거제도와 함께 폐지되었다.→ 과거, 한성시, 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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