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스크랩] 불교 용어 일람

시치 2013. 12. 18. 22:53

                 <불교 용어 일람>

   불교 용어를 어렵다고들 한다. 정말 어려운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이지만 이해하기 힘들어 애 먹는 경우도 있다. 같은 낱말이지만 불교계와 일반 사회에서 공히 사용할 경우, 세속적 의미에 익숙해져 있는 중생이 새삼스럽게 불교적 용어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자꾸만 세속의 의의가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불교 용어의 뜻 속으로 들어가기 힘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고충을 겪어봤기에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 불교 용어를 정리해봤다. 그리고 수많은 단어를 모두 담기보다 널리 쓰이는 용어 쪽을 택하는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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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假觀)---천태종에서 관법(觀法)의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눈 삼관(三觀) - 공관(空觀) ? 중관(中觀) ? 가관(假觀) 중의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주장, 즉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공(空)한 것이어서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해도 실체가 없는 임시적인 가(假)의 존재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견줄 경우, 가관은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즉시공(色卽是空)’ 부분과 같다고 할 수 있다.---→공관(空觀), 중관(中觀) 참조.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산스크리트어 카트야야니푸트라, K?ty?yan?-putra)---기원 전후(혹은 BC 2세기)경에 활약한 인도의 불교학자. 확실한 생몰연대는 미상. 부파불교시대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說) 소속이었다. 원래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해서 유명한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발지론(發智論)>을 저술함으로써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정립했다. 이 책은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확립시킨 대표적인 논서로서 널리 연구되며, 많은 주석서도 만들어졌다.---→발지론(發智論) 참조.


*가람(伽藍)---절, 사찰, 사원, 도량(道場), 정사(精舍)와 같은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상가 아라마(sangha-ara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인 말이다. 부처님 성도 후 당시 마가다국(Magadha國)의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왕이 마가다국의 서울 왕사성(라즈기르/Rajgir) 부근에 지어서 부처님께 보시한 죽림정사(竹林精舍)가 가람의 시초이다.

   중국의 선종 사찰 이래로 정립된 가람의 기본구조는 7당(堂) 가람이다. ①불전(佛殿), ②강당, ③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에 승당(僧堂 혹은 僧房; 스님들의 거처), ④부엌(주고/廚庫), ⑤욕실, ⑥동사(東司, 뒷간, 해우소/解憂所), 그리고 ⑦산문(山門) 등이 7당으로 꼽힌다. 그리고 큰 절의 경우, 금당(金堂) ? 강당 ? 탑 ? 식당 ? 종루(鐘樓) ? 경장(經藏) ? 승방(僧房)의 일곱을 일컫기도 한다.

 

*가루다(산스크리트어 Garuda)---가루라(迦樓羅)라로 번역하기도 하며, 불경에는 금시조(金翅鳥) 등으로 의역돼 있기도 하다. 두 날개를 펼치면 그 길이가 336만 리나 되며, 용을 잡아먹고 산다고 하는 전설적인 새이다. 대승의 경전에서는 불교를 수호하는 팔부중[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에 들어가 있다.

 

*가릉빈가(迦陵頻伽, 산스크리트어 Kalavinka)---아름다운 울음소리로 불법을 설하는 상상의 새이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이 새는 극락정토에 살며, 그 형상은 팔부중의 하나인 긴나라(緊那羅)와 비슷해서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나 부도, 석등과 같은 석조물에 더러 조각돼 있다.


*가범달마(伽梵達磨)---서인도 출신의 승려, 본명 바가바드 달마(Bhagavad-dharma), ‘존법(尊法)’이라 한역하기도 한다. 당나라 때 중국에 와서 658년 <천수경(千手經)>을 한역했다. 천수경은 그 외에 불공(不空), 지통(智通), 보리류지(菩提流支) 등의 번역본도 있다.


*가섭[마하가섭(摩訶迦葉, 산스크리트어 Mah?k??yapa)]---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제일인자. 가섭파(迦葉波), 음광(飮光)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 제자들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 역할을 했으며, 불경의 제1차 결집을 주도했다. 가섭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거친 옷과 거처에 상관없이 진리를 깨치기 위해 용맹 정진해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어졌으며, 부처님으로부터 첫 번째로 법을 전수 받은 제자이다(선종의 제1대 조사임). 선가에서는 빛을 마시는 뛰어난 존자란 뜻으로 음광승존(飮光勝尊)이라 부르기도 한다.---→곽시쌍부(槨示雙趺),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참조.


*가섭마등(迦葉摩騰, 산스크리트어 K??yapa-m?ta?ga)---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한 인도 출신 승려. 축섭마등(竺葉摩騰), 섭마등(攝摩騰), 마등(摩騰)이라고도 한다. 매우 총명해 대 ? 소승의 경(經)과 율(律)을 통달했고, 중국 후한의 효명제( 58~75재위) 때인 AD 67년 대월지국(大月氏國)의 승려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백마에 싣고 뤄양(洛陽)에 이르러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등을 번역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경의 시초이다.


 *가섭선세(迦葉善歲)---부파불교시대 음광부(飮光部)의 시조. 성은 가섭. 이름은 선세(善歲). 불멸 후 3백년(BC345~246)의 말기에 활동. 어릴 적부터 어질고 총명해 7세 때에 아라한과를 얻고, 사람들의 귀의를 받았다. 또 상좌부의 교의가 독자부(犢子部)ㆍ법장부(法藏部) 등으로 발전해가면서 대중에 너무 부화함으로써 그 근본 뜻을 점점 잃어 감을 개탄하고, 상좌부의 교의를 유지하기에 힘쓰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음광부를 독립시켰다.


*가야(Gaya, 伽倻)---보드가야((Bodhgaya)를 칭함. 붓다가 출가 후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대각의 성지. 현재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주 주도(州都) 파트나 남쪽 100여km 지점에 있다.

   이곳의 마하보디(maha bodhi, 大覺) 사원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 이 부근에는 붓다가 정각을 이루실 때 있던 보리수의 후손 및 금강보좌, 아소카석주, 네란자라강(니련선하강/尼連禪河江)과 전정각산(前正覺山), 가야시산, 수자타(Sujata) 여인이 유미죽(乳米粥)을 공양 올린 수자타사원, 가섭 삼형제를 제도하신 장소 등이 남아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 세계 불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성지이다.


*가야시산(象頭山)---붓다가 정각(正覺)을 이룬 네란자라강 부근의 가야(伽耶) 땅에 있는 산. 가야산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가야시산 정상에서 일천 명의 제자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삼화[三火 = 삼독(三毒)]를 처음 언급하셨다. 삼화란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痴心)의 삼독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즉, 욕망의 불길, 노여움의 불길, 어리석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사바세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가오욕(呵五欲)---선 수행에 들어가려면 일상생활 속에서의 번잡함, 사람들과의 관계, 생활과 관련한 잡다한 일들, 문자에 대한 집착 등으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것을 놓은 상태에서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수나라 시대에 천태지의(天台智?, 538-597)대사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추어야 할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즉, 구오연(具五緣) ? 가오욕(呵五欲) ? 기오개(棄五蓋) ? 조오사(調五事) ? 행오법(行五法)의 다섯인데, 다섯 항목에도 각기 다시 다섯 사항이 있어서 이를 ‘25방편(方便)’이라 한다. 그리고 위의 다섯 항목 중의 하나가 가오욕이다.

   가오욕(呵五欲)이란 다섯 가지 욕망을 꾸짖는 것으로서, 선 수행을 위한 준비로서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이라는 인간의 다섯 감각기관의 욕망에 반연하는 외적 조건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운 외모나 형상과 진귀한 물건[色], 귀를 자극하는 온갖 소리[聲], 향기로운 냄새 등의 온갖 내음[香], 미욕(味欲)을 부추기는 맛있는 음식[味],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觸] 등을 말하는 것으로 정해진 계율만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을 유혹하고 속박하는 외적 조건 또한 경계하라는 말이다.---→‘25방편(方便)’ 참조.


*가전연(迦?延, 카차야나, Katyayana)---마하가전연(摩訶迦?延)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사람. 부처님의 말을 논리 정연하게 해설해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는 말을 들은 4대 성문(聲聞)의 한 사람이다. 설법 제일이었던 부루나(富樓那)존자조차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설법 제일인 부루나와 논의 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자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많은 내용을 요약해 핵심만을 말하기도 하고, 너무 간략해 뜻이 모호한 내용은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기도 했다. 논리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논서의 저자로 추정된다.


*가지(加持)---부처님의 헤아리기 어려운 위대한 힘이 나에게 더해지고 나는 그 힘을 받아 지니기 위해 힘쓰는 것인데, 대자대비한 불보살의 가호를 받아 중생을 부처와 일체가 되는 깨달음의 경지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수행이나 의식에 의해 부처의 힘을 자기가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는 행위 전반을 가리킨다. 가지의 가(加)는 가피加被), 지(持)는 섭지(攝持)의 뜻으로 해석된다. 호념(護念), 가호(加護) 등의 번역도 같은 뜻이다. 즉 ‘가(加)’는 부처님이 지닌 대비심의 힘이 수행자에게 가해지는 것이고, ‘지(持)’는 수행자의 신심에 부처님 감응하는 것을 수행자가 받아 지니는 것을 말한다.


*가지성불(加持成佛)---중생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부처님을 흠앙하는 신심(信心)을 나타내면 부처님이 베푸는 대비력(大悲力)과 서로 어울려서 범부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성(佛性)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수행하는 자의 공부가 깊어감에 따라 부처님의 위력이 가지(加持)돼 성불하는 상(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부처의 삼밀과 중생의 삼밀이 깨달음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즉, 중생과 부처님 법신(法身)이 일여(一如)하게 되는 경지이다. 삼밀(三密)이란 밀교에서 신(身) ? 구(口) ? 의(意)의 삼업을 이르는 말인데, 수행을 열심히 하면, 중생의 삼밀이 대일여래 부처님의 삼밀과 일치하게 돼 중생과 대일여래가 한 몸을 이루는 경지가 되는데, 이것을 가지성불이라 한다.


*가타(伽陀, 가아타아)---산스크리트어 Gatha를 음역해서 게타(偈陀) 혹은 가타(伽陀)라고 하며, 의역해서 고기송(孤起頌)라고 한다. 이는 산문은 없고 경문 전체가 운문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26장 423게송으로 이루어진 <법구경(法句經)>이다. 같은 운문체이지만 산문체로 된 내용을 다시 운문체로 중복해서 설한 것은 중송(重頌) 혹은 기야(祇夜)라고 한다.---→중송(重頌), 게송(偈頌) 참조.


*가피(加被)---가비(加備)ㆍ가호(加護)라고도 함. 부처님이나 보살이 자비의 힘을 베풀어 중생에게 이롭게 힘을 주는 것. 온 마음을 다 기울여 기도를 했을 때의 부처님에게 받는 과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이다.


*가행(加行, 산스크리트어 prayoga)---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 더욱 힘써서 마음과 계행(戒行)을 닦고 수행한다는 말이다.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본래의 수행에 힘을 더해 행하는 수행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는 가행으로 얻어진 결과를 가행과(加行果)라고 하며, 번뇌를 끊는 준비로서 수행하는 단계를 가행도(加行道)라고 한다.---→가행도(加行道) 참조.


*가행정진(加行精進)---한국 불교에서는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평상시보다 한층 더 정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행정진(加行精進) 혹은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행정진은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방법이 보통이다. 7일, 21일, 100일 등으로 할 수 있다. 단, 유념할 것은 처음부터 너무 지겹게 기간을 잡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도 분량도 너무 많이 잡으면 나중에 감당이 되지 않아서 그만두는 수가 많으므로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


*가행도(加行道)---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하는데,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가행도는 4종도(四種道)의 하나이다. 4종도란 번뇌를 끊는 수행의 4단계를 말하는데, 가행도(加行道), 무간도(無間道), 해탈도(解脫道), 승진도(勝進道)의 4단계이다. 이 중 가행도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과정의 첫 단계로서 번뇌를 끊으려고 다시 힘을 더해 수행하는 기간을 말한다. 

       ※무간도(無間道)---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즉, 바르게 번뇌를 끊는 도를 말한다.

         해탈도(解脫道)---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무간도를 닦은 다음에,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성취하는 것.

         승진도(勝進道)---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가행위(加行位)---유식불교(唯識佛敎)에는 수도 5위(修道五位)가 있다. 즉, 보살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는 수행의 다섯 단계로서 자량위(資糧道), 가행위(加行道),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이다. 

      ? 제1위 자량위(資量位) -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를 쌓는 준비단계로서, 나와 네가 서로 짝으로 존재하고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는 진리를 머리로 깨달은 상태다.

      ? 제2위 가행위(加行位) -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제1위 자량위(資量位)의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로서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해 현상을 나와 너 또는 나와 대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정신적 습관을 자각하고, 그러한 습관을 제거하는 훈련을 닦아나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唯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5위(五位) 참조.


*각덕(覺德)---신라 진흥왕 무렵의 스님.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법을 구하러 중국 양(梁)나라에 건너갔다. 이것이 신라 스님으로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한 시초이다. 진흥왕 10년(549)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가지고 귀국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부처님 사리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때 임금은 백관으로 하여금 예의를 갖추고 흥륜사(興輪寺) 앞길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


*각천(覺天)---본명은 불타데바(佛陀提婆, Buddhadeva)이고, 발타제바(勃駝提婆)라고도 한다. 1세기경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 속했던 학승으로, 법구(法救, Dharmatrata), 묘음(妙音, Ghosa), 세우(世友, Vasumitra)와 더불어 바사 4대론사(婆沙四大論師)의 한 사람이었다.

      ※바사(婆沙)---비바사(毘婆沙)의 준말. 비바사는 산스크리트어 vibh???의 음사로서 각종 불경의 주석서(註釋書)를 말함.


*각황(覺皇)---깨달음의 황제, 곧 부처님을 가리킴. 각왕(覺王)이라고도 한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覺皇殿-국보 제67호)의 이름이 바로 이에 연유하고 있다.  


*간경(看經)---‘경을 읽다’라는 말. 경을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읽다[풍경(諷經)], 승당 불전 등에서 경을 송독(誦讀)하다 등의 뜻이었으나 뒤에는 소리 내어 경전을 읽는 독경(讀經)을 포함해서 경전을 연구하기 위해 읽는 것도 다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경전의 말씀과 의미를 쓰면서 되새긴다면서 사경(寫經)하는 것도 간경의 범주에 들어갔고, 결국 불경을 공부하는 모든 것을 간경이라 하게 됐다.

   그리고 강원에서 승려들이 간경, 즉 경전을 공부할 때는, 배우는 단계와 읽는 단계, 그리고 보는 단계의 구별이 있으며, 보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자득(自得)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보는 단계’란 정신을 집중해 직관하는 수행 실천의 단계, 자기 마음을 비추어보는 단계라고 해야 하겠다.  


*간경도감(刊經都監)---조선 세조 7년(1461년)에 불교 경전을 번역, 출판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립된 기관. 신미(信眉), 수미(守眉),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김수온(金守溫), 한계희(韓繼禧), 강희맹(姜希孟) 등의 학자가 실무를 맡았다. 특히 이때 한글로 번역한 불경 언해본은 불교학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간다라(Gandh?ra)미술---기원 전후 경부터 AD 5세기경까지 파키스탄 북부, 대략 지금의 페샤와르에 해당하는 지방에서 만들어진 그리스 ? 로마 풍의 조각 위주의 불교미술을 일컫는다. 동서 문화교류에 의해 생겨난 서방요소가 짙은 미술로 인도 미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시 로마 세계에서 행해졌던 헬레니즘 미술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해 서방의 공장(工匠)도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불상(佛像)이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보리수 ? 스투파(탑) ? 법륜(法輪) ? 보좌(寶座) 등으로 부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었으나 간다라미술부터 인간적인 모습의 간다라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했다.

   간다라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또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즉,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 ?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간시궐(乾屍厥)---‘마른 똥 막대기’라는 말. 중국 송대에 운문(雲門)스님이 던진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어느 스님이 운문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여하시불/如何是佛]? 라고 물었을 때 운문스님이 간시궐[마른 똥 막대기]이라고 대답했다.

   흔히 우리는 진리는 성스럽다고만 생각한 나머지 성스러운 커튼에 가려 진실을 제대로 못 볼 수가 있다. ‘무슨 똥 막대기 같은 소리인가?’ 충격적인 이 말은 ‘진리는 성스럽고 고귀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고, 깨달음을 얻게 해 주기 위한 화두였다.


*간혜(乾慧)---건혜(乾慧)와 같은 말.---→건혜(乾慧) 참조.


*간화결의론---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 지음. 매우 논리적인 논서로서 수행의 방법에 대한 글이다. 보조는 오교(五敎) 중에서는 화엄원교(華嚴圓敎)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보고, 선 전통 안에서는 대혜선(大慧禪)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보았다. 보조는 화엄의 성불론(成佛論)을 주장하면서도 한편, 그 화엄의 성불론이 구체적인 수행법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런 반면 대혜의 간화선은 ‘화두 참구’라는 수행법이므로 화엄의 약점을 상보(相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간화결의론>은 수행법의 천명이라는 점에서 간화선을 강조했다.


*간화선(看話禪)---간화선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을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 화두(話頭)라는 문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이러한 간화선은 중국 송(宋)대에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에 의해 정립됐다. 화(話)는 화두를 말하고, 간(看)은 주시하다, 참구(탐구)하다는 뜻.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으로 공안을 간(看)하는 참선법.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 현행하는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여기 화(話)에서 일컫는 화두는 즉 말이다. 헌데 여기서의 ‘말’의 의미는 보통의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말’이고 ‘말 밖의 말’을 의미한다. 즉, 화두는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풀 수 없고,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나타내는 말 이전의 말이다. 이러한 화두를 참구해 항상 그것을 의심해 나감으로써 궁극에 가서는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이 타파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흔히 간화선하면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일컫는데,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공안(公案),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화두(話頭) 참조.


*갈마(?磨, karma)---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의 음역어로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업(業)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교단 내부에서의 의식절차인 작법(作法)을 말한다.

   헌데 단지 ‘갈마’라고만 음역하는 경우에는 업을 의미하는 일이 거의 없고, 대개 불교수행자가 계(戒)를 받거나 참회하거나 할 때의 작법을 말한다. 이 작법에 관계하는 승려를 ‘갈마아사리’라고 한다.

                                     

*갈마아사리(?磨阿?梨, karma-acarya)---갈마는 불교의식을 말하고, 아사리는 불법의 스승을 일컫는데, 불교수행자가 계(戒)를 받을 때(수계할 때)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스승을 수계아사리 혹은 갈마아사리라 한다.


*갈애(渴愛)---목이 몹시 말라 갈증이 심할 때 절실히 물을 찾듯 범부가 5욕(欲)에 탐착함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4성제(四聖諦)에서 고(苦) 발생의 원인을 갈애라 했다.---→5욕(欲), 4성제(四聖諦) 참조.


*감로(甘露)---천신(天神)의 음료,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이라는 뜻. 불교 경전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교법이 중생을 잘 제도하는 데에 비유하는 예로 쓰인다. 즉 부처님의 설법을 감로라 했다.

    

*감로탱화(甘露幀畵)---망자를 구제하기 위한 탱화를 일컫는다. 조상숭배와 영혼숭배 신앙이 가미돼 묘사한 불화로서 우란분탱화(盂蘭盆幀?)라고도 한다.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죽은 어머니의 영혼을 아귀의 세계로부터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감로탱화는 우리나라의 강한 조상숭배 의식과 결합돼 널리 퍼졌던 <우란분경>의 신앙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지옥이나 아귀도에 빠진 가족 ? 친지들을 위해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올림으로써 그들이 고통을 여의고 극락에 왕생하는 전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강승회(康僧會)---강국(康國) 출신의 역경승으로서 중국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에 불교를 전파했다. <육도집경(六度集經)> 등을 한역했으며, <법경경주해(法鏡經注解)> 등의 저서가 있다. ‘강(康)’자는 강국(康國) 사람이라는 뜻이다.

     ※강국(康國)---강거국(康居國)이라고도 하는데, 고대에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방에 있었던 소그디아(Sogdia)란 나라를 중국에서는 강국 혹은 강거국이라 불렀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강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강승개(康僧鎧, 산스크리트어 상가바르만/Samghavarman)---강국(康國) 출신의 승려. 승가발마(僧伽跋摩)라 소리 번역을 하기도 한다. ‘강(康)’자는 강국(康國)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인 252년 위(魏)나라의 뤄양(洛陽)에 와서 중국 최초의 사찰로 일컬어지는 백마사(白馬寺)에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등을 번역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입을 여는 순간 어긋나버린다(틀린다)는 뜻. 말한 즉 곧 틀리다, 입만 벌리면 잘못 된다, 입을 벙긋하는 순간 어긋난다, 대체로 이런 뜻으로서 진리의 세계는 말로 표현하려면, 곧 입을 여는 순간 참모습과는 달리 빗나간다는 말이다.

   어떤 생각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 표현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말로써 선(禪)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면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진다는 뜻인데, 동념즉괴(動念卽乖)라, 생각만 움직여도 곧 어긋난다는 말과 비슷하다. 불법은 마음공부인데,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법장(法藏)은 진리의 창고로서, 즉 경전을 말하는데, 기도를 시작하는 일은 이 법장을 여는 일이고, 참선에 들어가는 것도 법장을 여는 일이다. ‘옴 아라남 아라다’는 <천수경>에 나오는 개법장진언이다.


*개보판대장경(開寶版大藏經)---중국 송(宋) 대에 최초로 조성된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을 일컫는다. 약칭 <개보장(開寶藏)>이라 한다. 송 태조 연간인 개보(開寶) 4년(971)에 착수해 다음 대인 송 태종 8년(983)에 완성했으므로 <개보판대장경>이라 통칭되며, 칙명으로 조성됐다고 해서 <칙판대장경(勅版大藏經)>이라고도 한다. 오류가 많았다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이 바로 이 개보판대장경을 바탕으로 해서 조성?었다고 한다.


*개시오입(開示悟入)---<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근본적인 목적 4가지를 제자인 사리불(舍利弗)에게 설명한 것이다. 즉, 중생이 진리를 열고, 보고, 깨닫고, 그 길에 들게 하는 일이다.

     ① 개(開)는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② 시(示)는 깨달은 바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모든 번뇌가 사라진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③ 오(悟)는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한다는 말이다.

     ④ 입(入)은 중생들로 하여금 진리의 본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 = 인상/人相)---붓다는 바라문들이 윤회의 주체라고 한 아트만(atman)을 현실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한 가공의 망상이라고 부정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불명 후 300년 경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독립한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즉,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뿌드갈라란 중생에게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어떤 실체가 ‘개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조작된 허구임을 모르고 몸과 마음속에 따로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고 여기는 그릇 된 착각이 개아, 즉 인상이다.---→4상(四相) 참조.


*개운당조사(開雲堂祖師)---1790년(정조 10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 자라 13세에 문경 봉암사로 출가해 혜암(慧庵)선사의 제자가 됐다.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상주 도장산(道藏山, 828m) 심원사(深源寺)로 들어갔다. 거기서 51세까지 수행 정진한 나머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 중생으로서 최고 경지에 올랐다.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지리산 묘향암에서 신선이 됐다고 한다. 천화(遷化)를 했는지, 그의 죽음을 본 사람이 없어 신선이 됐다는 설이 제기된 전설적인 인물이다.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당나라 초기(730년)에 지승(智昇)이 편집한 불경 목록집, 당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됐다. 송(宋) 대에 최초로 조성된 <개보판대장경(開寶版大藏經)>은 바로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5,048권의 불전을 판각한 것이다.


*개차(開遮)---개(開)는 어떤 행위를 허락함, 차(遮)는 어떤 행위를 금함이고, 개(開)는 방편이며 차(遮)는 막는다(금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계율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어떤 때는 계율을 어기는 것을 허락하고, 어떤 때는 어기는 것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목숨이 위태롭거나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할 경우에는 방편으로 계율을 어겨도 좋다고 허락하지만 어떤 때는 죽더라도 반드시 계율을 지키라고 한다. 즉, ‘큰 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것을 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지범개차라고 한다.---→지범개차(持犯開遮) 참조. 


*거돈사지(居頓寺址)---사적 제16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한계산 서쪽 기슭의 작은 골짜기에 펼쳐진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 보수돼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으나 언제 폐사가 됐는지 확실치 않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본다.

   거돈사지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신라 말 고려 초의 절터로서는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중문지 북쪽엔 3층석탑(보물 제750호)이 남아있고,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으며,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法眼宗)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됐다.


*거사(居士)---출가하지 않는 재가 남자신도로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사람을 말한다. 세계 3대 거사로는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도의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 중국의 방거사(龐居士), 신라의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있다. 중국의 방거사는 당나라 시대의 사람으로 이름은 온(蘊)이라 했으며, 있는 재산을 저 바다 속에 내다 버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신라의 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사람으로 성은 진(陣), 이름은 광세(光世)라 했다. 그 외에 의상대사의 동생 윤필거사(潤弼居士)도 유명하다.---→부설거사(浮雪居士), 윤필거사(潤弼居士)참조.


*건달바(乾?婆, gandharva)---긴나라(緊那羅)와 함께 제석천(帝釋天)을 모시면서 음악을 담당하는 천신으로 팔부중의 하나. 심향(尋香), 식향(食香) 등으로 번역. 술과 고기는 일체 먹지 않고 향기만 먹고 사는 천신의 일종이다. 수미산 남쪽의 금강굴에 살며 언제나 부처님이 설법하는 곳에 나타나 찬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통상 놀고먹는 ‘건달’이란 말도 이 건달바에서 유래된 것이다.

                  

*건혜(乾慧)---간혜(乾慧)와 같은 말임. 아직 원숙하지 못하고 메마른 지혜. 참다운 지혜를 발현하지 못하는 ‘알음알이로 이해한 단계’라 할 수 있다. 비록 깨우쳐 지혜를 얻었다고 해도 선정(禪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건혜라고 한다. 겨우 욕망의 습기(濕氣)는 말라 없어졌지만 아직 실질적인 덕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효용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건혜라고 한다. “계행 없는 정(定)은 죽은 물이고, 죽은 물에 사는 용(龍)은 활력이 없고, 정력(定力) 없는 지혜는 건혜(乾慧)일 뿐, 생사의 길에서는 쓸모가 없다” 이런 말이 있다. 건혜지(乾慧地)라고도 한다.


*겁(劫)---산스크리트어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 ? 대시(大時)라 의역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시간 개념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데,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란 뜻으로 매우 길고 오랜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 곧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했다.


*게송(偈頌)---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할 경우거나 중요한 교리를 서술할 때 운문으로 쓴 것을 게송이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운문으로 표현한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고기송(孤起頌)과 중송(重頌)이다.

   고기송은 게타(偈陀) 혹은 가타(伽陀)라고도 하는데, 산문은 없고 경문 전체가 운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6장 423게송으로 이루어진 <법구경(法句經)>이다.

   그리고 중송은 산문체로 된 내용을 다시 운문체로 설한 것이다. 여기서 ‘중(重)’은 무겁다는 뜻이 아니고 ‘거듭’을 의미한다. 즉 본론의 산문 내용을 좀 더 자상하고 미세하게 표현해 산문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내용을 중복해서 운문체로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의 경우, 각 품마다 그 말미에 그 품의 핵심내용을 다시 중송으로 읊고 있다. 이 중송을 일명 기야(祇夜)라고도 한다.

   게송은 바로 게타의 게(偈)와 중송의 송(頌)을 따서 게송(偈頌)이라 하게 된 것이라서 게타(고기송)이든 중송이든 모두 게송이라 일컫는 것이 일반적이다.---→가타(伽陀), 고기송(孤起頌), 중송(重頌) 참조.


*게타(偈陀)---가타(Gatha, 伽陀)와 같은 말임.---→가타(伽陀) 참조.


*격외도리(格外道理)---언어의 격식이나 관례를 초월한 말이지만 진리를 담고 있음을 말한다. 즉, 설정된 언어의 뜻에 구애받지 않고 부정과 긍정 양 날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언어의 격식을 뛰어넘는 진리를 말한다. 말이 있으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뜨고, 옳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쁘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틀이 잡히고, 논리가 생기고, 문법이 생기고, 격식이 생겨, 격식을 벗어나면 틀렸다 그리고 아니다 하는 갈등이 생긴다. 때문에 진리는 옳다 혹은 그르다 하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선문답이나 화두의 경우 대개 이에 해당한다.

   스승이 제자를 보니 공부가 거의 끝나갈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해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준다. 이렇게 돈발(頓發) 된 의심 때문에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스승이 제자에게 의심을 돈발시켜주기 위해 거량한 격외도리를 화두라고 한다.

   혹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해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화두이다.


*격외선(格外禪)---가르침 밖에 따로 전한 마음의 법리(法理)인 교외별전(敎外別傳)과 격식과 단계를 벗어난 수행의 이치인 격외도리(格外道理), 그리고 글자에 구애받지 않은 불립문자(不立文字), 이러함을 바탕으로 한 선(禪)을 줄여서 격외선이라 한다.

   6조 혜능(慧能) 계통의 격외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하는데, 이 남종의 격외선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는 신라 말의 도의(道義)선사였으며, 그를 이어 많은 선사가 격외의 선법(禪法)을 중국에서 받아들여 산문(山門)을 열었다. 그리하여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아홉 산문이 이루어졌으므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일컬었고, 그 이후는 물론 지금도 조계종(曹溪宗)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참선은 이 격외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격의불교(格義佛敎)---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됐을 당시 중국인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은 불교교리가 많았다. 이를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유교나 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으로부터 유사한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해 설명한 편법을 가리켜 격의(格義)라 했다. 이렇게 기존의 자국 언어를 빌어 이질적인 문화를 방편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격의라 했는데, 불교 도입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교리의 이해 및 연구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교의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을 가져와서 오호16국 시대에 이르러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과 그의 제자 승조(僧肇, 384~414)에 의해 극복돼 나갔다.


*견도(見道, 산스크리트어 dar?ana-m?rga)---초기불교에 있어서 성문과 보살로서의 수행단계인 삼도(三道)의 첫 단계이다. 번뇌가 없는 청정한 지혜에 의해 4제(四諦)와 12연기(12緣起)의 도리를 깨닫는 수행과정을 말한다.

   4제를 명료하게 관찰해 견혹(見惑)을 끊는 단계로서 무루(無漏)의 바른 지혜를 발휘해 4제와 같은 진리를 통찰하는 단계이므로 견제도(見諦道)라고도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예류향(預流向), 유식설에서는 통달위(通達位), 보살의 수행 단계에서는 십지(十地) 가운데 초지(初地)에 해당하며, 이 이상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보통 성자라고 한다.---삼도(三道) 참조.

     ※삼도(三道)---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임.

     ※예류향(預流向)---초기 불교 성문(聲聞)의 수행 단계인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사과(四果) 중 수다원을 예류향이라 함. 

     ※통달위(通達位)---유식설(唯識說)에서, 수행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도 5위(修道5位) 중의 셋째 단계.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우주의 진리를 체득하는 단계임.

     ※10지(十地)---천태종에는 보살 수행의 단계로서 통교(通敎) 10지(地)를 말하는데, 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말한다. <화엄경>에서 천명한 수행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이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유식학에서 설하는 4분설에 나오는 말이다. 견분(見分)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상분은 인식 대상을 말한다. 따라서 견분은 보고 인식하므로 주관이고, 상분은 보여지는 대상, 즉 인식 주관에 드러난 인식대상인 객관을 말한다.   

   견분, 상분 모두 마음 작용인데, 견분은 인식하는 장(場)이 되고, 상분은 인식하는 대상(對象)이다. 즉, 견분은 사물(事物)을 인식하는 주체인 심식(心識) 작용이고, 그 반대가 인식의 대상인 상분(相分)이다. 따라서 주관의 부분을 견분(見分)이라 하고, 객관의 부분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견분은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껴보고, 뜻으로 법을 알아보는 견문각지(見聞覺知)로서 사물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이다. 이에 비해 상분은 마음속에 객체인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내용이다. 이와 같이 견분은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이므로, 수행에 있어서 만일 견분이 없다면 관조(觀照)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유식(唯識) 4분설(四分說) 참조.


*견성(見性)---본래의 자기 면목, 즉 본시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본다는 뜻이다. 본연의 자기는 항상 존재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할까, 생각에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구름이 계속 피어올라서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흐림을 걷어내고 본성을 보는 것이 견성이요, 깨달음이다. 즉 견성이란 본연의 자기를 봄이요, 곧 깨달음을 일컬음이다. 결국 견성했다, 득도했다, 성불했다, 해탈했다는 말이 모두 같은 말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말.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밝고 바르게 보아 앎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면 성불한다는 뜻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희들의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정견(正見)이라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진지(眞知)라 한다.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도 없으며, 오직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과 깨달음의 본체가 원만하고 밝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것을 일컬어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다[견성성불]라고 한다”.

   즉 자기의 본성은 원래 형체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더 이상 불타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라 하는 것이다. 선종(禪宗)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타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독경, 좌선, 예불, 계율과 같은 수행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단지 마음을 닦아서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룰 것을 주장한다.---→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참조.                    


*견성성불 요익중생(見性成佛饒益衆生)---대승불교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같은 말임.---→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참조.


*견지(見地)---일반사회에서는 어떤 사물을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수행의 기틀이 잡힌 불퇴전(不退轉)의 지위를 일컫는다. 즉, 삼계(三界)의 견혹(見惑)을 끊어 다시 범부의 상태로 후퇴하지 않는 경지이다.

   천태종에는 보살 수행의 단계로서 통교(通敎) 10지(地)를 말하는데, 통교 10지는 초발심(初發心)의 단계에서 부처의 지위까지를 열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그 통교 10지 중, 제4위가 견지이다.---→‘통교(通敎) 10지(地)’ 참조.

     ※통교(通敎)---천태종의 교판(敎判)에서, 보살의 삼승인 성문 ? 연각 ? 보살에게 공통되는 가르침과 함께 받는 법을 말하며, 10지(地)가 있다.


*견취견(見取見)---5견[(五見=오리사(五利使)]의 하나. 그릇된 견해를 바른 것으로 간주해 거기에 집착하는 견해. 졸렬한 지견(知見)을 잘못 믿고 스스로 훌륭한 견해라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오견(五見), 견혹(見惑) 참조.


*견혹(見惑)---2혹(二惑)의 하나로 사혹(思惑)에 대칭되는 말임. ‘혹(惑)’이란 마음의 미혹, 번뇌를 의미한다. 그리고 견혹이란 사물에 집착하는 망상으로 일어나는 번뇌, 혹은 그릇된 도리를 분별함으로써 일으키는 아견(我見), 변견(邊見)… 따위 오견(五見)으로서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해 생기는 이론적인 번뇌이며, 사상적인 미혹이고, 후천적 번뇌이다. 이 5견은 예리(銳利)한 번뇌이므로 이사(利使), 즉 5리사(5利使)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사혹이란 세간의 현상에서 일어나는 탐 ? 진 ? 치 따위의 습관적 ? 선천적 번뇌를 말한다.---→오견(五見) 참조. 

  

*결가부좌(結跏趺坐)---앉는 방법의 하나로서, 두 다리를 서로 교차시켜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것. 줄여서 가부좌(跏趺坐) ? 결좌(結坐)라고도 한다. 앉는 방법은 항마좌와 길상좌의 2가지가 있다.

    ? 항마좌(降魔坐)---먼저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아, 두 발바닥이 모두 위로 향하게 하며, 손도 오른손을 밑에 두고 왼손을 위에 올려놓는다. 이는 천태종(天台宗)이나 선종(禪宗)과 같은 현교(顯敎)에서 많이 사용하며, 요가의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 길상좌(吉祥坐)---먼저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아, 두 발바닥이 모두 위로 향하게 하며, 손은 왼손을 밑에 두고 오른손을 위에 올려놓는다. 길상좌는 밀교(密敎)에서 많이 사용되며, 연화좌(蓮華坐)라고도 한다.


*결사(結使)---여기서 ‘사(使)’란 번뇌란 의미이다. 번뇌라는 놈은 우리 마음속에 꽁꽁 맺혀 있다. 그 맺힌 것들이 우리의 행동을 방해하며 복잡하고 불편한 행위로 이끌어간다. 그런 번뇌의 모습을 ‘결사(結使)’라 한다.


*결사(結社)---불교의 혁신운동을 말함. 불교 내부의 잘못을 혁신하려는 운동은 시대마다 있었으나 특히 고려 때 태동한 운동을 결사(結社)라 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결탁해 세속의 명예를 얻으려는 승려가 많았다. 이에 몇몇 뜻있는 승려들이 모여 혁신운동을 시작한 것이 그 유래이다.

   그 중에서도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의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유명하다. 지눌은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문>을 쓰고 세속화된 호국 ? 기복 ? 미신 불교를 타파하고, 타락한 형식 불교를 척결, 정법불교와 수행불교를 주창했다. 무신(武臣)들의 난에 의해 정치가 혼란해지고, 부패한 승려들에 의해 교단이 타락해갈 때 일어난 혁신운동이었다.

   한편 지눌과 비슷한 시기에 요세(了世)는 강진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를 중심으로 무신난 이후 혼란한 사회와 불교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결사로 백련결사(百蓮結社)운동을 통해 천태종을 중흥시켰다. 


*결제(結制)---안거(安居)엔 하안거 동안거 둘이 있는데, 그 안거를 시작함을 말함 - 반대말 ; 해제(解制).


*겸익(謙益)---백제 승려.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로 가서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성왕 9년(531년)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 겸익이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성왕은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케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겸익의 율학으로 백제 불교는 예의와 의식에 치중하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됐으며, 그 뒤 일본 율종의 토대가 됐다.


*경계(境界, 산스크리트어 visaya)---여러 경전에 나오는 용어로 상황에 따라 그 뜻이 약간씩 다르다.

      -모든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대상, 지각할 수 있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고,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뜻하기도 하는데,

      -정신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를 뜻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주변 환경의 모습을 뜻하기도 하며,

      -일반사회에서는 국경, 행정구역과 같이 자기 세력이 미치는 장소나 영역을 뜻한다.

            

*경봉(鏡峰, 1892년∼1982년)스님---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덕유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출가를 했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와 고성 건봉사(乾鳳寺) 조실을 지내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말년에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통도사 화엄산림법회’가 경봉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래는 경봉스님이 ‘물’에 대해 읊은 게송이다.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는 것이 물이다.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물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는 것이 바로 물이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물 한 가지를 가지고 사유하면서 중생을 일깨운 경봉스님의 말씀이다.


*경절문(徑截門)---수행시 점진적인 단계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간화선(看話禪)으로 곧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진제(眞諦)를 터득,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지름길인 수행법.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이 최초로 이 이론을 정립했다. 지눌은 그의 저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송(宋)나라의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가 주창한 간화선을 채택, 경절문 이론을 정립했다. 지눌 이후 우리나라의 선종에서는 경절문에 관한 공부가 성행함으로써, 교학(敎學)을 경시하는 풍조가 불교계를 휩쓸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와 휴정(休靜)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경절을 강조했다. 현재 한국 불교의 선 수행에서도 이 경절문의 법문이 중요시되고 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혹은 불성(佛性).

             

*경행(經行)---스님들이 좌선하다가 졸음을 막기 위해, 또는 건강을 위해 일정한 구역을 가볍게 거니는 것을 더러 경행(經行)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원칙적으로 포행(布行) 혹은 경행(輕行)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경행(經行)’은 고려시대에 민간의 질병과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 스님이 향불을 들고 북을 치며 불경을 외면서 거리를 걸어가며 복을 빌었던 불교행사를 일컫는다.---포행(布行) 참조.


*경허(鏡虛, 1849년~1912년)---경허선사는 조선 말기 사람으로 조선 500년 동안 잠자던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킨 근세 최고의 선승이었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했다. 개심사, 부석사, 범어사, 해인사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교화활동을 펴면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다가 마지막엔 주로 수덕사에 주석했고, 만공(滿空)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선종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라고 한다.

   “경허(鏡虛) 선사는 봉건적 잔재를 깨부수고 오염된 조선불교를 깨끗이 씻어냈다. 경허를 통해 한국불교는 다시 생성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이 주도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현대 한국불교가 그 목소리를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불교는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일지스님


*계금취견(戒禁取見)---오리사(五利使=5견/五見)의 하나. 잘못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그것을 받들고 집착하는 견해. 인(因)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도(道) 아닌 것을 도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견혹(見惑), 오견(五見) 참조.


*계단(戒壇)---계율을 수여하기 위한 단. 계율을 받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 마련된 단을 말한다. 주로 정식 승려가 되는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장소이다. 형태는 네모난 이층 석단(石壇)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바탕이 되는 비교적 넓은 단 위에 상대적으로 좁은 또 하나의 단을 조성하고, 그 중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石鍾形) 부도를 안치해 놓은 구조로 돼 있다. 계단의 형태는 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 사찰의 몇 곳에 계단이 있으나 특히 신라 선덕왕 15년에 설치된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유명하다.---→구족계(具足戒) 참조.


*계수(稽首, 산스크리트어 Vandana, Vandi)---반담(伴談)ㆍ반제(伴題)라 음역. 계수례(稽首禮)라고도 함.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여 공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 천수경에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란 말이 나온다. 


*계(戒)와 율(律)---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계(戒, sila)와 율(律, vinaya)을 별개의 뜻으로 사용해 붙여 쓰지 않았으나, 한역하면서 ‘계율’이라 합성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계와 율이 동일한 뜻으로 표현되고, 일상어로 사용할 때에 완전히 구별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살펴보면 계와 율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 계(戒)---어원은 산스크리트어 ‘실라(sila)’이고, 그 뜻은 습관 ? 관습 ? 경향을 말하는데, 여기서 악을 버리고 잘못을 예방[방비지악(防非止惡)]하는 윤리적 행위 즉 선행을 일컫게 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sila)란 규율을 지키고자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작용, 즉 자신을 제어하는 규칙을 지키려고 부처님에게 맹세하고 결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성철스님은  “계(戒)는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지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릇이 더러우면 물이 더러워진다. 흙 그릇에 물을 담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흙물이 되고 똥 그릇에 물을 담으면 똥물이 되고 만다.” 라고 하셨다.

     ? 율(律)---어원은 산스크리트어 ‘비나야(vinaya)’로서 법률 ? 규칙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한 제자들에게 악행이 있을 때마다 행위의 금지와 벌칙을 규정한 조항을 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는 수행자 개인이 지켜야 할 덕목이고, 율은 무리를 이룬 집단인 대중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일컫는다. ‘계’가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도덕과 비슷한 데 비해, ‘율’은 타율적인 규칙으로 법률과 비슷하다.

   ‘율’은 불교의 출가교단(出家敎團-僧團)의 교단 규칙으로 단체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입단자들은 이를 지키도록 강요되지만, 불교의 수행으로서는 이를 적극적 자발적으로 지켜야 하므로 ‘계’의 입장에서 ‘율’을 지키고, ‘계’와 ‘율’을 합해서 ‘계율’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타율적 의미의 율보다 자율적 의미의 계를 더 강조한다는 데에 불교 계율의 특징이 있다. 


*계족산(鷄足山, 쿠르키하르/Kurkihar)---인도 동부, 비하르주(州)에 있으며,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의 동북쪽에 인접한 산으로 큰 불교 승원지이다. 사방 약 200m와 사방 40m인 2개의 유적구(遺跡丘)가 있다. 1930년의 발굴에 의해 큰 유적구에서 약 150체의 상(像, 대부분은 브론즈)을 위시해서 대좌, 수정 소탑, 종, 도기 등 230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현장(玄?)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된 계족산이 이곳에 해당된다고 한다. 닭의 발처럼 세 가지로 나누어진 듯 생긴 산으로,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가 여기서 부처님의 의발을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세상에 미륵불이 나타나면 전한다고 하는 전설적인 산이다. 이런 성스러운 계족산이기에 그 이름을 따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 계족산이 있다.     


*계(戒) ? 정(定) ? 혜(慧)---삼학(三學)이라 하는데, 성불할 이가 닦아야 할 세 가지이다. 계(戒, 산스크리트어 s?lasikkh?)는 계율(戒律), 정(定-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삼매)은 선정, 혜(慧-반야)는 지혜와 교학을 말한다.


*계학(戒學, 산스크리트어 s?lasikkh?)---삼학(三學)의 하나. 붓다가 제정한 계율을 배우는 것을 말함. 불법을 수행해 깨달음에 이르는데 반드시 닦아야할 세 가지 배움을 삼학이라 한다. 즉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이다. 이 중 계학은 마음의 청정을 지키고 말과 행실을 단속해 마음의 진실을 지켜가는 계율에 관한 것이다.---→삼학(三學) 참조.


*계현(戒賢, ??labhadra)---동인도 출신 승려. 마가다국(magadha國)의 나란타사(N?land?, 那爛陀寺)에 출가해 호법(護法, 530-561)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뒤를 이어 나란타사를 총괄했다. 630년에 당의 현장(玄?, 602-664)이 그곳에 이르러서 계현에게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를 비롯해 여러 논서를 배웠다고 한다.


*고고(苦苦)---삼고(三苦)의 하나. 육체적 고통.---→삼고(三苦) 참조.


*고골관(枯骨觀)---관법 수행(觀法修行)의 하나. 오정심관(五停心觀) 중의 부정관(不淨觀)과 관계가 깊다. 백골관(白骨觀) 혹은 골상관(骨想觀)이라고도 한다.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버리는 시체의 모습을 관함으로써 욕망을 벗어나 인생의 무상(無常)을 터득하고자 하는 수행 방법이다. 죽음 뒤에 남는 하얀 뼈, 즉 백골을 떠올리며 자기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부정관(不淨觀) 참조.


*고기송(孤起頌)---산스크리트어 Gatha를 한역한 말, 음역해서 게타(偈陀) 혹은 가타(伽陀)라고도 한다.---→가타(伽陀), 게송(偈頌) 참조.


*고달사지(高達寺址)---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래산 줄기의 우두산(일명 혜목산) 아래에 있는 사적 제382호의 절터이다. 처음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봉황암(鳳凰庵)이란 이름으로 창건돼, 고려에 들어와서 광종의 왕사인 원종(元宗;869~958)대사가 우거한 이래 국가의 비호를 받아 거찰이 된 고달사의 옛 절터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했다. 법명은 찬유(璨幽)이고,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元宗)’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慧眞)’이라 내렸다.

  고달사는 고려 5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전하며,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해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더불어 삼원(三院)의 하나인 대찰이었다. 희양원이란 지금도 건재한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를 일컬었고, 도봉원이란 현재 도봉산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던 영국사(寧國寺)를 일컬었으며, 이들 세 선원(禪院)은 선풍이 뛰어나고, 선후배간의 법통 계승이 명확해 광종의 특별한 관심과 칭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달사는 그 후의 기록이 전혀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절이 언제 어떻게 폐사됐는지 알 수가 없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현재 남아있는 주요문화재로는 신라 말의 고승 원감(圓鑑;787~869)국사 현욱(玄昱)의 부도로 추정되는 국보 제4호의 고달사지 부도, 보물 제6호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 보물 제8호 석불대좌(臺座). 보물 제7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등이 있다. 그러나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쌍사자석등은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경복궁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돼 있다.


*고두례(叩頭禮)---머리(頭)를 조아린다(叩)는 뜻이다. 고두배(叩頭拜) 또는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한다. 아무리 무수히 절을 한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삼배 뿐 아니라 108배를 비롯해 모든 절의 마지막 절 끝에 머리를 땅에 다시 한 번 조아리는 것을 ‘고두(叩頭)의 예’라 한다. 이는 자신의 발원(發願)을 빈다 해서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픈 간절한 심정을 여기서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고, 지극한 존경심에 대한 여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마지막 큰 절을 완료해 몸이 오체투지의 상태가 되고, 두 손바닥이 부처님을 받들기 위해 위로 향한 자세에서 고두를 하기 위해서는 일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손바닥이 땅을 향하도록 한 다음 엎드린 자세에서 팔굽을 들지 말고 머리와 어깨만을 들었다가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데, 머리를 들었을 때에 시선을 그대로 땅에 두어야 한다. 머리와 어깨만을 잠깐 들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 단순한 동작으로 할 수도 있고, 머리와 어깨를 약간 들고 팔굽을 땅에서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손으로 합장 자세를 취하였다가 손을 풀고 다시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방법도 있다.


*고싱가 살라(Gosingasala) 숲---부처님 생존 당시  어느 날 세존의 고명한 직제자들이 함께 성스러운 살라(Sala)꽃이 만개한 고싱가 숲의 동산에 머물렀다. 이 때 샤리푸타(S?riputta/사리불)가 아난다(Ananda), 레와따(Revata), 아누룻다(Annuruddha), 마하가섭Mah?k??yapa), 마하목련(Mahamoggallana) 존자에게 “고싱가의 살라 숲은 아름답습니다. 밤이면 달빛이 밝고 살라 꽃이 만개해 마치 천상의 향기가 두루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 고싱가의 살라 숲을 더 빛나게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제자들이 각기 나름의 답을 말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존께 가서 누구 말이 옳은지 여쭈어 보았다. “세존이시여, 누가 가장 잘 말했습니까?” “샤리푸타여, 그대들 모두가 다 각자의 방법에 따라 잘 말했다. 이제 어떤 비구가 고싱가 살라 숲을 빛나게 하는 지에 대한 나의 말을 들어라. 샤리푸타여, 여기 비구는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앉아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다.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라고 결심한다. 샤리푸타여, 이런 비구가 고싱가 살라 숲을 빛나게 한다.” 라고 세존께서 설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했다.

   이 일화는 수행자의 자세, 마음 지키기 등에 관해서 세상을 빛내는 사람은 특별한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보다도 일상생활의 매 순간 마음을 다해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법문이다.---이 상의 내용은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Nik?ya)의 <마하 고싱가경(Mahagosingasalasutta)>에 실려 있다.


*고존숙(古尊宿)---고(古)와 존(尊)은 모두 경어. 숙은 노숙(老宿)이란 말. 오랜 수행 경력을 가진 선덕(禪德)에 대한 존칭. 선문(禪門)의 위대한 선승에 대한 존칭. 장로(長老) ? 원로(元老)와 같은 말.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사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은 무심선(無心禪)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30여 년간 지주(池州) 남전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밭을 갈면서 은둔생활을 하고, 세상의 시비와 사상의 추구마저 잊어버리는 무심선(無心禪)을 터득함으로써 훗날 선승들에게 고존숙(古尊宿)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고행(苦行, 산스크리트어 tapas)---고행은 선정(禪定)과 함께 고대인도 종교가들이 행하던 보편적인 수행방법이다. 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대단한 고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이나교에서는 육체를 철저히 괴롭혀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시킴으로써 영혼이 순수하게 돼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고 믿었다. 

   붓다는 주로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 호흡을 중지하는 고행, 단식에 의한 고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붓다는 뼈와 가죽만 남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피부는 검게 말라버려 마치 해골처럼 됐다고 한다. 간다라미술 조각품에 있는 유명한 ‘붓다의 고행상’은 그 당시 붓다의 모습을 상상해 작품화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 깨닫고,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했다.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ta)---‘공(空)’이라는 용어는 산스크리트어 ‘sunya’(텅 빈)라는 형용사나 ‘sunyata’(공한 것)이라는 명사의 번역어이다.

   공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空)사상은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함으로써 붓다의 기본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따라서 공(空)사상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공이라는 말은 인연(因緣)이라는 소리이다.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은 그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인연으로 생겨난[중인연생(衆因緣生)] 모든 것을 공하다고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아(無我)라고 하며,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이 말을 불교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실체를 자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무자성의 내용이 연기라는 이야기이다. 이 무자성이 바로 공이다. 불교의 공사상은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한 판별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공가중(空假中)의 원리---중국 수나라 시대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 지의(智?)가 세운 천태삼관, 즉 천태종에서 세우는 3가지의 견해를 이른다.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空),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가(假), 공(空)이나 가(假)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中)을 말하고, 이 셋을 공ㆍ가ㆍ중의 3제(三諦)라 하며, 이 진리를 관찰함을 공가중의 3관(三觀)이라고 한다.

     ? 공제(空諦) - 삼라만상은 공무(空無)해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

     ? 가제(假諦) - 한 물건도 실재한 것이 아니지만, 모든 현상은 뚜렷하게 있다.

     ? 중제(中諦) - 모든 법은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또 공이면서 유, 유이면서 공이다.

   그리고 3관(觀)은,

     ? 공제(空諦)를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

     ? 가제(假諦)를 관하는 것을 가관(假觀),

     ? 중제(中諦)를 관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한다.

   대개 3제는 관할 바 이치에 대해 말하고, 3관은 관하는 지혜에 대해 말한다.


*공견(空見)---공(空)에 집착하는, 공에 사로잡힌 그릇된 견해. 근본적으로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므로 공병(空病)과 같은 말이다.---→공병(空病) 참조.


*공공적적(空空寂寂)---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공공적적해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했다. 준말 - 공적(空寂)

      ? 우주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비어 있어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

      ?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텅 비어 매우 고요하다는 말.

      ? 번뇌나 집착이 없이 무아무심(無我無心)이라는 뜻.

   청화(淸華)스님은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것도 분별할 것이 없으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어라 말씀하셨다. 그것이 곧 공공적적(空空寂寂)이다.---→공적(空寂) 참조.


*공관(空觀)---공관이란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본성이 없고 고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관상(觀想)하는 수행법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천태종 입장에서는 관법(觀法)의 내용을 삼종으로 나누는데, 그 천태종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의 하나가 공관이다.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수많은 현상은 모두 인연소생(因緣所生-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 함)에 따라 생긴 것으로, 그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공적무상(空寂無相)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본성이 없고, 고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관상(觀想)하는 수행법을 일컫는다. 현상계의 일체법은 다 실체가 없는 공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물든 우리들의 번뇌 또한 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고 관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을 깨닫고자 함을 말한다.---→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참조.


*공교(空敎)---불교철학을 세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삼시교판설(三時敎判說)이라 한다. 이 분류는 붓다의 교설 중에서 유식학이 최상의 법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도 유식학파의 계현(戒賢, Silabhadra) 논사가 정립한 이론으로서 제1시 유교(有敎), 제2시 공교(空敎), 제3시 중도교(中道敎, 唯識敎)의 순서로 불법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 제1시교---처음 초기로 제1시교 법문을 유교(有敎)라 한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범안(凡眼)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이 유교(有敎)이다.

     ? 제2시교---보다 높은 차원으로서 ‘일체가 다 공(空)이다.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망령된 것이고 일체가 공이요 무상이다’ 이러한 높은 차원에서 모두를 다 부정하는 단계, 이것이 공교(空敎)이다. <반야경> ? <금강경> 등의 사상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 제3시교---제3시교는 바로 중도교(中道敎)이다. 제1시교와 같이 너와 나의 실재를 고집하는 편견과 제2시교에서 말하는 바, 일체만법이 무상하다고 하는 공(空)의 한 면만을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부정해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은 유(有)의 개념과 공(空)의 개념을 초극한 중도의 묘한 이치,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불성(佛性) 경계를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공의 참뜻을 중도(中道)라 해 그 중도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제3시의 중도교(中道敎)는 유(有)와 공(空)을 동시에 드러내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해심밀경> ?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공무변처(空無邊處, akasanancayatana)---사무색처(四無色處)의 하나. akasa(허공)+ananca(끝없음)+ayatana(장소, 處)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무색계(無色界) 제1천(天)의 경지. 물질인 이 육신을 싫어하고 가없는 허공의 자재(自在)함을 기뻐하며, 공이 가없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해 태어나는 곳이므로 공무변처라 함.---→사무색처(四無色處) 참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사무색정(四無色定)의 하나. 가없는 허공을 생각에 떠올리면서 염하는 정신통일. 공무변처천에 들어가기 위해 닦고 익히는 선정을 일컫는다.---사무색정(四無色定) 참조.


*공병(空病)---공병이란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공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만 이해하는 것은 공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처음 공의 이론이 성립되고, 그 후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이런 공의 교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견(空見)에 빠지게 됐다. 이를테면 모든 것은 공이다 해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이것을 공견(空見) 혹은 공병(空病)이라고 하는데, 공사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어서 무아(無我)라고 하고,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공견(空見) 참조.

  

*공성(空性, 산스크리트어 sunyata)---공(空)의 상태. 비어 있고,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즉, 공성이란 변화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중(中)의 실천[중도(中道)]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이것은 공성, 즉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은 무상(無常), 연기(緣起), 모든 존재의 참 모습, 진여실상(眞如實相), 불성(佛性), 중도(中道) 등 여러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본래부터 굳어있고 고정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 공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마음을 내어 해탈도, 성불도 가능하고, 공성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려우나 내일의 희망이 있고, 공성은 호(好) 불호(不好)에 관계없이 만법(萬法)에 평등한 것이다. 마치 텅 빈 거울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그대로 비춰주는 것과 같다. 이러하므로 마음공부 자체가 곧 수행이며, 마음공부의 목표는 마음의 본질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다. 


*공안(公案)---공안이란 선(禪)을 시작하는 제자들의 정진을 돕기 위해 스승이 과제로 제기하는 파격적인 선문답(禪問答)으로서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인데, 주로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도 공안의 참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정도로 공안은 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공안을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화두와 공안은 다르다. 화두는 공안보다 좀 더 간결하고 핵심적이다. 즉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지만 화두는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 구(句)를 뜻한다.---→화두(話頭),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참조.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간화선에 있어서 그 핵심인 공안(公案)과 화두(話頭)를 두고 그동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엄격히 다르다.

   공안은 당대에 옛 선사들이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사건 사례에 불과하지만, 화두는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비록 공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나에게 적용되는 공부법인 것이다. 즉, 공안집(公案集)에 수록된 공안들은 과거의 사건으로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기에 놓인 것’이지만 화두는 내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요청하는 절박한 실존적 과제이다.

   간화선을 확립시킨 중국 남송(南宋) 시대의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는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지,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삿된 마귀다”라고 밝힐 정도로 화두와 공안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공양(供養, 산스크리트 푸자나/pujana)---불 ? 법 ? 승의 삼보나 사자(死者)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 원래는 주로 신체적 행위를 말해 왔는데, 나중에는 정신적, 물질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게 됐다. 즉, 독경과 예불을 함으로써 숭경(崇敬)의 뜻을 나타내는 공경공양의 정신적 태도와 시주(施主)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됐다.


*공업(共業)---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 하는데, 사회의 분위기라든가 어떤 집단의 독특한 문화유형이나 그 집단의 통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空)의 종류---공은 크게는 18공(十八空)까지 나누어진다. 18공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3권 및 <대집경(大集經)> 제54권에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1) 내공(內空), 2) 외공(外空), 3) 내외공(內外空), 4) 공공(空空), 5) 대공(大空), 6) 제일의공(第一義空), 7) 유위공(有爲空), 8) 무위공(無爲空), 9) 필경공(畢竟空), 10) 무시공(無始空), 11) 산공(散空), 12) 성공(性空), 13) 자상공(自相空), 14) 제법공(諸法空), 15) 불가득공(不可得空), 16) 무법공(無法空), 17) 유법공(有法空), 18)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으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공작명왕(孔雀明王, 산스크리트어 Mahamayun-vidyarajni)---불보살로 밀교의 독특한 명왕 중 하나이다. ‘명(明)’은 진언, 다라니를 가리킨다. 그리고 명왕(산스크리트어 Viday-raja/비드야라자)은 주문을 관할하는 왕자(王者)로서 지혜의 작용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불(方便佛)이다.

   명왕은 밀교가 성립하면서 등장했고, 5세기경 공작명왕이 최초로 등장했다. 공작명왕은 독초나 해충, 독사를 잡아먹는 공작을 신격화한 것으로 모든 중생의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해 안락함을 주는 명왕이다. 원래 명왕은 분노형으로 표현하지만 공작명왕의 형상은 분노형이 아니고 자비로운 보살형으로 공작을 타고 있다.---→명왕(明王) 참조.


*공작명왕경(孔雀明王經, Mahanayuri-Vidyarajni)---밀교 경전, 당나라시대에 불공금강(不空金剛)이 한역했다. 경전에는 뱀에 대한 공작의 적개심이 담겨 있다. 예로부터 전래돼 온 <자타카(Jataka, 本生譚)>에는 금색 공작의 호신주(護身呪)가 독사를 비롯한 갖가지 재앙을 제거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밀교적인 요소가 더해져 완성된 것이 공작명왕경이다.


*공적(空寂)---공공적적(空空寂寂)의 준말. 불변하는 고유한 실체가 없는 상태. 공적(空寂)하다에서 ‘공(空)’은 이차별(離差別), 곧 차별을 떠남을 뜻하고, ‘적(寂)’은 이변화(離變化), 곧 변화를 떠남을 말한다.

   「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몸은 공적(空寂)해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 이번 생에 잠시 인연 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 따라 갈 뿐이다.’---→공공적적(空空寂寂) 참조. 


*공화(空華)---번뇌로 생기는 온갖 망상. 본래 실체가 없는 현상세계를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꽃이 있는 것처럼 잘못 보는 일에 비유한 것이다.


*공화(空花)---공화(空華)와 비슷한 말.---→허공 꽃(幻華) 참조.


*과거칠불(過去七佛)---석가모니 그 이전에 세상에 출현했다고 하는 6명의 부처와 석가모니를 통틀어 부르는 말. 과거칠불은 장엄겁에 나타난 비바시불(毘婆尸佛)ㆍ시기불(尸棄佛)ㆍ비사부불(毘舍浮佛)의 3 불과, 현재 현겁(賢劫)에 나타난 구류손불(拘留孫佛)ㆍ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ㆍ가섭불(迦葉佛)ㆍ석가모니불 등의 네 분의 부처님을 합해 일컫는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어서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은 불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불타는 오직 석가모니 한 사람일 뿐이며, 나머지 6명의 불타는 대승불교에서 과거불 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창작된 부처이다.

    ※장엄겁(莊嚴劫)---과거ㆍ현재ㆍ미래의 3대겁(三大劫) 가운데서, 현재를 현겁(賢劫), 미래를 성수겁(星宿劫)이라함에 대해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이라 함.


*과해(果海)---부처의 경지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국 화엄종의 제4조인 청량 징관(淸凉 澄觀, 738~839)조사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말을 떠나있다고 했으며, 또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마땅히 가히 설할 바 없다”고 했으며, 또 “과해(果海)는 생각을 떠나있으면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화엄경>은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현보살을 통해서 보인다.

       ※성해(性海)---변하지 않는 진리나 청정한 본성을 바다에 비유한 말. 진리의 세계.


*곽시쌍부(槨示雙趺)---붓다가 쿠시나가라(ku?inagara)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지 이미 칠일이라서 입관했는데, 가섭이 늦게야 돌아와서는 관의 주위를 세 번 돌며 슬피 울자 붓다께서 두 발을 관(棺) 밖으로 내보임으로써[槨示雙趺] 붓다의 마음을 가섭에게 전했다는 고사. 이는 선종에서 가섭이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인용되는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그 곳 숲에는 사라수가 둘씩 쌍으로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라 한다.

   붓다는 중인도(中印度)의 구시나가라 라는 성(城)밖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라는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그 언덕에는 사라(sala)라는 나무가 네 쌍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쌍 팔쌍(四雙八雙)의 사라수가 있었는데, 그 나무 사이에서 쉬고 계시다가 열반하셨다.

   이 때 붓다의 수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기사굴산이라는 곳에서 선정(禪定)을 닦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의 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세존께서 몸이 쇄약해져서 입적(入寂)을 알리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가섭은 바로 신통력으로 곧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망스럽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 7일간을 걸어서 발제하에 도착했다. 가섭존자는 곧 널을 돌면서 널 앞에 경례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제 부처님을 대하니 어떤 면으로 보아도 열반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데 제가 경례를 드린 것에 대한 표시를 하여 주소서.”라고 발원을 했다. 그 때 부처님의 두 발이 널 밖으로 나왔다. 그 발에서는 천개의 해가 환하게 조명한 것과 같이 밝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발이 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러한 부사의한 경지를 곽시쌍부(槨示雙趺)라 하고 이에 대해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영혼의 근원은 본래 담적(湛寂)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고 현재도 없다. 마음의 묘체(妙諦)는 신령스럽고 밝은 것인데 어찌 생(生)과 사(死)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 발제하의 언덕에서 부처님이 널 밖으로 두발을 보이실 수 있었느니라.”


*관(觀)과 견(見)

      ? 견(見)---눈으로 보는 것→견학

      ? 관(觀)---마음으로 보는 것,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관찰

      ? 간(看)---마음을 거치지 않고 손이 먼저 나가는 것→간호사

      

*관견(管見)---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竹筒)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아득하다. 즉, 중생들에게 세상은 모두 나(我)의 이미지(相)로만 존재한다. 중생은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불교는 이와 같은 세속의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올라 거기서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을 권고하는 종교이다.

     ※조감(鳥瞰)---새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보는 것.


*관륵(灌勒)---백제 승려. 백제 무왕 3년(602)에 천문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술(遁甲術) ? 방술(方術) ? 의학 분야 등의 책을 일본에 전했으며, 삼론종(三論宗)을 강하고, 일본 최초의 승정이 돼, 일본 불교계의 지주가 됐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십육관경(十六觀經)>, <관경(觀經)>이라고도 한다. AD 424년에 서역 출신의 역경승 강량야사(畺良耶舍, 산스크리트어 k?laya?as/칼라야사)가 한역한 것이 전하고 있으며, <아미타경>, <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의 하나로 우리나라 정토신앙의 중심 경전으로 유통되고 있다. 

   부처님 생존 당시 인도 마가다국의 아사세(阿?世)태자가 부왕인 빈비사라왕을 가두어 왕위를 찬탈했으므로 모후인 위제희 왕후가 몰래 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했다. 그것을 알아챈 아사세태자가 모후인 위제희 왕후마저 옥에 가두었다.

   이에 왕후는 석가모니가 있는 곳을 향해 지성으로 예배하고 교화해 주기를 빌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극락세계를 보여주고 16관법을 일러주어 왕비와 시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했다. 왕비는 16관법 등의 법문을 듣고 생사를 초월한 무생인(無生忍)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500인의 시녀들은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경의 중심내용을 이루고 있는 16관법은 지는 해를 보고 극락세계를 관하는 일상관(日想觀), 극락세계의 대지가 수면이나 얼음처럼 평탄함을 관하는 수상관(水想觀) 등의 16가지 관법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정토신앙이 성행하면서 널리 행해졌던 관법이다.

     ※무생인(無生忍)---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준말---→무생법인 참조.


*관문(觀門)---마음으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하니 관문이란 마음의 문이란 말이다. ‘문(門)’이라고 비유하는 까닭은 관하는 것은 법문(法門)에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나 부처, 정토 등을 관하는 것은 법문(法門)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므로 관문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문이란 관법(觀法)과 같은 말로서 법을 관찰한다는 말이다. 마음의 본성이나 진리를 자세히 주시하는 관법 수행,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하는 수행법을 일컬음이다.

   또한 관문이란 천태종에서 말하는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천태종에서 세운 6종 선관(禪觀)인 6묘문(妙門)의 하나란 말인데, 천태의 사상체계는 이론체계인 교문(敎門)과 실천체계인 관문(觀門)으로 구성돼 있다. 교문과 관문을 하나로 하면서 완벽한 조화의 하모니를 이루어 거대한 대승사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든 사람이 천태대사 지의(智?)이다.---→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 참조.


*관문상(慣聞想)---누구나 다 아는 쉬운 것이라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것쯤이야 다 아는 것인데’ 하듯이 함부로 용이심(容易心)을 내는 것을 말한다.---→반대말 ; 현애상(縣崖想) 참조.


*관법(觀法)---불교의 정신적 수도의 한 방법. 일종의 관조(觀照)하는 방법이다.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하는 수행, 마음으로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등이다. 이 관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 분류하면 진리(法)를 관조하는 관법(觀法)과 마음을 관조하는 관심(觀心)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천태종에서 말하는 십승관법(十乘觀法), <관무량수경>의 16관법(觀法) 등이 있다.---→십승관법(十乘觀法), 십육관법(十六觀法) 참조.


*관불(灌佛)---불상을 물로 깨끗이 씻는 것. 관욕(灌浴), 욕불(浴佛)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龍)이 갓 태어난 아이를 향수로 목욕시켰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부처님의 형상을 깨끗이 씻으면 자신의 마음에 쌓인 죄와 번뇌를 씻고 맑고 깨끗해지며 복을 누리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관상(觀想)---‘관(觀)’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일정한 경계를 응시하는 것이고, 관상이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뚜렷이 그리는 심상화(心想化)나 상상을 의미한다. 그렇게 지속적인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그 결과 대상 사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관상이란 내적 관조(觀照)를 통해 진리를 직관적(直觀的)으로 인식하는 행위를 말한다.


*관상염불(觀像念佛)---정토종 4종 염불의 하나. 단정히 앉아 순일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며 생각하는 것. 이리하여 삼매에 들면 분명히 부처님을 볼 수 있고, 한 부처님을 보게 되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닦으면 그이의 죄장(罪障)이 소멸돼 그 불토에 왕생한다고 한다. 즉, 이 염불을 닦는 이는 죽은 뒤에 그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4종염불이란---정토종에서 추구하는 칭명(稱名)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實相)염불, 관상(觀想)염불의 네 가지 염불법을 말한다.


*관상염불(觀想念佛)---정토종 4종 염불의 하나. 정토종에서의 염불은 아미타불에 생각을 응집시켜, 그 광대한 대비원력에 의해서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행이다. 이러한 염불의 행에는 아미타불의 법신(法身)을 염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과 아미타불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과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다.

   그리고 관상염불(觀想念佛)이란 부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속으로 살피고 생각하는 것인데,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통일해 부처님의 단정하고 장엄한 상호의 모양 등을 연상하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공덕에 생각을 응집시키는 염불법이다.


*관상염불(觀相念佛)---관상염불(觀相念佛)은 지관(止觀)에 의지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법이며, 고요한 가운데 선을 행하는 정선문(定善門)이다. 관상염불은 반드시 공(空)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공관(空觀)이 확립되고 순리발심(順理發心)해야 지관으로 보신불의 경계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상염불(觀相念佛)은 보신불의 경계를 깊이 관찰함으로써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하고 법신(法身)의 경계를 감득해 ‘일체 경계는 일심(一心)인 지혜’를 증득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때문에 관상염불을 염불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觀)’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일정한 경계를 응시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정토의 경계이다. 염불은 아미타불을 덕상(德相)을 생각(念)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염불은 정토의 경계를 관하고 아미타불의 덕상을 염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유념유상(有念有相)의 도라고 부른다. 관상을 심화함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쉬고 법(法)을 받아드려 관하는 마음과 경계가 일치되면 밝은 거울과 같이 무심한 경계를 거두어들이는 심적 상태를 체험하는데 이것을 관불삼매(觀佛三昧)라고 부른다. 이 관불삼매로써 정토의 경계를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정선문(定善門)---정토의 수행문에는 정선문(定善門)과 산선문(散善門)이 있는데, 정선문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염불하는 것이요, 산선문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산란한 마음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닦으며 염불하는 것이라 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구마라습은 관세음(觀世音), 현장은 관자재(觀自在)라 번역했고, 줄여서 관음(觀音) ? 관세음(觀世音) ?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라 하는데, ‘아바로키타’는 관(觀)하다는 뜻이고, ‘이스바라’는 신(神) 또는 자재천(自在天)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관세음은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는 뜻이고, 관자재라 함은 지혜로 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관자재(觀自在)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편이지만 큰 차이가 없으므로 문제될 것은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관세음보살로 일반화돼 있다.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AD1세기말 무렵이며, 먼저 인도 북부 지방에서 성했고, 6세기경에는 모든 불교사원에서 관음상을 모실 정도로 널리 퍼졌다. 중국에 전해진 것은 2세경으로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비교적 일찍 전해졌다.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보살이며, 현세에 이익을 주는 보살로 알려져 신도들에게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천수관음(千手觀音) 혹은 32면관음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머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을 원통전(圓通殿) 또는 관음전(觀音殿)이라 하는데, 그 절의 중심 전각일 경우 원통전이라 하고, 부속 전각일 경우 관음전이라 한다.


*관심(觀心)---관심이란 참선과 같은 수행으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觀照)해 그 본성을 밝히는 것인데, 마음이 모든 것의 중심이기 때문에 마음을 관조하면 일체를 관조하는 것과 같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사물에 대한 올바른 정찰(正察)은 해탈에 이르는 방도로서 중요시돼 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수행의 의의를 지닌다. 수행이란 흩어진 마음 즉 방심(放心=散心)을 챙겨서 관심(觀心)을 하는 것이다.

   우주 사이의 모든 사(事)와 물(物)이 항상 변화하고 그 자체로서 고유한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자태로 있는 원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의 본성을 깨달았다고 하면 모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선가의 스님들이 좌선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찾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심론(觀心論)---① 수(隋)의 지의(智?)가 지은 관심론. ② 당(唐)의 신수(神秀)가 지은 관심론이 있으나 ③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이 가장 유명하다.

   2조 혜가(慧可)가 달마대사께 여쭈었다. 불도를 구하려면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요긴한가라고 묻자, 달마대사는 관심법이 가장 요긴하다고 대답했다. 마음을 관하는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심법이란 자기 마음을 언제든지 잊지 않고 들여다보고 비춰 보는 방법으로서, 이 법 말고 다른 법은 없다고 했다.


*관음경(觀音經)---<법화경(法華經)>의 제25「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따로 떼 내어 독립된 경으로 만든 것이다. 5호16국의 하나인 북량(北?)의 지배자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인도 출신의 유명한 역경승 담무참(曇無讖, 358~433)이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라고 권했고, 이 경을 읽고 건강을 회복한 저거몽손이 보문품을 널리 유통시키면서 <관음경>이라 이름 했다.


*관음선종(觀音禪宗)---숭산(崇山, 1927~2004)선사는 미국에 불교를 선교함에 있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인들에게 알맞은 한국불교를 새로이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조계종 소속이면서 미국에 선교했던 숭산선사가 설립한 관음선종이다.

   관음선종의 특징은  미국적 환경에 맞추어 재가불자도 승복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조계종 계율이 금욕을 요하지만 관음선종에서는 기혼, 미혼의 재가자에게 다 스님의 계를 내려주고 선사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관자재(觀自在)---관세음(觀世音)과 같은 말.---→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조.


*관정(灌頂, 561-632)---→인명, 장안 관정(章安灌頂) 참조.


*관정(灌頂)---밀교에서 행하는 일종의 물에 의한 세례의식이다. 밀교에서 여러 수행을 마친 승려가 아사리의 지위에 오를 때 행하는 의식이다. 또 아사리가 제자 승려에게 법을 전할 때 행하는 의식을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바닷물을 머리에 부어서 축하하는 의식을 관정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관조(觀照)---가장 불교적인 용어 중 하나이다. 본래의 뜻은 고요한 마음과 지혜로써 사리(事理)를 관찰하는 일로서 대상을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나 논리적사변(論理的思辨)에 의하지 않고, 반야의 지혜로써 사리를 바르게 비추어 보아 밝고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결국 관조는 정적 ? 지적 ? 객관적인 직관(直觀)을 뜻한다.


*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와 함께 삼반야라 한다. 관조반야는 현상계의 실상(實相)을 관조하는 지혜를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상은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나아가 진실 ? 불변의 이치, 곧 모든 존재의 진실한 존재양식을 말한다. 따라서 실상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일여(一如) ? 실성(實性) ? 열반(涅槃) ? 무위(無爲)와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현실과 본질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조화된 세계로 보아서, 현상 즉 실재, 차별 즉 평등으로 보는 것이 관조이며, 이러한 관조가 바로 반야지(般若智)라고 한다.

   자동차 정비공이 엔진 소리만 듣고 무엇이 고장인 것을 정확히 꼬집어 내어 고칠 때, 이것이 일종의 관조반야이다. 엔진 소리는 현상이고 고장난 부분은 실상이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관조반야는 생명의 실상을 관조해서 알아내는 지혜인 것이 다를 뿐이다.---→실상반야(實相般若) 참조.


*광도중생(廣度衆生)---중생에게 널리 법을 펼치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


*광명진언(光明眞言)---광명진언은 바이로차나(Vairocana, 비로자나불)법신의 진언이고, 모든 불보살의 총주(總呪)이며, 그 의미도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대광명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 모두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얻게 하는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며, 어두운 카르마(業)를 몰아내는 진언이다. 악귀나 잡귀도 광명진언 속에서는 빛이 어두움을 소멸시키듯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주문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이고, 그 뜻은 “비로자나 법신의 광명으로 무명과 업장을 걷어내고 자성의 밝은 본성이 드러나게 한다.”이다. 따라서 수행 중에 장애가 생길 때, 과거의 습관이나 업장을 조복받기 위해서, 또는 과거의 잘못을 참회할 때 이 진언을 한다.

   ① 옴(OM)---모든 진언의 근본 음이며, 부처님께 귀의한다.

   ② 아모카(amogha)---불공성취여래이시여! 성취하지 못하는 바 없는 부처님이시여!

   ③ 바이로차나(vairocana)---비로자나 부처님(大日如來).

   ④ 마하무드라(mahmudra)---마하는 큰(大), 무드라는 도장 인(印)이므로 대인(大印)으로 번역된다. 큰 도장(대수인/大手印)을 지니신 분이여!

   ⑤ 마니(mani)---마니보주(摩尼寶珠=如意寶珠)를 지니신 분이여! - 보생여래를 뜻함.

   ⑥ 파드마(padma)---연꽃을 지니신 아미타여래.

   ⑦ 즈바라(suvara)---생사윤회의 원인인 미혹의 어둠을 한 순간에 없애주는 광명.

   ⑧ 프라바를타야(pravarttaya)---전변(轉變)한다는 뜻. 나의 본심, 보리심, 진심, 일심을 개발해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뜻.

   ⑨ 훔(hum)---완성, 성취의 의미를 지닌다. 진언의 마무리 근본 음. 부처님께 감사와 귀의를 다짐하는 소리.

     ※총주(總呪)---모든 불보살이 의지하는바 신령스러운 진언이란 말.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대일여래의 딴 이름. 그 몸이 광대해서 법계의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광음천(光音天)---빛을 말(목소리)로 삼은 것이라는 뜻이다. 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의 여섯째 하늘. 이 하늘 중생은 음성이 없고, 말을 할 때 입에서 맑은 빛을 내는데, 그 빛이 말이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할 때 입으로 광명을 내어 말의 작용을 하므로 광음천이라 한다.


*광통율사(光統律師)---AD5~6세기 중국 북위(北魏)의 승려. 당시 북위에 머물던 달마대사(達磨大師)을 질투해 보리류지(菩提流支)와 더불어 달마대사를 독살했다고 한다. 헌데 달마대사는 독살 당한 뒤 관속에 두 짝의 신발만 남기고 서천(西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괴고(壞苦)---삼고(三苦)의 하나. 애착을 느끼던 것이 무너져 없어지는 데에서 오는 고통.---→삼고(三苦) 참조.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와 더불어 송대의 선종을 대표하는 대선사이다. 굉지 정각선사는 조동종(曹洞宗)의 제10대 조사로서 당대 말기에 형성된 조동의 가풍에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가미해 조동종의 묵조선을 대성했다. 이것은 임제종(臨濟宗) 양기파의 대혜 종고(大慧宗?)에 의해 형성된 간화선(看話禪)과 거의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이후 선종의 역사에 큰 기여를 했다.


*교관겸수(敎觀兼修)---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주장으로, ‘교(敎)’는 교리와 형식을, ‘관(觀)’은 참선과 수양을 의미해서, 교리체계인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교관겸수사상은 고려시대 천태종을 중심으로 실천됐으며, 지눌(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의 뚜렷한 전통으로 전승됐다.


*교상판석(敎相判釋)---교상판석에서 ‘교상(敎相)’이란 가르침의 모습, 즉 붓다가 한평생 설한 모든 가르침의 실상을 말하고, ‘판석(判釋)’이란 판단하고 해석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란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고 가르치신 경전(經典)을 시대별로 혹은 그 뜻의 깊고 얕음에 따라 분류해서 경전의 의미와 내용 등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천태종의 오시교판(五時敎判), 화엄종의 오교(五敎) 등이 대표적인데, 교상판석의 목적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종(宗)의 경전이 최고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 데에 있었다.

   인도에서는 초기불교(원시불교) 다음에 부파불교가 발달하고, 그 다음에 대승불교가 흥기했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에는 이러한 인도불교의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초기불교 경전과 부파불교 경전, 그리고 대승불교 경전들이 순서 없이 마구 섞여 한꺼번에 들어왔다. 따라서 경전 간에 모호한 차이도 있고, 상호 모순도 있으며,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의 낯선 문화라서 난해한데다가 경전마저 뒤섞여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어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중국인 나름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불교경전을 분류한 것을 교상판석이라 한다. 줄여서 교판(敎判)이라 약칭하기도 하는데, 경전 성립의 순서는 무시한 채 경전의 성격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교상판석은 중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과 같은 문헌학적인 연구가 전무했던 당시 중국에서 과학적 근거 없이 종파별로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했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의 독자적 문헌조작이라는 혹평을 받아 지금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되고 있다.---→오시교판(五時敎判=오시팔교), 오교(五敎) 참조.


*교외별전(敎外別傳)---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말한다.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의 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했다.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등과 더불어 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교장총록(敎藏總錄)---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중심이 돼 고승들이 쓴 장 ? 소(章疏)를 모아 편찬한, 소위 속장경(續藏經)으로 일컬어지는 불경 해석서이다. 원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고, 줄여서 교장(敎藏)이라 한다. <교장총록>은 서역 ?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의 정본(正本) 이외의 주석서인 장 ? 소(章疏)만을 수집해 편찬했으므로 정식 대장경은 아니다.   

   초조대장경이 완간된 뒤 고려 문종(文宗) 대에서 선종(宣宗) 대까지 25년의 기간을 두고 초조대장경에 누락된 국내는 물론 송(宋) ? 요(遼) ? 일본(日本) 등지까지 산재한 주석서를 최대한으로 수집한 대단한 불경 해석서이나 몽고 침략 때 모두 소실돼 현재 전하지 않는다.


*교종(敎宗)---불교에서 교종이란 경전(부처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종파들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입된 초기에는 주로 대승불교의 교종 중심으로 발전했고, 중국에 있어서도 당(唐)나라 시대까지는 교종 일색이었다.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만이 불교 신행의 근거이므로 법보(法寶)인 경전을 신행의 의지처로 삼았으므로 학문적 소양이 있어야만 접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로 상류층들의 지적 여가이자 교양 영역으로 평가를 받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해서는 국가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서민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귀족불교 내지는 의식행사 중심의 불교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보니 주요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교파가 생겨나게 됐는데, 경전 중에서도 <화엄경>이 최고 경전이라 해서 이를 소의경전으로 해서 화엄종이 생겨났고, <법화경>이 부처님의 진실한 의중(意中)과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라 해서 이를 소의경전으로 해서 법화종, 천태종 등이 생겨났다.


*구게왕국(Guge, 古格王國)---구게왕국은 9세기 티베트의 토번(吐蕃)왕국이 분열된 뒤 성립된 지방 정권으로 비교적 세력이 강성한 국가였다고 한다.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마(?達瑪)가 죽은 뒤 벌어진 수차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왕자가 아리(阿里) 지역으로 도피해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세 아들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왕국, 푸란왕국, 그리고 구게왕국이다. 중심지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 지금의 티베트와 라다크 중간 지대였다.

   구게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왕국은 700여 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강성했을 때는 서쪽으로 캐시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배했다고 한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산에 토굴을 파고 살았으며, 이런 독특한 지형에 적응해 살면서도 그들이 꽃피운 불교미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700년을 이어오던 왕국은 1635년 라다크 군대의 침공을 받고 패망했다.


*구경(究竟)---최고의 경지를 이룩한 것을 일컫는다. 헌데 그 외에도 불교 문헌에 있어서 한역어(漢譯語)로서의 구경(究竟)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뜻을 지닌다.

   ① 성취, 완성, ② 완전한, 궁극에 도달함. ③ 마침내, 결국, ④ 최종의 극치, 최상, 그 위에 더 없음. 철저하게 체득함 등의 뜻이 있다.---→구경위(究竟位) 참조.


*구경각(究竟覺)---보살의 수행이 원만해 궁극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경지를 이른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일컫는다.

  

*구경위(究竟位)---유식설(唯識說)의 수도 5위(修道5位), 즉 유식수행의 5단계[5위(位)]의 하나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지위(경지)를 말한다.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진리를 증득해 최종의 불과(佛果)에 도달한 지위이다.


*구공(俱空)---삼공(三空)의 하나. 삼공은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을 말한다.  

    ? 아공(我空) - 연기에 의해 지 ? 수 ? 화 ? 풍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임시적으로 결합된 가짜 ‘나’를 두고 실재한다고 고집하는 아집(我執)을 부정하는 것이고,

    ? 법공(法空) - 객관세계의 일체법이 공함을 모르고 여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깨뜨리는 것이며,

    ? 구공(俱空) - 이러한 아공, 법공마저도 버리고 초월해서 공(空)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契合)함을 말한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산스크리트어 Gunabhadra, 394~468)---중부 인도 출신의 승려. 공덕현(功德賢)이라고도 한다. 바라문 출신이었으나 대승불교를 공부해 435년에 스리랑카를 경유해 해로로 남조의 송(南宋 = 劉宋)으로 와서 경전 번역에 종사해, <잡아함경(雜阿含經)>, <승만경(勝?經)>, <능가경(楞伽經)> 등을 번역했다.


*구두선(口頭禪)---수행은 하지 않고, 선(禪)에 대해 장황하게 말만 늘어놓는 것을 말함. 조사의 어록(語錄)들에 담겨있는 구절의 참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언구(言句)에 현혹돼 마치 깨달음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말한다. 입으로만 수행하는 선이라고 매도하는 선어(禪語)인데, 이 구두선의 폐해 때문에 야호선(野狐禪)이니 앵무새선이니 하는 유사한 선어들도 나왔다.---문자선(文字禪) 참조.


*구루(Guru)---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생님을 통칭하는 용어이고, 서구 사회에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철학과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구루요가(Guru Yoga)---‘구루(Gur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의 스승(mentor)을 의미하며, 구루요가는 스승과 하나 되기 위한 명상이다. 즉 명상으로 스승을 심상화(心象化)하는 수행법이 구루요가이다. 스승이 나의 속으로 들어오기를 청하고, 그의 신성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며, 그와 하나로 결합하는 수행으로 상상 속에서 스승과 결합하면, 나와 스승은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내가 스승이 되고, 내가 붓다가 된다.

