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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율곡, 이이

시치 2016. 9. 18. 23:29


성학집요 개요|성학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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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이이 저서)  [聖學輯要]

조선 중기의 유학자 (李珥:1536~84)가 쓴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
13권 7책. 고활자본. 궁중에서 왕자의 교재로도 사용했으며, 민간에서도 널리 읽혀 이이의 저작인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판본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율곡전서〉 권19~26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1575년(선조 8) 홍문관 부교리로 있으면서 저술한 책이다. 그는 치도(治道)의 근원과 덕(德)의 요체는 〈대학〉에 있다고 보아, 〈대학〉의 주제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에 관해 사서오경에 수록된 글들과 성현의 말을 모아 정리하고, 성현과 자신의 주석을 붙인 것이다. 그가 쓴 〈진성학집요차자 進聖學輯要箚子〉에 의하면 일찍부터 이 책을 구상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편찬하지 못하다가 1575년 가을에 완성했다고 한다. 〈대학〉에 관한 주석서로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 大學衍義〉가 있지만, 책이 너무 크고 문장이 방만하여 임금이 바쁜 일과중에 읽기가 어려우므로 자신이 강유(綱維)와 중요한 요지만을 골라 엮었다고 한다. 통설(統說)·수기(修己)·정가(正家)·위정(爲政)·성학도통(聖學道統)의 5편으로 구성하고 편마다 장(章)을 나누었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이(李珥:1536~84)가 쓴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

13권 7책. 고활자본. 궁중에서 왕자의 교재로도 사용했으며,

민간에서도 널리 읽혀 이이의 저작인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판본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율곡전서〉 권19~26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1575년(선조 8) 홍문관 부교리로 있으면서 저술한 책이다.

그는 치도(治道)의 근원과 덕(德)의 요체는 〈대학〉에 있다고 보아, 〈대학〉의 주제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에 관해 사서오경에 수록된 글들과 성현의

말을 모아 정리하고, 성현과 자신의 주석을 붙인 것이다.

그가 쓴 〈진성학집요차자 進聖學輯要箚子〉에 의하면 일찍부터 이 책을 구상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편찬하지 못하다가 1575년 가을에 완성했다고 한다.

〈대학〉에 관한 주석서로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 大學衍義〉가 있지만,

책이 너무 크고 문장이 방만하여 임금이 바쁜 일과중에 읽기가 어려우므로 자신이

강유(綱維)와 중요한 요지만을 골라 엮었다고 한다. 통설(統說)·수기(修己)·정가(正家)·

위정(爲政)·성학도통(聖學道統)의 5편으로 구성하고 편마다 장(章)을 나누었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聖學輯要(성학집요)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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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통설(統說)

제2편. 수기(修己)

  1. 수기 총론(修己總論)

  2. 입지(立志)

  3. 수렴(收斂)

  4. 궁리(窮理)

  5. 성실(誠實)

  6. 교기질(矯氣質)

  7. 양기(養氣)

  8. 정심(正心)

  9. 검신(檢身)

  10. 회덕량(恢德量)

  11. 보덕(輔德)

  12. 돈독(敦篤)

  13. 수기 공효(修己功效)

 

 

제3편. 정가(正家)

  1. 정가 총론(正家總論)

  2. 효경(孝敬)

  3. 형내(刑內)

  4. 교자(敎子)

  5. 친친(親親)

  6. 근엄(謹嚴)

  7. 절검(節儉)

  8. 정가 공효(正家功效)

 

제4편. 위정(爲政)

  1. 위정 총론(爲政總論)

  2. 용현(用賢)

  3. 취선(取善)

  4. 식시무(識時務)

  5. 법선왕(法先王)

  6. 근천계(謹天戒)

  7. 입기강(立紀綱)

  8. 안민(安民)

  9. 명교(明敎)

  10. 위정 공효(爲政功效)

 

  

제5편. 성현 도통(聖賢道統)


 


 

『성학집요』(聖學輯要)

저자:이이(李珥, 1536~1584)

황이 주자학적 명분론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학자라면 이이는 이를 더욱 세련시켜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다. 『성학집요』는 퇴계의 『성학십도』에 대응되는 율곡의 저작으로, 성리학의 과제와 얼개를 밝힌후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기修己의 방법에 서부터 위정자의 자세까지 조목조목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자체로도 성리학의 대강과 한국 성리학의 특징을 잘 볼 수 있지만, 되계의 『성학십도』와 비교하면서 보면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한국 성리학의 두 흐름이 지닌 미묘한 차이까지 느낄 수 있다.

 

 

▣ 생애


리 나라 사람 가운데 과거 시험에 9번응시하여 9번 모두 장원급제한 율곡과 영원한 현모양처의 상징인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청년 이율곡이 36세 연상인 퇴계를 도산서원으로 방문하고 하직할 때 퇴계가 율곡에게 준 금언은 무엇일까?

