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울타리의 노래/이설빈

시치 2014. 7. 22. 01:09

울타리의 노래/이설빈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널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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