   이상으로 볼 때, 구루요가란 참된 스승을 찾아서 스승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리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구루(스승)의 본성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의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계합되는 방법을 얻는다. 티베트 불교 수행의 진수는 ‘구루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류중생(九類衆生)---중생(衆生)은 인간에만 국한될 수는 없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며, 요새 말로는 생물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물 중에서도 식물은 제외되며 동물만을 지칭한다(우리말의 짐승이 衆生에서 전화된 것임).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중생 즉 “사뜨바(sattva)”를 9종류로 분류해 말한다. 구류중생은 크게 세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첫 카테고리는 태어나는 방식에 관한 분류로 4종류가 들어간다.

    1)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2) 태생(胎生)은 자궁의 태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3) 습생(濕生)은 물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물고기, 모기 등의 곤충류가 이에 속한다.

    4) 화생(化生)은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와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로서 다음의 두 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색(有色)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이며,

    2) 무색(無色)은 형태가 없는 신(神), 귀신과 같은 것들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지각의 유무로 분류되는 것으로서 마지막 3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상(有想)은 오관(五官)의 지각을 가진 존재이며,

    2) 무상(無想)은 물리적 오관(五官)의 지각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이다.

    3)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 가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신(神)들이다. 일체중생의 종류를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아홉 가지로 분류함을 말한다.


*구리태자(拘利太子, 산스크리트어  Koliputra)---가비라성 곡반왕(斛飯王)의 맏아들로서 붓다의 사촌. 붓다 성도 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교화한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마하남(摩訶男)을 일컫는다.


*구마라다(鳩摩羅多, 산스크리트어 Kumar?labdha, ?~AD 22)---대월지국(大月氏國) 출신의 학승으로, 인도불교의 19대 조사(祖師)이다. 8가지 신통력이 있어서 제2의 붓다로 불리기도 했다. 브라만 출신으로 출가해서 승가야사(僧伽耶舍)에게 배우고, 여러 논(論)을 지어 포교에도 힘썼다. 일찍이 경전의 깊은 뜻을 연구, 하루에 3만 2000개의 말을 외어 썼다고 하며, 경전의 깊은 뜻을 연구해 <일출론(日出論)>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성실론(成實論)>을 지은 하리발마(訶梨跋摩)와 사야다(?夜多)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


*구마라습(鳩摩羅什, Kum?raj?va, 344~413)---아버지는 인도인이며, 어머니는 구자국(龜玆國) 왕의 누이였다. 태어난 곳은 구자국(구차)으로서 현재 중국 신강성 위그루 자치구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는 7세에 출가해 9세 때에 대승을 닦았으며, 북인도 카슈미르 지방에 있던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스승들에게서 배움을 거듭하고 구자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대승불교의 선양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서역제국은 물론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구마라습을 데려올 욕심으로 383년 여광(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치게 했다. 그리하여 여광이 구마라습을 데리고 귀국 길에 올랐으나 그 사이 전진이 패망했으므로 여광은 고장(姑臧)이란 곳에 머무르면서 독립해 왕위에 올랐다. 이에 구마라습도 여광에게 붙들려 15년을 밑바닥 인생을 살며 고생을 했으나 401년 후진(後秦=姚秦)의 요흥(姚興)이 여광을 쳐서 구마라습을 데리고 장안으로 와서 국빈으로 대우했다.

   그는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미타경> 등의 여러 대승경전과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성실론> 등 논서를 비롯해 경전과 논서 70부 384권을 역출함으로써 중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위대한 역경승이었다. 특히 대승논부는 이때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고, 그는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구사론(俱舍論)---4~5세기 무렵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이 저술한 불교 논서. 원명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으로 교리의 백과사전식 해설서이며, 소승불교의 기초적 논부(論部) 가운데 하나로 중시돼 왔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아비달마 사상을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특히 많은 불교술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불교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로마 가톨릭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견돼왔다.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에서 활약한 진제(眞諦, 499~569)가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했고, 줄여서 구사석론(俱舍釋論)이라 했으며, 당나라의 현장(玄?, 602?~664)이 구사론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했다.


*구산(九山 秀蓮, 1909∼1983)스님---현대한국불교 수행자들의 사표. 송광사,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금당선원 등에서 수십 년 안거를 행한 선사다. 53년 통영미래사 창건, 62년 동화사 주지, 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한 후 초대방장을 맡았다. 73년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한 이래 79년 미국 LA 고려사, 82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 미국 카멜 대각사를 개원하는 등 해외포교에 진력해 큰 성과를 남겼다. 이와 함께 69년 불일회를 창립해 총재에 취임한 후 국내 대중포교 현대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효봉스님의 법맥을 이은 구산스님은 한국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고, 송광사 중창불사를 이뤄냈다.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성욕, 식욕 등과 같은 선천적이며 원천적인 번뇌를 말하며,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아주 끈질긴 번뇌이다. 반대말 - 후천적인 번뇌[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구생연(俱生緣, 팔리어 사하쟈따 빠짜야/sahajata-paccaya)---함께 일어나는 조건. 마음은 혼자서는 절대로 일어 날 수 없다. 반드시 마음부수와 함께 일어난다. 즉 왕이 가면 신하가 뒤 따르는 것처럼 마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마음부수 즉 마음의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함께 생긴 조건이 구생연(俱生緣)이다.


*구업(九業)---불교에서 말하는 9가지 업. 삼계(三界) 중에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각기 존재하는 작업(作業)ㆍ무작업(無作業)ㆍ비작비무작업(非作非無作業)과 무색계의 무작업ㆍ비작비무작업ㆍ무루업(無漏業)의 9종을 말한다.

    ? 작업(作業)은 뜻을 결정한 뒤에 외부로 표현되는 신(身)ㆍ구(口) 2업, 곧 언어ㆍ동작을 말한다.  ‘업을 짓는 행위’를 일컫는다.

    ? 무작업(無作業)은 몸과 입으로 외부에 나타난 행위인 표업(表業)이 밖에 나타나지 않고 각기 선(善)이나 악(惡)한 업을 상속하는 것이다.

    ?  비작비무작업(非作非無作業)은 의업(意業)인 마음의 활동 또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 무루업(無漏業)은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난 언어ㆍ동작ㆍ의념(意念)을 말한다.


*구오연(具五緣)---중국 수나라 시대에 천태지의(天台智?, 538-597)대사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추어야 할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그 다섯 항목 중의 하나가 구오연이다. 그리고 그 다섯 항목에는 다시 각각 5가지 실천항목이 들어 있어서 25방편(方便)이 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선 수행의 준비를 위한 25방편이다. 출가자든, 세간의 중생이든 수행에 들기 전에 읽어보고 실천해야할 사항들이다.---→25방편(方便) 참조.

   구오연은 참선 수행을 하기 위한 기초 조건으로서 이 기초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어떠한 참선 수행의 뜻을 세우더라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수행방편의 처음에 이것을 세우는 것이다. 구오연의 5가지 실천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지계청정(持戒淸淨) - 계율을 지켜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다. 

     2) 의식구족(衣食具足) - 입을 옷가지 약간과 최소한의 음식을 갖추는 것. 

     3) 한거정처(閑居靜處) - 시끄럽지 않은 조용한 수행 공간을 정한다.

     4) 식제연무(息諸緣務) - 일상의 업무, 친인척 등 모든 생활하던 인연들에서 일단 떠나라.

     5) 득선지식(得善知識) - 수행을 지도해 줄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조주무자(趙州無字)’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선사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없다(無).”고 한 것에 대해,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타파하게 되면 견성(見性)한다고 했다.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싸움질 좀 그만해라! 있으면 어쩔 것이고, 없으면 어쩔 것이냐? 부질없는 망상 집어치워라! 그래도 떨쳐버릴 수 없다면 그 속에 들어가 보거라. 일달 들어가면 60일 정도 있어야 나온다. 누구든 개새끼가 돼 나온다. 이 얼마나 통렬하게 비꼬는 말인가.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다, 없다’고 하는 분별심을 먼저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개에게 불성이 있고, 없고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쓸데 없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네가 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구족(具足)---빠짐없이 고루 갖추었다는 뜻.


*구족계(具足戒, 산스크리트어 upasapanna)---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을 말한다. 모든 계가 완전히 구비됐다고 해서 구족계(具足戒)라 한다. 비구나 비구니임을 구족(具足)하는 일 또는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戒)를 말한다. 즉 교단에서 비구,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계가 구족계로서, 모든 계가 완전히 구비됐다고 해서 구족계라 하며, 불교 율전인 〈사분율(四分律)〉에는 비구는 250계가 있으며, 비구니는 346계가 있다.

   불교에서 ‘출가’란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는 뜻이며, 구족계를 받게 되면 정식 승려가 된다. 비구계(比丘戒) ? 비구니계(比丘尼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구족계를 받으려면 20세 이상 70세 미만의 승려로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으며, 죄과가 없는 이로서, 사미계(沙彌戒) 또는 사미니계(沙彌尼戒)를 받은 뒤 3년이 경과해야 한다. 구족계를 받는 장소는 통도사 계단, 해인사의 계단, 범어사 계단과 같이 계단(戒壇)이 있는 곳이라야 한다. 


*구종식(九種食)---9가지 음식. 처음 하나는 육체를 단련하는 음식이고, 나머지 8가지는 심신을 북돋우거나 수련하는 것으로 식(食)이라 하나 음식은 아니다.

     1) 단식(段食) - 씹어서 먹는 형상이 있는 먹을거리. 사람이나 짐승이 먹는 음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촉식(觸食) -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는 감촉에 의해서 몸과 마음을 기르는 것.

     3) 사식(思食) - 사상이나 희망에 의해 몸을 충족시키는 것.

     4) 식식(識食) - 마음의 힘으로 능히 몸을 부지하는 것.

     5) 선열식(禪悅食) - 수행하는 수행자가 그 힘으로 몸을 지탱하는 것.

     6) 법희식(法喜食) - 불법에 의해서 몸과 마음을 기르는 것.

     7) 원식(願食) - 소원에 의해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

     8) 염식(念食) - 수행하는 사람이 지혜를 증익(增益)하는 것.

     9) 해탈식(解脫食) - 불도를 증득한 이가 열반의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


*구중(九衆)---비구ㆍ비구니ㆍ사미ㆍ사미니ㆍ식차마나ㆍ우바새ㆍ우바이의 7중(衆)에 출가(出家)ㆍ출가니(出家尼)를 더한 것. 출가ㆍ출가니와 비구ㆍ비구니와의 구별은 확실하지 않음.


*구지(九地)---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界)를 9종으로 나눈 것. 삼계(三界) 구지(九地)에서 욕계는 육취(六趣)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말한다, 그 중 지옥, 아귀, 축생은 삼악취(三惡趣)에 속하고, 수라, 인간, 천상은 삼 선취(三善趣)에 속한다, 악업(惡業)을 지으면 삼악취에 떨어져 윤회하고, 선업(善業)을 지으면 삼 선취에 난다.


     1) 욕계오취지(欲界五趣地) - 욕계 안에 있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의 5취(趣)를 합해 1지(地)로 하고, 이들이 섞여 사는 곳이라 해서 욕계오취지(欲界五趣地) 혹은 오취잡거지(五趣雜居地)라 한다.

          ※취(趣)---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고, 그 업인으로 말미암아 끌려가서 사는 곳.

     2)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을 말함. 욕계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희(喜)ㆍ낙(樂)의 느낌을 내는 곳.

     3)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 색계 제2선천(禪天)을 말함. 정(定)에서 즐거움을 내는 곳.

     4)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 색계 제3선천. 2선(禪)의 희락을 여의고 마음이 안정돼 묘한 즐거움이 있는 곳.

     5)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 색계 제4선천. 앞의 즐거움을 여의고 청정 평등한 사수(捨受)의 생각에 안주하는 곳.  

            ※사수(捨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

     6)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 - 무색계에서 색(色)의 속박을 싫어하는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한없는 허공을 반연(攀緣)하는 선정을 닦는 곳.

            ※반연(攀緣)---인연에 의지하고 이끌림.

     7)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 - 다시 공(空)인 생각을 버리고 심식(心識)이 끝없이 확대되는 관상(觀想)에 머물러 선정을 닦는 곳. 

            ※심식(心識)---마음의 작용.

            ※관상(觀想)---내적 관조를 통해 진리를 직관적(直觀的)으로 인식하는 행위.

     8)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 식이 무변하다는 주관적인 식상(識想)마저 버리고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관찰해서 머무는 선정을 닦는 곳.

            ※식상(識想)---마음속에 형성된 어떤 개념.

     9)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 - 앞의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는 식(識)이 한없이 확대됨을 관함으로 유상(有想)이고, 다음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는 식의 비존재를 관함으로 무상(無想)인데, 그 유상을 버림으로 비상(非想)이라 하고, 그 무상을 여의므로 비비상(非非想)이라 한다. 


*9차제정(次第定)---<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이론으로 차제정(次第定)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순차적인 수행단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 혹은 팔등지(八等地)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空無邊處禪) ? 식무변처선(識無邊處禪) ? 무소유처선(無所有處禪) ? 비상비비상처선(非想非非想處禪)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팔선정을 닦은 후 다시 그 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행단계인 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불렀다. 부처님은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을 통해 중생들의 세계는 중생들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중생들의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三界)는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중생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사무색처(四無色處), 멸진정(滅盡定) 참조.


 ? 9차제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 ?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제1선)

   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제2선)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제3선)

   사선에 들면 입출식(入出息)이 그치며-(제4선) → 4선정을 닦으면 색계18천에 태어남,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제5선)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제6선)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제7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제8선) → 4무색선정을 닦으면 무색계4천에 태어남(여기까지가 8등지)

   8등지에 멸진정(滅盡定)을 더한 것이 9차제정이다. 멸진정(滅盡定)을 상수멸(想受滅) 혹은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즉 열반에 이른 것이다. 이 수행과정이 9차제정이다.


*구해탈(俱解脫)---‘구(俱)’란 두 가지의 것이 얽혀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에 의한 해탈인 혜해탈(慧解脫)과 또 하나 정(定)에 의한 해탈이다. 특히 정 중에서도 최고도의 정까지도 체험한 정해탈(定解脫)이 합쳐졌을 때에 구해탈이라 한다. 번뇌에 의한 장애나 선정에 의한 해탈의 장애, 즉 평범한 사람의 선정의 한계를 극복할 때에 나타나는 해탈이다.

   지혜의 힘에 의해 이 세상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의 문제나 타인의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있는 경지가 되고, 나아가 선정도 깊어져서, 그리하여 차츰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본래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오갈 수가 있게 되는 데까지 간다. 그리하여 멸진정(滅盡定)이라고 불리는 최고도의 선정까지 들어가면, 이른바 대우주의 생명과 일체가 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이 대우주와 일체가 돼 녹아 들어가는 듯한 선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이른바 「불타의 깨달음」을 얻는 경우를 가리켜 구해탈이라 한다. 좀 어려운 말로는 수행자가 무색정(無色定)을 얻어 해탈했을 때에는 구해탈(俱解脫)이라고 불린다.---→정해탈(定解脫) 참조.


*구화산(九華山, 해발 1,342m)---중국 4대 불교 명산의 하나로서, 중국 내륙의 산악지대인 안휘성 청양현에 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아들 김교각(金喬覺, 697년~794년) 스님이 성불하신 곳이다. 구화산 월신보전(月身寶殿)에 모신 남무대원지장왕보살(南無大願地藏王菩薩)이 바로 신라 출신 김교각 스님이다.---→김교각(金喬覺) 참조.

     ※중국 불교 4대 성지---산서성 오대산(2,893m, 문수보살 성지),  사천성 아미산(3,099m, 보현보살 성지), 절강성의 보타산(291m, 관음보살의 성지), 그리고 이곳 안휘성의 구화산(1,342m, 지장보살 성지).


*군다리명왕 (軍茶利明王, 산스크리트어 Kundali)---명왕(明王)이란 교화하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여래나 보살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신하여 나타난 화신이다. ‘명(明)’은 명주(明呪), 즉 진언(眞言)을 말한다. 군다리명왕은 오방 중 남방(南方)에 배치된 명왕이며, 머리 하나에 팔이 여덟이고 두 다리에는 12마리의 뱀이 휘감겨있다. 이 뱀은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나타낸다고 한다. 모든 아수라(阿修羅)와 악귀(惡鬼)를 항복시킨다고 하며,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명왕이다.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천수경에 나오는 보살. 보배병을 들고 있으며, 일체 고액을 제도해 주는 일을 맡아서 자비를 펴는 보살이다. 즉, 우주의 중심에서 파멸과 고통을 일으키는 악마들을 엄히 막아내고 선(善)을 굳건히 지켜가는 임무를 담당하는데, 별나라마다 침입을 일삼는 악마를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일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 급한 보살이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편입된 대표적인 보살이다.


*권교(權敎)---여기서 ‘권(權)’은 가(假) 또는 방편(方便)이라는 뜻으로서 방편을 사용할 때 쓰는 말이다. 권교란 대승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방편으로써 가르침을 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권교는 대승의 진정한 가르침인 실교(實敎)에 대칭되는 말이다.


*권지(權智)---부처와 보살이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


*권청(勸請)---일반적으로는 신불(神佛)의 내림(來臨)을 비는 것을 권청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선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에게 설법을 해 주기를 원하거나 열반(涅槃)에 들려는 부처님에게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원하는 것을 일컫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범천왕(梵天王)이 그 깨달음의 경지를 널리 대중에게 설해 주시기를 권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권현(權現, 산스크리트어 avatara)---화신(化身), 권화(權化)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보살 등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불ㆍ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부러 신(神)으로 변해 나타나는 것.


*귀자모(鬼子母)---어린아이를 수호하는 신. 본래 아이들을 잡아먹는 나찰귀신이었으나 부처님이 그녀의 막내아들을 감추고 교화한 결과 부처님께 귀의했다.


*귀의(歸依, 산스크리트어 namas)---부처님이나 스님에게 귀순해 의지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한역해서 남무(南無)로 표현한다. 남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namas, 즉 ‘돌아가 의지함[歸依]’을 뜻하는 말로서 한자로 옮길 때 소리에 가깝게 ‘남무’라고 옮겼다. 그런데 ‘남’보다 ‘나’가 원음에 가까우므로 ‘나무’라 읽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규기(窺基, 632~682)---당나라시대 법상종(法相宗)의 개조. 자은대사(慈恩大師) 혹은 대승기(大乘基)라고도 한다. 17세에 출가, 현장(玄?)의 제자가 됐으며, 28세 때 스승을 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했고, 반야심경의 주석서인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과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등을 저술했다.


*극락(極樂, 산스크리트어 sukhavati/수카바티)---극락세계ㆍ극락정토라고도 부름.

   ①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간 곳에 있다는 아미타불의 정토.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法藏) 비구의 이상을 실현한 국토이다. 아미타불이 지금도 있어 항상 설법하며, 모든 일이 원만 구족해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을 일컫는다.

   ② 극락이라는 곳은 색계 4선천(禪天) 중에 정거천(淨居天)을 일컫는다. 이곳은 불환과(不還果)의 도과를 얻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으로 이곳에 태어나면 그곳에서 수행을 완성해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끊을 수 있는 천상이다. 26계의 천상 중 오직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정거천(극락) 뿐이다. 이곳은 천상에서 유일하게 나머지 수행을 완성할 수 있는 곳이다.---→정거천(淨居天), 천상(天上)과 극락(極樂) 참조.

  

*근(根)---‘근(根)으로 인해 모습이 있게 된다.’ 눈이라는 근을 통해서 사물을 보면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나고. 귀라는 근을 통해서 소리가 나타나고, 코라는 근을 통해서는 냄새, 혀라는 근을 통해서 맛, 몸이라는 근을 통해서 촉각이 나타난다. 그래서 근에 의해서 모양과 색깔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식(識)을 일으키는 근거라고 해서 근(根)이라고 한다.

   근(根)에는 부진근(扶塵根, 依處), 승의근(勝義根, 淨色)  두 종류가 있다. 부진근은 눈, 귀, 코, 혀, 몸이고, 승의근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오는 것인데, 승의근이 부지근의 도움을 받아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니 승의근이 부진근하고 같이 작용한다. 그리고 근을 유식에서는 종자라고 얘기 한다.---→승의근(勝義根) 참조.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인식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육근이 육경을 대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육식(六識)이다. 이렇게 육근, 육경, 육식이 모여 인식이 성립하는 것을 ‘근경식 삼사화합’이라 한다.


*근기(根機)---쉽게 말하면 소질인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상대의 근기에 따라 법문을 설하셨는데, 근기가 천하고 하열한 사람에게는 아함경(阿含經)을 설하시고, 근기가 수승한 사람에게는 방등경(方等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설하셨다.


*근본경전(根本經典)---<아함경(阿含經)>이라고 부르는 한 무리의 경전군(經典群)이 근본경전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살아 있는 경전이기에 근본경전이라 한다. 아함경에 수용되고 있는 경전군을 남방불교에서는 빤짜-니까야(Panca-nikaya)라고 통틀어서 부르는데, 소위 <팔리어 삼장(三藏, Tipi?aka)>이라 번역한다.---→‘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 참조. 


*근본번뇌(根本煩惱)---다른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번뇌. <구사론>에서는 6수면(隨眠), 유식학에서는 6대혹(大惑)이라고 한다. 탐(貪) ? 진(瞋) ? 치(癡)라는 3독심에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을 추가한 6번뇌이다. 여기서 수면(隨眠) 역시 번뇌를 말한다.---→수면(隨眠) 참조.


*근본불교(根本佛敎)---초기불교를 부르는 술어는 초기불교, 원시불교, 근본불교의 세 가지가 있다. 대개 붓다 시대부터 아소카왕 시대까지의 불교를 말하는데, 초기불교 이후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비밀불교)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다만 이런 시대구분이 연대기적으로 확연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근본불교란 부처님의 원음이야 말로 모든 불교의 근본이요, 뿌리요, 전부라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나 불자들은 초기불교를 근본불교라 부른다. 초기불교야말로 근본이요, 기본이요, 필수요, 가장 주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근본불교의 핵심은 부처님과 그 직제자들 시대를 기본으로 한다. 부처님의 원음이 그대로 전해진 불교란 말이다.---→초기불교, 원시불교 참조. 


*근본식(根本識)---근식(根識)이라고도 함. 안식(眼識)ㆍ이식(耳識) 등 6식과 제7 말나식 등 모든 식이 의지할 곳이 되는 근본 심식(心識)인 제8식 아뢰야식의 별칭이다.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無分別智) 혹은 실지(實智), 반야지(般若智)라고도 한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떠나, 판단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밝게 파악하는 지혜이다. 이는 일체 현상은 본질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서 모든 분별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지혜이다.

   좀 어려운 말로는 “곧바로 진리에 계합해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 즉, 선정에 들어 일체 존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지혜가 근본지이다.”라고 한다. 참고로, 불교에서는 사물을 아는 것, 즉 인식하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 하고, 반연된 인식 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하며,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能緣)이라 한다.

   그리고 근본지는 깨달은 자만이 갖고 있는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지혜이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은 모두 근본지(根本智)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에 숨겨져 있는 근본지를 발현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 궁극이 깨달음이다. 근본지에 반대되는 말은 후득지(後得智) 혹은 차별지(差別智)이다. 다양한 사건과 시련에서 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가 후득지이다.---→후득지(後得智) 참조.


*금강(金剛, 산스크리트어 바즈라체디까아/Vajracchedika)---금강은 금속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리하기 때문에 불교의 경론 속에서 굳고 단단한 것의 비유로 쓰이고 있다.

   헌데 금강을 다이야몬드가 아닌 ‘벼락’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벼락이 번뇌를 일거에 깨뜨린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Vajracchedika에서 바즈라(Vajra)는 벼락이라는 뜻이고, 체디까아(cchedika)는 부수어 버린다,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금강경(金剛經)---→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참조.


*금강계(金剛界, vajra-dhtu)---마하비로자나(大日如來)의 지혜를 나타내 보이는 부문. 밀교의 2대 교의(敎義)에는 태장계(胎藏界, garbha-dhtu)와 금강계(金剛界, vajra-dhtu)가 있다. 우리의 마음에는 본래 불성(佛性)인 ‘이(理)’와 번뇌를 깨뜨리는 ‘지(智)’의 양면이 있듯이 그것 그대로 대일여래에게도 ‘이’와 ‘지’의 양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자를 이법신(理法身)의 대일여래 또는 태장계, 후자를 지법신(智法身)의 대일여래 또는 금강계라고 한다.---→태장계(胎藏界, garbha-dhtu)와 금강계(金剛界, vajra-dhtu) 참조.


*금강계단(金剛戒壇)---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장소.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단이라는 뜻이다.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불교는 전통적으로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三學)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계를 가장 강조하면서 부처의 현존(現存)을 상징하는 불사리를 모시고 의식을 집행하는데, 그 의식 장소로 조성한 것이 금강계단이다. 이 계단은 인도에서 유래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얻어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이 계단을 만든 것이 최초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금강계단은 보물 제 539호, 덕유산 백련사 금강계단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 그 외에도 여럿이 있다.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금강계는 밀교의 본질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지덕(知德)이라는

측면에서 설한 것이다. 금강은 견고함을 의미하는데 대일여래의 지덕은 견고해 그 어떤 번뇌라도 모두 멸해 버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와 상대하는 말로 태장계(胎藏界)는 대일여래를 자비(慈悲)의 측면에서 설한 것이다. 그러니 남성적(금강계), 여성적(태장계) 원리에 근거해 받아들인 것이다.

   금강계는 <금강정경(金剛頂經)>, 태장계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에 의존하고, 이 두 가지는 보통 그림으로 도식화된 양계만다라(兩界曼茶羅)로 알려져 있다. <금강정경>의 말씀에 기초해 금강계의 묘미를 그린 그림이 금강계만다라이다. 금강계만다라는 구회만다라(九會曼茶羅)라고도 부른다. 그 내용에 따라 불과(佛果)의 실상을 9회(會)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밀교의 금강계만다라에 등장하는 16대보살의 한분이다. 원만금강(圓滿金剛), 만원금강(滿願金剛), 종종금강(種種金剛), 또는 허공기보살, 선리중생(善利衆生), 금강번, 금강광, 금강보장 등으로도 불린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보통 <금강경(金剛經)>이라 한다.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중국 후진(後秦) 때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문으로 번역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전래됐으며,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법(立法)을 위해서 반드시 <금강경>을 읽게 한 뒤부터 널리 유통됐다.

   주요내용은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수보리(須菩提)로부터 물음을 받고 사람들을 위해 반야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설하시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 경전이다. 한자로 5,249자에 불과한 금강경에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초기 공(空)사상이 압축돼 있다. 하지만 그 뜻이 오묘해서 누군가 설명을 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매번 법문을 들을 때마다 새롭고, 때로 법문하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해석 또한 다양한 경우가 허다하다. 불교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처럼 돼 있다.


*금강살타(金剛薩陀, 산스크리트어 vajrasattva)---밀교에서 중요시하는 보살임. 지금강(持金剛)ㆍ집금강(執金剛) ?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산스크리트어 ‘바주라사트바(vajrasattva)’에서 ‘vajra’가 금강이란 말로 의역됐고, ‘sattva’가 살타란 말로 음역돼, 이것이 합쳐져서 ‘금강살타’가 된 것이다.

   금강살타(금강수보살)은 진리 그 자체인 대일여래와 중생을 포함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대일여래와 중생을 연결하는 접점에 있는 초인적 존재이다. 탱화의 경우 한 손에 방편을 뜻하는 도르제(Dorje,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고, 다른 손엔 지혜를 뜻하는 딜부(drilbu, 요령/搖鈴)을 들고 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은 <대승기신론>의 논리를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경은 7세기 전후 당나라에서 조성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중국 남북조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나타났던 여러 문제된 설과 교리를 총말라해서 엮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에서 재편성된 것이라는 말도 있고, 원효(元曉)대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원효대사는 왕과 고승들 앞에서 금강삼매경을 강론해 존경을 받았다는 말이 전한다.

   마음의 고요는 어떤 지식적인 매개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매에 들 때에만 누릴  수 있다. 이 삼매를 중심으로 설해진 경전이 <금강삼매경>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마음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해 놓은 경전이다. 즉, 본래의 자기를 보기 위해 마음 찾아 삼매에 드는 길을 제시했으며, 압축된 문장이 특징이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에 대한 해석서로 원효(元曉, 617년-686년)대사가 지었다. <금강삼매경론>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더불어 원효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이다. 불교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금강삼매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원효는 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서를 쓴 것이다. 찬술 시기는 대략 7세기 중후반으로 보고 있다.

   <금강삼매경>이 위경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방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한 통찰력으로 경전의 오의를 천명한 원효의 공덕에 힘입은 바 크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자신의 핵심사상인 일심(一心)법과 중도(中道)와 화쟁(和諍)의 논리를 토대로 대승의 교학과 실천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금강승(金剛乘 = 密?, Vajrayana)---밀교를 금강승이라 하며, 탄트라 불교(밀교)라고도 한다. 금강승은 피안의 저 언덕을 넘어가는데 금강 수레라서 반듯이 넘어간다는 뜻이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6세기 이후 대두된 중관학(中觀學)과 유식학(唯識學)의 상호 대립 속에 부파불교시대의 아미달마처럼 이론이 너무 번쇄해져서 그 기능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금강승은 이런 사변적인 대승불교의 사상으로부터 개인 삶에서의 불교사상의 실현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소승의 목표가 자기 자신을 위한 아라한의 해탈이며, 대승의 목표가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 활동하는 높은 보살이라면, 금강승은 완벽한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자유자재로 구원해 줄 전지전능한 부처님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승은 불교의 완성이라고 보고 있다.


*금강심론(金剛心論)---금타(金陀)스님(1898-1948)의 저서. 벽산당(碧山堂) 금타(金陀)스님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해방의 혼돈 속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히 감추고 살다가 가신분이다. 모든 경전을 섭렵했기에 박학다식하고, 금타스님의 저서 <금강심론(金剛心論)>만 읽으면 모든 경전을 다 읽은 것과 같다고 했다.

   <금강심론>은 수행위차(修行位次)에 있어서 성문십지(聲聞十地), 보살십지(菩薩十地) 또는 오십오위나 오십육위 등 그런 여러 가지 위차를 대비하고 회통(會通)해 해탈십육위(解脫十六位)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금강심론>은 어떻게 수행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성불하는가를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경전의 인용 폭은 소승 ? 대승 ? 밀교를 총망라했다. 또 보편타당해서 어느 수행법도 부정하지를 않았다. 간경(看經), 진언(眞言), 참선(參禪), 관법(觀法), 이 모두 다 경계는 같다고 했다. 그러기에 간경 수행하는 사람이이나 진언하는 사람이나 화두 하는 사람이나 다 <금강심론>을 읽는다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금타(金陀)스님 참조.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원래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역사로서 코끼리 60만 마리의 힘을 가진 역사이며, 어떤 거짓도 허용할 수 없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눈을 금강안(金剛眼)이라 한다. 한편 금강역사는 문을 지키는 야차(夜叉)이기도 한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해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받아들였다.


*금강유정(金剛喩定)---금강삼매(金剛三昧)와 같은 말. 금강심(金剛心) ? 금강정(金剛定)이라고도 한다. 금강의 견고하고 예리한 성질에 비유해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선정(禪定). 온갖 분별과 번뇌를 깨뜨려 버리는 선정을 말함.


*금강저(金剛杵, vajra)---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 여러 신들이나 역사(力士)가 지니는 무기를 가리킨다. 금강저는 힘을 나타내는 무기로 삿된 것들을 모두 쳐부수는 강력한 무기이다. 특히 밀교에서는 의식에 쓰이는 작법용 불구로 번뇌를 없애는 보리심을 상징한다.


*금강정경(金剛頂經)---밀교 경전. 정확한 명칭은 <금강정 일체여래 진실 섭대승 현증대교 왕경(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이고, 명칭의 의미는 여러 경전 중 최고이며, 모든 여래의 진실을 수록한 실천규범의 왕경(王經)라는 뜻이다. 금강정경은 대일경(大日經)보다 약간 늦게 AD 670~690년(7세기 말엽)경 동남부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일경보다 밀교의 교의를 정교히 만들었다. 금강지(金剛智, 671~741)가 한역했다.


*금강지(金剛智)---극히 견고한 지혜. 곧 여래(如來)의 지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바쥬라보디, 671~741)---남인도 출신의 승려로 720년 중국 당나라 시대 뤄양(洛陽)에 들어가 밀교를 크게 펼쳐 중국 밀교의 개조가 됐다. 그와 같은 시대의 밀교 승려인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大日經)> 등을 번역한 데 반해, 금강지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국에 전하고 번역했으며, 그 외에 다수의 밀교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삼장이라고도 한다.

 

*금당(金堂)---사찰의 중심이 되는 주불전을 말한다.


*금시조(金翅鳥)---가루다(Garuda)와 같은 말.---→가루다(Garuda) 참조.


*금어(金魚)---불화나 불상을 조성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 불화를 제작하는 이들을 불모(佛母), 화사(畵師), 화승(畵僧)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이 중 으뜸이 금어이다.


*금타(金陀)스님(1898-1948)----벽산당(碧山堂) 금타(金陀)스님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해방의 혼돈 속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히 감추고 살다가 가신분이다. 20세 이전 장성 백양사에서 송만암(宋曼庵) 스님을 은사로 출가, 주로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했다. 그가 지은 <금강심론(金剛心論)>만 읽으면 모든 경전을 다 읽은 것과 같다고 했다.---→금강심론(金剛心論) 참조.

   

*급고독(給孤獨, 산스크리트어 an?thapi??ada/아나타 핀다다)---팔리어로는 아나타 핀디카임. 중인도의 사위국(코살라국;舍衛國)의 장자이자,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舍)을 지어드린 수달(須達, sudatta/수다타)의 별명.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수보리가 바로 급고독 장자의 조카이다.---→아나타 핀다다, 기원정사(祇園精舍) 참조.


*기바(耆婆, 지바카/j?vaka)---고대 인도의 이름난 의사.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왕사성(王舍城)의 창녀 살라바티(s?lavati)이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쓰레기 더미에 버렸는데, 그 곁을 지나던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의 빔비사라(bimbis?ra)왕의 아들 아바야(abhaya)가 데려다 양육했다. 성장한 기바는 펀자브(Punjab) 북쪽 지역에 있던 건타라국(乾陀羅國)의 탁샤실라(tak?a?ila)에 가서 7년 동안 의술을 배운 후 부처님께 귀의해 부처님의 풍병을 고쳐서 의왕(醫王)이라고까지 칭송됐다. 특히 아사세왕이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살해한 뒤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귀의시켰다.


*기복불교(祈福佛敎)---개인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복을 구하거나 비는 불교의 한 모습. 불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생겼다. 복을 구하는 행위나 생각은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기복이라는 말을 종교 앞에 붙인 경우에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기복불교로 여길 수 있는 신앙대상이 많은 편이다. 주로 산신이나 칠성신 등 아들 낳기를 기원한다거나 사업의 성공, 대학입시 합격 등과 관련된 신앙대상을 찾는 미신에 가까운 불교가 기복불교이다. 이 같은 기복신앙은 진정한 불교의 가치를 잊게 하는 표층신앙(表層信仰)이어서 자칫 종교 본래의 이타적 성격을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


*기세계(器世界)---기세간(器世間)이라고도 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같은 말이다. 모든 중생이 살고 있는 산하대지 등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넓게는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물질세계 모두를 포함하는 우주를 말한다.


*기신론(起信論)---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줄인 말. 대승불교의 개론서. 인도의 마명(馬鳴, 100∼160?)이 저술했다고 하나 그의 생존연대가 불확실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참조.


*기신론소(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줄인 말.---→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참조.


*기야(祇夜)---산스크리트어 geya, 팔리어 geyya의 음사. 중송(重頌)이라 번역. 경전의 서술 형식에서 산문체로 된 내용을 다시 운문체로 설한 것.---중송(重頌), 게송(偈頌) 참조. 


*기연(機緣)---계기, 동기와 비슷한 말. 깨달음을 얻게 된 동기, 깨닫게 된 계기를 말한다.


*기오개(棄五蓋)---→오개(棄五蓋) 참조.


*기원정사(祇園精舍, 범어로 Jetavana)---부처님께서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셨을 때 중인도 사위국(코살라국;舍衛國)의 장자이자 대신인 수닷타(sudatta, 수달/須達)가 죽림정사로 찾아가서 부처님께 자기네 나라인 사위국에 가서도 설법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사를 지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부처님이 정사가 완성되면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수닷타는 원래 배화교 신자였다가 부처님의 제자가 됐는데, 그의 집은 큰 부자로서 재보가 한량없었고, 어려운 이에게 항상 옷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자’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아나다 핀다다(팔리어 아나타핀디카/An?thapi??ika)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역으로는 급고독(給孤獨)이라 한다. 그리고 부처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수보리(須菩提)가 바로 급고독 장자의 조카이다.

   부처님께 약속을 하고 귀국한 급고독이 정사를 지을 곳을 물색한 결과 그가 택한 곳이 사위성(舍衛城:쉬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는 곳인데, 하필이면 그곳이 마가다국의 기타태자(祇陀太子)의 땅이었다. 그 땅을 흥정하다가 기타태자와도 뜻이 맞아 함께 정사를 지어드렸다. 그래서 정사 이름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祇園精舍)이라 했다.

   이후 부처님께서는 이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 오래 머물며 교화를 했고, 우기(雨期)의 안거를 자주 이곳에서 행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사위국의 파사닉왕(波斯匿;파사세나디)도 부처님의 제자였다.

  

*기타(祇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Jeta) 태자---석존 생존 시 사위국의 급고독(給孤獨) 장자와 더불어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드린 마가다국의 태자이다. 그러나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다.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코살라국 파사익(파세나디, 波斯匿王)왕의 부인 이름이 말리카(말리, 末利)이다. 말리카는 원래 사위성(舍衛城, 슈라바스티)에 사는 한 브라만의 재스민 동산을 손질하던 하녀로 원래 이름은 카필라였으나, 재스민 동산에서 한 사문을 공양한 후 그 공으로 을 만나 정성을 다해 모셨다고 해서 재스민을 뜻하는 말리카(Mallika)라 불렸다고 하며, 이 일이 계기가 돼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의 왕비로 간택됐다고 한다. 왕비가 된 뒤 자신이 공양한 사문이 석가모니 부처님임을 알고 기원정사(祈園精舍)에 머물고 있는 부처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 귀의했으며 파세나디왕도 인도해 부처님의 제자가 되게 했다고 전한다.

   훗날 아유타야(아유타, 阿踰陀)국왕과 결혼한 스리말리부인(승만부인, 勝?)은 석가로부터 장차 보광여래(연등불)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비구니로 대승경전 가운데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경전인 <승만경>의 주인공인데, 바로 이 승만부인과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어머니가 말리부인이다.


*긴나라(緊那羅, 산스크리트어 Ki?nara)---인도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신. 진타라(眞陀羅), 견타라(甄陀羅) 등으로 음역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이다. 의인(擬人) 혹은 인비인(人非人)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아닌 데서 유래한 말로서 나중에 이 말이 주는 인상 때문에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짓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길상(吉祥 = 수리)---‘길사유상(吉事有祥)’이라는 말을 줄인 말이고, 산스크리트어 ?r?의 의역으로서 ‘경사스러움’, ‘번영’, ‘행운’, ‘아름답고 착한 징조’라는 뜻으로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인간이 살면서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축원해주고 찬탄을 하는 것이 길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축원하는 말이면 모두 ‘수리’의 뜻이다. “행복하십시오, 훌륭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성공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등의 칭찬과 찬탄과 상대방을 향한 긍정적인 격려의 표현은 모두 ‘수리’ 속에 포함된다. 관련 단어 길상선사(吉祥善事)는 더할 수 없이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란 말이다.


*길상존(吉祥尊)---범어 ‘수리=길상(吉祥)’한 존자(尊者)라는 뜻이다. 따라서 ‘좋은 조짐을 주실 존자이시여’라는 뜻이고, 결국 부처님이나 문수보살 혹은 관세음보살을 뜻한다.


*길상천(吉祥天)---인도의 브라만교 및 불교에 등장하는 여신. 길상천녀(吉祥天女) 또는 공덕천(功德天)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 신화에서는 비슈누신(神)의 아내이고, 애욕의 신 카마(Kama)의 어머니이며, 행복을 주관하는 여신이었다. 그러다가 불교에 수용된 후로는 복덕을 주는 여신이 돼, 이 천녀(天女)에게 공양을 하면 누구나 복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밀교에서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의 비(妃)로서 북방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형상은 일정하지 않으나 아름다운 얼굴에 천의(天衣)를 걸치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길장(吉藏, 549~623)---남북조시대에서 수 ? 당시대에 걸쳐 활동한 승려.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이며, 중관사상(中觀思想)의 대가로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불린다. 남북조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전란 속에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삼론종의 근본 문헌들에 대한 주석서인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저술해 삼론종(三論宗)의 교리를 대성했으며, 특히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연구의 궤범이 되는 획기적 저서이다. 그는 수(隋) 양제(煬帝)에 의해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많은 승려와 일반 신도들을 위해 강론했다.


*김교각(金喬覺, 697년~794)---중국에 지장(地藏) 신앙의 성지로 이름난 곳이 내륙 산악지대인 안휘성 청양현에 위치한 구화산(九華山)이다. 그곳에서 신라 왕자 출신 김교각 스님이 철저한 두타행을 닦아 중국인들로부터 지장보살의 화현이라 불리었다. 스님은 99세의 나이로 좌탈입망했는데, 그 후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자, 그가 열반하기 전 유언대로 그 육신에 개금해 육신보살(肉身菩薩)로서 김지장(金地藏)으로 모셔지게 됐다.

   김교각 스님의 속명은 김중경(金重慶)이고, 697년 신라 제 32대 효소왕 4년에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33대 성덕왕이고, 그의 이복동생 두 사람은 제34대 효성왕과 제35대 경덕왕이다.---→구화산(九華山) 참조.


*까비르(Kabir, 1440~1518)---까비르는 가난한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는 베 짜는 직조공이었던 회교도 집안에서 자라서 평생 베를 짜며 평범한 삶을 살다 갔지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인도 민중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글을 배우지 않아 단 한 줄의 시(詩)도 손수 글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영혼의 말들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전으로 전해져서 인도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그리하여 시성이라 일컫는 타골과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했다. 까비르의 시는 타고르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


*깨달음이란?---불교 역사 2600여년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이고,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선 간단명료한 아주 기본적인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깨달음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탐(貪) ? 진(瞋) ? 치(癡)의 소멸이고,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가치인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공(空), 견성(見性)을 의미한다.

   <수타니파타(경집/經集)>에서 부처님은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 바 있다. “나는 알아야 할 바(苦聖諦)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滅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사람)이다.-수타니파타 558게” 이는 곧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徹見)’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에서는 부처님은 연기법을 통해서 정각을 이루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사성제=연기=무아를 깨달아 탐 ? 진 ? 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말들어낸다는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온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점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승불교, 특히 선종에 와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부처가 된다[견성성불(見性成佛)]’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위의 내용들을 관통하는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자기 자신의 발견’이라고 정의해야 하겠다.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라’라는 말이다. ‘끽다(喫茶)’는 차를 마시라는 말이고, 거(去)는 명령형 조사이다. 중국 당나라 때 ‘무(無)’자 화두로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선사의 선문답에 유래된 말이다. 조주 선사가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한 것은 꾸지람으로서, ‘너의 주인공은 어디에 두었느냐? 정신 차려라’ 하는 뜻이다. 꽤 까다로운 공안으로 알려져 있다.

   일체의 관념과 분별을 여의고 텅 비어 있는 조주에게 이런 저런 걸 물으러 오니 답할 게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 네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은 너 속에 다 있는데, 엉뚱한 곳에 와서 묻고 찾으려 하느냐 하는 말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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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150?-250?)---원래 이름은 나가르주나이나 용수(龍樹)라 한역 했다. 석가모니 입멸 후 600년이 흐른 뒤 나타나서 불교사상을 재조립해 대승불교를 확립시킴으로써 제2의 붓다로 칭송되며 용수보살로 불린다.

   원래 나가르주나는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 남인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는데 천문, 지리, 예언 등 여러 가지 비술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귀의해 반야경 계통의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중관(中觀, Madhyamaka)사상을 수립하고, 이를 논술한 <중론(中論)>을 비롯해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지었다. 이 세 문헌을 함께 불러 “삼론(三論)”이라 부르고, 중국에서 4~5세기경에 유행했던 삼론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이 여기에서 기인하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관학파라 한다.---→중관사상(中觀思想) 참조.


*나라연(那羅延)---천상의 역사(力士)로서 불법을 지키는 신. 제석천(帝釋天)의 권속으로, 집금강(執金剛)의 하나이며,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함.


*나락(那落, 奈落, 산스크리트어 naraka)---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란타(N?land?, 那爛陀)대학---날란다대학이라고도 함. 세계 역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이다. 인도 비하르 주의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했었다. 아소카왕이 건립한 나란타사원에 굽타왕조 때 나란타대학이 부설됐다. 제2붓다로 불리는 용수(나가르주나)를 비롯해 유식학을 체계화시킨 무착(無着, Asanga, 아상가), 세친(世親, Vasubandhu, 바수반두) 형제와 당의 현장(玄?)은 물론 의정(義淨)과 우리나라의 구법승들도 주로 이 나란타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리하여 서기 427년에 건립돼 회교도의 침입으로 황폐화되는 1197년까지 무렵 770년간 존속하면서 불교학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나란타( N?land?, 那爛陀)사---왕사성(王舍城) 북쪽에 인접해 있던 사원. 아소카왕이 건립한 사원으로 굽타왕조 때 쿠마라굽타(kum?ragupta) 1세(414-455)가 중창한 이후, 역대 왕들이 증축해 인도 불교의 중심지가 됐고, 이 절에 유명한 나란타대학이 부설돼 있었다.

     ※왕사성(王舍城)---옛 마가다국(Magadha國)의 도읍지. 지금의 파트나(Patna) 남쪽에 있는 라즈기르(Rajgir)에 해당함.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한다는 뜻의 불교용어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여섯 글자로 돼 있기 때문에 육자명호(六字名號)라고 불린다. 일종의 진언(眞言)으로서, 이 여섯 글자를 부르고 기억하면 왕생한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Namo-Amitabha인데, Namo는 예배한다, 귀의한다는 말이며, mita는 헤아린다는 말이고, abha는 광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는 뜻인데, 결국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헌데 나무아미타불을 찾으면 반드시 관세음보살이 뒤 따른다. 그 이유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같이 끝없이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원을 성취하게 하고자 하며,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그 모습을 자신이 쓰고 있는 관(이마)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읊는다. 


*나반존자(那畔尊者)---특이하게 우리나라에만 있으며, 대개 사찰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다. 나반존자는 16나한 중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가 이름만 바뀌어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된 것이라 한다. 사찰에서 산신, 칠성, 용왕들과 나란히 신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 토속 신앙이 불교적인 색깔을 띤 불 ? 보살로 변형돼 절에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그 형상은 중국에서 독립 신앙 대상이 된 ‘빈두로존자’의 모습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독성 참조.


*나옹(懶翁, 1320년∼1376년)---고려 말의 선승. 법명은 혜근(彗勤)이다. 경상도 영덕 출신이고, 호가 나옹(懶翁)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무상을 느끼고, 문경의 공덕산(孔德山) 대승사(大勝寺)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했다.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을 거쳐 명주(溟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여러 사찰에 주석한 후 귀국해 회암사 주지로서 절을 중수했다.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했고, 임제(臨濟)선사의 선풍을 도입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청산은 나를 보고……”의 선시가 유명하다. 그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 터와 여주 신륵사(神勒寺), 그리고 대승사 묘적암에 남아 있다.


*나찰(羅刹)---악귀의 일종. 사람을 먹는 두려운 귀신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해 불교의 수호신이 됐다.


*나한(羅漢)---초기불교에서 부처님 생존 시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 중 최고 단계에 이른 자를 아라한이라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성립되면서 ‘보살’이 생겨 아라한을 나한(羅漢)이라 고쳐 부르고, 그 격이 보살 아래로 떨어졌다. 16나한, 500나한이 유명하다.---→아라한(阿羅漢, Arhan) 참조.


*나한전(羅漢殿)---나한을 모신 전각(16 혹은 500나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16 나한은 석존께서 열반하신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한 분들이라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이고, 대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고 있다.


*낙덕(樂德)---‘낙(樂)’은 안락의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난 적정무위(寂靜無爲)의 안락한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즉 무위안락한 것이다. 안락이란 보통 그냥 재미있고 어떠한 유한적인 안락이 아니라, 조금도 변치 않는 영생의 안락을 말한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에서의 ‘낙’이 이에 해당한다.


*난식(亂識)---어지러운 생각, 온갖 망상을 일컫는 말. 망식(妄識), 염식(染識)과 비슷한 말이다.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망식이고, 자아의식으로 오염된 의식이 염식이다. 그리고 난식의 반대말은 정식(淨識)이다. 정식이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의식이다.


*난타(難陀, Nanda, ?~?)---석가의 이복동생임. 정반왕(淨飯王)의 아들이며, 모친은 마야 부인의 여동생인 마하파사파제(摩訶波娑波提)이다. 부처의 32상(相) 중에서 2종을 제외하고 모두 갖추었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지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 손타리(孫陀利)가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는 그 아내를 못 잊어 출가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부처님이 방편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운 모양을 보여, 그를 인도해 불도에 귀의케 해서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아내의 이름을 따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라고도 하는데, 이는 목우난타(牧牛難陀)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난타발난타(難陀跋難陀, Nanda-upananda)---8대 용왕 중에서 난타와 발난타의 두 형제용왕을 말한다. 두 용왕은 불법의 수호자로서 난타를 환희(歡喜)라 번역하고, 발난타를 선환희(善歡喜)라 번역한다.


*난행도(難行道)---AD 2~3세기경의 용수(龍樹), 4세기경의 세친(世親) 등의 글에서 불법(佛法)을 일반 세상의 도(道)에 준해 난(難) ? 이(易)의 둘로 나눈 바 있어 이에 힌트를 얻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담란(曇鸞, 476~542)은 세친의 <정토론(淨土論)>에 주석을 달아 <정토론주(淨土論注)>를 써서, 수행을 난행도와 이행도(易行道)의 2도설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외부의 힘에 의한 범부가 왕생할 수 있는 이행도를 역설함으로써 타력본원의 정토교의 교의를 처음으로 천명했다.  

   수행의 길에 있어서 자력에 의해 성불을 추구하는 것을 난행도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해 수행해 가는 것을 이행도라 하는데, 난행도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고, 이행도는 근기가 약간 미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자력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난행도의 종교로 알려져 있는데, 불보살의 원력에 의한 이행도가 시설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세속 중생은 근기가 다양하고 저열해서 누구나 높고 수승한 난행도를 성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이행도(易行道),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참조.


*남섬부주(南贍浮洲)---남염부주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세계관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땅을 말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수미산 주변에 네 곳의 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에만 인간이 산다고 알려져 있다. 염부(閻浮)라는 수목이 많이 자라는 곳이라서 염부주라고도 한다. 본래 염부는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므로 남섬부주는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상징하는 말로 추정된다.---→염부제(閻浮提) 참조.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남종선(南宗禪)의 거봉으로 제7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육조 혜능대사의 사법(嗣法) 제자 10인 가운데 가장 먼저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제자 마조 도일(馬祖道一)은 항상 좌선(坐禪)하는 것만을 고집해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이에 회양선사가 하루는 좌선 중인 마조(馬祖)에게 말을 건넸다.

   “수좌는 좌선해 무엇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가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 와서 마조 옆에서 묵묵히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한참 정진을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여쭈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회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무주법(無住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 하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

   마조는 여기에서 크게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좌선만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가운데서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해 순일(純一)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


*남염부주(南閻浮州)---→남섬부주 참조.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스리랑카에 전해오던 패엽경(貝葉經)인 <팔리어 삼장(三藏)>을 말한다. 팔리어 삼장은 19세기 초기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됐으며, 1882년에는 영국에서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가 중심이 돼 런던에 <Pali Text Society>가 설립돼 영역본이 출판됐다. 그리고 1935년부터 일본에서도 그 영역본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을 시작해 1941년에 65권 70책으로 완간해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 했다.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당나라시대의 선승.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130여 명 중 백장(白丈), 서당(西堂)과 함께 유명한 삼대사(三大士)의 한 사람으로 무심선(無心禪)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30여 년 간 지주(池州) 남전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밭을 갈며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자연 속에서 세상의 시비와 사상의 추구마저 잊어버리는 무심선(無心禪)을 터득해 훗날 선승들에게 고존숙(古尊宿)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가 남긴 화두 중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 ; 남전이 고양이의 목을 베다)가 유명하다. 835년 8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제자로 무자(無字)화두로 유명한 조주 종심(趙州從?)을 두었다.

    ※무심선(無心禪)---무심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과 달리 일체의 망념을 여읜 진심(眞心)인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계로 삼는 선법.

    ※고존숙(古尊宿)---선문(禪門)의 위대한 선승에 대한 존칭.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남전스님 휘하에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으로 나누어진 선방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고양이 한 마리가 절에 와서 동당에 가서 슬그머니 앉기도 하고, 서당에 가서 슬그머니 앉기도 했다.

   이때 수행승들은 그 고양이를 서로 자기 당(堂)의 고양이라고 우기다가 마침내 선방이 시끄러워 졌다. 이에 남전은 고양이를 집어 들고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죽이지 않겠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이에 대중(수행승들)은 각기 이말 저말 한 마디씩 했지만 모두 남전의 기대에 어긋났다. 그래서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를 베어 죽였다.

   헌데 저녁에 조주(趙州)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와서 스승인 남전스님에게 귀가 인사를 드리자 남전이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주에게 물었다.

   “자, 그대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그러자 조주는 아무 말 않고 짚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다. 이를 본 남전은, “그대가 있었더라면 그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했다.

   참선하다 말고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싸우는 한심한 대중을 보고 남전은 고양이를 집어 들고 한마디 이르라 했다. 이르면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고 했다. 고양이를 살려야 하는 위급한 순간이 닥친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이르라는 말은 우주의 본질에 대해, 진실에 대해, 마음에 대해, 도에 대해, 또는 내가 고양이를 들고 있는 뜻에 대해 어떤 것도 좋으니 알고 있는 것을 한마디 이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흡족한 말을 이르지 못했으므로 고양이는 두 동강나고 말았다.

   “이 고양이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싸운단 말인가, 한심한 놈들아!”라는 엄한 꾸지람인 것이다.

   큰 도에 발심한 사람들은 시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시비의 근본을 없앨 줄 알아야 한다. 별스럽지도 않은 고양이 한 마리에 온 절의 스님들이 법석을 떨다가 애꿎은 고양이만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훗날 설두(雪竇)선사께서 송(頌)을 하셨다.「양쪽 승당의 납자들은 모두 엉터리 중/ 먼지만 일으킬 뿐 어쩔 줄 모르는구나/ 다행히도 남전화상이 법으로 심판해/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 시비를 가렸네(兩堂俱是杜禪和 撥動煙塵不奈何. 賴得南泉能擧令 一刀兩段任偏頗)」

   그러나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는 제대로 대답했다. 바로 집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돌아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한 것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조주두재초혜(曹州頭在草鞋)’라는 또 하나의 화두가 됐다. 이것을 보고 남전은 네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조주의 선기를 인정했다. 

   고양이 집어든 뜻을 집신 한 짝을 머리에 이는 것으로 대답했으니 이 뜻이 대체 무엇일까? 이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라는 화두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있지 않는 맑은 것이라, 공연히 여기에다 이러니저러니 답을 하거나 사족을 달면 점점 더 진흙탕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고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 진다. 화두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혹 비유로도 대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이 화두는 직접 화두를 들고 체험해야 알 수 있다. - 그래도 종잡을 수 없다면, 알음알이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이 게 선문답의 진수이니까. 더 알려면 수행을 거쳐 깨치는 길밖에 없다.

    ※설두 중현(雪竇 重顯 : 980~1052) 선사---송대의 선승으로 금나라의 외침을 받아 북송과 남송으로 갈라지던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23세에 출가한 후, 운문종(雲門宗)의 3대조(三代祖)인 지문 광조(智門 光祚) 문하서 수행했으며, 아름답고 간결한 시어를 많이 남겼다.


*남종선(南宗禪)---중국 당나라시대 선종 제5조 홍인(弘忍, 601~674)에게는 걸출한 두 제자가 있었다.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고, 신수 계통을 북종선(北宗禪), 6조 혜능 계통을 남종선이라 했다. 북종선이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단계적 깨달음[점오/漸悟]을 주장하는 데 비해, 남종선은 <금강경(金剛經)>을 근거로 행동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돈오/頓悟]을 주장했다. 이를 가리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고 하나, 후대에는 남종선이 특히 발전해 선종이라 하면 으레 남종선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내전(內典)---경(經) ? 율(律) ? 논(論)과 어록(語錄) 등의 불전(佛典)을 말함. 이에 반해, 불교 밖의 다른 전적을 외전(外典)이라 한다. 출가인은 내전을 익히고 나서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외전을 공부한다. 출가인이 외전을 먼저 익히면, 그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다. 칼로 진흙을 베면 칼만 상한다. 출가한 사람은 일단 내전을 익히는 데에 열중하고, 내전이 어느 정도 익어서 자기 것이 됐을 때,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외전을 공부하는 것, 이게 제대로 된 순서다.


*냉난자지(冷暖自知)---물이 그릇에 가득 담겨 있다. 그런데 그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만져 봐야 알 수 있다. 즉 깨달음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뜻. 불법(佛法)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해야 깨닫는다는 것이란 말이다.


*녹야원(鹿野園, 미가다야, Migad?ya)---석가모니 부처님이 첫 설법을 행하신 곳.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 지금의 인도 바라나시(Varanasi) 북방 약 7㎞에 위치한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 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Bodhgaya)에서 정각을 이루신 삼칠일(三七日) 후에 이곳에 와서 5명의 수행자에게 사제(四諦)의 법을 설하고 진리를 설해 이들의 귀의를 받은, 말하자면 첫 설법[초전법륜(初傳法輪)]을 행한 곳이다. 사르나트는 과거 사슴이 많이 살고 있어서 사슴동산-녹야원(鹿野園)이라고도 불렀는데, 아소카 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石株)를 세운 뒤 뭇 신도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 초 현장(玄?)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엔 정사(精舍)가 있었다고 한다.

           

*논사(論事, Kath?vatthu)---팔리어 논장(論藏; Abhidhamma-pi?aka)에는 7론이 유명한데, 그 가운데 논사가 있다. 논사에는 제3결집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견해들에 대해 검토하고 논파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논사는 제3차 결집의 교리적 측면에서의 교단 정화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논장(論藏; Abhidhamma-pi?aka)---아비달마(阿毘達磨)라 음역한다. 3장(藏)인 경(經) ? 율(律) ? 논(論) 중의 ‘논’을 일컫는 말로서 부처의 가르침과 그가 제정한 계율을 주석 ? 연구 ? 정리 ? 요약한 문헌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논장(論藏)은 법취론(法聚論, Dhamasa?ga?i), 분별론(分別論, Vibha?ga),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atti), 논사(論事, Kath?vatthu), 계설론(界說論, Dh?tukath?), 쌍대론(雙對論, Yamaka), 발취론(發趣論, Pa??h?na) 등의 7론이 유명하다.

논장(論藏)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전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거나 주석을 단 것 중에서

그 시대의 붓다라 할 만한 선지식의 글을 논장이라 하여 法과 같이 취급합니다

*누진통(漏盡通)---육신통(六神通)의 하나. 지극한 수행 정진을 한 결과 얻게 되는 여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을 육신통이라 하는데, 그 중 누진통은 다른 다섯에 비해 가장 얻기 힘든 신통이다. 즉, 앞의 5신통은 외도(外道)나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만은 부처 또는 아라한(阿羅漢) 이상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누진통은 세계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서, 다른 종교로서는 얻어질 수 없는 불교 특유의 초능력인 것이다. 누진통은 번뇌를 모두 끊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람이 이에 통하면 극락에 이른 것과 같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이 누진통을 얻어 부처가 되셨으며, 깨달음을 얻은 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가 누진통을 포함한 여섯 가지의 신통력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석존은 제자들이 이러한 신통력의 사용을 금지하셨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불제자들이 이와 같은 신통을 함부로 나타내는 것을 계율로 정해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지혜의 종교이지 다른 종교처럼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육신통 참조.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보의(寶意)라고도 한다. 중인도 출신의 승려로, 508년에 북위(北魏)의 뤄양(洛陽)에 와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十地經論)> 등 총 6종 24권을 번역했다.


*능가경(楞伽經, Lankavatara-Sutra)---석가모니가 스리랑카의 능가산(楞伽山)을 배경으로 설했다고 전하는 경전으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형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경이다. 원제는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이고, 유가행파(瑜伽行派)에 영향을 주었으며, 선(禪)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능가경은 <십지경(十地經)>,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유심(唯心)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경전이며, 주로 4세기경에 형성된 듯하고, 일부는 그 이전에 형성된 듯하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올 때 가져와서 2조 혜가(慧可)에게 전수했다고 하며,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선종에서 매우 존중되고 있다. 한역본으로는 유송(劉宋)시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능가아발타라보경(楞伽阿跋陀羅寶經)>과 북위(北魏)의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입능가경(入楞伽經)>, 당나라시대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 세 가지가 있다. 신라 때에는 <입능가경>이 가장 많이 유통됐고, 최근에는 <대승입능가경>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참조.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초기 선종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 708년 정각(淨覺)이 기록했다. 제1조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에서 - 보리달마(菩提達摩)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신수(神秀) - 제8조 보적(普寂)에 이르는 선사 8대에 관한 전기이다. 단순한 인물평전이 아니라 다양한 선사상을 담고 있어 초기 선종사 연구에 긴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6조 혜능(慧能) 대신 북종선의 신수를 올린 점으로 봐서 북종선 중심이라 할 수 있다. 1900년대에 돈황에서 발견된 이후 북종선에 대한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는 계기가 됐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 눈을 능견(能見-보는 측)이라고 부르고 눈에 보인 것을 소견(所見-보이는 측)이라고 부른다. 능견과 소견은 연기 관계에 있다. 따라서 능견이 없으면 소견이 있을 수 없다. 능견인 눈이 없으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책과 컵 등을 눈에 보인 것[所見]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또 이렇게 눈도 없고, 눈에 보인 것도 없다면, 양자의 관계인 보는 작용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능엄경(楞嚴經)---원명은 <대불정여래 밀인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고, 줄여서 <수능엄경(首楞嚴經)> 혹은 <능엄경>이라 한다.   

   인도 바깥으로 유통되지 못하게 하라는 왕의 엄명이 있어 당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唐) 중종(中宗) 때인 AD 705년 인도 승 반랄밀제(般剌蜜帝, 極量)에 의해 전래되고 방융(房融)과 함께 번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 중국에서 많이 가필돼 거의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720년경 중국 선종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경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대장경에 수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유입됐음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불교의 신행(信行)에 크게 영향을 미쳐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 중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전문 강원에서는 금강경, 원각경, 대승기신론과 함께 능엄경이 4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돼 있다.

   내용은 부처님이 그동안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총정리해서 설하셨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 내용이 다른 경전에서 보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며 총체적인 수행서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다(阿難陀)가 마등가(摩登伽)라는 여인의 꾐에 빠져 그녀의 딸에 의해 청정한 계를 깨뜨려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석가)의 신통력으로 구해낸다. 그러고 나서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해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의 목적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돼 밀교적인 색채가 짙지만 선정(禪定)이 역설돼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의 주석은 모두 선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경의 제8권에서는 보살의 수행하는 단계로 57위(位)가 설해져 있다.---→위경(僞經) 참조.  

    ※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 - 백산개는 흰 비단으로 덮개를 만든 양산으로서 왕위를 상징하는데, 불지공덕(佛智功德)이 수승함을 전륜성왕에 비유한 것이다.

    ※ 마등가(摩登伽. Matanga)---바라문 여인.

    ※ 능엄(楞嚴)---능엄이라고 하는 말은 용맹스러운 행위, 또는 아주 그 건전한 행위, 건사한 분별, 건전한 분별력 이런 뜻이다. 이와 같이 아주 건전한 사상을 갖은 사람의 분별력을 능엄(楞嚴)이라고 한다.


*능엄신주(楞嚴神呪)---원명은 대여래불정능엄신주(大如來佛頂楞嚴神呪)라는 긴 이름인데, 줄여서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 더 줄여서 능엄신주 혹은 능엄주라 한다. <능엄경(楞嚴經)> 10권 중에 제7권에 능엄신주가 실려 있다. 능엄경과 능엄신주는 천수경과 신묘장구대다라니 관계와 비슷하다.

   성철스님이 선방에서 참선하는 수좌들과 신도들에게 능엄신주 기도를 시켜서 유명해졌고, 지금도 성철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는 새벽기도 때 능엄신주를 독송하고 있다.

   능엄주(楞嚴呪)에서 능엄이란 말이 ‘용맹’이라는 의미여서 능엄주가 좋지 않은 것, 내가 살아가는데 또 공부하는데 장애가 되는 그런 마(魔)의 요소들을 쳐부순다든지, 항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의미가 이 ‘용맹’이라고 하는 뜻 속에 포함이 돼 있다.---→수능엄(首楞嚴) 참조.


*능전(能詮)과 소전(所詮)---문자가 뜻을 발생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문자에 의하여 나타나는 뜻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모든 경전에서는 법(法)과 의(義)를 통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법은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의는 언설의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근본 뜻이다. 따라서 법이 없이는 뜻이 드러나지 않고, 뜻이 없는 법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법은 가르침 내지 진리를 설명하는 주체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의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객체라서 소전(所詮)이라 한다. 비유하자면 능전으로서의 법은 손가락에 해당하고 소전으로서의 의는 달에 해당한다.


*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니까야는 남방경전으로서 근본경전인 팔리어 삼장(팔리어 대장경)의 경(經) 부분을 뜻한다. 팔리어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는 ‘아가마(agama)’라 하므로 북방경전에서는 이를 음역해서 <아함경(阿含經)>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남방경전은 5부 니까야로 구성돼 있고, 중국에 전해진 북방경전은 4아함으로 구성돼 있으며, 남방경전 속의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는 북방경전인 아함경에는 빠져있다. 그리고 니까야와 아함 모두 그 하나하나가 1경(經)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經)으로 집성돼 있다.

    남방경전인 팔리어 대장경(니까야)의 율장(律藏)은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i), 건도부(健度部, Khandaka), 부수(付隨, Pariv?ra)의 3부로 이루어져 있고, 논장(論藏)은 법취론(法聚論, Dhamasa?ga?i), 분별론(分別論, Vibha?ga),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atti), 논사(論事, Kath?vatthu), 계설론(界說論, Dh?tukath?), 쌍대론(雙對論, Yamaka), 발취론(發趣論, Pa??h?na) 등의 7론이 유명하다.


     <남방경전인 팔리어 대장경 <5부 니까야>와 북방경전인 <4아함(阿含)>의 비교>


   --------<남방 경전의 5부 니까야>

   ①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 長部阿含) - 길이가 긴 경을 모은 것.

   ②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 中部阿含) - 중간 정도 길이의 경을 모은 것.

   ③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 - 相應部阿含) - 주제가 분명한 경들을 주제별로 모은 것.

   ④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 增支部阿含) -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제의 숫자별로 모아서 결집한 것으로 <하나의 모음>부터 <열 하나의 모음>까지 모두 11개의 모음으로 구성돼 있다.

   ⑤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나머지 경들을 모은 것으로, 이 쿳다까 니까야 안에는 법구경, 자설경, 본생경, 수타니파타(경집/經集), 장로게(長老偈) 등 15개의 소경이 들어있다. 이 쿳다까 니까야(소부)가 한역 4아함(阿含)에는 없다.

 

  ----------<북방 경전의 4아함경>

    ① 장아함경(長部阿含) - 남방경전의 디가 니까야에 해당함.

    ② 중부아함(中部阿含) - 남방경전의 맛지마 니까야에 해당함.

    ③ 잡아함(雜阿含) - 남방경전의 상윳따 니까야(상응부아함)에 해당함.

    ④ 증지부아함(增支部阿含) - 남방경전의 앙굿따라 니까야에 해당함.

   이상과 같이 북방 아함경엔 쿳다까 니까야가 없고, 상윳따 니까야(상응부)와 북방 경전의 잡아함(雜阿含)과의 관계도 다소 차이가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잡아함(雜阿含) 참조할 것.


*니다나카타(Nidanakatha, 인연담/因緣談)---니다나카타(인연담)는 <자타카(Jataka, 본생경)>의 주석서인 자타카 앗타카타(Jataka-attakatha)의 일부로서 팔리어 불교문헌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부처님 전기의 시초라고 평가된다. 초기 경전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붓다에 관한 전기가 시기별로 붓다의 일생을 일관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초의 불타전(佛陀傳)이라 할 수 있다. ‘먼 인연담’, ‘멀지 않은 인연담’, ‘가까운 인연담’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연등불로서 천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던 시대, 제2부는 도솔천에서 하생해서 탄생과 성도까지, 제3부는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건립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닛데사(Niddesa, 義釋)---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에 속해 있는 <수타니파타(Suttanipata, 經集)>에 실려 있음. 이 경은 팔리어 삼장(니까야) 가운데 유일하게 주석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의석(義釋)---옳은 해석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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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陀羅尼, dharani)---일반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주문(呪文, 비밀스러운 문구)으로서 암송하면 커다란 효험이 있다는 신성한 글귀. 부처님의 말씀을 주문 형식으로 만든 것이며,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귀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독송한다.

   한자로 번역하지 않는 것은 번역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변질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고, 신비성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다라니를 한문으로 총지(總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 하며, 주문의 길이가 짧은 것은 진언(眞言, mantra)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 한다.

   진언은 실담문자((悉曇文字, 산스크리트문자)로 된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육자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이나, 개법장 진언인 「옴 아라남 아라다」처럼 짧으면 한 자, 길어야 두 세줄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라니는 훨씬 길다. 예컨대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나 <능엄경>의 능엄신주(楞嚴神呪)처럼 상당히 길다.


*다라수(多羅樹, 산스크리트어 t?la)---종려과(야자수)에 속한 나무 이름. 인도 남부 ? 스리랑카 등지에서 자라는 열대식물임. 가지가 없으며 높이는 30m에 달한다. 자라는 꽃 이삭을 자르면 즙액이 나오는데, 이 즙액은 설탕의 원료로 쓰고 발효시키면 럼(rum)이라는 술이 된다. 또 이것을 증류한 것이 아라크(arrack)라는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술이다.

   그 잎은 고대 불경을 새기는 종이 역할을 했으며, 종이보다 습기에 강해 보존성이 뛰어나다. 이 잎을 패다라(貝葉, 貝多羅葉, pattra)라 한다. 패다라 잎을 너비 6.6cm, 길이 66cm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잘라 앞면과 뒷면에 모두 송곳으로 글자를 새기고 기름을 바르면 기름이 스며들면서 글자가 나타난다. 이렇게 불경을 새긴 잎 끝에 구멍을 뚫어 꿰매면 패엽경(貝葉經)이 된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이 나무로 높이의 척도로 삼기도 했다.---→패엽경(貝葉經) 참조.


*다보불(多寶佛)---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부타라트나(Prabhutaratna)이며, 동방 보정세계(寶正世界)의 교주다. 대보불(大寶佛)이라고도 하며, 일정한 모습은 없다.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온다. 이 다보불이 과거에 보살로 있었을 때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장차 입멸하면 온몸 그대로 사리가 돼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장소에는 반드시 출현해 그 설법의 위력을 증명하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해 법을 설할 때마다 보탑(寶塔)의 모습으로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보불은 <법화경>을 설하는 자리마다 보탑의 모습으로 솟아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부처이다. 따라서 다보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보탑은 언제나 석가탑 옆에 쌍으로 안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국사의 다보탑이 석가탑 옆에 쌍으로 있다.


*다비(茶毘)---산스크리트어 자피타(Jha-pita)를 음역한 말.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일을 이르는 말.


*단견(斷見, 산스크리트어 uccheda-drsti)---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뿌리박고 있다. 그 하나가 단견으로서 나와 세상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질 뿐이라는 허무론에 빠지는 극단적인 견해이다. 즉,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해 허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죽으면 심신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에 돌아간다는, 존재 자체를 아주 없는 것으로 끊어 없애버린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다른 하나는 나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상견(常見)이다. 초기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르침이 단견과 상견이다. 그런데 연기법은 단견에도 상견에도 떨어지지 않는 중도이다.


*단경(壇經)---→육조단경(六祖壇經) 참조.


*단말마(斷末魔)---‘단말마’란 말마를 끊는다는 말이다. ‘말마(末魔)’는 범어 marman로서 육체의 관절이나 육체의 치명적 부분, 즉 급소를 의미한다. 이것을 건드리거나 부딪치면 심하게 아파서 죽거나 발광한다고 믿었다. 단말마는 그 급소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수(水) ? 풍(風) ? 화(火) 삼대(三大) 중에서 한 종류가 유달리 많아지고, 그것이 말마와 부딪쳐 목숨이 끊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죽기 바로 직전 빈사상태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단말마의 고통’이라고 한다.


*단멸공(斷滅空)---공(空)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단멸공 또는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그리고 더러 단멸공을 무기공(無記空)과 비슷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기공이란 공에만 집착한 나머지 무념(無念)의 지혜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즉, 공사상(空思想)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음을 무기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공에 집착하면 단멸공이라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 어둡고 명료하지 못한 무지에 빠져 미혹한 어두움(無明)에 싸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변견(邊見), 즉 한쪽에 치우쳐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라고 하는 것이다.---→무기공(無記空) 참조.


*단멸론(斷滅論)---석존시대에 일반 사상계에서 주장한 이론인데, 특히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의 아지타(Ajita) 등의 주장이다. 단멸론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반드시 소멸해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정통 바라문적인 아(我, atman)의 상주(常住)를 인정하는 설과는 반대로 아(我) ? 영혼은 신체의 파괴와 함께 완전히 단멸 ? 소실해 사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이다.

   이러한 이론은 불교에서의 무아(無我)의 가르침과 혼동을 일으켜 불교적 가르침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붓다는 사후 세계(내세)를 부정하지 않았고, 특히 업의 과보를 강조함으로써 단멸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지타(Ajita)---본명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고대 인도의 반(反)브라만적 자유사상가인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한 명으로 유물론자이다. 그는 인간은 땅ㆍ물ㆍ불ㆍ바람 등의 네 가지 원소로 구성돼 있고, 그것들은 인간이 죽은 후, 각각의 집합체로 돌아가며, 시체가 화장된 후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영혼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또 선악업(善惡業)에 의한 과보도 부정했다.


*단월(檀越)---산스크리트어 다나파티(danapati)을 음역한 것으로 시주(施主)라 번역한다. 사찰이나 승려에게 물건 따위를 봉양하는 일.


*단주(短珠)---54개 이하의 구슬을 꿰어 만든 짧은 염주.


*달라이라마(Dalai-Lama)---티베트 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룩파(거루파/格魯派, 황교)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 ‘달라이’는 바다를, ‘라마’는 스승을 뜻한다. 달라이라마는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위까지 가진다.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제14세로서 중국군의 진주로 한때는 새 체제에 복종했으나,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다람살라에 망명정권을 수립해 현재에 이르렀다.


*달마(達磨, dharma)---인도의 고전인 <베다>에서 사용된 법(法)이라는 말로,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냈고, 후에는 정도(正道) ? 정의(正義)로 변했으며, 불교에서는 법칙, 진실, 불법(佛法) 또는 제법(諸法) 등의 의미로 쓰였다.


*달마(보리달마/菩提達磨, ?~528)---보리달마는 산스크리트어 Bodhi Dharma를 소리 번역한 것이며, 흔히 달마대사라고 한다. 붓다의 제27대 직계 제자인 반야다라(般若多羅: ?~457) 존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제28대 조사(祖師)가 됐다.

   6세기 초 해로로 중국으로 건너와서 양(梁)을 거쳐 북위(北魏)의 숭산 소림사(嵩山少林寺)에 들어가 면벽 9년의 수행을 함과 동시에 제자 혜가(慧可)를 얻어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중국 선종의 시조가 됐다. 이후 선(禪)은 불교 발생지인 인도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크게 발전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선은 중국화 된 선불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헌데 같은 인도 출신으로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보리유지(菩提流支)는 달마대사를 시기한 나머지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AD 528년 달마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에 하남성 웅이산(熊耳山: 해발 912m)에 장사를 지냈다. 헌데 달마대사는 독살 당한 뒤 관속에 한 짝의 신발만 남기고 서천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宋雲)이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고원에서 대사를 만났다. 대사는 주장자에 신 한 짝을 꿰어 들고 유유히 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서천으로 가노라. 너의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느니라.”라고 했다.

   송운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하고 귀국해보니 과연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 왕이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무덤을 파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관속에는 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아래 글은 양 무제(梁武帝)가 달마대사를 추모하는 비문이다.

  「슬프도다.

   보고도 보지 못했고,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

   지난 일, 오늘날에 뉘우치고 한 됨이 그지없도다.

   짐은 한낱 범부로서 감히 그 가신 뒤에 스승으로 모시나이다.」


     ※송운(宋雲)---중국, 남북조 시기의 승려. 돈황 사람. 생몰연대 미상. 북위 말, 효명제의 사절로 중앙아시아제국을 방문했다. 낙양을 출발, 서역남도를 거쳐서 간다라 각국을 역방, 각각 국서를 봉정했으며, 대승 불전 170부를 얻어 가지고 522년 귀국했다. 그의 여행기는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수록돼 있는데 당시 여러 나라의 사정, 불교신앙의 상태, 불적(佛跡)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서역사정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인데, 문헌학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다.


*달마급다(達磨?多, Dharmagupta)---BC 3세기경 인도 승려, 담무덕(曇無德)이라 하기도 한다. BC 4세기경의 논사(論師)인 우바국다(優婆?多)의 5대 제자 중 하나로, 처음에는 부파불교의 화지부(化地部)에 속했었으나, 법장부(法藏部)를 만들어 독립했다. 이 법장부를 담무덕부(曇無德部)라고도 한다. 담무덕은 출가한 승려가 불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계율을 자세히 기록한 불교 율전인 사분율(四分律)을 작성했다.

     ※사분율(四分律)---담무덕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율서(律書). 4대 계율서(戒律書)의 하나이다.


*달마서래의(達摩西來意)---달마대사가 서쪽 땅 인도에서 동쪽 땅 중국으로 건너 온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말. 불교의 근본이 무엇이냐, 불법의 참 뜻이 무엇이냐 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즉, 달마가 서쪽에서 가져온 참 진리의 근본은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조주(趙州從?, 778~897)스님의 대답은 뜻밖에도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였다. 이 말은 화두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잣나무는 감정이 없는, 무심한 나무이다. 무심이란 공(空)을 뜻한다. 즉 무심한 공의 상태가 바로 달마대사가 서쪽(인도)으로부터 가지고 온 선(禪)의 진리요, 그대가 찾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말이다.---→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참조.


*달마야중(達磨耶衆)---여기서 ‘달마’는 중국에 선을 최초로 전한 달마대사가 아니라 법, 혹은 진리라는 ‘다르마(dharma)’를 의미한다.

   ‘야(aya=耶)’는 접미사로 ~에게, 영어로는 ‘to’의 뜻이고, ‘중(衆)’은 무리, 모음이란 말이다. 따라서 달마야중은 달마야(dharm?ya=達磨耶)라는 산스크리트어에 ‘모음’이란 뜻의 ‘중(衆)’이라는 한자를 합친 글이므로 ‘달마야중’은 ‘진리의 모음에게’란 뜻이 된다.


*담란(曇鸞, 476~542)---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승려. 담란은 정토교에 귀의해 세친의 <정토론(淨土論)>에서 힌트를 얻어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한 정토삼부경으로 정토사상을 확립하고자 노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고유의 민간신앙도 원용해 정토사상을 중국에 정착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와 같이 실질적인 중국 정토교의 기틀을 확립했으므로 후세에 그를 중국 정토종의 제1조라 불렀다.

   한편 <무량수경론>의 주석인 <왕생론주(往生論注)>를 저술하고, 또한 아미타불의 본원과 그 성격을 올바르게 포착해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분별해 타력본원설을 주장하면서 난행도를 버리고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편승하는 이행도를 따를 것을 선포했다.

     ※타력본원설(他力本源說)---부처와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타력구원의 사상.


*담마(曇摩, Dhamma)---팔리어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마를 설하셨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담마”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경우 ‘담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보다 진리나 우주현상, 바른 길 등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때문에 담마를 ‘가르침’이라는 한 단어에 한정하기보다는 그냥 ‘담마’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한자로 번역될 경우 ‘법(法)’이라 해서, 부처님의 담마를 ‘불법(佛法)’으로, ‘붓다 ? 담마 ? 승가’를 ‘佛 ? 法 ? 僧’으로, ‘담마의 바퀴’를 ‘법륜(法輪)’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법(法)’이라는 번역은 의미가 한정돼 담마의 뜻을 명쾌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좁은 의미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함축적 의미에는 여러 다양한 뜻이 내포돼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할 경우, 너무 막연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의미, 담마가 지닌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진리(법)인 사성제(四聖諦)와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와 12연기(緣起)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담마류지(曇摩流支, Dharmaruci)---5세기에 중국 5호 16국의 후진(後秦)에서 활약한 서역 출신 승려. 법락(法樂)이라고도 한다. 405년에 중국으로 왔으며, 그는 계율을 잘 알았으므로 구마라습 등과  <십송률(十誦律)> 번역에 참여했다.---→십송률(十誦律) 참조.

                

*담마야사(曇摩耶舍)---서역(계빈국) 승려로 중국 이름은 법명(法明)이다. 5세기 초 진(晋)나라 때 중국으로 와서 역경사업을 펼치다가 5세기 중엽 송(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때 서역으로 돌아갔다. 담마야사에게는 인도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축법도(竺法度)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도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를 잘해 스승을 도와 역경사업에 종사했다.---→축법도 참조.

     ※계빈국(?賓國)---펀자브(Punjab) 북쪽, 카불(Kabul) 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


*담무덕(曇無德)---달마급다(達磨?多)와 동일 인물.---→달마급다(達磨?多) 참조.


*담무참(曇無讖, 산스크리트어 Dharma-rak?a, 385~433년)---중인도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한 후, 처음에는 소승불교와 인도의 일반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그 후 대승불교를 연찬한 후, 수많은 대승경본을 가지고 서역의 구자국(龜玆國)과 노선국(露善國)을 거쳐 돈황에서 수년간 머무르며 북량(北?)의 왕(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 재위:401년 ~ 433년)의 비호 하에 <대집경(大集經)>, <대운경(大雲經)>, <불소행찬(佛所行讚)>, <열반경(涅槃經)> 등을 한역함으로써 그가 번역한 경 ? 율들은 중국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거몽손의 오해를 받아 피살됐다.


*담판한(擔板漢)---널판지를 등에 짊어지고, 옆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이다. 인간은 원래 150도를 돌아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선종에서는 소승의 나한을 좁은 소견이라 해서 담판한이라 한다.


*담징(曇徵, 579~631)---고구려 승려. 영양왕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했고, 채색, 지묵, 공예에도 능해 일본 불교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당간(幢竿)이란 사찰에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당(幢;깃발)을 다는 깃대를 말한다. 그리고 깃대(장대)를 양쪽에서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지주는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철제 혹은 목제인 경우도 있다.

   석재 당간지주로는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가 유명한데, 이 당간지주의 서주(西柱) 서면(西面)에 826년(흥덕왕 1)에 채석해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주기(柱記)가 각자(刻字)돼 있어서 당간지주 양식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철제 당간지주로는 충북 청주 용두사 터 철 당간에 그 조성 연대와 철통의 척 수가 새겨진 명문이 있어서 국보 제41호로 지정돼 있다.


*당취(黨聚)---신라 말에 학문이나 수행이 없는 승려들이 모여서 조직한 비밀결사. 땡땡이중ㆍ땡추(당취) 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숭유배불 정책으로 인해 승려의 지위가 땅에 떨어진데다가 조선 중기 이후 생활고로 인해 당취들이 많이 생겼다.         


*대광명(大光明)---태양의 광명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처럼, 지혜의 광명은 시방 삼세를 두루 비추기 때문에, 태양의 광명에 비유해서 지혜의 광명을 대광명이라 한다. 태양의 광명은 구름이 끼면 밝지 못하지만, 지혜의 광명은 어떠한 것도 다 비추기 때문에 태양 광명보다 더 밝은 것이다. 그리고 대광명은 아미타불을 뜻한다.


*대기설법(對機說法)---듣는 이, 혹은 질문하는 이의 이해 수준(근기)에 따라 그에 맞추어 적절한 언어와 방편으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응병여약(應病與藥)에 견주기도 한다.


*대념처경(大念處經, 팔리어 Maha Satipathana Sutta)---<대념처경>은 원시경전의 하나로 <중아함경> 권26에 실려 있고, 4세기말 계빈국(?賓國) 출신의 학승 구담 승가제파(瞿曇 僧伽提婆, Gautama Sa?ghadeva)가 한역했으며, <사념처경> 또는 <염처경>이라고도 한다.

   <대념처경>의 팔리어 원 제목 ‘마하 삿띠팟타나 숫타’에서 ‘삿띠(Sati)’는 정념(正念)의 바른 마음챙김 혹은 바른 알아차림을 의미하며, ‘팟타나(pathana)’는 몸, 느낌, 마음, 법 등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에 굳건하고 면밀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마음챙김이 그 대상 속에 파고들어 지속적으로 면밀하게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경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올바른 생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뜻으로 욕심을 비롯한 일체 번뇌를 생각 속에서 지워버리고 생의 참뜻을 깨우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사념처란 몸의 관찰[身念處], 느낌의 관찰[受念處], 마음의 관찰[心念處], 법의 관찰[法念處]를 말한다.  

   그리고 이 대념처경에 위빠사나 수행법이 잘 설명돼 있어서 남방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역으로 된 <대념처경>은 <중아함경>에 속해 있지만, <남전대장경>엔 제7권 <장아함부>에 포함돼 있다.---→사념처(四念處), 승가제파(僧伽提婆) 참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의 17년간(629년 ~ 645년)에 걸친 인도에의 구법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현장이 장안을 떠나 세계불교학의 중심지인 나란타(Nalanda:那爛陀)대학에 들어가 수학한 후 인도와 서역을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기까지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당시의 불교 정세나 그 지방의 형편을 아는데 요긴한 자료이다.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대승열반경>을 말함.---→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참조.


