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관련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시치 2017. 2. 25. 20:05
내 마음엔 충절도 출세도 모두 있다 
                             -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주지하다시피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김종직은 도대체 이 「조의제문」을 왜 지은 것일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정축년(1457, 세조3) 10월 일에 내가 밀양에서 경산을 거쳐 답계역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던져졌다.”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 놀라서,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거리는 만여 리가 넘고, 세월 또한 천여 년이 되는데, 꿈속에서 만나니, 이 무슨 조짐이란 말인가? 또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강(江)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격살하고 그 시신을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한다.


하늘이 모두에게 본성을 주었으니 이 세상 누군들 삼강오륜 모를 건가.
중화라고 많이 주고 동이라고 적게 주며, 옛날엔 있었지만 지금인들 없겠는가.
이로써 동이 사람 나는, 천 년이 지난 뒤에 삼가 초나라 회왕을 조문하노라.

진시황 포학하여 사해 피바다 되니, 작고 큰 물고기들 살길 찾아 헤매었지.
산동 여섯 나라의 왕손이라 하여도 여기저기 유랑하는 무지렁이 백성일 뿐.
초나라 장수 후예 항우는 진승 따라 일어나 왕손 찾아내 끊긴 제사 이어줬네.

의제는,
하늘의 명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 세상에 진실로 더 높은 이 없었으며,
유방을 보내어 관중에 먼저 들이니 또한 천자의 인의를 볼 수가 있었도다.
항우는,
발끈하긴 양과 같고 탐욕은 이리 같아 초나라 상장군 송의**를 죽였으니,
어찌 잡아들여 목을 치지 않았는가. 형세 어긋나니 왕 위하여 더욱 두렵도다.

끝내 배신한 자에게 참혹하게 죽으니, 과연 천운은 틀어지고 말았네.
침강의 산 우뚝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나 지는 해 잡지 못해 저물어가고
침강의 물 도도하여 영원히 흐를 듯하나 지난 물결 되돌리지 못하네.

한스러라 이 세상 언제나 끝이 나서 구천을 떠도는 왕의 영혼 쉬어보려나
나의 충심 뜨거워 금석을 꿰뚫으니 홀연히 왕께서 내 꿈속에 들어오셨네.
내 평소 주자 필법*** 사모하여서, 이제 제문 짓고 술잔 부어 제사 올리니,
바라건대 영령이시여! 부디 와서 흠향하소서. 

* 회왕 : 회왕은 의제 심의 조부이나, 의제도 회왕으로 불렸으므로 맨 앞의 회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제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 송의 : 의제가 상장군으로 삼은 사람이다. 여기서는 김종서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기 전에 그의 우익인 김종서를 죽인 것을 말한 것이다.
*** 주자의 필법 : 필법이란 공자의 춘추필법으로 역사서술방식을 말하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역적을 역사에 분명히 기록하여 역사로서 심판한다는 뜻이다. 주희도 역시 이 방식을 이어 『통감강목』을 저술, 촉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위나라 조조를 윤통(閏統)으로 정리하였다.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伯王項籍所弑。沉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翅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吊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豊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吊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以營營。時六國之遺祚兮。沉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而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惧。爲醢醋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무오사화사적(戊午史禍事蹟)」, 『점필재집(佔畢齋集)』

  
  단종은 1452년 왕위에 올랐고,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으며, 1454년 윤6월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된다. 그리고 1456년 6월 사육신의 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457년 10월 죽임을 당한다.

  김종직은 1453년(단종1) 23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고, 1455년(세조1) 24살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으나 1456년 회시(會試)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해 부친상을 당했으며, 1457년 상중에「조의제문」을 짓는다. 29살이 되던 145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다. 사헌부 감찰,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등 정통관료의 코스를 거쳤고, 세조가 죽자 시책문(왕의 시호를 정하여 올리는 글)과, 만사(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를 짓는다. 성종 때는 경연에 들어갔고, 도승지, 이조참판 등 핵심 요직을 지냈다.

  김종직이 꿈을 꾸었다는 10월은 바로 단종이 유배지에서 살해당하던 그달이다. 실제로 김종직이 이글을 10월에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기를 적시한 것으로 볼 때 단종을 애도한 것이 분명하고, 강물 운운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그 내용을 조금만 뜯어보면 세조를 비유한 것에 의심이 없다. 이런 그가 세조 때 벼슬길에 들어 성종 때는 핵심 요직을 지내고 경연에 들어갔으니, 후세에 사람들이 도대체 「조의제문」 지을 때는 무슨 마음이고, 또 벼슬할 때는 무슨 생각인지 헷갈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계유정난이 일어난 해에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또 그때 「조의제문」도 지었으니, 이익을 취하면서 명망을 훔치려 했다는 허균의 비판에 딱히 대답할 말도 없을 듯하다.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올라있는 예양(豫讓)은 주군이 죽고 나라도 없어졌는데, 끝까지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려다 자신도 죽는다. 설사 복수를 위해서라도 거짓 충성을 바쳐서는 안 된다고 한 예양은 영원한 충절의 표상이 되었다. 관중은 다르다. 자기가 섬기던 주군을 죽인 환공(桓公)에게 벼슬하였다. 비록 환공을 춘추오패의 하나로 만들고 제나라를 중흥시켰지만, 주군을 죽인 환공에게 벼슬했다는 점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를 지적한 제자에게 공자는 무력을 쓰지 않고 제후를 규합하였으니 관중이야 말로 인(仁)이라고 하였고, 필부필부의 작은 의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면서, 백성이 지금까지 그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군신의 관점이 아니라 백성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하루는 김종직이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말하니, 성종의 낯빛이 변했다. 이때 김종직이 “신은 전하의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풀렸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김종직의 마음속에는 현실에 대한 의지와 충절에 대한 마음이 모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예양도 되고 싶고, 관중도 하고 싶은 것이다. 세조의 잘못된 처사는 참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출세의 의지를 꺾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출세를 이록(利祿)으로 본다면 허균의 비판이 맞겠지만, 경세(經世)의 포부로 본다면 둘이 같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성종은 생전에 그의 「조의제문」을 보았지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사실 충절이란 왕조의 유지에 필요한 덕목이지, 백성을 위한 관점은 아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절은 권력 투쟁을 잘 싸놓은 포장지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관중 같은 능력으로 백성을 편케 하는 것이 예양의 충절보다 나을 수 있으며, 그래서 공자의 평가를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조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에도 여전히 김종직에게 충절을 요구하는 것은 김종직만큼도 인식이 분화되지 못한 것이며, 더욱이 그를 포용했던 성종의 생각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닐까.


  

  
서정문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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