 이이(율곡은 호)는 중종 31년 강릉의 외가인 오죽헌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용이 집으로 날아들어왔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은 현룡見龍,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3세에 글을 해독했고 13세에 과거를 보아 과연 천재답게 진사進士에 뽑혔다. 흔히 재주가 승한 사람은 박덕하기 일쑤인데, 율곡은 어려서부터 재덕才德을 겸비하여 이를 자랑함이 없이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16세에 어머니이자 스승이요, 미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모친인 신사임당을 여의고 3년 동안 산소 앞에 움막을 짓고 근신한 다음, 인생에 무상을 느끼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접했으나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논어』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하산하여 평생동안 그의 행동규범이 되는 「자경문自驚文」,즉 좌우명座右銘 11조를 지었다. 그 1조가 “조금이라도 성현에 미치치 못하면 나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의 궁극적 목표인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23세 되던 해 59세의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여 이황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후에 이황은 제자인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 즉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술회했다 한다.

 평생과거 시험 아홉 번에 응시하여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 불리었던 율곡은 호조좌랑, 예조좌랑,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하지 않고, 불교와 노장철학을 비롯한 제자백가 사상에도 이해가 깊었다. 또한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등에도 탁월한 방책을 제시했다. 다소 사회참여를 기피했던 이황과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참여했는데, 동서분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을 위한 10만 양병설, 대동법과 사창제의 장려등 모두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과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주요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만언봉사』『경연일기』『인심도심설』『시무육조』 등이 있으며,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어찌나 생활리 청빈했던지 그의 집에는 수의 壽衣를 만들 천조차 없어 친구들이 구해다 만들 정도였고, 그의 영구가 서울을 떠나던 날 밤 애통해하는 시민들의 횃불이 수십리나 계속 되었다고 한다.


                                

▣ 율곡의 사상

의 사상은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기론理氣二元論的主氣論 ’ 즉,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과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성경론誠敬論에 있어서는 ‘성誠’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이이는 우주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이理와 유형유위有形有爲한 기氣로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현상의 변화발전을 기氣의 작용으로 보고, 이理는 기氣의 작용에 내재하는 보편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도 이발理發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발일승일도설에 대해 “이理는 무위無爲인데 기氣는 유위有爲이다. 그러므로 기발이승氣發理乘이다. 음양은 동정動靜이요, 태극이 이것을 올라타고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며 그 기氣를 올라타는 것은 이理다. 공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잇되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고 했다. 무형무위이면서 유형유위의 주재主宰기 되는 것은 이理요,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의 기器가 되는 것은 기氣이다”고 했다.

 또는 독자적인 이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통기국이라 함은 이는 대체로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그 렇게 말한 것이다. 이통이란 천지만물이 동일함이란 것이요, 기국이란 천지만물이 각각 일기一氣라는 것이다. 일리분수一理分殊란 것은 이理는 본래 하나인데 기가 고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소속에 따라 각각 한 이理가 되니 이것이 분수인 이유요, 이가 본래 일一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의 ‘이통기국설’은 화담의 ‘일기장존설日記帳存設’을 부인하게 되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통해 이황의 4단 7정의 구분ㅇ르 7정만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이황은 4단四端은 이발기수理發氣隨요 7정七情은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이理의 발發과 기氣의 발發을 인정하는 호발설이다. 따라서 4단과 7정을 별개로 구분한다. 그러나 율곡은 이황의 4단인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7정인 기발氣發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4단과 7정을 모두 정情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단은 7정 중의 순선정純善情만을 뽑아서 4단으로 지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성경론誠敬論에 있어서는 이황이 경敬을 강조한 데 반해 이이는 성誠을 강조했다. 성리학의 모든 논리와 주장이 도덕적 인격의 완성에 귀납했는데, 그것을 위해서 성리학자들은 성과 경을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웠다. 그 인격수양방법으로는 거경居敬(어떤 일을 함에 있어 정신을 집중시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과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를 중시한다. 이이는 성을 천지실리天地實理, 심지본체心之本體, 학문의 요체, 궁행의 근본이라 봄으로써 평생을 성誠으로 일관했다.


                              

▣ 『성학집요』의 내용

서는 13권 7책으로 되어 있는데 선조 8년(1575)에 율곡이 40세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선조로 하여금 ‘내성외왕內聖外王’ 의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경사經史’ 에서 뽑아모아 학문및 정치에 긴요한 것을 사서四書의 『대학大學』체계를 본따 엮어서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이응 그가 선조의 ‘성학聖學’ 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미 20세 때 「자경문」을 통해서 “먼저 자기의 뜻을 크게 가지어 성인으로 준칙을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인의 뜻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결의 했던 것처럼, 스스로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두었던 포부가 40세에 이르러 그가 공부해온 바를 정리한 필생의 역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율곡철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체가 5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 「통설」은 『중용』과『대학』의 수장首章의 설을 인용하여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합하여 말했다. 즉, 『대학』의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을 개관했다.