*대반야경(大般若經)---원명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으로서 중요한 대승경전이다. 전체 600 권으로 반야부 계통의 경전을 집대성한 총서이다. 대승경전 성립의 중기에 집대성된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玄?)이 한역했다.

   내용은 전체적으로 공(空)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며, 육바라밀 중 특히 반야바라밀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는 부처님의 모체요 육바라밀의 원천으로서 일체의 불법이 반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육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고, 육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의 지혜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량으로도 가장 방대한 경전으로 그 사상적 내용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에도 그 첫머리에 이 경을 배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은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만큼이나 그 경명도 아주 다양하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열 가지를 ‘십본반야(十本般若)’라고 한다.

     ①<소품반야경> ②<대품반야경> ③<인왕반야경> ④<금강반야경> ⑤<반야심경> ⑥<유수반야경> ⑦<문수반야경> ⑧<승천왕반야경> ⑨<이취반야경> ⑩<대반야경>. 이 가운데서 ③번과 ⑤번 이외에는 모두 ⑩번의 600권<대반야경>에 포함돼 있다.---→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참조.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혹은 줄여서 <열반경(涅槃經)>이라 한다. 경전 중에 열반경류는 부처님의 입멸을 다루고 있는 경전들인데, 크게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으로 나눌 수 있다.

   소승열반경은 부처님이 입멸한 것을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데 반해, 대승열반경에서는 그 사건의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전자는 부처님 입멸 전후에 걸친 부처님의 행로와 발병, 춘다(純陀)의 공양, 최후의 유훈 그리고 불멸 후의 슬픔과 사리 분배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승열반경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역과 티베트역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상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고타마 붓다가 설파한 법의 의의가 대승불교의 교리와 실천도의 관련 위에서 기술돼 있는데, 주요 내용은, 

     1) 부처의 본체로서의 법신(法身: 진리 자체)은 상주불변(常住不變)이다.

     2) 불교 본래의 무아(無我)의 입장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열반의 경지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3) 일체중생, 즉 생명을 받은 모든 것에는 부처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극악불신(極惡不信)의 천제(闡提)라도 성불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천제(闡提)---‘일천제가 (一闡提迦)’의 준말. 불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소승열반경에는 팔리어본 경장인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에 실린 <대반열반경>과 <유행경(遊行經)>, 그리고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불유교경(佛遺敎經)>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대승열반경에는 <대반니원경>과 <대반열반경>등이 있는데, 소승열반경, 대승열반경 모두 <대반열반경>이라 했음을 알 수 있고, 아래와 같은 대승열반경이 있다.

   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 - 북량(北?)의 담무참(曇無讖) 번역. <북본열반경(北本涅槃經)>이라 일컬음. 부처가 쿠시나가라(ku?inagara)의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열반에 들 때에 대중에게 행한 설법으로, 열반의 특성과 법신(法身)의 상주(常住),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천제(一闡提)의 성불 등에 대해 설하고 있다. 담무참의 <대반열반경>은 대승열반경의 대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경전은 모두 40권 13품으로 구성돼 있고, 5세기 초에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 - 동진(東晋)의 법현(法顯), 각현(覺賢, 불타발타라)의 공역. 줄여서 <니원경(泥洹經)>이라고도 한다.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권에서 제10권의 제5 일체대중소문품(一切大衆所問品)까지에 해당하는 다른 번역으로, 주요 내용은 담무참의 번역과 거의 같음.

   ③ 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 - 남송(南宋)의 혜관(慧觀), 혜엄(慧嚴)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 법현이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과 담무참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등 북본열반경의 모호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수정해서 재편집한 것으로, 내용은 북본열반경과 거의 같다. 후세의 〈열반경>에 대한 연구는 대개 이 남본열반경을 기초로 했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선종에서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 경전으로서 이 경에 ‘염화미소(拈花微笑)’ 혹은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그리고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란 말도 이 경전에 나온다. 헌데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대보적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가운데 가장 중심부분인 방등부(方等部)에 속하는 경전이다. 큰 법의 보배를 한 곳에 쌓았다는 뜻의 이 경은 하나의 단독경이 아니라 별개의 여러 경전들을 한데 묶어 정리 집성한 일종의 혼합경이다.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보살이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통해서 불법을 터득하고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부처가 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8세기 초 당나라에서 인도 출신의 학승 보리유지(菩提流支)가 편집한 것으로 모두 49종의 불경을 모아 49회 77품 120권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 <대보적경>을 집대성한 보리유지는 북위(北魏)에서 활약하다가 달마(達磨)대사를 시기한 나머지 AD 528년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달마를 독살한 그 보리유지와 동일 인물이 아니다.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불교 이론서로 원명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으로서, 줄여서 <비바사론>이라고도 하는데,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가 저술했다는 <발지론(發智論)>에 대한 주석서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불경 주석 연구에 종사한 주석가들을 비바사사(Vibhasika, 毘婆沙師))라고 불렀으며, 이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 대비바사론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여러 학자가 편찬했다. 이에는 발지론에서 언급되지 않는 문제까지도 새롭게 채택해 논의하고,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현장(玄?)의 번역본과 북량(北?)의 부타발마(浮陀跋摩), 도태(道泰) 등이 번역한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娑論)>이 있으며, 현장의 번역을 신역, 후자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뛰어난 지혜를 상징하며, 3악도(惡道)를 떠나 위없는 힘을 얻게 해주고 모든 것을 베풀어 주는 보살이다. 아미타 3존불 중 하나로서 아미타불의 우보(右輔)처 보살이다. 줄여서 세지보살이라고도 한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대승은 산스크리트어 mahayna(마하야나)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하며,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한다. 소승은 hinayana의 번역어이다.

   승(乘, y?na)은 수레를 의미하며 중생을 태워서 생사의 고해를 건너 미혹의 차안에서 열반의 세계인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게 한다는 교법을 가리킨다. 승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고 파괴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정신적인 추구이다.

   소승불교는 중생구제보다 자기수행에 역점을 두는 반면 대승불교는 중생을 제도해 불타의 경지에 이르게 함을 이상으로 하며, 그 교리와 이상과 목적이 모두 크고 깊다고 해서 소승불교에 대칭해서 대승불교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불교는 남방불교인 미얀마, 타이, 스리랑카 등의 소승불교와 달리 북방불교로 대승불교이다.

   불멸 500년 경(AD1세기), 당시 승려집단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히고 자기수행과 교리연구에만 몰두한 까닭에 부처님 본래의 뜻이 많이 퇴색돼 있었다. 그래서 대중 구제와 원래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개혁운동의 하나가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대승심(大乘心) 참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논서이다. 대승 경전에 설해져 있는 모든 사상을 종합적으로 회통(會通)해 체계적인 논리를 세워 대승의 본질을 밝혀놓았다. 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원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도의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A?vagho?a, 100∼160?)이 저술했다고 하나 그의 생존연대가 불확실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 양(梁)나라 때의 진제(眞諦)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한역본만 전한다. 한국에는 실차난타의 한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의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 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양, 화합시켜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眞俗一如)]’,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染淨不二)]’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이 논서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의 주요 종파에 영향을 끼쳐 불교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강원에서 필수과목인 4교과에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대승기신론>이 포함될 정도로 존중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대사가 지은 것으로 주석서 중 최고로 평가되는 명저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국가나 종파를 초월해 널리 유포됐고, 이에 관한 주석서가 수백여 종이 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기신론삼대소(起信論三大疏)」이다. 즉, 신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수나라 혜원(慧遠, 513-592)의 <대승의장(大乘義章)>, 당나라 현수 법장(賢首 法藏, 643∼712)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를 일컫는다.

   그런데 기신론의 3대소 중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단연 혜원의 <대승의장>를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장의 <기신론의기>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곳도 적지 않다. 따라서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가 단연 으뜸의 기신로소로서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기신론 연구의 기본문헌으로 삼았다. 

   그리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일명 <해동소(海東疏)>라 하고, 혜원의 <대승의장>을 <정영소(淨影疏)>, 현수가 지은 <기신론의기>를 <현수소(賢首疏)>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승불교(大乘佛敎)---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불교가 발전하다가 기원 전 3세기 무렵에 교단 내에 교리 해석 문제에 이견이 생기고, 기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분열이 시작됐다. 이후 분열의 시대를 부파불교라 하는데, 부파불교시대에는 지나치게 교리 중심으로 발전해 불교 교리가 너무 번쇄해짐으로써 일반 대중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이에 반발해서 기원 전 1세기경부터 대중적인 성격을 띤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대승불교라 하며, 상대적으로 기존의 불교를 소승불교라 했다. 대승불교는 이후 중국, 티베트, 우리나라, 일본 등 주로 북방으로 전파돼 북방불교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반야의 지(智)와 공(空)사상, 그리고 부처님의 대자대비 사상을 바탕으로 해 육바라밀 수행을 강조하고, 중생구제에 목표를 두고 있다.---→소승불교(小乘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참조.


*대승심(大乘心)---불교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 구제만 추구하는 사람을 작은 수레에 비유해 ‘소승(小乘)’이라 하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하면서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심(菩薩心)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큰 수레에 비유해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말하면, ‘위로는 성불하기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는 마음[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다.  


   ---육조(六祖) 혜능선사의 삼승(三乘)에 대한 말씀---


   어떤 학인이 육조에게 “부처님이 삼승법을 설하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셨는데, 잘 모르겠으니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라고 했다. 삼승(三乘)은 소승(小乘), 중승(中乘), 대승(大乘)이다. 이에 대해 육조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보고 듣고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소승이고, 법을 깨달아서 뜻을 아는 것[오법해의(悟法解義)]은 중승이고, 깨달은 법에 의해 닦고 행하는 것[의법수행(依法修行)]은 대승이다. 그리고 생각 생각이 머무는 데가 없으면[염념무주(念念無住)] 그것이 최상승이다.”

   간단하고 쉽고 분명한 말씀이다. 소승은 범부들이 하는 것이고, 중승은 중등근기가 하는 것이고, 대승은 보살같이 근기가 높은 이들이 하는 것이다. 그 위에 최상승이란 삼승을 훨씬 뛰어넘는 상근기를 말함이다. 견성을 해서 만법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은 버리고 저것은 취하고 그럴 일이 없는 것이 최상승이다.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근래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란 주장을 편다. 대승불교는 부처님 입멸 후 약 500년경에 성립한 새로운 교설로서 부처님이 직접 설한 교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의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의 주장이다. 그리고 부파불교 당시에도 진보적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소승에서 부처님교설이 아니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파불교 당시 지나치게 교리를 미세하게 다루어 너무 번쇄해졌고, 그러다가 보니 일부 부파에서는 부처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반발해서 대두된 대승불교의 사상은 공(空)사상을 바탕으로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대승경전은 그 근간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부처님의 교설이 아니라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북방불교권은 대승경전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근본취지를 더욱 선양해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 이를 높이 숭앙하고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중국 수나라 시대 혜원(慧遠:523∼592)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한 해설서로서 불교교리 중 중요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여러 경전과 논서, 수나라 이전 여러 학파의 주장을 모아 분류한 뒤 대승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주석한 일종의 불교백과사전이다.---→기신론소(起信論疏) 참조.

  

*대승장엄보왕경(大乘莊嚴寶王經)---밀교계의 경전으로 10세기 초반에 완성돼 10세기 말경에 중국에 전래됐고, 송(宋)나라 때 천식재(天息災)가 한역했다. 이 경전은 티베트 등 범어를 중심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지역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는 경전 중의 하나이다. 밀교 총지종(摠持宗)의 소의경전인데, 그 주제는 관자재보살과 육자진언이다. 그리고 이 경전이 「옴 마니 반메 훔」의 육자진언을 설하는 유일한 경전이기도 하다.


*대웅전(大雄殿)---불교의 선종 계통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당우(堂宇).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 혹은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했다. 따라서 대웅전의 주존불은 석가모니불이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이다.


*대일경(大日經)---원명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이고, 이 불경의 뜻은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성불해서 신묘한 변화를 나타내고 가지(加持:부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통해 중생을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경지로 이끄는 경’이라 하겠다.

   대일경은 7세기 중엽 서부 인도에서 성립됐다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나라시대 인도 출신 승려 선무외(善無畏: 637~735)가 한역한 것과 9세기 초엽의 티베트어 역본이 전한다.

   밀교의 근본성전 가운데 하나로서 <금강정경(金剛頂經)>과 함께 2대 경전을 이룬다. <대일경>은 다른 대승경전들과는 달리 “보리심을 인(因)으로 하고, 대비를 근본으로 하며, 방편을 구경(究竟)으로 한다”고 해서, ‘보리심’을 중시한 <반야경>의 흐름을 이으면서도, 역사적 인물인 석존을 새롭게 이해해 법신불로서의 ‘대일여래’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에서는 다른 대승경전들과 달리 본존불이 석가불이 아니라 대일여래라고 불리는 바이로차나불(Vairocan, 비로자나불)이다.

   그리고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가 성립하는 사상적 근거가 됐고, 대일경의 사상은 태장만다라로 집약되는데, 태장이란 어머니의 자궁처럼 만물을 탄생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대비(大悲)의 만행(萬行)에 의해 보리심이 자라나고 방편의 활동이 일어나므로 대비를 태장이라고 표현한다.---→태장계 만다라 참조.


*대일여래(大日如來, Vairocan)---밀교의 본존불. 비로자나 혹은 마하비로자나(摩訶毘盧遮那) 등으로 음역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셔진 비로자불을 말한다.

   밀교 이전의 대승경전인 <범망경(梵網經)>과 <화엄경(華嚴經)> 등에서는 비로자나를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중심을 이루는 광대한 세계관의 주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불타관의 형성은 법신(法身) 사상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역사상 실재했던 불타인 석가모니불과는 달리 우주적 통일 원리의 인격화를 불타로 보는 것이며, 따라서 대일여래의 기본적인 성격은 절대적인 원리의 인격화이다.---→삼신불(三身佛) 참조.


*대일여래삼부경(大日如來三部經)---밀교의 계통의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소실지경(蘇悉地經)을 말한다.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설법[경(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율(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해석한 논술[논(論)] 등 삼장(三藏)을 모은 불교성전의 총칭이다.

   ‘대장경’이란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중국 수나라 시대였다. 그 전에는 삼장(三藏) 혹은 일체경(一切經)이라 했다. 그리고 대장경이라는 이름의 목판이 처음 조성된 것은 중국 송(宋)나라 시대였다. 그때까지는 모든 불경이 필사본이었다.---→개보판대장경(開寶版大藏經) 참조.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20세기 초(1924~34) 일본에서 활자판으로 간행된 대장경. ‘대정(다이쇼)’은 당시 일본의 연호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두 100권으로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모본으로 삼고, 인도의 산스크리트 경전, 팔리어 원전, 중국의 한역 경전 등을 비교 검토하는 등 학계에 보고된 모든 경전을 수집 정리해 활판인쇄로 간행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을 각각 구분해 편찬했으며, 한문 문장에 토를 달고 서로 다른 언어로 간행된 경전의 차이점도 설명했다. 경전의 역사적 발전 순서와 내용에 근거해 분류를 새롭게 했고, 한문 불교경전의 최고 결정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대주 혜해(大珠慧海)---당나라 시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의 제자이다. 대주 혜해선사의 전기는 그다지 명확하게 기록돼 있지 않아서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그는 마조 문하에서 6년간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탈은 오로지 돈오에만 있다고 하는 돈오입도(頓悟入道)의 요지를 밝혔다. 그의 저서로는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 등이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로서 인도 대승불교 초기의 고승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의 저서이다. 흔히 <지도론(智度論)>, <대론(大論)>, <석론(釋論)> 등으로 약칭된다. ‘지도(智度)’란 반야바라밀을 뜻한다.

   AD 2∼3세기 무렵에 이루어졌는데,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없고, 구마라습(鳩摩羅什)의 한역본만이 전한다. 전 100권의 방대한 것이지만 원서는 그 10배나 되며, 구마라습은 그 중에서 처음의 <대품반야경>의 서품에 해당하는 34품만 완역하고, 이하는 초역했다고 한다.

   주석서이지만 오히려 대승불교의 백과전서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원시 불경과 부파불교의 논서, 그리고 초기 대승경전까지 폭넓게 인용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저서이다. 


*대집경(大集經, 산스크리트어 Maha-samni-pata-sutra)---원제는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이며, 전체 60권으로 구성돼 있다. ‘대방등’은 대승경전을 통칭하는 말이고, ‘대집’은 많이 모았다는 말이어서 경전의 이름은 ‘대승의 교리를 많이 모았다’는 뜻이다.

   분량이 많아 북량(北?)의 담무참(曇無讖) 등 여러 사람이 부분별로 한역했고, 부처님이 시방(十方)의 불보살들에게 대승의 법인 공(空)사상과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굴복시키는 법, 다라니(陀羅尼)의 공덕 등을 설한 경전으로 밀교적인 요소가 강하다. 천태종의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의 하나임.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 산스크리트어 Mahabhijna-jnanabhibhu)---대통중혜여래(大通衆慧如來)라고도 한다. 과거 한량없고 끝없는 불가사의 아승지겁(阿僧祇劫)의 부처님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통지승불은 출가 전에는 전륜성왕이었고 16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부왕이 성도해 대통지승불이 되자 아들들은 부왕의 가신 길을 사모해 모두 출가해 사미가 됐다. 이들이 모두 출가해 성불했으니 아촉불, 아미타불을 비롯한 열여섯 부처가 출현했는데, 석가모니불이 열여섯째 부처라고 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원제는 <이만오천송반야(二萬五千頌般若)>이고, 이를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라고도 한다. 404년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했다. 용수(龍樹)가 저술한 대지도론(大智度論)이 바로 이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이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또 하나의 반야경인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과 구별하기 위해 대품반야경이라 이름 했다.

   <반야경>이란 단일경전이 아니고 같은 계통에 속하는 많은 경전의 총칭이다. 그래서 현존 대승경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방대한 양이 <반야경>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문에 학자들은 이러한 다수의 반야경전류를 편의상 <대부반야경전(大部般若經典)>과 <잡부반야경전(雜部般若經典)>으로 나누고, 대부반야경전류를 다시 대반야경계(大般若經系)와 대품계(大品系) 그리고 소품계(小品系)의 셋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은 <잡부반야경전>에 속하는 반면, <대품반야경>은 대품계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대승불교는 소승교단이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을 지적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롯됐고,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이끈 사상이 바로 <반야경>이다. 즉 대승불교의 사상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이어받아 사상적으로 부단히 발전해 왔는데, 이러한 불교의 새로운 사상이 태동될 때마다 새로운 경전의 성립은 불가피했고, 이때 새롭게 성립된 경전은 그때마다 <반야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경전이 성립돼 유포될 때마다 이것이 중국에 전래되면 그때마다 새로운 경전으로 번역됐다. 이렇게 경전의 제작과 유포 및 번역이 반복돼 반야경 경전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그 다양한 반야경들의 모든 사상을 총망라해 정리된 경전이 <이만오천송반야경>이고, 이것을 번역한 것이 바로 <대품반야경>이다.---→대반야경(大般若經) 참조.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중국 남송(南宋) 시대의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5대 전인(傳人)이고,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대혜어록(大慧語錄)>이 있다. 묵조선(默照禪)을 비판하고,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해 선종불교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과 태고종은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을 이은 간화선을 그 종지로 하고 있어서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 종고는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데바닷타(提婆達多, 산스크리트어 Devadatta)---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배반자. 곡반왕(斛飯王)의 아들로서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이다. 그는 5통(五通)을 얻어 신통력이 뛰어났었는데, 이에 교만해져서 우두머리가 되려고 갖가지 방법으로 석가모니를 해치고자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석가모니를 25년 동안 성의를 다해 시봉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칭송되던 아난(Ananda, 阿難)의 친형이었다. 마가다국의 아사세태자(阿?世太子)를 꼬여 그 부왕 빈비사라왕을 배반케 해서 죽이게도 했다. 따라서 악인의 대명사처럼 돼 있다.

             

*도(道)란 무엇인가---도(道)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정도로 이해되지만, 종교적으로는 의미가 더 깊고 다양해진다.

   유가(儒家)에서는 도의 도덕적 면을 강조해서 인간행위의 올바른 길, 인간의 가치기준 등 행동규범으로 이해하며, 나아가서 하늘의 길[천도(天道)]을 의미하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도는 마음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종교적 의미가 강하게 부각돼, 우주만유의 본체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실재(實在)로서의 도를 주창하고, 인생의 모든 행위와 자연계의 섭리는 모두 도 아님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나 도에 가까우냐 하는 것으로 그 됨됨이를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불교의 경우, 도는 진리(Dharma) 그 자체, 근본적인 원리 또는 이치, 사람의 본성(本性)을 가리킨다. 여기서 본성이란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비슷한 말이다. 따라서 도(道)란 태초로부터 인간 자신이 중심이고, 처음이며, 마지막 근본의 자리임을, 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과정을 말한다. 즉, 깨달음 자체를 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 자리를 깨닫기 위해 하는 수행과정을 도라고 한다. 따라서 사제(四諦) ? 팔정도(八正道) 등에서 설명하는 도(道)는 ‘올바름’, ‘당위(當爲)’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고 해 수도(修道)라 하고, 도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해 도인(道人)이하며,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도사(道師)란 말이 있는가 하면, 양극단을 피하라는 의미로 쓰이는 중도(中道)는 불교에서는 유명한 도이다.  

   도에 대해 송(宋)나라 때의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혜선사는 그의 저서 <서장(書狀)>에서 “도무방소(道無方所)이니 명대승심(名大乘心)”이라 했다. 여기서 ‘방소’란 방위(方位)이다. 위치를 표시하는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인데 방위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이라고 설정할 수 없다. 그리고 도를 대승심, 즉 대승의 마음이라 했다. 결국 도(道)란 대승심을 찾아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겠는데, 방위가 없으니, 대승심으로 가는 길에 특별히 이것이다 하는 정해진 길이나 방위가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는 평상심이 도[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했고,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꾸밈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함과 버림이 없고, 한결같아서 끊임이 없고, 속됨도 없으며,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라 했다.

   세상 사람은 도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도란 그런 높은 차원의 진리가 아니라 범부가 일상생활을 하는 그런 마음가짐임을 천명하고 있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의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 한결같이 수행을 통해 추구하는 대승심이 도란 것이다.

   따라서 거짓 없는 참된 이치가 진리이고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가 도이다. 그런 이치를 확연히 깨닫는 것을 오도(悟道)라 하고, 그런 길을 본 것을 견도(見道)라고 한다. 그런 도를 말할 때는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끝은 도달함이고, 성취이다. 시작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끝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끝에 도달하기 위해 행동하는 방식과 방법 등이 모두 도이다. 불자들에 있어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 붓다가 제시한 수행법들이 모두 도이다. 그러므로 도란 것은 성취하려는 사람과 성취될 수 있는 길과 성취 또는 도달이란 주제를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도량(道場)---부처님이나 보살이 도를 얻는 곳, 또는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불도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절(사찰)을 뜻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도리천(?利天, 산스크리트어 Tr?yastri??a)---불교의 우주관에서 분류되는 천(天)의 하나. 불교의 27천(天) 가운데 욕계(欲界) 6천의 제2천에 해당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볼 때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 Sumeru)이 있고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다. 모양은 사각형을 이루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봉우리가 있으며, 중앙에는 선견천(善見天)이라는 궁전이 있다. 선견천 안에는 제석천(帝釋天, Indra)이 머무르면서 사방 32천의 신(神)들을 지배한다. 사방에 8천씩의 32천에 선견천을 더한 이 천상계(天上界)를 33천이라 하는데, 33천(三十三天)을 도리천이라고 하는 까닭은 33을 인도말로 음역했기 때문이다.

   제1천 사왕천과 이 도리천은 하늘나라이긴 하지만 지상에 속해 있으므로 지거천(地居天)이라 한다. 이들은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갖추긴 했지만 욕망이 지배하고 있어서 남녀 간의 섹스를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도리천 다음부터의 하늘나라는 높은 공중에 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 한다.---→욕계(欲界) 6천(六天) 참조.


*도량석(道場釋)---하루 중에서 제일 처음 올리는 기도. 사찰에서 새벽 예불을 하기 전에 도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 하루 중에서 사람의 정신이 가장 맑을 때가 새벽시간이다. 수면을 통해 피로했던 심신이 새로워진 탓도 있지만 어둠이 가시고 밝음이 퍼져가는 새벽은 대우주의 기(氣)가 가장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천지만물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첫새벽의 목탁소리는 잠들어 있는 유정(有情) ? 무정(無情)의 일체 생명체들이 법음(法音)을 듣고 미망에서 깨어나라고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도량석을 하는데 있어서 목탁을 갑자기 치지 않고 서서히 약한 음에서 높은 음으로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는 까닭은 모든 신들이나 생명이 있는 것들이 놀라지 않고 깨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도법아사리(都法阿?梨)---불교 교단의 스승을 아사리라 한다. 도법아사리는 밀교 계통에서 이르는 아사리로, 밀교의 태장계ㆍ금강계의 모든 법을 전해 받아 스승이 된 대아사리 승려를 이른다.---→아사리 참조.


*도선(道詵, 827~898)---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도선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창시자로 영암출신이다. 속성은 김씨로,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에서 수도하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게 됐다.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道詵秘記)〉?〈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등이 있다.---무설설(無說說) ? 무법법(無法法) 참조.


*도솔천(兜率天)---욕계(欲界) 6천 중 제4천. 산스크리트어 듀스타(Tusita)의 음역으로서, 의역해서 지족천(知足天)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는 욕계 6천 중 제4천인 도솔천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물고 있는 천상의 정토(淨土)이다.---→도리천(?利天) 참조.


*도신(道信, 580~651)---중국 선종의 제4대 조사로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열어 중국 선종의 교단을 형성 체계화했다. 도신은 일곱 살에 출가해 사미승이 됐고, 제3대 조사인 승찬(僧璨, ?~606)선사에게 불법을 배웠다. 도신의 선사상은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신라의 법랑(法朗, 632~?)에 의해 한반도로 전해졌다.---→동산법문(東山法門) 참조.


*도안(道安, 312~385)---310년 중국에 온 인도 승 불도징(佛圖澄)에게 사사해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강북을 통일하고 도안을 장안으로 모셔왔다. 그는 이때부터 385년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번역된 수많은 경전에 대한 목록을 제작해 후대의 불교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당시까지 경전 해석이 노장의 무(無)사상을 빌어서 불교의 반야사상을 설명하는 등 이른바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였으나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격의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공(空)을 일체제법의 본성임을 풀이했다.

   또한 당시 출가자들의 성은 주로 출생국이나 스승의 성을 따랐는데,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출가자는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이므로 석(釋)씨로 성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석도안(釋道安)으로 칭했고, 이런 풍습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도업(道業)---도업이란 도를 성취하고 진리를 성취하는 그런 업을 이른다. 도행(道行)이라고도 하는데, 결국 수행이란 마음을 닦아 불성을 깨치고 도업(道業)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수행자가 상(相)을 떠나는 행위는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道業)이 된다.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업에 지나지 않는다. 선업이 도업이 되려면 먼저 깨달음을 얻어 공관(空觀)을 확립해야 한다.


*도의(道義)---선덕왕 5년(784)에 당나라로 가서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선종의 법을 얻고, 다시 백장산(百丈山) 회해화상(懷海和尙)에게서 법요(法要)의 강의를 받았다. 헌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설(魔說)이라고 거부당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은거해 40년 동안 수도,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니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했다. 가지산선파(迦智山禪派)의 개조로 일컬어진다.


*도작(道綽, 562-645)---당나라시대의 승려. <안락집(安樂集)>을 지어 불법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분별하고, 교법이 시대와 근기에 상응해야 공덕을 성취하기 쉽다고 했다.---→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참조.


*도피안(到彼岸, 산스크리트어 Paramita)---‘피안(彼岸)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며,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로 건너감을 말한다. 파라미타(Paramita)를 소리 번역해서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라 하고, 의역을 해서 도피안(到彼岸) 또는 도(度)라고 한다. 여기서 피안은 깨달음의 세계이고, 미혹의 세계인 차안(此岸)과 상대되는 말이다. 따라서 도피안은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즉 열반을 의미한다.---바라밀(波羅蜜) 참조.


*도현(道顯)---고구려의 승려. 일본에 가서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역사책을 지었다고 한다.


*독각(獨覺, pratyeka-buddha)---불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달아, 고독을 즐기며 설법도 하지 않는 불교의 성자. 과거 숙세(夙世; 지나간 시대)에 선근(善根, 좋은 과보를 낳게 하는 착한 일)이 많아서 자연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12인연이나 인연법을 관찰해 깨닫기도 한다. 연각(緣覺) ? 벽지불(?支佛)이라고도 한다.---→연각(緣覺), 벽지불(?支佛) 참조.


*독두사문(禿頭沙門)---독두(禿頭)란 대머리를 뜻함. 비록 머리를 깎았으나 사문의 행이 없는 출가자. 옷이나 밥을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한 이를 가리키는 말로서, 교묘한 말로써 민중을 현혹시키고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이 없는 비구를 꾸짖는 말이다.


*독성(獨聖)---독성(獨聖)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성자 가운데 하나로 흔히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 불린다. 다른 나라에선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신앙 대상이다.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가 18나한 중의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독성(獨聖)을 단군 내지는 환웅일 것이라 하기도 한다. 사찰의 독성각(獨聖閣)에는 나반존자상을 모시기도 하지만 독성 탱화가 많이 모셔져 있다.---→나반존자(那畔尊者) 참조.


*독자부(犢子部, 산스크리트어 v?ts?-putr?ya)---붓다가 입멸한 후 300년경의 부파불교시대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갈라져 나온 파로, 가주자(可住子)를 파조(派祖)로 함. 후에 독자부에서 다시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賢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의 4부가 갈라져 나왔다. 이 독자부에서 윤회의 주체로서의 뿌드갈라(pudgala, 個我)라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했던 점에서, 불교의 근본교리인 무아설과 상치되며, 이 때문에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 즉 불법 안에 있는 외도로 비난받았다.


*독화살의 비유---하루는 만동자(蔓童子, 말룽꺄뿟타, 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하는가.<중아함 권 60. 전유경(箭喩經) >”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에는 그러한 해명이 없으므로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 끝까지 부처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지 않는다면 부처님 곁을 떠나겠다는 단호한 태도까지 보였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일반 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화살 깃이 매 털로 되었는지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문제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인간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이와 같이 빨라서, 한가로이 이것저것 따지는 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쓸데없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의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인생의 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실적인 고통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응해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펴는 부처님의 목적이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부닥친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돈교(頓敎)---얕고 깊은 일정한 수행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 차례를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깨달음의 경지를 설한 가르침을 말하여, 돈오(頓悟)와 같은 맥락이다. - 점교(漸敎)에 대비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돈오(頓悟)란 담박에 깨닫는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점진적으로 혹은 단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점오(漸悟)라 한다. 그래서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성철(性澈)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참조.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당나라의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의 어록집. 저자는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6년간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 돈오입도(頓悟入道)의 요지를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해탈은 오로지 돈오(頓悟)에만 있다고 했다. 여기서 ‘돈(頓)’은 일시에 망념을 없애는 것이며, ‘오(悟)’는 무소득(無所得)을 깨닫는 것이고, 돈오를 이루려면 좌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문장은 대부분 평이하며, 기발한 표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깊은 선 체험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


*돈오점수(頓悟漸修)---줄여서 돈점이라 한다. 불교에서 선(禪)을 수행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해 가는 수행방법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점진적인 것이 점수(漸修), 단박에 깨닫는 것을 돈오(頓悟)라 한다. 돈오를 위해서는 그전에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뜻, 또는 먼저 돈오하고 난 뒤에 점수한다는 뜻. 돈오점수를 표방한 대표적인 인물이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다. 성철(性澈)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돌(?)---꾸짖을 돌. 꾸짖다, 놀라 지르는 소리, 어이!


*동사섭(同事攝)---사섭법(四攝法)의 하나. 부처나 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몸을 나타내어 사업, 고락, 화복 따위를 함께해 그들을 진리에 이끌어 들이는 방법을 이른다.---→4섭법(四攝法) 참조.

  

*동산법문(東山法門)---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을 이은 제5조 홍인(弘忍, 601-674)의 선법(禪法)을 말함. 도신과 홍인은 기주(호북성) 황매현 쌍봉산(雙峰山 = 일명 파두산/破頭山, 西峰과 東山 두 봉우리가 있었음)의 서봉에 함께 머물렀으나 도신이 입적한 후, 홍인은 그 산의 동쪽에 있는 동산(東山 = 빙무산/馮茂山)에 있는 유거사(幽居寺)로 옮겨 그의 선법을 선양했기 때문에 동산법문이라 일컫는다.

   도신의 선법은 좌선해 오로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본성을 주시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와 하나를 응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움직이지 않는 수일불이(守一不移)로 요약될 수 있고, 홍인의 선법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확인해서 잘 지키는 수심(守心)에 있었다.---→일행삼매(一行三昧) 참조.  

     ※황빙무(黃馮茂)---원래 동산의 산 주인인 지방호족이었음. 그가 5조 홍인을 존경해 이 산을 기증했기에 빙무산이라고도 함.

     ※수일불이(守一不移)---오로지 한 물건을 응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움직이지 않음.


*동체대비(同體大悲)---불교 교리의 핵심사상. 나와 남이 따로 없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 남의 생명을 내 생명과 동일하게 본다는 경지, 내 생명이 소중한 만큼 남의 생명도 소중하고, 나와 상관없는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과 같은 맥락의 말이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라고 하는 사성제(四聖諦) 사상과도 일맥상통해 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리이타(自利利他), 원융무애(圓融无涯) 정신도 같은 맥락이다.

    ※가이아(Gaia)의 이론---지구 시스템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가이아로 보는 이론. 즉, 가이아 이론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물리 ? 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데 전 지구의 생물권이 관여하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헌데 인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물권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암적인 존재였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이론은 불교의 동체대비의 가르침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불가결의 사상임을 가르치고 있다. 가이아(Gaia)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임.


*동체삼보(同體三寶)---불 ? 법 ? 승 삼보가 의미상으로는 각각 다른 것이나 본질적으로 일체라고 하는 것을 동체삼보(同體三寶)라고 한다.


*두두물물(頭頭物物)---삼라만상 두두물물(森羅萬象 頭頭物物)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며, 세상의 모든 것에 불심이 있다는 뜻. 낱낱의 개체마다 모두 진리가 들어 있다는 뜻.


*두순(杜順, 557~640)---수 ? 당시대의 승려. 중국 화엄종의 개조(제1조). 법순(法順)이라고도 함. <화엄법계관문(華嚴法界關門)>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두타행(頭陀行)---출가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주를 험하고 간단하게 해 고행을 하는 불도 수행방법의 하나. 이러한 수행은 그 목적이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지, 억지로 육신을 괴롭혀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도의 전통적인 고행과는 다르다.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가운데 가섭(迦葉)존자가 두타행을 가장 잘 닦았기에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했다.


*둔황석굴(敦煌石窟)---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현(敦煌縣) 남동쪽 20km 지점의 명사산(鳴砂山) 동쪽 절벽에 판 석굴군으로,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한다.

   중국 전진(前秦) 시대인 AD355~366부터 원(元) 시대까지 약 1,000여년에 걸쳐 조성됐으며, 석굴의 수가 무려 1,800여개나 되는 대표석인 천불동이다. 이 석굴들은 불교가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됐을 무렵의 것, 전성기 중원풍의 것, 그리고 쇠퇴 ? 형식화된 밀교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것 등 석굴 하나하나에 그 시대와 문화가 반영돼 있다.

   헌데 명사산은 왕모래가 진흙과 섞여 다져진 역암(礫岩)이어서 불상을 새길 수도 없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렸고, 그 부근의 강(월아천/月牙泉)의 강바닥의 진흙을 채취해 이겨서 불상을 만들었다.


*등각(等覺)---등(等)은 평등, 각(覺)은 깨달음으로서, 부처님들이 모두 깨달은 것은 한결같이 평등하므로 등각이라 한다. 그래서 등각이 부처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이고, 등정각(等正覺)이라고도 한다.

   한편 수행이 꽉 차서 지혜와 공덕이 바야흐로 불타(佛陀)의 묘각(妙覺)과 같아지려고 하는 자리. 즉, 부처의 깨달음과 동등한 위(位)로서, 이는 곧 보살의 가장 높은 지위이고, 그 지혜가 부처님과 거의 같다는 뜻으로 등각이라 한다.---→묘각(妙覺) 참조.


*등각(等覺)과 묘각(妙覺)---깨달음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 깊이가 다른데, 등각이나 묘각은 최고의 깨달음에 근접한 것을 말한다. 당나라시대의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의 어록집인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경에 이르기를 ‘등각, 묘각’이라는 말이 있으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이 묘각입니까?”

   “색(色, 물질)이면서 곧 공(空)함을 등각(바른 깨달음)이라 하고, 색도 아니고, 공함도 아님을 묘각(묘한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깨달을 것도 없고, 깨달음이 없다는 것조차도 없는 것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사안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의 두 이름을 붙인 것이며, 본체는 하나요,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일체법이 모두 그러하니라.”-

     ※등각(等覺)---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결같이 평등하다는 의미로 등각이라 한다.

     ※묘각(妙覺)---가장 높은 수행단계(수행을 52단계로 구분했을 때 51단계 수준의 깨침). 더 높은 곳이 없는 최고상태의 깨달음. 자기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 그러므로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이다.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長部)---부처님의 긴 길이의 설법을 모아 놓은 경전, 북전 한역경전으로는 <장아함경(長阿含經)>에 해당한다. 가장 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비롯해 범망경(梵網經), 유행경(遊行經). 사문과경(沙門果經), 세기경(世記經), 선생경(善生經) 등 34개 경문이 실려 있다.---→‘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 참조.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중국 당나라 시대에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 이 말은 달마가 가져온 진리란 무엇이냐? 즉, 무엇이 선의 진리냐? 라는 뜻이다. 이에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무슨 뜻일까? 화두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다. 또한 화두는 암호나 밀명과 같아서 지식과 알음알이로는 분석되지 않는다. 오직 큰 의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탐구한다면 결국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선불교와 화두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잣나무는 감정이 없는 - 무심한 나무이다. 무심(無心)이란 공(空)한 것을 뜻한다. 즉 무심한 공(空)의 상태가 바로 달마대사가 서쪽(인도)으로부터 가지고 온 선(禪)의 진리요, 그대가 찾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말인데, 이런 해석도 주제넘은 짓이다. 그 진의는 말 밖에 있다. 허니 불교사전 뒤적거리는 일로 시간 낭비하다가 “가리키는 달은 바로보지 못하고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다.---조주 종심(趙州從?, 778~897) 참조. 

    ※인도가 중국에선 남남서에 위치하지만 당시엔 서역(西域)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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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교(喇?敎, Lamaism)---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불교를 라마교라 한다. 현재 라마교는 티베트, 몽고, 만주, 부탄, 네팔 등지에 퍼져있다.

   인도 출신의 명승 구루 파드마 삼브하바(Guru Padma-sambhava, 蓮華上座師)를 교조로 삼는다. 구루 파드마 삼브하바는 인도 나란타사에서 밀교를 수학, 유가계(瑜伽系)의 불교를 배우고, 747년 티베트 왕의 초청으로 입국, 티베트 고유한 종교인 B?n교를 흡수해 불교를 정착시켰다. 

   15세기 초에는 총카파(Tsong?kha?pa, 宗喀巴)가 종교 개혁을 단행해 신파(新派)를 만들었다. 이를 황파(黃派), 종래의 종파를 홍파(紅派)라 했다. 이때부터 몇 개의 분파가 생겼으나 황파가 점점 세력을 차지했다. 따라서 현재의 티베트 라마교는 주로 황파이다. 승려인 라마를 불ㆍ법ㆍ승의 3보와 함께 숭배하고 최고의 승려를 달라이라마라 부른다. ‘달라이’는 바다란 뜻이고, ‘라마’는 스승이란 뜻이다. 라마교의 최고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정치ㆍ종교의 두 가지 권한을 다 지배한다.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제14세로서 1959년 중국군을 피해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인도 북서부의 다람살라에 망명정권을 수립해 현재에 이르렀다.


*라자그리하(산스크리트어 R?jag?ha)---왕사성(王舍城)으로 한역된다. 세존 당시 중인도 지금의 비하르(Bihar)주의 파트나(Patna) 남쪽에 있는 라즈기르(Rajgir) 지역에 위치했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이다. 당시 마가국의 국왕은 빈비사라(Bimbisara)왕이었고,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었던 곳이다.---→빈비사라(頻毘娑羅) 참조. 


*라후라(羅?羅, Rahula)---석가여래의 아들임. 어머니는 야소다라((Yasodara, 구이/俱夷). 석가가 성도한 뒤에 출가해 제자가 됨. 석가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 밀행(密行) 제일이라 한다, 밀행 제일에서 ‘밀행’이란 남들이 알지 못하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계율을 세밀한 부분까지 실천한 것을 말한다. 배운 바 그대로 작은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실천했다고 한다.


*라후라(羅?羅, Rahulabhadra, 라훌라바드라, 200년~300년경)---제바(提婆, Aryadeva: 170년~270년)의 제자이자 용수(龍樹)의 손제자로서 반야의 공사상에 밝아 중관학파의 성립에 기여한 학승이다.


*룸비니(藍毘尼, Lumbini)---현재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룸비니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으로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폐허로 방치돼 있던 곳을 1895년 독일 고고학자인 알로이스 포이러(Feuhrer)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룽다(Lungdar)---네팔 불교에서 희망, 소원, 안전 등을 기원하며 거는 깃발. 얼핏 만국기처럼 보이는 이 오색찬란한 깃발은 흰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천으로 물결을 이루는데 색깔마다 상징이 다르다. 흰색은 티베트의 식수가 되는 흰 눈을, 초록색은 티베트의 푸른 물을, 파란색은 시린 하늘을, 노란색은 풍요로운 대지와 곡식을, 빨간색은 열렬한 불심을 뜻한다.


*리그베다(Rigveda)---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으로, 브라만교의 근본경전인 4베다 중 첫째 문헌인데 <리그베다 상히타>의 약칭이다. ‘리그’는 성가(聖歌), ‘베다’는 경전, ‘상히타(sahit?)’는 경전의 집성(集成)을 뜻하는 말이다.

   제식(祭式) 때에 신들을 제장(祭場)에 초청해 제관(祭官)이 부르는 찬가를 모아서 기록한 것이며, 베다 문헌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10권 1,028의 운문의 찬가로 돼 있고, 대부분은 기원전 1000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 전후 수백 년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암송에 의해 후세에 전해지다가 차츰 정비 ?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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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니(魔軍)---마라(魔羅 Mara)라고도 하며, 크리스트교의 사탄(Satan)에 비유되는 존재이다. 마구니는 마귀(魔鬼)가 아니다. 마구니는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다. 마구니는 내적으로 볼 때 내 마음속의 온갖 욕망(식욕, 성욕, 수면욕, 명예욕, 재물욕 등)과 그로 인한 번뇌들, 그리고 외적으로는 수행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여러 잡신들(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신들)을 일컫는다.

   석가모니를 여러 차례 유혹한 ‘욕계(欲界)의 지배자’가 바로 마구니이다. 생과 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런 마음이나 욕구, 집착, 사랑, 증오 그런 번뇌를 가리킨다. 마구니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자신의 분별이니, 즉 스스로의 이면적인 모습이다. 자신의 수행을 방해하는 것들인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즉, 마구니는 일이 너무 안 되는 고난이나 파행 등의 역경(逆境)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으로 일이 너무 잘되고 편해서 수행할 마음이 잘 나지 않는 ‘순경(順境)’도 마구니의 일면이다. 바로 무사안일(無事安逸)도 마구니란 말이다.


*마나사로바(Manasarovar)호수---티베트에 있는 성호(聖湖). 히말라야 북쪽, 티베트 수도 라싸의 서쪽 ‘아리(阿里)’ 지역은 소위 ‘신(神)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지구상의 오지 중의 오지이다. 거기 카일라스산(수미산) 남쪽 자락에 하늘호수[天湖]라 불리는 마나사로바호수가 있다. 해발 4,56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지구상 가장 높은 고도에 있는 담수호이다.

   인더스강, 갠지스강, 알롱창포강, 스투레지강 등 4대 강의 발원지이고, 세계 불교도들의 오체투지 성지순례지이며, 티베트 불교 신앙의 어머니라고 한다. 마나사로바호수를 한번 돌면 한 생애에 지은 죄가 소멸된다고 전해오는 불교 최대 성지의 하나이다.---카일라스산 참조.


*마니, 마니주(摩尼珠)---여의주(如意珠)를 가리킴. 혹은 ‘보주(寶珠)’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이 구슬은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불행과 재난을 없애주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며, 물을 변하게 하는 따위의 공덕이 있다.

*마라난타(摩羅難陀)---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인도 승려. 백제 침류왕 1년(384)에 바다를 건너 중국 동진(東晋)으로부터 건너왔으며, 당시 침류왕이 직접 맞이해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예로써 공경했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마르만(marman)---→말마 참조.


*마른 똥 막대기---→간시궐(乾屍厥) 참조.


*마명(馬鳴)---한역 이름이 마명(馬鳴)이고, 원명은 아슈바고샤(Asvaghoa)이다.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AD80~150>설과 <AD100~160>설이 있는 걸 보면 대체로 AD 2세기경의 인물인 것 같다. 쿠샨 왕조 제3대 카니슈카왕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불교학자이며 시인이다. 북부 인도의 브라만교 출신으로 불교에 귀의해서 보살의 칭호를 얻었고,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대월지국(페르시아)에 가서 포교활동을 했기에 그의 작품이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인도의 고전인 산스크리트어 문학 최초의 불교 시인인데, 그의 작품 <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carita)>은 불타의 생애와 교의를 격조 높게 서사시로 읊은 최초의 완전한 불타전이며, 불교문학의 걸작이자 인도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인도 고전문학 융성의 선구자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마명(馬鳴)이 대승불교의 창시자로 치는데, 그는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후에는 대승불교의 근본 뜻을 해설한 명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를 저술했다고 한다.---→불소행찬(佛所行讚) 참조.


*마 삼근(洞山麻三斤)---중국 송(宋)나라 시대의 동산 화상(洞山守初, 910~990)에게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동산 화상이 “마 삼근”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세 근(三斤)의 마사(麻絲)로 만든 가사(승복)를 걸친 스님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뜻이다. 질문을 하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이므로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지 말라, 즉 ‘즉심시불(卽心是佛)’과 같은 말이다.

     ※당시 삼베 실 3근이 옷 한 벌 감이었다.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彌勒, 270?~350?)---→미륵(彌勒) 참조.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중국 당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선사.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제자인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에게 법을 전수 받았다. 석가모니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조 도일의 문하에는 백장 회해(百丈悔海)를 비롯한 80인 이상의 선지식(善知識)이 배출됐다.  

   마조 도일 선사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의 급소를 찌르는데 결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등 많은 화두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조사선(祖師禪)을 완성시켜 중국 선종의 황금기를 연 뛰어난 선각자였다.

   마조선사는 평상심이 도라고 했다[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즉,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꾸밈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함과 버림이 없고, 한결같아서 끊임이 없고, 속됨도 없으며,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는 도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道)라는 가르침이다.---→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참조.


*마지(摩旨)---절에서 부처에게 올리는 밥. 부처에게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 30분에서 11시 30분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가 하루에 한 끼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마투라(Mathur?) 미술---고대 쿠샨왕조 시대와 굽타왕조 시대에 인도 북부, 델리 동남동 약 140km의 야무나(자무나)강 서안에 면한 옛 도시 마투라(Mathur?)를 중심으로 융성했던 석조(石彫)를 주로한 조각미술을 말한다. 마투라는 동서 통상로의 요충을 차지하고, 상업도시로서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자이나교가 성행하고, 힌두교도에게는 힌두교의 신 크리슈나(Krsna)의 성지라는 종교도시이기도 했다. 따라서 초기 불교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6세기 이후 계속되는 이교도의 침입에 의해서 폐허가 됐다.


*마하(摩訶, Maha)---크다, 많다, 특출하다는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여기서 ‘크다’는 뜻은 ‘작다’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개념이 없는 절대적으로 크다는 의미이다. 즉, 마하란 마음이 광대해 마치 허공과 같이 변두리가 없으며, 모가 난 것도 둥근 것도 아니며,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며, 또한 푸르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흰 빛깔도 아니며, 또한 위 아래와 길고 짧은 것도 없고, 성날 것도 기쁠 것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어서 허공과 같이 넓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세계이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가섭(迦葉) 참조.

   

*마하가전연(摩訶迦?延, 마하가티야나, Mahakayayana)---→가전연(迦?延) 참조.


*마하목건련(目?連, 마우드가리야야나, Maudgalyayana)---→목건련(目?連) 참조.


*마하무드라(Mahamudra, 大手印)---밀교에서 표방하고 있는 네 가지 수인 가운데 하나. 마하는 큰(大), 무드라는 ‘도장 인(印)’이므로 대인(大印)으로 번역된다. 대인은 대 우주의 도장, 진리의 도장이다. 이 도장(진리)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어서 ‘결코 변동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마하바라따(Mahabharata)---인도 2대 서사시의 하나. ‘바라타족의-(전쟁에 관한)-대서사시’라는 뜻으로, 왕위 계승쟁탈로 말미암아 일어난 전쟁과 태고의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약 9 만개의 게(偈)로 된 세계 최대의 서사시이다.

   이러한 <마하바라따>는 가능한 모든 인간관계와 문제들, 그 배경이 되는 갖가지 상황들을 통해서 해답과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제5의 베다로 불린다.

   <마하바라따>가 편집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 이후에 시작됐고, 나중에 첨가된 철학적인 부분이 완성된 기원후 2세기경에야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하바스투(Mahavastu, 대사/大事)---산스크리트어로 씌어져 흔히 <대사(大事)>라 번역되는 부처님의 전기이다. 부파불교시대 대중부 중 설출세부(說出世部)의 율장(律藏) 속에 부처님의 전기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석가모니의 현생과 전생의 기적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으로 붓다를 초인적인 존재로서 취급해 구세주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으로 본 사상이 반영돼 있다. 아주 오래된 내용에서 4∼5세기경의 내용까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여러 편저자가 저술한 내용을 한데 모은 것으로 보인다.


*마하밤사(Mahavamsa, 大史)---대사(大史)라는 뜻이며, <마하방사>라고도 한다. 팔리어(語)로 쓰인 불교를 중심으로 해 작성된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로, 전체 37장(章)의 게송으로 돼 있다. 실론왕 다투세나(재위 460∼478)의 숙부인 비구승 마하나마(Mahanama)가 왕명에 따라 5세기 중엽에 역사서 <디파밤사(D?pava?sa)>를 수정해서 편집했다고 전해진다.---→디파밤사(D?pava?sa, 島史) 참조.


*마하살(摩訶薩)---마하살타((摩訶薩陀, Maha-sattva)의 준말로서 원어 ‘마하사트바’의 음역이다. 큰 보살, 대 보살, 즉 보살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나고 수승한 보살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마하지관(麻訶止觀)---천태대사 지의(智?, 538~597)가 저술하고, 관정(灌頂, 561-632)이 정리 기록한 책이다. 이 <마하지관>은 법화 삼대부(法華三大部)의 하나로서 지의가 수나라 시대인 594년 형주(荊州)의 옥천사(玉泉寺)에서 하안거 동안 강설한 내용을 제자인 관정(灌頂)이 기록한 것이다.

    천태종(天台宗)의 실천적 관심법을 체계화한 저서로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지관(止觀)이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선정 수행법은 천태 이전부터 전해온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모으고 정리한 것이고, 독특한 것은 아니지만 지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지(止)는 선정(禪定)이고 관(觀)은 지혜를 뜻한다. 이 둘을 함께 닦는 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며, 책명 마하지관(摩訶止觀)도 같은 뜻이다.---→지관(止觀), 지의(智?) 참조.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大愛道尼)---불교 교단 최초의 비구니, 번역해서 대애도니(大愛道尼)라 한다. 카필라성 정반왕(슈도다나왕)의 왕비로, 석가의 생모 마야(摩耶) 왕비의 동생이고, 석가모니를 키워준 이모이자 계모이며, 난타(難陀)의 생모이다. 그녀는 석가를 매우 사랑해 석가의 출가를 누구보다도 슬퍼했다. 불교 교단 최초의 비구니가 된 그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항상 계율을 지켜 다른 비구니들의 모범이 됐다고 한다. 팔리어로는 Mahapajapat Gotam 라고 하며, 한역해서 마하바사바제(摩訶婆斯婆提)라고 쓰기도 하고, 


*만공(滿空, 1871~1946)---일제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우리나라 불교를 지키려 노력한 선사로 경허(鏡虛)선사의 제자이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며, 제자들에게 무자(無字) 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주로 수덕사에 주석했고, 문하에 춘성(春城), 벽초(碧超), 비구니 법희(法喜), 일엽(一葉) 등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됐다.


*만다라(曼茶羅, 曼陀羅, mandala)---밀교(密敎)에서는 부처님 불법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여러 가지 도형으로 표현하는데, 만다라는 그런 불화(佛畵, 呪畵)이다. 즉 원 내지 사각형의 형상을 한 깨달음의 집합체이자 그 본질(불법의 진리)을 도형화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상징체계로서, 법계(法界)의 부처가 증험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핵심부는 정중앙의 대일여래와 사방의 네 분의 여래, 그리고 그들을 보좌하는 네 분의 보살로 구성돼 있다. 만다라엔 대체로 아래와 같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①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그림

    ② 수행자의 우주적 심리현상을 도형화한 그림

   그리고 만다라는 <대일경(大日經)>을 중심으로 하는 태장계(胎藏界)만다라와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계(金剛界)만다라로 나뉜다. 금강계 만다라는 법신여래의 지덕(智德)을 불(佛) ? 금강 ? 보(寶) ? 연화 ? 갈마(?磨, karma)의 5부로 나누어 도형화한 것이고, 태장계 만다라는 법신여래의 본체를 어머니 뱃속의 태(胎)에 비유해 도형화했다.


*만동자(蔓童子, 말룽꺄뿟타, Malunkyaputta)---→‘독화살의 비유’ 참조.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영국의 동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쓴 책. 리차드 도킨스는 무신론자의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무신론은 마음의 건전한 독립성 즉, 건강한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학적 논증을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펼치면서, 인격화된 신을 숭배하는 종교(기독교처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로버트 피시그(Robert Maynard Pirsig)의 말을 인용하며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우리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리처드 도킨스는 외친다. 그러한 세계는 자살 폭탄 테러범도 없고, 9.11 테러도 없고, 십자군도 없고, 마녀 사냥도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자연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나,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신을 만들었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만뢰(萬?)---자연계에서 나는 온갖 소리. 산곡 사이(산골짜기)에서 나는 바람과 물의 여러 소리.    ※만뢰구적(萬?俱寂)---밤이 깊어 아무 소리 없이 아주 고요해짐.


*만일회(萬日會)---불교의식의 하나.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한다.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나기를 기원하면서 1,000일 또는 1만 일 동안 큰 소리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 시작된 것은 신라시대이지만 성행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때에는 염불수행하는 풍조가 널리 퍼짐에 따라 만일회를 개최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사원이 많았다.


*만(卍)---산스크리트어 스바스티카(swastika). 불교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표지이자 부처님이 지닌 성덕(聖德)과 길상(吉祥) 혹은 행운의 표시이다. 길상해운(吉祥海雲), 길상희선(吉祥喜旋)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에 이 표지가 있었다고 한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 만자(?)와 왼쪽으로 도는 좌 만자(卍)로 나누어진다.

   이 만자가 유럽에 전해져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갈고리 십자가)가 되기도 했고, 나치스 독일에서는 좌 만자를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라 해서 나치스의 상징 마크로 했다.

       ※ Haken=영어 hook(갈고리), kreuz=영어 cross(십자가).


*만트라(mantra, 진언)----진언(眞言)이란 허튼소리가 아닌 진실한 말, 참다운 말이라는 뜻으로 밀어(密語)라고도 하며, 참된 부처님의 말씀이며 비밀스런 깊은 뜻이 들어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담문자((悉曇文字, 범어문자)로 된 <옴 마니 반메훔>처럼 한 자, 혹은 길어야 두 세줄 정도에 불과한 신비한 힘을 지닌 짧은 음절로 이루어진 주문이다. 신주(神呪) ? 주(呪) ? 밀주(密呪) ? 진언(眞言) ? 밀언(密言)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원문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음사(音寫)하며, 이를 많이 외우면 재액이 물러가고 공덕이 쌓인다고 한다. 긴 주는 다라니(陀羅尼)라고 한다.---→다라니(陀羅尼) 참조.

                   

*만행(萬行)---만행이란 진리에 이르는 길, 수행을 통한 해탈의 길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구도의 길, 즉 행각(行脚)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안거수행 후 여러 대중들과 만나고 여러 선지식들에게 배우고, 또 배움을 주는 행위를 만행이라 한다. 이러한 만행을 통해 하심을 배우고, 지혜를 체험하며, 세상과 중생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불법의 지혜를 보임한다.

   보임(保任)이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깨달은 바를 잃지 않고 더욱 단단히 하는 작업을 말한다. 만행과 행각은 바로 보임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크게는 만행이 따로 있어서 만행이 아니라 사는 것이 그대로 만행이라고도 한다. 고정됨이 없이 행하는 생활자체가 만행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만행이기 때문에 결국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고 할 수 있고, 만행이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가 있다는 것이다.

     ※육도만행(六度萬行)---보살 혹은 중생이 육바라밀을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하는 일. 육바라밀을 여러 가지로 실천하며 행하는 것.

     ※육도윤회(六道輪廻)---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라고 한다.


*말나식(末那識 = 제7 마나스식/Manas識)---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육근(6根)이라 해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 대상인 육경(6境)을 만났을 때 각각의 감각 장소를 통해서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육식(6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을 6식이라 한다. 초기불교 가르침에서는 마음으로 보통 육식까지만 인정했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제6식까지는 표층의식이고, 거기서 좀 더 심층으로 들어간 의식으로 제7식 말나식, 그리고 말나식보다 더 심층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말나식은 삼식(三識)의 하나로서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해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는 아상(我相)을 가진, 이기심(egoism)이 있는 아주 깊은 무명(無明)의 뿌리이다.

   이 제7식 말나식은 미세한 생각, 비언어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며, 모든 집착과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나’라고 하는 자아집착의식(自我執着意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집착으로 오염된 자아의식이다. 그래서 말나식에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가 일어난다고 본다. 이와 같이 4번뇌(4혹/四惑)와 함께 하므로 말나식을 망식(妄識)이라고도 한다.

    ※삼식(三識)---심(心)[제8아롸야식], 의(意)[제7말나식, 식(識0[제6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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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마(末摩)---산스크리트어 marman의 음사. 단말마)와 같은 말.---→단말마(斷末魔) 참조.


*망식(妄識)---모든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고 분별하고 차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의 4번뇌[(4煩惱)=4혹/四惑)]와 함께 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을 망식이라 한다. 따라서 유식학의 핵심사상은 망식을 정화해 지혜를 증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청정한 심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 섭론종(攝論宗), 지론종(地論宗)에서는 제8식인 아뢰야식조차도 망식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아뢰야식을 망식으로 보면서 따로 제9 무구정식(無垢淨識)을 세웠다.


*멸빈(滅?)---무거운 죄를 저지른 수행승을 영원히 승단에서 추방하는 것을 말한다. 멸빈은 불교에서 가장 치욕적인 벌로 승려의 신분증인 도첩(度牒)을 빼앗아 승적을 박탈하는 것이다.


*멸제(滅諦)---4제(諦)의 하나. 일체의 번뇌가 멸진(滅盡)된 상태로서 명성제(滅聖蹄)를 일컫는다.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의 열반을 말한다. 생사의 인과를 없애므로 멸이라 하고, 그 이치가 진실하므로 제라 한다.---→사성제(四聖諦) 참조.


*멸진정(滅盡定)---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팔선정을 닦은 후 다시 그 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행단계인 멸진정에 이르는 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불렀다.

   그리고 멸진정을 상수멸정(想受滅定)이라고도 한다. 상수멸정이란 상(想)과 수(受)의 소멸, 즉 지각(인식)과 느낌의 중지(소멸)을 의미한다. 

   초기경전(P?li-Nik?ya)의 설명에 따르면 멸진정(상수멸정)은 불교수행에서 나타나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상태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남방불교의 수행자들은 일시적으로 조건의 소멸을 이루는 이 중지 상태를 열반의 체험 혹은 열반자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러 수행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범부와 성인의 분수령으로 이해되는 단계로서 수행자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해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정지된 상태다. 이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며, 한 유정(有情)이 현상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멸진정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나함과 아라한 중에서도 사마타 수행이 충분히 돼 있는 분들만이 해당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멸진정이란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없게 된 삼매를 말한다.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리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져서 저 위에 가면 그때는 이생위(離生位)라, 너와 나의 차이 또는 사물과 나와의 차이가 전혀 없이 일체 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돼야 비로소 참다운 정각성불(正覺成佛)이 되는 구경위(究竟位)이다. 그때는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잠재의식에 묻어온 번뇌를 다 뿌리 뽑아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로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완성이요 해탈이다.


*명(銘)---명(銘)이란 ‘마음에 깊이 새겨둔다’는 뜻으로 잠(箴)과 함께 주로 문장 속에 설해진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말이 있듯이, 명(銘) 체로 돼 있는 글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불교의 전적(典籍) 가운데 ‘명(銘)’자를 붙인 글은 부(傅)대사의 심왕명(心王銘)을 비롯해 3조 승찬(僧瓚)의 <신심명(信心銘)>, 법융(法融)스님의 심명(心銘) 등이 있다.


*명(明, viduya)---불교에서 반야(prajna, 般若)란 제법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불교 교리에 제법이란 일체의 구조, 즉 사대(四大), 오온(五蘊), 12처(處)와 삼법인(三法印), 인연(因緣), 인과(因果), 상의상관(相依相關), 법칙성(法則性) 등의 속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에 대한 이해를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산스크리트어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 그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12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12연기법이다.


*명랑(明朗)법사---신라 선덕여왕 4년(635) 명랑법사에 의해 신라에 밀교(密敎)를 처음 들여왔다. 명랑은 자장(慈藏)율사의 생질로서(명랑의 어머니가 자장의 누이임)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신인비법(神印秘法)이라는 방위신(方位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인 신앙을 들여왔다. 그리하여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됐다.---→신인종(神印宗) 참조.  


*명상(名相)---이름과 형상을 말한다. 우리는 그 이름만 듣고도 사물의 형상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름이나 형상은 그 자체가 본래 확실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망령된 오관(五官)을 통해 들어온 생각이 지어낸 빈이름이며, 한 때의 인연을 따라 생겨난 일시적인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름이나 형상은 본래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고,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집착할 바가 못 되는 것인데,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불쌍한 중생은 이들에 매달린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라고 가르침이 곧 공관(空觀)이다. 

     ※5관(五官)---5근(五根) 또는 5력(五力)이라고도 하는데, 곧 5감각 기관(器官)인 눈, 귀, 코, 혀, 몸을 가리킨다. 이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다스려야 하는 다섯 가지 기관이기도 하다.

          

*명상(冥想)과 참선(參禪)---명상(冥想)이란 ‘어두울 명’과 ‘생각 상’을 써서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이란 뜻이다. 명상은 마음을 편하게 가진다는 의미에 가깝고 참선은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로 통한다. 명상은 생각이 있다고 해야 하나 참선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한다. 명상은 마음 편하게 하는 것에 두고 참선은 하나의 생각으로 일여삼매에 들어가야 한다. 일여삼매에 들기 위해 화두를 드는데, 참선이란 화두를 들어 깨닫고자 하는 한 방법이다.

   부처님께서 어째서 인간은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당하는가를 일념 화두로 고민하셨다. 즉 명상이 아닌 참선을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참선은 일념화두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하여 차츰 그 하나 일념화두의 생각도 사라지고 생각한다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면 선정이 온다. 시작이 반이라 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시작이 됐다고 하겠다. 부처님이 고행할 당시 선정에 있었을 것이므로 무념의 상태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종국에는 무념의 상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명색(名色, naamaruupa)---명색의 산스크리트어 n?mar?pa에서, na-ma는 명(名), ru-pa는 색(色)을 말한다.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심식(心識)을 명이라 하고 물질적 존재인 육체를 색이라 한다. 즉,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비물질적이란 정신(마음)을 말하고, 물질적이란 몸을 말한다. 따라서 명색은 몸과 마음을 말함이다.

   그런데 행(行)을 원인으로 식(識)이 일어날 때는 결과의 마음을 말하지만 명색에서 말하는 명은 결과의 마음과 여러 전생에서 행해진 업(業)의 마음들이 포함된다. 즉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모든 마음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와 같이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경전엔 오온(五蘊)을 명색이라 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은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명색은 ‘정신과 물질(육체)이 하나로 결합된 혼합물’이라는 의미로서, 정신과 육체가 한 덩어리인 상태이다. 또한 오온도 한 덩어리로 결합돼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헌데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의심했었다. 붓다는 이러한 물음에 침묵했다. 정신과 물질 또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하나의 잘못된 틀임을 직시하신 것이다. 본래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 우주 전체가 모두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부분을 ‘정신’이라고 하고, 변화해서 소멸해가는 부분을 ‘육체’라고 지칭한 것일 뿐이다.


*명심견성(明心見性)---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밝은 마음으로 타고난 천성을 안다는 뜻, 곧 마음을 밝혀 자기 본연의 불성(佛性)을 본다는 의미로서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여래를 보고, 불광(佛光)을 보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지혜의 경지를 얻는 것, 그러한 것이 바로 명심견성이다. 성(性)이란 우리의 본성, 우리 본래의 면목 또는 우리 본래의 힘을 가리킨다. 우리가 본래의 힘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모든 지혜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곧 깨닫는다는 말이다.

     ※불광(佛光, Buddha Light)---깨달음의 빛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증득한 존재로부터 나오는 정묘(精妙)한 빛을 말한다.---→불광(佛光) 참조.


*명왕(明王, 산스크리트어 Vidya-raja)---명왕(明王)이란 주로 밀교(密敎) 계통에서 모시는 밀교 특유의 존격(尊格)으로서 교화하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여래나 보살이 무서운 형상, 분노하는 모습으로 변신해 나타나는 화신이다. 따라서 명왕은 분노의 상으로 표현되므로 명왕을 분노존(忿怒尊) 또는 위노왕(威怒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왕은 밀교가 성립하면서 등장했으며, 여래의 명을 받아 일체의 마장(魔障: 악마의 장애)을 물리친다고 하는데, 5세기경 공작명왕(孔雀明王)이 최초로 등장했다. 여기서 ‘명(明)’은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신비로운 명주(明呪), 진언(眞言), 다라니를 가리킨다. 진언은 지력(智力)으로 중생들의 어두운 번뇌의 벽을 깨뜨리는 광명이다. 따라서 명왕은 주문을 관할하는 왕자(王者) 혹은 주력을 가진 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로서 지혜의 작용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불(方便佛)이다.---→공작명왕(孔雀明王) 참조.


*명행족(明行足)---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지혜(智慧)와 행(行)을 완전히 갖춘 자란 뜻이다.


*목건련(目?連, 모옥갈라나, Maudgalyayana, 마우드갈리아야나)---마하목건련(摩訶目?連)이라고도 한다. 본래 사리불과 함께 회의론자인 산사야(刪?耶)의 제자였으나 제자들을 이끌고 불문에 귀의한 뒤 붓다의 10대 제자, 4대 성문(聲聞) 중 한 사람이 됐다. 붓다에게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불렸다. 효성이 지극해서 어머니를 지옥에서 제도한 일화로 유명하다.


*목어(木魚)---마치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속을 파고 그것을 조석예불(朝夕禮佛) 때 치며, 수중(水中) 중생의 고통을 쉬게 하는 법구로 쓰인다. 일설에는 물고기는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수행 정진하는 사람들이 잠에 취해서는 안 되는 것을 경책하는 뜻이기도 하단다.


*목우난타(牧牛難陀)---석가모니 제자의 한 사람. 본래 소를 먹이던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그는 일찍이 소를 먹이는 목동이면서 출가해 아라한의 과위를 이루었다고 한다.


*목우자(牧牛子)---보조국사(普照國師)의 호(號). 소먹이는 사람이라는 뜻.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마음을 닦는 비결을 적은 선 이론서(禪理論書).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국역해 간행한 1책이 목판본으로 있다 -보물 제770호. 서울대학교 소장.


*목탁(木鐸)---본래는 수도승에게 교훈을 주는 뜻에서 밤이고 낮이고 눈을 감는 일이 없는 물고기를 본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같은 연유에서 목어(木魚)와 같은 뜻인데, 주로 깨우치는데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대중을 모으는데 쓰는 신호이기도 하고, 모든 의식 집행에 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소중한 법구(法具)이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던 것을 나중에 나무로 만든 것 같으며, 이러한 법구들은 거의 전부가 중국에 와서 선종사찰에서부터 비롯됐다.


*몰종적(沒?迹)---집착 없는(무집착) 자유스러운 삶과 행동. 아무 흔적이나 자취가 없음을 말한다.


*묘각(妙覺)---가장 높은 수행단계, 보살 수행의 계위(階位)중 마지막 단계(수행을 52단계로 구분했을 때 51단계 수준의 깨침). 더 높은 곳이 없는 최고상태의 깨달음. 자기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 그러므로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지혜를 원만히 갖춘 부처의 경지. 등각(等覺) 위에 있는 보살이 무명을 끊고 이 지위에 들어간다. 결국 묘각(妙覺)이란 불가사의한 부처의 무상정각(無上正覺)을 말한다.---→등각(等覺) 참조. 


*묘길상(妙吉祥)---문수보살(文殊菩薩)을 일컫는 말이다. 문수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만주슈리(Majushri)이고, 문수사리(師利) 또는 문수시리(尸利)라 번역되는데, 여기서 문수(文殊)는 묘(妙)하다는 뜻이고, 사리 혹은 시리는 길상(吉祥)이라는 의미라서 합쳐서 묘덕(妙德), 묘수(妙首), 묘길상(妙吉祥)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문수보살을 묘길상보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재 북한의 금강산 만폭동 골짜기 높은 곳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磨崖佛) 이름이 묘길상이다. 높이 40m의 붉은 성벽에 양각으로 새긴 마애미륵불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묘법(妙法)---미묘한 법문이란 뜻. 여기서 ‘묘(妙)’란 불가사의한 것,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법(法)은 교법(敎法)을 뜻한다. 즉 부처님 일생동안 설하신 법문은 모두가 묘법이 아닌 것이 없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 말씀이 모두 알듯 말듯 하지만 결국엔 불법 모두가 묘법(妙法)이고 나아가서 우주 법계의 근본법칙이 모두가 묘법이다. 헌데 이 묘법(妙法)이라는 묘한 이치는 중생이 수행 없이 그냥 알음알이로 연구를 한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불법의 이치가 그러하듯 스스로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묘유(妙有)---묘유는 진공(眞空)과 짝을 이루는 단어이므로 진공과 함께 논의해야 그 어의에 다가설 수 있다. 진공과 묘유에서 ‘진공(眞空)’은 과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없는 듯하면서 실상 그 속에 있음(有)을 말하고, 묘유(妙有)는 그것을 뒤집어서 있는 듯하면서 실상은 없는 것을 말한다. 즉, 묘유는 현상적인 것은 있는 것이로되 실상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종이에 산을 그렸다고 하자. 그 그림이 분명 산은 산이로되 또한 산이 아니고 종이와 먹일 따름이다. 헌데 종이와 먹이지만 한편 산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실은 모든 존재가 그와 같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치이다. 그러한 존재원리를 일러 중도적(中道的) 존재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진공이며 묘유이고, 묘유이면서 진공인 것이다.

   <반야심경>에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물질이 곧 텅 비어 공한 것이고, 텅 비어 공한 것이 곧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인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텅 빈 공과 다르지 않고, 텅 빈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진공묘유(眞空妙有) 참조.


*묘행(妙行)---묘행에서 ‘묘(妙)’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한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분별없는 무분별의 행을 행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도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무간도(無間道)---불교에서 도(道)에 이르는 과정은 가행도(加行道) ? 무간도(無間道) ? 해탈도(解脫道) ? 승진도(勝進道)의 4단계로 나누는데, 가행도는 번뇌를 끊으려고 다시 힘을 더해 수행하는 기간을 말하고, 무간도는 바르게 번뇌를 끊는 도를 말한다.---→사도(四道) 참조.


*무간지옥(無間地獄)---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아비지옥(阿鼻地獄) 또는 무구지옥(無救地獄)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이곳에 떨어지면 한 겁(劫) 동안 끊임없이[無間]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이다.

          

*무견(無見)---‘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의 두 가지 견해, 즉 유견(有見)과 무견(無見) 이견(二見)에 대해 세존은 두 견해 모두 모순된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고 했다. ‘유견(有見)’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으며, 그 실체는 늘 변하지 않는다며 집착하는 생각이다. 이에 비해 무견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일체가 무(無)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고, 유무견(有無見)에 사로잡힌 견해가 사견(邪見)이다.

   부파불교시대의 소승불교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해 중도사상을 여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해 모든 교설이 설해져 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파사현정(破邪顯正)]’는 것이었다. 즉 유견이 아니면 무견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道論)>을 저술해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사상을 천명했다.---→유견(有見) 참조.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죄나 허물을 소멸시켜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진언(眞言)을 설한 경전이다. 다라니경이란 탑을 조성한 다음 불경을 염송함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경전(기도문)으로서, 탑 속에 이를 수납해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나라 측천무후 말년인 704년에 서역 도화라국(覩貨羅國)에서 온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법장(法藏) 스님과 함께 한역(漢譯)했다.

   1966년 10월 13일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 보수할 때, 2층 탑신에서 금동 사리함이 발견됐다. 이 사리함 안에 여러 사리 장엄구와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들어 있었다. 이 다라니경은 일본에서 770년에 간행된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의 목판본보다 20년가량 앞서는 것으로서, 751년 신라 경덕왕 10년경에 간행된 목판인쇄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라 인정받고 있으며,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있다.


*무기(無記)---무기에는 다음 세 가지 개념이 있다.

     ? 하나는 붓다의 침묵을 무기(無記)라 한다. 석가가 다른 종교가(외도)로부터의 형이상학적 10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하고 기답(記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세계의 공간이 유한한 것인지, 아니면 무한한 것인지, 또는 여래는 사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이와 같은 외도(外道)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이를 무기라고 한다. 무기의 이유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으며, 또 비록 해결했다 하더라도 불안 ? 고뇌의 해탈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의 사유와 이성적 판단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희론(戱論)은 말장난에 불과하다.---→14무기(十四無記) 참조.


     ? 다른 하나의 개념은 선악을 가리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과 무기의 3성(性)으로 구분하는데, 이 중 무기는 선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 흑백 등의 상태가 분명한 것을 유기(有記)라고 하고, 선 ? 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의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기의 업(業)에 대해서는 자성(自性)에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무기업(無記業) 참조.


     ? 또 하나 참선 중에 화두를 망각하거나 화두를 놓친 상태를 말한다. 참선을 할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주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망각한 상태를 무기공(無記空)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무기에 빠졌다 라고도 한다.---→무기공(無記空) 참조.


*무기공(無記空)---무기공에도 두 가지 개념이 있다.    

     ? 무기공(無記空)은 참선 중에 화두를 망각한 상태, 화두를 놓친 상태를 말한다. 참선을 할 때 아주 고요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망각한 상태를 무기공이라 해서 예로부터 무기(無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 또 하나 무기에 빠진다는 것은, 공(空)에 집착한 나머지, 공에만 머무르려는 것이다. 공(空)사상에 집착해서 생각이 일어남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음을 무기공이라고 한다. 진정한 공이라는 것(무기공은 진정한 공이 아님)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므로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머물지 않는 마음이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에 온갖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그 변화무쌍한 생각과 마음을 분별치 아니하고 받아들이고 흘러 보내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진정한 공이라고 한다.

               

*무기업(無記業)---삼성업(三性業) 중의 하나. 선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惡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 행위가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과보를 낼 수 있는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비선비악(非善非惡)의 무기업(無記業)은 무의도적 행위로서 윤리적으로 중성적인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행위이다. 따라서 과보를 낼 수 없고, 선악의 어떤 결과도 받지 아니하는, 윤리적인 척도로 해석할 수 없는 업이다. 선악의 어느 쪽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인간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란 무의식적인 행위, 아무 뜻 없이 하는 행위를 말하며, 이것이 무기업이다.---→업(業) 참조.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핵심내용임. 육조단경에는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생각하며 대상과 접촉하는 작용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작용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무’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무상(無相)에서 ‘상’은 망념으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즉 우리들의 생각인 상(想)이 마음 밖의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그것이 상(相)이다. 그리고 무상이라는 것은 ‘상 속에 있으면서도 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차별상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 차별상을 공(空)으로 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본디 무상이다. 상은 모두 망상에 물든 마음이다. 

   무주(無住)란 양극단 중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집착이 사라지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생각이나 어느 찰나에 머물면 그것을 속박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법에서 어떤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면 속박이 없으니 그것이 무주이다. 즉, 이어지는 온갖 대상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 무주이다. 공(空)에도 불공(不空)에도 머물지 않는 그것이 바로 모든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디 성품이다.


*무드라(手印, 산스크리트어 mudra)---불교에서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조각상과 탱화(幀畵)에서 보이는 손 모양들을 말한다. 손과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수많은 상징적 모양이다. 한자로 ‘수인(手印), 인상(印相), 인계(印契)’ 등으로 변역 한다. 조각이나 그림의 경우, 손의 자세는 그 인물의 특성이나 그와 연관된 중요한 일화를 상징한다.---→수인(手印) 참조.


*무량광(無量光)---무량광의 광의는 진리를 크게 깨친 사람의 지혜의 광명은 한량없이 많아서 이 세상을 다 비추어 주고, 아무리 오래 비추어도 다함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이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협의로는 아미타불의 광명을 뜻한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그 수가 극히 많아서 수량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 공덕은 한없이 커서 삼세에 이르도록 다함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이라 한다. 이래서 아미타불을 무량광불이라 하지만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아미타가 원래 아미타브하(Amitabha:무량광) 및 아미타유스(Amitayus:무량수)라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량광은 늘 한량없는 수명이라는 무량수(無量壽)와 함께 말해진다.---아미타불(阿彌陀佛) 참조.


*무량수경(無量壽經)---<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을 합해 정토 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됐던 경전이다. 서기 100년경 북인도에서 만들어진 이 경의 한역본 중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된 것은 동진(東晋)의 각현(覺賢)과 보운(寶雲)이 421년에 번역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정토사상을 주제로 설법한 것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량의(無量義)---‘무량의’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말이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무량의(無量義)에 대해 “무량(無量)의 의(義)는 일심(一心)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무량의 의’라는 뜻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중생을 가르칠 때에는 듣는 사람의 근기나 시기, 생활환경 등에 따라 온갖 방편을 다하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한량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량의 의’라고 한다. 그러니 여기서 한량이 없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설법인 팔만사천 법장을 말한다.

 

*무량의경(無量義經)---법화 삼부경의 하나. <무량의경>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보현관경(普賢觀經)>을 합해 법화삼부경이라 한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개경(開經), 곧 서설인데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기에 앞서 설하신 것이므로 지금에는 법화경을 읽을 준비단계로서 무량의경을 읽은 다음에 법화경을 읽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인도 승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陀耶舍)가 남조의 제(齊)나라시대인 481년에 번역한 것이 전하고 있는데,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했다고도 하고 중국에서 지은 것(위경)이라고도 한다.


*무루(無漏, 산스크리트어 as?srava)---루(漏)란 집에 비가 세다는 의미로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분별과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무루란 물 샘이 없다는 말인데, 구경위(究竟位 -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 단계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원만하고 밝음의 상태를 말한다.---반대말 유루(有漏, s?srava)


*무루복(無漏福)---무루복이란 새어 나가는 일이 없는 복이다. 이에 비해 유루복(有漏福)은 새어나가는 복이다. 즉 유루복은 생노병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누리는 한정되고 부자유한 사바세계의 복이지만, 무루복은 생노병사가 없는, 불 ? 보살과 성현들이 누리는 걸림 없는 정토세계의 복이다.  

   유루복은 보시에 대한 반대급부인 대가를 바라거나 자기가 보시를 했다는 마음의 상을 짓고 보시를 하고 받는 복으로서 한정된 복이다. 이에 비해 무루복은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한 보시로서 내가 보시를 했다는 상마저도 떠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보시바라밀를 행함으로써 이에 따라 받는 복이다. 무루복은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혜택이 없으나 보시바라밀을 행한 복이므로 무루복은 샘물처럼 한량없고 다 함이 없는 무한정의 복이다.---→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참조.


*무루업(無漏業)---깨달음에 이르게 한 청정한 수행.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난 언어ㆍ동작ㆍ의념(意念)을 말한다. 번뇌에 젖지 않은 순수한 업.


*무명(無明, 산스크리트어 Aviduya)---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대승에는 ‘진여(眞如)의 이치를 모른다. 또는 유(有)를 무(無)로 보고, 무를 유로 본다’라고 정의한다.

   탐(貪)ㆍ진(瞋)ㆍ치(痴)의 3대 번뇌 중의 치(痴)에 해당하며, 탐 ? 진이 정신적인 번뇌인데 비해 무명(=치)은 지적인 번뇌이며, 번뇌 중 가장 근본적인 번뇌이다.

   그리고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생사 윤회하는 근본원인 역시 무명이다. 따라서 이 무명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적이다. 12연기의 경우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이 있다고 한다. 즉 무명으로 말미암아 업이 형성된다.---→명(明, viduya) 참조.

 

*무문관(無門關) 수행---무공방(無孔房)이라고도 하는데, 4면이 벽인 방에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최소 3개월부터 3년 동안 면벽참선하는 것을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라 한다.

     ※무문관 수행의 유래---문을 닫아걸고 ‘폐문 정진(閉門精進)’ 하는 법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달마 대사의 면벽 9년이 시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64년 당시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주지 정영(瀞暎) 스님이 ‘무문관’이라는 참선수행도량을 세우면서부터이다.


*무문자설(無問自說)---산스크리트어 우다나(優陀那, Udana)의 번역어이다. 불경 서술 형태를 분류한 십이분경(十二分經)의 하나로서, ‘우다나’란 감흥해서 저절로 나오는 말을 가리킨다. 이것을 한역한 것이 무문자설이다. 부처님이 종교적 체험에 감격한 나머지 누가 묻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그대로 말하는 형식이다. 즉 (묻는 사람도 없는데) 부처님 스스로 설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이를 모은 것이 <우다나경(무문자설경)>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도 무문자설로 이루어진 경전이다.---→우다나(優陀那), 아미타경(阿彌陀經), 십이분경(十二分經)참조.


*무분별지(無分別智)---불법의 최고 지혜인 진여지혜(眞如智慧)는 언어나 문자로 분별하고 헤아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무분별의 지혜라 한다. 즉 반야의 지혜를 무분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의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알 수 있다고 해서 무분별지라고 하며, 곧 공(空)을 뜻한다.    


*무상(無常)---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부처님의 세계관이다.---→제행무상(諸行無常) 참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무상(無上)은 더없이 높다는 말, 정등(正等)은 비길 데 없다는 말, 정각(正覺)은 바로 깨달았다는 말, 그래서 무상정등정각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으로서 불과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 참조.


*무상사(無上士)---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최상의 인간, 곧 위가 없는 대사(大士)라는 뜻임.


*무상의경(無上依經)---이 경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특징 등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중국 양나라 때 진제(眞諦)가 번역했으며, 전체 7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상의경>은 신라불교, 특히 원효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경전이다. 원효는 보살의 윤리에 관한 이론적 바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그의 소(疏)에서 무상의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했다.

                

*무색계(無色界)---욕계(欲界) ? 색계(色界)와 함께 삼계(三界)의 하나로서 삼계 중 최고의 수행을 이룬 자만이 머무는 곳이다. 즉, 무색계는 색계 위에 있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세계로서 이곳은 오온(五蘊) 중 색(色)을 제외한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만으로 구성된 물질을 초월한 순수한 정신적 영역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곳은 형상과 육체를 떠나 정신만으로 깊이 선정에 든 자가 머무르는 공간인바 무념무상의 정(定 ; 三昧)을 닦은, 즉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천계(天界)를 일컫는데, 이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남성이지만 남근이 없다.

   그리고 이 세계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가 아니므로 방처(方處) ? 색질(色質) ? 사방(四方) ? 상하(上下)가 없는 무형의 세계, 공간적 개념을 초월한 세계이다.

   따라서 무색계가 색계 위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처, 즉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곳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보의 우열에 따라서 공무변처(空無邊處) ? 식무변처(識無邊處) ? 무소유처(無所有處) ?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4처로 나뉜다. 그리고 무색계엔 4천(天)이 있고, 선정에는 4단계가 있다.


     <무색계 4처-네 가지 경지=사무색(四無色)>

     ? 공무변처(空無邊處,) -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무색계 제1천(天)의 경지. 물질인 육신을 싫어하고 가없는 허공의 자재(自在)함을 기뻐하며, 공이 가없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해 태어나는 곳.

     ? 식무변처(識無邊處) - 공무변처를 초월해 인식작용의 무한성을 관찰하는 제2천의 경지. 마음의 작용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무한의 의식영역.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한다.

     ? 무소유처(無所有處) -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체득한 제3천의 경지. 일체 식(識)이 끝없는 곳을 초월하면 조그만 것도 소유함이 없는 데 들어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머문다.

     ?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제4천의 경지. 욕계 ? 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제4천의 경지.


     <무색계 4천>

     ?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 색계에서 버리지 못했던 모든 형상과 육체를 허공과 같이 관(觀)한 결과 마음이 허공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마음이 허공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대한 끝없는 의식만 존재하는 세계로 들어간 자가 머무는 곳이다.

     ?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 허공을 관하는 그러한 의식마저 ‘없음, 없음’이라고 관한다. 여기서는 ‘무(無)의 삼매’ 체험에 들어간 자가 머무는 곳이다.

