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붉은 입술/고영민

시치 2016. 4. 21. 05:56


붉은 입술/고영민



식당에서 내준 물컵에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인을 불러 입술을 떼어낼까 하다 그만둔다
어쩜 나에게 이 컵을 일부러
내놓았는지도 모른다
컵은 아직도 입맞춤 중이다
누구의 입술일까
입속으로 미지근한 물이 엎질러진다
물은 목 끝을 넘어 몸 곳곳으로 퍼진다
컵에 고스란히 입술이 남는다
입술을 댄 자리에
입술을 댄다
자꾸만 겹쳐지는 입술들
닳고 닳은 입술들
입술을 문질러 닦는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입술들
입술을 피해 입술을 문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아직도
컵을 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