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수상작과 후보작들

[스크랩] 2015 미당문학상 후보작 (1)/ 김안, 김이듬, 김행숙, 박형준

시치 2015. 8. 13. 00:57

 디아스포라

 

   김 안

 

 

 

어머니, 당신은 나의 말 바깥에 계십니다. 그곳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이곳의 하루는 멀고 지옥은 언제나

불공평합니다. 어제까진 입을 벌리면 눈먼 벌레들

쏟아지더니 오늘은 모래뿐입니다. 나는 죽은 쥐의 가면을 쓴 채

부푼 샅에 손을 넣고선 나의 오래된 방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립니다.

어머니, 당신은 나의 모어(母語)로는 쓸 수 없는 것들입니다.

꽃밭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여전토록 아름답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나는 쓸 수 없습니다. 저 꽃을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

그러나 당신은 이토록 아름다운 붉은 꽃들을 토하며 어디에서든 나타납니다.

어머니, 당신의 모국어는 너무나 낯설고, 매일이 사육제인 것처럼

나의 말 바깥에서 웅얼거리는 모국어의 서늘한 빛살이 간절하게

방 안으로 쏟아집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에도

나름의 규칙과 나름의 관계들이 있습니다. 매일 밤 나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

또 한 명의 어머니는, 또 누구입니까? 내 말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나는 누구의 모어와

관계하고 있는 겁니까?

 

                    —《현대시학》2014년 11월호

 

호명

 

     김이듬

 

 

 

  당신이 부르시면

  사랑스런 당신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면

  한숨을 쉬며 나는 달아납니다

 

  자꾸 말을 시켰죠

  내 혀는 말랐는데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이웃집 개와 맞바꿉니다 그 개를 끌고 산으로 가 엄나무에 매달았어요 마당에는 커다란 솥이 준비 되었어요 버둥거리던 개가 도망칩니다 

 

  이리 와 이리 와

  느릿한 톤 불확실한 리듬

 

  어딘가 숨었을 개가 주인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향해 사랑이라 믿는 걸까요 날 이해하는 사람은 나를 묶어버립니다 호명의 피 냄새가 납니다

 

  개 주인은 그 개를 다시 흥분한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이번엔 맞아죽을 때까지 지켜봅니다 

 

  평상에서 서로 밀치고 당기는 사람들

  비어가는 접시와 술잔

  빈 개집 앞에 마른 밥 몇 숟가락 

 

  아버지는 나를 부르고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옥수수 밭 너머 신작로가 보입니다 흐르는 구름 너머 골짜기 개구리 소리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아요 

 

  당신이 부르시면 

  날개 달린 당신이 부르셔도

 

 

         —《애지》2014년 가을호

 

 

 

  1월 1일 

 

     김행숙

 

 

   공중으로 날아가는 풍선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손바닥만한 고무풍선에 공기를 모으면 점점 부푸는 것. 점점 얇아지는 것……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오므려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지붕 위로 둥둥 떠오를 거예요. 이들은 언젠가부터 마음에 공기가 가득해진 사람들이었어요. 지붕 위에서 수레를 잃은 노점상과 지갑을 잃은 취객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에요. 두 사람은 허공에서 잠시 얼어붙은 허깨비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다."

 

  "형씨,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습니까?"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비벼서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기다란 불꽃 같을 거예요. 우리가 감추는 꼬리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재를 보면 오늘이 1월 1일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꼭 이랬어요. 그날도 나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걸을 했어요. 아침에 본 거울처럼 그가 나를 슬프게 건너다보고 있었어요.

 

                 

          —《문학동네》2015년 봄호

 

 

 

칠백만원

 

   박형준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식구들 몰래 내게만

이불 속에 칠백만원을 넣어두셨다 하셨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불 속에 꿰매두었다는 칠백만원이 생각났지

어머니는 돈을 늘 어딘가에 꿰매놓았지

대학 등록금도 속곳에 꿰매고

시골에서 올라왔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리는 자취방에서

어머니는 꿰맨 속곳의 실을 풀면서

제대로 된 자식이 없다고 우셨지

어머니 기일에

이제 내가 이불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얘기를

식구들에게 하며 운다네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내 사십 줄의 마지막에

장가 밑천으로 어머니가 숨겨놓은 내 칠백만원

시골집 장롱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원짜리 칠백 장

 

 

          —《녹색평론》2015년 7-8월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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