     ?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天) - 허공을 관하는 그러한 의식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다시 그런 의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상태에 들어간 자가 머무는 곳이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욕계·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의식이 완전히 소명해 다한 것 같으나 다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 멸진정(滅盡定)---→멸진정(滅盡定) 항목 참조.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8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정) ? 식무변처선(정) ? 무소유처선(정) ? 비상비비상처선(정)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은 아직 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색계선정(色界禪定)이라 하고,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은 물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정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라고 한다. 무색계선정을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도 한다. 무색계는 물질적인 것도 없어진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인데, 무념무상의 정(定:三昧)으로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곳이다. 아래에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 무색계4선정(사무색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무색계 초선정으로서 허공처럼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색계 4선정에서 벗어나 집중한 대상을 향해 ‘끝없는 허공, 끝없는 허공’ 하면서 물질을 대상으로 한 수행에서 벗어난다. 공무변처정이란 일체의 물질 관념을 타파하고 단지 끝없는 공간만을 - 허공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며, 염(念)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상태이다. 이렇게 해 우주가 텅 비어서 하나의 순수광명이 된다.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으로 텅 비어있는 순수광명의 경지가 바로 8선정 중 제5선정인 공무변처정이다.


    2)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식이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무한한 의식 영역)

   무색계 초선정의 고요하지 못함의 허물을 보아 무색계 2선정에 마음을 기울인다. 끝없는 허공에 따른 의식에 마음을 집중한다. 끝없는 허공이라는 선정의 대상을 벗어나서 끝과 한계의 구분이 없는 의식작용이라고 생각해 - 끝없는 의식작용의 선정에서 지낸다. 즉, 하나의 마음이 우주에 충만해 보이는 경지가 식무변처정이다.

   공처(空處)의 심경을 더욱 진전시켜 식이 무변하다는 사실을 염(念)하여 식(識) 중에 일어나는 차별상을 제거하는 수행이다. 마음의 작용이 허공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고 관찰한다.

   

    3)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경지, 아무 것도 없는 영역)

   식무변처정보다 더 고요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공무변처정의 끝없는 허공을 관하는 인식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없음, 없음’이라고 하거나 ‘조용함, 조용함’이라고 거듭거듭 생각한다. 공간도 식도 초월해 아무것도 대상이 없다고 관찰하며, 일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이고 저것이고 구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다. 원융무애(圓融無碍)이고 혼연일체(渾然一體)라 구분할 수가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제8선정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4)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

   무소유처정에서 더욱더 정묘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또 없을 것도 없단 말이다.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생각이 조금도 없고 아주 맑고 미세한 생각만 조금 있다. 지각,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아주 미세한 단계로, 마음부수들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란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능엄경>에 의하면 공무변처정은 몸이 장애됨을 깨달아 장애를 소멸하고 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장애가 소멸하고 장애가 없어졌다는 것까지 멸하면 그 가운데는 오직 아뢰야식과 말나식의 미세한 반분만 남게 되는데 이를 식무변처정이라 한다.

   공과 색(色)이 모두 없어지고 식심(識心)까지 멸해 시방(十方)이 적연해 훤칠하게 갈 데가 없으면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이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잠복된 상태이다.

   아뢰야식의 종자인 식성(識性)이 동(動)하지 않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데서 다한다는 성품을 발명해 있는 듯하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한 것 같으면서 다한 것이 아닌 상태가 비상비비상처정의 상태이다. 거친 생각은 없으며, 섬세하고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한 무색계 4선정은 조용하고 높다.

   그리고 9차제정(九次第定)은 8선정(八禪定)에다 다시 아홉째의 멸진정(滅盡定)을 합해 부르는 말이다.

    ※ 멸진정(滅盡定)---초기부파불교의 수행전통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계는 멸진정 혹은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9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초기경전(P?li-Nik?ya)의 설명에 따르면 상수멸정은 불교수행에서 나타나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상태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남방불교의 수행자들은 일시적으로 조건의 소멸을 이루는 이 중지 상태를 열반의 체험 혹은 열반자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멸진정에 이르면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잠재의식에 묻어온 번뇌까지 모두 다 뿌리 뽑아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로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완성이다. 이 멸진정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나함과 아라한 중에서도 사마타 수행이 충분히 돼 있는 분들만 해당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돼야 비로소 참다운 정각성불(正覺成佛)이 되는 구경위(究竟位)라 할 수 있다.


*무생(無生)---모든 현상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가 존재가 있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겠는데, 고정된 실체가 없다면 생길 것도 없다. 그런데 연기법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이라니 어떠한 존재가 태어날 수가 없다.

   헌데 여기서 태어나지 않음이란 번뇌와 열반을 생기지 않음의 경지를 말함이다. 곧 무생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깨달으면 다른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무생이다. 따라서 무생이란 무생의 이치, 즉 ‘남[生]이 없는 진리’,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으며, 일체의 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무생법(無生法)---무생(無生)의 법, 즉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결국 공(空)의 이치를 뜻한다. 원효(元曉)대사는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에서 무생(無生)의 법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공에 형상과 위상이 없듯이 마음 역시 형상과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갓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허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듯이 마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허공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지된다. 마음 역시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생법이란 모든 법의 본래 생겨남이 없는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三法忍)의 하나이다.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 

     ? 신인(信忍)은 신심에 의해 얻는 지혜,

     ? 순인(順忍)은 진리에 순종하는 지혜,

     ? 법인(法忍)은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 이 법인을 무생법인이라 한다.

   여기서 인(忍)은 ‘참을 인’이 아니라 인가결정(認可決定) ? 인지(認知)의 뜻이니, 진리를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것. 혹은 진리를 확인해 결정적으로 이해하는 일을 말한다. 줄여서 무생인(無生忍)이라고도 하는데, 무생법인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일체법들이 태어남도 머무름도 사라짐도 더러워짐도 깨끗해짐도 늘어남도 줄어듬도 없다. 도무지 잡을 것이 하나 없다는 말이다.

   이상의 대승불교에서의 무생법인에 비해 부처님 원음에서 말하는 무생법인이란 법들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보아 갈애와 집착을 여읜 것을 말한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아 마음이 끄달리지 않으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불생이고 무생이다.---→ 삼법인(三法忍) 참조.


*무설설(無說說)---말 없는 가운데 말이 있다는 것이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설법해도 모르는 이야기이니 말없이 설법을 하는 침묵의 소리를,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만 체득이 가능하리라. 말이 많다고 의사가 통하는 것이 아니며 설법 없이도 통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장장설(廣長說)의 반대되는 말이다,


*무설설 불문문(無說說不聞聞)---말하는 바 없이 말하고, 듣지 않음으로 듣는다는 뜻. 말이 없는 가운데 말이 있으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전해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말이 무설설이고, 이심전심으로 듣는 것이 곧 불문문이다.

   저 뜨락의 굵직한 소나무들은 설함이 없이 설하고,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삼층석탑이 토해내는 사자후는 어떻고, 담 밑의 갖가지 꽃들도 화엄세계의 장엄법문을 하고 있으라. 중생의 어리석음으로 제불의 미묘 법문을 듣지 못하니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만 법비[法雨]를 담는다.


*무설설(無說說) ? 무법법(無法法)---도선(道詵)국사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에서 수도하던 혜철(惠徹)도인을 찾아가서 그에게서 "무설설 무법법"을 화두로 받아서 불철주야 고행한 끝에 확철대오했다. 무설설(無說說)은 말 없는 가운데 말함이고, 무법법(無法法)은 법 없는 가운데 법을 말한다. 말없는 말, 또 말을 하고도 말한 바가 없는 무설설은 무법법의 ‘법 없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무법이 법이며, 곧 법이 법이 아닌 것과 같은 ‘무법법’의 도리다. 결국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알음알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다면, 그 걸 알음알이로는 이해할 수 없고,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무소득(無所得)---<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로서 산스크리트 시마티가(simatiga)를 번역한 말인데, 무소유(無所有)라고도 하며, 집착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용어로는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단순하게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 모자람도 없고 궁색함도 없어 집착(번뇌)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얻을 바가 없는 공의 경지에 이르면 곧 깨달음을 성취한 경지이다. 무소득은 일체가 공(空)이기 때문이다.


*무소득공(無所得空)---불가득공(不可得空), 부단공(不但空), 필경공(畢竟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말.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空)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 Dharma)라는 관념도 없다.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이를 무소득공(無所得空) 또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고 한다.


*무소작(無所作)---짓는 바가 없음이다. 무엇인가 짓는 바가 없으니 업(業)을 지을 리도 없다. 연기법에 따라 짓는 바가 없고, 욕심으로 인한 머무르는 바도 없으니[무주(無住)], 번뇌 망상이 일 것도 없고, 아무런 죄업도 짓지 않는다. 이는 곧 공(空)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다. 


*무심선(無心禪)---무심선은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되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과 달리 일체의 망념(妄念)을 여읜 진심(眞心)인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계로 삼는 선법이다. 즉 무심의 경계를 위해서 참선하는 것이 무심선이라 하겠다. 이는 중도사상(中道思想)에 입각한 것이고, 연기적 생명의 실상에서 무아(無我)를 체득해 가는 선이다.

   즉, 무심선은 의식(意識)을 벗어나고 범부의 길이나 성인(聖人)의 길을 벗어나서 무위(無爲)와 무심(無心)으로 면밀하게 양성해 자연히 도(道)와 합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은 이러한 무심선의 생활적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무심선은 중국의 석옥청공화상(石屋淸珙和尙)과 고려 말 우리나라에 다녀간 적이 있는 인도의 지공(指空)선사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고려 말의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저술했다.


*무아(無我, anatman)---무아는 아상(我相)에 반대되는 말이다. 아상이란 ‘나’를 내세우고, ‘나’란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무아란 불변의 실체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인간관이다.

   헌데 부처님께서 무아를 설하지 않으면 안 됐던 이유는 인생의 괴로움의 대부분은 집착에서 오기 때문이다. 집착이란 무엇에 얽매이는 것이고, 이 집착의 근본에 있는 것이 ‘나(我)’에 바탕 한 집착이다. 아상(我相) 혹은 ‘나(我)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혹은 ‘아견(我見)’, 이와 같은 나(我)에 바탕을 둔 견해나 욕망에 의해 집착이 시작되고, 인생의 괴로움이 시작된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도 ‘아상’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따라서 수행을 하든 깨달음을 얻어 해탈은 하든 우선적으로 아상부터 타파해야 한다.

   헌데 공교롭게도 ‘나(我)’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나(我)를 연마하는 것이 되고, 나(我)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행의 방향이 부처를 향해 간다면 그것은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것이고, 내(我)가 없어져 가는 방향이 되기도 한다. 또 이타(利他)를 향하는 수행이라면 이것도 또한 결국은 나(我)를 없애가는 방향이다.

   그러나 무아의 상태는 성자의 수준인 아라한(阿羅漢,Arhan) 이상의 수행에서 가능할 정도로 매우 높은 경지이다. 무아가 되면 남과 나의 경계가 없어지고 ‘나’란 존재가 사라진다. 그 정도가 되면 번뇌를 완전히 여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경지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미국의 저명한 배우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리처드 기어(Richard Gere)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사람이 행복하려면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 상대의 기대가 충돌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가 행복하려면 내가 없으면 된다. 생활 속에 무슨 일을 할 때 가능한 한 ‘나’ 없이 하려고 해야 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은 무아의 바탕 위에 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 보살심이 없다면 우리가 수행을 통해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다고 해도 전혀 도움 될 것이 없다. 그건 결국 자신의 에고만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리처드 기어의 이야기가 무아와 전혀 별개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다만 부처님 말씀의 진의를 진제(眞諦)라 한다면 이 이야기는 속제(俗諦)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진제로서의 무아의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와 같은 속제의 수준에서의 무아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 세상은 참으로 부드러워질 것이다. 


*무언통(無言通, ?-826)---월남(베트남) 선종(越南禪宗) 무언통파(無言通派)의 초조(初祖). 원적은 중국 광주(廣州)이다. 성품이 염정과언(恬靜寡言)했지만 견해가 뚜렷하고 트여서 사람들이 ‘무언통’이라 불렀다. 일찍이 백장 회해(百丈懷海) 문하에서 배웠고, 개오한 뒤 광주로 돌아와 화안사(和安寺) 주지로 있었다. 820년 월남으로 가서 건초사(建初寺)에 주석하고, 하루 종일 면벽좌선했다. 몇 년 뒤 제자 감성(感誠)이 그 법을 이었다. 이로써 월남에 선종이 널리 퍼져 선종의 한 파를 형성했고, 이것이 ‘무언통파’이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 ? 3열반 ? 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그 중 4종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이 중 무여의열반은 줄여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며, 반열반(般涅槃, parinirva), 대반열반(大盤涅槃)이라고도 한다. 죽은 후에 번뇌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들어가는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모든 분별이 완전히 끊어진 적멸(寂滅)의 경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무여열반이야말로 참 해탈이어서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유여열반(有餘涅槃), 무주처열반(無主處涅槃) 참조.


*무염(無染, 801∼888)---신라시대의 승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2세에 출가해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됐다.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법성은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줬으며, 당나라 유학을 권고했다.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가서 선법(禪法)을 익혀 돌아와서 선문9산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가 됐다. 89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이라 했다. 탑은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곤(崔仁滾)이 쓴 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돼 있다.


*무외시(無畏施)---불가에서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를 삼보시(三布施)라고 한다. 그 중 무외시는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보호해 두려운 마음을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무외시를 베푸는 자를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한다.

   무외시는 소극적 관점에서 내가 주변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이요, 적극적 관점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가진 것, 아는 것, 하나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외시이다. 얼굴 표정을 밝게 하는 것, 따뜻한 말 한 마디, 칭찬 한 마디 등 남을 대할 때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훌륭한 무외시가 될 수 있다.---→무재칠시(無財七施) 참조.

 

*무위법(無爲法, 범어 asamskrta-dharma)---무위법이라 하는 것은 유위법에 반대되는 말로서, 조작(造作), 위작(爲作)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위(爲)’는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의지를 뜻한다. 따라서 유위란 마음먹고 행하는 의지적 작용(爲作)을 가리키며, 생멸(生滅) ? 변화의 원인으로서 업을 만드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이에 비해 무위법은 조건에 지배돼 생기는 유위에 대해 ‘함이 없는’, 원인 조건을 초월한 형태를 이름인데, 온갖 분별과 망상이 끊어져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즉, 생멸 ? 변화가 없는 진리의 세계, 의식의 지향 작용이 소멸된 상태에서 직관으로 파악된 현상.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탐(貪) ? 진(瞋) ? 치(癡) 삼독심(三毒心)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무위법이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 법의 본성으로서 남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가설로서 명칭을 붙인 용어이다. 즉,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적으로 명명한 말이고, 유위법으로 살아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 무위법이라는 반대말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유위법은 번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고, 무위법은 번뇌가 하나도 없이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다.---→유위법(有爲法) 참조.


*무위진인(無位眞人)---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해탈을 이룬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일컫는데,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도를 닦은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 즉 자리(지위) 없는 참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왜 자리가 없는가. 그 사람을 어떻게 경계 지을 수 없고, 어떤 모습으로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교 사상을 차입한 격의불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무의도인(無依道人) 참조.


*무유애(無有愛, vibhava-tanha)---팔리어로 ‘위바와 딴하(vibhava-tanha)’라 한다. 유애(有愛)란 갖고 싶어 하거나 악착 같이 생존하고 존재하려는 욕망인데 비해, 무유애(無有愛)란 유애(有愛)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갈애이다. ‘죽고 싶다’라든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말과 같이 삶을 포기하려는 허무주의가 바로 무유애이다.

   중생은 때로 자신감의 상실, 혹은 생명의 무상함과 허무와 허탈감, 그리고 자괴감(自愧感)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그러한 망상이 생겼더라도 흘러가는 바람처럼 지나쳐버리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런 망상에 집착하고 사로잡혀 극심한 고통을 느낀 나머지 자살까지 가는 일이 있다. 그래서 불교에선 자살을 무유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유애가 개체 존속의 욕망인데 비해 무유애는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 「불교개론」, 현암사, 2007, 마스타니 후미오(이원섭 역), P145.


*무유정법(無有定法)---금강경에 나오는 경구로, ‘진리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이 진리다’라고 이름 짓는 그 순간에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은 지어진 이름의 틀 속에 갇혀버리므로(올가미를 씌우는 꼴이 되므로)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다.


*무의도인(無依道人)---인간은 대개 무엇엔가 의지하고 집작하는데, 무의도인은 자기의 본래 마음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 해탈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즉,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은 사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을 일컫는다.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이 사용한 말이다.---→무위진인(無位眞人) 참고.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부처님 당시 외도(外道)들 중에 유물론자들은 이 세상의 온갖 현상에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인과응보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무인무연을 주장해 인(因)과 연(緣)을 부정하는 일종의 ‘우연론’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유물론자들이 보는 사회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본다. 따라서 한 평생 즐기면서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도덕적 규범이나 가치도 그들에게 있어서 무용지물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쾌락주의에 빠져 밤의 문화를 즐기는,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단멸론자(斷滅論者)들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사상은 도덕과 윤리의 부재를 초래 할 수 있어서 황금만능주나 쾌락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무자경(無字經)---무자경이란 글자가 없는 경이니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높고 큰 뜻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법.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 모든 경전은 오로지 단 한권으로 압축이 된다. 그 한권의 경전이 바로 <심경(心經)>이다. 이 심경에는 단 한 글자도 없어서 무자경(無字經)이라고도 한다. 세상에 모든 경전이 무자심경(無字心經)에서 나왔으니 이를 깨쳐 알면 글자로 된 모든 경전을 다 뚫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무자경(無字經) 한 권이 있는데 종이와 붓과 먹으로 쓰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밤낮 사시(四時)로 광명을 낸다.


*무자경(無刺經)---부처님께서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가시에 비유해 설하신 경. - 중아함경의 제83경, 팔리어 증지부 경전의 제10의 제72경임.


*무자성(無自性, 산스크리트어 ni?svabh?va)---반야경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은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공관(空觀)과 동의어이다. 즉,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임.


*무자화두(無字話頭)---화두란 참선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데 제시되는 문제를 일컫는다. 참구란 참선하여 진리를 찾음을 뜻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근(麻三斤)’, ‘마른 똥 막대기(乾尿?)’ 등이다.

   이 중에서 ‘구자무불성’를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화두를 참구해 도를 깨달은 고승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한 학인(學人)이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가?”라고 물었을 때 “무(無)”라고 답해 이 화두가 생겨났다고 한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대혜 종고(大慧宗?)선사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해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특히 많은 화두 가운데 조주의 ‘무(無)’자를 강력히 제창했다고 한다.---조주 종심(趙州從?, 778~897) 참조.


*무재칠시(無財七施)---가진 것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7가지를 말한다. 재물이 아닌 것으로 하는 보시.---→무외시(無畏施) 참조.

   1. 안시(眼施)---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

   3. 언사시(言辭施)---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된다. 이 언사시는 삼업(三業) 가운데 구업(口業)에 해당한다.

   4. 신시(身施)---예의 바르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 이것은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신업(身業)에 해당한다.

   5. 심시(心施)---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심업(心業)에 해당한다.

   6. 상좌시(床座施)---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노약자에게 또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7. 방사시(房舍施)---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


*무쟁삼매(無諍三昧)---무쟁삼매란 마음이 편안해 아무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쟁(諍)은 ‘다툰다’라는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남과 다툼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갈등이 없음을 뜻하고, 나아가서는 미혹(迷惑)이 없는 것이 된다.

   경전을 펼치거나 법회를 할 때 마음에 온갖 번뇌와 잡념이 가득하면 그것은 유쟁삼매(有諍三昧)이고, 번뇌가 없는 마음, 갈등이 없는 하나로 통일된 마음이 무쟁삼매이다. 그렇다면 유쟁삼매는 삼매랄 것도 없겠고, 무쟁삼매가 돼야 비로소 경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무쟁삼매란 공(空)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소멸돼버린 순수한 상태이다.

   불기 2551년 부처님 오신 날(24일)을 맞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법전(法傳)스님은 법어에서 “대립과 투쟁 속에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이룬 이는 화해(和解)를 빚어내어 상생(相生)의 길을 열 것이며, 탐욕 속에 들어 있는 이타(利他)의 덕성(德性)을 깨달은 이는 평화와 안락(安樂)을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셨다.

 

*무정설법(無情說法)---.무정(無情)은 유정(有情)에 반대되는 말로서 감정이 없는 초목 ? 산하 ?  대지 등을 말하고, 무정설법이란 인간만이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도 설법한다는 뜻이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세상 모던 것이 과거로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항상 설법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 배 이상의 설법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정이란 무생물이다. 생물은 으레 움직이고 소리도 내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한다. 그뿐 아니라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설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온 세상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 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린다. 그러면 그기에 서 있는 바위가 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한다. -성철스님의 이머꼬 중에서-  


*무주(無住)---무주는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공성(空性)은 일정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것과 함께 하는 것이 된다.---→무념, 무상, 무주 참조.


*무주처 무주심(無住處 無住心)---머무는 곳이 없는 마음.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바로 머무는 것입니까?”

   “머무는 곳이 없는 데 머무는 것이 바로 머무는 것이니라.”

   “머무는 곳이 있을 것 같으면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여기에는 부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고, 마구니도 설 수 없고, 외도도 설 수 없고, 일체가 모두 머물지 못 합니다.”

   “일체 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곧 머무는 곳이니라. 이와 같이 얻은 것을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무주심이 부처님의 마음이니라.” ―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 내가 보시를 한다는 데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을 무주상보시라 하는데, 무주상의 보시가 곧 보시바라밀이다.


*무주처열반(無主處涅槃)---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 ? 3열반 ? 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그 중 4종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넷이다.

   이 중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항상 큰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열반으로 생사와 열반의 차별이 없는 것을 아는 깊은 지혜를 얻어 도달할 수 있는 열반이다.---→소지장(所知障),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참조.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운 보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觀音經)]은 무진의보살과 부처가 관세음보살에 대해 문답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차법회(無遮法會, Panca parisad)---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도 한다. 부처의 보시정신에 입각해 승려 ? 속인 ? 남녀노소 ? 귀천 등을 가리지 않고,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법문을 듣고 잔치를 열어 재물을 베푸는 법회의식을 이른 말이다. 즉 부처의 덕과 자비를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의미로 개최하는 법회이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 때 국왕이 유명한 선지식을 모시고 차별 없이 재물과 불법을 보시한데서 비롯됐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때 현장(玄奬)이 승려들 사이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차법회를 연 적이 있고, 국내에서는 신라 ? 고려 때 백성의 어려움을 달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무차법회를 열고 조정에서 재물을 보시했다.


*무착(無着)---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한 불교 사상가이다. 본명은 아상가(阿僧伽/Asanga, 300?~390?)이며, 세친(世親)의 형이고, 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페샤와르(Peshawar) 출신이다. 처음에는 소승불교에서 출발했지만, 뒤에 유식파(唯識派)의 시조 마이트레야(Maitreya/미륵)의 가르침을 받게 돼, 대승불교의 모든 경론을 연구하고 유식불교(唯識佛敎)를 확립했으며,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대표적 논사였다. 유식설을 조직 ?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외에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저술했다.---→유식학파(唯識學派) 참조.


*무표색(無表色)과 표색(表色)---무표색(無表色)과 표색(表色)은 서로 상대어이다. 표색이란 신체에 의한 행동과 언어에 의한 행위, 즉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두 가지를 말하며, 따라서 표색은 표업(表業)이라고도 한다.

   무표색이란 표색이 선 혹은 악으로 외부에 드러날 때 일종의 잠재적인 힘을 내부에 남기게 되는데 이것을 무표색이라 한다. 사람이 한 번 강한 선 혹은 악의 표색에 의해 무표색을 일으키게 되면 그 무표색은 지속성이 있어서 선의 무표색은 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해하며, 악의 무표색은 선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해 한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 습관과 같은 것을 무표색이라고 한다.

   표색과 무표색은 다 같이 객관적으로 원래 독립 자존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행위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행위가 없다면 표색(表色)의 표(表)는 의의가 없고, 또 표색이 없으면 따라서 무표색도 없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도둑질을 안 하는 것은 물론 도둑질이 옳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도둑질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선(善)의 무표색(無表色)이 방비하고 있어서 도둑질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도둑질을 해보면 그 다음 무표색이 발동을 해서 도둑질하기가 처음보다 훨씬 쉽고,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남의 물건을 쉽게 훔치게 되는 것과 같다. 남을 험담 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 험담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처음 하는 것은 힘들지만 한 번 하고 나면, 무표색이 발동을 해서 자주 또 쉽게 버릇처럼 남을 험담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처음에는 이웃들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럽게 생각되지만, 보시를 한 번이라도 해보면 그 다음에는 무표색이 발동을 해서 그러한 어색함이 조금씩 덜해져서 점점 보시를 하는 것이 수월해지고 나아가 보시가 내 삶의 일부가 됨으로써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학(無學)---아라한과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라 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음을 말한다.---→사향사과(四向四果) 참조.


*무학도(無學道)---삼도(三道)의 하나. 삼도란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그 중 무학도는 수행을 끝내고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는 최고의 단계를 이른다. 즉, 수도의 결과 해탈 ? 열반에 이른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이 실현된 상태이다. 경전에서는 ‘고(苦)의 두루 앎을 마치고, 집(集)의 끊어버림을 마치고, 멸(滅)의 실증함을 마치고, 도(道)의 닦음을 마친다’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사성제의 수행을 통달했음을 말한다.---→견도(見道), 삼도(三道) 참조.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년~1405년)---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고승. 속성은 박씨(朴氏), 무학(無學)은 호, 법호는 자초(自超)이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제자이며, 공민왕 2년(1353)에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했다가 귀국한 후 주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했으며 조선 태조의 왕사였다.    

   무학대사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 터 위쪽 산등성이에 있다. 태종 7년(1407) 입적한 그 해에 건립했으며,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보물 제388호).


*묵빈대처(默賓對處)---침묵으로써 물리쳐 대처하라는 것이다. 그럼 스스로 사라질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다. 어떤 갈등이 있을 때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세월이 가면 다 풀린다.

 

*묵식심통(?識心通)---묵식(默識)이란 말없이 마음속으로 알게 됨을 말하고, 묵식심통은 남이 말한 것을 암묵(暗?) 중에 깨달아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간화선이 화두를 참구해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법인데 비해 묵조선은 화두나 공안을 활용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않아서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법을 일컫는다. 중국 송대에 조동종(曹洞宗)의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스님에 의해 형성되고 체계화된 수행체계이다.

   오로지 침묵만을 지언(至言)으로 삼는 것으로서 묵묵히 안으로 관찰해 그 마음을 청정케 하고 그 법(法)의 근원을 철견(徹見)하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이란 묵조(默照)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고 참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굉지선사가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가고 쉬어가게 한다”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대혜선사(大慧禪師)께서 그의 가르침을 비난해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지칭한데서 묵조선이란 말이 비롯됐다.---→지관타좌(只管打坐) 참조.


*묵호자(墨胡子)---5세기 경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했다는 고승이다. 국적은 불명이고 고구려로부터 왔다고 한다. 신라 눌지 마립간(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잠입해 굴속에서 불교를 포교하다가 왕녀의 병을 고쳐 불교의 이적을 보여주고 사라졌다고 하나 아도(阿道)와의 동일인지 여부가 불명하다.


*문사수(聞思修)---부처님 법을 구하고자 할 때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 즉 많이 들어라(聞). 생각을 하라(思). 실천을 하라(修)의 세 가지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문수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만주슈리(Majushri)이고,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만수실리보살(曼殊室利菩薩), 문수시리(文殊尸利), 묘길상(妙吉祥)이라고도 표기되는 보살이다. 문수(文殊)와 만수(曼殊)는 묘(妙)의 뜻이고, 사리(師利)와 시리(尸利)는 덕(德), 길상(吉祥)의 뜻이다. 이 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인 권현(權現=化身=權化)으로 보살의 자리에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의 왼쪽에 협시해 석가불의 지혜를 상징하는데 머리에 5지(智)를 상징하는 오발관(五髮冠 - 오계/五?)을 쓰고 있으며, 바른손에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지혜의 그림이 있는 청련화(靑蓮華)를 쥐고 위엄과 용맹을 나타낸 사자를 타고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인도에서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하며,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般經)>에는 사위국(舍衛國) 다라취락범덕 바라문(多羅聚落梵德 婆羅門)의 아들이라 돼 있고, 그는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른 경전에 따르면 단순히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등장하기도 해 그 역사적 실재성은 분명하지 않다. 

    ※권화(權化)---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나는 것. 권현(權現), 화신(化身)도 같은 말임.

    ※오계(五?)---머리카락을 전 ? 후 ? 좌 ? 우 그리고 중간에 볼록 솟아나게 묶은 형상.


*문자반야(文字般若)---부처님의 가르치심은 모두 문자화돼 있다. 이와 같이 문자화돼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경(經).율(律).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경전의 문자나 개념에 너무 치중하면 불경(佛經)의 원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의 마음을 글을 통해서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문자를 통해서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문자반야라고도 한다.---→관조반야(觀照般若)와 실상반야(實相般若) 참조.

                                         

*문자선(文字禪)---언어, 문자 풀이나 해석으로 선을 이해하는 것. 즉 이치나 논리,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선을 말한다. 의리선(義理禪)과 비슷한 말.

   중국 송나라 시대에 문자선의 폐해가 심했다. 당나라 말엽부터 송대에 걸쳐 고승들의 각종 어록(語錄)이 대량으로 출현하자, 점차 선의 수행이 일종의 주석학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경향은 대혜(大慧)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圓悟克勤)의 어록인 <벽암록(碧岩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선 수행이 문자선의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심지어 사대부 문인들의 언어적 유희로 전락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대혜선사가 바로 스승인 원오선사의 벽암록을 모두 불살라 유포를 금지시켰을까. 이는 바로 문자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었고, 그러한 폐해를 고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등장했다.---→구두선(口頭禪) 참조.


*미가다야(Migad?ya)---녹야원(鹿野園)과 같은 말. 부처님이 첫 설법[초전법륜(初傳法輪)]을 행한 곳이다.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임.---→녹야원(鹿野園) 참조.


*미란타왕문경(彌蘭陀王問經)---경전의 원명은 <밀린다팡하(Milindapanha)>이다. 한역에서는 <미란타왕문경> 또는 <나선비구경>이라 한다. 기원전 150년경 서북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왕 밀린다(메난드로스)와 불교경전에 정통한 학승 나가세나(Nagasena, 那先) 사이에 오고 간 대론서(對論書)이다.

   당시의 그리스적(서양적)인 사유와의 대비라는 면에서 동서 사회의 가치관이나 종교관을 비교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또한 역사상 동양과 서양의 지혜가 교류한 전적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미륵(彌勒,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미륵보살과 다른 실존 인물이다. 남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유가행파(유식학파)를 열어 그 개조가 됐고, 무착(無著, 300?~390?) 등을 가르쳤다.


*미륵보살삼부경(彌勒菩薩三部經)---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미륵불(彌勒佛)---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이다. 미륵을 자씨(慈氏)로 번역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했고, 부처님으로부터 미래불의 수기를 받고 현재 윤회의 마지막 일생을 도솔천에서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세상에 출현해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해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고 한다.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미륵불을 그 절의 주존으로 모실 경우, 그 전각을 용화전(龍華殿)이라 하고, 부속 전각에 모실 경우엔 미륵전이라 한다.---→아일다阿逸多) 참조.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원래 명칭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이며, <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과 함께 미륵삼부경을 이루고 있다. 내용은 석가모니불의 제자인 미륵아일다(彌勒阿逸多, Maitreya Ajita)에 대한 것, 도솔천의 모습, 미륵보살의 상생(上生)과 하생(下生)에 관한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계(五戒)와 팔재계(八齋戒), 구족계(具足戒)를 갖추고 몸과 마음으로 정진해야 하며, 십선법(十善法)을 닦고 도솔천의 쾌락함을 사유해야 한다고 했다.


*미륵육부경(彌勒六部經)---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의 미륵삼부경 외에 미륵내시경(彌勒來時經),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미륵상생성불경(彌勒上生成佛經)을 더해 미륵육부경이라 일컫는다.


*미타경(彌陀經)---아미타경(阿彌陀經)과 같은 말.


*미혹(迷惑)---미혹이란 사리(事理)에 벗어난 것을 뜻한다. 사(事)와 이(理)의 잘못 됨을 미(迷)라 하고, 사리에 밟지 못함을 혹(惑)이라 한다.


*밀교(密敎, Esoteric Buddhism)---현교(顯敎)에 대한 대칭어이다. 현교는 명료한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인 불교를 뜻하고, 밀교는 비공개적이며 비밀스런 교의와 의례를 지닌 불교라 말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밀교(密敎)를 어떤 특수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불교 속의 한 흐름으로서, 대승불교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다. ‘밀(密)’은 주술신앙의 신비성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문자를 초월한 ‘은밀’을 의미한다. 즉 ‘밀’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니 불법의 신비성을 표현하기 위해 ‘밀’이라는 글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밀교는 주술신앙 아닌 대승불교의 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밀교란 비로자나불과 금강살타를 내세우고, 진언(眞言), 다라니((陀羅尼), 수인(手印), 만다라(曼茶羅), 의식(儀式) 등을 행함으로써 불교가 힌두교와 민간 신앙까지 수용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결국 불교의 순수성이 많이 희석된 것이 밀교이다.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탄트라불교)이고, 우리나라에 불교에도 밀교적 영향이 짙게 깔려 있다. 밀교의 교주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이고, 현교의 교주는 화신 석가모니불이다.


*밀린다팡하(Milinda-panha)---→<밀린다왕문경> 참조.


*밀행(密行)---불교에서 ‘밀행’이란 비밀한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보지 않은 곳에서도 계율을 빈틈없이 잘 지킴(면밀히 행함)을 말한다. 즉, 남이 살피지 않는 곳에서도 오로지 수행에만 힘쓰는 행업(行業)을 말하며, 그런 고결한 수행이 이루어진 분은 애를 쓰지 않더라도 하는 일상의 동작이 그대로 진리에 계합하게 된다. 부처님의 아들이며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라후라(羅?羅)존자가 밀행에 뛰어났기에 밀행 제일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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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문(婆羅門, Brahman)---브라만이라고도 하는데, 인도 특유의 신분으로 카스트의 가장 높은 계층. 주로 브라만교(Brahmanism, 婆羅門敎/바라문교)의 베다(Veda) 성전을 신봉하던 사제자(司祭者) 계층을 일컫는다. 사상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주술적(呪術的) 제사를 주관하고, 종교적 지도자로 세습에 의해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혈통을 중시했다. 이와 같은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정신적 사상가로 등장한 것이 사문(沙門)이고, 붓다도 정각을 이루기 전엔 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바라밀(波羅蜜)---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의 음사로서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며,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로 건너가는 보살의 수레라 할 수 있다. 한역에서는 보통 도피안(到彼岸) 또는 도(度)라고 번역되고 있다. 용수(龍樹)의 저서 <대지도론(大智度論)>의 도(度)는 바로 파라미타(Paramita)의 번역어이다.

   대표적인 바라밀로는 <반야경>에서 설법하는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의 6바라밀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은 다른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또한 6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의 네 가지 바라밀을 더해 10바라밀(十波羅密)이라고 한다. 바라밀의 경지는 애쓰고 노력하는 경지가 아니라 몸에 배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경지이다. 애쓰는 것이 없는 제법이 공한 상태, 즉 공성(空性)이 있어야 바라밀이 된다. 그리하여 바라밀은 보살의 길로서 보살이 걸어가야 할 도(道)를 의미한다.---→도피안(到彼岸), 6바라밀(六波羅蜜) 참조.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atimoksya)---불교에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의 모든 조항을 모아 놓은 계본(戒本)을 말한다. 산스크리트 프라티모크샤(Pratimoksya)를 음역한 말이다. 붓다가 성도한 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귀의해서 교단을 이룸에 따라 이들을 이끌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 중 10중대계(十重大戒)로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술을 팔지 말라,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남을 비방하지 말라, 제 것을 아끼려고 남을 욕하지 말라, 성내지 말고 참회를 받아 주어라,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고 했다.


*바수밀다(婆須蜜多)---바수미트라(산스크리트어 vasumitra)와 같은 말.---→세우(世友) 참조.


*바수밀다(婆須蜜多) 여인---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여인. 선지식을 찾는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여인임.


*바수밀다(婆須蜜多) 창녀---인도에 바수밀다라는 창녀가 있었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창녀 바수밀다는 붓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붓다님, 저는 바수밀다라 하옵니다. 더러운 육신을 가진 년이지만, 붓다님께 꽃 한 송이를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시든 꽃 한 송이를 붓다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붓다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시든 꽃을 받았다. “고맙구나. 네가 준 꽃은 향기롭기 그지없다. 너와 내가 여기서 만난 것은 인연. 네가 매일 밤,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수천겁의 삶이 쌓아놓은 네 업보 때문이다. 이제는 너는 바수밀다도, 외간 남자와 몸을 섞어야 하는 여자도 아니다. 이제 너를 ‘산시야(향기로운 꽃)’라 부르겠다. 허리에 단 패물을 끄르고 나를 따라오라.”

   바수밀다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붓다는 친히 손을 내밀어 바수밀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바수밀다는 산시야가 됐고, 창녀에서 꽃이 됐다. 붓다는 조용히 마을을 떠나갔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제자들의 행렬 맨 뒤에는 아직 화장을 지우지 못한 산시야가 걷고 있었다.」


*반가부좌(半跏趺坐)---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 혹은 왼쪽 다리를 구부려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얹고 앉는 자세를 말하는데, 대개 왼쪽 발은 그대로 두고 오른쪽 발만을 구부려 왼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는 자세를 말하며, 바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모습이다.

   전가부좌(全跏趺坐)를 여래좌(如來坐)라고 하는 데 반해 보살좌(菩薩坐)라고도 한다. 또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길상좌(吉祥坐), 오른쪽 다리로 왼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항마좌(降魔坐)라고 한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왼쪽 발을 그대로 두고 오른쪽 발만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는 반가부좌(半跏趺坐) 자세에 왼손으로는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이 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해,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마투라(mathur?) 조각과 간다라(Gandh?ra)미술에서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는 일찍이 5세기 후반 윈강(雲岡) 석굴에 나타나지만 6세기 후반 북제(北齊)시대에 성행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나타날 미륵불이 태자사유상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상이다.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해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고우류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 그리고 당시 삼국과 일본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배(半拜)---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절은 오체투지가 원칙이지만, 다음과 같이 큰 절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반배를 한다. 또는 반배를 다른 말로 저두(低頭)라고 한다.

   - 반배를 하는 경우 ―

   절의 입구인 일주문, 부도탑,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해탈문을 지날 때, 절 마당에서 대웅전을 향해, 탑 앞에서, 경내에서 스님이나 도반을 만날 때, 대웅전 등 전각에서 향과 초 등 공양물을 올린 후, 법당 들어가고 나올 때. 야외 법회시, 옥 내외 법회시 대중이 너무 운집해 오체투지를 할 수 없을 때 등.


*반야(般若)---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쥬나(prajna)이며, 팔리어 ‘panna’의 음역어이다.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보통 말하는 판단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하기 위해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초월적 지혜, 즉 인간 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므로 이기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예지라 할 수 있다. 달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하며, 이 반야의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다.

   반야의 반(般)은 접두어 ‘pan’를 음사한 것인데, 그 의미는 능동적으로 앞서간다는 것이고, 야(若)는 ‘na’를 음사한 말로 혜(慧) 즉 앎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알기는 알되 진행적으로, 능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개념 ? 분별 ? 망상 ? 판단 ? 인식의 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리 알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진행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반야경(般若經)---원명은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으로 반야(지혜)를 주제로 한 경전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대반야경(大般若經)>과 같은 말이라 해야 되겠는데, 당나라 현장(玄?)이 번역한 600권의 <대반야경>에도 누락된 반야계통의 경전이 있다. 즉, 오늘날 가장 널리 독송되고 있는 <반야심경>과 호국 경전의 하나인 <인왕반야경(人王般若經)>은 그 속에 포함돼 있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반야경>도 반야경 계통 경전의 하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야경전에 속하는 경전만도 수십 종류에 이르며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만큼이나 그 경명(經名)도 아주 다양하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열 가지를 ‘십본반야(十本般若)’라고 하는데,

①<소품반야경> ②<대품반야경> ③<인왕반야경> ④<금강반야경> ⑤<반야심경> ⑥<유수반야경> ⑦<문수반야경> ⑧<승천왕반야경> ⑨<이취반야경> ⑩<대반야경>. 이 가운데서 ③번과 ⑤번 이외에는 모두 ⑩번의 600권<대반야경>에 포함돼 있다.---→수품반야경과 대반야경 참조.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 般若波羅蜜)---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이라고도 한다. 반야(般若)란 팔리어 ‘panna’를 음사한 말로서, ‘수승한 지혜’라는 뜻인데, 이때의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를 일컫는다. 그 지혜란 “공에 대한 지혜이고, 집착 혹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즉,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사한 말로서,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는 뜻이고,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수행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즉 보살이 수행을 통해 제법(諸法)이 공(空)임을 아는 참다운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일이다.---→바라밀(波羅蜜), 육바라밀(六波羅蜜) 참조.

                        

*반야심경(般若心經)---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은 경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이다. 원명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고, ‘마하’는 크다는 뜻이며, ‘반야’는 지혜를 뜻하고, ‘바라밀다’는 완성을, ‘심’은 심장 또는 정수를 뜻하는 말이므로, ‘위대한 지혜의 완성과 그 정수를 담은 경’이 된다. 즉,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 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반야경전의 중심 사상을 260자로 함축시켜 서술한 것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며, 한국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다.

   중심 사상은 공(空)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해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나 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역본으로는 현장(玄?)의 것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현장법사와 <반야심경> 사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즉, 현장법사는 629년 천축국(天竺國)을 향해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익주(益州) 공혜사(空惠寺)에 이르렀을 때, 한 병든 노스님을 만났는데, 그는 험난한 천축 길에 만나게 어려움을 알려주면서 “삼세제불의 심요법문(心要法門)이 여기 있으니 이것을 늘 기억해 외면 온갖 악귀를 물리치고 안전히 다녀올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 노스님이 가르쳐준 법문이 바로 범어로 된 <반야심경>이었다.

   천축을 가는 길은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으나 그때마다 이 <반야심경>을 독송함으로써 그때마다 길이 저절로 열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리하여 현장이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천축의 나란타사( N?land?, 那爛陀寺)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그는 거기에서 자신에게 <반야심경>을 가르쳐준 그 병든 노스님을 만났다. 현장을 본 그 노스님은 흔연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삼세제불의 심요법문을 수지 독송한 덕이니라.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그러고는 표연히 떠올라 하늘 높이 사라져버렸다.

   그 뒤 현장법사는 귀국하자마자 관음보살이 친히 교수한 <반야심경>을 번역해 유포했는데, 수지해 지심으로 독송하는 이마다 그 영험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망자는 아미타불이 기다리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망자가 극락정토로 갈 때 타고 가는 배가 반야용선이다. 이 때에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반야용선을 인도한다.

          

*반야지(般若智)---반야지는 일명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하며, 반야지사상은 공(空)사상, 그리고 중도(中道)사상과 더불어 중관(中觀)사상을 구성하는 3대 사변(思辨)이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지혜, 곧 ‘공(空)’임을 보는 지혜이다. 계율로 닦아 깨끗해진 사람이 선정에 의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지혜가 반야지로서, 다른 지혜와 구별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반야지를 ‘각(覺)’이나 ‘오(悟)’라고도 한다. 그래서 반야지는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고, “깨달음” 그 자체이다.

   반야지는 예술을 느끼는 감성이나 자비심과 같은 감성작용과 같은 것으로, 마음이 순수할 때 자비심이 발현될 수 있듯이, 순수한 마음의 상태에서 반야지의 발현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반야지는 만들어지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고, 인간의 마음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유(本有)의 순수감성에 가깝다.

   반야지는 초 분별지(超分別智)와 같은 탁월한 분별지의 성격이 아니고, 감성이라고 보아야 하는 까닭은, 인간의 감성이 분별력보다는 마음의 근원에 더 가까운 까닭이며, 자비심과 같은 것도 분별력이 아닌 인간의 감성작용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비교, 분석, 추리, 판단과 같은 분별작용에 의한 사물의 존재양태에 대한 이해라고 한다면, 감성은 분별에 존재하지 않은 사물에 대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반연(攀緣)---반연이란 말은 일반 사회에선 잘 쓰지 않으나 불경엔 자주 나오는 말이다.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그 외에 아래와 같은 여러 뜻이 있다.    

     ? 얽힌 인연이란 말.

     ? 휘어잡고 의지해서 기어 올라감.       

     ? 정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인연.

     ?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경계를 대했을 때 작용하고 그 모습을 취하는 것.

     ? 도 닦는 것을 방해하는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쓸데없는 일들.

     ? 집착의 대상이 되는 인연 경계. 그래서 반연은 일체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다.


     ※달마(達摩)스님이 이조(二祖) 혜가(慧可)에게 처음으로 가르치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다.---여기서는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반연식물(攀緣植物)---다른 물건을 감아 뻗어 올라가는 줄기식물. 칡, 호박, 나팔꽃, 수세미, 오이 따위.    


*반열반(槃涅槃)---열반은 산스끄리트어 니르바나(nirvaana)의 음역이다. 그런데 반열반은 파리니르바나(parinibbaana)라 한다. ‘파리(pari)’는 완전이란 뜻이다. 따라서 반열반은 완전한 열반이란 뜻이 되며, 주로 석가모니의 죽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구경열반(究竟涅槃) 혹은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도 한다.

     ? 유여열반(有餘涅槃)--현신으로 깨달음을 얻은 상태.

     ? 현신해탈(現身解脫)--살아 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

     ? 무여열반(無餘涅槃)--죽음에 의해 이룬 완전한 열반.

     ? 이신해탈(離身解脫)--죽음에 의해 이룬 해탈.


*반자밀제(般刺密帝)---중인도의 승려. 반랄밀제(般剌蜜帝)라고도 한다. <수능엄경(首楞嚴經)>이 인도의 유명한 절 나란타사에 숨겨져 있어서 당 시대 이전까지는 중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당나라 4대 중종 때인 705년경 반자밀제(般刺密帝)에 의해 전래돼 그에 의해 한역됐다.---→능엄경(楞嚴經) 참조. 


*반주삼매(般舟三昧)---반주(般舟)는 산스크리트어 pratyutpanna의 소리 번역인데, 현재(現在) 혹은 현세(現世)란 뜻이다. 그리고 7일 또는 90일을 기한으로 해서, 계율을 지키고 도량이나 불상의 주위를 돌면서 오로지 아미타불을 생각함으로써, 여러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삼매를 말한다. 즉 염불삼매로서 염불을 통해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부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불현전(佛現前)’, 부처가 바로 앞에 나타나 계심을 뜻한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반주삼매경>은 후한(後漢) 시대인 AD 197년에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번역한 정토사상의 선구적 불경이다. ‘반주(般舟)’란 산스크리트어 pratyutpanna의 음사인데 그것은 불립(佛立)이라, ‘부처 불(佛)’자, ‘설 립(立)’자로서 내 마음 속에 부처님을 세운다는 뜻이다. 부처가 서서 앞에 보인단 말이다. 즉 ‘불현전(佛現前)’, 부처가 바로 앞에 나타나 계심을 뜻한다.


*발난타(跋難陀, Upananda)---8대 용왕(八代龍王)의 하나. 난타(難陀, Nanda)와 발난타는 형제간으로 다 용왕이다. 함께 마가다국을 지키며, 적당한 시기에 비를 내려 백성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발보리심(發菩提心)---줄여서 발심(發心)이라 한다.---→발심(發心) 참조. 


*발심(發心)---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음을 말한다. 지금의 동기부여(動機附輿)란 말과 비슷하다. 그러나 불교 나름에서의 발심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약칭으로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고자 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즉,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불도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등의 뜻이 있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원효(元曉)대사가 출가 수행자를 위해 지은 발심(發心)에 관한 글. 불교 전문강원의 사미과(沙彌科) 교과목 중 하나이며, 처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한 자들은 반드시 읽고 닦아야 할 입문서이기도 하다.

 

*발원(發願)---부처님께 올린 서원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발원이라고 한다. 안으로는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밖으로는 모든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부처님 앞에서의 약속인 서원(誓願)은 수행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 발원이다. 즉 맹세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발지론(發智論)---부파불교시대인 BC 2세기 경 인도 승려 카트야야니푸트라(가다연니자, 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가 저술한 논서로서 당나라의 현장(玄?)이 한역했으며, 모두 20권이다.

   발지론이 나오기 전에는 여러 논(論)들이 주로 각기 특정한 문제를 분담해 고찰하고 있었는데 비해 이 논서에 이르면 비로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학설 전반에 걸쳐 조직적인 논술이 이루어짐으로써 드디어 원시불교에서 설일체유부의 교리가 독립하게 됐다. 그리고 이 <발지론>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가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비바사론>이다.

   소승불교의 대표적 부파(部派)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서는 <발지론(發智論, BC200년경)>→<육족론(六足論)>→<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AD2세기경)>→<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391년에 漢譯)>→<구사론(俱舍論)>의 순서로 발전됐다.

              

*방광(方廣)---산스크리트어 바이풀라(vaipulya)를 번역한 말로 방등(方等)이라고도 번역한다. ‘방등’이란 말이 ‘이치가 보편적이며 평등하다’는 뜻으로서, 대승(大乘)이란 말과 같은 말로 쓰이므로 방광 역시 광대한 진리라는 뜻으로 대승과 같은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편 논리적으로 깊고 넓게 심화된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띤 부처님의 경문을 말하기도 한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산스크리트어 Lalitavistara)---석가의 일대기를 기록한 경전. 당(唐)나라 시대인 683년에 지바하라(地婆河羅)가 번역했는데, <대장엄경(大莊嚴論經)> ? <신통유희경(神通遊戱經)>이라고도 한다. <불소행찬(佛所行讚)>, <보요경(普曜經)> 등과 함께 석가의 생애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일련의 원시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경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전한 불전으로 생각되지만, 대승불교 전통에서 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AD 2~3세기경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부처님의 탄생에서 초전법륜까지 부처님의 전설적인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경의 이름인 범어 랄리타비스타라(Lalitavistara)에서 ‘랄리따(Lalita)’는 유희(遊戱)이고, ‘비스따라(vistara)’는 교설이어서, ‘붓다의 유희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란 뜻인데, 붓다의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설법을 의미한다. 308년 서진(西晋)에서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한역된 〈보요경(普曜經)>은 이 작품의 이본(異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등부경전(方等部經, 산스크리트어 Vetuya Pitaka)---여기서 ’방(方)‘이란 넓다[廣]의 뜻이며, ’등(等)‘은 평등의 뜻이다. 그리고 ‘방등’이란 이치가 보편적이며 평등하다는 뜻으로, 대승(大乘)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방등부경전이란 통상 대승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격하게는 남방 경전인 아함경과 북방 불교, 즉 대승불교의 5부 경전인 화엄부(華嚴部), 법화부(法華部), 열반부(涅槃部), 반야부(般若部) 계통의 불경을 제외한 나머지 대승 경전들을 말한다. 방등부의 경전으로는 <유마경>, <승만경>, <아미타경>, <금광명경> 등이 유명하며, 방등부에 속하는 경전 중에서 <대집경(大集經)>은 별도로 대집부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집경>은 다른 대승경전과 다소 성격이 달라서 그렇다. 그리고 방등부의 경전들이 대부분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방부(房付)---선방에 안거를 청하거나 객승으로 남의 절에 가서 있기를 부탁하는 일.


*방장(方丈)---총림(叢林)의 최고 덕망 높은 고승. 총림이 아닌 사찰에서는 조실(祖室)스님이라 한다.


*방편(方便, 산스크리트어 upaya)---방편이란 편리한 방법, 교묘한 방법이란 말로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맞는 최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근하다’, ‘도달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리고 중생 제도에 목적을 둔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방편을 중요시해 설법하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갖가지 방편이 설명되고 있다. 다만 중생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절대선(絶對善)이어야 방편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방편은 진실을 전제한 도구이다. 진실에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지 않으면 방편이라 할 수 없다.---→방편시설(方便施設) 참조.


*방편바라밀(方便婆羅蜜)---대승의 가르침은 흔히 6바라밀로 설명되지만 제7바라밀로 방편바라밀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방편바라밀이란 뛰어난 방법과 교묘한 수단에 의해,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젊잖게 이야기 한다면, 한량없는 지혜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 중생들 하나하나의 병폐와 원하는 바에 따라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이끌어주는 것이다.


*방편불(方便佛)---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으로부터 파생된 분신불(分身佛)을 방편불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은 대우주의 본체이시고 본불이신 석가여래를 도와주는 방편불 곧 분신불이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부처님은 “(여러 부처들은) 일체중생 구제를 목적으로 하고 중생의 근기에 따라 부처님 입으로부터 출행시킨 방편불이라”고 하셨다.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삼존불이라 해서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실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용일 뿐이다. 불리불가(不離不可) 큰 하나이다.

   과거칠불(過去七佛)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과거칠불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먼저 성불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우주 법계 최초의 부처님-시성정각불(始成正覺佛)이시다. 과거칠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라 하는 등 모든 부처는 모두 본불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탄생한 분신불, 방편불이다.


*방편시설(方便施設)---여기서 ‘시설’이란 사회적 통념에서 갖가지 공사 현장에 설치하는 시설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통념과 불교에서의 개념 사이에 다르게 나타나는 단어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진리 그 자체를 직접 표현하기 힘들 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간접적 수단을 방편(方便)이라 한다. 부처님이 바라는 인간주의적 바른 종교가 세상에 행해지기 위해서는 ‘깨닫기 어렵다’는 문제가 어떻게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됐다. 부처님은 이 문제에 골몰해 마침내 하나의 묘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機)’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론을 불교에서는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방편(方便, upaya)은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하다’, ‘도달하다’라는 말이고, 시설(범어 prajnapti)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에서 부처님은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인 사실을 깨우치는 일에서부터 설해가기 시작했다.

    ※<법화경〉등의 대승경전에 의하면 성문승 ? 연각승 ? 보살승의 삼승(三乘)은 부처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임시로 세운 방편시설(方便施設)로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가르침인 일불승(一佛乘)에 귀착된다고 한다.


*방편지(方便智)---방편지란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응해서 분별(分別)해서 법을 설하는 중생교화의 지혜를 말한다.

   방편이란 수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단이란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목적을 이룰 때에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실천관(實踐觀)으로 두타(頭陀), 정진(精進), 인욕(忍辱), 선정(禪定)과 같은 여러 가지의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방편은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이룰 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방편지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데 거기에도 여러 가지 분별을 할 일이 있을 때 이에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지식이란 말이다.


*방포원정(方袍圓頂)---방포(方袍)는 비구(比丘)가 입는 3종의 가사(袈裟)가 모두 방형(方形)인데서 나온 말이며, 원정(圓頂)은 둥근 머리란 뜻이다. 따라서 방형의 가사를 입은 둥근 머리, 즉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방하착(放下着)---방하착이란 ‘놓아 버려라’, ‘집착하지 말라’ 또는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버려라’ 하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 ‘무자화두(無字話頭)’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등 많은 화두를 창출한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 스님이 처음 한 말이다.

   여기서 ‘방하(放下)’는 내려놓다. 또는 놓아버린다는 뜻이고, 착(着)은 명령형인 ‘방하’를 강조하기 위한 어조사이다. 그래서 방하착이란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집착하는 것을 놓아버려라 하는 말이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我)’, ‘내 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 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하착이란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내려놓고 내 안의 ‘참 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 되겠다.


*백고강좌(百高講座)---백고강좌란 인왕경(仁王經)에 입각해 거국적인 호국법회를 개최하는 것을 말한다. 인왕경은 국토를 지키고 국난을 퇴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그리고 국난의 근본원인은 각자의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이며, 심난(心亂)의 원천은 귀신의 장난으로 본다. 따라서 국난을 일으키는 제신(諸神)을 위무하고 선도하기 위해 인왕경을 강독케 하는 법회를 백고강좌라 한다.


*백골관---→고골관과 같은 말.


*백론(百論)---3세기 무렵의 인도 중관파(中觀派) 승려 아랴데바(提婆)의 저서. 산스크리트어본이나 티베트어본은 전하지 않고, 구마라습(鳩摩羅什)의 한역본(漢譯本)만 현존한다. 대승불교의 공(空) ? 무아설(無我說)에 대해 용수(龍樹, 나가르쥬나)의 <중론(中論)>설만을 채택하고 다른 철학과 종교의 설을 논파한 책이다.

   <백론서(百論序)>를 쓴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 승조(僧肇)에 따르면 원래 백론은 100개의 게가 있어서 백론이라 했는데, 전하는 한역은 전반 10장 50게(偈)만 있고 후반 10장 50게는 빠져 있다고 했다. 이렇게 전후반 합쳐 100게가 있었기 때문에 ‘백론(百論)’이라는 제명을 붙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삼론종(三論宗)의 근본경전으로 중시되고 있다.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백산개’는 흰 비단으로 덮개를 만든 양산의 일종인 천개(天蓋)로서 왕위를 상징하는데, 불지 공덕이 수승함을 전륜성왕에 비유한 것이다.

    ※천개(天蓋)---불상을 덮는 일산(日傘)이나 법당 불전(佛殿)의 탁자를 덮는 닫집. 부처의 머리를 덮어서 비, 이슬, 먼지 따위를 막는 양산. 부처님이 중생들의 뜨거운 번뇌를 식혀주는 그런 의미에서 백산개(白傘蓋)를 사용한다고 한다.

    ※마나사로바(Manasarovar) 호수 북쪽의 카일라스산이 큰 구름의 백산개(白傘蓋) 아래 순백의 미묘한 베일을 두르고 위엄 있는 자태로 제왕처럼 앉아 있다.


*백일법문(百日法門)---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성철스님이 100일 가까이 대중에게 설법한 법문을 엮은 법문집. 먼저 200페이지까지만 읽고, 그 부분을 이해한 후에 뒤로 읽어가라고 한다.


*백장청규(百丈淸規)---중국 당나라 때 백장 회해(百丈悔海, 720~814)가 처음 창안한 것으로 선문의 수행과 생활규범을 정한 청규이다. 이 백장청규에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백장 회해(百丈悔海, 720~814)---중국 당나라 중기의 선승으로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문하이다. 6조 혜능(慧能)의 직제자가 남악 회양(南岳懷讓)이고, 그 제자가 마조 도일이다. 그리고 백장, 그 다음이 황벽(黃檗)이고, 이어서 임제(臨濟), 이렇게 선맥이 이어진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른다. 

   백장은 선의 규범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해 교단의 조직이나 수도생활의 규칙 등을 성문화했다. 그의 수도생활은 매우 준엄해 “하루를 무위(無爲)로 지내면 그날은 굶는다”고 할 정도였다. 많은 제자가 그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황벽 희운(黃檗希雲)과 위산 영우(?山靈祐) 두 사람이 걸물로서, 뒷날 이들의 계통에서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仰宗)이 시작됐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끝에 서서 앞으로 한발을 내딛어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는 말이다. 100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란 깨달음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걸음 더 나아가라면,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르지 말고 한 번 더 전진하라는 말이다. 즉, 이미 노력한 그 위에 죽음을 각오하고 더욱 노력하라는 말이다.


*108 번뇌(煩惱)--- ‘백팔(108)’은 불교에서만 아니라 바라문교의 성전인 우파니샤드에도 ‘108’이라는 수가 보인다. 염주의 수가 108이라는 것도 불교에 국한된 것만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6경(六境)이라는 여섯 가지의 대상을 파악할 때에 호(好)ㆍ오(惡)ㆍ평(平=非好, 非惡)의 셋 감정이 발생해 18이 된다. 그 하나하나에 염(染)과 정(淨)의 두 가지가 있어 합하면 36이 된다. 여기에 또 각각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셋이 있어, 합계 108의 번뇌가 있다는 설이다.


*번뇌(煩惱, klesa)---‘번뇌’의 원어인 산스크리트어 크레샤(klesa)는 ‘마음을 더럽히는 것’, ‘상처 주는 것’, ‘괴롭히는 것’을 의미한다. 번뇌 중에 근본 번뇌로 일컫는 것으로 탐(貪-탐욕) ? 진(瞋-성냄) ? 치(癡-어리석음) ? 만(慢-오만) ? 의(疑-의심) ? 견(見-아견)이 있다.

   번뇌의 분류방법은 수십 종에 달하지만 일반적으로 108번뇌라 말하며, 그 중에서 오개(五蓋), 10사(使)가 유명하다.---→오개(五蓋), 10사(十使) 참조.


*번뇌장(煩惱障---불교수행, 즉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장(二障)이 있다. 이 중 번뇌장은 탐 ? 진 ? 치(貪瞋癡) 등에 의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 것이고, 소지장(所知障)은 기왕에 조금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이다.---→삼장(三障)과 소지장(所知障) 참조.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번뇌가 곧 깨달음이란 말이다. 그 이유는,

     ① 번뇌 가득한 삶의 현장에서라야 깨달음의 꽃이 필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누구나 본래 바탕엔 불성이 있다. 그런데 그 불성이 우리들의 분별작용으로 인해 번뇌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작용만 쉬어주면 곧 불성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범(梵, 산스크리트어 Brahm?)---산스크리트어 브라흐마(Brahm?)를 음역한 말로 청정하다, 신성하다는 뜻인데, 바라문교에서 설하는 우주의 최고 원리, 우주를 창조하고 전개시키는 근본 원리, 만물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힘을 뜻한다.---→범천(梵天, 브라흐마, Brahm?) 참조.


*범망경(梵網經)---<범망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은 크게 북본과 남본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초기경전에 속하는 것으로서, 팔리어로 된 남방 상좌부의 경장인 장부(長部, 디가니까야) 속의 범망경(Brahmajalasutta)이다. 한역(漢譯)으로는 장아함의 <범망경(梵網經)>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의 범망경은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했다고 하는 대승경전으로서의 범망경이다. <보살계본(菩薩戒本)>이라고도 하는데, 본명은 <범망보살계경(梵網菩薩戒經)>이다. 초기경전의 <범망경>과 다르고, 위경이라는 설이 있다.

   ‘범망(梵網)’이란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 갖가지 견해를 건져 올린다는 뜻이고, 내용은 주로 보살의 계율에 관한 것이다.


*범부지(凡夫地)---보통 사람의 경지. 금타(碧山金陀)스님(1897-1948)이 체계화한 수행위차인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에서 제4가행지(加行地)까지가 범부지(凡夫地)이다. 수행을 보다 더 맹렬히 지속적으로 정진해야 하는 경지이므로 가행정진(加行精進)라고도 한다.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를 지칭한다. 고대 인도에서 교양 있는 상류사회의 용어로서 표준어에 해당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주로 평민 언어인 팔리어로 설하셨고, 초기경전 역시 팔리어로 씌어졌으나 대승경전은 대부분 범어로 씌어졌다.


*범천(梵天, 브라흐마, Brahm?)---인도 베다 시대에 브라흐마(Brahm?)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 후 힌두교신 중의 하나가 됐으며, 불교에서는 ‘범천(梵天)’이라고 했다.

   제석천과 함께 일찍 불교에 받아 들여져 불법수호신이 됐고, 또 석가삼존의 양 협시보살이 돼 후세 삼존형식의 선구가 되기도 했다. 형상은 중국식 복장을 하고 손에 불자(拂子)를 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천(天)’을 신(神)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불자(拂子)---먼지떨이. 짐승의 꼬리털 또는 삼 따위를 묶어서 자루에 맨 것. 원래 인도에서 벌레를 쫓을 때 사용했으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승려가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 지닌다.


*범천경(梵天經)---<잡아함경(雜阿含經)>의 제44권에 수록된 경이다. 불교의 중요 교리인 사념처(四念處)에 관한 내용으로, 부처가 제자들에게 직접 설법한 것은 아니고 성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루벨라 네란자라강 근처의 보리수 밑에서 생각한 것을 전한 것이다.


*범행(梵行)---산스크리트어 ‘brahma-carya’은 청정을 뜻함. 따라서 범행이란 음욕(淫欲)을 끊고 계율을 지키는 청정한 수행.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혹은 청정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보살의 수행을 일컫는다.---→오행(五行) 참조.


*법(法)---법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 달마(dharma)이고 팔리어 담마(dhamma)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법(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을 주석서에서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 부르고,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을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a)이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체법으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곧 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고 〈금강경〉은 설명하고 있다. 좀 더 세분화 하면,  

        ① 법에 의지하라고 할 때 법은 절대적 진리의 세계,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덕행을 의미하며, 상주 불변하는 본체를 뜻하는 진여(眞如)와 같은 의미를 뜻한다.

        ②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할 때 법은 존재, 사물을 뜻함.

        ③ 어떤 생각을 법(法)이라 할 때도 있다.

        ④ 법계(法界)에서 법은 모든 사물의 근원 혹은 종교적인 본원을 뜻하고,

        ⑤ 법계(法戒)라고 할 때 법은 불교도이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말하며, 여기서 법(法)은 성법(聖法=佛法)을 뜻한다.

     

*법거량(法擧量)---선종에서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참구해서 깨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깨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인가(認可)를 중히 여긴다.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 즉 화두를 타파했는지를 검증 받는 것이다. 혼자서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의 방식은 주로 스승과 제자의 문답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침(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법거량(法擧量) 혹은 법담(法談)이라 한다.

   법거량을 통해 스승이 제자의 깨침이나 화두 타파를 인정해 주면, 인가를 받는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답(答-화두)만 제자에게 남겨진다. 법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 보며 1대 1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 앞에서 법사와 참가자가 문답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법계(法界)---불법(佛法) 혹은 진리의 범위를 이르는 말. 범어 다르마 다투(dharma-dhatu)를 의역한 말이다. 불교에서 법(法)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마는 여기에서는 모든 사물의 근원을 뜻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종교적인 본원을 의미하며, 여기에 경계라는 의미의 ‘계’를 붙여 진리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법계는 진여(眞如)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즉 우주 만유(萬有)에 보편 상주 불변하는 본체. 절대적 진리의 세계를 뜻하는 진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법계성(法界性)---법계의 본성.


*법계(法戒)---불교도이면 출가 ? 재가와 남 ? 여 구별 없이 모두가 지켜야 할 행위규범인 계율을 말한다. 여기서 법(法)은 성법(聖法=佛法)이고, 계(戒)는 인(因)을 뜻하므로 성법을 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계(戒)와 율(律) 참조.

 

*법공(法空)---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말함. 즉,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에 불변하는 실체-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한다.


*법구(法救)---인명. 산스크리트어 dharmatr?ta, 4세기 북인도 건타라국(乾陀羅國) 출신의 승려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사(論師)임. 저서로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이 전한다.


*법구경(法句經)---팔리어 Dhammapada, 즉 진리(Dhamma)의 말씀(pada)이란 뜻이다. 원전은 팔리어 5니까야의 하나인 소부[小部.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ya)]에 실려 있다. 편집 시기는 BC 4~3세기경이다.

   이 경은 불교의 윤리적인 교의(敎義)를 운문으로 나타내어 26장 423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성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로 석존의 진의(眞意)를 전하는 주옥같은 문자로 존중되고 있어서 예부터 불교도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돼 왔다.---→고기송(孤起頌) 참조.


*법락(法樂)---아래와 같은 세 가지 뜻이 있다.

   ①불법(佛法)의 묘하고 깊은 이치에 맛 들여 얻는 마음의 즐거움.

   ②법회(法會)를 마칠 때, 음악으로나 시ㆍ노래를 지어 부처에게 공양하는 일.

   ③법락(法樂)---인명---→담마류지(曇摩流支, Dharmaruci) 참조.


*법륜(法輪)---윤(輪)이란 고대 인도의 수레바퀴 모양의 무기인 차크람(chakram, 윤보/輪寶)을 의미한다. 이 차크람이 굴러가면 바위든 적군이든 모두 부셔졌다고 하는데, 인도의 전설적인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이 무기를 사용해 천하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붓다나 승려가 설법을 하고, 중생이 그 설법을 들어 불교 교의를 믿으면 차크람에 의해 모두 부셔지듯 번뇌가 모두 파사(破邪: 삿된 것을 깨뜨림)된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의를 차크람에 빗돼 표현한 것이다.

  이래서 불교의 교의(법륜)를 타인에게 전하는 일(轉 ; 굴리다)을 전법륜(轉法輪)이라고 하고, 특히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첫 설법한 일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이후 법륜은 불교의 교의를 나타내는 수레바퀴 형태의 법구로서 구체화됐고, 만(卍)자와 함께 불상이 조상(彫像)되기 전, 불교의 상징이었다.

      ※법륜을 굴리다---불교의 교의를 널리 펼친다는 뜻,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불교를 널리 전하다, 혹은 전교를 한다는 말이다.


*법문(法門, dharma-paryaya)---법문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법(法)은 교법. 문(門)은 드나듦의 뜻이므로 진리의 세계(法)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 부처님의 교법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 열반의 피안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진리를 깨친 이의 가르침(부처님 말씀)은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금 집착과 욕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피안(열반)의 세계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법문(法門)’에서 굳이 ‘문 문(門)’자로 쓰는 것은 스스로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실천의 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스님들의 설법을 통칭 법문이라 한다. 스님들은 부처님을 대신해 가르침을 전하기 때문이다.

  

*법상종(法相宗)---유식사상(唯識思想)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됐다. 법상종의 교의(敎義)가 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유가행파(瑜伽行派)의 교학(敎學)으로 중국에서는 현장(玄?)이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켰다.

   법상종이란 사물의 성질을 밝혀낸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제법(諸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종(宗)이란 뜻이다. 여기서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하며,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 ‘성(性)’에 대칭되는 말이다. 그리고 법상의 ‘법(法)’은 본체적이며 물질과 마음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법상종의 주요 목적은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하는 것이다.

   인도의 유식학을 정립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형제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일컬어지며,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근본 경전으로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圓測)을 중심으로 연구됐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법상종은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교종(敎宗)의 2대 종파였으며, 원주 법천사(法泉寺)가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법성게(法性偈)--중국에 가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한 의상(義湘)대사가 그 경의 핵심 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의상스님의 탁월한 안목과 지혜, 간절한 자비심이 담긴 게송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이다.


*법수(法數)---법수란 대장경 가운데 중요한 부분과 수행에 요긴한 부분을 숫자로 분류 정리한 불교의 교리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일승(一乘), 이제(二諦), 삼법인, 사성제, 오온, 육바라밀, 칠각지(七覺支), 팔정도, 구품왕생, 십선… 삼천대천세계 등 숫자로 된 법(진리)을 말한다. 수(數)에는 숫자라는 뜻 외에 ‘세다, 계산하다, 세어서 말하다, 들어 말하다’ 등의 뜻이 있다. 거기에 ‘헤아리다, 살피다’ 등의 뜻이 더 있다. 불교의 법수를 잘 이해해야 불교교리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불교 법수를 모르는 사람은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법신(法身)---→삼신불 참조.


*법신상주(法身常住)---부처님이 여든 살을 일생으로 열반에 드시려 하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정법(正法)이 얼마나 보존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나도 법은 오래도록 존속할 것이다. 아난아 법신의 수명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라. 육신은 비록 이 세상에서 거두지만 법신(法身)은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이와 같이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멸해도 법신(法身)은 온 법계에 두루 상주(常住)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법신은 삼신불에서의 법신이기는 하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신 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신 부처님의 몸, 우리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몸이지만 우주 및 중생계 모든 것의 바탕이 되며, 그것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만드는 주체인 진리의 당체를 말한다.

 

*법안종(法眼宗)---중국 선종의 한 파. 당나라 때에 크게 발전한 선종은 제6조 혜능(慧能)의 남종 계통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됐는데, 법안종은 그 중의 하나로 중국 5대(代) 시대 청량문익(淸凉文益)이 개창, 주로 강남 지방에서 전개됐다. 법안종은 오대(五代)의 선불교를 최후로 종합해서 화엄철학을 선(禪)의 실천으로 구현시킨 선교융합(禪敎融合)의 종풍을 펼쳤고,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우리나라엔 신라 말(10세기경) 지종(智宗)이 전하고, 고려 때에 크게 융성했으며, 원주 부론면에 있었던 거돈사(居頓寺)가 중심사찰이었다. 거돈사는 현재 사적 제168호의 폐사지이다.


*법열(法悅)---불법을 듣고 진리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말한다. 깨닫고 나면 며칠간 법열의 기쁨에 빠진다. 강한 번뇌가 무섭지만 강한 번뇌 뒤에는 법열이 동반된다. 번뇌 즉 보리가 된다. 흔히 ‘번뇌 즉, 보리’라 하지만 번뇌와 보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번뇌를 실존적으로 체험해 보지 않은 이는 보리의 증득(增得)이 불가능하다. 불안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법열의 기쁨을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요(法要)---아래와 같이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불법(佛法)의 가르침의 요지. 불교의 중요한 부분. 진리의 본질.

      ②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 법회(法會)와 같은 말.


*법융(法融, 594~657)---수~당시대의 승려로서 우두선(牛頭禪)의 개조임. 강소성(江蘇省) 모산(茅山)에 출가해 20여 년 동안 수행하고, 643년에 금능(金陵)의 우두산(牛頭山) 유서사(幽栖寺)의 북암(北巖)에 선실을 짓고 머무는데, 하루는 선종 제4조 도신(道信, 580-651)이 찾아와 그에게 가르침을 주어 심요(心要)를 깨닫게 함으로써 법을 전했다. 그 후 지암(智巖) ? 혜방(慧方) ? 법지(法持) ? 지위(智威) ? 헤충(慧忠) 등 많은 수행자들이 그곳에 운집해, 이들과 함께 이루어진 선맥이 우두종(牛頭宗)이다. 이와 같이 도신선사는 홍인(弘忍, 601~674)선사에게 정통 선맥을 이어주고, 법융선사에게 방계로 선맥을 이어주게 돼 결국 우두종이 탄생하게 됐다. 즉, 도신선사의 법이 나누어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선풍을 그가 머문 곳의 이름을 따서 우두선(牛頭禪)이라 부른 것이다, 저서로 <절관론(絶觀論)>, <심명(心銘)>이 있다.


*법인(法印, 산스크리트어 dharma-mudr?)---법(法)은 부처의 가르침, 인(印)은 특징 ? 징표 ? 도장의 뜻으로 확실하게 단언함을 뜻한다.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데서 이것은 불교 특유의 가르침이다하고 도장 찍어 놓듯 확실한 가르침이 있는데 이를 법인(法印)이라고 한다. 법인에는 네 가지가 있어서 이를 4법인이라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합쳐 사법인(四法印)이라 한다.---→삼법인(三法印) 참조.


*법인(法忍)---<무량수경(無量壽經)>에 나오는 삼법인(三法忍)과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에 각각 법인(法忍)이 있다. 어느 경우나 대체로 뜻은 같다.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지혜. 그리하여 미혹을 끊고 진리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거기에 안주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지혜를 말한다.---→삼법인(三法忍) 참조.


*법장(法藏, 643~712)---중국 당나라시대 화엄종의 승려. 자는 현수(賢首), 본래의 성은 강(康)씨이다. 국일법사(國一法師) ? 강장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다른 법장스님과 구별하기 위해 ‘법장현수’ 혹은 ‘현수법장’이라 한다. 서역의 강거국(康居國) 출신이어서 성을 강씨라 하고, 그래서 강장국사라고도 한다.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중국에서 살았다. 일찍이 신라의 의상(義湘)과 더불어 화엄 제2조 지엄(智儼)에게서 화엄종의 교학을 사사해 중국 화엄종의 제3조(三祖)가 됐으며, 이 종파의 교리를 집대성했다.---→기신론소(起信論疏) 참조.

    ※강국(康國)---강거국(康居國)이라고도 하는데, 고대에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방(혹은 지금의 동 투르키스탄)에 있었던 소그디아(Sogdia)란 나라를 중국에서는 강국 혹은 강거국이라 불렀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강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법장(法藏, 1350~1428)---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송광사를 중창했다. 송광사를 중창한 공로와 그 도력으로 송광사 16국사의 열(列)에 참여하게 됐다. 저서로는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이 있다.


*법장부(法藏部, 산스크리트어 dharmaguptaka)---붓다 입멸한 후 300년경 부파불교시대에 부파의 하나. 화지부(化地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라고도 하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분파라고도 함. 파조(派祖)는 담무덕(曇無德)임.


*법장비구(法藏比丘, 법장보살)---아미타불(阿彌陀佛)이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의 이름.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본래 한 나라의 왕이었는데 발심 출가해 이름을 법장(法藏)이라 했다.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48대원(四十八大願)을 세우고 오랜 세월 수행 끝에 성불해, 현재의 아미타불이 된 후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며, 법(法)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법주(法住)와 법계(法界)---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고 있는 이것을 ‘법주(法住, dharma-sth-iti)’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성립하듯 일정한 법칙을 요소로 해서 성립해 있다. 경전에는 이것을 ‘법계(法界dharma-dhatu)’라 한다(잡아함 권 12). 여기서 ‘계(界)’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본래 법칙을 그의 성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법성(法性)이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그런 법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 속에 상주의 법성(法性)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성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체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법성을 일체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봐서도 안 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法]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미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법집(法執)---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4상(相)이라 한다. 이 4상은 주관적인 아집인데 반해 객관의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법집(法執)이 또 있다. 객관의 실체성 역시 없는 줄 알아야, 즉 법무아(法無我)를 실현해야 4상이 완전히 없어져 부처님 세계에 들 수 있다. 

   법집(法執)에서 법(法)은 객관적 사물을 뜻하기도 하고, 종교적 진리를 뜻하기도 해서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법집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주 만물의 객관적 사물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고집하는 집착과 내가 믿는 종교, 즉 ‘법’에 대한 집착, 모두를 말한다.

   출가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집착에 시달린다. 공부가 진전되면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집착에서는 점차로 멀어지지만, 또 하나의 집착이 찾아온다. 바로 자기가 발견한 진리(법)에 대한 집착이다. 자기가 발견한 진리이니 이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 진리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 자기가 발견한 진리만이 진짜이고, 다른 사람의 진리는 깔보는 고질병도 법집이다.


*법현(法顯)---중국 최초의 구법승, 동진(東晋)시대의 승려임. 399년 60세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동학 5인과 함께 고난을 무릅쓰고 히말라야를 넘어 북인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불적을 순례하고, 계율경전과 그 밖의 불교경전을 베껴가지고 실론(스리랑카)으로 건너갔다가 414년 해로로 귀국함으로써 최초의 인도 순례승이 됐다. 귀국까지 15년의 세월을 소비하며, 순방한 나라가 30여 개국이었다.

   그의 여행기 <불국기(佛國記)>는 간략하나 5세기 초의 중앙아시아나 굽타 왕조의 극성기에서의 인도의 불교사정을 기록한 현존 최고(最古)의 기록으로서 귀중하다. 그는 귀국 후 소승열반경인 <대반열반경>을 한역했고,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와 더불어 대승열반경인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도 한역했으며, 그 외에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또한 법현은 미륵신앙을 중국에 전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법화경(法華經)---법화경의 원제목은 산스크리트어로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ndarika sutra)로서 ‘흰 연꽃과 같은 올바른 가르침의 경’이란 뜻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開) 보여(示)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悟) 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入) 함을 목적으로 편찬된 경이다.

   법화경은 한꺼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형성 시기는 대체로 3기로 나누어서 제1기는 AD 50년경, 제2기는 AD100년경, 제3기는 AD150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3세기에 최초로 한역됐으므로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한역된 셈이다. 번역본엔 3종이 있다.

   ? 286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 406년 구마라습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601년 사나굴다(?那?多)와 달마급다(達磨?多)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의 3종이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화엄경>을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하고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 최고의 가르침으로 꼽았고, 모든 경전의 왕으로 생각됐으며, 대승불전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그러므로 묘법연화경은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많이 존숭되고 신봉해온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내용도 대승불교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으로서 문학적인 가치도 높다. 소승을 포함한 삼승(三乘 - 성문의 길, 독각의 길, 보살의 길)의 가르침을 먼저 설해 보인 후 결국엔 일승(一乘)의 가르침이 가장 뛰어남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법화경은 방편품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은 결국 본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의 분신불이라고 설하신 여래수량품을 그 주지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천태종의 기본 경전이다.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신라의 고승 원효(元曉)의 저술. 원효의 많은 저술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20여 가지 가운데의 하나인 이 <법화경종요>는 그 책 제목이 보여 주듯 법화경의 가장 중심 되는 가르침[종취(宗趣)]과 중요한 뜻[요의(要義)]을 간략하게 밝혀 놓은 글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의 하나,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천태대사 지의(智?, 538~597)가 저술하고, 관정(灌頂, 561-632)이 정리했다.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법화경을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법화현의(法華玄義)>를 일컬으며, 모두 천태종(天台宗)의 개조인 천태대사 지의(智?)가 저술했다.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법화경(法華經), 무량의경(無量義經), 관보현경(觀普賢經)


*법화행자(法華行子)---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법화경을 온 세상에 펴는 사람을 말한다. 즉 법화경을 펼 때에는 모든 인간에게 다 법화경을 믿게 하겠다는 굳건한 마음으로 펴는 이를 법화행자라 한다.


*법화현의(法華玄義)---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의 하나, 천태대사 지의(智?, 538~597)가 저술하고, 관정(灌頂, 561-632)이 정리했다.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교상문(敎相門, 교학)의 대표 저서로서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목을 중심으로 해서 경전의 요지를 해석하고 붓다 일생의 교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했다.


*벽관(壁觀)---중국에서 선종을 일으킨 달마(達摩)대사의 독특한 수행법으로 벽을 마주하고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담림(曇林)은 <소전(所傳>에서 ‘이입(理入)이란 안심(安心)이며, 안심이란 벽관(壁觀)이다’라고 해 벽관이 진리에 들어가는 실천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송대 종감(宗鑑:?∼1206)은 저서 <석문정통(釋門正統)>에서 벽관을 ‘참다운 마음의 안정’이라고 해석했다. 벽(壁)은 먼지나 티끌처럼 밖에서 오는 번뇌를 들어올 수 없도록, 즉 망념을 막아주므로 마음을 집중해 벽과 같이 함으로써 마음의 청정함이 유지되니, 이를 곧 벽관이라고 했다.

     ※이입(理入)---경전의 연구를 통해 근본교리의 이해하고, 진리의 깨달음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안심(安心)---불법에 의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


*벽암록(碧巖錄)---중국 송나라 때 선승 원오 극근(?悟克勤, 1063~1135)선사의 어록으로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인데 화두(話頭) 100칙(則)을 모아서 10권으로 만든 책. 각 칙마다 수시(垂示) 등 알기 쉽게 해설을 붙여 놓았다.


*벽지불(?支佛, pratyeka-buddha)---연각(緣覺) ? 독각(獨覺)과 같은 말.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성문(聲聞, sravaka)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도(道)를 깨치고, 고요와 고독을 즐기며 설법교화를 하지 않는 성자이다. 독각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남을 깨닫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므로 완전한 부처와는 구별된다.


*변견(邊見)---오견(五見)의 하나. 자아를 비롯한 모든 것은 단멸한다거나 영원히 존속한다고 어느 한쪽에 치우친 극단적인 그릇된 견해, 즉 ‘나’라는 존재에 집착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생각(有見, 常見)과 그 반대로 죽은 뒤에 자아는 아주 없어진다는 극단적인 생각(斷見, 無見)을 말한다. 즉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혀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그릇된 견해이다.---→견혹, 10사(十使) 참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유식 삼성설(三性說)의 하나. 변계(遍計)는 모든 것을 치우치게 헤아리고 억측한다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분별해 집착한다는 말이다.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인 편계소집성은 우리 중생의 망령된 잘 못 보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즉 정(情)에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인은 함부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다.---→유식삼성(唯識三性) 참조.

 

*변상도(變相圖)---불교경전에 나오는 교훈적인 장면 등을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경화(經畵)라고도 한다. 즉, 경전의 내용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설화 또는 극락이나 지옥의 모습을 주제로 해서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진상(眞相)을 변화시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변상도라고 한다. 탱화가 벽에 걸어두기 위한 액자형의 불화인데 반해, 변상도는 불경에 그리거나 나무나 금속판에 새긴 판화형이 대부분이다.

     ※법화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 관무량수경변상도, 범망보살계경변상도 등이 있다.


*변정각(便正覺)---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 의상대사가 지은 법성게의 한 구절로서 초발심을 일으켰을 때가 문득 정각(구경각)을 이루었을 때라는 말이다. 초심(初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고, 그 초심을 그대로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변조(遍照)---부처의 광명이 온 세계와 사람의 마음을 두루 비추는 일. 특히 밀교에서 숭상하는 대일여래의 경우, 그 광명이 널리 세계를 비추되 금강과 같아서 쇠퇴하는 일이 없기에 이를 일러 변조금강(遍照金剛)이라 하며, 대일여래의 호칭이기도 하다. 


*별교(別敎)---천태종의 화법사교(化法四敎)에서, 보살만을 위한 가르침을 말함. 별교일승(別敎一乘)의 준말.---→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별교일승(別敎一乘)---삼승(三乘)에 대한 가르침과 전혀 다른 일승(一乘)의 가르침이라는 뜻. 화엄종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원만하고 완전한 가르침, 곧 화엄경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말함.


*별상삼보(別相三寶)---신앙상의 삼보를 말함이니,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불보요, 여러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과 부처님이 깨달으신 우주의 진리는 법보요, 부처님의 교법을 의지해서 수행한 삼현(三賢) ? 십성(十聖) 등은 승보인데, 이 삼보의 체상(體相-모습)이 서로 다르므로 별상삼보라 한다.

     ※삼현(三賢)---여기서 말하는 삼현은 성문, 연각, 처음 발심한 보살을 뜻한다.

     ※십성(十聖)---10성은 10지(地)보살을 일컫는다.


*보리(菩提, 산스크리트어 Bodhi)---깨달음이란 뜻. 한자로는 보제(菩提)라고 쓰고, 보리라고 읽는다.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인 깨달음의 지혜, 또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 과정을 뜻하는 말.


*보리도량(菩提道場, 산스크리트어 bodhi-ma??a)---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우루베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buddhagay?)의 보리수(菩提樹) 아래 금강좌를 말한다. 후대에는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장소라는 보통명사가 됐다. 


*보리살타(菩提薩陀)---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한 것이 보리살타이다. 보살과 같은 말. 보디((Bodhi)는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sattva)는 유정(有情;생명체)이란 뜻으로 ‘깨달음을 얻은 생명체’, 혹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본래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에 보리살타였다고 한다. 그것을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보살 참조.