 제2편 「수기修己」편은 곧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을 밝히는 것으로서 모두 13제목으로 되어있다. 1장은 총론이요, 2장은 입지立志(학문에 뜻을 세움), 3장은 수렴收斂(마음을 수습하여 정돈함)을 두었다, 4장의 궁리(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는 곧 『대학』의 격물치지이며, 5장은 성실誠實(사물의 진리에 성실하는 것)이요, 6장은 교기질矯氣質(기질을 본연의 성으로 교정함)이고, 7장은 양기養氣(본연의 기를 기름)요, 8장은 정심(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9장은 검신檢身(몸을 가다듬음)이요, 10장은 회덕량恢德量(덕량을 바로잡음), 11장은 보덕輔德(덕을 북돋움), 12장은 돈독敦篤(독실하고 거리낌없이 일관함), 13장은 수기공효修己功效(자기수양의 결과와 효과)를 말하고 있다.


 제3편 「정가正家」로서 제가齊家를 말하고 8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은 총론정가(총론격), 2장 효경(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함), 3장 형내刑內(아내와 집인을 바르게 다스림), 4장 교자敎子(자녀를 잘 가르침), 5장 친친親親(친척과 서로 화목하고 우애함), 6장 근엄謹嚴(부부․가족․친척과의 신분의 분별과 질서를 엄하게함), 7장 절검節儉(사치와 낭비를 삼가고 절약함), 8장 가정공효家正功效(가정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를 서술하고 있다.


 제4편 「위정爲正」으로서, 위정이라 하는 것은 『대학』의 이른바 신민新民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10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 총론위정(총론격), 2장 용현用賢(인재를 등용함), 3장 취선取善(정당한 여론으로 정치함), 4장 식시무識時無(당면한 급한 일을 의식해서 실천함), 5장 법선왕法先王(선왕의 좋은 정치를 모방함), 6장 근천계謹天戒(하늘의 뜻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음), 7장 입기강立紀綱(먼저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함), 8장 안민安民(인민을 편안케 해야함), 9장 명교明敎(교육과 교화를 밝혀서 실시함), 10장 위정공효爲政功效(나라 다스림의 결과와 효과).


 제5편 「성현도통聖賢道統」(유교의 계통을 세움)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을 내용으로 하는 『성학집요』는 유학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완성을 이루며, 다시 가정․사회․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이념적인 것을 간결하게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의 주된 흐름은 유학에서 기본적이고도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대학』을 성리학적 입장에서 풀이한 송대宋代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를 골격으로 삼고 그 논리적 전게에 의해 차례를 세웠다. 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선현의 여러 서술을 참고하고 인용, 그 고증과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율곡은 이 저술을 선조에 바치면서 학자들이 궁리․정심․수기치인의 도는 하지 못하면서 기통記通과 사장詞章에만 얽매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대학』에서 가르치는 팔덕목을 성현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익히고 상용에 힘써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보람과 수기치인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임금도 이 원리와 방식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 『성학집요』대로 실천된다면 하․은․주 3대의 이상정치는 현실적으로 부흥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성학집요』는 그의 실천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윤리관과 정치관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나 주자학 자체가 그러하듯 율곡의 사상에서도 사변적인 형이상학과 실천적인 실용철학은 서로 혼융, 동화 내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그래소 『성학집요』에서도 그 전개과정에 있어 그의 독자적인 이기론理氣論․4단7정론四端七情論․심성론心性論․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조도 이 책을 받아보고 높이 평가, 치국안민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는 물론, 학문적으로 반대 입장에 섰던 영남학파등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들의 학문과 정사를 위해 사용했다.



                               

▣ 율곡사상의 평가

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성학십도』와 『성학집요』가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얼마나 ‘성인聖人의 길’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인이 되고자 함에 두었다는 점, 그리고 각각 독자적인 성리학의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생을 검소함 속에서 보내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리설의 입장에선 이황이 주자학의 본질인 학문과 제자양성에 주력한 반면, 주기설을 주장한 이이는 주자학의 이념적인 세계를 현실에 적응시키고자 했다. 부패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민생의 구제를 위해 항상 갱신과 개혁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주자한의 이념과 현실사회의 실제가 들어맞는 명실상부한 유교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성실사상誠實思想’에 입각한 ‘무실적 경세론務實的經世論’과 그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백성의 경제적인 안정이 선행되어야한다고 보고,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전 분야에서의 변법變法(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와 언로확충을 통한 민본정치의 구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황의 사상이 임진란 이후 일본유학계와 구한말의 기정진․이진상을 거쳐 19세기 말 이항로 등의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된 반면, 이이의 현실개혁 사상은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고 한원진․임성주․최한기 등을 거쳐 개화사상가들과 국학자, 그리고 애국계몽사상에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퇴계와 율곡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율곡이 도산서원에 이틀을 머물고 떠나면서 36세 연상인 퇴계에게 한 말씀을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지심귀재불기 입조당계희사)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 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아가게 되면

 공을 세우려고 일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자기현시 욕구가 강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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