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의 노래/이설빈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널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必死 筆寫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장남자 시코쿠 / 황병승 (0) | 2014.08.06 |
---|---|
하지 무렵/유홍준 (0) | 2014.07.23 |
북천 / 유홍준 (0) | 2014.07.22 |
유월에/김춘수 (0) | 2014.06.10 |
고양이와 초콜릿/김륭 (0) | 2014.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