*보리수(菩提樹)---부처님은 고대 인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에서 가까운 붓다가야 우루베라의 네란자라강(尼連禪江 ; 리라강) 서쪽 기슭의 핍팔라(pippala;畢鉢羅)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깨달음을 준 나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보디 브리크샤(Bodhi vriksa)인데, 이 음을 따서 한역해 핍팔라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 했다. 그리고 각수(覺樹), 도량수(道場樹) 등으로도 불린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그 옆의 니그로다나무(尼拘律樹;Nigrodha) 아래로 옮겨 앉아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고, 설법을 할 방법을 궁리했다. 이 니그로다나무는 뿌리가 많다고 하여 다근(多根) 혹은 용수(榕樹)라 한다.


*보리수나무(Silverberry)---우리나라 보리수나무. 전국의 표고 1,200m 이하의 산기슭에서 자생하는 낙엽활엽관목이다. 수고 3~4m 정도로, 5~6월에 잎겨드랑이에서 1~7개의 꽃이 모여 흰 꽃이 피는데 점점 노란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10~11월에 둥근 적색으로 익으며 먹을 수 있고 비늘털이 남아 있다. 인도의 보리수와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인도의 보리수나무는 열대림이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


*보리심(菩提心)---보리심이란 한 마디로 부처님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역어로, 위없는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일컫는다. 즉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이다. 보리심에 의해 수행이 시작되므로 보리심을 부처의 어머니라고 한다.


*보리유지(菩提流支)---6세기 중국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인도 출신 승려. 그는 삼장(三藏)에 정통했다. 508년 낙양으로 왔는데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는 그를 매우 환영해 영녕사(永寧寺)에 주석하도록 배려했으며, <십지경론(十地經論)>, <입능가경(入楞伽經)>,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등을 번역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달마(達磨)대사를 시기한 나머지 AD 528년 10월 5일,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달마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한다.

     ※당나라시대 <대보적경(大寶積經)>을 편집했다는 보리유지와는 다른 인물임.


*보리유지(菩提流支)---위의 보리유지와 다른 인물임. 7세기 말, 8세기 초 당나라시대에 활약한 인도 출신의 밀교 계통 승려. <천수천안관세음보살모다라니신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모陀羅尼身經)>,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索紳變眞言經)>을 번역하고, <대보적경(大寶積經)>을 편집 완성했다. 대보적경은 별개의 여러 경전들을 한데 묶어 정리 집성한 일종의 혼합경이다. 모두 49종의 불경을 모아 49회 77품 120권으로 돼 있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감색(紺色)의 의 종이에 은니(銀泥)로 쓴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索紳變眞言經)>은 검푸른 색의 종이에 은가루를 사용해서 직접 불경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국보 제210호로 지정돼 삼성 리움미술관에 보관돼 있다.---→대보적경(大寶積經) 참조.


*보리행(菩提行)---깨달음을 지향하는 것.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깨달음의 실천. 보살도의 실천 등의 뜻이다.

   그런데 습성으로 익혀온 마음속의 이기심을 변화시켜야 보리행을 하는 것이다. 마음 따로 있고 보리심이라는 것이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별이나 집착, 망상이 없는 인식에서 선행과 선심의 보리행이 나오고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보리행경(菩提行經)---인도의 불교학자 산티데바(Santideva, 한역 적천/寂天, 7∼8세기경)의 저술로 전해지나 10세기에 송(宋)나라시대에 천식재(天息災)가 번역한 한역본에는 용수(龍樹)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보살행을 밝히는 저술로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을 설한, 8품(品)으로 된 게송. 대승불교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일명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이라고도 한다.


*보림전(寶林傳)---당의 고승 지거(智炬)가 801년에 지은 불교서적. 원제는 <대당소주쌍봉산조계보림전(大唐韶州雙峰山曹溪寶林傳)>이다. 선종에 전하는 조사(祖師)의 법맥이 달마까지 28조라고 주장한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섭(迦葉)에서 달마에 이르는 조사의 법맥을 순서대로 다루고 조사에 관한 전설과 법을 전하게 된 인연을 소개했다. 이 보림전에 “불립문자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란 말이 처음 등장한다.


*보문시현(普門示現)---관세음보살께서 ‘넓은 문으로 (몸을) 나타내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므로,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며, 삼십삼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서른 세 가지 몸의 모습으로 중생의 필요(고통 받는 소리)에 따라 몸을 나타내시어(시현하여) 고통을 없애주니, 보문을 보통 ‘넓은 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그 종류가 많지만, 성관음(聖觀音)만이 본신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문시현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화신이다.


*보살(菩薩)---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音)역한 것으로 보디(Bodhi)와 sattva(사트바)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리와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 하며, 살타와 사트바(sattva)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으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깨달음과 중생을 합친 개념이다. 즉 ‘깨달음을 얻은 생명체’, 혹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명체’란 말이다.

   이는 곧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보살은 위로는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 하면서[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보살계(菩薩戒)---보살계란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력으로 지혜와 자비를 실현해 나가는 출가와 재가 보살이 지켜야 할 실천덕목이다. 본래는 대승(大乘)의 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승려 외에 속인의 경우에도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계율로 인식되고 있다.


*보살승(菩薩乘, bodhisatttva-yana)---보살의 길, 보살의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한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므로 불승(佛乘)이라고도 한다.


*보살행(菩薩行)---보살의 수행. 보살이 실천하는 행위. 즉 부처가 되기를 목적으로 수행하는 자가 행하는 자리(自利) ? 이타(利他)의 행위, 곧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무아행(無我行)을 말한다. 결국 보살행이란 베풀고서 후회하지 말고, 과보를 기대하지도 말며,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말고, 내생을 바라지도 말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도 말며, 오직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위한다는 마음에서 아낌없이 베푸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보살행의 시작이다. - <대방광불화엄경>에서 -


*보요경(普曜經)---서진(西晋)시대 축법호(竺法護) 번역.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다른 번역. <보요경(普曜經)>에 근거해 탄생불에 감로다를 붓는 의식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전통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즉, 사찰에서 음력 4월 8일 부처님의 탄생하는 모습의 불상을 목욕시켜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념하는 관불회(灌佛會)라는 법회를 개최한다. 헌데 <보요경(普曜經)>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탄생하셨을 때 용왕이 공중에서 향수를 솟아나게 해 그 신체를 세욕(洗浴)시켰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해 관불회 때에는 탄생불상에 감로다(甘露茶)를 붓는 의식을 집행한다.


*보우(普愚)---고려 말에 활동한 승려(충렬왕 27/1301년~우왕 8/1382년). 원증국사(圓證國師)의 휘가 보우이다.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다. 우리나라 임제종의 시조이고, 종파 통합(통불교)에 앞장선 한국불교의 중흥조로서 조계종의 공식적인 중흥조이며, 태고종(太古宗)의 종조이기도 하다.

   태고 보우는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禪敎兼修) 사상을 계승함으로써 화엄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선(禪)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의 회통구조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1625년(인조 3)에 휴정(休靜) 문하의 언기(彦機)가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을 제기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 휴정의 제자들이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태고법통설은 우리나라 불교계 전체의 정통설로 수용됐다.


*보우(普雨, 1509~1565)---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명종 3년(154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가 돼 당시 질식 상태에 있던 불교를 부흥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선 ? 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억불정책(抑佛政策)에 맞서 불교를 부흥시켜 전성기를 누리게 했으나 그의 죽음 직후 원상태로 돌아갔다.


*보임(保任)---→만행 참조.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고려 중기의 승려. 무신의 난으로 정치권력이 무신들로 교체되면서 불교교단도 재편되던 때였다. 따라서 그는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야기된 불교계의 폐단과 선종과 교종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비판하며 불교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침체된 선을 부흥시키면서 불교계를 개혁하는 한편 중국 당대(唐代)의 선종 승려 하택 신회(荷澤神會)의 이론을 받아들여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보타락가산(補陀落山)---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해 있는 팔각형의 바위산으로, 산에서 자라는 꽃과 흐르는 물은 빛과 향기를 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이 보타락가산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를 본 따서 우리나라 여러 곳에 낙산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강화군 석모도의 보문사 뒤의 낙가산(해발 235m)과 마애관음상이 유명하다.


*보현보살(普賢菩薩)---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보현보살은 대행(大行)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부처님의 행원(行願)을 대변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른쪽에 협시해 이덕(理德)과 정적(定德)과 행덕(行德)을 맡고 있다. 이와 같이 이치와 명상과 실천을 관장하는 것이 보현보살의 특징이다.

   원을 세우면 반드시 실행한다고 해, <화엄경>에서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기에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보현보살은 형상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흰 코끼리를 타거나 연화대에 앉아 있는 형상이 대부분이다.

    ※대행(大行)---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영원에 걸쳐 여러 선행을 행하고 공덕을 쌓는 일로 대승의 실천을 말한다.

    ※행원(行願)---행원은 신행(身行)과 심원(心願)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바람과 그 실천의 서원(誓願)을 말한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원(行願)을 기록한 경. <화엄경(華嚴經)> 안에 수록돼 있으며,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다. 즉, 화엄경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의해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53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찾아가서 도를 묻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찾았을 때 보현보살이 설한 법문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해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켜서 이 한 품을 별도 책으로 간행, 유포시켰다.


*복전(福田)---논밭이 곡물을 자라게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보에 공양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베품을 행하면 자기에게 복이 돼 돌아와서 복덕(福德)의 열매를 얻게 되므로 복밭(福田)이라고 한다. 즉 불법(佛法)의 참된 신앙이 곧 복의 밭이 된다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를 통해 승려를 복전이라 일컫기도 했다.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중생의 마음이란 번뇌로 더렵혀진 미혹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의 본성은 본래가 청정한 각체(覺體)인 것이다. 이 청정한 각체를 본각(本覺)이라 한다. 따라서 본각이란 우리가 본래 깨달아 있다는 말이고, 시각은 이런 우리를 스스로 각자 확인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르기를 본각이란 본래부터 불성을 갖추고 있는 진여의 본체이며, 시각이라 함은 수행의 공(功)을 방편으로 대지혜광명의 공덕을 나타내는 각(覺)이다. 이와 같이 본각과 시각은 서로 대칭되는 말이다.

   사람들은 번뇌 망상으로 시달림을 받다가 홀연히 한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평정되면 깨달음을 얻었다, 한 소식을 얻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이르듯 본래 마음[本覺]이 깨달았다고 해서 더 맑아지는 것도 아니고 번뇌 망상에 물들었다고 해서 더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본각의 불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다.   

   무시이래의 번뇌를 수행에 의해 차례로 없애고 서서히 마음의 본원을 깨닫는 것이 시각이며, 번뇌로 덮여 있는 미혹한 모습이지만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라는 것을 본각이라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불교가 성선설인가 성악설이가 하는 논의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선설도 아니고 성악설도 아니다. 본래면목이다. 즉 본래 그대로라는 말이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을 일컫는다.

   제6조 혜능(慧能)은 제5조 홍인(弘忍)으로부터 의발(衣鉢)을 전수받았으나 대중의 시샘으로 박해를 받아 남쪽으로 도피했다. 그 의발을 빼앗으려고 뒤쫓는 자들 중에 무사 출신의 발 빠른 혜명(慧明)이란 자가 있어 뒤쫓아 왔다. 이에 혜명이라는 수좌를 만나 혜능은 이렇게 물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 것이오. 그렇다면 이러한 때 그대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이오?” 이 한 마디 물음에 깨달음을 얻은 혜명은 혜능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이때 혜명의 깨달음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고, 이후 선가에서 본래면목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됐다. 여기서 본래면목은 혜능이 가진 의발을 뺏으려는 마음을 비롯한 온갖 생각들을 다 떨쳐낸 고유한 자기, 순진무구한 자기,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자기를 뜻한다. 즉, 우리의 본래 모습, 중생이 본디 지니고 있는 순수한 심성을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성(自性), 진아(眞我), 불성(佛性), 진여(眞如), 일심(一心) 등으로 일컫는다.

   본래면목엔 으레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란 말이 붙어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라 하는데, ‘부모미생전’이란 분별 이전,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이고, 본래면목이란 진실한 나의 모습, 또는 본래의 자기 성품을 말한다.

   이러한 ‘본래면목’은 우주 삼라만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 우주 삼라만상이 다 멸한다 해도 본래면목은 멸하지 않는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인 것이다.---→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참조.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열반에는 2열반 ? 3열반 ? 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그 중 4종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으로서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이에 속한다.

   본래자성청정이란 모든 사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열반, 즉 진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진여의 성품이 청정해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생멸이 없는 적정한 열반이고, 본래 성불, 본래 부처와도 같은 뜻이다.


*본사(本師)---아래와 같이 몇 가지 뜻이 있으나 주로 석가모니불을 의미한다.

        1) 근본이 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로 주로 쓰인다.

        2) 자기가 믿는 종파의 조사(祖師).

        3) 자기가 법을 받은 스승을 일컫기도 한다.


*본생담(本生譚)---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 <본생경(本生經)>이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자타카(Jataka)라 한다.---→자타카(Jataka) 참조.


*본연부(本緣部)---본연은 본생(本生) 또는 본기(本紀)라고도 하는데, 주로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세에 중생을 구제하고 자아의 완성을 위한 보살행을 한 전생 설화를 담고 있으며, 대표적인 경전이 자타카(본생경)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전생담(전생의 이야기)을 담은 경전류를 일본에서 발간한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서 본연부(本緣部)라고 분류해 놓았다.

   본연부에 딸린 경전은 대부분 신화와 전설이 뒤섞인 옛날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합리적인 논리로 전개되는 경전과 함께 이처럼 비합리적인 설화가 경전으로 결집됐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본원(本願)---부처가 되기 이전, 즉 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세운 서원(誓願). 부처가 맨 처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세운 서원. 대승의 보살들은 자신의 오도(悟道)는 뒤로 돌리고 우선 남을 구제한다는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의 사상과 실천을 이상으로 했고, 이러한 중생구제의 염원과 깨달음을 찾아 불도에 들어올[(발심(發心))] 때부터 그 맹세가 요구됐다. 이러한 소원을 마음으로 맹세하는 것, 즉 서원을 본원(本願)이라고 했다.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자리이타(自利利他), 하화중생(下化衆生)과 같은 말.


*본원력(本願力)---대승의 보살들은 자신의 깨달음은 뒤로 돌리고 우선 남을 구제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 하화중생(下化衆生) 사상의 실천을 이상으로 했고, 이러한 중생구제의 염원은 불교에 귀의할 때부터 그 맹세[발심]가 요구됐다. 이러한 소원을 마음으로 맹세하는 근본적인 서원이란 뜻인데, 보살의 본원에 힘입는다는 뜻이다.


*본초불(本初佛)---밀교에서 최초이고 근본적이며 원초적인 부처님을 일컫는다. 산스크리트 명은 아디 붓다(Adi Buddha)이고, ‘아디’란 본래, 최초를 의미한다. 아제불타(阿提佛陀)는 그 음역이다. 본초불은 겁초에 출현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생자(自生者)로서 어떤 인연에 의해 나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태어나신 분’ 혹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즉 깨달아서 부처가 된 게 아니라 본래불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는 나오지 않고, 대승불교에서 신격화된 부처이다. 일종의 자재신(自在神)으로서 연기 법칙을 골간으로 하는 근본불교(초기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이런 데에서  대승비불설이 나오는 것이다.

   아무튼 아디 붓다가 밀교계 경전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처님이라면, <법화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처님은 위음왕불(威音王佛)이다.


*부단공(不但空)---필경공(畢竟空)ㆍ무소득공(無所得空)이라고도 한다. 만유가 공이라면 다시 공 자체에 얽매이기 쉬우므로 공에 대한 집착까지도 떠남으로써 공마저 공한 것이라고 보아 더 이상 부정할 것이 남지 않은 최후 완전한 절대 공을 뜻한다는 말이다. 즉, 공도 역시 공(空)하다는 절대 부정(否定)의 공을 부단공이라 함. 공에 집착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으며 묘유(妙有)의 일면을 아울러 인정하는 중도의 공. 반대말 - 단공(但空).---→필경공(畢竟空) 참조.


*부대사(傅大士, 497~569)---중국 양(梁)~진(陳)시대의 승려로 성은 부(傅)이며, 이름은 흡(翕), 자는 현풍(玄風)이다. 부대사라는 별칭 이외에 쌍림대사(雙林大師), 동양거사(東陽居士)라고도 한다. 16세에 혼인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24세에 서역의 승려 숭두타(嵩頭陀)에게 감화돼서 출가해 절강성(浙江省) 동양(東陽) 송산(松山)에 은거해 숨어 살며 수행했다.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와 재가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양무제(梁武帝)를 귀의시켜 중국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어록으로 <선혜대사어록(善慧大士語錄)>과 <심왕명(心王銘)>이 전해지고 있다.---→심왕명(心王銘) 참조.


*부도(浮屠, Buddha)---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한다. 또는 탑파(塔婆)의 전음이라고도 한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승려의 사리를 모신 묘탑을 일컫는 말이다.


*부동명왕(不動明王,Aryacalanatha)---원명은 아짤라(Acala)라 하는데, 힌두교 쉬바 신의 이명(異名)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했다. 불교에서는 이 부동명왕에게 사자(使者)의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서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됐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고, 동자형(童子形)의 몸의 모양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돼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따른 것이다. 조상(造像)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부란약(腐爛藥)---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허술한 약인데, 이를 약으로 사용할 정도로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좋은 약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정사(精舍)에 거주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이와 함께 부란약 대신 온갖 약초가 사용되게 됐다.   


*부루나(富樓那)---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사람. 부루나는 설법을 통해 9만 9000명을 열반에 들도록 해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본명은 푸르나 마이트라야니 푸트라(Purna maitrayani putra)이다. 아버지는 카필라성주 정반왕의 국사이며 큰 부자였다. 그는 부처가 탄생하던 날에 태어나서 일찍 그 총명한 능력으로 베다(Veda)와 그 밖에 브라만교(敎)의 모든 논서(論書)들을 공부했으나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심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부처에게 귀의(歸依),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우주 삼라만상이 생기기 이전을 말한다. 여기에서 부모란 ‘현생의 부모’가 아니다. 영생을 두고 수많은 생을 거듭나며 새 몸을 받기 위해 그때마다 부모를 만났을 것이고, 그 부모는 그 부모대로 몇 생을 거듭 태어나며 만난 또 다른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란 전생(前生), 전전생(前前生), 그 이전의 부모이고, ‘미생전’이란 몸 받기 그 이전, 분별 이전, 번뇌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몸 받기 전의 몸’이란 눈에 보이는, 즉 태어나서 자라나서 살다가 병들어 죽는 이 몸뚱이, 세월 따라 변하는 지금의 ‘거짓 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참 나’, 내게 본래 있는 불성(佛性)을 말한다.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헌데 일반사회에서는 통속적으로 간단히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혹은 우주 생성이전을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하기도 한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시심마(是甚磨)---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시심마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본래면목이 ?고? 어떤 것이 ‘참나’이던고? 라는 뜻으로 화두의 하나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참모습(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네가 네 엄마로부터 몸 받기 전에 너는 무엇을 했느냐, 부모님께 몸 받기 이전에 나는 어디 있었는가? 이러한 물음에 큰 의심을 가져보라는 말이 본래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제를 의심하기 위해 ‘이 뭣고’ 하며 골똘히 참구하면 본래면목, 즉 ‘참 나’를 깨달게 된다는 것이다. 

   헌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란 ‘나(我)’라는 개체적 인식이 없는 상태,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본래면목을 진아(眞我), ‘참 나’라 표현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뜻은 [무아(無我)]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은 문자를 통한 말로 터득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깨달은 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므로 굳이 알음알이로 알려고 하면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만다. ‘이해’가 아니고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이 뭣고’라고 하는 화두를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본래면목’은 우주 삼라만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 우주 삼라만상이 다 멸한다 해도 본래면목은 멸하지 않는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인 것이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해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경전이다.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어 유교의 <효경(孝經)>이 아버지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점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한편 <부모은중경>은 내용이나 형식이 부자연스럽고 성립과정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중국에서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이와는 달리 고려대장경과 대정신수대장경에는 <불설부모은난보경(佛說父母恩難報經)>(1권)이 안세고(安世高)의 번역으로 수록돼 있다. 그 내용은 <부모은중경>과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이 경은 위경이라기보다는 <불설부모은난보경>을 근거로 해 유교적으로 변용된 불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목(負木)---절에서 땔나무를 해 들이는 사람.


*부사의(不思議)---불가사의(不可思議)와 같은 말. 깊은 이치나 희유한 일이어서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


*부설거사(浮雪居士)---신라 진덕여왕 때의 이름 높은 재가승. 성은 진(陣)이고, 이름은 광세(光世), 신라 서울 경주에서 태어났다.

   경주 불국사에서 승려가 돼 수도 생활에 정진해서 경학(經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날마다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그리고 지리산과 천관산(天冠山) 등지에서 수 년 동안 수도한 후에 도반들과 오대산을 가는 길에 김제의 구(仇)씨 집에 머물게 됐을 때, 그곳에서 묘화라는 구씨의 딸과 혼인을 해서 평생 신앙 깊은 거사로 지냈다.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5년을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은 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부인에게 맡기고 백강 변에 초가를 짓고 참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망해사(望海寺)이다.


*부전(副殿)스님---불공이나 재(齋)를 집전하는 스님. 혹은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승려를 말함.

 

*부정관(不淨觀)---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 인간의 육체 각 부분이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관찰해 탐욕의 번뇌를 없애는 수행법이다.---→오정심관(五停心觀) 참조.


*부진공론(不眞空論)---중국 진(晋)시대의 승려 승조(僧肇, 384~414)가 지은 <조론(肇論)>이라는 저서가 있다. 승조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로서 비교적 짧은 삶을 살았던 승려였으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로 그의 저서 <조론> 속의 ‘부진공론(不眞空論)’이라는 논문을 통행 격의불교(格義佛敎)를 비판하고, 공(空)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함으로써 중국불교가 한 단계 뛰어오르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승조(僧肇) 참조.


*부처님---→붓다(Buddha:佛陀), 석가모니(S?kyamuni) 참조.


*부처님 10대 제자

   지혜제일(智慧第一) - 사리불 또는 사리자라고 한다.

   신통제일(神通第一) - 마하목건련.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했다.

   두타제일(頭陀第一) - 마하가섭. 소욕지족(少欲知足)하며 항상 두타행을 했다.

   천안제일(天眼第一) - 아나율. 밤낮으로 정진하다 눈이 멀었지만 지혜의 눈인 천안통을 얻었다.

   해공제일(解空第一) - 수보리. 지혜가 총명해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설법제일(說法第一) - 부루나. 부루나미다라니자의 약칭으로 부루나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논의제일(論議第一) - 마하가전연. 뛰어난 언변과 논리 정연한 말솜씨로 불법을 널리 펼쳤다.

   지계제일(持戒第一) - 우파리. 십대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노예 출신이고, 이발사였다.

   밀행제일(密行第一) - 라후라. 부처님의 친아들.

   다문제일(多聞第一) - 아난다. 부처님 시자라서 누구보다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


*부촉(咐囑, 付囑)---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이나 사물을 부탁해 맡기다. 스승이 제자에게 불법을 전수하는 것을 말함.


*부파불교(部派佛敎)---부처님이 입멸한 후 약 100여년 지난 기원전 3세기 중반 교단 내에 교리 해석 문제에 이견이 생기고, 기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분열이 시작돼 교단은 이후 4~5백년 사이 점차 20개 여파로 분열이 일어났다. 이때를 부파불교시대라 한다.

   분열은 처음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근본 분열이 일어났다가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상좌부와 대중부에도 각기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말분열(支末分裂)이라 한다. 지말분열은 B.C. 3세기경 아소카왕 시대가 절정기였다고 하는데, 대중부에 먼저 내부분열을 일어나서 아소카왕 이전에 이미 완료됐다.

   이에 비해 상좌부는 분파 후 100여년 간은 화합하고 있었지만, 200년이 지나면서 분열이 시작됐다. 그리하여 상좌부의 지말분열은 B.C. 2세기부터 B.C. 1세기 사이, 즉 아소카왕의 시대로부터 그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상좌부와 대중부 합해서 결국 20개 부파가 생겼다.

   이 시대의 특징은 번쇄하고 전문적인 논장(아비달마/abhidharma)이 일어나 교리 중심이 되면서 점차 대중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1세기 경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대승불교라 한다. 이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의 종전 불교를 부파불교(아비달마불교) 혹은 소승불교라 한다.

     ? 대중부의 부파 - 먼저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가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됐다.

     ? 상좌부의 부파 - 상좌부 내에도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분출됐다.

   이들 대중부, 상좌부(상좌부 9, 대중부 11)를 합친 20개의 부파를 부파불교라 부르며, 소승 20부라고도 한다. 헌데 여러 연대기에 나오는 부파 명칭을 모두 합하면 30개 부파 이상이 된다. 그리고 상좌부에 속한 부파만을 소승불교라 하고, 대중부 쪽의 부파들은 대승불교로 포함시키는 사람도 있다.---→대승불교(大乘佛敎), 소승불교(小乘佛敎) 참조.


*부화(浮華)---①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함. ② 남녀 관계가 도덕적으로 타락해 건전하지 못함.


*북종선(北宗禪)---→남종선 참조.


*분소의(糞掃衣)---세속사람들이 버린 헌 옷을 주워서 빨아 지은 가사(袈裟). 이 버린 옷은 똥을 닦은 헝겊과 같으므로 분소의라 한다. 또 이 헌옷의 조각조각을 기워 모아서 만든 옷이므로 백납(百衲) 또는 납의(衲衣)라고도 한다.


*불(佛, buddha)---범어 Buddha(붓다)를 중국에서 소리 나는 대로 음역(音譯)하다가 보니 불타(佛陀)로 번역했고, 불타를 줄여서 불(佛)이라 하는데, 뜻으로는 각자(覺者, 깨달은 분) 등으로 번역했으나 주로 음역인 불(佛)을 많이 쓰고 있다. 그래서 사실 한문으로 불(佛)은 음역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그러니 '불(佛)' 자는 붓다를 표현하기 위한 조자(造字)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원체 각자(覺者)보다는 불(佛)을 많이 쓰다가 보니 결국 이 ‘불(佛)’이라는 글자가 ‘깨달을 불(佛)’로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은 무엇일까? 인류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도대체 우주의 비밀은 어디까지일까? 불(佛)이란 말은 인류를, 우주를, 나를 움직이는 근본에너지를 말하게 됐다.

   인간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과 태어남의 이전 즉 어떤 모양과 어떤 특성의 물질 이전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표현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바로 깨달음이다.

   인간으로서 생명력이 유지되면서 위의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의 핵으로 돌아가게 된다. 시간과 공간과 그 밖의 어떤 자연현상으로도, 또 인간의 어떤 의지작용으로도 변형이 불가능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태풍으로 말하자면 태풍의 핵과 같다고나 할까. 우주의 근본, 인간의 근본, 신의 근본, 인류의 근본 핵, 이렇기에 불(佛)은 우주와 인류 자연과 신의 원천이며, 스승이며, 아버지가 된 것이다.


*불경(佛經)---불교의 교리를 밝혀 놓은 전적(典籍)을 통틀어 이르는 말. 경(經)은 범어 수트라(Sutra)를 의역한 말로서, 원래 실 또는 끈을 뜻했는데, 뒤에 자[尺]로 사용하는 끈, 혹은 교훈 ? 교리 ? 금언(金言) 등의 뜻으로 통용됐다. 이것이 중국에 와서 불변의 진리를 뜻하는 경(經)으로 의역됐다.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불경은 부처님, 드물게는 부처님의 제자가 설한 교의(敎義)를 적은 서적을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교단(敎團)의 규율을 규정한 율(律)과 철학적 이론을 전개한 논(論), 고승들이 경 ? 율 ? 논의 삼장(三藏)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붙인 저술들까지를 모두 포함한 불교성전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일체경(一切經)이라든가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면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불경결집---결집(結集, Sa?g?ti))이란 경전 편찬회의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종합하고 교정하는 편집 과정을 말한다. 확인된 불설은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는 공인의 절차를 거쳐 불설(佛說)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합법적인 정전화(正典化) 절차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불교사에 있어서 불멸(佛滅) 후 네 차례에 결집이 있었다. 불멸 후 처음으로 라자가하(R?jagaha)에서 500 아라한에 의한 제1차 결집, 불멸 100년 후 베살리(V?sal?)에서 계율상의 문제가 쟁점이 된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불멸 후 200년경(BC 2세기경)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阿育王) 때 아소카왕의 스승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의 주관으로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불멸 후 6백 년경(AD 2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슈카(Kaniska)왕의 후원으로 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지방에서 네 번째 경전 편찬회의가 열린 한편 남방불교에서는 스리랑카에서 <알루비하라(Alu Vihara) 결집>이라고 하는 불전 편찬회의가 열려 그때까지 전승되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경 ? 율 ? 론의 <팔리어 삼장(三藏), Tipi?aka>을 완성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완성된 <팔리어대장경>이 성립된 것이다.


*불공(不空)---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는 현상.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주관에 드러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불공(不空, 705~774)---당나라 시대 인도 출신의 승려이자 경전의 번역가이고. 밀교의 제6대조이다. 원명은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이고 번역해서 불공금강(不空金剛) 혹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라고 하며, 보통 불공이라 약칭한다.

   실론(일설에는 북인도)에서 태어나 720년에 스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따라 남중국해를 거쳐 당나라 뤄양(洛陽)에 왔다. 이후 약 30년간 금강지에게서 밀교를 배우면서 스승의 역경사업을 도왔으며, 신라 출신 혜초(慧超)의 스승이기도 했다.

   금강지가 입적한 뒤 불공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함광(含光) 등과 함께 실론으로 가서 실론의 보현아사리에게서 비법을 배우고, 뒤이어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밀교 경전을 얻어가지고 746년(천보 5년)에 장안에 돌아왔다. 그 후 당 현종(玄宗) ? 숙종(肅宗) ? 대종(代宗)의 3대에 걸쳐 후한 대접을 받았다.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비롯해 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후세에 4대번역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됐다. 불공은 말하기를 “불법을 듣고자 하면 먼저 참 스승을 찾아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모시고 받들어라. 옛날 석가세존이 출가해서 6년이나 스승을 구해 후인들로 하여금 본받게 했으니 너희는 마땅히 성심을 다해 목마르게 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불공(佛供)---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에게 음식 ? 향 ? 꽃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공양(供養)하는 종교의식. 또는 그것을 바치며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의례.


*불과(佛果)---수행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지위. 불도 수행을 원인으로 해서 얻는 최상의 경지. 과(果)는 열매라는 뜻.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법을 말한다. 선한 원인에 따라 일어나는 법을 선과(善果)라고 하고, 부처님에 귀의해 얻는 법을 불과라고 한다.


*불광(佛光,  Buddha Light)---불광은 깨달음의 빛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증득한 존재로부터 나오는 정묘(精妙)한 빛을 말한다. 깨달음에는 여러 종류의 단계가 있는데 자기 나름대로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파동(波動)을 몸으로부터 발산한다고 한다. 대체로 기(氣) 차원의 에너지를 자기 몸 주위에 발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불광은 파동을 넘어서서 불일보조광명(佛日普照光名)의 수준이라 부처님의 빛은 널리 비치고 빛나고 밝다는 뜻이다. 즉, 불광을 태양에 비유한 것이다.

   물질계의 태양빛이 지구상의 만물을 길러주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며,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몰아내고 얼음을 녹이는 것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서 오는 불광은 중생들의 영혼, 곧 아뢰야식에 있는 업장과 죄업을 녹이고 영혼을 꽃 피우고 해탈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는 덕을 지니고 있기에 불광을 불일보조광명이라고도 한다.


*‘불교’란 말 뜻---불교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한 가르침을 기독교라 하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명명법이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설법함으로써 성립된 종교이다.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법(法)’이라고 하는데, 불교를 달리 말하면 ‘불법’ 즉 부처님이 말한 진리이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가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것을 염원하는 까닭이다. 결국 불교는 목적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다. 실천을 ‘도(道)’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불도(佛道)’라고도 한다. 한자의 '불(佛)'은 붓다를 표현하기 위한 조자(造字)이다.


*불교의 4대 재일(齋日)          

           1. 출가재일 음 2월 8일 

           2. 열반재일 음 2월15일

           3. 탄생재일 음 4월 8일

           4. 성도재일 음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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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란분(백종)재일 음 7월 15일


*불교기(佛敎旗)---1950년에 실론(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정식 승인해, 현재 모든 불교국가와 불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모양은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주황색 등 5색을 가로와 세로로 배치했다. 가로 세로 비율은 3:2다. 의미는 부처님의 상호(相好)인 모발과 몸, 피, 치아, 가사의 색과 그 가르침을 상징한다. 


*불교의 특징

      1) 불교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붓다는 깨달음과 구제의 도사(導師)이지 창조자가 아니다.

      2) 대승불교에서는 불(여래)과 보살(菩薩) 등이 나와 숫적으로 증대해 다신교적(多神敎的), 범신론적(汎神論的)인 경향을 지닌다.

      3) 깨달음으로서의 지혜(智慧)가 강조되고, 구제기원(救濟祈願)과 자비(慈悲)가 강조된다.

      4)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5)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며,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무아(無我)>가 강조된다.

      6)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돼, 무아(無我)설과 함께 <공(空)>의 사상을 완성한다.

      7)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이 달성되며, 열반(涅槃, 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8)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9)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불교 종파(현재 한국)---아래는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등록된 종단명이다. 이외에 종단협의회에 등록되지 않은 종단도 부지기수이다.

   1. 대한불교조계종  2. 한국불교태고종  3. 대한불교천태종  4. 대한불교진각종  5. 대한불교관음종  6. 대한불교총화종  8. 대한불교보문종  9. 대한불교원융종  10. 불교총지종  11. 대한불교원효종 12. 대한불교법화종  13. 대한불교조동종  14. 보국불교염불종  15. 대한불교법상종  16. 대한불교진언종  17. 대한불교용화종  18. 한국불교법륜종  19. 대한불교본원종  20. 대한불교일붕선교종 21. 대한불교대승종  22. 대한불교삼론종  23. 대한불교열반종  24. 대한불교미타종  25. 한국불교여래종  26. 대한불교대각종  27. 한국불교미륵종


*불국토(佛國土) 사상---불국토란 부처님이 계시는 국토 또는 부처님이 교화하는 국토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장(慈藏)율사가 신라는 원래부터 불국토라는 불국토사상을 천명했다. 자장율사는 신라의 불교는 결코 새로운 종교가 아니며, 과거세(過去世)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상국(理想國)이라고 역설했다. 그 이후 신라의 승려들은 계속 신라가 불국토임을 주장하는 갖가지 증거를 설정해 신라인이 불국토에 살고 있음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일반인의 생활태도를 정화해 갔다.


*불야다라(弗若多羅)---산스크리트어 pu?yat?ra의 음사. 북인도 계빈국(?賓國) 출신의 승려로, 399년에 후진(後秦=姚秦)에 와서 구마라습과 함께 장안(長安)에서 <십송률(十誦律)>을 번역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함.


*불도징(佛圖澄, 232~348)---인도 승려로서 310년 중국에 왔고, 뒤에  5호 16국 시대 후조(後趙)의 건국자인 석륵(石勒)의 패업을 도와 존숭됐다. 그리하여 348년 117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38년간에 걸쳐 불교 발전에 힘썼다. 불도징의 문도는 수천을 넘었으며, 그 중 도안(道安), 축법태(竺法汰), 법화(法和), 법상(法常) 등 동진(東晋)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승려들을 배출했다.


*불두화(佛頭花)---꽃의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이 만발하므로 불두화라고 부르고 절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쌍떡잎식물 꼭두서니목 인동과의 낙엽활엽 관목으로 수국과 비슷하다.

   불두화(佛頭花)는 처음 필 때에는 연초록색이지만, 만개했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 되고, 꽃이 질 무렵이면 누런빛으로 변하면서 낙화하고 만다. 불두화는 꽃이 피어 있는 동안 색깔이 세 번 바뀌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 불두화는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듯해 불교와 인연이 많은 듯하다.


*불망어(不妄語)---불교의 십선계 중 하나로서 불망어(不妄語)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불매인과(不昧因果)---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사람은 성인이 돼 실연을 당했을 때,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비통감, 지독한 우울증, 뜨거운 분노로 온몸을 태운다. 과거에 겪은 경험은 이미 지나간 버린 것이고, 지금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괴로운 감정이 어떤 상황을 만나 활성화 될 때, 그 감정이 격해진다.

   따라서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불매인과이다. 헌데 불매인과가 되려면, 즉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이 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업은 자신의 존재가 간파당하면, 꼼짝 못한다. 따라서 깨어 있음으로 업이 일어나는 것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업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것이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불명경(佛名經)---부처님과 보살의 명호(名號)를 적어서 그 공덕을 설명한 경전이다. 북위(北魏)에서 보리류지(菩提流支)가 한역했다. 이 경은 12권에 걸쳐 11.093분이나 되는 부처님의 명호를 거명하고 있다. 그 이름을 독송하면서 참회하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天上)에 태어나 모든 번뇌를 여의고 보리(菩提)를 얻을 수 있다는 경.---→일면불 ?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참조.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원명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고, 동진(東晋)시대 법현(法顯)이 번역했다. 부처님의 입멸과 그 전후 사정을 밝히고 있음며, 80세로 입멸할 당시의 부처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경전이다. 이 불전은 담무참(曇無讖, 385~433년)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및 같은 이름의 이역본과 구분하기 위해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반니원경(般泥洹經)> 혹은 <소승열반경>이라 한다.


*불방일(不放逸, appamaada)---방일(放逸)이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유혹에 끄달려다니는 것을 말하며,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 없이 자제함과 집중을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불방일의 실천에 오랫동안 힘쓰고, 방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이렇게 마음 쓰며 노력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과 평온인 열반의 성취에 아주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불방일한 비구라면 8정도를 배워 익히고 8정도를 잘 닦아갈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하셨다.


*불본행경(佛本行經)---<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불소행찬(佛所行讚)>과 함께 부처님의 전기를 담은 경전이다.

  〈불본행경〉은 운문체로 쓴 아름다운 문장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찬탄하고 있다. 7권 31품으로 돼 있는데 언제 편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한 결과 이 경이 1세기를 전후해 편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편찬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송나라 때 보운(寶雲)이 한역한 것으로 돼 있다. 내용은 마명(馬鳴, Asuvaghosa)이 지은 〈불소행찬〉과 비슷하다.

  “생로병사가 큰 바다라면 지혜는 달리는 배다. 무명(無明)이 큰 어둠이라면 지혜는 밝은 등불이다. 번뇌가 가시나무숲이라면 지혜는 날카로운 도끼다. 어리석음과 탐욕이 흐르는 물이라면 지혜는 다리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지혜를 닦아야 한다.” <불본행경>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이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불본행집경>은 여러 가지 불전(佛傳)과 본생담 등을 참작해 매우 풍부한 수식으로 기술 ? 편집한 부처님의 전기이다. 불교의 전기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북인도에서 중국에 들어온 사나굴다(?那?多)가 중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수(隋)나라 시대에 한역했다(A.D. 587∼591). 원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번역은 철저하게 직역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능히 원전의 형태를 유추해 낼 수가 있다고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용수의 저서 <중론(中論)> 속의 팔불(八不)의 하나이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존재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생멸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본래 생멸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고 있다.


*불성(佛性, buddhadhatu)---부처를 이룰 수 있는 근본 성품. 미혹이나 깨달음에 의해 변하는 일 없이 본래부터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근본 성품이다.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고 불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 해 ‘중생 모두가 바른 정법을 안에 갖추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고, 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도 하셨다.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여래장(如來藏), 진여(眞如), 공성(空性), 각성(覺性), 무루심(無漏心), 청정심(淸淨心), 보리심(菩提心),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불성과 영혼은 전혀 다르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설사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깨달을 수 있는 속성’을 뜻하는 불성과는 상관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 뜻이 다르다.


*불소행찬(佛所行讚, 붓다짜리따/Buddhacarita)---1~2세기경 북인도에 살았던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vagho?a)이라는 시인이 부처의 생애를 시극 형식의 운문으로 묘사한 아름다운 대서사시(大敍事詩)이다.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하강한 이래 입멸하기까지의 전 생애를 서술했으며, 불교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제까지는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진(晋)나라 보운(寶雲:376~449)의 번역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불야다라(弗若多羅, Punyat?ra)---공덕화(功德華)라고도 한다. 계빈국(?賓國) 출신 승려. 어려서 중이 돼 계행이 장하기로 유명했다. 경ㆍ율ㆍ논 3장에 통달했으며,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했다. 399년 중국 후진(後秦=姚秦)에 와서 구마라습과 함께 <십송률>의 번역에 종사해 3분의 2쯤 번역하고 병으로 사망. 나머지는 뒤에 구마라습이 담마류자와 함께 번역을 마쳤다.---→십송률(十誦律) 참조.


*불유교경(佛遺敎經)---<유교경(遺敎經)>이라고도 함. 구마라습이 번역. 이 경전은 부처님이 사라쌍수에서 입멸하려 할 때에 마지막으로 모든 제자들을 위해 설한 경이므로 부처님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유교경(遺敎經) 참조.

 

*불이문(不二門)---사찰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불이(不二)는 분별을 떠난,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뜻한다. 즉 불이(不二)란 뜻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불일(佛日)---부처를 태양에 비유한 말. ‘부처의 자비가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널리 미침’을 해에 비유해 이르는 말. 햇빛이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부처님은 중생의 보리심을 싹트게 하며, 해가 어둠을 걷어내는 것처럼 중생의 번뇌를 없애줌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다. 


*불입문자(不立文字)---<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의 ‘불입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에서 나온 말. 글자 그대로는 문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여기서 설 ‘입(立)’ 자는 선다는 말이 아니라 ‘활용하지 않는다’, ‘쓰지 않는다’ 하는 말이다. 따라서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능가경>의 불타문자(不墮文字-문자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문자(離文字-문자를 떠나라) 하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헌데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진제(眞諦)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우리 인간의 언어는 한갓 ‘희론(戱論)’에 불과한 것이다. 용수(龍樹) 또한 즐겨 사용한 희론이란 개념은 무가치한 소음과도 같다고 했다. 믿음이 낮은 표층믿음은 문자주의로 빠지기 쉽다. 문자주의에 빠질 경우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질 뿐만 아니라 배타주의라는 함정에 떨어진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 359~429)---각현(覺賢)이라고도 하는데, 가유위국(迦維衛國) 사람으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후예였다. 나이 열여섯에 모든 경전에 박학했으며 깊이 선율(禪律)에도 능통했다. 중국으로 와서 진(晋)시대에  <달마다라선경(達磨多羅禪經)>, <대방등여래장경(大盤如來藏經)>,  <육십화엄경(60華嚴經)> 등을 한역했고, 법현과 함께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도 한역했다.


*불타선다(佛陀扇多, Buddhasanta)---각정(覺定)이라 번역. 북인도 출신의 승려로, 북위(北魏)에 와서 508년에 <십지경론(十地經論)>의 한역에 참여했고,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와 상주(相州) 금화사(金華寺)에 머물면서 <섭대승론(攝大乘論)>, <여래사자후경(如來師子吼經)>, <금강삼매다라니경(金剛三昧陀羅尼經)> 등을 한역했다.


*불타야중(佛陀耶衆)---불타야중은 ‘모든 부처님에게’라는 뜻이다. ‘불타’는 부처님이란 말이며, ‘야(耶)’는 ‘∼에게’라는 조사이며, ‘중(衆)’은 ‘무리’라는 복수의 뜻이다.


*불탑(佛塔)---탑파(塔婆)라고도 하는데, 탑이란 산스크리트어 Stupa, 팔리어 Thupa의 소리번역이다. 탑파란 당초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서 비롯됐다. 스리랑카에서는 탑을 다가바 또는 다고바라 부르고, 미얀마에서는 탑을 ‘파고다(pagoda)’라 일컬으며,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역시 파고다라고 한다.---→탑파(塔婆) 참조.


*불해(不害)---붓다가 말한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비와 불해이다. 불해는 보통 불살생(不殺生)으로 번역하지만 넓게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환과(不還果)---아나함(阿那含) 참조.


*붓다(Buddha:佛陀)---깨달은 사람을 일컫는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 불리게 됐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gata)라고도 불리고,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 ? 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석가모니(S?kyamuni) 참조.


*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붓다고사는 서기 440년 경 중부 인도 부다가야 지방 브라만 가문 출신의 상좌부 계통의 불교학자로서 불음(佛音), 각음(覺音)이라고도 한다. 스리랑카의 마하나마 왕(Mahanama AD458-AD480) 당시 스리랑카에 와서 불교의 교리를 요약한 논서인 <청정도론(Visuddhi magga 비숫디 막가)>이라는 유명한 주석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실론 대사(大寺)에 거주하면서 그 절에 소장돼 있는 성전을 팔리어로 번역하고, 팔리어 삼장에 대한 주해를 완성했다.---→청정도론(淸淨道論) 참조.


*붓다다사(Ajahn Buddhadasa, 1906~1993)---아찬 붓다다사 스님은 태국의 고승이다. 20세 때 출가했고, 26세 때인 1932년 자신의 고향에 수행도량 <왓 수안 목(Wat Suan Mokkh)=‘해탈의 정원’>을 창설했다. ‘수안 목’ 도량은 불상이나 건물도 없지만 전 세계의 불자들이 수행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곳은 오직 수행만을 위해 숙식과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여건을 갖춰놓고 인종, 국적, 성별에 관계없이 수행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찾아올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이다.

   스님은 이곳을 중심으로 ‘새 불교 운동’, 즉 초기불교의 이념을 충실히 따르면서 수행을 하자는 내용을 주창해 실천함으로써 불교사의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찬 붓다다사 스님은 교학을 연구하는 승려와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의 구별을 두었던 남방 상좌부 불교 전통을 통합했다.


*붓다의 특징---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다음은 현암사 간,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불교개론>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이다.

     ? 붓다는 천지창조의 절대자가 아니다. 평범한 자연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 붓다는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 붓다는 신적(神的) 속성을 지녔다든지 구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 인간에게 ‘절대 타자(絶對他者)’도 아니다. 다소 뛰어난 자연인의 한 사람일 따름이다. 붓다 자신도 상대주의를 지향했다. 연기론(緣起論)이 상대주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 붓다는 결코 윤회(輪廻)를 말하지 않았다.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고, 후세 불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리고 열반(涅槃)도 타생(他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을 의미했고, 해탈은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었다.

     ? 붓다는 리얼리스트(realist)였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붓다의 가르침은 천상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문제, 내세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붓다는 결코 신비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 붓다는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인간에 초점을 둔 신(神) 없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격화를 거부했다. 즉, 그에게 예배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를 보려고 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했다. 붓다는 사람이지 신의 아들이 아니며, 신과 인간의 중재자이거나 속죄자도 아니다. 더구나 신판자도 신도 더욱 아니다. 붓다는 어디까지나 선각자이고, 지도자일 뿐이다.

   ※절대타자(絶對他者)란---인간이나 이 세계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며 독립된 초월적 존재자. 종교에 있어서, 신비적인 실재(實在)가 인간성을 초월해 인간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름을 표현하는 말.

    ※헌데 후세 불교에서는 붓다를 신격화해서 마치 절대자인 것처럼 추켜세우는 종파나 불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만(Brahman, 婆羅門)---카스트의 가장 높은 계층으로 주로 브라만교 성직자 계층을 일컫는 용어이다.---→바라문 참조.


*브라만(Brahman, 범/梵)---브라만은 힌두교(브라만교)에서 우주의 근본적 실재 또는 원리를 가리킨다. 아트만(?tman)이 진정한 자아를 뜻하는 개별적 ? 인격적 원리인 반면에 브라만은 우주적 ? 중성적인 원리이다. 한자로는 범(梵)으로 음역된다.

   브라만은 원래 <리그베다>에서 찬미가 또는 제사(祭詞)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브라만 계급에 의해 제사 만능시대가 되자 거기에 간직된 신비한 힘으로 간주됐다. 이후 창조신의 창조물의 하나가 됐다가 결국 창조신과 동일시됐다. 마침내 브라만은 우주 창조의 이법(理法)이 됐다. 즉, 브라만교 사상의 최고원리. 우주를 창조하고 일체를 지배하는 원동력으로서의 근본이라 해서 세계의 근원적 창조원리로 보았으며, 우주의 일체는 모두 브라만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했다.

 이러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중성(中性)의 브라만(梵)은 많은 사상가들의 사유 대상이 됐다. 그런 후 브라만은 남성적인 인격신 브라흐마(Brahma=범천/梵天)로 인격화됐다. 이 신은 우주의 최고신으로 일체를 창조 ? 지배한다고 했다. 이것이 불교에 들어와서는 불교 수호신의 하나인 범천(梵天)이 됐다. 

   힌두교 역사에서 베다시대 말기인 AD 500~700년 사이에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만과 개인의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이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주창한 신비적 문헌인 <우파니샤드>가 집성됐다. 이후 우파니샤드의 사상이 발전적으로 전개돼 힌두교의 육파철학이 성립됐고,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은 후대 힌두교 철학과 종교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브라만교(婆羅門敎 ; 바라문교 ; Brahmanism)---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베다(Veda)> 성전에 의거해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특정한 개조가 없는 종교를 말한다.

   BC 1,500년 무렵 인도아리아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의 펀자브지방에 진입하고, 더욱 동쪽으로 진출, 도아브지방을 중심으로 브라만문화를 확립한 뒤, 브라만계급을 정점으로 하는 4계급으로 이루어진 4성제도(Caste)를 발달시켰다.

   그들은 인도에 진입할 때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와서 발전시켰는데, 그때부터 BC 500년 무렵에 이르는 동안 <리그베다>를 비롯해 <브라마나> ? <아라냐카>를 포함하는 방대한 근본성전 <베다>를 편찬했다. 그 내용은 복잡하고 다양해 자연신 숭배, 종교의례, 주술은 물론, 높은 철학적 사변까지 담고 있다. 이 종교의 본질은 다신교이며, <리그베다>에서 발단하는 우주의 유일한 근본원리의 탐구는 <우파니샤드>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우주 유일의 근본원리로서 브라만(梵/brahman)과 개인 존재의 본체인 아트만(我/?tman)이 상정되며, 결국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힌두교는 BC 3세기 무렵부터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해서 인도의 토착적인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이룩됐는데, 이 힌두교와 구별하기 위해 서양학자들이 브라만교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이처럼 브라만교는 힌두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어서, 넓은 뜻으로 힌두교라고 하면 브라만교도 포함된다.


*브라흐마(梵, Brahma)---브라흐마(범천/梵天)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창조의 신으로, 비슈누, 시바와 함께 힌두교의 세 주신이었다. 브라만교의 주(主)신이며, 창조의 신이다. 이러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중성(中性)의 브라만(梵)이 후에 남성적인 인격신 브라흐마(Brahma=범천/梵天)로 인격화됐다. 이 신은 우주의 최고신으로 일체를 창조 ? 지배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리 대중적인 신은 아니다. 브라흐마의 신전은 전 인도를 통틀어 두 곳밖에 없다. 인도인들에게 어째서 브라흐마가 인기가 없는지를 물어보면 그들의 말은 이렇다. ‘이미 창조가 끝났으므로 창조신으로서의 역할이 현시대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브라흐마는 4개의 팔과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 각각의 4개의 얼굴에서 4개의 베다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불교의 수호신 범천(梵天)이 됐다. 


*브라흐마나(Br?hmana)---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근본 경전인 4<베다>의 본집에 속하며, 제사의식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보조문헌이다. 우아한 산스크리트 산문으로 씌어졌으며, 여기에 수록된 신화는 후세의 문학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성립연대는 일정하지 않으나, BC 700년을 전후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비구(比丘)---대구비중(大比丘衆)의 준말.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남자 승려. 비구란 말 속에는 일체의 번뇌를 깨뜨려 없애고 일체의 생사를 초월하며, 능히 성취를 이루고 열매를 증득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비구니(比丘尼)---여승

 

*비담(毘曇)---아비담(阿毘曇), 아비달마(阿毘達磨, 阿鼻達磨)의 준말.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의 음사. ‘dharma’는 법, ‘abhi’는 ~에 대해라는 뜻.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 ? 연구 ? 정리 ? 요약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서, 경 ? 율 ? 논의 삼장(三藏) 가운데 논장(論藏)을 일컫는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산스크리트어 Vairocana)---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인 법신불(法身佛). 밀교(密敎)에서의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일한 이름. 세계에는 큰 연화가 있고 그 가운데 일체의 국토와 일체의 사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한다. 이 연화장세계의 교주는 곧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이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경전 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 <화엄경(華嚴經)>의 교주이다. 석가모니불을 응신(應身)으로 삼고 있는 비로자나불은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가변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 大光明殿)이나 비로전(毘盧殿), 화엄전이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중앙 본존으로 모시고 노사나불과 석가불을 좌우 협시불로 배치하는 것이 통례이다.---→대일여래(大日如來) 참조.


*비마라차(Vimal?ks?,卑魔羅叉 )---계빈국 승려. 무구안(無垢眼)이라고 번역. 처음에 구자국에 있으면서 율장(律藏)을 강설하자 사방에서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왔으며, 구마라습도 그에게 법을 배웠다. 구마라습이 중국의 장안에서 역경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율장을 전하려고 중국에 왔다가 구마라습이 입적한 후, 석간사에서 머물면서 율장을 선양하다가 77세로 입적했다. 그는 특히 눈이 푸르러서 당시 사람들은 '청안율사(靑眼律師)'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비밀주(?密呪)---비밀스러운 내용의 주문. 진언이나 다라니 따위이다.


*비바사나(毘婆舍那)---산스크리트어 vipayan의 음역. 비발사나(毘鉢舍那)라고도 하며, 관(觀). 정견(正見). 능견(能見), 광설(廣說) 등으로 의역한다. 선정(禪定)에 들어서 지혜로써 상대되는 경계를 자세히 관찰해 잘못됨이 없게 하는 것. 즉, 자상하고 밝게 비추어봄을 말함. 자신이 사마타를 통해 본 것을 메모했다가 상담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줘서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병원에서의 비바사나이다.


*비바사론(毘婆沙論)---<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시대 비구 카트야야니푸트라(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이다.---→발지론. 대비바사론 참조.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의 하나. 수미산의 북방을 수호하며 사천왕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신이다. 고대 인도신화에서는 암흑계를 다스리는 악령의 수장이나 바다와 강의 신으로도 등장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사무색처(四無色處)의 하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욕계 ? 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칼의 핵심은 칼날이다. 그런데 문제는 칼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갈아도 이쪽 아니면 저쪽이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칼날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칼날이 없으면 벨 수가 없다. 그러니 칼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1초 전은 과거이다. 그리고 1초 후는 미래이다.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현재가 없는가. 그러니 현재는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비상비비상처란 바로 이런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정) ? 식무변처선(정) ? 무소유처선(정) ? 비상비비상처선(정)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은 아직 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색계선정(色界禪定)이라 하고, 공무변처정 ? 식무변처정 ? 무소유처정 ? 비상비비상처정은 물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정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라고 한다.

   비상비비상처정은 이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사무색정/四無色定)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생각이 조금도 없고 아주 맑고 미세한 생각만 조금 있는 경지로서 비상비비상처정이란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팔선정 수행단계 중 제7단계, 무색계 사무색정의 제3단계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서 더욱더 정묘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생각은 병이다. 생각은 종기와 같다. 생각은 박혀 있는 가시와 같다. 거친 생각은 없으며, 섬세하고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한 무색계 4선정은 조용하고 높다.’ 이렇게 무소유처정에 탐착하던 것을 다하게 해 ‘조용하구나, 조용하구나’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며 마음집중을 한다. 무소유처정의 대상과 영상을 거듭거듭 의지해 반복하면 사라짐이라는 명칭, 즉 없다는 명칭에 비상비비상처정이 생긴다.

   <능엄경>에 의하면, 공과 색(色)이 모두 없어지고 식심(識心)까지 멸해 시방(十方)이 적연해 훤칠하게 갈 데가 없으면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이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잠복된 상태이다. 아뢰야식의 종자인 식성(識性)이 동(動)하지 않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데서 다한다는 성품을 발명해 있는 듯하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한 것 같으면서 다한 것이 아닌 상태가 비상비비상처정의 상태이다.--→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참조.

   

*바수반두(Vasubandhu)---세친(世親)---→세친 참조.


*비슈누(Vi??u)---힌두교의 주요 신의 하나.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사원---마가다(Magadha) 왕조 9세기 다르마팔라(Dharmapala)왕 때 비하르 지역에 건축됐던 사찰. 인도 불교 최후의 거점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원이다. 1203년 이슬람 세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비크라마실라 사원이 철저히 파괴되고, 이후 불교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비파사나(毘鉢舍那, vipasyna)---→위빠사나 참조.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 Pindola)---빈두로존자는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 혹은 부동이근(不動利根)이라 한역하는데, 원래 인도 발차국(跋蹉國) 재상의 아들로서 어렸을 적에 출가해 아라한이 됐으며, 후에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했다. 부처님의 명을 받아 남인도에서 부처 열반 후에 중생을 제도해 대복전(大福田)이라 존중됐으며,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이라 일컫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독성(獨聖) 혹은 나반존자(那畔尊者)라 해서 절마다 독성각(獨聖閣)에 봉안하고 있다. 16나한 중 우두머리로서 초능력자였다.---→독성, 나반존자 참조.


*빈비사라(頻毘娑羅, 빈바사라/頻婆娑羅, 산스크리트어 Bimbisara, BC 582~554 재위)---석존께서 살았을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성했던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의 왕으로 석존께 귀의해 부처님을 공경하고 불법을 열심히 믿어 수도 왕사성(王舍城, 라즈기르, Rajgir, Rajagrha)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바쳤다.

   그런데 늙도록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빈비사라왕은 신에게 기원했던 바, 어떤 관상가가 와서 말하기를 “비부루산에 있는 선인이 3년 후 죽으면 태자가 탄생한다.”라고 했다. 빈비사라왕은 3년 후 선인의 화신이 아들이 될 것이라 예언을 들었으나 조급한 마음에 선인을 살해했다. 그리하여 예언대로 왕비 웨이데휘(韋提希)의 몸에서 아사세태자가 태어났다.

   하지만 훗날 태자와 부왕 사이가 나빠졌다. 아사세태자(阿?世太子, Ajatasatru, 아자타샤트루, BC 554~527 재위)는 반역자인 부처님의 4촌 동생 제바달다(提婆達多, 데바닷다)의 악한 꼬임에 빠져 부왕(父王) 빈비사라왕을 가두고 굶어죽게 해 왕위에 올랐다. 빈비사라왕은 선인을 죽인 과보로 못된 아들을 얻어 그 아들에 의해 죽임까지 당한 것이다. 아사세태자는 후에 참회해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아사세왕 참조.


*뿌드갈라(pudgala)---→개아(個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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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행위(四加行位)---사선근위(四善根位)라고도 한다.---→사선근위(四善根位) 참조.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능엄경에 제시한 수행의 단계, 일반 중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임. 즉, 일반 중생이 열심히 수행을 해서 난위(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의 네 가지 단계를 거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사선근위(四善根位) 참조.  

     ※가행(加行)---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 힘을 쓰고 마음을 닦음.---→가행(加行) 참조.

     ※가행위(加行位)---보살이 부처가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다섯 단계인 오위의 하나로 보살 수행의 둘째 단계.---→가행위(加行位) 참조.    


*사견(邪見)---삿된 견해로서 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 정견(正見)의 반대말.---→유견 ? 무견(有見無見) 참조.


*사경(寫經)---붓으로 경전 베껴 쓰는 것.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에는 붓으로 경문을 써서 널리 퍼뜨렸다. 그런데 인쇄본이 나온 뒤에도 부처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수행의 하나로서 지성으로 경문을 베껴 쓰기도 한다. 사경은 부처님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이어가는 뜻도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살펴보는 공부법이기도 하다. 경전을 옮겨 쓸 때에는 깨끗한 바탕에 정갈한 필기도구로 써야 하고, 옮겨 쓰는 글씨의 모양이나 속도도 한결 같아야 하며, 경을 쓰면서 그 글자를 마음속에 같이 써야 한다.


*4고(四苦)---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말한다.


*4교과(四敎科)---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승려들의 기초학습에 있어서 중급과정에서 불교경전을 연구하던 네 과목, 곧 <능엄경(楞嚴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을 이른다.


*사교입선(捨敎入禪)---교리적 공부에 집중하지 말고 체험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 언어문자를 맹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처방전이 아무리 좋아도 약은 먹는 사람이 먹어야 약효가 있듯이, 경전 공부도 이와 같아 경전은 다만 처방일 뿐 그 가르침을 실천을 통해 교화돼야만 공부가 완성된다는 말이다.

   지식의 차원에서 경전의 글귀를 찾을 필요는 없다. 지식이라는 알음알이도 알고 보면 탐욕에 속하는 것이며, 탐욕은 결국 마음의 병이 되고 만다. 믿음이 낮은 표층 믿음인 근본주의는 문자주의로 빠지기 쉽다. 문자주의에 빠질 경우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질 뿐만 아니라 배타주의라는 함정에 떨어진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교학(敎學)을 버리고 선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 교학 불교보다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 가르침을 직접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도록 주장하고 있는 말이다. 


*사구게(四句偈)---불경의 주요 내용을 넉 줄로 읊은 게송. 슐로카(?loka)라는 산스크리트 시(詩) 형식으로, 8음절을 1구(句)로 해 4구, 곧 32음절로 된 게송을 말함.

   예컨대 금강의 게송 하나---「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모든 형상이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깨달음을 얻는 자리[부처]가 되리라 - 는 말이다.


*사념주(四念住)---4념처(四念處)와 같은 말임.


*4념처(四念處)---석가모니가 개발한 위빠사나(비파사나, 毘鉢舍那) 수행법의 한 부류로서, 주로 남방불교 승려들이 사용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 아난존자가 물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무엇을 의지하오리까?” 이에 부처님께서 “사념처에 의지하라.”라고 하셨다.

   초기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수행법이 4념처경이다. 붓다가 4년처관을 강조한 것은 중생들이 4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고 고집하므로 중생들은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붓다는 경전 곳곳에 몸(身)운 부정하다고 관하고, 느낌들(受)은 고(苦)라고 관하고, 마음(心)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사물들 또는 관념들(法)을 무아라고 관하는 4념처관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구성요소를 관함을 수행의 틀로 삼았으므로 4념처관을 신관(身觀) 혹은 사념주(四念住)라고 한다.

   그리하여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몸과 감각과 마음과 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알아차림의 수행법이다. 팔정도의 정념(正念)과 같다고 볼 수 있다.

     ? 신념처(身念處)---자신의 몸과 관련된 현상, 즉 호흡 ? 동작 등을 관찰해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정신을 집중해 몸 안팎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육신은 죽어서 썩을 부정(不淨)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부정관(不淨觀), 고골관(枯骨觀) 참조.

     ? 수념처(受念處)---느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감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깨달아 음행 ? 자녀 ? 재물 등의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苦]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심념처(心念處)---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욕심이 있다면 욕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다면 욕심이 없는 참뜻을 알아 모든 마음의 참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 법념처(法念處)---정신적 대상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앞의 세 가지 외에는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통해 생기는 번뇌의 생멸에 대해 깨닫는 것을 말한다.

   사념처는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같기 때문에 수행자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 어느 하나만이라도 성취하면 곧 해탈을 이룬다고 한다. 이 네 가지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 하고, 이에 대한 것이 <대념처경(大念處經)>과 <범천경(梵天經)>에 설해져 있다.


*사다나(sadhana) 명상법---산스크리트어로 ‘성취’라는 뜻이고, 밀교 명상 수행법의 하나이다. 이 밀교 명상은 현재의 14대 달라이 라마의 간절한 소망으로 서구 불교도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다. 여타의 밀교 수행과 마찬가지로 몸과 말과 마음의 3대 능력을 총체적으로 이용해 이를 통해 부처와 같은 지혜와 자비를 길러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밀교에서 수행자가 신을 불러내어 그것을 자신과 일치시키고 자기 안에 몰입시키는 수행법으로 티베트 탄트라 불교의 기본적인 명상법이다. 수인(手印 mudr?)을 짓는 신체, 진언(眞言, mantra)을 외는 음성, 만다라(曼陀羅, mandala)와 신의 모습을 내관(內觀)하는 정신이 모두 사다나에 포함된다.  


*사다함(斯陀含, Sakadagami)---성문(聲聞)의 수행 단계인 사과(四果) 중 제2단계임. 일래(一來) 또는 일왕래(一往來)라고 번역하며, 산스크리트어를 직역하면 ‘한번 되돌아오는 자’이다.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다함은 죽은 다음 천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되므로 일래 또는 일왕래라 한다.


*4대(四大)---우리 몸(色身)을 구성하고 있는 4가지 성질,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일컫는다.

     ? 지(地) - 뼈, 근육, 내장 등 몸 안의 고체 부분. 그리고 몸에 닿는 여러 느낌들도 이에 해당한다. 

     ? 수(水) - 피, 대. 소변 등 액체 부분 또는 액체를 많이 포함하는 부분. 결합력과 접착성이 수에 해당한다.  

     ? 화(火) - 발열, 소화 작용.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늙어감도 화에 해당한다. 

     ? 풍(風) - 호흡기관과 신진대사 - 기(氣). 하강하는 바람과 상승하는 바람이 있다. 상승하는 바람엔 재채기, 하품, 구토 등이 해당하고, 하강하는 바람엔 대소변, 들숨 날숨이 이에 해당한다.


*4대 성문(聲聞)---부처님 제자 중 뛰언난 네분, 수보리, 마하가섭, 마하가전연, 마하목건련.


*4대 성지(聖地)

    1)룸비니(Lumbini, 藍毘尼)---부처님의 탄생지. 흔히 룸비니동산이라고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네팔의 영토에 있으며, 마야부인당이 건립돼 있다.

    2)붓다가야(buddhagay?)---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곳. 우루벨라(uruvel?) 마을의 네란자라(nera?jar?)강변에 있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현재의 지명은 보드가야이며, 이곳에 거대한 보리수와 ‘붓다가야의 대탑’이 있다.

    3)녹야원(Migad?ya, 미가다야, 鹿野苑)---최초로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 사르나트는 바라나시 교외에 있으며, 바라나시의 현재 지명은 베나레스이다.

    4)쿠시나가라(Ku?inagara, 拘尸那揭羅)---부처님이 열반한 곳. 인도 힌두스탄 평야에 있는 지금의 카시아(Kasia) 지방이다. 현재 이곳에는 열반당이 있다.


*사도(四道)---열반(涅槃)에 이르는 네 길. 곧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한다.  해탈도는 , 넷째 승진도는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1) 가행도(加行道) - 번뇌를 끊으려고 다시 힘을 더하여 수행하는 단계. 용맹정진의 별명이 가행도이다.

     2) 무간도(無間道) - 다시 노력 정진한 공이 현저해 진지(眞智)를 발하고, 한창 번뇌를 끊고,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3) 해탈도(解脫道) - 무간도 뒤에 생기는 일념의 정지(正智)가 한창 진리를 증오(證悟)하는 자리로서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4) 승진도(勝進道) - 해탈도 뒤에 다시 나아가 열반을 구해 향상하는,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사도승(私度僧)---국가에서 신분을 확인해 주는 도첩(度牒)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승려가 된 자, 혹은 엄격한 스승의 지도하에 그 법통을 이어받지 않고 제멋대로 머리를 깎고 절의 풍습을 조금 익힌 잡승을 일컫는다. 


*사라쌍수(沙蘿雙樹)---인도에는 삼대성수(三大聖樹)가 있다. 사친나무(일명 무우수;無憂樹)와 보리수(菩提樹), 사라수(沙蘿樹)의 세 나무가 이에 해당한다. 마야 부인이 사친이라는 나무 그늘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자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셨으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원산지인 인도에서는 사라나무를 살(sal)나무라 하고, 이를 한역한 것이 사라(沙羅)인데, 부처님이 그 사라나무가 쌍으로 서 있는 곳에서 열반에 드셨기에 사라쌍수라 한다.


*사루가주(?樓伽酒)---술이 채 되기 전의 것. 교단 분열로 불경의 제2차 결집이 있을 무렵 술을 금하게 돼 있는 승단 계율에서 예외적으로 병자를 위한 치료의 목적으로 막걸리의 일종인 사루가주 정도는 마셔도 되느냐 하는 논쟁이 있었다. 

 

*사리불(舍利弗, 사리자)---팔리어 S?riputta, 산스크리트어 ??riputra의 음역(音譯)이다. 그는 주로 교화활동에 종사했는데, 경전 중에는 석가를 대신해 설법한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소위 10대 제자 중 수제자로,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됐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석가보다 먼저 죽어 부처님이 애통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법화경>에는 사리불이 내세에 화광여래(華光如來)가 됐다고 한다.---→샤리푸트라(S?riputta, 사리자) 참조.


*사리 신앙(舍利信仰)---사리(Shrine, 舍利)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는 풍습을 지닌 인도에서 유래됐는데, 인도에서는 고대부터 학문이나 덕이 높은 인물이 사망하면 그의 은혜나 덕을 기리기 위해 화장해서 그 뼈를 나눠 가졌다. 불교에서 사리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부터 시작돼 일찍부터 여러 불보살 신앙과 함께 중요한 신앙 대상이었다. 사리는 소리 나는 대로 사리라(舍利羅)라고 하다가 사리(舍利)로 부르게 됐다.


*사마타(奢摩他)---산스크리트어 ?amatha의 음사. 산란한 마음을 멈추고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다. 의역해 지(止), 적정(寂靜), 지적(止寂), 등관(等觀)이라 한다.

   모든 분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적정(寂靜)한 상태가 돼,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치므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이에 유사어가 적정(寂靜)이다. 위빠사나 수행법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정신집중 수행법으로 위빠사나가 관수행법(觀修行法)이라면 사마타는 지수행법(止修行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합쳐 지관(止觀)이라 하며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은 흔히 병칭되고 또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초기 불교에서부터 양자는 구별됐다.

   즉, 지(止)는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움직이지 않고 한 대상에 머물러[止] 있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관(觀)은 이 상태에서 바른 지혜로써 제법을 관조하는 것을 이른다. 이와 같이 지와 관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므로 이 둘을 별개로 분리할 수는 없다. 불교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교리이기도 하며, 불교사상적으로도 대단히 중시된다.

   말하자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사마타에 의해 자아몰입에 들어간 후 지혜를 끌어내 대상을 관하는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준비단계이자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즉, 집중과 관찰은 불도수행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마타는 정(定)에 해당되고, 위빠사나는 혜(慧)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관불이(止觀不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지(止)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이처럼 사마타를 통해 모든 것이 변화와 관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내 생각은 변화와 관계를 거부한 채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봄으로써 근본관계를 볼 수 있다.

   사마타란 이처럼 마음을 조절하며 그동안 은폐해 왔던 갇혀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사마타란 자신의 생각에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사만(四慢)---네 가지 자만(自慢)하는 것을 말함인데, 만(慢)이라 함은 잘 못한 것을 보고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비하만(卑下慢) - 남보다 훨씬 못한 것을 자기는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

     2)사만(邪慢) - 아무 덕이 없는 사람이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

     3)증상만(增上慢) -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우쭐대는 일.

     4)아만(我慢) -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무량심(無量心)이란 중생(衆生)을 어여삐 여기는 부처님의 마음, 혹은 중생을 향한 보살의 네 가지 마음으로, 이에는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네 가지 마음이 있다.

     ? 자무량심(慈無量心) - 중생에게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려는 마음.

     ? 비무량심(悲無量心) - 중생의 괴로움을 한량없이 덜어 주려는 마음.

     ? 희무량심(喜無量心) - 중생에게 한량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마음.

     ? 사무량심(捨無量心) - 나의 입장을 떠나 중생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려는 마음.

   크게 사랑함이 대자(大慈)요, 크게 불쌍히 여김이 대비(大悲)요, 크게 기뻐함이 대희(大喜)요, 크게 버림이 대사(大捨)이니 대자대비(大慈大悲) 대희대사(大喜大捨)의 한량없는 네 가지 마음인 사무량심(四無量心)은 곧 온갖 착한 일의 근본이다.


*사무색정(四無色定)---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과 같은 말.---→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참조.


*사무색처(四無色處, akasanancayatana)---무색계의 네 가지 경지를 일컬으며, 줄인 말이 사무색(四無色)이다. 이 세계에 사공천(四空天)이 있어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이라 한다. 사공천이라 사선정(四禪定) 위의 영적 세계로서 이 우주 시공간(時空間) 안에 존재한다. 바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헌데 초기 근본불교가 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로 발전하면서 아주 허무맹랑한 상상을 발휘해 엉뚱한 허상을 만들어 혼란을 주고 있는데,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이 사무색처(四無色處)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런 불합리하고 허무맹랑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설들을 가려내 폐기해야 불교가 바로 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 공무변처(空無邊處) - 공간의 무한함 -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제1천의 경지. 가이없는 허공을 생각에 떠올리면서 염하는 정신통일. 무색계의 4천(天) 중의 첫째. 형체가 있는 이 몸을 꺼리어 무한한 하늘을 동경, 하늘은 무한하다는 견해를 가질 때 생기는 장소이므로 이렇게 불린다.

     ? 식무변처(識無邊處) - 사고의 무한함 - 마음의 작용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제2천의 경지.

     ? 무소유처(無所有處) - 비존재의 무한함 -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체득한 제3천의 경지. 무소유란 공(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닌 무위법의 경계이며 분별도 없다.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경지.

     ?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 의식(意識)도 아니고 의식이 아닌 것도 아님의 무한함 -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제4천의 경지. 욕계 ? 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제4천의 경지.---→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참조.


*4무소외(四無所畏)---여기서 무소외(無所畏, 산스크리트어 vai??radya)란 무외(無畏)라고도 하는데, 자신감을 가지고 가르침을 설하므로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일. 혹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어떠한 장애도 두려움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설법함에 있어서 확신이 있었기에 외부로부터 어떤 비난이나 트집을 당해도 두려운 바가 없었다. 부처님의 4무소외는 아래와 같다.

    1) 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 -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을 깨달아 알아 정견(正見)에 머물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

    2) 누수진무외(漏水盡無畏) -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번뇌를 끊었음을 자신하고 어떤 이가 있어 이것을 비난할지라도 이에 일체 두려운바가 없다.

    3)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 부처님께서는 수행에 장애가 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보여줘서 어떤 비난에 대해서도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다.

    4)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 부처님께서는 중생계를 떠날 수 있는 도를 닦으면 반드시 모든 고통을 떠난다고 설함에 대해서 어떤 이가 있어 이를 비난할지라도 이에 두려운 바가 없었다.


*4무애지(四無碍智)---부처님은 항상 네 가지 자재무애의 지해변재(知解辯才)를 운용해 중생을 제도 교화했다. 4무애해(四無碍解)라고도 한다.

    1) 법무애(法無?) - 일체의 교법에 통달해 막힘이 없다.

    2) 의무애(義無?) - 일체의 교법의 의미를 알아 막힘이 없다.

    3) 사무애(詞無?) - 여러 지방의 언어에 통달해 막힘이 없다.

    4) 변무애(辯無?) - 이상의 세 가지 지혜로써 중생을 위해 설법함에 막힘이 없다.

    ※지해변재(知解辯才)---지해(知解)란 언어를 매개로 한 인지나 인식의 결과인 지식을 말하고, 변재(辯才)란 말 재주를 말함.


*사문(沙門, 산스크리트어 ?rama?a, 팔리어 samana)---고대 인도에서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브라만계급 이외의 출가 수행자를 사문이라 했다. 즉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정도의 뜻으로 일반적인 자유사상가의 총칭으로 쓰였다. 그러니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이전엔 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불교에서는 출가해 불도수행에 힘쓰는 수행승(비구)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사물(四物)---사찰에서 4물이란 범종(梵鍾), 목어(木魚), 운판(雲版), 그리고 법고(法鼓)를 말한다. 이것들은 소리를 내는 공양구로 소리로써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 범종(梵鍾)은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친다.

    ? 법고(法鼓)는 가죽 달린 짐승, 즉 육지 동물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 목어(木魚)는 비늘 달린 중생, 즉 물고기 종류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 운판(雲版)은 하늘을 나는 짐승들(새 종류)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네 가지 법구의 소리를 듣고 짐승들은 축생의 악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미(沙彌, 산스크리트어 Srmanera)---사미(沙彌)란 행자교육을 마치고 사미10계를 수지한 후 구족계를 받을 준비를 하는 예비승려로서, 정식 스님이라고 할 수 없다. 예전엔 20세 이전의 동자승이나 청소년기의 승려를 일컬었으나 지금 조계종에서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구족계를 받지 못한 모든 승려를 사미승이라 부른다.


*사바라이(四波羅夷)---승려가 지켜야 하는 네 가지 중요한 계율. 살생, 도둑질, 음행(淫行), 삿된 말(깨달음을 얻었다고 거짓말하는 것), 이 계율을 범하면 승려의 자격이 박탈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산스크리트 Saha)---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란 말이다. 사바(沙婆)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뜻이어서 괴로움이 가득 찬 이 세상이 사바세계이다.

[출처] 사바세계 | 두산백과Samsara)---


*사바하(娑婆訶, svaha)---‘스바하’라고도 하며, 원만한 성취라는 뜻으로, 진언의 끝에 붙여 앞말의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희구하면서 내용을 결론짓는 종결의미로 사용되는 정형구이다. 


*사방불(四方佛)---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AD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개념이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망라해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며, 특히 밀교 계통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사방사불(四方四佛)---사방의 정토에 계신 네 부처. 동방 묘희세계(妙喜世界)의 아축불, 서방 안락세계(安樂世界)의 아미타불, 남방 환희세계(歡喜世界)의 보생불, 북방 연화장엄세계(蓮華莊嚴世界)의 미묘성불(微妙聲佛)이다.


*사법계(四法界)---모든 존재의 세계를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한 화엄종의 우주관. 현상의 세계인 사법계(事法界), 진리의 세계인 이법계(理法界),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法界),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法界)이다.

     ? 사법계(事法界)---현실인 미혹의 세계를 일컫는다. 우주 만유의 현상이 서로 대립해 차별이 있는 현상 세계를 말한다.

     ? 이법계(理法界)----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 수행이 최고조에 달해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상태가 되는 경지. 번뇌가 녹아져서 완전히 없어지고, 너와 나의 차이 또는 사물과 나와의 차이가 전혀 없이 일체 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돼버리는 경지이다. 바로 정각성불(正覺成佛)이 되는 것이다.

     ? 이사무애법계(理事無?法界)---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 ? 융합하는 것. 즉, 이와 사,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의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 현실 즉 이상(現實卽理想)의 세계이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이다.

     ? 사사무애법계(事事無?法界)---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현상계는 서로 교류해, 한 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즉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이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이건 고립돼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사부대중(4部大衆)---사부중(4部衆)이라고도 한다. 불교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네 부류의 사람들, 즉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을 가리킴. 

     ? 비구 - 20세 이상으로서 구족계(250계)를 받은 남자스님

     ? 비구니 - 20세 이상으로서 구족계(348계)를 받은 여자스님

     ? 우바새 -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남자신도 = 거사, 청신남

     ? 우바이 -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여자신도 = 보살, 청신녀


*사분(四分)---→유식(唯識) 4분설(四分說) 참조.


*사분율(四分律)---출가한 승려가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계율을 자세히 기록한 불교의 율전(律典). 비구가 지키는 250계와 비구니가 지키는 348계가 기록돼 있다. 전체 내용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이 일컫는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에 담무덕(曇無德)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율문불서(律文佛書)로서, 전진(前秦=姚秦)의 불타야사(佛陀耶舍)와 축불념(竺佛念)이 한역했다. 


*사분정근(四分精勤)---새벽예불, 사시예불, 오후 2시 예불, 저녁예불, 등 하루 4번 올리는 예불을 일컫는 말.


*사불괴정(四不壞淨)---불괴정이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신앙’, 즉, 절대 확실한 신앙을 의미하는데, 불교적인 신앙이 확립돼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불(佛) ? 법(法) ? 승(僧)과 계율(戒律)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청정함을 뜻한다.


*사사무애(事事無碍)---삼라만상 사사물물이 각기 독립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화엄종의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法界)---화엄교학 4법계의 하나. 현상계는 서로 교류해, 한 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말한다.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관의 모습이다.---→사법계(四法界) 참조. 


*사사물물(事事物物)---모든 사물. 모든 현상을 말한다.---→ 천하사사물물 개유실리(天下事事物物 皆有實理) - 천하의 사사물물에는 모두 실리(實理)가 있다.

   

*사상(四相)---깨치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을 말한다.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헌데 그 4상도 사람 혹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구구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를 바로 잡아서, 자아가 있다는 관념[아상], 개아가 있다는 관념[인상-개아], 중생이 있다는 관념[중생상], 영혼이 있다는 관념[수자상]으로 옮기고 있다.

     ? 아상(我相, atma- samjna) - 아상이란 자아(自我)라는 생각, 자의식을 뜻한다. 석존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atman)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브라만 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었다. 석존께서는 이러한 아트만을 아상이라 해서 이를 부정했다.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론이다.---→아상(我相) 참조.

     ? 인상(人相, pudgala-samjna) - 부파불교 당시 독자부(犢子部)에서 마치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해 이것을 뿌드갈라(pudgala, 개아)라 했다. 대승불교에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인상론이 제기됐다.---→개아(個我) 참조.

     ? 중생상(衆生相, sattva-samjna) - 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부처와 중생들을 분별해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 한다거나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중생상(衆生相) 참조.

     ? 수자상(壽者相, jiva-samjna) -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 즉 순수영혼인 지바(jiva)가 있다는 생각인데, 물론 불교에서는 이런 수자상을 부정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셨다.---→수자상(壽者相) 참조.


*사생(四生)---태 ? 난 ? 습 ? 화(胎.卵.濕.化)로 태어나는 것.

     ? 태생(胎生) - 인간, 네 발 짐승과 같이 어미의 태반을 통해 태어나는 것.

     ? 난생(卵生) - 닭, 오리, 새, 거북 등과 같이 알에서 깨어나는 것.

     ? 습생(濕生) - 모기, 파리 등과 습기 있는 곳에서 부화하는 곤충들. 

     ? 화생(化生) - 낳는 자 없이 업력(業力)에 의해 홀연히 태어나는 것. 즉, 천신이나 귀신, 아수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 입장에선 기독교의 신이나 하느님도 화생이다.---→화생(化生) 참조.


*사생자부(四生慈父)---사생은 태(胎) ? 란(卵) ? 습(濕) ? 화(化)의 네 가지 형태로 태어나는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사생의 자부이시니 인간은 물론이고 하찮은 미물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푸는 분이시다. 다른 종교에는 그런 자비사상이 없다.


*사선(四禪)---색계의 네 선정(禪定).---→색계선정(色界禪定) 참조.


*사선근(四善根)---사가행(四加行)라고도 한다. 

      1) 난위(煖位) - 4선근 가운데 첫 번째 자리로, 불을 일으키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문지르면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마찰열에 의해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없애는 불이 생기기 전에 접촉된 부분의 선근을 이에 비유해 난(煖)이라고 한다. 이 난위란 선정에 의해 사물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 범부의 지혜로써 4제(四諦)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로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2) 정위(頂位) - 정(頂)이란 산꼭대기를 의미하는데, 범부의 지혜로는 최상의 단계이므로 정수리라 한다. 범부의 지혜로써 사제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최상의 단계이다.

      3) 인위(忍位) - 인위에서는 선근이 확정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위치를 말한다. 즉, 범부의 지혜로 4제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서 이를 인정해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사제의 이(理)를 인가(忍可)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단계이다.

      4)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 아직도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는데, 유루법이 존재하는 세간 중에서 최상의 선근이 일어난 위치라는 말이다. 즉, 가장 뛰어난 범부의 지혜에 이른 단계로서 그 다음 단계가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이다.


*4섭법(四攝法)---여기서 ‘섭(攝)’이란 서로 어우러져 화합한다는 뜻이다. ‘섭’ 자의 손 수 변(?) 옆에 귀 ‘이(耳)’자가 셋이 있는데, 맨 위의 ‘이(耳)’자가 포용 섭수하는 마음의 귀이고, 아래 두 개 ‘이’자는 사람의 두 귀이다. 이 글자처럼 인간생활 혹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네 가지의 포용 태도를 사섭법 또는 사섭사(四攝事)라고 한다. 즉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기본 마음가짐 4가지를 말한다.

     ? 보시섭(布施攝)---인자한 마음으로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조건 없이 베풀어 마음에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 애어섭(愛語攝)---사랑스러운 말로 항상 그 뜻을 따뜻하게 보호하며,

     ? 이행섭(利行攝)---남에게 이익 된 일을 하고,

     ? 동사섭(同事攝)---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도하며 마음을 나누는 것.


*4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ryasatya)---사성제에서 제(諦, 산스크리트어 satya)란 진리라는 의미이고, 그 진리가 신성(arya)한 것이라 해서 4성제, 즉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이는 고(苦)성제, 집(集)성제, 멸(滅)성제, 도(道)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한다.

     ? 인생의 현실은 괴로움으로 충만해 있다 - 고성제(苦聖蹄)

     ?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집/集) 때문이다 - 집성제(集聖蹄)

     ? 번뇌를 없애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 명성제(滅聖蹄)

     ?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된다 - 도성제(道聖蹄)


*49재(四十九齋)---사람이 죽은 지 49일까지를 중음(中陰) 혹은 중유(中有), 중간계(中間界)라고 부른다.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煉獄, purgatory)과 비슷한 개념이다.

   7일마다 시왕을 바꾸어 가며 심판을 받는데, 49일 안에 일곱 번 심판을 받는 셈이 된다. 이때의 영혼을 흔히들 중음신(中陰神)이라고 하며, 아직 사후 인생이 결정 안 된 불귀의 혼인 셈이다. 이 중음신을 위해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재(齋)를 올리는 천도의식으로 칠칠재(七七齋)라고도 하는데, 49일째 되는 날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를 말하기도 한다.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祖靈崇拜) 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이 절충된 것이라고 여겨진다.---→천도재(薦度齋) 참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중국에 최초로 전래된 불교 경전. 인도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여러 경전을 발췌해 불교의 요지를 42장으로 엮은 것. 후한 황제 효명제(孝明帝, 58~75재위)의 보호 속에서 번역한 중국 최초의 한역 경전이다. 특히 수행을 중요시하는 선가(禪家)에서는 불조삼경(佛祖三經)의 하나로 손꼽고 있는 경전이다.


*4악도(四惡道)---악인이 죽어서 가는 네 가지 고통스러운 길.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에 아수라(阿修羅)가 더해진 것을 말한다.


*4여의족(四如意足)---4신족(神足)이라고도 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수행이 뜻과 같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욕(欲)여의족, 정진(精進)여의족, 심(心)여의족, 사유(思惟)여의족의 넷이다. 각각 깨달음을 향한 욕구, 정진과 노력, 마음을 통일하는 선정, 바른 사유가 뜻대로 작용하는 것인데,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에 포함된다.  

      ? 욕(欲)여의족=욕신족(欲神足) - 구도심(求道心)이 강렬해서 하고자 하는 대로 수행이 잘 되는 것.

      ? 정진(精進)여의족=정진신족(精進神足, 勤神足) - 정진이 저절로 잘 되는 것.

      ? 심(心)여의족=심신족(心神足, 念神足) - 정념(正念)이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

      ? 사유(思惟)여의족=사유신족(思惟神足) - 선정(禪定)이 한결같이 잘 진행되는 것.


 *4연(緣)---4연은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해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 4~5세기경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sa)>에 실려 있는 4연을 현장(玄?)은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으로 구분해서 번역했고, 구마라습은 인연(因緣), 연연(緣緣), 차제연(次第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4연(四緣)은 주로 마음과 관계되는 인연관계를 뜻하고, 마음의 활동을 잘 도와주는 인연관계이며, 마음을 중심한 유식(唯識)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1) 인연(因緣) - 인(因, hetu)이 결과를 만들기 위한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원인이라면, 연(緣, pratyaya)은 인을 도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간접적이고 외적인 원인(즉 조건이나 상황)이다. 그래서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생멸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유위법의 현상은 원인이 되는 인과 그 결과인 연에 의해 발생하며, 항상 변화하고 일순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2) 소연연(所緣緣) - 소연연은 마음이 의지하는 모든 경계(境界)를 가리킨다. 즉 심적 활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모든 인식 대상을 가리킨다. 6식(六識)의 대상이 되는 6경(六境)이 소연연이라 할 수 있다.

     3) 등무간연(等無間緣) -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는데, 서로서로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말한다.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하며, 이런 현상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4) 증상연(增上緣) - 연(緣)을 두 가지로 구분해 어떤 특정현상에 대한 존속에 대한 것을 인연(因緣)이라고 하고, 어떤 특정현상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간접적으로 조력하는 연을 증상연이라고 한다. 즉, 보조적 원인을 모두 통틀어서 ‘증상연’이라 한다.


*사왕천(四王天)---‘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욕계 6천 중 제1천. 사왕천은 수미산 중턱에 있다. 사천왕(四天王)과 그 권속들이 이곳에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고 있다.


*사위성(舍衛城)---원어 스라바스티(sravastitilde)의 음역어이다. 실라벌(室羅筏), 실라벌실저 (室羅筏悉底), 시라바제(尸羅波提)라고도 음역한다. 부처님 당시 인도 중부지방에 있던 코살라(Kosala)국의 수도로서 나라 이름을 수도 이름을 따서 사위국이라고도 했다. 신라의 서울 ‘서라벌’은 스라바스티에서 차음한 것이란 설이 있다.

   당시 국왕은 파사익(婆斯匿王-프라세나지트/Prasenajit)왕으로서 부처님 제자였고,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이곳에 있었다.


*4열반(四涅槃)---열반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번뇌장(煩惱障)과 그리고 지혜(知慧)의 활용을 장애하고 무지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정화하고 단멸한 경지를 의미한다. 열반을 취멸(吹滅)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러한 번뇌를 정화했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열반의 경지를 정하는 사상이 있으며 이는 보통 대승불교에서 유래된 열반관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 가운데 사열반관(四涅槃觀)이 가장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은 마음의 번뇌가 거의 정화되었으나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지만 고통이 없는 열반을 실현한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번뇌가 완전하게 정화되어 열반이 구현된 것을 말한다.

     ③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은 어떠한 거주처에서든지 항상 안정과 즐거움을 실현하는 열반을 뜻한다.

     ④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은 본래 자성이 청정하고 진실한 진리를 간단없이 보존하고 있는 열반성을 의미한다.


*사유(四維)---아래와 같은 두 가지 뜻이 있었다.

     1)사방의 네 방위, 곧 서북ㆍ서남ㆍ동북ㆍ동남의 네 간방을 일컫는 말이다.

     2)나라를 다스리는데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를 이른다.


*사유(四有)---윤회의 네 가지 과정. 중생이 살다가 죽어 다음의 어떤 생에 이르는 과정을 네 가지로 나눈 것.

     1) 사유(死有) - 죽는 순간

     2) 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즉 어떤 생이 결정되는 순간.

     3) 본유(本有) - 생애를 누리는 기간, 어떤 생이 결정된 후부터 죽을 때까지.

     4) 중유(中有) - 죽어서 다음의 어떤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


*사의지(四依地)---초기 불교시대에 출가자가 닦아야할 네 가지 법. 즉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것, 항상 밥을 빌어먹는 것, 나무아래서 정좌(靜坐)하는 것, 부란약(腐爛藥 ; 소의 오줌으로 만든 허술한 약)을 쓰는 것 등이었다.

    ※분소의(糞掃衣)---세속 사람들이 버린 헌 옷을 주워서 빨아 지은 가사(袈裟). 똥 걸레 옷이란 뜻.

 

*사자의 서(死者의 書)---사후의 세계에 관한 안내서로서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와 티베트 밀교의 <사자의 서>가 유명하다. ‘사자의 서(死者의 書)’는 내세관으로 부활 또는 윤회를 믿는 데서 출발한다.

   티베트 <사자의 서(死者의 書)>는 1200년 전인 8세기에 티베트 밀교의 대가였던 위대한 스승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 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라는 의미)가 저술한 100여권의 책 중의 한권이다. 이 책은 그 후 매장돼 있다가 ‘테르퇸’이라 불리는 전문 발굴자인 릭진 카르마 링파에 의해 티베트 북부 지방의 한 동굴에서 발견됐다.

   이 후 이 책은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티베트지역에 전해지다가 1919년 영국인  에반스 웬츠(W,Y. Evans Wentz)에 의해 발견돼,  <티베트 사자의 서(the Tibetian book of the death)>라는 제목으로 발행돼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 장례 후 49제를 지내는 이유도 모두 이에서 유래한다.


*4전도(顚倒)---어떤 판단을 할 때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오해하는 일 4가지를 말한다.

      ? 상전도(常顚倒) - 무상한 세상을 영원한 듯이 생각하는 것.

      ? 낙전도(樂顚倒) -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고 여기는 것.

      ? 정전도(淨顚倒) -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잘못 아는 것.

      ? 아전도(我顚倒) - 무아인 존재를 내 것이라 착각하는 것.


*4정근(四正勤)---사정단(四正斷)또는 사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하는데,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네 가지 법.,  

      ? 율의단(律儀斷) -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 단단(斷斷) - 이미 일어난 불선법(不善法)을 모두 제거하는 것.

      ? 수호단(隨護斷)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善法)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 수단(修斷) - 이미 일어난 선법(善法)들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더욱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

   그런데 사정근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그리하여 사정근 수행을 해야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지혜의 균등함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형을 이룸으로써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집중은 게으름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은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노력은 들뜸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집중이 노력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노력이 집중과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정근(正勤) 참조.


*4종열반(四種涅槃)---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 ? 3열반 ? 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으나 유식계의 4열반관(四涅槃觀)이 가장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자성청정열반(子城淸淨涅槃) - 본래청정열반(本來淸淨涅槃)이라 하기도하고, 성정열반

(性情涅槃)이라 하기도하면서 이는 삼라만상 제법 모두의 본래상(本來相)은 진여적정(眞如寂靜)의 이체(理體)로 곧 진여(眞如)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여성(眞如性)과 불성(佛性)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에 열반의 의미를 본래부터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2)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여의(餘依)는 번뇌가 마음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번뇌는 끊어졌지만 아직 육체는 있기 때문에 ‘나머지 의지할 것[여의(餘依)]’이 있다는 뜻에서 유여의열반이라 한다. 아무리 정신적 의미에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얻어진 열반은 불완전한 것[유여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생존에 얻은 열반을 유여의열반이라 했다. 

   3)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번뇌와 육신이 모두 소멸된 죽음의 상태로서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육체의 제약에서도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해서 무여열반이라 한다. 그러니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생사괴로움을 여의어 얻은 진여경계의 열반이다. 이는 이숙(異熟)의 고과(苦果)인 현재의 몸까지 멸해 없어져 고(苦)가 의지할 바가 없는 열반이다.

   4)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 번뇌를 끊고 청정한 지혜를 얻어, 생사(生死)에도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고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상태로서, 무주처열반은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얻는 열반이다. 소지장마저 끊었으므로 생사와 열반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깊은 지혜를 얻게 되고, 대비(大悲)가 있으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계의 중생을 교화하며, 대지(大智)가 있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히 미계(迷界)를 여의었으므로 무주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4주(四洲)---수미산(Sumeru)을 중심으로 4개의 큰 섬이 있는데, 그 이름은 각각 방위에 따라 동승신주(東勝身州), 남염부주((南閻浮州), 서우화주(西牛貨州), 북구로주(北俱盧州)라 하고, 우리가 사는(사람이 사는) 세계는 남염부주이다.


*4시(四智)---유식철학에서 말하는 사지(四智)는 번뇌에 오염된 팔식(八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

     1) 대원경지(大圓鏡智) - 오염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함.

     2) 평등성지(平等性智) - 오염된 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킴으로 이와 같이 말함.

     3) 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육식(第六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해 자유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므로 이와 같이 말함.

     4) 성소작지(成所作智) - 오염된 전오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함으로 이와 같이 말함.


*사참(事懺)---참회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참(理懺)이고 하나는 사참이다. 사참은 우리가 몸과 말과 생각(身 ? 口 ? 意 삼업)으로 지은 죄업을 불보살의 가피와 예불 등을 통해, 즉 행동을 통해 불보살에게 참회하는 것이다. 이참은 본래의 마음자리에서 볼 때 모든 죄가 본래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꿰뚫어 봄으로써 참회를 이루는 것이다. 결국 사참이란 밖으로 참회하는 것으로 죄를 범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인정받는 것이고, 이참은 죄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관조해 없애는 것이다.

   이참과 사참 두 참법 중, 사참은 이참이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될 때 온전히 이루어지고, 이참 또한 사참이 없으면 공중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곧 사참과 이참은 결코 둘이 아니다.---→이참(理懺)과 사참(事懺) 참조.


*사천왕(四天王)---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천왕. 즉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일컫는다. 사천왕은 인도 신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찍부터 불교에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절 입구의 천왕문에서 불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수미산 꼭대기 살며 사천왕들을 통솔하는 신이 제석천(帝釋天)이다.


*사향사과(四向四果)---사문사과(沙門四果)라고도 하고, 줄여서 사과(四果)라고도 하는데, 소승불교의 수행 단계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수행함으로써 아라한이라는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4향 4과라고 불리는 8종의 위계(位階)가 있다. 즉 예류(豫流) ? 일래(一來) ? 불환(不還) ? 아라한(阿羅漢)의 4위가 있어서, 아래와 같이 과(果)를 향해 수행(修行)해 가는 단계(向)와 그에 의해 도달한 경지(果)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4향4과이다.

     1) 예류향(豫流向) - 예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2) 예류과(豫流果) - 예류에 도달한 상태

     3) 일래향(一來向) - 일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4) 일래과(一來果) - 일래에 도달한 상태

     5) 불환향(不還向) - 불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6) 불환과(不還果) - 불환에 도달한 상태

     7) 아라한향(阿羅漢向) - 아라한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8)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에 도달한 상태

    ? 예류는 수다원(須陀洹)이라고 음역(音譯)하는데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해서 그 흐름에 참여한 것, 즉 불도 수행에 대한 확신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 일래는 사다함(斯陀含)이라고 음역하는데 수행의 도상에 있어서 한 번 더 윤회의 세계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 불환은 아나함(阿那含)이라고 음역하는데 더 이상 윤회의 세계로 물러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한다.

    ? 아라한향(阿羅漢向)은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의 위계(位階)이다. 아라한과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으며, 해야 할 바를 다했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무학위를 간단히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아라한과 이전의 단계를 통칭해 유학위(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사혹(思惑)---사혹이란 세간의 사물을 생각해서 일으키는 탐 ? 진 ? 치 따위의 번뇌로서 습관적으로 사물에 대해 애착을 하는 선천적 번뇌이다. 2혹의 하나로서 견혹(見惑)에 대칭되는 말. 견혹이란 그릇된 도리를 분별해 일으키는 아견(我見) ? 변견(邊見) 따위 번뇌요,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해 생기는 후천적 번뇌이다.

   이 두 혹(惑)을 끊는 데에 순서가 있으니, 먼저 견혹을 끊고 뒤에 사혹을 끊어야 한다. 그리하여 견혹을 끊는 단계를 견도위(見道位), 사혹을 끊는 단계를 수도위(修道位)라 한다.---→견혹(見惑), 오위(五位) 참조.


*사홍서원(四弘誓願)---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려고 바라고 다짐하는 것을 서원이라 한다. 서원이 욕망과 다른 점은 욕망이 이기적인데 비해 서원은 자신을 포함한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한다. 불교에서는 보살이 걸어가야 할 네 가지 큰 서원을 내세우는데, 그것을 4홍서원이라 한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중생이 가이 없어도 모두 건지기를 서원함.

    ?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모두 끊어버리기를 서원함.

    ?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법문이 한없어도 모두 배우기를 서원함.

    ?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불도가 위없이 높아도 반드시 이루기를 서원함.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事西風動林野 一聲寒雁淚長天 (산당정야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 하사서풍동임야 일성한안누장천) 산 집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으니 고요하고 고요함은 본래 그런 것을 무슨 일로 서풍은 나무숲을 흔드는가. 기러기 싸늘히 울며 끝없이 멀고 넓은 하늘 날아가네.

   중국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도천(冶父道川)의 게송이다. ‘고요한 밤 산당에 묵묵히 앉으니’는 참선삼매의 경지다. 그 경지에서 본연의 세계를 적요히 비추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주법계의 실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서풍이 불어 숲을 흔들고 기러기의 끼득끼득 소리가 들린다. 선에 몰입한 무아의 세계가 비실재의 세계라면 숲과 기러기소리는 실재의 세계다. 초탈지경에서 문득 현상계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 현상계의 일이란 하나의 소식이다. ‘그것은 무슨 소식인가’라고 묻는 데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야보도천(冶父道川)이 지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는 시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 송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산림(山林)---출가 승려의 수행과 거주가 이루어지는 장소. 바로 사찰 ? 절을 말한다. 


*산림법회(山林法會)---사찰에서 특정 불경을 강경(講經-강설)하는 특별 강습의 큰 모임을 말한다. 이와 같이 특정 불경을 강경하는 산림(山林)이란 제도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 ‘산림(山林)’의 뜻은 “최절인아산(折人我山)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너다 나다 잘난체하는 아상과 교만의 산을 허물고 공덕의 숲을 잘 가꾸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선 ‘통도사 화엄산림법회’가 유명하다. 화엄산림이라고 하면 대방광의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인행(因行)이 두루 설해진 <대방광불화엄경> 법문을 듣고 마음에 지녀 독송하며 사경하고 해설함으로써 화엄의 진리를 체득해감으로 인해 내가 잘났다는 아상을 버리고 공덕을 키워가는 법회라는 뜻이다.

   근래 통도사의 화엄법회는 경봉(鏡峰)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통도사의 화엄법회는 창건주인 자장(慈藏) 대국통(大國統)으로 올라간다.


*산스크리트(Sanskrit)어---중국 및 한국에서는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는 BC 5세기∼BC 4세기경의 문법학자 파니니(P?ini)가 당시 서북인도 지식계급의 언어를 기초로 한 문법체계를 완성했다. 이로부터 산스크리트어는 종교 ? 철학 ? 문학 용어로서 지식계급 사이에 사용됐다. 흔히 브라만의 글자라 하는데 비해, 불교경전은 처음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각 지방의 속어(팔리어)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다가 BC 2세기경 부파(部派)불교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쓰기 시작했고, 특히 인도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 때에 캐시미르에서 개최됐던 제4결집 시(AD 140년 경), 범어를 불교의 성전어로 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그 후 불교경전은 범어로써 표기돼 범어경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대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씌어졌던 경전들이 일부 단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지 않고, 고대 범어 자체도 사라져버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이 화두는 성철(性澈)스님이 처음 말한 법어가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중국 송나라 때의 청원유신(靑原惟信)선사의 법어는 아래와 같다.

   「견산시산 견수시수(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이 늙은이가 중생일 때는 산을 보면 곧 산이요 물을 보면 곧 물이었고, 진리를 좀 알게 되니 눈이 차츰 열려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네. 이제 불법의 도리를 크게 깨닫고 보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더라.」

   그리고 역시 송의 야보도천(冶父道川)스님의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라는 글이 유명하다. 이는 깨달은 사람의 안목을 뜻한다.


*살타(薩陀)---원어 사트바(sattva)의 음역. 살타(薩陀)는 본질, 실체, 마음, 유정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유정(有情)으로서 중생을 뜻한다. 따라서 보리살타(菩薩薩陀), 즉 보살(菩薩)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중생이라는 뜻이 되겠다.


*삼계(三界)---부처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거주하는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통칭하는 말이며, 세간(世間)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중생이 생사유전 한다는 3단계의 미망의 세계이다.

    1) 욕계(欲界) - 욕계는 맨 아래에 있으며 애욕, 재욕, 식욕, 성욕, 명예욕의 오욕 등 온갖 욕망이 창궐하는 세계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六道)와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 욕계 6천(六天)이 여기에 속한다.---→욕계(欲界) 참조.

    2) 색계(色界) - 욕망은 끊었으나, 미묘한 형체가 남아있는 세계. 색계는 욕계 위에 있으며 물질의 세계로서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청정의 세계이긴 하나 형상(색)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세계이다. 여기엔 여성은 없고, 물들어지는 욕락이 없어서 전혀 화생(化生)하는 곳이지만 아직 물질이 있으므로 색계인 것이다. 이 색계는 욕계의 더러운 색을 여의었다 하더라도 미묘한 청정세계이다.---→색계(色界) 참조.

    3) 무색계(無色界) - 육체를 가지지 않고 정신적 요소만 있는 세계. 무색계는 색 아닌 법체의 세계로서 물질과 공간 개념을 초월한, 형질이 없는 허공 자체이자, 순수한 정신적 영역의 세계, 무념무상의 정(定:三昧)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삶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미혹의 중생 세계이다. ---→무색계(無色界) 참조.


   ※단 화엄종에서는 불계(佛界), 중생계(衆生界), 심계(心界)의 세 가지를 삼계라고 한다.


*삼계교(三階敎)---중국 수(隋)나라 시대 신행(信行, 540∼594년)에 의해 창시된 불교의 일파이다.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의 혼란기에 생겼다. 당시의 혼란상을 여러 나라가 다투는 무질서 말법시대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하는 교설을 내세웠다. 세상을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삼단계로 구분하고 정법과 상법계에 있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쉬우나 세상이 어지럽고 탁한 말법계에 드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어려우므로 독특한 방법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금(당시)은 말법의 악세(惡世)인데, 모든 사람은 불성을 갖춘 존재이므로 서로 공경하고 보경보불(普敬普佛)에 의지할 것을 주장했다.---→삼시관(三時觀) 참조.

    ※보경보불(普敬普佛)---모든 사람은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부처로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 불, 법, 승에 귀의해 모든 악을 끊고 선을 닦아 훌륭한 지도자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 커다란 스승이시고, 삼계에 으뜸가는 멘토라는 뜻이다. 즉, 부처님을 일컫는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 낸 허영의 작품이라는 뜻. 모든 존재, 즉 만법(萬法)은 우리의 의식이 낸 것이므로 실존하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뜻이다.


*삼고(三苦)---중생의 괴로움을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의 셋으로 나누어 삼고라고 한다.

     ① 고고(苦苦, dukkha-dukkhata)---추위와 더위 ? 추위 ? 기갈(飢渴) ? 질병(疾病) 등에서 생기는 육체적인 괴로움.

     ② 행고(行苦, sankhara-dukkhata)---여기서 ‘행(行)’은 천류(遷流), 곧 생멸의 유전과 변화를 말하는데, 이것에 의지해 일어나는 고통을 행고라 한다. 즉, 행고(行苦)는 현상계[有爲法]가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輪廻)를 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그리고 오음성고(五陰盛苦)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행(상카라)의 고통, 즉 온갖 심리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괴로움, 이 모두가 행고이다.  

     ③ 괴고(壞苦, viparinama-dukkhata)---집착을 갖는 사물(事物)이 파괴·변화(變化)해 갈 때 느끼는 정신적(精神的) 괴로움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재산, 권력, 명예 등에도 변화가 와서 언젠가는 무너질 때가 오는 괴로움.


*삼관(三觀)---세 가지 진리-삼제(三諦)를 관찰하는 것. 삼제란 공제(空諦) ? 가제(假諦) ? 중제(中諦)를 말한다.---→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참조.


*삼관법(三觀法 - 원각경 삼관법)---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없게 하자면 근본 무명인 마음을 멸해야 하므로 ,마음을 주시하는 삼관법(三觀法)이 대해탈로 가는 불교의 요체가 된다. 이 삼관의 삼매수행법은 모든 부처님의 참선법이다. 참선은 여러 갈래의 마음들을 고요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법의 근본이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교법은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데 근본이 있다.

    ? 정관(靜觀) -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 일어나는 곳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고요해질 것이다. 고요한 것이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밝아져 버린다. 그것이 정관(靜觀)이다.

    ? 환관(幻觀) - 밖의 경계를 볼 때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환몽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환관(幻觀)이다. 삼라만상이 환상임을 깨닫게 되면 집착을 하지 않게 되고 자성이 밝아진다. 그래야 스스로 나쁜 행동을 그만두게 되며 선을 닦을 수 있게 된다.

    ? 적관(寂觀) - 적관이란 정관과 환관이 일치하게 된 것을 말한다.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없고 밖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이것이 참선 수행의 첫걸음이다.

   안으로 번뇌를 항복받아 안정을 취하고 밖으로 일체 경계에 집착을 여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세속의 번다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는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을 세웠다.---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참조.


*삼귀오계(三歸五戒)---삼귀오계는 불교의 중요한 입문의례로 재가의 신도가 불교에 귀의하는 필수적인 형식이다. 먼저 불 법 승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다음에 오계(五戒)를 받는 법. 계율의 일종으로 이를 받은 이를 남자는 우바새(優婆塞), 여자는 우바이(優婆夷)라 한다. 오계는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에 취하지 말라 등이다.


*삼귀의(三歸依)---삼귀의는 불(佛) ? 법(法) ? 승(僧)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

      <삼귀의례(三歸依禮)>

      1)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 혜와 복덕을 구족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2)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 일체 욕망을 떠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3)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 - 모든 스님들(승가, 사부대중)께 귀의합니다.


*삼도(三道)---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 과정인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를 이르는 말이다. 계(戒)와 정(定)과 혜(慧)를 뜻하는 삼학(三學)에 비해 삼도란 보고 닦아서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단계로서 세상의 법이 연기와 중도임을 관찰하고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해탈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1) 견도(見道) - 사제(四諦)의 도리를 깨닫는 수행 과정을 말한다. 사제와 12연기에 대한 인식이 이에 속한다.

     2) 수도(修道) - 사제와 연기를 체험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는 수도의 여러 방법을 제시했다. 경전에서는 ‘고는 널리 알아야 할 것이고, 집은 끊어버려야 할 것이며, 멸은 실증해야 할 것이고, 도는 닦아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3) 무학도(無學道) - 수도의 결과 해탈 ? 열반에 이른 것을 뜻한다. 무학은 더 이상 배움이 없는 경지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이 실현된 상태이다. 경전에서는 ‘고의 두루 앎을 마치고, 집의 끊어버림을 마치고, 멸의 실증함을 마치고, 도의 닦음을 마친다’라고 설명한다.

   이상을 현실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인생을 관찰하고, 인생을 성숙시키는 길을 거쳐,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는 길에 이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의 법이 연기와 중도임을 관찰하고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실천해 해탈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견도(見道), 무학도(無學道) 참조. 


*삼독심(三毒心)---탐(貪) ? 진(瞋) ? 치(癡)를 말함. 삼독심에 의한 재앙을 삼재(三災)라 한다. 탐(貪)에 의한 재난이 수재(水災)이고, 진(瞋)에 의한 재난이 화재(火災)이며, 치(癡)에 의한 재난이 풍재(風災)이다. 지구 온난화도 결국 삼독심에 의한 재난이다.


*삼론종(三論宗)---용수(龍樹 : 150?~250?)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중국에서 체계화한 종파가 삼론종(三論宗)이다. 인도의 대승불교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의 두 흐름이 있었다.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관불교는 삼론종(三論宗)으로, 유식불교는 법상종(法相宗)이 됐다.

   중관파의 주요한 세 논서인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을 채택해 이해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삼론종이라 칭한다. 이들 세 논서를 한역한 사람이 구마라습(鳩摩羅什)이었으므로 삼론종의 창시자를 구마라습이라 간주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 종파의 이론을 대성한 사람은 길장(吉藏 ; 549~623)이다.


*삼륜청정(三輪淸淨)---참된 보시, 즉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하는데,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靜)이라 한다. 베푸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보시한 물건(施物), 이 세 가지가 깨끗할 때 비로소 참다운 보시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베푸는 자도 공하며[시공(施空)], 받은 자도 공하고[수공(受空)], 베풀어지는 물건도 공하다[시물공(施物空)]라고 해서 삼륜체공(三輪體空) 혹은 삼륜공적(三輪空寂)이라고도 한다.


*삼마지(三摩地)---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의 음역. 삼매(三昧)와 같은 말임. 삼마(三摩)라고도 함.


*삼매(三昧)---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의 음역으로 삼마지(三摩地) ? 삼마제(三摩提)라고도 한다. 불교의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내적, 또는 외적인 어떤 자극에도 동요됨이 없는 바르고 맑은 정신 상태를 말한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정(定), 또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등지(等持)라 하기도 한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 말씀의 시작은 언제나 부처님이 먼저 선정에 들고(입정) 거기서 나온 이후 법문을 시작했다. 이래서 부처님의 삼매의 종류는 해인삼매, 화엄삼매 등 다양하게 전개됐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나오는 삼매의 종류가 무척 많다.


*삼무성(三無性)---유식 삼성인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3종자성(三種自性)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들 3종자성은 모두 인연소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스스로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이들이 모두 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무성(相無性) ? 생무성(生無性) ? 승의무성(勝義無性)의 3무성에 의해 유식 삼성(3종자성)을 부정함으써 이 세상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밝힌 것이다.


     ?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相無性)이고,

     ?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며,

     ?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세 가지 상태>

    1) 상무성(相無性) - 온갖 분별과 망상으로 집착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변계소집성은 허구적인 것으로 자성이 없고, 일체만법의 상(相)은 무성이라는 것이다.

    2) 생무성(生無性) - 생무성이란 생겨난 것에 자성이 없다는 의미로 의타기성의 연기적인 존재는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3) 승의무성(勝義無性) - 승의무성은 원성실성의 무성성(無性性)을 말한 것이다.


*삼문수업(三門修業)---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 이렇다 할 종(宗)이 없는 무종산승(無宗山僧)의 시대에 서산대사는 간경 ? 참선 ? 염불의 삼문수업을 주창했다. 그리하여 한 사찰 안에 선방(禪房)과 강당(講堂), 그리고 염불당(念佛堂)을 마련하고 선과 교 그리고 염불을 모든 스님들이 겸해서 닦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회통불교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삼밀(三密)---밀교에서 신체 ? 언어 ? 정신으로 짓는 신(身) ? 구(口) ? 의(意)의 삼업을 이르는 말이다. 진언(眞言)을 외우는 구밀(口密), 손으로 수인(手印)을 맺는 신밀(身密), 마음으로 불보살의 존상(尊像)을 바라보는 의밀(意密)을 통틀어 이른다.


*삼밀가지(三密加持)---밀교 수행법의 하나, 삼밀유가법(三密瑜加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가지(加持)’란 서로 어울린다는 말로서, 대자대비한 불보살의 가호를 받아 중생이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삼밀가지란 열심히 수행을 하면, 중생의 신(身) ? 구(口) ? 의(意) 삼밀이 대일여래 부처님의 신 ? 구 ? 의 삼밀과 가지(加持)하게(일치하게) 돼 중생과 대일여래가 한 몸을 이루는 경지가 된다는 것이다.


*삼법인(三法印)---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인(涅槃寂靜)를 말한다. 그런데 삼법인에도 부르는 순서가 있다. 삼법인을 순서에 따라 부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언급했다면 스스로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으로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 사법인라고 하기도 한다. 삼법인의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행무상이 항상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용어가 그 사상의 핵심적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법인(法印) 참조.


*삼법인(三法忍)---<무량수경(無量壽經)>에 나오는 말. 여기서 인(忍)은 참을 인이 아니라 인가결정(認可決定)한다는 말이니, 진리를 확인해 결정적으로 이해하는 일을 말한다.

      첫째는 음향인(音響忍) - 설법, 즉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마음이 안온해짐.

      둘째는 유순인(柔順忍) - 불보살의 교화, 즉 진리에 순종해 법대로 행하는 것.

      셋째는 무생법인(無生法忍) -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법인(法忍) 참조.


*삼법인(三法忍)---<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 

      ? 신인(信忍) - 신심에 의해 얻는 지혜,

      ? 순인(順忍) - 진리에 순종하는 지혜,

      ? 법인(法忍) - 진리를 깨닫는 지혜.


*삼사칠증(三師七證)---비구가 정식 승려가 되려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며, 이 때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인이 필요한데, 이들을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라고 한다. 여기서 삼사는 계를 주는 계화상(戒和尙), 청결을 증명하는 갈마사(葛磨師), 의식을 가르쳐 주는 교수사(敎授師)를 말하고, 칠증은 입회인인데, 덕이 높은 승려(僧侶) 일곱 사람이다. 이들에 의해 수계식이 이루어진다.

   소승불교에서는 반드시 이 10명 앞에서 계를 받지만 대승불교와 밀교에서는 꼭 10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부처님 앞에서 서원(誓願)을 세우고 계를 받는 자서수법(自誓受法)도 있다.

 

*삼선도(三善道)---아수라 ? 인간 ? 천신


*삼성각(三聖閣)---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을 합친 것.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 ? 칠성(七星) ? 독성(獨聖)을 함께 모신 전각.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모신다. 산신(山神)은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다. 독성은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한다.


*삼성업(三性業)---선업, 악업, 무기업(無記業)---→무기업(無記業) 참조.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삼세양중인과는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과 <구사론(俱舍論)>, 그리고 남방불교의 니까야 주석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 등에서 12연기설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삼세(三世)란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하고, 양중(兩重)이란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며, 인과(因果)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말한다. 즉 삼세에 걸쳐 두 번의 인과를 가지고 윤회하는 과정을 말한다. 12연기는 삼세에 걸쳐서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인-과-인-과로 두 번 반복됨(兩重)을 가르친다고 해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결론짓고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경)의 소승불교에서의 주장으로 12연기설의 가장 완벽한 해석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현대 불교학자들은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삼승(三乘, 산스크리트어 tri-y?na)---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삼승을 일컫는다. 여기서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한다. 법화경에는 삼승(三乘)이 일승[一乘-불승(佛乘)]을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를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한다. 즉, 삼승은 부처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삼승통교(三乘通敎)---천태 지의 대사가 정리한 오시교(五時敎)의 하나.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三乘)에게 공통되는 가르침, 곧 반야경의 가르침을 말한다.

     ※오시교(五時敎) - 부처님께서 49년간 설하신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섯 단계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삼시관(三時觀)---삼시관이란 정법시대(正法時代), 상법시대(像法時代), 말법시대(末法時代)라는 부처님 말씀에 의한 시대구분이다. 붓다 열반 후 1천년을 정법시대요, 그 후 1천년을 상법시대라 하며, 그 후 1천년을 말법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은 말법시대이다.---→상법시대(像法時代) 참조.


*삼시업(三時業)---업이 결과를 가져오는 과보를 세 가지 시기별로 분류한 것.

     1) 순현업(順現業) -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업

     2) 순생업(順生業) -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다음 생에서 받는 업

     3) 순후업(順後業) -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차차후 생에서 받는 업.

    이와 같이 과보를 받을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 하고, 과보 받을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금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인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삼신(三身)---불교에서 불신(佛身)을 세 가지 종류로 표현한 교리.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여러 가지 불신설 가운데 삼신설을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의 삼신설이 가장 보편적으로 설해지고 있으며, 자성신(自性身) ? 수용신(受用身) ? 변화신(變化身)의 삼신설도 채용하고 있다.


*삼신불(三身佛)---대승불교의 불신관으로 법신불(法身佛) ? 보신불(報身佛) ? 응신불(應身佛)로 구분한다. 여기서 말하는 몸(身)이란 부처님의 참모습에 인격적인 의미를 붙여 일컫는 말이다.

     ? 법신불(法身佛)---삼신 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신 부처님의 몸이다. 우리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 우주 및 중생계 모든 것의 바탕이 되며, 그것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만드는 주체인 진리의 당체이다. 이를 독립시켜 인격화해서 부를 때는 흔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 보신불(報身佛)---진여당체인 법신이 형태를 취해 나타난 몸을 말한 것으로 곧 법신을 인(因)으로 삼아 그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이기에 보신이라 한다. 이를 독립시켜 인격화해서 부를 때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고 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실제로 존중되는 보신불로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등이 있다.

     ? 응신불(應身佛)---화신불(化身佛)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과 같은 육체를 지니고 현실세계에 나타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말한다.


*삼십심(三十心)---대승의 삼현위(三賢位)를 말하는데 삼십심이라고도 한다. 십지(十地) 이전의 보살을 말하며, 그 계위에 세 단계의 십심의 구별이 있다. 즉 십주심(十住心), 십행심(十行心), 십회향심(十廻向心)을 합쳐 삼십심이라 한다---→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참조.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한다. 도품(道品)은 실천하는 방법의 종류를 뜻하고, 삼십칠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 일곱 가지 수행방법을 합친 것이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한다.---→4념처(四念處), 4정근(四正勤), 4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참조.


 *삼아승기겁(三阿僧祗劫)---줄여서 ‘삼승기(三僧祇)’라 한다. 아승기(阿僧祗)는 셀 수 없다는 뜻이고, 삼아승기겁은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까지에 소요되는 무한히 긴 기간을 셋으로 나눈 것.

   보살의 오십위(五十位) 중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의 사십위(四十位)를 제일 아승기(第一阿僧祗), 십지(十地) 중 초지(初地)에서 제칠지(第七地)까지를 제이 아승기(第二阿僧祗), 제팔지(第八地)에서 제십지(第十地)까지를 제삼 아승기(第三阿僧祗)라 한다.---→아승기(阿僧祇) 참조.


*삼악도(三惡道)---중생들은 죽으면 6도를 윤회하게 된다. 그런데 중생이라고 하지만 착한 일을 많이 한 중생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중생도 있다. 그래서 가는 길이 다 다르다.

   6가지 윤회의 세상인 육도는 둘로 나눈다. 즉 위에는 조금 괜찮은 3가지가 있고, 아래는 나쁜 3가지 세계가 있다. 복덕이 많은 사람은 위의 3가지 세계 즉 천당, 사람, 아수라의 3가지 업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죽어서 나쁜 3가지 세계에 태어난다. 이 나쁜 3가지 세계가 바로 삼악도, 즉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이다.


*삼업(三業)---두 종류의 삼업이 있다.

      ①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의 세 가지를 삼업이라 하고, 

      ②선업(善業; 자기의 뜻에 알맞은 결과를 받을 업), 악업(惡業;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결과를 받을 업), 무기업(無記業; 선악에 치우치지 아니하며, 또 선악의 어떤 결과도 받지 않는 업)의 세 가지를 말하기도 한다.  

  

*삼염주(三念住)---부처님께서는 항상 바른 마음에 머물러 흔들림이 없어 동요치 않음을 셋으로 나눈 것. 부처님과 중생의 다른 점인 18불공법(不共法)에 들어있다.

     ? 제1염주 -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해도 부처님은 환희심을 일으키지 않고 정염정지(正念正知)에 안주함을 말함. 혹은 부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잘 순종할지라도 그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거나 희심을 일으키는 일 없이 그 마음이 항상 평온함을 말한다.

     ? 제2염주 - 중생이 부처님을 믿지 않아도 부처님은 괴로워하지 않음. 혹은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잘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이 항상 평등해서 동요하지 않음을 말한다.

     ? 제3염주 - 중생이 부처님을 믿거나 믿지 않아도 부처님은 기쁘거나 괴로워하지 않음. 혹은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순종하거나 순종치 않거나 그러한 일로 인해 마음이 동요치 않고 항상 평등심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란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인데 연기법을 이해하거나 하지 않거나 부처님은 관여하지 않는다. 부처는 오직 가르쳐 줄 뿐이고, 실천하는 것은 중생의 책임이고, 중생 스스로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장(三藏, Tipitaka)---부처님의 설법을 모은 경장(經藏, 팔리어 Sutta Pitaka),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Vinaya Pitaka), 교리에 관해 제자들이 연구한 논문을 모은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 이 경 ? 율 ? 논 세 가지를 합해서 삼장이라 한다.


*삼장(三障)---수행(修行)과 선근(善根)에 미치는 중대한 세 가지 장애, 즉 업장(業障), 번뇌장(煩惱障), 보장(報障)을 말한다. 장(障)은 장애를 말하는 것이니, 번뇌가 가리어 열반을 막으며 무명이 가리어 보리를 막는 것이다

     ? 업장(業障) - 나의 과거로부터의 숙업과 나의 업이 미치는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체의 방해를 뜻한다.

     ? 번뇌장(煩惱障) - 중생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탐(貪) ? 진(瞋) ? 치(癡) 삼독(三毒)의 번뇌가 불도수행을 방해하고 장애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가령 눈앞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신심을 망각하거나 신심의 자세에 대해 주의를 받고 감정적이 돼 자기 스스로의 신심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 등이다.

     ? 보장(報障) - 업보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국가나 왕 혹은 혈육인 부모, 즉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나 존재가 그 어떤 힘을 가지고 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에서 금지를 한다든지 아니면 부모가 반대를 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법으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고 부모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환경이 되면 수행을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삼장교(三藏敎)---① 경(經)·율(律)·논(論)의 가르침, 곧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뜻함. ② 천태종에서는 소승의 가르침을 일컬음.


*삼장법사(三藏法師)---불교 성전인 경, 율, 논 삼장에 모두 정통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 진체(眞諦;499~569), 현장(玄?;602?~664), 불공(不空:705~774) 등을 삼장법사라 했다.


*삼재(三災)---탐(貪) ? 진(瞋) ? 치(癡) 삼독심(三毒心)에 의해 일어나는 재앙을 삼재(三災)라 한다. 탐(貪)에 의한 재난이 수재(水災)이고, 진(瞋)에 의한 재난이 화재(火災)이며, 치(癡)에 의한 재난이 풍재(風災)이다. 지구 온난화도 결국 삼독심에 의한 재난이다.---→삼독심(三毒心) 참조.


*삼제(三諦)---중국 천태종의 개조 지의(智?)가 독자적 입장에서 전개시킨 세 가지 진리를 말한다. 즉 공제(空諦)) ? 가제(假諦) ? 중제(中諦)의 셋을 말한다. 여기서 제(諦)는 진리라는 뜻이다.

     ? 공제(空諦)---만물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일 뿐, 어느 것도 실(實)은 없고,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는 것.

     ? 가제(假諦)---공인 것은 확실히 진리이지만, 우리는 ‘공’이라는 특수한 원리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이라는 것은 가칭(편의상 이름 한 것)이다. 공을 실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

     ? 중제(中諦)--- 공(空)이나 가(假)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진리. 공(空)과 가(假)는 둘이 아니라는 진리.


*삼종법락(三種法樂)---삼종락은 천상에서 받는 천락(天樂), 선정으로 받는 선정락(禪定樂), 그리고 열반락(涅槃樂)인 제일락(第一樂)을 이른다. 고락을 다 떠나버린 무량의 청정무비한 안락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락 또는 선정락 또는 열반락을 다 갖춘 경우 삼종락에 머문다고 한다.

   

*삼종세간(三種世間)---세간은 세계의 의미로서, 삼종세계란 3가지 종류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는 삼종세간과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삼종세간 두 종류가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 중생세간(衆生世間) - 중생세간은 중생 또는 유정(有情) 자체를 가리키고,

   ? 국토세간(國土世間) - 국토세간은 기세간(器世間)이라고도 하는데, 온갖 마음의 집착과 욕망 번뇌를 놓지 못하는 중생이 살고 있는 국토를 가리킨다.

   ? 오음세간(五陰世間) - 오온세간(五蘊世間)이라고도 하는데, 중생과 국토를 형성하는 요소로서의 오온, 즉 색 ? 수 ? 상 ? 행 ? 식(色·受·想·行·識)을 가리킨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 기세간 - <대지도론>의 국토세간과 같다.

   ? 중생세간 - <대지도론>의 중생세간과 같다.

   ?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 마음의 눈을 떠 무루지(無漏智), 즉 일체의 번뇌 망상을 떠난 지혜에 따라 정각(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세계, 즉 삼계윤회를 초월한 출세간(出世間)을 가리킨다.


*삼종정육(三種淨肉)---수행승(修行僧)은 3종류의 부정육(不淨肉)을 먹어서는 안 되지만, 그 이외의 고기는 먹어도 상관없다. 즉 비구들은 만일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죽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고의로 죽였다는 의심이 없는 그런 생선과 고기(3종 정육)는 먹어도 좋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삼처전심(三處傳心)---석존께서 세 곳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것이라 해 삼처전심이라 한다. 

     1)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었을 때 가섭만이 홀로 미소를 지은 것. 이를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한다.

     2)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다자탑 앞에서 부처님께서 자리를 반 나누어 가섭에게 같이 앉게 한 것.

     3) 니련하반 시쌍부(尼蓮河畔示雙趺)---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심에 가섭이 늦게 참석해 슬피 울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민 것. 


*삼학(三學, 산스크리트어 tisso sikkh?)---부처님의 가르침을 집약하면 3학(三學)으로 귀결된다. 즉,

     1) 계학(戒學, adhis?la-sikkh?) - 마음을 맑게 하는 계학은 입과 몸으로 짓는 악한 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품행을 바르게 하기 위한 과정이다

     2) 정학(定學, sam?dhi-sikkh?) -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정학은 내면의 악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번뇌를 잠재우는 과정에 해당한다.

     3) 혜학(慧學, adhipa???-sikkh?) - 마음을 밝게 하는 혜학은 계학과 정학을 바탕으로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계 ? 정 ? 혜 삼학은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계학이 없으면 정학이 이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른 불자의 생활 질서가 없이는 안정된 마음을 유지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학이 없이는 혜학이 이뤄지지 않는다. 안정된 마음이라야 바른 반야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현(三賢)---→삼현위(三賢位) 참조.

 

*삼현삼요(三玄三要)---임제스님의 ‘삼현삼요(三玄三要)’라고 부르는 유명한 공안(公案)이다. 임제스님은 “한마디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다”라고 했는데, 그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과 구중현(句中玄)과 체중현(體中玄)이다. 현중현은 말의 그 자체로서의 진실이다. 구중현은 말의 인식 위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체중현은 말의 실천 속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우가 한마디 말에 다 포함돼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것은 알 수 없다. 깨달아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玄)’은 현묘한, 진리, 진실이란 뜻이다.


*삼현위(三賢位)---현위(賢位)와 성위(聖位)로 나누는데 현위는 현자의 자리이다. 말하자면 진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닦아나가는 자리로서 방편위(方便位)라고도 한다.

   소승의 아비달마 교학에서 현위는 다시 오정심관(五停心觀) ? 별상염주(別相念住) ? 총상염주(總相念住)의 3현(三賢)과 난법(煖法) ? 정법(頂法) ? 인법(忍法) ? 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합해 7현위라 한다.

   또는 보살의 수행위(修行位)인 초·2·3지를 삼현위, 4지를 입성지문(入聖之門), 5지부터 10지까지를 육성위(六聖位)라 말하는 삼현육성설(三賢六聖說)이 있다.

   유식학에서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등 삼십심을 내범부위(外凡夫位) 혹은 삼현위라고 하며, 삼현위는 지전보살(地前菩薩)의 단계이다. 그리고 보살 수행 5위 중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면 지전보살이라 하며, 현자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자나 현자에 대해서도 경론에 따라 달리 표현해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증득함을 기준해서 성자라 표현했다.


*상(相)---불교에서 ‘상(相)’이란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중요한 용어의 하나이다. 그래서 불경을 접하다 보면 상이 없다, 상을 여의라, 상이 아니다, 등의 용어가 자주 나온다. 불교에 있어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그런 ‘상(相)’이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되기 전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에 samjna, laksana, nimitta의 세 가지가 있어서 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이 같은 ‘상(相)’이라는 글자로는 번역돼서 경의 내용에 쓰임에 따라 그 뜻이 다소 다르게 해석된다.

     ? samjna(산냐) - 앎, 관념, 인식, 생각, 견해라는 뜻이다. 헌데 이러한 견해는 수백 가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 들게 해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4가지를 들어서 4상(四相)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끊을 것을 강조한다. 그 4상은 중생이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상, 즉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이른다.     

   <금강경>에 만약 보살에게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 했다. 하물며 보살도 그렇거든 수행이 안 된 중생이야 사상(四相)을 실재한다고 믿으므로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 nimita(니미따) - 형상, 모습의 뜻으로 금강경에 보살은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한다고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거로부터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한 대상을 만났을 때 생겨난 인상(일종의 선입견, 전체적인 첫 인상)을 일컫는다.

     ? laksana(락샤나) - 특별한 모양, 특수한 형태의 뜻으로서 금강경에 여래의 신상(身像)으로 여래를 보았다 할 수 있겠는가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즉,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습, 모양, 특징, 현상 등을 일컫는다.


*상(想, 파리어 sanna)---오온(五蘊)인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하나. 상은 표상(表象)과 지각 작용으로 의식 속에 심상(心像)을 취하고 구성하는 것, 마음속에 어떤 것을 떠올려 개념 ? 관념을 형성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즉 이미 축적돼 있는 정보와 연관 지어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지각하고 이름 짓는 표상작용을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상온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해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이리 저리 생각해서 언어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꽃이 있다면 눈(안근)이 그것(경계/경)을 보고 예쁘다고 느낀다면 수온(受蘊)이지만, 이것을 장미꽃이라면 장미꽃이라 인식하고, 국화꽃이라면 국화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상(想)이다. 


*상가(sangha)---불법을 중심으로 화합된 무리(和合衆)라는 뜻으로 승려 집단을 의미한다. 이 화합된 무리의 구성원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이다. 그런데 이것이 언젠가 비구, 비구니만을 뜻하는 말로 변질됐다.

   본래 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자들의 동업조합 혹은 종족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정체(共和政體)의 정치조직을 상가 또는 가나(gana)라 했다. 불교 교단에서도 초창기에는 이들 두 용어가 같이 사용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가라는 말이 점차 우세하게 됐고, 교단의 율(律)이 확립될 무렵에는 상가가 공식적인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승가((僧伽)는 바로 이 상가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상가바드라(Samghabhadra, 衆賢)---부파불교시대의 인물. 불교 논서인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毗達磨順正理論)>과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 등을 저술했다. 이 방대한 두 저술 이름을 줄여 각기 <순정론(順正論)>, <현종론(顯宗論)>이라 한다. 이 두 가지 논서는 운문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지만 산문으로 된 해설부분에서는 바수반두(세친)의 학설을 엄격히 비판해 정통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선양하려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즉 기본골격은 <구사론(俱舍論)>을 따르되 그 학설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반박하고 있다.

   <순정리론>은 그 분량에 있어 구사론의 두 배 이상이 되며, <현종론>도 구사론보다 많은 분량으로 돼 있는데 전자에서는 특히 그 예리한 비판과 상세한 반론이 두드러지며 후자에서는 비판보다 오히려 정통설의 천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상견(常見, 팔리어 사싸따딧띠/sassata-di??hi)---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뿌리박고 있다. 그 하나가 나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상견(常見)이다. 즉, 인간은 죽지만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항상 머물러 불변해 끊어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으로서 나와 세상은 허무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허무론에 빠진 극단적인 견해이다. 초기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르침이 단견과 상견인데, 연기법은 단견에도 상견에도 떨어지지 않는 중도이다.---→단견(斷見) 참조.


*상견(相見)---통상적으로 ‘상견(相見)’이란 말에서 ‘상(相)’은 ‘서로’라는 뜻으로, 상견이란 만난다는 의미의 ‘뵈다’ 혹은 대면(對面)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불교에서 상견의 뜻은 전혀 다르다. 불교에 있어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며,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습, 모양, 특징, 현상으로서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고정관념(觀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상견(相見), 또는 유견(有見)이라 한다.

   그리고 육조단경에서 혜능선사는 상견(相見)을 삿된 도라 했고, 깨달아야 할 마음(본성: 여래)은 상(相)이 없고 비어서 공하며, 온 우주에 머물음 없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대승불교의 교육이념이자 보살의 도(道)이다. 위로는 깨달음(菩提), 바른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근기가 낮은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 교화한다는 말이다. 선종에서의 견성성불 요익중생(見性成佛 饒益衆生)과 같은 말이다.


*상기티수타(팔리어 Sa?g?ti Sutta, 중집경/衆集經 = 산스크리트어 Sangiti suttanta)---니까야의 장아함에 속하는 경전의 하나. 부처님 당시 사리자(舍利弗)에 의해 결집된 경전의 이름이다.

   부처님 생존시 자이나교의 지도자 마하위라(Mah?v?ra)가 임종한 후 자이나교 교단에 분규가 일어나서 분열이 일어났다. 이를 교훈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립해 혹시 후일에 일어날지도 모를 교단의 분열을 막고, 불설이 온전히 보존돼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자 사리자(舍利弗, 팔리어 샤리푸타/S?riputta)의 주도로 불전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경전은 부처님 재세 시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결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제일차 결집 이전에 이루어진 법전 결집이고, 이 결집이 석존의 감독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경의 마지막엔 부처님의 인가로 마감하고 있다.

   경전은 정법(正法)으로서 230여 가지의 불설을 법수(法數)로 재정비했다. 즉, 여러 가지 불교술어를 1에서부터 10까지의 숫자에 따라 열거한 경전으로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이 경을 한역한 아함이 바로 장아함의 <중집경(衆集經)>이다. 즉 ‘중집(衆集)’은 Sa?g?ti에 대한 한역으로 합송을 위한 대중집회의 의미로 번역한다.


     ※중집경 결집의 계기가 된 것은 자이나교 지도자의 죽음과 분열인데, 그 죽은 자이나교 지도자를 마하위라(Mah?v?ra)가 아니라 니간타 나따뿟따(Niga??ha N?taputta=니건)라는 자료도 있다.

     ※위에서 sutta는 경(經)으로 번역하는데, 팔리어 sutta를 산스크리트어로 수탄타(suttanta)라고 한다. suttanta는 잘 조직되고 정리돼 주제의 견고한 핵심을 제공하는 설법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집경을 Sangiti suttanta(상기티수탄타)라고 한다.


*상당법어(上堂法語)---법상에 올라가서 사자후를 한 법문.


*상락아정(常樂我淨)---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네 가지 성질과 특성.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樂), 대아(大我) ? 진아(眞我)의 경지로서 집착을 떠나 자유자재해 걸림이 없는 아(我),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정(淨)을 이른다.


*상법시대(像法時代)---부처님 자신의 말씀을 제자나 신자들이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기를 정법시대(正法時代)라고 하고, 부처님 입멸 후, 즉 정법시대 다음에 오는 1000년 동안을 상법시대라 한다. 그리고 상법시대에 이어지는 1만년 동안을 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한다.

   상법시대(像法時代)는 민중의 불법에 대한 소질은 정법시대보다 열악하지만 불법을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은 정법시대와 닮아 있다. 정법시대는 교(敎) ? 행(行) ? 증(證)이 모두 갖추어 있지만 상법(像法)시대는 교(敎)와 행(行)만 존재하는 시기이다.---→삼시관(三時觀) 참조.


*상분(相分)---유식학에서 인식 대상.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을 말한다.---→견분(見分)과 상분(相分) 참조.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산스크리트어 사다파리부타, Sadaparibhuta)---석가모니가 과거 인행(忍行)을 닦을 때의 이름이고, 상불경이란 ‘무시하거나 천시하지 않는 이’라는 뜻으로, 교만의 악덕을 철저히 버린 보살이다.


*상사각(相似覺)---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구경각(究竟覺)에 못 미친 비슷한 깨침을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직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체득하지 못한 깨달음은 유사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상속(相續)---불교에서의 ‘상속’의 개념은 사회 일반에서 죽은 이의 재산을 상속하는 그런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불교에서의 상속은 인(因)은 과(果)를 내고, 과는 또 인이 돼 다른 과(果)를 내어, 이렇게 인과가 차례로 계속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연속된 흐름, 개체의 연속을 말하며, 흐름은 현생에만 한정되지 않고 과거의 존재에서 유래해 미래의 존재에서도 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상수멸정(想受滅定)---멸진정(滅盡定)과 같은 말. 상수멸정이란 상(想)과 수(受)의 소멸, 즉 지각(인식)과 느낌의 중지(소멸)을 의미하는데,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선정(禪定)을 말한다. 이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이다. 불교수행에서 나타나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상태이다.---→멸진정(滅盡定) 참조.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산스크리트어 idam-pratyaya-ta)---존재와 존재 사이에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돼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상입상즉(相入相卽)---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도 하며, 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 즉,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이 일체가 된 마음과 현상, 보는 주관도 없고 보이는 객관도 없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으며, 상호개입과 상호연계 돼 있다는 존재양식을 일컫는 화엄사상이다. 이에 바탕 한 일(一)과 다(多)의 상입상즉(相入相卽)의 법계관(法界觀)이 마치 화엄의 인드라망의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空)’으로 돌려 상대방과 일치시키고, 나로 하여금 상대방이 생겨나는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나를 상대방과 일치시키는 것이 상즉(相卽)이요, 나 자신으로 하여금 상대가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 속에 들어가듯 하는 것을 상입(相入)이라 한다. 즉,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 없이 융합하는 묘용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해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따라서 ‘상입상즉’은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 이 사회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상종(相宗)---현상의 변화 ? 차별 ? 대립 등에 대해 설한 가르침 ? 학파 ? 종파를 일컫는 말임. 불교에는 상종(相宗) ? 공종(空宗) ? 성종(性宗)이 있다. 상종은 ‘있다’라고 하는 설이다. 그래서 상종에선 극락이 있다. 그러나 공종은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 극락은 없다. 극락을 말하는 것은 보채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성종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를 잘 구분해서 듣고 이해해야 한다. 

   상종(相宗)과 공종(空宗)은 초학자와 근기가 얕은 사람을 상대해 그들이 말에 따라서 집착함을 걱정해서 단지 명자(名字)를 표방해 그 잘못됨을 차단하는 것이다. 즉 다만 방편으로 있지도 않지만 이름으로만 상종이니 공중이니 해서 광범위한 이치를 사용해 그 참뜻을 끌어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종(性宗)은 오래 공부하고 근기가 높은 사람을 상대해 그들이 말꼬리를 잊고서 근본바탕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한 마디로 그 자리를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상좌(上佐)---큰 스님의 제자, 시봉하는 제자. 사승(師僧)의 대를 이을 사람 가운데 가장 높은 승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습 기간 중의 예비 승려.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불멸 100여년이 지나고 계율 문제로 근본분열이 일어났을 당시 전통을 고수하려던 장로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 대중부와 더불어 소승불교의 2대 부문이었다. 훗날 이 상좌부가 다시 10여 개의 부파로 갈라졌는데, 이 상좌부 부파만을 소승불교라 하는 사람도 있다.


*상주불변(常住不變)---상주불변해 생멸(生滅)이 없다는 말. 생멸이 없다는 말은 영생한다는 말이다. 열반은 무상하지가 않고,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이 항시 존재한다. 따라서 상주불변은 열반을 뜻한다. 즉 상덕(常德)을 말하며,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상(常)을 말한다.


*상즉상입(相卽相入)---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서로 끝없이 연관돼 있는 연기관계를 통해서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인 상태에서 원융무애함을 이루고 있다는 말.---상입상즉(相入相卽) 참조.


*상카라(sankhara, 行)---경전에서 행(行)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행(行)’ 참조.

   

*상히타(Samhita)---인도 브라만교의 제사의식 때 부르는 경전. 인도어로 상히타는 경전의 집성(集成)을 뜻하는 말인데, 본집(本集)으로 한역한다. 인도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를 구성하는 4부문 중에서 제사의식 때 부르는 찬가(讚歌) ? 가영(歌詠) ? 제문(祭文) ? 주문(呪文)을 집대성한 문헌이다.


*색(色, 산스크리트어의 r?pa)---물질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대상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색(色)은 자체로서 물질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제일 앞에 있는 까닭에 대표성이 부여된 것 같다. 좁은 의미의 색은 안근(眼根)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색(色)과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만을 말한다.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색’은 공(空)에 반대되는 것, 다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현상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색은 넓은 의미에서는 물질적 존재를 총칭하는데, 변화를 하면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을 특질로 한다.

   그리고 오온(五蘊)에서 색은 물질적인 형태로서 육체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로 이루어지고, 감각기관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등 다섯 감각기관[오근(5根)]으로 이루어진다.

  초기의 불교에서는 색에 어느 정도의 실재성을 인정했지만, 대승에서는 공(空)이라 불리고, 혹은 식(識)의 전변(轉變)이라 불리며, 그 자존성(自存性)이 부정됐다.


*색계(色界)---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의 하나. 욕계의 위에 있는 세계로서 천인(天人)이 거주하는 곳을 말한다. 음욕(淫欲) 식욕(食欲) 따위의 탐욕에서는 벗어났으나 아직 형상에 얽매여 있는 세계.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色)은 있어도 감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淸淨)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거주하는 중생들은 음욕을 떠나 더럽고 거친 색법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청정하고 미세한 색법에 묶여 있기 때문에 욕계 및 무색계와 구별해 색계라 한다. 이 색계에는 선정의 깊이에 따라 열여덟 가지의 하늘나라가 전개된다. 색계 18천은 아래와 같다.

   초선천(初禪天)의 삼천(三天)인 범중천(梵衆天) ? 범보천(梵輔天) ? 대범천(大梵天),

   이선천(二禪天)의 삼천(三天)인 소광천(少光天) ? 무량광천(無量光天) ? 광음천(光音天),

   삼선천(三禪天)의 삼천(三天)인 소정천(少淨天) ? 무량정천(無量淨天) ? 편정천(?淨天),

   사선천(四禪天)의 구천(九天)인 복생천(福生天) ? 복애천(福愛天) ? 광과천(廣果天) ? 무상천(無想天) ? 무번천(無煩天) ? 무열천(無熱天) ? 선견천(善見天) ? 선현천(善現天) ? 색구경천(色究竟天).---→삼계(三界) 참조.


*색계선정(色界禪定)---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은 아직 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색계선정(色界禪定)이라 하고,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은 물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정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라고 한다.

   색계4선정은 8정도(八正道) 중 정정(正定)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의의를 지니는데, 곧 석가모니 생존 시 사문(沙門)이라 불린 자유사상가들이 실천하고 있던 선정이 그 원형이다. 아래에 4선정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1)초선(初禪)-악의소멸

   초선은 모든 감각적인 욕망을 떨어버리고, 모든 좋지 않은 법들을 떨쳐버리고, (마음집중의 대상을)향하는 생각과 머무는 생각이 있고, (감각적인 욕망 등에서)멀리 떠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다. 즉, 욕계의 온갖 욕구와 모든 탐욕을 버리고 떠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선정이다.

   헌데 행이나 형태나 모양에서 미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생각은 사라졌지만 너무 성급하거나 지나치게 꼼꼼한 분별과 사려, 그리고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 작용(覺)과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 작용(觀)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2)제2선(二禪)-선정의 기쁨

   2선에서는 향하는 생각과 머무는 생각이 가라앉고 마음의 정결함과 전일성이 있는, 머무는 생각이 없고 향하는 생각도 없는, 마음집중[sam?dhi]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이 있다.

   헌데 너무 성급하거나 지나치게 꼼꼼한 사고들을 극복해 -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 작용과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 작용이 소멸되고, 안으로부터 깨끗해진 마음이 되고, 선정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 즉, 제2선은 분별과 사려가 가라앉고 마음이 통일되고 청정해 기쁨과 안락을 느끼는 선정이다.


    3)제3선-무소유

   3선은 희열을 버리고, 평온에 머물며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면서 성자들이 평온함과 마음챙김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

   탐욕과 기쁨이 사라진 곳에 머무르면, 바른 생각과 지혜로 몸이 즐거워 성인이 말씀하신 무소유의 경지에 스스로 머물게 된다. 즉, 제3선은 기쁨과 안락도 소멸돼 마음이 평정하게 되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가 작용해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선정이다.


    4)제4선(四禪)-무심 

   색계 선정의 마지막 단계인 제4선은 행복을 떠나고 괴로움도 떠나고,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애버린, 불고불락(不苦不樂)인, 그리고 평온에 의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단계이다.

   괴로움도 사라지고, 즐거움도 쉬어져 본질적인 근심이나 기쁨이 사라지면, 불고불락(不苦不樂)의 무소유가 돼 깨끗한 참마음이 된다. 즉, 제4선은 몸의 안락도 없게 되고 고락을 초월해 마음의 평정에 의해 염(念)이 청정하게 된 상태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마음의 안정과 지(知)의 활동이 동등하게 돼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색계선정에 대하서 원하는 시간만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해졌을 때, 수행자는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에 들 수 있다.


*색구경천(色究竟天)---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의 열여덟째인, 맨 위에 있는 하늘. 사선 구천(四禪九天)의 아홉째인 맨 위에 있는 하늘.


*생(生, Jati)---12연기에 있어서 유(有)에 연해 생이 발생하는데, 생은 문자 그대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유(有), 즉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한다. 불교의 입장은 생(生)조차도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노(老) ? 병(病) ? 사(死)의 고통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生覺)---현재의 생각→사(思)-정사(正思)

              미래의 생각→상(想)-예상(豫想)

              시공을 초월한 생각→신념(信念)


*생멸문(生滅門)---진여문(眞如門)의 반대말. 중생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문. 중생 세계로 나아가는 문. 원효대사는 마음이 움직여 타락돼가는 과정을 생멸문이라고 표현했다. 진여문은 불변하며 모든 상대적 모습을 떠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 것이고, 생멸문은 본래의 고요함을 잃고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생사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는 말. 그러므로 생사의 끊임없는 변화 곧 무상을 깨달아 사는 것이야말로 지혜며 모든 불만족을 벗어나는 길이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 나오는 말이다. 


*샤리푸트라(산스크리트어 ??riputra, 팔리어 s?riputta, 사리자)---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사리자(舍利子) 혹은 사리불(舍利弗), 추자(?子). 산스크리트어 이름 샤리푸트라(S?riputra)의 ‘샤리(S?ri)’는 예쁜 눈을 가진 새(鳥)의 이름인데, 사리자의 어머니 이름이다. ‘푸트라(putra)’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사리자는 샤리의 아들이란 뜻이 된다.---→사리불(舍利불弗) 참조.


*샤카무니(釋迦牟尼, Sakyamuni Buddha, BC 556?~480?)---석가모니(S?kyamuni) 참조.


*샴발라(Shambhala)---티베트의 오지에 있었다고 하는 불교도가 상상하는 가공의 유토피아. ‘숨겨진 왕국’으로 알려진 샴발라는 티베트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완벽에 이른 사람과 완벽의 상태로 가고 있는 존재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이끌어 가는 가장 앞서있는 존재들이라고 한다.


*서건동진 급아해동(西乾東震 及我海東)---서건(西乾)은 인도, 동진(東震)은 중국,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뜻함. 사시 예불(巳時禮佛)의 예불문에 ‘지심정례공양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至心頂禮供養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란 말이 나온다. 풀이하면,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뒤를 이어 진리의 등불을 전해오신 조사와 종사’ 그런 내용이다.


*서역불교(西域佛敎)---서역이란 중앙아시아 일대를 말한다.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과 이란 일부를 포함하는 지대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서역으로 먼저 전파됐다. 따라서 인도불교가 곧 바로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역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즉, 수 ? 당 이전의 초기 중국 불교는 그 대부분이 서역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서방정토(西方淨土)---불교에서 멀리 서쪽에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이상향(理想鄕)이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를 말하며, 극락정토라고도 한다. <아미타경>에 “여기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를 지나서 하나의 세계가 있으니, 이름을 극락이라고 한다”고 한 데에서 비롯된 말로서, 곧 극락세계를 뜻한다. 이곳을 또 동거토(同居土)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동거한다는 뜻이다.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 1520/중종 15)~1604/선조 37)---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이 휴정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출가 한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돼 석방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돼 승군을 지휘했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고,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간경 참선 염불 삼문수업(看經參禪念佛三門修業)을 주창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달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과 편양 언기(鞭羊彦機) 등이 유명하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을 비롯해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결(禪敎訣)〉등 많은 저서가 있다.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조선 영조 때의 승려 채영(采永)이 1762∼1764년(영조 38∼40)에 편찬 간행한 책. 내용은 인도와 중국 및 한국의 3국에 걸친 불조(佛祖)의 법통(法統)에 대한 원류를 계통적으로 정리했다. 저자는 오랫동안 문제가 돼 오던 한국불교의 법맥에 대한 이설을 정리해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로 법통의 계보를 정리했다.


*서원(誓願)---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려고 바라고 다짐하는 것을 서원이라 한다. 그러니 서원은 일종의 결심이다. 나는 어떻게 하겠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다. 서원이 욕망과 다른 점은 욕망이 이기적인데 비해 서원은 자신을 포함한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한다. 그래서 불보살들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운다. 즉,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일으키는 원이 곧 서원이다. 따라서 중생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원하는 자리(自利)의 원과 대비된다. 불교에서는 보살이 걸어가야 할 네 가지 큰 서원을 내세우는데, 그것을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 한다.---→사홍서원(四弘誓願) 참조.


*서장(書狀)---중국 남송(南宋) 시대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스님이 그의 문하 거사와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한 선(禪)의 요지를 설명한 편지 글을 모은 책. 간화선의 교과서로 불리며, <대혜서(大慧書)>라고도 불린다.


*석가모니(S?kyamuni, 釋迦牟尼)---이름은 Siddhartha(悉達多), 성은 Goutama(喬答摩, 瞿量). 아버지 숫도다나왕(淨飯王),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배우자 야쇼다라(耶輪院羅), 아들 라후라(羅?羅), 이모 마하프라 자파디(Mahaprajapati, 摩?波?波提/大愛道).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그래서 석존(釋尊)이라 번역한다. 불교의 창시자. 오늘날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 가까이에 카비라밧토(迦毘羅城/가비라성)라고 하는 소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석가족 출신으로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출산을 위해 친가에 가는 도중, 룸비니(藍毘尼) 동산에서 쉴 때 출생했는데, 생후 7일째에 모친이 죽고, 이모 마하프라 자파디(摩?波?波提)에 의해 양육됐다. 29세 때 출가해 6년간의 고행을 했으나, 그 헛됨을 알고, 같이 수행하던 5인의 수행자와도 헤어져,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35세에 성도(成道)했다. 이후 45년간 인도 각지를 순력하면서 설법하고, 쿠나시가라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80세에 열반에 드셨다.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41)---중국 원나라시대의 승려. 1272년 강소성 상숙(常琡)에서 태어났다. 고봉 원묘(高峰原妙)의 문하에서 공부한 다음 급암 종신(及菴宗信)의 법을 이었다. 이후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352년 81세에 입적했다. 그의 문하에 우리나라 고려 말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등이 있다.


*선(禪)---선(禪)은 산스크리트어 jhana, 팔리어 dhyana의 음을 딴 선나(禪那) 혹은 선사(禪思)의 줄인 말이다. ‘깊이 생각한다’, ‘고요히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관찰해 체득한다는 것이 선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선정(禪定)이라고도 하고, 지관(止觀)과도 같은 의미이다.

   흔히 참선(參禪)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명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불교는 명상이라는 용어를 사용치 않고 선이라 한다. 보통 앉아서 하는 좌선이 일반적이고,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들어감을 중시한다.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이고,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이며,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앉아서 거기에 몰입함이다. 이와 같이 화두 의정(話頭疑情)에 몰입하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고, 자세와 호흡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점에서 건강 위주의 호흡수련, 요가수련과 구별된다.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달마조사(達摩祖師)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염불기도, 간경, 보살행 등의 다른 수행법보다 힘들지만 더 빠르고 깊이 들어가며 지혜와 직관력이 돈발(頓發 : 문득 떠오름)된다고 해서 수행법의 으뜸으로 친다.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과 교를 나누어 전한 이들은 가섭(迦葉)존자와 아난(阿難, Ananda)존자라고 한다. 말을 지움으로써 말이 없는데 이르는 것이 선이고, 말을 일으킴으로써 말이 없는데 이르는 것이 교이다. 그래서 마음은 선을 이루고 말씀은 교법을 이룬다. 법은 한 맛이지만, 그 맛을 보는 견해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크다.


*선가귀감(禪家龜鑑)---조선  명종 19년(1564)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선종의 요긴한 지침을 모아서 엮은 책. 당시의 불교계가 선종과 교종이 서로 혼합돼 있어, 불교인들이 수행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선문(禪門)은 견성법(見性法)을 전하고, 교문(敎門)은 일심법(一心法)을 전하는 것임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올바른 길을 밝히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1579년(선조 12) 그의 제자 유정(惟政)이 발문을 쓰고 이를 간행했다.


*선도(善導, 613-681)---당나라시대의 승려. <관무량수경사첩소(觀無量壽經四帖疏)>를 지어 정토의 긴요한 문은 정선문(定善門)과 산선문(散善門)이 있는데, 정선문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염불하는 것이요, 산선문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산란한 마음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닦으며 염불하는 것이라 했다.


*선무외(善無畏: 637~735)---산스크리트어 수바카라 심하(Subhakara simha, 淨獅子/깨끗한 사자). 동인도 오릿사국의 왕족출신으로 나란다사에서 밀교를 배우고 80세 때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716년 당나라 장안에 도착해 밀교를 전하고, <대일경(大日經)> 등을 역출한 밀교계 승려였다.


*선문답(禪問答)---간화선(看話禪)이란 낱말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화(話)를 간(看-살피다)하는 선(禪)’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화(話)란 진리에 관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나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상적인 세간적인 의미의 대화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진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런 대화를 우리는 선문답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문답의 전통은 불교의 초기경전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지, 이를테면 희랍의 소피스트들, 인도의 베다 혹은 우파니샤드 전통, 중국의 제백가(諸百家)들의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들이다.


*선문정로(禪門正路)---성철(性澈)스님이 1970년대 후반부터 해인총림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설법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각종 경론과 선서 60여 권을 참조했으며, 견성이 바로 성불임을 강조한 참선의 이론적인 지침서이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의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을 비판하고 일관되게 돈오돈수(頓悟頓修說)를 주장한 성철스님의 역작.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된 내용으로 해 수행자들에게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내용이 어려워 1993년 <선문정로평석>이라는 해설서가 출간됐다.            


*선문촬요(禪門撮要)---조선 말기의 선승 경허(鏡虛)선사가 편찬한 우리나라 불교 선학(禪學)의 지침서. 상권은 1907년에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발간해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옮겨 보관했고, 하권은 1908년 범어사에서 간행했다.


*선서(善逝)---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훌륭하게 완성한 자를 일컫는 말.


*선요(禪要)---중국 원나라시대의 고봉(高峯, 1238~1295)선사가 선법(禪法)의 요의(要議)에 대해 20여 년간 설법했던 것을 적은 책.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거사 홍교조(洪喬祖)가 엮어서 펴냈다.


*선재동자(善財童子)---<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구도자의 이름. 53선지식을 차례로 만난 뒤, 맨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서 대행원(大行願) 10가지[십대원(十大願)]을 듣는다.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해 입법계(入法界)의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선재동자의 구법행로는 대승보살의 구도행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정(禪定)---→선(禪)과 같은 말.---→선(禪) 참조.


*선정인(禪定印)---부처의 수많은 수인 중의 한 가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 겹쳐 놓되 두 엄지손가락을 마주 대는 형식을 선정인이라 한다. 손의 위치가 바뀌는 수도 있으나 오른손이 위로 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손의 형식은 결가부좌를 할 때나 좌선할 때 취하기도 한다.

*선종(禪宗)--- 참선으로 자신의 본성을 구명해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교설(敎說) 외에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로 하는 종파. 6세기 초 중국 양나라 때 인도의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전하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중엽에 전해져 9산선문이 성립됐다.

   교의적으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한다. 즉 문자에 의하지 않은[언어도단(言語道斷)] 순수체험의 직접 전승을 중시하고, 또 자기의 본성이 부처임을 직접 경험해 그대로 성불하고자 한다. 일체의 분별을 털어버리고, 다만 직관에 의해 해탈의 경지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종은 특별한 경이나 논 등을 근본 교리로 해서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 남종은 금강경, 북종은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갖게 됐다. 그리고 선종에서는 자기들의 법통을 이어주는 역대 조사(祖師)들을 매우 숭상하며, 선의 경지를 즐겨 수묵화로 표현한다.

   인도인들은 현실보다 내세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성격을 지녔는데, 비해 중국인들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현세에서 깨달아 성불하고자 하는 현실적이요 실천적인 성격을 띤 가장 중국적인 불교가 선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종 때 모든 종파의 통폐합에서 남은 두 종파 중의 하나이다. 1424년(세종 6) 7개 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두 종파로 통폐합했다.

 

*선지식(善知識)---수행이 깊은 스님. 선종에서 수행자들의 스승을 이르는 말. 본래 박학다식하면서도 덕이 높은 현자를 이르는 말이다. 불타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진리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불교적 교사(敎師). 그러나 불교에서 ‘지식(知識)’은 ‘벗, 아는 사람’이라는 말로 쓰이므로 선지식의 원뜻은 ‘참된 벗’으로서, 산스크리트 칼리아니미트라(kalyamitra)에서 유래했으며, 불교에 있어서의 교사는 인생의 반려자인 동시에 인도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선지식마(善知識魔)---자기가 가진 교법에 집착해 남에게 말해 주지 않는 좋지 않은 마음. 자기가 깨달은 교법에 집착심(執着心)을 갖고, 남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마군(魔軍).


*선호념(善護念)---여기서 ‘선善’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 또는 의지를 뜻하고, ‘염(念)’이란, 불교의 큰 깨달음을 이루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있는 ‘염심(念心)’과 팔정도의 ‘정념(正念)’에서 ‘염(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금 이 순간의 생각 또는 마음, 혹은 관(觀)하는 주체의 지혜를 말한다.

   이 몸을 염하면 무상함을 깨닫고, 느낌(감정)과 마음을 염하면 생각과 느낌들은 무작위로 생멸하는 것이어서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법을 염하면 온 물질과 관념들이 모두 성주괴공(成住壞空)이요 모두 생멸함을 알게 된다.

   쉽게 말하면, 시시각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마음, 자기 생각을 가만히 살피는 것이 선호념이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예는,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선호념이다. 좌선할 때도 자신을 살피고 쓸 때 없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선호념해야 한다.   


*설두 중현(雪竇 重顯, 980~1052)---중국 송대의 선승으로 금나라의 외침을 받아 북송과 남송으로 갈라지던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출가 후 운문종(雲門宗)의 3대조인 지문 광조(智門 光祚) 문하서 수행했다.

   어느 날 중현(重顯)은 스승에게 “한 생각도 내지 않을 때의 허물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묻자, 스승은 제자를 불러 앉히고는 다짜고짜 손에 들고 있던 불자(拂子)로 얼굴을 후려쳤고, 그런데도 제자가 다시 같은 질문을 하려 하자, 스승이 다시 불자를 내리쳤는데, 바로 그 순간 중현은 깨달음을 얻게 됐다는 일화가 전한다.

   운문종(雲門宗)의 4대(代) 법손으로 운문종의 가풍을 계승한 중현은 훗날 스승의 간청에 못 이겨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의 설두산(雪竇山)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며 30여 년을 한결같이 독특한 선풍으로 제자들을 교화하며 종풍을 크게 진작시켰는데, 70여 제자를 길러냈기에 ‘운문의 중흥조’라 불린다. 

   중현의 저술이 여럿 있으나 그 가운데 백미(白眉)는 부처 당시부터 11세기까지 살았던 선사들의 이야기를 간결한 시어로 표현한 어록집 <송고백칙(頌古百則)>이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산스크리트어 사르바스티바딘(sarv?stiv?din)이라고 하며, 줄여서 유부(有部)라 하기도 한다. 부파불교 시대 소승불교의 상좌부(上座部)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부파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부파이고, 부파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일체법(一切法 : 모든 법)을 유(有)라고 설명하는 부(部)라는 뜻으로 모든 것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부파이다. 성립은 불멸 후 3백년 경(기원전 2세기 전반)이다. 그 한참 후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가 나타나 <발지론(發智論)>을 저술해서 설일체유부의 체계를 대성했다고 한다. 뒤에 독자부(犢子部) 등 여러 파가 여기에서 나왔다.


*섭대승론(攝大乘論)---“대승(大乘)을 포섭한 논서”라는 뜻으로 아상가(阿僧伽/Asanga, 무착/無着, 310∼390)가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대승불교를 통일하기 위해 저술한 논서. 진제(眞諦)에 의해 한역됐다. 무착의 동생 세친(世親)이 섭대승론을 주석한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석론(釋論)>을 지었다.


*섭론종(攝論宗)---중국 불교 13종의 하나.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석론(釋論)>에 의거해서 일어난 종파인데, 진제(眞諦, 499-569)가 개조이다. 

   진제는 원명을 파라마르타(Paramartha)라고 하며, 서북 인도의 브라만 출신 승려였는데 548년 다수의 불전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서 건강(建康)에 상륙해 양나라 말기 전란의 와중에서 각지로 전전하면서 <섭대승론>과 <섭대승론석>을 번역해 인도 유식파(唯識派)의 무착 ? 세친의 학설을 체계화해 소개했다.

   그러나 당나라에 와서 현장(玄?)에 의해 <섭대승론>과 그 주석서가 새롭게 번역돼 법상종(法相宗)이 일어나면서 섭론종은 점차 쇠퇴했다. 한국에는 신라시대 원효(元曉)대사가 <세친석론약기>를 지었다.---→진제(眞諦) 참조.


*섭리(攝理, Providence)---세계와 인간의 운명은 신이 예정했던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신앙(信仰). 신 또는 신적존재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ㆍ의도를 말하는 것으로 창조주 ? 조물주를 신봉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허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설에는 위배된다. 섭리를 옹호한 논작(論作)으로 유명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辯神論)>임.


*섭수(攝受)---관대한 마음으로 남을 받아들임, 혹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어 들여서 보살핀다는 뜻이다. 절복(折伏)이 상대를 비난해서 굴복시키는 일인데 비해, 이는 마음을 너그럽게 해 포용하는 태도이다.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섭화(攝化)---중생을 불법으로 교화하는 일. 중생을 거두고 보호해 가르쳐 인도함.


*성(性)---불교에서 성이란 남녀 구분의 성이 아니라 불변의 본체를 말한다. 이에 대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상(相) 참조.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AD 2~3세기경의 용수(龍樹), 4세기경의 세친(世親) 등의 글에서 불법을 일반 세상의 도(道)에 준해 난(難) ? 이(易)의 둘로 나눈 바 있어 이에 힌트를 얻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담란(曇鸞, 476~542)은 <정토론주(淨土論注)>를 써서 난행도와 이행도로 나누었고, 수 ? 당시대의 도작(道綽, 562~645)은 그의 저서 <안락집(安樂集)>에서 불법을 다시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둘로 나누었다. 난행도는 성도문을 말하며 이행도는 정토문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문(聖道門)이란 어렵고 힘들지만 현세에서 수행해 증오(證俉)하려는 것이고, 정토문(淨土門)은 쉽게 아미타불을 믿음으로써 극락세계에 태어나 거기에서 성불할 것을 가르치는 교설(敎說)---→난행도(難行道), 이행도(易行道) 참조.


*성문승(聲聞乘)---‘성문승,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삼승(三乘)의 하나. ‘성문승(聲聞乘)’에서 ‘성문’이란 석가모니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불제자들을 이르는 말인데, 후에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석가의 가르침을 그대로 충실히 실천하는 출가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그리고 ‘승(乘)’이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한다. 그러니 ‘성문승’이란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충실히 따르고 가르침을 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성문승의 목표가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성문승을 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성문4과(聲聞四果)---초기불교에 있어서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성문(聲聞)의 수행단계를 네 단계로 분류하고 이를 성문4과라 했다. 즉 깨달음의 4단계인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을 말한다.

     ?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panna의 음사.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도 함.       ? 사다함(斯陀含) - 산스크리트어 Sakadagamin의 음사. 일래(一來)라고도 함.

     ? 아나함(阿那含) - 산스크리트어 Anagami의 음사. 불환(不還)이라고도 함.

     ?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 arhat의 음사. 나한(羅漢), 응공(應供), 무학(無學), 응진(應眞)이라고도 함.---→자세한 것은 사향사과(四向四果) 참조.


*성성적적(惺惺寂寂)---참선수행을 할 때,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寂寂)에서 멍함(昏沈/혼침)에 빠지지 말고(편안함에 머무르지 않음), 항상 또렷하게 깨어 있고, 산란함(掉擧/도거)에도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참선하는데 두 가지 장애가 있으니,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다. 이를 혼신이마(昏散二魔)라고 한다. 참선을 위해 지(止/定, 사마타수행)와 관(觀/慧, 위빠사나수행)을 함께 닦으라는 것에서 성성(惺惺)은 혜(慧=觀照/관조, 사방으로 비추어 보는 것)에 해당되며, 적적(寂寂)은 지(止=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함)에 해당 된다. 의미적으로 본다면, ‘진공(眞空)은 적적이며, 묘유(妙有)는 성성’일 것이다.

   다른 말로는, 혼침을 무기(無記)라 하는데, 너무 적묵(寂默)에 빠지는 것이고, 산란이란 마음이 들떠 번뇌망상이 들끓는 것이다. 이러한 혼침을 성성(惺惺), 즉 깨어있는 것으로 다스리고, 산란한 마음은 적적(寂寂), 즉 고요함으로 다스려, 성성한 가운데 적적하고, 적적한 가운데 성성해야 화두일념에 들어 공부가 순일(純一), 순숙(純熟)해질 수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해설한 논서이다. 인도의 유식학파(唯識學派)가 발전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유식사상을 정리한 유식학의 기본서이다. 인도의 학승 호법(護法, 530~600)이 세친(世親, AD 320~400)이 저술한 <유식삼십송>을 기반으로 이론과 실천 전반에 걸쳐 주석을 간결하게 정리한 논서로서 아뢰야식(alaya-vijnana, 阿賴耶識, 혹은 第八識)의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659년에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奬)이 호법의 논서에다가 다른 유식 논사(論師)들의 학설을 취사선택 보충해 번역 편집했다. 중국과 일본의 법상종(法相宗)은 이 논서에 의거해 세워진 종파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불교의 심오한 우주관(질서). “성-생성되다, 주-머무르다, 괴-파괴되다, 공-없어지다”라는 뜻으로, 사람도 태어나고, 나이를 먹고, 늙어 퇴화해, 죽는 것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이러한 질서로 움직인다는 이론.


*성중(聖衆)---신중(神衆), 중성(衆聖)과 같은 말로서 성자의 무리, 즉 부처와 성문, 연각, 보살 따위를 이른다.---→신중단(神衆壇) 참조.

           

*성철(性澈, 1912년~1993)---속명은 이영주(李英柱). 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澈). 경남 산청 출신. 1930년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경 지리산의 대원사(大願寺)에서 거사로서 수행하다가 출가했다.

   출가한 후엔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행하는 등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했으며, 돈오사상(頓悟思想)과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설파했다.

   1967년에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했는데, 이것은 불교의 중심 사상인 중도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했다. 승가의 수행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세간(世間)---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계 혹은 세간이라 한다. 세(世)는 공간을 말하며, 간(間)은 시간을 말한다.


*세간해(世間解)---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일체 세간의 온갖 일을 완전히 안 분이라는 뜻.

 

*세우(世友, 산스크리트어 바수미트라(Vasumitra)---서기 2세기경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사. 불멸 후 6백 년경(AD 2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슈카(Kaniska)왕의 후원으로 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지방에서 네 번째 경전 편찬회의가 열렸다. 이때 이 결집을 주관한 사람이 세우존자(世友尊者)와 협존자(脇尊者, 파르슈바, Parsva)였다.

   세우의 저서로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 전하는데, 이 논서는 그 이름처럼 서로 다른 여러 부파의 종지(宗旨)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해 부파의 분열 역사와 각 파의 교리 내용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세존(世尊, 세존(世尊:Bhagavat))---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아 중생을 바르게 인도하므로 세상의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라는 뜻. 범어 ‘바가바(婆伽婆, Bhagavat)’를 뜻에 맞게 번역한 단어로 부처님에 대한 여러 호칭 가운데 하나이다.


*세친(世親, Vasubandhu, 바수반두, 320?~400?)---천친(天親)이라 하기도 하고 바수반두(婆藪槃豆)라고 음사한다. 생물 연대는 4세기설과 5세기설이 있다. 그의 형 무착(無着)의 유식학(唯識學)을 계승해 이를 완성시켰으며, 여러 대승경전을 연구해 대승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가행파(瑜伽行派)를 대승불교의 주류를 이루었고,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인 <구사론(俱舍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의 저자이다.

   처음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출가해 소승교리를 연구하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있었다. 에 형 무착은 이런 세친(世親)의 행위를 염려하고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해서 <십지경(十地經)>을 보여주고 유식사상을 설명해 대승불교에 귀의케 했다.


*셔먼(Robert A Sherman) 교수---1941년 뉴욕 출생,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 석사, 박사를 마쳤다. 1964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비구승이 됐으나 이후 환속해서, 엠하스트 대학, 하버드 대학 방문교수를 역임했으며, 1987년 설립한 뉴욕 티베트 하우스의 대표이고, 현재 콜럼비아 대학교 인도-티베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티베트 불교 옹호자로 유명한데, 셔먼 교수는 종교간의 갈등 해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로가 상대를 개종시키려 하면 안 된다. 그럼 종교전쟁을 낳게 된다. 이라크전쟁, 알카에다 등도 이런 부작용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이슬람교도는 더 나은 이슬람교도가 되고, 기독교인은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고, 불교인은 더 나은 불교인이 되는 거다.”라고 했다.


*소나경(Sona Sutta)---한역 <잡아함경>에 있는 <소나경>은 중도(中道)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소림사(少林寺)---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崇山)에 있는 사찰. 이 사찰은 496년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발타선사(跋禪師)를 위해 처음 창건했다고 하며, 달마(達磨)가 530년부터 9년간 여기서 좌선했다는 사실이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한 소림권법(少林拳法)은 달마(達磨)가 인도에서 들여온 행(行)의 일종인데, 선승(禪僧)들의 수행법으로, 그리고 불교도들의 심신단련과 호신에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현재의 소림권법은 불교의 수행법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고유무술이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 있는 남소림사(南少林寺)의 권법이 더 유명하다. 그래서 중국 권법의 영화는 대부분 이 남소림사에서 촬영됐다.


*소마경(蘇摩經 Som? Sutta)---악마 파순(波旬)과 소마(蘇摩) 비구니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여성도 해탈할 수 있음을 밝힌 경이다.

   “성자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렵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네.”

   “마음이 잘 집중돼 최상의 법을 보는 자에게 지혜가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 잡아함경 45권 1199경. ― 상윳따 니까야의 제5. 비구니 상윳따의 소마경.

 

*소승불교(小乘佛敎)---부처님이 입멸한 후 약 100여년 지나서(기원전 3세기 중반 아소카왕 무렵) 교단 내에 교리 해석 문제에 이견이 생기고, 기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분열이 시작돼 교단은 4백여 년 사이 점차 20개 여파로 분열이 일어났다. 이때를 부파불교시대라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번잡한 논장(아비달마/abhidharma)이 일어나 교리 중심이 되면서 점차 대중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세기 경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대승불교라 한다. 이들 대승불교에서 종전의 부파불교(아비달마불교)를 소승불교라 했다.

   소승불교 중에서 특히 중요한 부파는 대중부(大衆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독자부(犢子部), 화지부(化地部), 법장부(法藏部), 경량부(經量部) 등이다. 헌데 상좌부만을 소승불교라 하고, 대중부는 대승불교로 포함시키는 사람도 있다.

   현재 전하는 논장은 스리랑카 상좌부가 전하는 팔리어로 써진 논장과 한역으로 전해지는 설일체유부의 것이 거의 전부이며, 타 부파의 논장은 매우 적다.

   소승불교의 교리의 특징은 붓다의 가르침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해서 정비하느냐는 점에 있었다. 소승불교는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데, 이를 대승불교인 북방불교(북전불교)에 대해 남방불교(남전불교)라고도 한다.---→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참조.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초기에 성립된 열반경을 흔히 소승열반경이라 하며, 대승불교 흥기 후 성립된 경전을 대승열반경이라 하나 두 경의 이름은 모두 <대반열반경>이다.

   소승열반경은 후기에 성립된 대승열반경과 달리 붓다의 유언으로 법과 율에 의지하라는 당부와 게으르지 말고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아난에 대한 충고가 주요내용이다. 그 한역본은 법현(法顯) 역의 <대반열반경> 외 두 종류가 있다.

   대승열반경은 붓다가 설파한 법의 의의가 대승불교의 교리와 실천도(實踐道)의 관련 위에서 자세히 기술돼 있다. 이의 한역은 법현과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공역의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과 북량 담무참(曇無讖) 번역의 <대반열반경>, 그리고 그 후 위의 2가지 번역본을 종합한 <남본열반경>이 있다.---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참조.


*소의경전(所依經典)---소의(所依)는 의지할 바 대상을 의미하며, 소의경전은 각 종파에서 근본으로 삼는 경전으로서 신행(信行)을 비롯해 교의적(敎義的)으로 의지하는 근본 경전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이고, 화엄종은 <화엄경>, 법화종과 천태종은 <법화경> 하는 식이다.


*소지장(所知障)---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장(二障)이 있다. 번뇌장은 탐 ? 진 ? 치(貪瞋癡) 등에 의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 것이고, 소지장이란 기왕에 조금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이다. 즉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여러 가지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데, 이때의 알음알이(얕은 지식)에 집착해 더 깊은 공부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 받게 되는 것이다.---→삼장(三障) 참조.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소품반야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8천개의 게송(시구)으로 구성된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이다.

   <소품반야경>은 바라밀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지혜제일인 수보리(須菩提)를 등장시켜서 그 해답을 들려주고 있는 대승 초기경전으로서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이다.

   헌데 반야경전에 속하는 경전은 그 수만도 수십 종류에 이르며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분량도 많고, 경명(經名)도 아주 다양하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열 가지를 <십본반야(十本般若)>라고 하는데,  <소품반야경>은 이 중의 하나로서 10여종의 산스크리트본과 12여 종의 티베트본, 그리고 한역본은 무려 42종의 동본이역(同本異譯)이 나올 정도로 선호됐던 경전이다. 이 중에서 후한(後漢)의 지루가참(支婁迦讖) 번역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 번역한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이 특히 유명하다.---→대반야경(大般若經) 참조.


*속장경(續藏經)---고려시대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중심이 돼 초조대장경에서 제외된 중국 및 한국 학승들의 저술인 교장(敎藏) ? 소(疏) 등을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작성하고, 이들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것을 초조대장경에 이어서 판각된 것이라 해서 속장경이라 했다. 고려 선종 8년(1091)부터 고려 숙종 연간에 걸쳐 판각됐다. 하지만 경(經)은 없고 오로지 논 ? 소만으로 편성된 것이기에 대장경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마저도 몽고군의 침입으로 경판이 모두 불탔다.


*속제(俗諦, samvrti-satya)---불교 사상에서 보통사람들의 상식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진리. 속제는 일상생활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의사소통이라는 실질적 목적을 위해 인정되는 경험적 진리를 말한다. 이러한 속제는 경험적 현상의 기저에 있고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궁극적 진리인 진제(眞諦 param?rthasatya)와 구별된다. 진제는 어떤 것도 독립적 실재성을 갖지 않은 현상세계의 참된 본질로 간주되는 보편적 공(空 ??nyat?)의 진리이다.---→이제(二諦), 제일의제(第一義諦) 참조.


*송고승전(宋高僧傳)---중국 송대(宋代)의 승려인 찬녕(贊寧, 919∼1002)의 저술. 송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80년에 착수한 후, 8년 동안 집필해 998년에 완성한 고승들의 전기. 문헌의 선택에 약간의 문제는 있으나 중국 중세 불교사 연구에는 불가결의 자료이며, 한국의 고승 전기도 많이 수록돼 있다.


*송담(松潭, 1929년~)---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중국 당나라 때 “남설봉 북조주(南雪峰北趙州)”에 빗대어, “남진제 북송담(南眞際 北松潭)”이라고 한다. 현재 인천용화선원 원장. 여기서 남 ‘진제’는 2012년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분이다.


*손챈감포왕(Songts?n Gampo, 쏭짼 감뽀, 松贊岡保, 617-698)---티베트 국왕. 중국 당 황실 출신의 문성공주(文成公主)와 브리쿠티 데비 두 왕비가 중국계와 인도계의 불교를 도입했다. 그리고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에 혼합해 티베트 불교로 토착화해 갔다.


*수(受, 산스크리트어 vedana)---유식학(唯識學)에서 수(受)란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 할 느낌을 말하는데, 의식 속에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 즉 색(色)인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의 다섯 기관[오근(五根)]으로 느끼는 감정 ? 감각, 영어로는 필링(feeling)이다.

   수는 내적인 감각기관[오근(五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상 세 가지가 있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삼수(三受)이다. 고수란 괴로운 감정이고, 낙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불고불락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12연기의 경우에 있어서 무명(無明)에 연해 행(行) ? 식(識(식)) 이런 순서로 연기하다가 여섯 번째 촉(觸)에 연해 일어나는 감수작용[느낌]을 수(受)라고 말하는데, 접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즐거운 감정, 괴로운(싫은)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 즉 삼심수(三心受)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접촉해서 느끼는 괴로운 감정은 고수(苦受)이고, 즐거운 느낌은 낙수(樂受)이며,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또는 사수(捨受)라 한다.

   감각기관[6입]과 그 대상[6경], 그리고 인식작용[6식]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촉(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受)가 발생하게 된다. 즉, 6입과 명색과 식의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불고락, 불고불락 등의 감수작용이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헌데 수 ? 상 ? 행 ? 식은 따로 떼어서는 살펴볼 수 없다. 수 ? 상 ? 행 ? 식은 하나하나 떼어내면 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수가 없이는 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상이 일어나면 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한 시공간에 두 개의 실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흐름에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 즉,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다.

   하지만 수 ? 상 ? 행 ? 식은 지속적이고 복합적이며 통합적으로 일어난다. 그 하나하나의 가닥은 실체가 없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그것이 뭉치면 마치 얇고 약한 지푸라기를 꼬아 만든 새끼줄처럼 강력한 다발이 된다. 그래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과를 보기만 하고도 사과에 대한 식으로 인해에 맛과 향, 느낌과 기분까지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것들이 다시 사과에 대한 인식으로 자리를 잡는다. 점점 강해지고 굳어져서 사과라고 하면 이미 끊어낼 수 없는 우리의 복합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수 ? 상 ? 행 ? 식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예이다.


*수기(授記 혹은 受記)----수기는 범어 뱌아카라나(vyakarana)를 번역한 말로, 화가라나(和伽羅那)라 음역되기도 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태어날 곳, 혹은 성불하리라는 것을 낱낱이 예언하는 경문의 부분인데, 보통 문답식으로 의론을 전개하다가 최후에 부처님이 인가를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부처님이 수행자 혹은 제자가 미래에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거나 보증, 인가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실행하신 수기란 각자가 지닌 잠재능력을 부추겨 목적성취를 위해 노력케 하는 역할을 한다. 비록 미약할지라도 뭔가의 동기를 지닌 사람에게 그 스스로가 지닌 잠재능력을 인식시키고 개발케 함으로써 인간의 나약함을 자신감과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적 방편이다.


*수능엄(首楞嚴)---수능엄이란 범어 수랑가마(suramgama)를 음사한 말이다. 그리고 ‘수능(首楞)’이란 모든 것에 구경(究竟-최종의 극치)임을 뜻하는 말이고, ‘엄(嚴)’이란 견고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에 구경이고, 견고한 것이 수능엄이니, 이것은 바로 불성(佛性), 여래장성(如來藏性)을 의미한다.

   헌데 이 수능엄(首楞嚴)이란 말엔 용맹이란 뜻이 들어있다. 수능엄경에 나오는 능엄주(楞嚴呪)가 좋지 않은 것, 내가 살아가는데, 혹은 공부하는데 장애가 되는 그런 마(魔)의 요소들을 쳐부순다든지, 항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의미가 이 용맹이라고 하는 뜻 속에 포함이 돼 있다.---→능엄신주(楞嚴神呪)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줄여서 <능엄경>이라고도 한다.---→능엄경(楞嚴經) 참조.

   

*수능엄삼매(首楞嚴三味)---<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등에 108가지 삼매가 설명돼 있는데, 그 가운데 처음의 수능엄삼매 또는 번역해서 용건삼매(勇健三昧)는 번뇌를 깨뜨리는 견고한 삼매라 한다. 즉, 수행자가 용맹스러운 마음으로 일체의 번뇌와 욕망을 깨뜨리며 집중하고 들어가는 단계를 수능엄삼매라고 한다. ‘수능엄’을 구경이라고도 하니 수능엄삼매란 결국 구경의 삼매란 뜻이 되겠다.


*수다라(修多羅)---약어 다라(多羅). 산스크리트어 s?tra 팔리어 sutta의 음사. 경(經) 혹은 계경(契經)이라 번역하는데, 아래와 같은 뜻이 있다.

     ①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나. 경전의 서술 형식이 산문체로 된 것을 말함.

     ② 경(經) ? 율(律) ? 논(論)의 삼장(三藏) 가운데 경(經)을 뜻함.

     ③ 대승 경전을 일컫기도 함.


*수다원(須陀洹, 산스크리트어 srota-?panna 팔리어 sota-?panna)---초과(初果),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한다. 성문(聲聞)의 수행 단계인 수다원,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사과(四果) 중 처음으로 미혹을 끊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성자의 무리에 끼어든 자이다.

   부지런히 정진해 6근이 6진(六塵 또는 6境)에 의해 흔들리지도 물들지도 않게 되면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된다.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되면 탐 ? 진 ? 치로 인한 거칠고 무거운 번뇌들이 생겨나지 않게 되므로, 다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몸을 받지 않게 된다.---→사향사과(四向四果), 예류자(預流者) 참조.


*수도(修道)---초기 불교에 있어서 성문이나 보살의 수행단계인 삼도(三道)의 제2단계. 사성제(四聖諦)와 연기를 체험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고(苦)는 널리 알아야 할 것이고, 집(集)은 끊어버려야 할 것이며, 멸(滅)은 실증해야 할 것이고, 도(道)는 닦아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삼도(三道) 참조.


*수도 5위(修道5位)---유식설(唯識說)에서 수행 과정의 다섯 단계를 말함.---→오위(五位) 참조.


*수라도(修羅道)---아수라도(阿修羅道)와 같은 말. 육도(六道)의 하나로서, 교만심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싸움만 하는 아수라(阿修羅)가 사는 세계(世界)이다.


*수메다(Sumedha, 유동행자, 선혜동자)---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오래 전(4아승지 10만 겁 전) 연등불(D?pankara Buddha)이 세상에 나와 교화하실 때, 수메다(Sumedha)라는 수행자였다. 그의 외모는 수려하고 단정해 마치 연꽃과도 같이 훌륭했다. 수메다는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모두 보시하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연등불을 만나기 전에 홀로 수행해서 8선정(색계 4선, 무색계 4정), 5신통(천안통, 숙명통,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5근(信, 精進, 念, 定, 慧)을 갖추고 있었다.

   연등불께서 마을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로 와서 부처님이 지나가실 길을 고치다가 물이 고여 있는 곳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곳을 가려서 부처님께서 지나가시도록 했다. 연등불은 이러한 수메다 행자의 근기를 살피시더니, “그대는 4 아승지 10만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붓다가 되리라”하고 예언했다. 이 수기를 받고나서 수메다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려고 결심한 존재인 보살(菩薩, bodhisatta)이 됐다.


*수면(隨眠, 산스크리트어 anu?aya)---번뇌는 중생을 늘 따라 다녀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따른다’는 뜻의 수(隨) 자를 쓰고, 그 작용이 잠자듯 숨어 있다고 해서 면(隨) 자를 쓴다. 그래서 마음에 잠재하고 있는 번뇌란 말이다.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복하고 있는 번뇌의 종자라서 번뇌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란 말이기도 하다. <구사론>에서는 6수면(隨眠), 유식학에서는 6대혹(大惑)이 있다고 한다. 6수면(隨眠)은 탐(貪) ? 진(瞋) ? 치(癡)라는 3독심에 만(慢), 의(疑), 악견(惡見)을 추가한 6번뇌이다.---→근본번뇌(根本煩惱) 참조.


*수미(守眉, ?~?)---조선 초기의 승려. 속성은 최씨(崔氏). 호는 묘각(妙覺). 13세에 출가했고, 처음엔 교학(敎學)에 뜻을 두었다가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信眉)와 함께 수도에 정진한 후 선교(禪敎)를 부흥시키는 데 힘썼다. 세조 때인 1458년 왕명으로 해인사(海印寺)에서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50부를 인출하는 일을 맡아 감독한 뒤 왕사(王師)가 됐고, 간경도감에서 신미(信眉), 학조(學祖)와 더불어 불경 언해 작업에 종사했다. 부도는 전남 영암군 월출산(月出山) 서남쪽 자락의 도갑사(道岬寺)에 있다.


*수미단(須彌壇)---사원의 본전(本殿) 정면에 불상을 모셔 두는 단. 수미산을 본뜬 것으로 대개 방형이나 사각, 팔각, 원형 따위의 모양이 있다.


*수미산(須彌山, Sumeru, Mount)---불교의 세계관에 나오는 상상의 산이다. 세상은 아홉 산과 여덟 바다가 겹쳐져 있는데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수미산이다. 세계의 중앙에 있는 이 거대한 산의 중턱에는 사천왕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곳이라고 하며,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한다. 한편 여덟 바다 중 가장 바깥쪽 바다의 사방에 섬(四洲)이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섬, 즉 남염부제(南閻浮提)에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하며, 그곳이 바로 지구라는 말이다.

   이상과 같은 전설적인 면 이외에 실제로 히말라야 북쪽,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 서쪽 ‘아리(阿里)’라는 지역은 소위 ‘신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지구상의 오지 중의 오지이다. 거기 해발 6,714m의 미개척 봉우리로 카일라스(Kailas)산이 있다. 이 산을 수미산이라 한다.

   피라미드의 형상으로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덮여 있다. 이 산이 순례자들에게는 곧 ‘우주의 중심’이고, 그들에게 카일라스산은 천상을 뚫고 선, 신앙의 중심지인 것이다. 삼라만상을 순환하게 하는 으뜸 산이요, 세계의 기둥으로 숭앙된다. 순례자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의식대로 지금도 이 산을 일주한다. 3박4일이 걸리는 고행이지만 순례자들은 주저 없이 감행한다. 순례자들은 이 산을 한번 순례하면 평생의 업보가 지워진다고 믿는다. 카일라스산의 가운데 파인 기다란 홈이 불교의 설화로는 그곳이 천국에 오르는 계단이라고 설명한다.


*수바드라(Subhadra, 須跋陀羅, 수밧다라)---석가가 죽기 직전 찾아와 마지막 제자가 된 사람이다. 이때 그의 나이 120세였단다.

   헌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부처님이 열반을 한 후 마하가섭(迦葉)에게 폭언을 퍼부음으로써 가섭으로 하여금 불전 결집의 결심을 하게 했다고 하는데, 정황을 봐서 이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 아닌 것 같다. 고대 인도엔 같은 이름의 사람이 많았다.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슬픔에 빠진 비구들 사이에서 오직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뻐하며 모든 통제로부터 벗어났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자고 제의했다는데, 노련한 마지막 제자가 그런 제의를 했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수보리(須菩提)---수부티(subhuti)를 음사한 이름, 선현(善現)이라고도 함.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4대 성문(聲聞) 중 한 사람이며, 공(空)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였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렸고, 결코 남과 논쟁하지 않았다 해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금강경(金剛經)>에서 부처님의 대화 상대가 수보리이다. 그리고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를 지어드린 급고독(給孤獨 = 아나타 핀디카 수닷타) 장자의 조카가 바로 수보리이다.


*수불부촉(受佛付囑)---부촉(咐囑)이란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불법의 포교와 전수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을 말한다. ‘수불부촉’이란 그런 부처님의 부촉하심을 받들어 받아들여라 하는 뜻이다.


*수?상?행?식(受想行識)---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 오온(五蘊)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서 색(色)을 뺀 나머지로서 ‘마음’의 여러 상태, 즉 감정, 지각, 의지, 의식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수 ? 상 ? 행 ? 식이라는 감정의 흐름에는 ‘주인공’이 없다고 한다. 즉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수식관(數息觀)---불가의 수행법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 산란한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 수행법. 즉, 참선 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선방에 앉아 근엄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쉽고 편안하게 일상생활에서 할 수도 있다.

   수식관을 하면 망상(妄想)이 복잡하게 일어날 때 숨을 고르면 망상이 어느 정도 잦아진다. 숨을 쉴 때 들여 쉬고 내쉬는 이것을 열까지 세고 버린다. 왜 열까지 세고 버리느냐 하면 열이 넘으면 망상이 생긴다. 들어가는 숨을 세고 나오는 숨도 세면 분별이 많아지니 들어가는 숨은 빼고 나오는 숨만 세는 수도 있다. 열 번씩 세다가 혹은 세 번이나 다섯 번이나 일곱 번까지 세다가 망상이 생기면 잘못 세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센다. 열 번까지 가지 말고 이렇게 숨을 세는데서 다른 생각이 들어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정신(精神)이 집중이 된다. 이것을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화두선(話頭禪)에서는 호흡에 대해서 별로 강조를 하지 않는다. 화두는 오직 참구하고 참구해서 참된 의심을 돈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두참구의 초보자나 마음의 안정이 잘 되지 않는 사람, 진전한 의정(疑情)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은 먼저 호흡법과 수식관을 통해서 마음의 고요를 얻어야 한다. 수식관은 그런 면에서 초보 참선 자들이 해야 할 기초단계의 수련이다.--→오정심관(五停心觀) 참조.


*수심결(修心訣)---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마음을 닦는 비결을 적은 선 이론서(禪理論書).---→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참조.


*수심요론(修心要論)---5조 홍인(弘忍, 601~674)의 저서. 문답형식으로 선 수행의 요지를 밝힌 동산법문(東山法門)의 강요서(綱要書)이다. 수심요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마음을 닦는 본질은 모름지기 자기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분별심도 찾아볼 수 없어서 본래 원만하고 때가 묻지 않아 청정한 마음, 이것은 우리의 근본 스승이며, 시방의 여러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뛰어난 선 수행의 핵심이다.”

   홍인은 이와 같이 심성의 본원에 철저함을 본지로 삼아 수심(守心), 즉 수본진심(守本眞心)함을 강조하고, 본래의 청정한 진심을 지키는(守本眞心) 법을 기본으로 좌선법을 지도했다. 그리하여 무릇 도를 닦는 근본은 모름지기 이 몸과 마음이 본래 청정해,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분별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자성의 원만하고 청정한 마음이 곧 본사(本師)이며, 온 누리의 모든 부처님을 염송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동산법문(東山法門) 참조.


*수아정례(受我頂禮)---受(받을 수), 我(나 아), 頂(정수리 정), 禮(예절 예). 정례(頂禮, 바른 마음과 몸으로 예의). 따라서 ‘저의 간절한 예배를 받으시고…’라는 뜻이다.


*수유(須臾)---매우 짧은 시간. (예)지구의 나이를 생각하면, 백 년도 수유에 불과하다.


*수인(手印)---인계(印契)라고도 한다. 손과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수많은 상징적 모양. 조각이나 그림에서 손의 자세는 그 인물의 특성이나 그와 연관된 중요한 일화를 상징한다. 부처님의 수인에는 여원인(與願印), 전법륜인(轉法輪印), 선정인(禪定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등이 있다.---→무드라,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참조.


*수자상(壽者相, 산스크리트어 jiva samjna)---수자상의 원어인 jiva는 영혼, 목숨, 생명이라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생사를 초월한 존재 또는 영원불멸의 순수영혼이 있다는 견해로서, 구마라습은 수(壽)로 현장은 명(命)으로 번역했다. 

   중생의 오온(五蘊)은 모두가 실체가 없어 한시도 머물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영생불멸의 윤회하는 주체로서 영혼이 있어서 오온은 사라져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릇 된 착각을 한다. 그것이 수자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설을 반박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교설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헌데 종전에는 이 수자상을 ‘목숨’으로 이해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이라 해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의 존재설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한다.

---→4상(四相) 참조.


*수자타(Sujata)---우루벨라 촌장의 딸. 부처님께서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유미죽/乳米粥) 공양을 받아 기력을 회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수좌(首座)---선방에서 참선에 정진하는 스님들을 수좌(首座)라고 한다. 머리 수(首) 자에 앉을 좌(座)를 쓰는데 아마도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이 그대로 묻어나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중국 당나라의 선승 임제(臨濟)선사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 ‘가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는 뜻이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며,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돼 주체적으로 살라고 하는 뜻이다.

    ※비슷한 말---입처개진(立處皆眞) -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라는 뜻.


*수타니파타(Suttanipata, 경집/經集)---숫타니파타라고도 발음한다. 수타니파타는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경으로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경이다. 수타(sutta)는 팔리어로 경(經)이란 말이고, 니파타(nip?ta)는 모음[集]이란 뜻으로 부처님 말씀을 모아놓은 경이란 뜻이다.

   팔리어 삼장 가운데 경장(經藏 Sutta Pi?aka)의 소부(小部, 굿다까니까야, Khuddaka Nik?ya)에는 법구경(法句經), 본생경(本生經), 여시어경(如是於經) 등 15개의 경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타니파타이다. 다른 불교 저서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작품의 하나이며, 초기 불교의 문화적 ? 종교적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대부분 운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설화, 대화, 짧은 서정시, 격언, 속요(俗謠)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탄생을 이야기한 문헌 중 최고(最古)의 것이다. 〈수타니파타〉에서는 사성제(四聖諦)를 깨닫고,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수행과 음식---수행에 있어서 음식을 조정할 일이다. 힘을 낸다고 과식해서는 안 된다. 수면을 줄이고 마음을 맑힌다고 음식을 너무 줄여서도 안 된다. 선은 망념을 격파해야 한다고 음식을 함부로 먹고 육단심(肉團心)을 내려하면 안 된다. 수도인의 식기(食器)를 응량기라 하듯이 자기 양에 맞추어서 적당히 먹어야 한다. 먹고 싶은 양의 7부를 먹는 것이 선가식의 적당량이다. 좋다고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거칠다고 덜 먹어서도 안 된다. 음식은 이것이 몸을 부지해 가는 약이다. 이 약은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대해야 한다. 오래 씹어 천천히 먹어야 한다. 먹으면서 잡념을 해서도 안 된다. 생식(生食)을 하거나 담식(淡食-싱겁게 먹음)을 하는 것은 권할 바가 못 된다. 비시식(非時食)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단식은 병을 고치기 위한 이유 외는 마땅하지 않다. 참선에서 그 양(量)을 알아서 먹는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정신자세와 환경을 꾸며 가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일즙(一汁) 일채(一菜)가 선가의 식사지만 이 식사에 무성의하면 안 된다. 식사를 고루하지 않으면 필경 마음이 고르지 아니해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게 된다.

       ※담식이란 소금 간장 매운 것 등 일체를 안 먹는 것이다.


*수행 5위(修行五位)---수행5위란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수도 5위(修道5位), 수행위차(修行位次), 수행계위(修行階位), 수행계차(修行階次)라고도 한다.

   수행의 목적은 8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識)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된 허망한 인식인 망식(妄識) 을 대승적인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유식사상의 수행론이다. 수행 5위에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가 있다.


*수행위차(修行位次)---수행을 하려면 어떤 과정을 밟아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위차이다. 실수(實修)하는 수행자로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위차를 모르면 헤매게 되거나 아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증상만(增上慢)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위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번쇄하게 논의가 많았다. 

   밀교에서는 십지(十地)를 말했고, 유가(瑜伽)에서는 십칠지(十七地)를 말했으며, 성문승(聲聞乘) ? 연각승(緣覺乘)도 나름대로 십지(十地)를 말했다. 보살승도 역시 화엄경에서 십지(十地)를 말했으며, 그와 동시에 오십오위(五十五位), 오십일위(五十一位), 오십육위(五十六位)… 등의 여러 가지 수행론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타(金陀, 1898-1948)스님은 이런 성문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나 오십육위나 그런 여러 가지 위차를 대비하고 회통(會通)해 해탈십육위(解脫十六位) 하나의 체계를 세?다.

 

*숙명통(宿命通)---불교에서 말하는 신통(神通)이란 수행으로 얻어지는 초인적 능력을 말하는데, 숙명통은 신통의 하나로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전생을 두루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숙업(宿業)---지난 세상에서 지은 여러 가지 선악의 업. 오래전부터 이루고자 했던 사업.


*숙작인론(宿作因論)---과거의 어떤 원인이 숙명적으로 현재의 세계뿐 아니라 미래의 세계까지도 결정짓고 있다는 운명론적주장이다.

   부처님 당시 외도의 주장인데, 운명론 내지는 숙명론과도 유사하며, 전생에 지은 업력에 의해 내세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즉 모든 것을 운명론적으로 보고 현실 또한 이미 결정돼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리기 때문에 현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사상이다.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운명을 개척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적인 근거도 희박하다.


*순결택분(順決擇分)---결택은 결단하고 가려서 사유한다는 뜻.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모든 의심을 끊고 사제(四諦)를 사유하는 성자의 경지로 나아가는 난법(煖法) ? 정법(頂法) ? 인법(忍法) ?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를 말함.---→순해탈분(順解脫分) 참조.


*순경(順境)---역경(逆境)의 반대말, 순탄한 생활을 말한다. 편안하고 안락한 경계 또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에 의해 탐욕의 번뇌가 생기게 됨을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순경(順境)의 미덕은 절도(節度)이고, 역경의 미덕은 인내(忍耐)이다.’라 했다. - 베이컨의 말이다.


*순도(順道)---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보낸 사자를 따라와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 이것이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한 최초의 공식기록이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으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肖門寺, 혹은 성문사/省文寺라고도 함)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했다. 순도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중국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순해탈분(順解脫分)---분(分)은 원인을 뜻함. 해탈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계위, 해탈에 수순하는 단계란 말이다. 구사론에서는 삼현(三賢-현자의 세 단계)를 말하고, 유식설에서는 자량위(資糧位)를 일컫는다.

   여기서 삼현이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로 나아가는 오정심관(五停心觀) ? 별상염주(別相念住) ? 총상염주(總相念住)을 말하는데, 유식학에서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등 삼십심을 삼현위 혹은 내범부위(外凡夫位)라 한다. 이러한 삼현위는 지전보살(地前菩薩)의 단계이다. 보살 수행 5위 중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면 지전보살이라 하며, 현자라 하고, 통달위부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사유로 말미암아 마음이 해탈의 방향으로 굳어진 단계로서 이러한 삼현위는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든 존재의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을 전체적으로 관찰 수행함으로써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해 열반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 또는 외범위(外凡位-깨달음 밖의 단계)이라 한다.


*숫타니파타(Suttanipata, 經集)---→수타니파타(Suttanipata) 참조.


*승(乘, 산스크리트어 y?na)---승이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하고, 비유로서 가르침 혹은 수행도(修行道)를 가리킨다.

   승(乘)은 수레, 탈 것을 말하는데, 법수레를 뜻한다. 비유적인 의미로는 중생을 태우고 깨달음의 저 언덕(깨달음)으로 실어 나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미혹에 빠져 있는 이 삶에서 깨달음의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교법(敎法)을 가리킨다. 헌데 승(乘)은 행한다는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스스로 닦는 것이지 말을 주고받는 알음알이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승가물(僧伽物)---승가물에는 스님들이 함께 쓰는 교단의 공유물, 예를 들면 그 절의 방사(坊舍 - 승려가 거처하는 방), 전답 등 사방승물(四方僧物 - 모든 수행승들이 함께 사용하는 승단의 공유물)이 있고, 현재 스님들이 시주로부터 보시 받아 사사로이 쓰는 현전승물(現前僧物 - 수행승의 개인 소유물)이 있다. 다시 말해 사찰 재산은 사방승물과 현전승물로 나눠져 있다.


*승가바라(僧伽婆羅, Samghap?la, 479~524)---부남국(扶南國-캄보디아) 출신. 중양(衆養)이라고도 한다. 양(梁) 나라 때 바닷길로 중국에 들어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abhadra)의 제자가 돼 역경에 종사했다. <대승십법경(大乘十法經)>,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해탈도론(解脫道論)> 등을 비롯해 총 11부 38권을 번역했다.


*승가제바(僧伽提婆 : Samghadeva)---한역해서 중천(衆天), 혹은 제화(提和)라고 한다. 본래의 성(姓)은 구담씨(瞿曇氏)로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그는 AD 4세기 중반 전진(前秦)왕 부견(符堅) 시대에 장안에 와서 포교에 종사했고, 동진(東晋)시대까지 활약해서 대념처경(大念處經), <옥야경(玉耶經)> 등을 번역했다.

    ※계빈국(?賓國)---펀자브(Punjab) 북쪽, 카불(Kabul) 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


*승만부인(勝?夫人)---승만은 산스크리트 명 슈리 말라(Srimala)를 음역한 말로 슈리(Sri)는 ‘아름다운’ 혹은 ‘행복한’이라는 뜻의 여성 명사이며, 말라(mala)는 ‘꽃다발’이라는 뜻이다. 굳이 해석한다면 ‘아름다운 꽃다발’이라 할까.

   이 슈리말라의 아버지는 중인도 사위국(코살라국)의 파사닉(波斯匿, 프라세나지트)왕이며, 어머니는 말리(末利 Malika) 왕비이다. 그녀는 성장해서 아요디야(Ayodhya 阿諭陀)국의 우칭왕(友稱王)에게 시집을 가서 왕비가 됐다. 그래서 왕비를 뜻하는 데비(devi)라는 말이 붙어, 슈리말라 데비(Srimala devi)라 했으며, 독실한 불도로서 승만경(勝?經)의 주인공이다.


*승만경(勝?經)---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여래장(如來藏)사상과 일승(一乘)사상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경전. 따라서 <여래장경(如來藏經)>,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과 더불어 여래장 삼부경이라 불린다. 그리고 <유마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재가득도(在家得道)의 신앙을 표방하는 경전으로서도 중요하다. 경의 구성은 사위국(舍衛國, 코살라국)의 파사닉(波斯匿, Pasenadi)왕의 딸로서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우칭(友稱)왕과 결혼한 승만부인이 부처 앞에서 설주(說主)가 돼 설법을 펴고, 부처님이 승만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인가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승의근(勝義根)---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각 기관이 대상을 감각하는 작용. 마음을 일으켜 바깥 대경(對境)을 감각하며 내계(內界)에 식(識)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감각 작용을 도우는 그 기관들은 부진근(扶塵根)이라 한다.---→부진근(扶塵根) 참조.


*승조(僧肇, 384~414)---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고, 그가 남긴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줬으며, 그 속의 <부진공론(不眞空論)>을 통해 격의불교를 비판함으로써 후세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여러 서적을 접했던 승조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여러 종파들이 불교 사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해 빼어난 저술들을 내놓음으로써 중국불교를 한 단계 뛰어오르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무고로 인해 사형을 받게 됐으나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태연자약했으며, 간수에게 청해 7일 동안의 형 집행 연기를 얻어 옥중에서 저술한 책이 <보장론(寶藏論)>이다. 그리고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다음의 게송을 남기고 죽었다.---→부진공론(不眞空論) 참조.


     “사대(四大)란 원래 주인이 없으며

      이 몸과 마음도 본래 공(空)한 것이니

      시퍼런 칼날로 이 목을 치는 것도

      불어오는 봄바람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네!”


*승찬(僧璨, ?~606)---생몰연대가 정확치 않으나, 서기 606년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 선종(禪宗)의 제2대 조사(祖師) 혜가(慧可, 486?~593?)의 제자로서 선종 제3대 조사이다. 그는 나병환자였으며, 당시로서는 평생 고치지 못할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믿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禪)의 요체를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詩文)으로 풀이한 <신심명(信心銘)>을 남겼다.---→신심명(信心銘) 참조.


*시계천(施戒天)의 가르침---부처님께서 재가 불자에게 시계천(施戒天)이라고 해서 널리 베풀고[보시], 계율을 잘 지키면[持戒] 살아서 행복하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셨다.

   시계천의 가르침이란 사성제와 8정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초보자격인 재가자에게 예비법문격으로 부처님이 제시한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두 가지 실천법을 일컫는다. 


*시무외인(施無畏印)---무외(無畏) 곧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베풀어 주는 수인(手印).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보호해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없애 줘서,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켜 주는, 대자대비의 덕을 보이는 수인이다. 오른팔을 꺾어 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보인 손의 모습이다. 가장 보편적인 수인 중의 하나로서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보통 여원인을 함께 행한다.   

     ※여원인(與願印)---왼손을 밑으로 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모습이다. 중생의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수인이다.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을 상징하는 시무외인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여원인을 합한 것이다. 일명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    


*시설(施設, prajnapti)---→방편시설(方便施設) 참조.


*시심마(是甚?)---“시심마오~?”라는 화두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 “이 뭣고~?” 화두이다. 즉, 중국인들이 한역 할 때 “시심마~?”라 했고, 그것을 우리말로 “이 뭣고~?”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 또는 그 다그침의 경상도식 사투리이다. 경상도 사투리가 말을 짧게 줄이는 특성이 있다.

   “시심마” 즉 “이 뭣고”란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서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이 마음가짐을 관찰하는 것으로 행하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멈춘 가운데[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나를 움직이는 마음의 주인공, <이 놈이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헌데 “이 뭣고?” 화두는 의심해가는 독립된 화두이면서 천칠백 가지의 화두를 모아놓은 총칙의 화두이자 그 외의 모든 화두의 화두 드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화두의 왕이라 할 수 있다.

     ※예,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시심마(父母未生前本來面目 是甚?)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본래면목이 ?고?[어떤 것이 ‘참나’이던고?].---→‘이 뭣고’ 참조


*시심시불(是心是佛)---마음 밖에 따로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 사람은 온갖 번뇌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러워져 있으나 본마음은 불성(佛性)으로서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는 말. 즉심즉불(卽心卽佛), 시심즉불(是心卽佛), 즉심시불(卽心是佛)이 다 같은 의미이다.---→즉심시불(卽心是佛) 참조.


*시아본사(是我本師)---나의 근본이 되는 스승. 나의 본래 스승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불성의 존재요 그것(연기)을 깨달은 존재이며,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이끌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시아본사라 한다.

 

*시왕(十王)---염라대왕(閻羅大王)을 비롯해 지옥의 중생을 다스리는 열 명의 왕이다.


*시절인연(時節因緣)---굳이 애쓰지 않아도 혹은 꼭 피하려고 해도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전에 만날 요인을 품고 있다가 시간적 공간적 연이 닿으면 만나게 된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시크교(Sikh敎)---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힌두교의 한 파. 15세기 말경에 나나크(Nanak)가 시작한 것으로, 힌두교의 개혁을 꾀하고 우상숭배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며, 창조신에 대해 열광적으로 숭배한다. 19세기 중엽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영국에 저항해서 ‘시크 전쟁’을 일으켰다.


*식(識, vijnana-skandha)---식은 알다, 인식하다, 요별하다는 의미이며, 넓은 의미로는 대상을 감각, 지각, 사고하는 마음의 활동 일반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을 마음이라 일컫기도 한다. 단 불교의 식(識)은 서양과학의 의식(意識)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6식(六識) 참조.


*식상(識想)---마음속에 형성된 어떤 개념.

     ※용례-아무리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한갓 식상(識想)만 해치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은 식이 무변하다는 주관적인 식상(識想)마저 버리고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관찰하며 머무는 선정이다.


*식차마나(式叉摩那, 式次摩那)---팔리어 sikkha m?n?의 음사. 정학녀(正學女) ? 학법녀(學法女)라고 번역. 비구니가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에 2년 동안 육법(六法)을 지키며 수행하는 여자 출가자. 즉, 사미니와 비구니 사이의 단계에 있는 여승을 이르는 말임. 사미니로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는 여승은 18세가 되면 자연히 식차마나가 된다. 육법을 지킨다고 해서 육법니(六法尼)라고도 한다.---→육법(六法) 참조.


*신견(身見)---오견(五見)의 하나.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곧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하고 내가 실로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오온(五蘊)이 인연화합해서 이루어진 ‘나’를 영원한 존재로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즉,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가 무상전변(無常轉變-언제나 변천하는 것)하는 것인데, 상주불멸(常住不滅-조금도 변치 않음)한다는 자기 생각에 구애돼 자신의 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그릇된 생각이다.----→견혹(見惑) 참조.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신묘장구(神妙章句)는 한자의 뜻 그대로 신통하고 묘한 글이라는 뜻이며, 대다라니(大陀羅尼)는 구절이 긴 다라니라는 뜻이다. ‘다라니’는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외야 한다. 자체에 무궁한 뜻이 있어 이를 외는 사람은 한없는 기억력을 얻고, 모든 재액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공덕을 받는다고 한다.

   굳이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내용을 한글로 간략히 풀어보면, 삼보(불,법,승)와 거룩한 관세음보살님, 그 외에 보살님과 대보살님, 그리고 대자대비하신 분에게 귀의하오며 찬탄한다는 내용이다.

   천개의 손과 눈을 가지신 관세음보살이 넓고 크고 걸림이 없는 대자대비심을 담은 큰 다라니를 설법하신 경으로 대비주(大悲呪), 천수주(千手呪)라고도 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천수경 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다라니인데, 반야심경 마지막에 다라니(진언)가 등장하지만, 천수경에는 다라니가 한가운데에 등장한다.


*신수(大通神秀: 606?~706)---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으로 혜능(慧能)과 더불어 제5조 홍인(弘忍)의 제자이다. 혜능계의 남종선(南宗禪)에 비해 북종선(北宗禪)이라 일컬어진다. 측천무후(則天武后) 및 중종(中宗)의 부름을 받아 국사(國師)가 돼 왕공귀족들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으며, 입적 후 황실로부터 대통선사(大通禪師)로 추존됐다. 점오(漸悟 = 점수돈오/漸修頓悟)를 강조해 북종선을 점수선(漸修禪)이라고 정의한다.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일본에서 대정 연간(1912∼1925)에 간행된 활자판 대장경.---→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참조.


*신심명(信心銘)---중국 수나라 때에, 선종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瓚)이 지은 글. 당시로서는 평생 고치지 못할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믿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 후학들을 위해 신심명(信心銘)을 찬술했고, 이 글 한 편에 의해 승찬은 불가(佛家)의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됐다.

   신심명은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고, 내용은 4언 146구 584자의 운문체로, 지적인 분별의식을 배척하고 선(禪)의 무분별적 세계를 간단명료하게 풀은 선시(禪詩)다. 장편의 시(詩)와 같은 운치를 풍기면서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음의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장경에서 설해놓은 불법의 심오한 이치를 간결한 언어로 함축해 그 대의를 극명하게 밝혀 놓았다. 간결한 문체와 응축된 내용으로 일체의 군더더기 말을 배제함으로써 선문(禪門)의 필독서로 여겨져 왔다. ---→승찬(僧璨) 참조.


*신아(神我)---신본주의에 빠져 있는 나(기독교 신자처럼)를 일컬음.


*신인종(神印宗)---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 명랑(明朗)을 종조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 밀교 계통의 종파로 고려 초에 종파가 성립됐다. 고려시대의 불교 종파는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이 종파만은 순수하게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신중단(神衆壇)---불법을 수호하는 신중(神衆 = 聖衆 = 衆聖)을 모신 단. 신장단(神將壇), 중단(中壇)이라고도 한다. 주로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예컨대 팔대금강신장, 제석천, 사왕천, 대범천,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등이 불법을 옹호하는 유명한 신중이다.


*신해수증(信解修證)---‘신해수증’은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지켜야 할 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 신(信)은 부처님의 법을 즐거이 믿는 것이고,

     ? 해(解)는 부처님의 법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

     ? 수(修)는 그 법을 삶 속에서 바로 실천 수행하는 것이고,

     ? 증(證)은 실천수행을 통해 마지막에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유가록(瑜伽錄)에 이르기를, “반야를 아깝게 여겨서 계율을 굳게 지키는 것을 신(信)이라 하고, 반야를 널리 물어서 절조(節條, 조목조목)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해(解)라 하는데, 신만 있고 해가 없으면 무명(無明)만 더해가고, 해만 있고 신이 없으면 사견(邪見)만 더해진다. 이는 공부에 큰 병이니, 신과 해가 구족해야만 바야흐로 수행의 기본이 된다. 그리고서 반야를 관조(觀照)해 시후(時候, 절기)를 잃지 않는 것을 수(修)라고 하는데, 무위(無爲)를 당해서는 무위를 하고 유위(有爲)를 당해서는 유위를 해야만 이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그리고서 반야를 배양(培養)해서 마니주(摩尼珠, 여의주와 같은 말)를 결성(結成, 맺어서 이룩하는 것)하는 것을 증(證)이라고 하는데, 증과(證果)를 구하는 자는 먼저 참되고 변함없는 현묘(玄妙)한 마음을 보리의 인(因, 씨앗)으로 삼아 때가 오면 그때마다 단련해서 쌓고 쌓아야만 바야흐로 참되고 변함없는 묘과(妙果)를 얻을 것이다.”라고 했고, 또 이르기를,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선정을 고르게 익혀서 혼침(昏沈)하고 산란(散亂)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해 적적(寂寂, 고요하고 고료함)하고 성성(惺惺, 또렷또렷함)하게 되거든 곧 반관내조(返觀內照, 돌이켜 안을 비추어 관찰함)해서 법대로 수련해 증득하라”고 했으니 우리들은 정성껏 가슴에 새겨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해행증(信解行證)---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과정을 넷으로 나누어 신 ? 해 ? 행 ? 증(信解行證)이라 한다.

     ? 신(信) - 진리가 있음을 믿어서 의심하지 말 것.

     ? 해(解) -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 내용을 알려고 노력할 것.

     ? 행(行) - 안 것을 삶 속에 실천할 것.

     ? 증(證) - 알아 얻은 것을 결정을 받아 다시는 없어지지 않게 할 것.


*신해탈(信解脫)---해탈의 길에는 신해탈(信解脫), 심해탈(心解脫; 정에 의한 것), 혜해탈(慧解脫)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신해탈이란 신앙심에 의한 해탈을 말한다. 믿음을 깊게 하고 믿음의 힘을 강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자재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마음을 정화하는 힘을 지닌다. 믿음을 깊게 하면 그것은 자연히 지혜로 변해 간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믿음은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이어져 변화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 그것에 따라 수행해서 수도(修道)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신해탈이라 한다.

   그리고 신해탈은 ‘의(疑)의 극복’이 그 중심에 있다. 의(疑)란 올바른 불법진리(佛法眞理), 혹은 법을 설하는 불타, 여래에 대한 의심이다. 그런 의문이나 의심을 극복해야 신해탈을 추구할 수 있다. 


*신행(身行, k?yasa?kh?ra)---신행(身行)이란 신업(身業)을 말하며, 몸의 의도적 행위. 몸으로 행하는 선악(善惡)의 업을 말한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이 있다.

 

*신행(信行)과 신앙---신앙이라는 말에는 ‘절대자에 무조건 복종 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풍긴다. 따라서 불교의 경우에는 제한적으로 쓰는데, ‘신심(信心)으로 귀의(歸依)한다’는 뜻으로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신행(信行)이란 자기 스스로 승가에 귀의해 좀 더 광범위하게 불보살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일인데, 불경을 공부하고, 불공, 참선, 염불, 기도, 간경, 참회 등을 행하며, 계율을 지키는 등의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실상(實相)---실상은 법의 진실한 모습, 본래 성품의 진실한 모양,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체성, 진리의 참모양이라는 말이고, 공(空)과 같으며, 무상(無相)이다. ‘존재의 본질’ 혹은 ‘존재의 본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말이다. 진실 자체의 모습이라는 기본적 의미로부터 평등의 실재, 불변의 이치를 뜻하며, 모든 존재의 이치가 되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존재 자체의 성질이므로 법성(法性)이라 하고, 그 자체는 진실하고 상주하므로 진여(眞如)라고 하며, 그렇게 진실하고 상주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진짜 모습이므로 실상이라 한다. 


*실상반야(實相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와 더불어 3반야의 하나. 실상반야는 제법의 실상 그 자체를 말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한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 세계, 우주와 하나가 될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우리가 흔히 일체의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고, 법신 부처님이 두루 편만(遍滿)해 계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은 실상반야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법의 실상, 무상, 공적이 내는 지혜로 본래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대립이나 차별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직관하는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 참조.


*실상법(實相法)---실상(實相)은 법의 진실한 모습, 본래 성품의 진실한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즉, 실상은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체성, 진리의 참모양이라는 말이고, 공(空)과 같으며, 무상(無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내가 인식한 세상과 물리적으로 본래 있는 세상이 조금도 다르거나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의 세상이다. 욕심에 의해 대상(사물)을 왜곡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맞이하고 걸림 없이 살자는 것이다. 세상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좁은 소견으로 실상을 왜곡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실상인(實相印)---참된 불법임을 증명하는 인(印), 또는 표치(標幟).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이에 대해 설하는 것이 불교의 특징이므로 인(印)이라 한다. 소승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을 이르고 대승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를 이른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소승경에서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涅槃)의 삼법인이 있어서 이를 찍으면 이것은 불법이고, 이를 닦으면 도를 얻으나 삼법인이 없으면 마구니설이라고 한다”고 했다. 헌데 대승경에는 단지 일법인(一法印)만 있으니,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인데 이것이 요의경(了義經)이다. 따라서 대승에선 실상인(實相印)이 없으면 그것은 마구니설이다.

     ※요의경(了義經)---진실하고 극진한 뜻을 분명하게 말한 경전이란 뜻.


*실지(實智)---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밝게 아는 지혜. 모든 분별이 끊어진 진실한 지혜. 모든 법계가 공적(空寂)임을 깨닫는 참된 지혜. 분별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 ---→공적(空寂) 참조.


*실차난타(實叉難陀, 산스크리트 명 시크샤난다/?ik??nanda, 652~710)---당(唐) 나라 시대의 인도 출신 역경승.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신역(新譯) 화엄경(80권)> 등을 한역했고, 그가 한역한 화엄경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서문을 썼다.


*심상(心相)과 심의식(心意識)---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을 심성과 심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성은 모습이 없어 이름을 칭하기가 어렵지만 방편으로 진여 또는 불성 및 공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 진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心相)이라고 한다. 심성은 진제(眞諦)로서 평등하여 차별이 없지만 심상은 속제(俗諦)로서 차별이 있으며 차별의 마음을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상의 체성을 팔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팔식(八識)설이다. 이는 심의식(心意識)을 분류한 것으로서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심체로 나누어 설명한다.


*심상사성(心想事成)---마음이 절실하면 이뤄진다,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원효대사가 한 말. 원효는 어제 저녁에 마신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깨달아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 간파했다.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오직 내 마음 이외 어디에 진리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유학을 그만두고 되돌아와서 무애행(無碍行)으로 불교 포교에 전념했다.


*심소(心所,  팔리어 cetasika)---마음의 작용 혹은 심리작용을 심소라고 한다.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었다’, 이 표현에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음을 심(心)이라고 하고, 그 마음의 작용을 심소(心所)라고 한다. 심소는 심왕에 종속된다.---→심왕(心王) 참조.


*심식(心識, 산스크리트어 citta-vijinana)---초기불교에서 죽음은 심식(心識)이 육신의 옷을 벗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초기의 불전에서 영혼이나 넋이 심식이란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파불교시대의 소승불교에서는 심(心)과 식(識)을 동체이명(同體異名)이라 했고,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심과 식을 따로 나누어 제8식을 심, 전5식과 제6식은 식이라 했다.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에 해당하는 마음속의 인식작용, 즉 마음작용을 심식(心識)이라 했다.

   그리하여 유식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이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 창조되며 이 심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유정(有情)이 지니고 있는 여덟 가지 심식(心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 이러한 8식을 심식이라고 한다.

   심식은 인식주(認識主)로서 어떤 대상의 내용과 모습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식은 요별(了別)과 분별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한다. 만약 심식(心識)이 적멸해서 털끝만치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곳이 없다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고 부른다.

 

*심왕(心王, 팔리어 citta)---대상의 전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즉 마음의 체성을 흔히 심왕(心王)이라고 하며, 육식(六識) 또는 팔식(八識)으로 분류한다. 아래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관계를 살펴보자.

     ※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관계---심왕에서 심소의 작용이 일어난다. 심왕은 언제나 마음의 작용을 있게 하는 장의 흐름이며, 심소는 그 가운데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심소를 통해서 ‘현행하는 윤회를 여실히 보는 것’이다. 관계(심왕)는 작용(심소)을 통해서 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관계를 안식(眼識)을 예로 들어 보자. 눈[眼]과 색[色]은 별개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눈이 없으면 색이 없고, 색이 없으면 눈도 없다. 그러나 눈과 색은 다르다. 이 다른 두 가지가 만나서 만드는 새로운 장(場)이 안식(眼識)이며, 곧 심왕이다. 만나면 그 장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심리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심소이다. 관계[심왕]는 있지만 작용[심소]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심왕이 중심이 된다. 심리현상은 심왕의 장이 소유하므로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하며, 줄여서 심소라고 한다.

   우리는 심리현상의 분별만을 따지며 살아왔기 때문에 만남의 장인 심왕에 대해서는 생소하다. 그러나 6근(六根)과 6경(六境)은 함께 만남의 장인 식(識 ; 心所)을 이루고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는 관계의 장이 있어야만 그 가운데에서 심리현상(심소)이 일어난다. 정신작용의 본체인 심왕(心王)에 종속된 심소(心所)가 욕망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심왕명(心王銘)---중국 양(梁)~진(陳)시대의 승려인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저술. 부대사는 쌍림대사(雙林大師), 동양거사(東陽居士)라고도 하는데, 16세에 혼인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24세에 서역(西域)의 승려 숭두타(嵩頭陀)에게 감화돼 은거해 숨어 살며 수행했으며,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와 재가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심왕명(心王銘)>은 짧은 시구 속에 불교의 진수를 잘 표현한 노래로서, 3조 승찬(僧瓚)의 <신심명(信心銘)>과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게송이다.

   <심왕명(心王銘)>은 “텅 비어있는 마음의 왕을 관조해보면, 현묘해서 헤아리기 힘들도다(觀心空王 玄妙難測).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위대한 신통력을 지니고 있도다(無形無相 有大神力).”로 시작되는데, ‘참나’를 심왕(마음의 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마음은 만물의 왕이며 삼라만상의 왕이라는 말을 빌어서, 일심법(一心法)의 내용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 가 곧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바로 이 마음이다(卽心卽佛 卽佛卽心 是心是佛 是佛是心).”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佛像)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대명사로서 ‘네 마음속에’ 또는 ‘네 마음 그 자체가 진리이며, 동시에 그 마음이 진리임을 깨달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명(銘)이란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에 깊이 새겨둔다’는 뜻으로 명(銘) 체로 돼 있는 글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불교의 전적(典籍) 가운데 ‘명(銘)’자를 붙인 글은 부(傅)대사의 심왕명(心王銘)을 비롯해 3조 승찬(僧瓚)의 <신심명(信心銘)> 등이 있다.---→부대사(傅大士) 참조.


*심우도(尋牛圖)---수행자가 정진 수행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 전체 과정이 10단계로 구분돼 있기 때문에 십우도라고도 한다.


*심의식(心意識)---초기 불교에서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동의어로서 인식 주관 또는 인식 작용을 뜻했다. 그러나 유식설에서 심의식은 심(心) ? 의(意) ? 식(識)의 세 낱말을 합친 복합어로 이해한다. 즉,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의(意)는 말나식(末那識), 식(識)은 육식(六識)을 뜻한다.


*심인법(心印法)---심인이란 마음의 본바탕, 즉 불심(佛心) 자성(自性)을 의미하며, 선종(禪宗)에서는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의 본체를 전할 때 심인(心印)을 전한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심인법이 내려오는 원동력이라 옛날에는 의발이요 이제는 심인법(心印法)이라, 옛날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을 전할 때 스승의 의발을 제자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런 풍습이 없어지면서 이젠 심인을 전한다는 말이다.

   진제 조계종 종정스님은 “우리 모든 사부대중은, 한 가닥 밝은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이 단절되지 않고 천추만대에 면면히 이어지도록 바르게 참선법을 익혀 정진에 정진을 더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설하며 수행정진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심지법문(心地法門)---심지법문이란 마음을 여는 법문. 마음에 관한 법문을 말한다. 세상의 중심은 마음이다.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神)보다도 그 누구의 말보다도 마음에서 나온 진리가 가장 위대하다. 사람의 마음은 만고의 기준이다.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 신해탈(信解脫)이 있다. 심해탈은 마음을 통한 해탈이다. 선정(禪定)으로 탐욕을 소멸시켜 그 속박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즉 구체적으로는 마음의 집중(삼매)를 통한 해탈이란 의미이니, 탐욕을 끊은 결과로 애욕을 여의고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자유경(自由境)에 노닐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을 통해 육근이 ‘나’가 아니라고 지적(知的)으로 해탈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그것에 대한 집착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직관(혜해탈)했다 하면, 그 다음에는 그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집착심을 없애야 된다. 무엇으로 집착심을 없애느냐, 바로 삼매, 즉 바른 선정(禪定)을 통해서 없애야 한다. 바른 선정을 통해서 집착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면 그 때의 상태가 심해탈(心解脫)이다.---→혜해탈(慧解脫), 신해탈(信解脫) 참조.


*10계(十戒)---십계(十戒)에는 사미(沙彌) ? 사미니(沙彌尼)가 지켜야 할 10계, 보살이 지니는 10정계(淨戒), 보살(菩薩)이 중생에게 지키게 하는 10계, 천태종(天台宗)의 10계, 10선계(善戒),

10중금계(重禁戒) 등이 있다.

   이 중 소승에서 설하는 사미 ? 사미니의 십계는 ① 살생하지 말라, ② 훔치지 말라, ③ 음행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술 마시지 말라, ⑥ 향수나 꽃다발로 바르거나 치장하지 말라, ⑦ 노래와 춤을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 ⑧ 사치스럽고 화려한 자리에 앉거나 눕지 말라, ⑨ 때 아닌 식사를 하지 말라, ⑩ 금이나 은 등의 보물을 받거나 비축하지 말라.

   그리고 속인이 지켜야 할 십계는 소승과 대승이 함께 설하는 십선계(十善戒)가 있다.---→10선계 참조. 


*십계(十界)---십법계(十法界)라고도 하는데, 지옥계 ? 아귀계 ? 축생계 ? 아수라계 ? 인간계 ? 천상계 ? 성문계 ? 연각계 ? 보살계 ? 불계를 말한다. 이 중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계, 천상을 한데 모아 ‘육도(六道)’, 성문, 연각, 보살, 불계를 한데 모아 ‘사성(四聖)’이라고 한다. 따라서 십계를 '육범사성(六凡四聖)'이라 칭하기도 한다.


*10력(十力)---부처님께서 일체를 요지(了知)하는 열 가지의 십력(心力).

    1)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혜의 힘

    2)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업인(業因)과 이숙과보(異熟果報)의 관계를 다 안다는 것이니, 즉 부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얻은 업의 과보에 대해 그 이유 원인을 다 안다는 것이다.

    3) 4선. 8해탈. 3삼매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4) 중생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5) 중생의 성류(性類)가 각기 다르므로 그들이 주하는 세간도 각기 다르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 아신다.

    6) 중생의 의락(意樂)에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나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7) 중생의 근기란 제각기 달라 수없는 상하 우열의 계층이 있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 아는 힘.

    8) 중생의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9) 초인간적인 천안(天眼)으로 중생의 나고 죽음을 보고 천함과 고귀함. 행과 불행들을 다 각각 그 업에 따라 다 아는 지혜의 힘.

    10) 일체의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부처님은 중생의 갖가지 번뇌, 성향, 수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지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에게는 이렇게 십력(十力)이 있으므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원효 사상의 집약서이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요 내용을 미루어보면, 백가(百家)의 이론(異論)을 모아서 십문(十門)으로 분류해 난점(難點)을 들어 판결하고, 이점(異點)을 모아 정리해 화회(和會)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를 건설하고자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십바라밀(十波羅蜜)---육바라밀에 아래와 같은 바라밀을 더한 것이다.---→육바라밀 참조.

      ? 방편바라밀(方便波羅密) -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방편과 수단을 이용해, 혹은 여러 형상을 나타내어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일.---→방편바라밀(方便婆羅蜜) 참조.

      ? 원바라밀(願波羅密) - 원(願)이란 욕망이 아니라 공에 바탕 한 이타적 중생구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요 순수의지이다. 보살은 중생구제를 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원바라밀을 실현해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원바라밀(願波羅蜜) 참조.

      ? 역바라밀(力波羅密) - 잡념이나 망상에 휘말리지 않고 악마(惡魔)의 유혹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다. 그래서 원력(願力)이라고도 한다.---→역바라밀(力波羅密) 참조.

      ? 지바라밀(智波羅密) - 여기서 지(智)란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의 지혜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보살이 여러 바라밀을 실행함에 있어서 여러 지식들을 지혜의 힘으로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바라밀(智波羅密) 참조.

·       

*십법계(十法界)---→십계(十界) 참조.


*10사(十使)---5둔사(五鈍使)와 5리사(五利使)를 합쳐 10사라 한다. 여기서 ‘사(使)’는 번뇌란 뜻이다. 그리하여 근본번뇌에는 탐(貪), 진(瞋), 치(癡), 만(慢:거만), 의(疑), 견(見:삿된 소견)의 6번뇌가 있고, 이 중 견(見)을 다시 5견으로 나눈다.---→오견(五見), 오둔사(五鈍使), 견혹(見惑) 참조.

 

*14무기(十四無記)---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대표적인 것이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즉,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 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붓다는 답변을 않고 침묵했다. '무기(無記, 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붓다가 이렇게 답변을 삼가 한 이유는 불교가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됐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권 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 일(一)과 이(異), 자작(自作)과 타작(他作)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전유경(箭?經>에는 붓다의 실천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들어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14무기에 대해서,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14무기의 질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열반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때문에 자신은 항상 사성제를 가르치고 말할 뿐 14무기에 대해서는 가르치거나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무기(無記) 참조.


*십선계(十善戒)---십선계란 선한 결과를 초래할 인간의 주요한 행위, 즉 신체적 활동에 관한 것 3종, 언어의 표현에 관한 것 4종, 마음의 동기에 관한 것 3종으로 분류해 일상적인 실천덕목으로 삼은 것이다. 십선업도(十善業道)라고도 불린다. 보살계라고 하는 대승계의 대표적인 계율이다. ①살생하지 말라. ②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③잘못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거짓을 말하지 말라. ⑤이간질을 하지 말라. ⑥사나운 말을 하지 말라. ⑦실없고 잡된 말을 하지 말라. ⑧아끼어 탐내는 마음을 지니지 말라. ⑨성내거나 원한된 마음을 지니지 말라. ⑩잘못된 소견을 버려라.---→10계 참조.


*십송률(十誦律)---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율장(律藏). 후진(後秦=姚秦)에서 5세기 초 구마라습, 불야다라(弗若多羅), 비마라차(卑魔羅叉), 담마류지(曇摩流支) 등이 번역. 61권으로 돼 있으며, 전체의 내용이 10송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이 일컬음.


*십승관법(十乘觀法)---천태종에서 말하는 10종의 관법(觀法)을 말한다. ‘승(乘)’이라는 것은 10법이 수행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실어 나르는 탈 것이라는 의미이다. 10종의 관법은 관불사의경(觀不思議境), 기자비심(起慈悲心) 등의 열 가지 방법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수행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는 아니고 수행자의 수준에 따라 상근기(上根機)는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을 닦는 것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으나 중근기(中根機)는 제6법까지 닦아야 하며, 하근기(下根機)는 제10법까지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법은 중국 수나라의 지의(智?)가 체계화시켰으며, 고려의 제관(諦觀)도 심도 있게 해설했다. 이 관법은 원교일승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갖추고 있으며, 초발심 수행자의 지침으로서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끈다고 한다.


*십신(十信)---보살이 처음 닦아야 할 열 가지 마음가짐. 십심(十心), 혹은 십신심(十信心)이라고도 한다.

     1) 신심(信心) -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위(位).

     2) 염심(念心) - 염지(念持)해서 잊는 일이 없는 위.

     3) 정진심(精進心) - 한결같이 선업(善業)을 닦는 위.

     4) 정심(定心) - 마음을 한곳에 정하고 수행하는 위.

     5) 혜심(慧心) - 제법이 일체공(一切空)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위.

     6) 계심(戒心) - 보살의 청정한 계율을 수지하고 실수를 범하지 않는 위.

     7) 회향심(回向心) - 몸에 닦은 선근(善根)을 보리?깨달음에 회향(回向)하는 위.

     8) 호법심(護法心) -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방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위.

     9) 사심(捨心) - 공리(空理)에 주(住)하여 집착이 없는 위.

     10) 원심(願心) - 여러 가지의 청정한 원(願)을 수행하는 위.


*십심(十心)---보살이 지녀야 할 열 가지 마음가짐.

     1) 대지등심(大地等心) - 모든 중생에게 온갖 청정한 일을 하도록 하는 대지와 같은 마음.

     2) 대해등심(大海等心) - 모든 부처의 한량없는 지혜를 지니는 바다와 같은 마음.

     3) 수미산왕등심(須彌山王等心) - 모든 중생을 위없는 청정한 일에 머물게 하는 수미산왕과 같은 마음.

     4) 마니보심(摩尼寶心) - 모든 번뇌를 떠나 마음이 청정하여 마니 보배와 같은 마음.

     5) 금강심(金剛心) - 모든 현상을 꿰뚫어 아는 금강과 같은 마음.

     6) 견고금강위산심(堅固金剛圍山心) - 마음이 견고해 모든 악마와 외도를 부수는 금강위산과 같은 마음.

     7) 연화등심(蓮華等心) - 온갖 속된 일에 물들지 않는 연화와 같은 마음.

     8) 우담발화등심(優曇鉢華等心) - 우담발화가 아주 희귀하듯, 오랜 세월에도 지니기 어려운 마음.

     9) 정일등심(淨日等心) -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맑은 햇빛과 같은 마음.

     10) 허공등심(虛空等心) - 모든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한 허공과 같은 마음.


*10업---10종류의 선행을 총칭한 십선업(十善業)을 일컫는다. 십악(十惡)의 반대말임. 십선도(十善道), 혹은 십선업도(十善業道)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몸, 입(언어), 마음의 3종으로 구분하고, 십선이라는 것은 신삼(身三), 구사(口四), 의삼(意三)의 악행(십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즉,

    ? 신체에서 ①살생(죽이는 것), ②유도(훔치는 것), ③사음(남녀의 관계의 부정)을 하지 않고,

    ? 말에서는 ④망언(거짓말을 하는 것), ⑤양설(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 ⑥악구(험담을 하는 것), ⑦기어(함부로 말하는 것)를 행하지 않으며,

    ? 의에서는 ⑧탐욕(탐하는 것), ⑨진에(화내는 것), ⑩사견(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의 각각을 행하지 않는 것인데, 이 십선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십선계라고 한다.---→10선계 참조.


*십여시(十如是)---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에 갖추어져 있는 열 가지 성질. 우주의 모든 형상이 열 가지 범주 안에 있다는 뜻. 즉, 모든 것이 10가지 category로 존재하고 생기한다는 것. 이는 천태종의 중요한 세계관으로 천태종의 모든 가르침이 시작되는 근원이기도 하다. <묘법연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말이다.

     1)여시상(如是相) - 존재 하는 모든 것은 존재 그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다.

     2)여시성(如是性) - 태어난 모든 것은 나름의 특성이 있다.

     3)여시체(如是體) - 생겨난 것은 모두 나름의 주체(본체)가 있다.

     4)여시력(如是力) - 존재 하는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쓰임세가 있다.

     5)여시작(如是作) - 양과 음이(+/-) 만나서 여러 가지 에너지를 만들고 작용한다.

     6)여시인(如是因) - 불과(佛果)를 성취하는데 직접적인 원인.

     7)여시연(如是緣) - 모든 행에 따르는 간접적 원인.

     8)여시과(如是果) - 모든 행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다.

     9)여시보(如是報) - 인, 연, 과에 의해 그 갚음을 받는 것.

     10)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 본말(本末)은 10여시 가운데 첫 번째인 여시상(如是相 : 형상, 모습)을 가리키고 말(末)은 10여시의 아홉 번째인 여시보(如是報 : 마지막 과보)를 가리킨다. 그리고 구경등(究竟等)은 구경 곧 마지막으로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실상이고 본체의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16관법(十六觀法)---십육관이라고도 한다. 관법이란 불교수행법의 기본으로서 관심(觀心)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나오는 말로서, 불교에서 극락왕생을 위해 극락세계를 관상(觀想)하는 관법이다. 즉, 석가모니가 마가다국의 빈비사라(頻毘娑羅)왕의 왕후 위제희 부인(韋提希夫人)에게 극락을 보여주고 그곳에 태어나는 방법을 가르칠 때 설한 것인데, 16관법이란 극락에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열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① 해를 생각하는 관[일상관(日想觀) - 지는 해를 보면서 극락정토를 관상하는 것,

    ② 물을 생각하는 관[수상관(水想觀)]- 극락의 대지(大地)가 넓고 평탄함을 물과 얼음에 비유하여 관상하는 것,

    ③ 땅을 생각하는 관[지상관(地想觀)]- 극락의 대지를 분명하게 관상하는 것,

    ④ 나무를 생각하는 관[보수관(寶樹觀)]- 극락에 있는 보배의 나무를 관상하는 것.

    이외에도 보지관(寶池觀), 보루관(寶樓觀), 화좌관(華座觀), 상관(像觀), 진신관(眞身觀), 관음관(觀音觀), 세지관(勢至觀), 보관(普觀), 잡상관(雜想觀), 상배관(上輩觀), 중배관(中輩觀), 하배관(下輩觀) 등의 16가지이다. 이러한 열여섯 가지 관을 관상할 때 정토에 나아가게 되고, 정토를 볼 수 있는 지혜가 싹트게 되며, 주변의 사물들도 정토의 일부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12분경(十二分經)---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내용이나 서술의 형식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12부경(部經), 십이분교(十二分敎), 십이분성교(十二分聖敎)라고도 한다. 이 분류법은 불경의 최초 편찬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① 수다라(修多羅) - 경(經). 계경(契經) ? 법본(法本)이라고도 하며, 산문체의 경전을 말함.

   ② 중송(重頌) - 응송(應頌)이라도 하며, 산문체의 경문 뒤에 그 내용을 운문으로 노래한 것.

   ③ 수기(授記) - 경의 말뜻을 문답식으로 해석하고, 제자들의 다음 세상에서 날 곳을 예언.

   ④ 게송(偈頌) - 고기송(孤起頌)이라고도 하며, 4언 ? 5언 ? 7언의 운문으로 구성된 것.

   ⑤ 무문자설(無問自說) - 아미타경 같이 남이 묻지 않는데도 붓다가 스스로 이야기한 말.

   ⑥ 인연(因綠) - 경전 중에서 붓다를 만나 법(法)을 들은 인연 등을 설한 것.

   ⑦ 비유(譬喩) - 경전 중에서 비유로써 은밀한 교리를 명백하게 풀이한 부분.

   ⑧ 본사(本事) - 붓다나 제자들의 지난 세상에서의 인연을 말한 부분.

   ⑨ 본생(本生, 자타카) - 붓다 자신의 지난 생에서의 보살행 (菩薩行)을 말한 부분.

   ⑩ 방광(方廣) - 방등(方等)이라고도 함. 광대한 진리를 말한 부분.

   ⑪ 미증유(未曾有) - 희유법(希有法)이라고도 함. 붓다가 보인 여러 가지 신통력을 말한 부분.

   ⑫ 논의(論議) - 교법(敎法)의 이치를 논하고 문답한 경문 등으로 돼 있다.


*12연기(十二緣起)---연기설(緣起說)을 12지분(支分)으로 정리한 것. 12인연이라고도 한다.

   ① 무명(無名, avidya)---무명은 ‘명(明)’이 없다, 즉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부처님의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미(迷)의 근본이 되는 무지로서 사물의 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잘못된 일념을 가리킨다. 이 무명 일념이 일체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고(苦)의 결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무명은 일체번뇌의 근본인 동시에 악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② 행(行, samskara)---무명이 있으면 이에 연해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행이란 육체적인 행동 뿐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거나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의도된 행위’를 일컫는다. 결국, 행은 인간의 근원적인 행위로서의 업(業, karma)을 말한다.

   ③식(識, vijnana)---행을 연해 식이 일어나는데, 식은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한다. 무명으로 인해 무아(無我)를 알지 못해 ‘나’라는 것을 세움으로 인해 ‘내가 아닌 가아(假我)’가 성립한다. 이때에 가아를 ‘나’로 인식하게 되는 주체가 식이다.

   ④ 명색(名色, nam-rupa)---식을 연해 명색이 있게 되는데, 명색의 산스크리트어 n?mar?pa에서, na-ma는 명(名), ru-pa는 색(色)을 말한다.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심식(心識)을 명이라 하고 물질적 존재인 육체를 색이라 한다. 즉, 명(名)은 비물질적인  정신(마음)을 가리키고, 색(色)은 물질적인 몸을 가리킨다. 따라서 명색은 몸과 마음을 함께 말함이다.

   ⑤ 육처(六處, sad-ayatana)---육입(六入) 혹은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며,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를 말한다.

   ⑥ 촉(燭, samsparsa)---육처에 의해서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燭) ? 법(法)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곧 시각 ? 청각 ? 후각 ? 미각 ? 촉각 ? 지각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은 육처 -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 - 로 인식하게 되면 반드시 촉(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으로 사물을 판단하게 된다. 촉이란 접촉을 말하는데, 눈으로 보는 것도 접촉으로 본다. 

   ⑦ 수(受, vedana)---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돼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苦(괴로움-싫다), 樂(즐거움-좋다), 不苦不樂(괴롭지도않고 즐겁지도 않음-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의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을 수라고 한다.

   ⑧애(愛, trsna)---수에 의해서 괴로움(싫음), 즐거움(좋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싫지도 좋지도 않음)의 3가지 감정 중에 어느 한가지의 감정이 발생하게 되면,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 세 가지 감정 중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만을 끝없는 갈증 같은 욕심으로 갈애(渴愛)하게 되고, 그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 대상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붓거나 추구한다. 그것을 애라고 한다. 여기서 애는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갈애)으로서의 사랑이다.             

   ⑨ 취(取, upadana)---애에 의해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어떤 일을 취하게 된다. 그것을 취라고 한다.

   ⑩유(有, bhava)---취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중생은 그 소유하는 작업을 하게 된 대상을 결국 자신이 소유하게 된다. 그것을 유라고 한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⑪ 생(生, jati)---유에 의해서 그것을 있다, 또는 된다 하는 것으로 소유하게 되면 그 사물이나 생각이 생성되는 것이다. 생이란 단어는 모든 존재의 출생, 태어남을 뜻한다.

   ⑫노사(老死, jara-marana)---생에 의해서 그 대상이 태어나게 되면 그대상이 무엇이라도 결국 닳아 없어지거나 사그라지거나 늙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노사라고 한다.


*12처(十二處)---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境)을 합해 12처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상 현상계의 모든 것이 이 12처에 포함된다고 본다.


*십주(十住)---보살이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 진리에 안주하는 단계라는 뜻으로 주(住)라고 한다.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용수(龍樹, AD 150∼250경)가 <화엄경>의 십주품을 해설한 불교서적.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십지(十地)를 해설한 것이다. 책 명칭의 십주는 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말한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이 5세기 초에 한역했다.


*십지(十地)---십지란 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말하는데,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가 있다. 화엄종의 10지와 천태종의 통교 10지는 약간 차이가 있어서, 화엄종의 10지는 보살의 완숙한 경지를 설명한 것이고, 천태종의 10지는 초발심(初發心)의 단계에서 부처의 지위까지를 10단계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통교(通敎) 10지(地), 화엄(華嚴) 10지(地) 참조.

 

*십지경(十地經)---<화엄경(華嚴經)> 중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수행(修行)하는 상태를 말한 십지품(十地品)을 말함. 십주경(十住經)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교종선(敎宗選)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됐던 중요한 경전이다.


*십지품(十地品)---<화엄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십지품은 <화엄경>의 중심사상이므로 1~2세기경 가장 빨리 성립됐다. 십지품은 십지의 제1환희지(歡喜地)에서 제10법운지(法雲地)까지 십지보살들의 수행 경지에 대한 설명이다.


*십팔계(十八界)---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境)을 합해 12처라 하는데, 이 12처(處)에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識)을 더한 것을 18계라 한다.


*십팔공(十八空)---불교에서 공(空)을 그 본체와 작용을 18가지로 분류 ? 관찰한 것.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3권 및 <대집경(大集經)> 제54권에 나오는 말이다.

   1) 내공(內空), 2) 외공(外空), 3) 내외공(內外空), 4) 공공(空空), 5) 대공(大空), 6)제일의공(第一義空), 7) 유위공(有爲空), 8) 무위공(無爲空), 9) 필경공(畢竟空), 10) 무시공(無始空), 11) 산공(散空), 12) 성공(性空), 13) 자상공(自相空), 14) 제법공(諸法空), 15) 불가득공(不可得空), 16) 무법공(無法空), 17) 유법공(有法空), 18)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으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십행(十行)---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이 수행하는 열 가지 이타행을 말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 환희행(歡喜行) - 남에게 베풀어 기쁘게 함.

    2) 요익행(饒益行) -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함.

    3) 무에한행(無瞋恨行) - 인욕을 닦아 성내지 않고 참음.

    4) 무진행(無盡行) - 끊임없이 가르침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함.

    5) 이치란행(離痴亂行) - 바른 생각을 하여 어리석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음.

    6) 선현행(善現行) - 청정한 행위를 하여 중생을 교화함. 항상 불국(佛國)의 안에서 생(生)을 시현(示現)한다.

    7) 무착행(無著行) -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음.

    8) 존중행(尊重行) - 행하기 어려운 청정한 행위를 존중해 그것을 성취함. 난득행(難得行)이라고도 한다.

    9) 선법행(善法行) - 바른 가르침을 지키고 정법을 호지(護持)함.

    10) 진실행(眞實行) - 가르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가르쳐 말과 행동이 일치함.


*십회향(十回向)---회향이란 스스로 쌓은 선근(善根)과 공덕(功德)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어 자타(自他)가 함께 불과(佛果)의 성취를 기하려는 것을 말한다.

   10회향이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가운데서, 제31위에서 제40위까지의 단계. 지금까지 수행해 오던 것을 방향을 돌려 궁극적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할 수행의 방향 열 가지를 제시하고, 이에 따라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중생에게 돌리는 단계이다.

     1) 구호일체중생난상회향(救護一切衆生難相廻向) - 중생을 구제하지만 중생상을 떠난 회향임.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중생이 번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겨 구제를 하지만 참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은 중생의 번뇌를 자기의 번뇌로 여겨서 교화하려는 보살과 중생이 하나가 될 때에 가능한 단계이다.

     2) 불회회향(不懷廻向) - 무너지지 않는 회향임. 모든 차별현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그대로 공하다고 보는 회향이다.

     3)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 - 마음에 중도의 바른 생각이 있으므로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게 하는 회향이다.

     4)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 - 모든 세계의 부처님이 계신 곳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하기를 발원하는 회향이다.

     5)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 - 모든 곳의 부처님을 공양하는 공덕과 모든 중생에게 진여의 공덕을 돌려주어도 다함이 없는 공덕을 쌓는 회향이다.

     6) 입일체평등선근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 - 선과 악이 모든 진여와 같다고 개현(開現) 되는 회향이다.

     7)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 모든 중생을 선악으로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하나의 불자라고 보므로 악인이라 해서 멀리하지 않고 선인이라 해서 편애하지 않는 마음으로 접촉하는 회향이다.

     8)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 - 선악의 유무를 다 같이 진여의 모습으로 보는 회향이다.

     9) 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着解脫廻向) - 차별현상에서 평등진여를 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차별된 모습에서 인연하면서도 그것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회향이다.

     10) 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 - 중도 진여를 관함으로서 한량없는 모습을 그 참모습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회향이다.


*쌍차쌍조(雙遮雙照)---쌍차쌍조는 중도(中道)를 설명하는 용어 중에 하나이다. 천태종의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 스님이 이것으로 중도를 설명했다고 한다.

   쌍(雙)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의 양변을 말하는 것이다.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선과 악 등 일체의 차별상이다. 쌍차(雙遮)라는 것은 이 양변이 서로를 막아서 서로를 숨기는 것, 즉 서로의 소멸을 말한다. 쌍조(雙照)라는 것은 그 반대로 이 양변이 서로 비추어서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서로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서로 드러남이란 사성제의 집제(集諦)이고, 숨기는 것이란 멸제(滅諦)이다.

   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했다면 쌍조(雙照)로써 긍정을 말하고 있다. 차(遮)는 막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조(照)는 비추어서 전체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중도(中道) 공식은 앞에서 차(遮)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조(照)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부정을 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긍정을 해 부정은 분명히 긍정을 전제로 하고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해서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한 면만 강조해서는 중도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쌍차쌍조란 양변의 극단을 여윈, 그런 말과 일맥상통하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적당한 타협과 상생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론을 통해 갈등과 모순,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된 현실을 통섭(通攝) 내지 원융(圓融)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그것은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초월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화해시키고자 했던 일종의 구원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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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마(Agama)---고대 인도에서는 전해 오는 성인의 말씀을 ‘아가마’라고 했고, 힌두교 용어로는 ‘전승된 성전(聖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붓다의 교설을 집성한 것을 ‘아가마’라고 불렀으므로 이를 음역해서 <아함경(阿含經)>이라 했다.


*아견(我見)---오견(五見)에서 ‘신견(身見)’과 같은 말. ‘나’라고 하는 견해. 자아라고 하는 견해. 나에 변하지 않는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자아(自我)에 변하지 않고 항상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함.---→아소견(我所見), 오견(五見) 참조.


*아공---공을 다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이다.

     ? 아공(我空)은 연기에 의해 지수화풍 사대와 오온이 임시적으로 결합된 가짜 ‘나’가 실재한다고 하는 아집(我執)을 부정하는 것이며,

     ? 법공(法空)은 객관세계의 일체법이 공함을 모르고 여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깨뜨리는 것이며,

     ? 구공(俱空)은 이러한 아공, 법공마저 버리고 비로소 제법의 본성에 계합함을 말한다.


*아귀도(餓鬼道)---육도 가운데 아귀도는 지옥도 다음으로 고통이 많은 세계이다. 음식에 탐욕을 부린자, 시기 질투심을 가진 자가 이 세계에 떨어진다. 아귀도의 책임자가 염라대왕이다.


*아나타 핀다다(산스크리트어 an?thapi??ada, 팔리어 아나타 핀디카)---한역해서 급고독(給孤獨)이라 함. 부처님 생존 당시 중인도의 사위국(舍衛國;코살라국)의 장자이자 대신이었던 수달(須達, sudatta/수다타)의 별명.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드린 사람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수보리(須菩提/수부티/subhuti)가 바로 아나타 핀다다의 조카이다.---→급고독(給孤獨) 참조. 


*아나율(阿那律, 산스크리트어 아니룻다/Aniruddha)존자---아누룻다(Anuruddha)라고도 한다. 아나율는 석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슛도다나대왕의 동생인 쑤꼬다나였다. 따라서 아나율은 부처님과는 사촌지간이다. 말하자면 그는 석가모니의 작은 아버지 쑤꼬다나[감로반왕(甘露飯王)]의 아들이었다.

   아나율은 어느 날 부처님 앞에 앉아 졸다가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 후 밤낮으로 자지 않고 수행 정진하다가 그만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참 지혜의 눈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일컫는 부처님 10대 제자가 됐다.


*아나율 팔대인념(八大人念)---아나율(阿那律)존자는 8가지 수행자의 조건을 제시해서 그것을 구도자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팔대인념(八大人念) 혹은 팔대인각(八大人覺)이라 하는데, 풀어보면 대인이 되기 위한 8가지 마음가짐이라는 뜻이다. 

   첫째. 지족(知足)할 줄 아는 마음가짐(知足者)

   둘째. 시끄럽지 않고 적정한 곳에 머무는 마음가짐(閑居者)

   셋째. 욕심 없는 마음가짐(小欲者)

   넷째. 계율을 지키는 마음가짐(持戒者)

   다섯째. 생각이 고요한 마음가짐(三昧者)

   여섯째. 지혜로운 마음가짐(智慧者)

   일곱째. 많이 들으려는 마음가짐(多聞者)

   열덟째. 정진하는 마음가짐(精進者)


*아나함(阿那含)---성문의 수행의 단계인 사과(四果) 중 제3단계임. ‘불환(不還)’, ‘불래(不來)’, ‘출욕(出欲)’ 등으로 번역하며,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아나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의 번뇌를 모두 끊어 완전히 벗어난 성자이기에 ‘출욕’이라고 하며, 5욕(五慾)을 완전히 벗어나고,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뿐 다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불환’또는 ‘불래’라 한다. 즉,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자들은 우리가 극락(極樂)이라 일컫는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서 다시는 이보다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여기서 열반에 든다고 한다.---→사향사과(四向四果), 정거천(淨居天) 참조.


*아난다(Ananda, 阿難陀)---아난(阿難)이라고도 함. 석가모니의 4촌 동생으로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이며, 십육나한(十六羅漢)의 한 사람임.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아난다는 용모가 출중했는데, 이것이 출가 후 아난다가 많은 부녀자들로부터 유혹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석가가 성도 후 귀향했을 때, 난다(難陀) ? 아나율(阿那律) 등과 함께 그를 따라 출가했다고 한다.

   20여년간 석가모니 곁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석가의 말을 가장 많이 듣게 돼,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다. 견문(見聞)이 많고 기억력이 좋아 불멸(佛滅) 후에 불경의 대부분이 이 사람의 기억에 의해 결집됐다. 따라서 후대에 경(經)이 전해지도록 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yokdhara Samyak Sam Bodhi)---이를 뜻으로 번역하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뜻한다. 즉, 대철대오(大徹大悟)란 뜻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이를 소리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데, 

     안(An) : 무(無), 부정형태

     욕다라(yokdhara) : 상(上), 높다.

     아누다라 ; 지고무상하다는 뜻,

     삼(sam) : 정(正), 바르다.

     먁(yak) : 평등(平等), 비교하다

     삼(sam) : 정(正), 바르다

     보리(bodhi) : 각(覺), 깨달음

   이를 종합해 보면 ‘무상정등정각’이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대자연의 법’을 일컫는 말이다.


*아덕(我德)---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아(我)’로서 진아(眞我)를 뜻하며, 망집의 아(我)를 벗어난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본성의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즉, 외부로 부터의 아무런 방해나 속박을 받지 않는 일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통묘용(神通妙用)의 자유자재의 덕을 일컬음이다.


*아도(阿道)---AD 374년(고구려 소수림왕 4년) 동진(東晉)으로부터 온 승려. 생몰연대 미상. 소수림왕은 아도(阿道)를 위해서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2년 전에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순도(順道)를 위해 성문사(省門寺)를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눌지왕(재위 417~458) 때에 고구려로부터 신라의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군)에 와서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있으면서 불교를 전한 묵호자(墨胡子)가 바로 아도와 동일인이라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아디 붓다(Adi Buddha)---→본초불 참조.


*아라한(阿羅漢, 산스크리트어 arahan)---소승(小乘)의 수행자들, 즉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 성문의 수행 단계인 사과(四果) 중 마지막 단계, 즉 아나함(阿那含)의 다음 단계인 최고의 경지.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하기도 한다. 안과 밖이 항상 고요해 다툼이 없으므로 아라한은 언제나 무쟁삼매(無諍三昧) 속에 머무르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부처님의 직접 가르침인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자의 최고 단계였으나 대승불교에 와서 ‘보살’이 생겨 아라한을 나한(羅漢)이라 하며, 그 격이 보살 아래로 떨어졌다.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종자식(種子識),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심층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이다. 제6식까지는 표층의식이고, 제7식과 제8식은 심층의식이요,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 저장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신체를 유지시켜 나가는 업력(業力)과 윤회의 심종자(心種子)가 저장돼 있는 곳으로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고 존재의 밑바탕에 붙어 있다가 알맞은 환경과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업력이 원동력이 돼 다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식 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이라고 한다.---→말나식(末那識) 참조.


 *아말라식(阿末羅識,Amala-vijnana)=암마라식(菴摩羅識)=아마라식(阿摩羅識)=제9식---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인 제9식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겐 의식인 제6식(六識)이 있고, 그 밑바탕에 제7식 말나식(末那識)이 있으며, 그 보다 깊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제9식 암마라식이 있는데 그 자리가 이른바 불성(佛性)으로서 부처님께만 갖추어진 식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라고 한다. 중국의 현장(玄?)이 9식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 중생이야 불성에 접근하기 힘들어서 제9식이 있으나마나 하므로 보통 제8식 아뢰야식만 논의하는 것이다.


*아비달마품류족론(阿毘達磨品類足論)---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의 논사 세우(世友, 산스크리트어 Vasumitra)가 저술한 논서이다. 당(唐)나라 때 현장(玄?)이 한역했다.


*아미타경(阿彌陀經)---대승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중의 하나이다. 한역본은 3종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간결 유려한 구마라습의 번역본이 널리 독송되고 있으며, 석가모니가 자진해서 설한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용은 석가가 기원정사에서 제자 사리불(舍利弗)을 상대로 해 아미타불과 그가 머물고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인 극락세계의 공덕과 장엄을 설명하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한다고 설법한 내용이 주요 골자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인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하고, 무량광불(無量光佛)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아미타가 원래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브하(Amitabha:무량광) 및 아미타유스(Amitayus:무량수)라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량광은 늘 무량수(無量壽)와 함께 말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미타의 아(阿)자는 무(無)의 뜻이며, 이것은 화신을 의미한다. 미(彌)자는 원만하다는 의미로서 보신을 의미하고, 타(陀)자는 법의 뜻으로서 법신을 의미하는데, 이처럼 삼신을 다 갖추고 있는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아미타불은 바로 우리의 참 자아(眞我)요 본래면목이다. 이 아미타불의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성립된 것이 정토교(淨土敎)이다.

   허나 소승불교계인 남방불교엔 아미타불이 없고, 인도의 어떤 유적지에도 아미타불에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페르샤 계통의 중앙아시아에서 태양신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부처로 보인다.---→무량광(無量光) 참조.


*아바다나(阿波陀那, 산스크리트어 Avadana, 비유/譬喩, 비유문학/譬喩文學)---부처님의 말씀은 정해져 있는 바가 없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진리로 가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만큼 방편도 다양하다. 따라서 경전에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12 가지로 분류를 했다. 이것을 십이분경(十二分經)이라 하는데, 그 가운데 비유를 말한다. 이는 경 가운데서 비유나 우언(寓言)으로써 교리를 설명, 해석한 부분이다.

   불교 경전에는 이 비유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며, 경에 따라서는 이 비유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된 경전도 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서 알기 어려운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초기 경전의 율장(律藏) 안에 산재해 있는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해 별도로 편집된 문헌이다.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와 불교를 신봉했던 위대한 아소카 왕에 관한 이야기 등의 전설을 담고 있다.---→십이분경(十二分經) 참조.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아비다르마)---아비담마(abhidhamma)라고도 하며, 여기서 달마(阿毘達磨, dharma/다르마)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고, 접두어 아비(abhi/阿毘)는 ‘최고의’ 또는 ‘에 대한’이란 의미라서 결국 ‘아비달마’란 부처님의 ‘최고의 가르침’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란 의미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논장(論藏)’이라 한다. 즉, 불교의 경전을 경(經) ? 율(律) ? 논(論)의 3장(三藏)으로 나눌 때에 논장(論藏), 즉 논부(論部)의 총칭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많은 논(論)이 만들어지고, 그 쌓인 것이 후일에 정비돼 논장이 됐다. 따라서 부파불교시대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한다. 논장의 형식에는 모두 7가지가 있다. 이것을 아비담마(Abhidhamma) 칠론(七論)이라고도 한다.

   ① 담마상가니(Dhammasangani, 法集論)---‘법의 모음’이라는 뜻으로 아비담마의 모든 주제들이 열거됨.

   ② 위방가(Vibhanga, 分別論)---부처의 가르침을 온(蘊), 처(處), 계(界), 근(根) 등 18가지로 분류해 설명.

   ③ 다뚜까타(Dhatukatha, 界論)---여러 법들을 문답 형식으로 설명.

   ④ 뿍갈라빤나띠(Puggalapannatti, 八施設論)---여러 형태의 인간에 대한 질문과 답.

   ⑤ 까타왓투(Kathavatthu, 論事)---여러 종파간의 다른 견해를 설명.

   ⑥ 야마까(Yamaka, 雙論)---아비담마의 용어 해설서.

   ⑦ 빳타나(Patthana, 發趣論)---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상세히 다루는 책. 논장 중 가장 방대하고 난해한 논서이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sa-sastra)=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세친(世親) 지음,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는 교리에 관한 논장의 백과사전식 해설서 성격임. 이것을 양 무제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온 진제(眞諦)가 한역한 것이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이고, 줄여서 <구사석론(俱舍釋論)>이라 한다. 그 후 당나라 때 현장(玄?)이 이를 다시 번역해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라 했고, 줄여서 <구사론>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진제의 번역을 구구사(舊俱舍)라 하고, 현장의 번역을 신구사(新俱舍)라 한다.---→구사론(俱舍論) 참조.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발지론(發智論) 참조.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불교---석존께서 열반에 드시고 100년 쯤 지나자 교단 내에서는 교리와 계율의 해석 문제를 놓고 논쟁이 일었고, 이에 따라 과거의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과 시대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두 입장이 나누어지게 됐다.

   이때 과거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을 상좌부(上座部), 그리고 진보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대중부(大衆部)라 했고, 이들의 대립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이후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파로부터 다시 분파가 생겨나 기원전 200년경에는 총 20여 개의 부파가 생겼다.

   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일컫는데, 이들 부파들은 각 교단마다 석존의 교리와 계율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방대한 논서(論書)를 작성하면서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논(論)'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아비달마(abhidharma)’이므로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아비달마불교의 특징은 풍부한 논서의 발달을 이룬 것이다. 대체로 아비달마불교를 소승불교라 하는데, 일부 대중부를 대승불교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4세기경 인도의 승려 중현(衆賢, Samghabhadra/상가바드라)이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반박해서 쓴 책. 세친이 <구사론>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취급한 데 비해, 이 책은 <구사론>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를 비판함으로써 설일체유부의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순정리론’에서 ‘정리(正理)’란, 유부의 정통 학설을 의미한다. 현장(玄?)의 한역본(漢譯本)이 있다.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중현(衆賢) 지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취지를 밝힌 저술. 중현(衆賢)의 <아비달마순정리론>과 짝을 이룬다. 이 두 가지 논서는 운문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지만 산문으로 된 해설부분에서는 세친(世親)의 학설을 엄격히 비판해 정통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선양하려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당(唐)의 현장(玄?)이 한역했다.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391년 설일체유부의 법승(法勝) 짓고, 동진(東晋) 시대의 인도승 승가제바(僧伽提婆)와 혜원(慧遠)이 한역했다. 작은 논(論)이지만 부파불교 시대에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조직화하는데 특기할 만한 공헌을 했다. 이 논은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7장에서는 복잡하게 발달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연하게 조직하고 있다.---→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참조.


*아비발치(阿?跋致, 산스크리트어 avivartika)---아유월치(阿惟越致)라고도 하는데, 불퇴(不退) 혹은 불퇴전(不退轉)으로 번역한다. 이는 반드시 성불(成佛) 함과 동시에 보살위에서 후퇴하지 않을 위치.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후퇴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이다. 그 후퇴하지 않을 보장이 ‘불방일(不放逸)’이다.


*아비지옥(阿鼻地獄)---여덟 지옥 가운데 최하층의 고통과 형벌기간이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아비’란 ‘사이가 없다’는 뜻으로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고통이 계속되는 지옥이란 말이다.

  

*아사리(阿?梨, 산스크리트어 아사리아/acarya)---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지도해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승려. 불교 교단의 스승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아사리라고 하면 은사(恩師) ? 법사(法師) ? 계사(戒師) 중 계사를 지칭하게 된다. 자격은 10회 이상의 안거(安居)를 마쳤고, 계율에 밝으며, 지혜와 복덕을 겸비해야만 한다.

   여러 아사리가 있으며, 특히 삭발아사리는 머리를 깎아 준 스승이고, 출가아사리는 십계아사리라고도 하는데, 출가의식인 득도식(得度式) 때 10계를 일러주는 스승이며, 수계아사리는 갈마아사리라고 하는데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스승이다.---→갈마아사리 참조.


*아사세왕(阿?世王, 아자타샤트루, BC490?~BC458?)---중인도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의 왕. 아버지는 빈비사라(頻婆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왕이고, 어머니는 위제희(韋提希)임. 반역자인 부처님의 4촌 동생 데바닷다(提婆達多)의 악한 꼬임에 빠져 부왕인 빈비사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강대국인 코살라와 패권다툼을 벌여 코살라를 격파하고 갠지스강 유역의 최강국으로 군림했으며, 군사조직과 지배체제를 정비해 인도 고대통일국가 형성의 기초를 닦았다. 나중에 참회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불교를 적극 보호 육성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치세 동안 불교와 도시 상공업이 번성했다.


*아상(我相 산스크리트어 Atma-samjna)---아상이란 당시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나’ 혹은 ‘자아’라는 생각을 말한다. 아상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름, 나의 육신, 나의 학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히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이르러 보니 우주안의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각은 생주이멸((生住離滅)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사상(四相) 참조.


*아상가(阿僧伽, 300?~390?)---한역 이름은 무착(無着)임. 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한 불교 사상가이며, 세친(世親)의 형.---→무착(無着) 참조.

 

*아소(我所, mama)---아소유(我所有)의 줄인 말. 나의 소유란 뜻. 나에게 속하는 것. 내 마음이 집착하는 바를 뜻한다. 따라서 아소를 부정한 것이 무아(無我)이다. 아(我, attan)는 ‘나’라는 것이며, 아소(我所)란 나에게 딸린 나의 것이다. 이 육신은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아소(我所) 즉, 내 것이라는 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아소견(我所見)---줄여서 아견(我見)이라고도 함. 모든 사물은 원래 가짜 존재로서 소유할 것이 없는데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자신(自身)에게 딸린 모든 물건은 원래 일정한 소유주(所有主)가 없는 것이나, 정말 나에게 소속된 자기의 소유물이라고 고집하는 치우친 생각이다.---→아견(我見) 참조.


*아소카왕(Ashoka, 阿育王)---인도 마가다(Magadha)제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의 세 번째 임금으로 마우리아왕조의 개창자인 찬드라굽타의 손자이다.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재위: BC 265년경 ~ BC 238년, 혹은 BC 272~BC 232)으로서  불교의 이상을 구현한 ‘법의 대왕’으로 불린다. 불법(佛法)에 바탕 둔 통치이념 전파와 불교의 세계종교화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린다.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 교세는 인도 전체에 퍼져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세 번째 경전 편찬회의는 아소카왕의 주도로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파타리불성, 波陀利佛城, 華氏城, 현재의 파트나)의 계원사(鷄園寺)에서 열렸다. 이때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부처님 말씀이 팔리어로 문자화(文字化)됐다고 한다. 1, 2차 결집 때는 경(經)과 율(律)만 결집했지만, 이때는 논장(論藏)도 결집해 불경의 영역이 훨씬 확장 정비됨으로써 비로소 <팔리어 삼장>의 기초가 성립됐다.

   아소카왕의 주도로 열린 제3차 결집이 끝난 직후 아소카 왕은 자신의 지배 이념인 법에 의한 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변국으로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를 파견해 경전을 전했다. 스리랑카의 역사서 <마하밤사(Mahavamsa, 丈史 혹은 大史)>에 의하면 간다라, 카슈미르, 랑카(스리랑카) 등 9개국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아수라(阿修羅, Asura)---줄여서 <수라>라고도 하는데, 불교를 수호해주는 신장인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서 매우 호전적이며 공격적이다. 아수라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신의 중간적 존재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을 못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해 시비를 걸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으로, 항상 제석천과 싸움을 벌인다. 생전에 몹시 공격적이고 시기심과 교만심이 강한 사람들이 죽어서 업장에 따라 가는 곳을 아수라라고 한다.


*아슈바고샤(Asvaghoa, AD 80?~150?)---한역 이름은 마명(馬鳴)이다. 카니시카왕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불교학자이며 인도의 고전인 산스크리트어 문학 최초의 불교 시인이다. 그의 작품 <불소행찬(佛所行讚>은 불교문학의 걸작이자 인도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마명(馬鳴) 참조.      


*아승기(阿僧祇)---산스크리트 아상가(asanga)를 음역한 말로, 수리적으로는 10의 56승을 뜻하지만 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를 뜻한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를 뜻하는 항하사(恒河沙)보다 더 많은 수를 이르는 말이다. 흔히 ‘아승지’로 잘못 표기한다. 


*아승기겁(阿僧祇劫)---무수겁(無數劫)의 뜻.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량. 아(阿)는 무(無), 승기(僧祗)는 수량, 겁(劫)은 시간을 뜻함.---→흔히 ‘아승지겁’으로 잘못 표기한다.

    ※겁(劫)---불교에서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산스크리트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 ? 대시(大時)라 의역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 곧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아육왕경(阿育王經)---잡아함경(雜阿含經) 제23권. BC 3세기 인도 마가다(Magadha) 제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의 세 번째 임금인 아소카왕에 관한 기록이 중심이 된 경.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참조.


*아일다阿逸多, ajita)---미륵보살의 별명. 산스크리트어 Ajita의 음사. 미륵은 성씨이고 본래 이름이 아일다(阿逸多)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하실 미래의 부처님으로 미륵은 부처님 당시의 제자 아일다(阿逸多)의 후신 명이다.

   인도 바라나국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출가 수행했으며,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으며, 지금은 도솔천 내원궁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신다고 한다. <미륵성불경>에 의하면 미륵부처님이 장차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면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해 설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 시에 빠졌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한다.

   여기 아일다는 유식학파를 열고 무착(無著, 300?~390?/世親의 형) 등을 가르쳤던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 270 ?~350 ?)과는 다른 사람이다.---→미륵(彌勒) 참조.


*아제불타(阿提佛陀)---밀교에서 최초이고 근본적이며 원초적인 부처님으로 일컫는 본초불(本初佛=아디 붓다/Adi Buddha)의 다른 이름.---→아디 붓다(Adi Buddha), 본초불(本初佛) 참조.


*아촉불(阿?佛, 산스크리트어 악소바야/Aksobhya)---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처이다. 아촉불은 ‘악소바야’를 음역한 것인데,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의역해 부동불(不動佛) ? 무동불(無動佛) ? 무노불(無怒佛)이라 한다. 이 세계에서 동쪽으로 1천의 불국토를 지나는 곳에 아비라타(Abhirata: 阿比羅提)라는 나라가 있는데, 옛날 이 곳에 대일여래(大日如來)가 한때 주존으로 있었다. 그 당시 대일여래를 모시던 수행비구 중에 아촉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 앞에서 성내지 않겠다는 서원을 했다. 아촉은 그로부터 용맹 정진해 깨달음을 얻고 지금까지 아비라타국에서 설법을 하고 있다. 아비라타란 환희(歡喜) ? 묘락(妙樂)의 의미로, 아촉불은 이곳에서 보리를 향한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수행자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아트만(산스크리트어 ?tman)---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범(梵 : 브라만)과 함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인도철학에서 자아를 나타내는 술어로 아(我) 또는 개아(個我)라고 번역된다.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인도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삼법인 중의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바로 이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함경(阿含經)---아함(阿含)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Agama)를 소리 번역한 말이다. 아가마란 ‘전해오는 가르침’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기억에 의해 구전돼 오던 부처님의 교설을 총칭하는 말이고, 아함경이란 이를 정리 집성한 불경을 말한다. 그런데 불경이 북방으로 전해져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아함경이라면 남방으로 전해진 것은 니까야(Nikaya)라고 한다.

   그리고 아함경에 일관해 설해지고 있는 것은 근본불교의 중심사상인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자리이타(自利利他), 깨달음(覺) 등의 교리이다. 이것은 불설(佛說)의 원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므로 아함경은 다른 어떤 경전보다도 부처님의 인간미에 가깝고 사상적인 변화도 거의 없으며, 이설의 대립이나 대 ? 소승의 구별도 보이지 않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아함(阿含)’으로 불리는 문헌으로 한역 대장경 안에 장아함(22권) 중아함(60권). 잡아함(50권). 증일아함(51권) 등 네 가지가 전한다.

   한역 4아함(四阿含)에 해당하는 문헌으로 팔리어 5부 니까야(Nikaya)가 있는데, 그 중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aya/소부)에는 <법구경>, <경집>, <본생담> 등 중요한 경전 15편이 포함돼 있으나 아함에는 없다.


*아힘사(ahims?)---인도 종교 ? 도덕의 기본적 가치. ‘불살생(不殺生)’의 뜻으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에서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간디가 독립 운동을 벌일 때는 ‘비폭력’의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악고(握固)---도교의 용어. 갓난아기가 태어날 때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것. 이처럼 중생은 습관적으로 무엇이든지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을 뜻한다.


*악도(惡道, durgati)---불교의 윤회사상에서 말하는 악한 일을 많이 저지른 자가 장차 태어나게 될 좋지 않은 곳. 보통은 3악도를 말하는데, 제일 좋지 않은 곳이 지옥도(地獄道)이고, 그 다음이 아귀도(餓鬼道), 세 번째가 수라도(修羅道)이다. 4악도는 3악도에 아수라(阿修羅)가 첨가된다.---→삼악도(三惡道) 참조.


*악작(惡作, 산스크리트어 kauk?tya)---후회하는 마음 작용. 행위로 저지른 가벼운 죄. 갑자기 “아!(잘못했었구나!)”라고 한숨짓는 것.


*악취공(惡取空)---공(空)에 대한 그릇된 이해. 공(空)이라는 글자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허무하다, 허망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공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즉 허무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단멸공(斷滅空) 내지 악취공(惡取空)이다. 즉, 악취공은 공(空)사상 중에서 사악한 부분인 허무주의를 취해서 생긴 일종의 자기도취적인 병이다. 불교에서 가장 금기시 하고 가장 꺼려하는 것이 바로 이 악취공이다. 수행을 게을리 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어 득도를 한 것처럼 도사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는 스님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증상만(增上慢)과 악취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안거(安居, Varsa)---승려들이 음력 4월 보름 다음날부터 7월 보름날까지 3개월간(하안거), 그리고 음력 10월 보름 다음 날부터 다음 해 정월 보름날까지 3개월간(동안거) 한곳에 모여 일체의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

   원래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비가 많이 오는 우기(雨期)라서 벌레들이 밖으로 많이 나와 다니므로 알게 모르게 살생을 할 수 있어서, 일정한 장소에서 우기를 피해 수행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으로 불교가 전파됐고, 이 곳 지역들은 겨울이 너무 추워 추위를 피해 수행을 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생겨났고, 하안거(夏安居)는 부처님 당시처럼 우기 또는 더운 석달동안을 더위를 피해 수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안거의 시작을 결제(結制), 안거의 끝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안거기간이 끝나면 천하를 주유하며,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만행(萬行)에 나서는 것을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하고, 이 스님들을 운수납자(雲水衲子)라 한다.


*안락행(安樂行)---안락행이란 어떤 경우에도 평화로운 마음, 기쁜 마음, 안온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안락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편안하게 만드는 것, 즉 자기의 마음가짐에 따라 어디서나 안락한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안세고(安世高, An Shigao, AD 25~220 혹은 147~167)---세고(世高)는 자, 본명은 안청(安淸). 안식국(安息國) 즉 파르티아에서 온 사람이다. 2세기경 후한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역경승(譯經僧). 안식국(파르티아 제국)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다. 그의 불경 번역은 중국 역경사에서 최초에 해당하며, 그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에 정통했다. 현재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음지입경(陰持入經)>,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그의 이름으로 돼 있는 역전(譯典)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안심법문(安心法門)---불교는 팔만 사천 법문 전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안심법문이라 한다. 누구나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 진리를 설하기 때문이다. 본래 진리란 것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진리의 세계는 안락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안심법문이다.

   중국에 선종을 일으킨 달마(達磨)의 선사상 원형이 바로 안심법문이다. 어느 날 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간절히 청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바라옵건대 제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그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내가 편하게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我與汝安心竟>.”

   불안은 단지 심리적 상황일 뿐, 본디 그 실체는 없다는 점을 달마는 날카로운 당기일구(堂機一句)로 혜가를 깨우쳐준 것이다. 혜가가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 마음이 형상과 문자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 의해 절대적인 마음의 깨달음이 선종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됐다.

    ※당기일구(堂機一句)---순간적으로 전광석화처럼 아무런 군더더기 하나 없이 척 나오는 한 마디 말(對句)이다. 선문답(禪問答)에서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항상 끊듯이 짧게 말한다.


*안심입명(安心立命)---마음속의 모든 번뇌 ? 망상을 잠재우고 편안하게 하고 천명에 맡김. 그리하여 생사의 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해 몸과 마음이 평온한 상태. 이와 같이 모든 의혹과 번뇌를 떨쳐버려 생사와 이해를 초월해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길 수 있는 안정된 마음상태, 혹은 진리를 깨달은 상태를 말한다.


*안양(安養)---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곳이다. 불교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향이다.


*안함(安含, 579∼640년)---안홍(安弘)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김(金)씨. 신라 10성의 한 사람으로, 진평왕 23년(601)에 왕명을 받고 중국 수나라에 유학 가서 밀교를 배워 진평왕 27년(605)에 호승(胡僧) 비마진제(毗摩眞諦)ㆍ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귀국했다. 서역의 승려들이 신라에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저서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가 있다.


*안혜(安慧, 510~570, 산스크리트어 sthiramati)---유식학 십대논사(十大論師)의 하나. 남인도 나라국(羅羅國) 출신의 승려로, 유식학(唯識學)과 인명(因明)에 정통하고,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를 지었다. 덕혜(德慧)의 제자. 저서에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구사실의소(俱舍實義疏)>, <유식삼십송석론(唯識三十頌釋論)> 등이 있다.


*알음알이---한자로 지해(知解)라고 한다. ‘지견해회(知見解會)’의 준말로서 사전에는 ‘약삭빠른 수단’이라 적혀 있는데, 잔머리를 굴리면서 분석하고 억측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분석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잔꾀 굴리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지(자기) 꾀에 지가 빠진다’는 말이 있는데, 화두참구 역시 같다.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가로 막는 존재다. 때문에 참선할 때에는 알음알이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정면으로 화두를 참구하지 않고 잔머리를 굴려서 알려 하고, 이리저리 지능적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에서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란 것도 다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절에 가면 주련에 “入此門來 莫存知解(이 절에 들어온 자는 알음알이를 갖지 마라)”라고 적혀 있다.


*애(愛)---맹목적으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욕심이,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애(愛)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애를 번뇌 중의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즉, 애는 마음을 더럽게 하는[염착(染着)] 장애[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야단법석(野壇法席)---법당 아닌 곳, 숲속이나 광장 등에 임시로 단을 마련해 야외법회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럴 때 여러 사람이 모여드니 야단스럽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상을 야단법석이라 한다.


*야마천(夜摩天)---불교의 우주관에서 설정한 욕계(欲界)의 6천(天) 가운데 제3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利天) 위의 공간상에 위치하며, 수야마천(須夜摩天)ㆍ염마천(焰摩天)이라고도 한다. 그곳의 주인이 야마(Yama)이다. 야마는 최초의 인간이기에 최초로 죽은 인간이기도 하다. 야마천은 욕망이 줄어들어 포옹만 해도 서로 기쁨을 나눈다.


*야사(Yasa)---야사는 부처님이 초전법륜을 한 곳인 미가다야(鹿野苑)가 있는 바라나시의 큰 부호 상인의 아들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야사(Yasa)의 출가를 허락하심으로써 야사는 초전법륜 대상의 다섯 비구 외에 최초의 제자가 됐다. 그리고 야사의 친구 55명의 출가도 허락하셨고, 야사의 부모는 최초의 재가불자가 됐다.


*야운(野雲)비구---<자경문(自警文)>의 저자.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 승려가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의 하나이다. 야운스님은 정확한 생몰연대가 없으며, 역대에 두 분의 야운스님이 계시다. 신라 원효스님의 제자 야운스님과 고려 말 나옹(懶翁)선사의 제자 야운스님이 있다. 두 분 중 한분이라는 설이 있을 뿐 확실한 근거는 없다. 나옹의 제자 야운스님은 오랫동안 나옹의 시자(侍者)를 지냈으며, 항상 지극한 정성과 성실로써 스승을 받들어 나옹으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았다.


*야차(夜叉, Yaksa)---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 중의 하나. 야차는 생김새가 추괴하고 잔인 혹독한 귀신이었는데, 불법에 귀의해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의 휘하에서 북방을 수호하는 수문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sajyaguru)---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혹은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에 따르면, 약사불이 머무는 동방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는 아미타정토와 같고, 약사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12신장(十二神將)을 권속으로 거느린다고 했다. 또한 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헌데 불교에서는 석가여래를 현재불, 약사여래를 과거불, 아미타불을 미래불로 상정하기도 한다.


*약사전(藥師殿)---유리광전(琉璃光殿) 혹은 만월보전(滿月寶殿), 보광전(寶光殿)이라고도 하며, 주불은 약사여래,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다.


*약석(藥石)---약과 침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약을 통틀어 이르는 말.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어서 그것을 고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말. 그러나 불교에서는 저녁 공양을 이르는 말이다.


*약왕(藥王, 산스크리트어 Bhaiajya-r?ja)---25보살(菩薩)의 하나. 일체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심신의 병고를 덜어 주고 고쳐 준다는 보살.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머리칼은 보발과 수발(垂髮)을 갖추었으며, 왼손은 주먹을 쥐어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구름 위의 태양을 가리킨다.

 

*약찬게(略纂偈)---화엄경은 방대한 경전이다. 그래서 대중들을 위해 화엄경을 요약한 것이 <약찬게(略纂偈)>와 <법성게(法性偈)>로서 간략하게 게송으로 화엄의 사상을 찬탄하고 있다. <약찬게>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이 <화엄경>의 구성에 대해 간략히 엮어 놓은 게송이고, <법성게>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국에 유학해 화엄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저술한 게송이다. 약찬게의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 약찬게>이다.


*얀트라(산스크리트어 yantra)---얀트라는 “유지하다. 지탱하다. 다스리다. 통제하다”의 의미를 지닌 얌(yam)이라는 산스크리트어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얀트라는 갖가지 에너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의식이 집중된 역장(力場)을 의미하는 기하학적인 도형인데, 힌두교의 신비주의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밀교(密敎)에서는 명상을 도와주는 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정좌하고 얀트라만 보고 있어도 명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옴’이라는 소리가 만트라의 대표 소리라면 얀트라는 점, 선, 곡선, 원, 삼각형, 사각형, 연꽃무늬들로 구성된 상징적 도형이다. 그중에서도 점(bindu)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도형 중앙의 점은 만물의 시작과 끝에서의 합일을 표현한다.


*얍 윰(yab-yum)---티베트 불화를 탕카(thangka, 幀畵)라 한다.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의 종류인데 족자 또는 액자로 만들어 사용한다. 그런 탕카 중에 ‘남녀 교합상’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얍 윰(yab-yum)’이다.

   불교의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녀교합상이 활용됐다고 한다. 이러한 자세는 남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적극적인 힘으로서의 방편(方便)과 여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지혜로서의 반야(般若)의 신비적 합일을 나타내며, 남녀가 교합함으로써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해 해탈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 교합상에서 보이는 지혜와 방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힌두이즘의 탄트리즘에서 비롯된다. 즉 힌두교에서의 ‘시바(Siva)’와 ‘삭티(Saktl)’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와 방편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을 보면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교전통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얍 윰’이라는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탕카라는 형식을 빌어서 표현하는 것은 좌도밀교(左道密敎)에서 불교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환희불 참조.


*양구(良久)---묵연 양구(默然 良久)와 같은 말. 언어와 생각이 끊어진 묵시적 설법을 일컫는다. “스승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를 양구(良久)라고 한다. 말이 없는 묵시로써 답을 하고 있다.

 

*어록산림(語錄山林)---산림법회(山林法會)란 사찰에서 불경을 강설하는 모임을 말하며, 어록산림이란 불경 대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강설하는 법회를 통해 선풍 진작을 하는 것을 말함.


*어시바루---바루 중에서 맨 큰 바루를 칭함.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대주 혜해(大珠慧海)의 어록집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 있는 말, “경에 이르기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니 그 뜻이 어떠합니까?”라 적혀 있다. 

   즉 진리의 궁극처는 깊고도 묘해서 말로써는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글로써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써도 결코 생각할 수 없음을 찬탄하는 말. 곧 일원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일원의 진리는 말도 끊어지고 글도 끊어지고 마음으로도 도저히 미칠 수 없어서 생각조차 끊어진 경지라는 뜻.

   그러나 일원의 진리는 역시 언어로써 설명할 수도 있어야 하고, 마음으로써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현실 속에서 체험을 통해서 체득해야 한다.


*업(業, 산스크리트어 Karma)--- ‘업(業)’이란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에서 사용되는 카르마(karma)라는 어휘를 한역한 것으로, ‘행위(行爲)’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해위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cetana)’ 를 뜻한다.

   근본경전 증지부(增支部, Anguttara Nikaya)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하고서 업을 짓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써”라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이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신(身) ? 구(口) ? 의(意), 이 세 가지 업을 일으키는 본체는 의지이므로 업은 의지의 산물이라 하겠고, 행위의 원인에 따른 과보로서 업이 형성되는 것이다.

   즉, 업이란 “어떤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는 의도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과보/果報)가 나타날 때, 그 결과의 원인이 된 행위이다.    

   그런데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연기론은 시대와 학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됐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연기론은 특히 업(業)의 사상과 결합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 나타났다. 이것은 중생의 생사유전(生死流轉)이 모두 자신의 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업경대(業鏡臺)---지옥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죄를 비추어보는 거울.


*업보(業報)---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과보(果報). 착한 일을 하면 선업이 있고 나쁜 일을 저지르면 악업을 받게 된다. 선업을 받든지 악업을 받든지 다 자신이 지은 대로 받는 것이 업보(業報)이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나왔다.


*업식(業識)---우리가 저지른 업은 모두 업장(業藏=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악업이나 선업이나 모두 저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업장에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일어나는 생각을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즉 저장된 업이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타나서 또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게 유도를 하는데, 그것이 업식이다.


*업식성(業識性)---업식성이란 업을 짓는 성품으로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등 흑백논리로 따지는 차별의식과 분별의식의 중생심(衆生心)을 말한다.


*업장(業藏)---아뢰야식과 같은 말임.---→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 참조.


*업장(業障)---깨달음에 이르는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 장애[삼장(三障)]의 하나. 잘못 저지른 악업에 의해 나타나는 장애를 이른다. 삼장은 업장(業障) ? 번뇌장(煩惱障) ? 보장(報障)을 말한다.---→보장(報障) 참조.


*업처(業處, 산스크리트어 Kammatthana)---업처라는 것은 명상의 토대, 명상의 대상 또는 그것을 이용하는 명상의 한 단계로서, 선정을 증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행의 주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업처에서 kamma는 업, 즉 명상행위, 수행행위를 말하며, hana는 장소[處], 주제, 근거, 대상으로 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kamma h na’는 업처(業處)로 한역되고 ‘수행의 주제’, ‘명상행위의 근거’, ‘수행행위의 대상’을 말한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 따르면 40종의 업처가 있으며, 각 수행자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에 맞는 정신적 집중의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소승불교인 상좌부불교에서는 사람의 기질을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 신뢰 ? 지혜 ? 이성 등의 6가지로 분류했다. 그런데 그 중 자기의 가장 아픈 곳(정신적인 약점)을 대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그 아픈 곳이 업처이다.


*여(같을 如)---‘여(如)’가 불교에 들어와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 뜻으로만 쓰이지 않고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으로도 인용된다. 자연법이(自然法爾)와 비슷한 뜻이다. 우리가 스님들께 인사를 드릴 때, ‘수행이 항상 여여(如如) 하십니까?’ 라고 여쭌다. 그처럼 여여란 적정한 깊은 삼매의 경지, 혹은 높은 진리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여래(如來)에서 볼 수가 있다. ‘여래’란 의미는 ‘그렇게 오신 분’, 또는 ‘그와 같이 오신 분’, ‘진리 그 자체로서 다가오는 분’이란 뜻으로 부처님의 존칭 중 하나이다.---→여여(如如) 참조.


*여래(如來, 산스크리트어 tathagata)---‘진여(眞如)’로 번역하는데, 여래란 붓다를 일컫는 여러 명칭 가운데 하나로서 tathata와 agata의 복합어이다. tathata는 ‘그와 같이', ‘여여(如如)하게', 따라서 진리의 화현이라는 뜻이며, agata는 ‘옴’ 혹은 ‘온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뜻을 새기면 ‘진리의 구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여래(如來)는 진여를 온몸을 깨달은 인격체를 말한다.   

   그런데 후기 대승불교에서 여래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본질인 불성(佛性)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진여(眞如 tathata)와 같은 의미이다. 모든 중생은 그러한 여래를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된 상태로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궁극적 실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여래선(如來禪)---여래선은 <능가경>, <반야경(般若經)> 등의 여래의 교설에 따라 깨닫는 선을 가리킨다. 그러니 여래선(如來禪)이란 ‘여래의 말씀’ 즉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해서 깨닫는 선’이라는 뜻이다. 또는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최상승선(最上乘禪, 최고의 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래선은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해 번뇌가 없으며, 중생은 누구나 최고의 지혜인 무루지성(無漏智性)을 갖추고 있고, 또 이 마음이 본래 부처(진리)와 다름없다는 이치를 믿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경지와 관점, 목표, 지향하는 바는 조사선(祖師禪), 묵조선(?照禪), 간화선(看話禪)과 같다.

   그런데 여래선, 조사선에 대한 구분은 육조 혜능(慧能) 때까지는 없었다. 혜능 계통의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종래의 선(禪) 특히 북종선과 차별화하기 위해 조사선을 내세우면서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것은 혜능의 남종선에서 자파(自派, 조사선)가 월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종래의 선을 여래선, 의리선(義理禪)이라고 격하하고 자파(自派)의 선(禪)인 조사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헌데 여래선을 의리선이라고도 한다는데, 의리선이란 학문적 교학적, 또는 언어적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이다. 경전이나 언어문자, 뜻풀이 등에 의존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인데, 후대에 성립한 조사선과 간화선 쪽에서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정의한 것이다. 그것은 실참보다 교리에 의거해 이치로 이해하는 선이라고 규정했다. 문자나 뜻풀이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기는 했으나 아직 미흡한 경지에 있을 때를 여래선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다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찾아가서 조사선을 전해 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여래선이 조사선보다 못하다고, 여래선을 폄하하려는 이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주로 말씀하신 여래선(如來禪)이나, 달마스님 이후에 발달된 조사선(祖師禪)의 내용이 둘일 수가 없다. 꼭 여래선과 조사선이 원래 둘이 아니라는 데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나라 이후에는 이 두 말이 함께 쓰였다.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중생은 본래부터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 그리고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동일한 개념이다. 여래장은 중생의 번뇌 중에 있지만 그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본래부터 절대 청정해 영원히 변함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여래장(如來藏)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gatagarbha)를 의역한 것으로, 여래태(如來胎)라고 하기도 한다. 타타가타(Tath?gata)는 여래(부처)를 의미하고, 가르바(Garbha)는 ‘장(藏)’ 또는 ‘태모와 태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래장은 “그 태내에 부처를 잉태하고 있는 것과 성장해서 부처가 될 태아”라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달리 말하면, 여래장은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일컫는 말이다. 

   여래장계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여래장경(如來藏經), 승만경(勝?經), 열반경(涅槃經), 능가경(?伽經) 등이 있다. 특히 <능가경>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여래장과 아뢰야식(阿賴耶識)과의 관계를 논함으로써 유식설(唯識說)과의 융화를 시도하고 있다.


*여리지(如理智)와 여량지(如量智)---여리지란 이(理)에 부합되는 절대적인 지혜니, 지혜의 근본이고, 우주의 본체, 절대 평등의 진리를 깨달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로서 무분별지(無分別智) 혹은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한다.

   여량지는 온갖 구체적인 사상(事象)에 응하는 지혜여서 경험적인 지혜로서, 다양한 번뇌와 고뇌를 수행과 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여리지(如理智)란 우주의 본체(本體), 절대(絶對) 평등의 진리 - 진제(眞諦)를 깨달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이고, 여량지(如量智)는 현상계의 여러 가지 차별상(差別相)의 이치 - 속제(俗諦)를 환히 아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로서 차별지(差別智)라고도 한다.

   불가에서 일체존재의 진여불성을 깨닫는 여리지를 중시 여긴 나머지 중생제도에 작용하는 지혜인 후득지를 소홀히 하는 경향을 지적해서, ‘후득지 없는 근본지는 아상만 늘 뿐’이라고 꼬집는다.


*여시상(如是相)---10여시(十如是)의 하나.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분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여실지견(如實知見)---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여실한 인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첫째, 주관적 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관찰이 돼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편견, 주관, 경험에서 비롯한 선입견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우리 삶의 주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들의 인식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여실지견이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이고, 진리는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인식대상은 바로 우리의 삶이 돼야 하고,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과 무관하게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涅槃)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 - 을 가진 진리이다.


*여여(如如)---있는 그대로 같고 같다. 삼라만상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대로 변함이 없이 같다는 뜻이다.

   이 여(如)의 사상은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如)’는 ‘그대로’, ‘그와 같이’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본래 부사(副詞)였으나 나중에 명사(名詞)로 쓰이게 됐다.

   이 ‘여’가 불교에 들어와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 뜻으로만 쓰이지 않고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의 명사로 인용된다. 자연법이(自然法爾)와 같은 뜻이다.

   부처님의 다른 표현을 여래(如來)라고도 하는데 ‘진여로부터 내생(來生)한 이’로 수행을 완성한 사람이란 뜻인데, 진여로부터 왔기 때문에 진리의 체현자로서 중생을 가르쳐 이끈다는 부처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여여(如如)’에서 앞 글자 여(如)는 바로 여래(如來)의 여(如)자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여’의 논리는 뒤에 공(空)과 같은 뜻이 놓이게 된다. 차례대로 관찰해 나아가 보니 모두가 공이 아닌 것이 없다. 여의 진실은 곧 공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공이면서 불공(不空), 불공이면서 공이라는 것은 여여의 뜻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도 해석한다.

   헌데 당나라의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의 어록집인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는 여여(如如)란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마음이 진여인 까닭에 여여라고 하느니라.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하셨고, 현재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하시고, 미래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또한 성도하실 것이니, 삼세에 닦아 증한 바의 도가 다름이 없으므로 여여라 함을 알지니라라고 했다.   


*여원인(與願印)---수인(手印)의 한 종류. 부처님이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는 의미의 수인인데 여인(與印)이라고도 한다.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있는 손 모양으로 시무외인과는 반대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원인은 넷 째,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대개 시무외인과 함께 나타난다.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쳐 통인(通印) 혹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한다.---→시무외인(施無畏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참조.



*역바라밀(力波羅蜜)---역(力)은 보살이 깊은 선정에 들기 위해 갖추는 힘을 가르킨다. 잡념이나 망상에 휘말리지 않고, 악마(惡魔)의 유혹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힘이 밖으로 나가 중생 구제의 원이 행(行)으로 발휘되는 힘이 역이다. 보살이 아무리 원을 세웠더라도 힘을 가지고 행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원력(願力)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연(然)---그러할 연(然), 이 글자는 일반 경전에는 찾아보기 어렵고 조사들이 남긴 조사어록에서 많이 사용되는 글자이다. 예를 들면,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연(然)’자가 쓰이는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함으로써 진리가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것” 그러한 것을 ‘무위자연’이라고 한다. 조사들 법문 중에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는 그러한 최고의 경지를 밝힐 때 쓰는 단어(글자)이다. 참고로 ‘무위자연’이 도교의 단어 같지만 사실은 불교의 단어이기도 하다. ‘함이 없이 진리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 의도적으로 행함이 없이 행하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됨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가 ‘연(然)’자 하나에 담긴 것이다.


*연각(緣覺, pratyeka-buddha)---홀로 연기법을 깨달았다 해서 연각이라 하며, 벽지불(?支佛) 또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한다. 삼승(三乘)은 성문(聲聞)과 연각과 보살(菩薩)의 세 가지 수행 부류를 말한다. 연각은 불교의 가르침을 듣고 도를 깨닫는 성문과는 달리 외부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현상과 인연의 법칙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그리고 자기만의 깨침을 목적으로 삼아 산림(山林)에 은둔해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 독선자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보살행이 부족한 깨달은 자이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인연의 법칙을 관찰해 정각(正覺)을 이룬 뒤 삼칠일(21일) 동안 선정(禪定)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자기가 깨달은 인연의 이치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러나 정각(正覺)의 진리가 너무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대로 열반에 들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의 상태를 연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범천(梵天)이 석가모니 앞에 나타나서 법을 설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타락과 고뇌가 더할 것이므로 마땅히 설법해야 함을 간청했고, 이에 석가모니는 중생교화를 결심했다. 이때의 석가모니는 연각이 아니라 부처이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상으로는 연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연각의 독자적인 가르침도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성문→연각→보살→부처’라 해서 성문보다 연각을 우위에 놓는다. 


*연기(緣起)---원인에 의해 결과가 나타난다는 존재론, 즉 의존적 발생의 법칙이 곧 윤회의 법칙이다. 연기법 안에 있는 12개의 연결고리가 있어 이들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 속에 하나의 현상에서 또 다른 현상으로 의식체가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나의 현상이 사라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의 끝없는 연속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러한 현상을 연기라고 하며 그 작용은 어떠한 창조주나 신이라고 할지라도 시작하거나 멈출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인연에 의해 생긴다(因緣生起)는 연기의 내용이 인연생멸(因緣生滅),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시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제행무상(諸行無常)-시간적상의성-무상(無常)

        공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제법무아(諸法無我)-공간적상의성-무아(無我)

   이러한 내용들이 곧 생주이멸(生住離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의 현상이기도 하다.---→십이연기(十二緣起), 연생연멸(緣生緣滅) 참조.


*연기조사(緣起祖師)---생몰연대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흥덕현(興德縣, 현재의 전북 고창군) 출신으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지리산에 와서 화엄사(華嚴寺)를 중창하고 화엄학(華嚴學)을 널리 드러내어 퍼뜨렸다. 최근에 경덕왕 때 제작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사적이 확인됐는데, 그가 창건한 사찰로는 나주 운흥사(雲興寺),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와 연곡사(?谷寺), 대원사(大源寺)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해발 1,400m)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지리산 로터리대피소 바로 위의 법계사(法界寺)도 신라 진흥왕 때인 AD 544년에 연기조사가 가 창건했다고 한다.

 

*연꽃(蓮花)과 불교---연꽃은 불교의 이상를 상징하는 꽃으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꽃이다. 즉 연꽃은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또한 보살(菩薩)이 홀로 자신의 안락만을 위해 열반(涅槃)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을 비유로 많이 들었다. 그리고 연꽃의 막 피어오르는 봉오리는 마치 우리 불교 신도가 부처님 앞에 경건히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한다.


*연등(燃燈)의 유래---아사세왕(阿?世王)은 석존 생존 당시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의 왕으로서 빈비사라(頻婆娑羅)왕의 아들인데, 천성이 난폭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사정없이 욕하고 벌을 주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도 죽였다. 그런 그가 인도를 통일했지만 수많은 전쟁을 하다가 보니 많은 악업을 짓게 됐고, 그 죄업으로 등창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됐다. 그때 어느 불자의 권유로 석존께 귀의해 참회의 기도를 하니 등창이 나았다. 이에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의 뜻으로 등불을 밝혔는데 이때부터 연등 달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연등불(燃燈佛)---과거불인데, 붓다께서 전생에 수메다(Sumedha)라는 이름의 청년으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훗날 석가모니라는 부처로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를 준 부처이다.


*연비(燃臂)---승려가 되기 위한 득도의식 때 행하는 삭발과 함께 신체의 일부를 태우는 의식. 불가(佛家)에 출가해 승려가 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연생연멸(緣生緣滅)---불교에서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서, 인연(因緣)은 조건이나 원인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연기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현상이 일어나는 이치' 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연법 혹은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연생연멸의 법칙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 따라 소멸한다는 뜻이다. 마음은 물론 제법(諸法)이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不生不滅) 인연에 의해 생하고 인연에 의해 멸하므로 연생연멸이라,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 이처럼 인연 따라 생기고 멸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 역시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실체 또한 없다. 이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불교에서 말하는 청정과 광명이 충만 돼 있는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말한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과 광명이 충만 돼 있는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석가모니불의 정토(淨土). 이 세계는 큰 연꽃으로 돼 있고, 그 가운데 일체의 나라, 일체의 현상이 간직돼 있다고 한다. - <범망경(梵網經)>의 이야기.

   또 다른 설명,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廣大莊嚴)을 갖춘 불국토이다. 이 세계에는 큰 연화가 있고 그 가운데 일체의 국토와 일체의 사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연화장세계라 한다. - <화엄경(華嚴經)>의 이야기.

   이와 같이 화장세계에 대해서 두 이야기가 각기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경전의 설을 모두 채택하고 있다.


*열반(涅槃, 산스크리트어 Nirvana)---‘열반’이란 말은 붓다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특징이 있다. ‘열반’은 “(바람이) 불기를 멈추다. (촛불을) 불어서 끄다. (촛불이) 불어서 꺼진 상태” 라는 뜻의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말이다. 뜻을 따라 번역하면 적멸(寂滅) ? 멸도(滅度) ? 원적(圓寂) 또는 그냥 적(寂)이라고도 번역한다. 열반은 탐 ? 진 ? 치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꺼서 깨달음의 지혜를 보리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를 뜻하는데, 즉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불교의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 ? 3열반 ? 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2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태종에서는 3열반설을 따른다. 3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 ? 원정열반(圓淨涅槃) ?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이다. 4종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죽음을 대반열반(大盤涅槃) 또는 반열반(般涅槃)이라 한다. 


*열반경(涅槃經)---<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약어.---→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참조.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위대한 역경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의 4대 제자 중 하나인 승조(僧肇) 법사의 저서 <조론(肇論)>에 수록된 말이다.

   열반은 언어 밖에서 드러난다고 설한 것. 즉, 열반을 일컬어 도(道)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 형체나 이름으로 닿을 수 없고, 미묘하고 모양이 없기에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다. 도라고 부르는 열반을 어떻게 모양으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다만 텅 비어 공할 뿐이다. 도는 그렇게 깨달음, 열반, 공, 해탈, 반야의 지혜로 일컬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열반무명론(涅槃無明論)>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법신(法身)을 얻고 나면, 무위(無爲)의 경(境)에 들어간다. 그 심(心)은 지(智)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身)은 형(形)에 의해 가늠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신체는 정신과 감각이라는 두 요소를 초월하고 심지(心智)는 적멸(寂滅) 그 자체가 된다.

 

*열반4덕(涅槃四德)---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네 가지 덕, 즉 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을 일컫는다. 열반의 세계는 절대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자재(自在)한 참된 자아가 확립돼 있으며(我), 청정하다(淨)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중의 <우다나((優陀那, udana)>라는 자설경(自說經)에서 “열반이란 어떤 것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묾도, 죽음도 재생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처도 없다.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지 않는 세계이며, 더 이상 변화를 겪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재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열반경(涅槃經)>은 다른 법문도 있지마는 주로 열반사덕을 풀이한 경전이다.


*열반3덕(涅槃3德)---<열반경>에 따르면 대열반이란 법신(法身)과 반야(般若)와 해탈(解脫)의 3법(法) 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셋을 열반의 3덕(德)이라고 한다.


*염기즉각(念起卽覺) 각지즉무(覺知卽無)---망념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하택종의 수행법으로 고려 보조 지눌스님도 이 말을 지지했다.

       ※하택종(荷澤宗)---6조 혜능(慧能, 638-713)의 제자 하택 신회(荷澤神會, 684-758)를 개조(開祖)로 한 종파. 집착이 없어 텅 빈 공적심(空寂心)을 종지(宗旨)로 함.


*염리심(厭離心)---염리는 염오(厭惡)라고도 하며, 팔리어 ‘nibbida’를 한역한 것이고, 염리심과 출리심(出離心)은 같은 뜻이다. 염리심의 ‘염(厭)’ 자는 싫어할 염으로서 괴로움(고)과 괴로움의 원인(집)을 싫어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서 염리심이 발심(發心)의 원동력이다. 염리심이 아니고는 이욕(離慾)도 이탐(離貪)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염리심(출리심)이다. 진정으로 삼보에 귀의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윤회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고 깨달아서 윤회계를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선행돼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염리심 또는 출리심(出離心)이라고 한다. 즉, 염리심이 불법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므로 간절한 염리심과 함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생겨났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귀의가 이루어지고 수행에 입문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사성제(四聖諦) 중에서 고성제(苦聖諦)를 사유하면, 출리심(염리심)이 생겨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티베트불교에서는 ‘염리심은 도(道)의 시작이요, 수행자의 머리’라 칭하고 있다.


*염리예토(厭離穢土)---더럽혀진 세상을 피해 떠난다는 말. 흔구정토(欣求淨土, 깨끗한 땅을 찾아 나서다)와 짝을 이룬다. 곧 더럽혀진 세상이 싫어서 속세를 떠나 이상적인 극락세계에 갈 것을 갈망함을 이르는 말이다. 예토는 더렵혀진 국토로 부정토(不淨土)라고도 하며, 윤회가 계속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정토사상에서 나오는 말이다.---→흔구정토(欣求淨土) 참조.


*염부제(閻浮提)---수미산(須彌山) 바깥쪽 바다의 사방에 네 개의 섬(四洲)이 있는데, 그 중 남쪽 섬을 염부제(閻浮提)라 하며, 이 염부제에 인간이 살고 있다. 염부(閻浮)는 나무 이름이니, 염부나무가 번성한 나라란 뜻이고,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염부제(南閻浮提) 혹은 남섬부주(南贍浮洲)라고도 한다,---→남섬부주(南贍浮洲) 참조.


*염불(念佛, Buddha-smrti)---염불이란, 말 그대로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름과 모습을 끊임없이 마음에 집중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을 없애 깨달음을 이루고 불국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방법이다.

   염불의 종류에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고, 부처의 32상 80종호를 갖춘 원만 덕상을 관찰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으며,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염불을 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다. 염불의 대상은 대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 염불을 꾸준히 하면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고 환희심이 생기는데, 가장 손쉬운 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염불선(念佛禪)---염불은 부처님이나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고, 선은 조용히 앉아서 한 가지 물음(화두)만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염불은 한 가지 단어(부처나 보살의 이름), 선은 한 가지 물음(화두)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이 다를 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한다는 본질에는 다름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염불이나 선이 같은 말이다. 염불수행은 일반적으로 쉬운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염불삼매(念佛三昧)는 부처님을 염원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마음의 안락이다. 평안과 안정된 마음으로 염불(念佛)에 전념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억념(憶念)해 마음의 통일과 안정이 실현된 상태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도 한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고,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선 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하지만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한다.

     정법안장(正法眼藏) -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깨달음을 뜻함.

     열반묘심(涅槃妙心) -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 진리를 깨닫는 마음.

   

*영가(靈駕)---영혼(靈魂), 육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되는 정신적 실체.


*영락경(瓔珞經)---원명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과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의 비슷한 이름의 두 종류가 있다. <보살영락본업경>은 2권, 8품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승(大乘)의 보살(菩薩)이 최초에 보리심을 일으키고부터 수행을 쌓아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의 52종류의 계위(階位)를 설한 경전이다. 그리고 <보살영락경>은 14권, 45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은 대승불교의 두 가지 사상인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불교의 개론서라 할 수 있다.


*영산당시(靈山當時)---영산(靈山)은 영축산의 준말로 불교의 대표적인 성지이다.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왕사성) 주위에 있던 산이다. 그리고 ‘영산 당시’란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영축산에서 최후 십여 년 동안 법을 설했던 시기를 말한다. 부처님 일생 중 법력을 가장 활발하게 널리 펴실 무렵이었다.


*영산전(靈山殿)---영산회도(靈山會圖)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지은 전각을 말한다. 영산회도란  ‘영산 당시(靈山當時)’, 즉 영축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며 좌우에 갈라보살(竭羅菩薩)과 미륵보살이 협시한다. 그리고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가 후불탱화로 봉안된다. 영산인 영축산을 불당 안으로 모신다는 의미가 있다.


*영축산(靈鷲山)---발음대로 영취산 혹은 기사굴산(耆??山)이라 음역하기도 하며, 산스크리트어 G?dhrak??a 팔리어 Gijjak??a라 한다. 고대 중인도에 있던 마가다국(摩竭陀國, magadha國)의 도읍지인 라자그리하(왕사성/王舍城, 현재의 비하르주 라지기르)에서 동북쪽 약 3㎞ 지점에 있는 산. 정상에 있는 검은 바위의 모양이 마치 독수리 같으므로 축 혹은 취(鷲)라 한다. 인도의 영축산과 닮았다고 해서 통도사 뒷산을 영축산(1,081m)이라 한다.

   석가여래가 이곳에서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강(講)했다고 해서 신성시 하는 산이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 현장(玄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에 의하면, 산정에 벽돌로 지은 설법당 흔적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류자(預流者, sotapanna)---성문(聲聞)의 수행단계엔 사과(4果=네 단계)가 있다. 즉 깨달음의 4단계인 수다원(須陀洹=예류자), 사다함(斯陀含=일래자), 아나함(阿那含=불환자), 아라한(阿羅漢)을 성문4과라 하는데, 그 첫 단계에 이른 자가 예류자이다. 수다원(須陀洹)이라고도 하는데, 예류자는 ‘흐름에 든 자’라는 뜻으로, 깨달음 즉 성인의 길로 들어선 자라는 말이다. 예류자에 이르면 다시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자라면 죽기 전에 꼭 이루어야 할 최소한의 목표이기도 하다. 예류자가 되려면,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계(戒)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사향사과(四向四果), 수다원(須陀洹) 참조.


*오가칠종(五家七宗)---중국 선종의 6조 혜능 계통의 남종선(南宗禪) 분파를 총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오개(五蓋)---선법(善法)을 할 수 없게 하는 마음을 덮고 있는 다섯 가지 번뇌. 탐(貪) ? 진(瞋) ? 도거(掉擧) ?  혼침(昏沈) ? 의(疑)가 그것이다. 즉 탐욕이 마음을 덮는 탐욕개(貪慾蓋), 분노가 마음을 덮는 진에개(瞋?蓋), 마음이 흐려지는 수면개(睡眠蓋), 마음이 들뜨고 불안 근심이 생기는 도회개(掉悔蓋), 법에 대한 확신이 없이 부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의법개(疑法蓋)이다.    

     ※참고---속마음이 어둡고 산란한 것을 ‘면(眠)’이라고 말한다.


     ※기오개(棄五蓋)---다섯 가지 번뇌의 덮임[오개(五蓋)]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1)탐욕---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비롯해 모든 욕망의 근원은 ‘나’라는 환상과 내 것이라는 집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필사적인 애착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정관(不淨觀)을 닦는 것이 도움이 된다.

     2)성냄---악의란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일에 대한 성내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탐욕 다음에 경계해야 할 것이 성냄이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비관(慈悲觀)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3)들뜸과 회환---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유희에 빠지는 것을 몸의 들뜸이라 한다. 그리고 읊고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익 없는 담론을 장황하게 설하는 것을 입의 들뜸이라 한다. 이러한 들뜸과 회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해야 하며, 산란한 마음을 극복하는 대처법으로 호흡관(呼吸觀)이 있다.

     4)혼침과 해태(懈怠)---정신적 해이와 육체적 졸음에 대한 극복방법은 사수념(死隨念)이라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모든 것은 무상함을 관하면, 정신이 번뜩 들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참선 중에 애를 먹는 부분 중의 하나가 졸음이다. 수마(睡魔)라고 할 정도로 위력적으로 덤벼든다.

     5)회의적 의심---의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것은 도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의 해로움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믿고, 스승을 믿으며, 법을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해야 흔들림 없이 정진할 수 있다.


*오견(五見)---견혹(見惑)에 해당하는 오리사(五利使)와 같은 말. 즉, 잘못된 다섯 가지 견해로서 신경(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을 일컫는다. 여기서 ‘리(利)’는 예리하다는 뜻이고, ‘사(使)’는 번뇌란 말이다. 번뇌가 중생들의 마음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뜻이다. 이 오리사는 지적인 번뇌이므로 바른 정견(正見)을 얻으면 쉽게 끊을 수 있으나 오둔사(五鈍使)는 본능적인 번뇌라서 끊기가 힘들다. 이 오리사와 오둔사를 합하면 열 가지가 되는데 이를 근본번뇌라 한다.

     ① 신견 -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오온(五蘊)이 인연화합해서 이루어진 ‘나’를 영원한 존재로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

     ② 변견 - 편벽된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어느 한쪽에 얽매여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극단적인 견해.

     ③ 사견 - 삿된 견해로서 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 정견(正見)의 반대말, 자신도 모르면서 아는 체 남을 속이는 것.

     ④ 견취견 - 그릇된 견해를 바른 것으로 간주해 거기에 집착하는 것. 졸렬한 지견(知見)을 잘못 믿고 스스로 훌륭한 견해라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

     ⑤ 계금취견 - 잘못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드는 것. 인(因)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도(道) 아닌 것을 도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오둔사(五鈍使), 10사(十使), 견혹(見惑) 참조.


*5경(境)---5근(五根)의 대경(對境)인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을 말함.


*오계(五戒)---불교에 입문한 신도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 불교도이면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규범이다.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②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③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⑤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의 5종이다.


*오과(五果)---원인에 의한 결과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

     1) 증상과(增上果) - 원인이 조건의 도움으로 생긴 결과.

     2) 사용과(士用果) - 사용(士用)은 원인의 강한 세력을 남자의 동작에 비유한 말.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결과.

     3) 등류과(等流果) - 좋은 원인에서 좋은 결과, 나쁜 원인에서 나쁜 결과처럼, 원인과 성질이 같은 결과.

     4) 이숙과(異熟果) - 원인과 다른 성질로 성숙된 결과. 원인은 좋거나 나쁜데 성숙된 결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것.

     5) 이계과(離繫果)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결과, 곧 열반.


*오관게(五觀偈)---공양할 때 외우는 다섯 구의 게송을 말한다. 사찰에서는 공양도 하나의 의식이자 수행이다. 공양물이 앞에 놓이면 먼저 죽비를 한 번 치고 대중이 함께 오관게를 외운다. 식사 전에

    ① 이 음식이 어디서 왔으며, 여기 오기까지 공이 얼마나 든 것인가를 생각한다(計功多少 量彼來處),

    ② 자기의 덕행이 공양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한다(村己德行 全缺應供),

    ③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防心離過 貪等爲宗),

    ④ 밥 먹는 것을 약으로 생각하고, 몸의 여윔을 방지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관한다(正思良藥 爲療形枯),

    ⑤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해 이 공양을 받는 것임을 관한다(爲成道業 應受此食).


*오교(五敎)---화엄오교(華嚴五敎)라고도 말함. 부처님이 행한 일생의 가르침을 화엄종의 입장에서 5종으로 분류해 설명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이는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여러 분류 방법이 있으나 당나라시대 법장(法藏)이 설한 오교가 유명하다. 화엄종에서 불교 교리의 얕고 높음에 따라 우열을 판단하는 오교(五敎)는 아래와 같다.

     1) 소승교(小乘敎) -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인연기(十二因緣起)를 설한 아함경의 가르침을 말함.

     2) 대승시교(大乘始敎) -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고 설한 반야경과 해심밀경(解心密經) 등의 가르침을 말함.

     3) 대승종교(大乘終敎) - 실교(實敎)라고도 하며,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한 능가경(?伽經)이나 기신 (起信論)의 가르침을 말함.

     4) 돈교(頓敎) - 문득 이성(理性)을 버릴 것을 설한 유마경의 가르침을 말함.

     5) 원교(圓敎) - 원만하고 완벽한 일승(一乘)을 설한 화엄경의 가르침을 말함. 결국 화엄경의 가르침이 최고라는 것을 유도하기 위한 분류인 셈이다.


*오구연(具五緣)---천태대사 지의(智?/지관)가 제시한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

     1) 지계청정(持戒淸淨) -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율은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참선수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2) 의식구족(衣食具足) - 옷과 음식을 갖추는 것이다. 수행자는 오직 굶주림과 추위만을 면할 뿐 사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아예 갖추지 않는 것도 선수행을 방해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옷가지와 음식물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3) 한거정처(閑居靜處) -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산란하고 시끄러움을 멀리 피하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한적하고 조용해야 곧 선을 닦을 수 있다.

     4) 식제연무(息諸緣務) - 모든 인연 있는 일을 쉬는 것이다. 작위적인 모든 사업을 하지 않고 세속적인 왕래를 좇거나 찾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오직 선을 닦을 뿐이다. 몸과 마음에 일이 많으면 수행을 할 수 없다. 수행인은 세속의 일을 줄여 주변을 정리하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5) 근선지식(近善知識) - 참선수행에 있어서는 선지식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선지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밖에서 보호하는 선지식으로서, 살림을 꾸리고 공양해 수행인을 잘 보호하며 어지럽지 않게 하는 분.

   둘째는 함께 행하는 선지식으로서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채찍질해주고 북돋아주며 서로 어지럽게 하지 않는 분.

   셋째는 가르쳐 주는 선지식이니 내외방편과 선정의 법문으로 가르쳐 이익 되게 하는 분이다. 모든 수행에 선지식이 필수적이지만 특히 참선수행에서는 선지식이 더욱 중요하다. 만공스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으로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이니라.”


*오근(五根)---인간의 감각기관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등 다섯을 일컫는다. 이 다섯 감각기관이 감각과 인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근(五根)이라고 한다.


*오근(五根)---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다섯 가지 뛰어난 능력, 5가지 기능을 말한다. 번뇌에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불법 가운데 도의 뿌리를 깊이 내려 세속법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37조도품(助道品)에 포함된다.

    ① 신근(信根) - 믿음(saddh?)의 기능 - 신념이 도법에 굳게 뿌리를 내리는 바르고 굳은 믿음으로 수행의 뿌리를 내리는 것.

    ② 정진근(精進根) - 노력(viriya)의 기능 - 올바른 정진으로 수행에 물러섬이 없는 것.

    ③ 염근(念根) - 알아차림(sati)의 기능 - 바른 가르침인 불법을 항상 깊이 생각하는데 뿌리를 내려 바르게 기억하는 것.

    ④ 정근(定根) - 집중(sam?dhi)의 기능 - 바른 선정에 뿌리를 내려 마음을 고요히 해 올바른 마음을 가짐.

    ⑤ 혜근(慧根) - 지혜(pa???)의 기능 - 불법의 진리를 여실히 통찰해 올바른 지혜에 뿌리를 내리는 것.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믿음(saddha)은 지혜(pa???)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집중(sam?dhi)은 노력(v?riya)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알아차림(sati)은 다른 기능들과 균형을 이룰 필요는 없지만 지속적이어야 하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이 알아차림은 다른 네 기능이 제각기 목적지에 이르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 둘이 모두 균형을 이룸으로써 근본 집중을 얻는다.


*오도송(悟道頌)---승려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 짓는 시가. 승려들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감흥이 일면 이를 게송으로 읊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둔사(五鈍使)---활동이 느리고 둔한 다섯 가지 번뇌.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의 다섯을 말함. 이 오둔사는 태어남과 동시에 따라오는 선천적 번뇌이고, 훈습적(薰習的)인 번뇌라서 끊기가 힘들다.---→오리사(五利使), 10사(十使) 참조.

   

*오력(五力)---오신력(五信力)이라고도 하는데, 수행에 필요한 다섯 가지 힘. 오근이 뿌리가 되어 실제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다섯 가지 힘.

    ① 신력(信力) - 불법을 믿고 진리 아닌 것은 따르지 않는 힘.

    ② 정진력(精進力) - 선을 짓고 악을 버리기에 부지런히 수행에만 전념하는 힘.

    ③ 염력(念力) - 바르게 생각해 그릇된 생각을 버리며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힘.

    ④ 정력(定力) - 선정(禪定)을 닦아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힘.

    ⑤ 혜력(慧力) - 지혜를 닦아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깨닫는 힘.

   오력은 오근(五根)과 맥을 같이 하며,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에 포함된다.---→오근(五根) 참조.


*오리사(五利使)---오견(五見)과 같은 말.---→오견(五見), 견혹(見惑) 참조.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천태종에서 중시하는 다섯 경전, 즉 화엄경, 대집경, 대반야경, 법화경, 열반경을 말함.


*오분법신(五分法身)---부처와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다섯 가지 공덕. 식(識)으로 존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중생의 존재 방식은 오취온(五取蘊)이고, 반야로 법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수행자의 존재 방식은 오분법신의 관계에 있다. 오취온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생사의 괴로움이 있고, 오분법신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열반의 즐거움만이 있다.

   즉, 여러 단계의 수행을 거쳐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공덕을 갖춘 것을 오분법신이라 하는데, 부처님과 아라한이 갖게 되는 법체(法體)를 말한다. 구체적인 오분법신(五分法身)이란, 

      ? 계신(戒身) - 일체의 허물에서 벗어난 모습.

      ? 정신(定身) - 일체의 망념을 떠난 모습.

      ? 혜신(慧身) - 일체의 진리를 통달한 모습.

      ? 해탈신(解脫身) - 일체 얽히고 묶인 것에서 벗어난 모습.

      ?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 - 본성은 본래 물들지 않아서 해탈인 상태를 혼자서 증지(證知)한 모습.


*오분향례(五分香禮)---오분향례란 오분법신(五分法身)인 부처님과 모든 성현들께 향(香)을 공양하고 예(禮)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오시교판(五時敎判=오시팔교)---천태종(天台宗)의 교상판석(敎相判釋), 즉 여러 경전을 설법의 형식과 방법 및 내용에 따라 분류를 해서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5시와 8교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오시팔교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각종 교판(敎判)을 이어받아 전체 불교를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에서는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가 발달하고, 다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초창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 인도불교의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소승경전(원시경전)과 대승경전이 순서 없이 마구 뒤섞여서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래서 소승경전과 대승경전들 간에 교리상의 해석에 차이가 있어 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 없이 중국에 전래된 불교의 교파 나름으로 경전에 대한 비중과 가치를 판단하게 됐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한다. 이 교상판석은 중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했다.

   ? 교상판석(敎相判釋) -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한 가르침을 분석해 그 성격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한 한 것을 말한다. 줄여서 교판(敎判)이라고 한다.

   ? 오시교판(五時敎判)=오시팔교(五時八敎)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개조인 수(隋)나라의 지의(智?, 538∼597)가 천태종의 입장에서 교상판석을 한 것을 말함.

   인도에서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된 불교가 그 순차와 상관없이 중국에 전래됐기 때문에, 그 차이와 모순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경전 및 교리를 분석 ? 판단해서, 부처님 일대(一代)의 설법의 순서를 시간적으로 분류해 ‘오시(五時)’로 나누고, 모든 경전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해 여기에 재배치했다. 즉, 부처님께서 49년간 설하신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 팔만대장경이고, 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다섯 단계로 분류한 것을 오시교라 한다. 오시교판은 화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 열반시의 오시(五時)를 말한다.

      1) 화엄시(華嚴時) - 성도 후 최초의 21일간 화엄경을 설한시기.

      2) 아함시(阿含時) - 화엄시 이후 12년간 소승들을 위해 아함경을 설한 시기.

      3) 방등시(方等時) - 아함시 이후 8년간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 방등부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

      4) 반야시(般若時) - 방등시 이후 21년 동안 반야부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

      5)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최후의 8년간 법화경, 열반경을 설한 시기.

   그리고 팔교(八敎)란 가르침으로 이끄는 형식과 방법을 4종으로 나눈 화의사교(化儀四敎), 사람들의 성질 ? 능력에 대응해 가르치는 교리 내용을 4종으로 나눈 화법사교(化法四敎) 등으로 비판 ? 정리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같은 교판은 수많은 경전을 독자적 사상체계로 분류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업이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로 비판돼 지금에 와서는 전혀 존중되지 않고 있다.


*5식(識)---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의 다섯 식을 말하며, 이를 전5식(前五識)이라고도 한다.

   오온(五蘊)이란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우주만물의 현상인 객체가 다 색(色)이고, 그것을 주체인 내가 받아들이는데, 수(受) ? 상(想) ? 행(行)을 거친다. 색이 오관작용에 의해 접촉됨을 수(受)라 하고, 그것을 의식함이 상(想)이고, 그것을 정리해서 마음에 전달함이 행(行)이다. 그 과정을 거쳐 마음에 도착하면 이것이구나, 저것이구나 하는 의식을 일으켜 지각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식(識)이라 한다. 그 식을 눈, 코, 귀, 혀, 몸을 통해 인식하는 것을 오식(五識)이라 한다.


*오신채(5辛菜)---수행자가 먹지 말아야 하는 채소. 마늘, 파, 부추, 고추, 미나리-기록에 따라서는 고추, 미나리 대신으로 달래, 흥거(興渠, 무릇)라고도 말함. 부처님 당시부터 직접 먹어서도 또는 다른 음식에 곁들어 먹어서도 안 될 것들로 수행자들이 경계해야 할 음식이다.

    무릇---아스파라거스목 히아신스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이 원산이며 일본과 중국에도 서식한다. 어린잎을 조려 먹는다. 한방에서는 이를 면조아(綿棗兒)라고 해서 해독 혹은 요통, 타박상에 처방하는 약으로 쓴다.


*오신통(五神通)---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고 행함으로써 갖추게 되는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신통력.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을 이른다. 여기에 누진통((漏盡通)이 더해지면 육신통이 된다.---→육신통(六神通) 참조.


*오십이위(五十二位)---대승(大乘)의 보살이 최초에 보리심을 일으키고부터 수행을 쌓아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의 52종류의 계위(階位)를 말한다. <영락경(瓔珞經)>에 설하고 있는 보살의 52위를 열거 해보면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각 10계위가 있어 50단계이고, 그 다음에 51위인 등각(等覺), 52위인 묘각(妙覺)을 거쳐 부처에 이른다.

     ※ 영락경(瓔珞經)---원명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과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의 영락경은 <보살영락본업경>을 뜻한다.---→영락경(瓔珞經) 참조.


*오안(五眼)---수행의 정도에 따라 갖추게 되는 다섯 가지 눈.

     1) 육안(肉眼) - 가려져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범부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눈.

     2) 천안(天眼) - 겉모습만 보고 그 본성은 보지 못하는, 욕계 ? 색계의 천인(天人)이 갖추고 있는 눈.

     3) 혜안(慧眼) - 현상의 이치는 보지만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성문(聲聞) ? 연각(緣覺)의 눈.

     4) 법안(法眼) -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두루 아는 보살의 눈.

     5) 불안(佛眼) -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보살들은 오안(五眼) 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데, 형상을 보는 육안(肉眼)은 맑고 밝아서 모든 사물을 분명히 알아보지 못함이 없고, 천안(天眼)을 통달해 시방세계와 과거, 현제, 미래의 삼세 등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보는데 걸림이 없으며, 법안(法眼)을 통달해 일체 만유의 차별상을 관찰하고 가지가지 가르침을 밝히며, 혜안(慧眼)을 통달해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 능히 영생의 피안에 이르며, 가지가지 지혜의 안목을 원만히 갖춘 법안(法眼)으로서 일체 만법의 근본실상을 사무쳐 깨달아 있다.


*오온(五蘊)---산스크리트어 pa?ca-skandha, 팔리어 pa?ca-khandha. ‘온(蘊)’이란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와 팔리어 칸다(khandha)의 역어로서 덩어리, 무더기, 혹은 집합(적취/積聚)을 의미한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으로서 불교에서는 인간을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온으로 관찰한다. 이 다섯 감각기관이 감각과 인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근(五根)이라고 한다. 여기서 색은 몸이고, 수 ? 상 ? 행 ? 식은 생각인데, 결국 오온이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라는 구성요소이자, 인간들이 살아 생존해 움직이는 정신적과 육체적 활동을 말한다.           

      ? 색(色, 루파/rupa)---색은 물질적인 형태로서 육체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로 이루어지고, 감각기관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등 다섯 감각기관으로 이루어진다.

      ? 수(受, 베다나/vedana)---수는 감수 작용 - 느낌인데, 의식 속에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 즉 색인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 다섯 기관(오근)으로 느끼는 감정 ? 감각, 영어로는 필링(feeling)이다.

   이처럼 오근(색온)이 어떤 대상을 만나서 일어나는 느낌을 수(受)라고 하고, 이때의 대상을 경계 혹은 경(境)이라 한다. 예를 들면, 눈(안근)이 좋은 그림(경)을 만나서 즐거움을 느끼(수)는 것과 같다. 이때 색온인 눈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식온도 작용을 해서 즐거움을 느낀(수)다. 따라서 식온이 색온인 육체(눈)와 연결됨으로써 수(受) 즉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감정이 발생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곱다, 밉다, 시끄럽다, 조용하다, 비리다, 쿠리다, 좋은 냄새다, 달다, 쓰다, 매끄럽다, 거칠다, 좋다, 싫다, 즐겁다, 괴롭다, 쾌ㆍ불쾌, 고, 락, 불고불락 등의 일차적 단순 감정의 느낌을 수(受)라고 한다.   

      ? 상(想, 삼스냐/samjna)---상은 표상과 지각 작용으로 의식 속에 심상(心像)을 취하고 구성하는 것, 마음속에 어떤 것을 떠올려 개념 ? 관념을 형성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즉 이미 축적돼 있는 정보와 연관 지어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지각하고 이름 짓는 표상작용을 일컫는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해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이리 저리 생각해서 언어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꽃이 있다면 눈(안근)이 그것(경계/경)을 보고 예쁘다고 느낀다면 수온이지만, 이것을 장미꽃이라 인식하든지, 국화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상(想)이다. 

      ? 행(行, 산스카라/samskara)---팔리어로는 ‘상카라(sankhara)’라 하며, 행위를 낳는 의지작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심적작용 ? 심리현상을 말한다. 즉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작용이다.

   인간의 정신작용 중, 행동하게끔 해주는 능동성. 의지와 욕구. 기억, 추리, 그 이외에 감각, 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선업의 마음(믿음, 양심, 수치심), 불선업의 마음(탐, 진, 치)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행은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 ? 상 ? 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한다. 즉 심리현상을 포괄하고 있다.     

      ? 식(識, 비지냐나/vijnana)---식은 느낌(수)과 인식(상)과 심리현상들(행)과 같은 마음부수(심소/心所=마음의 부분적 속성)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상을 아는 것, 즉 모든 인식의 주체가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분별, 인식, 판단 및 그 작용을 말하는데, 식별(識別, 요별/了別)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

    오온이란 색온(色蘊, 루파스칸다/rupaskandha), 수온(受蘊, 베다나스칸다/vedanaskandha), 상온(想蘊, 삼나스칸다/sam-jnaskandha), 행온(行蘊, 삼스카라스칸다/samskaraskandha), 식온(識蘊, 비즈나나스칸다/vijnana-skandha), 이렇게 다섯 가지의 구성요소를 말한다.


*5욕(五慾)---1)식욕(食慾), 2)장수욕(長壽慾) 혹은 수면욕(睡眠慾), 3)성욕(性慾 = 색욕/色慾), 4)물욕(物慾 = 재욕/財慾), 5)명예욕(名譽慾) 혹은 권력욕(權力慾).

    ※불교에서는 5욕을 즐기는 것을 오욕락(五慾樂)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오욕을 멀리하면 할수록 법락(法樂)을 즐길 수가 있다. 우리는 깨달음의 법락을 미처 맛보지 못해서 그런데,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법락은 더욱더 증가되며, 그 법락은 한도 끝도 없다.


*오위(五位)---유식설(唯識說)에서, 수행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도 5위(修道5位)를 말함.

      1) 자량위(資糧位) -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를 쌓는, 선근과 공덕을 쌓는 준비단계로서, 나와 너가 서로 짝으로 존재하고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는 진리를 머리로 깨달은 상태다.

      2) 가행위(加行位) - 가행도(加行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하는데,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제1위 자량위(資量位)의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로서 인식의 주객(主客)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해 현상을 나와 너,또는 나와 대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정신적 습관을 자각하고, 그러한 습관을 제거하는 훈련을 닦아 나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唯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번뇌가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은 모두 허구라고 주시하는 단계이다.

      3) 통달위(通達位) -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이치를 체득하는 단계. 즉,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우주의 진리를 체득하는 단계이다.

      4) 수습위(修習位) -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우주의 진리를 여러 번 되풀이해 체득하는 단계이다.

      5) 구경위(究竟位) -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이다.


*오음성고(五陰盛苦)---팔고(八苦)의 하나로서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도 한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그 자체가 곧 괴로움이란 의미이고,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곧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중생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5온(五蘊, 五陰)이 불같이 일어나서 괴로움이 생기는데, 오온(五蘊 ??????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이란 것도 다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거늘, 이를 무상하게 보지 못하고 나의 몸과 마음(아상/我相)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 이에 집착함으로써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오의평등五義平等)---대상의 전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작용인 심왕(心王)과, 심왕에 부수적으로 일어나 대상의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 작용인 심소(心所)의 다섯 가지가 동등한 성질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1) 소의평등(所依平等) - 심왕이 육근(六根) 가운데 어느 것을 의지처로 하면, 심소도 같은 것을 의지처로 해 일어남.

     2) 소연평등(所緣平等) - 심왕과 심소는 대상을 같이 함.

     3) 행상평등(行相平等) - 심왕과 심소에 나타나는 대상의 모습은 같음.

     4) 시평등(時平等) - 심왕과 심소는 동시에 일어남.

     5) 사평등(事平等) - 심왕과 심소는 각각 하나씩 일어나고, 동시에 둘 이상의 심왕과 심소가 일어나지 않음.


*오정심관(五停心觀)---삼현(三賢)인 오정심관(五停心觀), 별상염주(別相念住), 총상염주(總相念住)의 하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번뇌(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제거하기 위한 5가지 수행법이다.

   우리들의 내적인 마음의 평화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불건강한 심리상태는 탐 ? 진 ? 치의 3독심과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 그리고 분별하는 산란한 마음이다. 이들 5가지 불건강한 마음을 정화하고 해독하기 위한 사마티와 위빠사나에 의거한 수행방법이 오정심관이다.   

      1) 부정관(不淨觀) -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 육체의 부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탐욕과 애욕을 조절하도록 하는 수행법.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더럽고 부질없는 모습인가 육신의 덧없음과 더러운 모습을 관하는 것

      2) 자비관(慈悲觀) - 사람들이 성내고 다투는 마음을 그쳐 자비로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자비심으로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

      3) 인연관因緣觀) -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치를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것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는 것.

      4) 계분별관(界分別觀) - 나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버리기 위해 오온(五蘊) ? 십팔계(十八界) 등을 주시함.

      5) 수식관(數息觀) - 참선 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별상염주(別相念住)---신체는 깨끗하지 못하며, 느낌이나 감정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항상 변하며,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주시하는 수행법.

        ※총상염주(總相念住)---신체와 느낌이나 감정과 마음과 현상은 모두 변하며, 괴로움이며, 공(空)이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주시하는 수행법.


*오조가사(五條袈娑)---다섯 가닥의 헝겊을 꿰매어 붙여 만든 승려가 장삼 위에 걸쳐 입는 옷. 인도에서는 일할 때나 잠잘 때 입었으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법의(法衣)로 입었다.

     

*오중(五衆)---불제자 중에서 출가한 자를 다섯 종류로 나누어, 비구, 비구니, 식차마나 (式叉摩那), 사미, 그리고 사미니로 구별한 것.


*오체투지(五體投地)---오체는 몸의 다섯 부분인 두 팔꿈치와 두 무릎, 이마를 말한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엎드려 하는 절을 일컬음. 이런 오체투지는 자신의 아만심과 교만을 물리쳐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과 삼보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최고의 공경법이다.


*오취온고(五取蘊苦)---오음성고(五陰盛苦)와 같은 말.---→오음성고(五陰盛苦) 참조.


*오행(五行)---불교에서의 오행은 유학에서의 오행과는 사뭇 다르다. 불교에선 보살의 다섯 가지 수행을 말한다.

    1) 성행(聖行) - 계율과 선정과 지혜로써 행함.

    2) 범행(梵行) - 청정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괴로움을 덜어 줌.

    3) 천행(天行) - 자연의 이치에 따름.

    4) 영아행(?兒行) - 지혜가 얕은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이 행하는 작은 선행(善行)을 같이 행함.

    5) 병행(病行) - 평등심에서 중생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번뇌와 괴로움의 병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임.


*옥야경(玉耶經)---불교의 입장에서 어진 아내의 도리를 들려준 경전. 중국 동진(東晋)시대에 축담무란(竺曇無蘭)이 한역(漢譯)했고, 승가제바(僧伽提婆)도 번역했다. 부처님에게 기원정사를 희사한 사위국(코살라국;舍衛國)의 장자 수닷타[sudatta, 수달(須達)=급고독(給孤獨;아나타 핀디카)]의 며느리 옥야에게 부녀자의 도리를 설한 경이다.


*옥천사(玉泉寺)---수의 양제(煬帝)가 지자(智者)대사 지의(智?, 538~597)를 위해서 내린 중국 형주(荊州)에 있는 사액(賜額) 사찰이다. 중국 불교사에서 옥천사가 갖는 위상은 대단하다. 천태종의 지자, 북종의 신수(神秀), 남종의 신회(神會)와 회양(懷讓) 등이 수행과 교화를 해서 선종의 3개 종파가 탄생한 사찰이다.


*옴(Om, 唵)---산스크리트어 ‘옴(Om)’이라는 음절은 하늘 ? 땅 ? 대기의 삼계(三界)를 의미하며, 일체를 가득하게 하고, 일체의 근본이며,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거룩한 소리이다. 원래는 헤브라이어의 '아멘'에 해당되는 말로, 승낙을 나타내는 경어였으나 불교에서는 옴을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으로 보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상징한다.

   옴 마니 반메 훔(Om Mani Pedme Hum)의 첫 글자. 옴은 절대적인 의식을 상징하는 신성한 음절로서 모든 만트라(眞言)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만트라이다. 옴에는 모든 만트라가 포함돼 있으며, 모든 만트라는 옴으로 시작된다. 옴은 태고의 떨림이며, 옴의 근본적인 가치는 의식의 영원한 진동이다. 우주는 옴에서 시작돼 옴에서 휴식을 취하고, 옴으로 사라진다. 이 불멸의 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래 도형은 옴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위쪽 초승달 모양은 마야(Maya,환영)의 형상이며, 그 위의 점은 초월의 상태이다. 아래의 긴 곡선(3 모양)의 등에 붙은 꼬부랑(곡선)은 꿈꾸지 않은 깊은 수면의 상태, 긴 곡선(3자 모양)의 아래 끝은 ‘꿈꾸는 상태’, 3자의 위 끝은 ‘깨어 있는 각성의 상태’                          

  

*옴 마니 반메 훔(唵???美?)=(Om Mani Pedme Hum)---<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고 하는데, 원명은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이라는 긴 이름이다. 이 진언(眞言, Mantra)은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인데,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말로 모든 복덕, 지혜, 공덕, 행의 근본이 되는 아주 소중한 진언이다. 여기서 ‘육자(六字)’는 글자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육도의 중생을 뜻하는데, 각각의 글자마다 여러 뜻이 있고, 글자마다 공덕이 다르다.

  

     ? 옴(Om) - 태초 이전부터 울려오는 우주의 소리(에너지)를 의미하며, 보통 성음(聖音)이라 한다.

     ? 마니(mani) - 여의주(如意珠)로서 깨끗한 지혜를 상징하고,

     ? 반메(padme) - 연꽃으로서 무량한 자비를 상징한다.

     ? 훔(Hum) - 우주의 개별적 존재 속에 담겨 있는 소리를 의미하며, 우주 소리(Om)를 통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육자진언은 「온 우주(Om)에 충만해 있는 지혜(mani)와 자비(padme)가 지상의 모든 존재(hum)에게 그대로 실현될지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사람의 내면적 에너지(지혜와 자비)를 활성화시켜서 우주의 에너지와 통합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법계(우주)에 두루한 지혜와 자비가 수행자에게 실현된다고 한다. 


*왕사성(王舍城, 산스크리트어 R?jag?ha)---옛 마가다국(Magadha國)의 도읍지.---→라자그리하(산스크리트어 R?jag?ha, 왕사성/王舍城) 참조.


*왕생(往生)---불교에서 사람이 죽은 후 다른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서방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날 것을 원하는 극락왕생(極樂往生),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불국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시방(十方)왕생,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兜率)왕생 등이 있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통일 신라 시대인 727년(성덕왕 26)에 혜초(慧超)가 고대 인도와 인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당나라에 돌아와서 쓴 여행기이다.

   혜초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인 704년에 태어나서, 20세 때인 723년 당나라로 유학 가서 인도 출신 밀교 승려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의 제자가 됐다. 혜초는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에 배편으로 중국을 출발해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을 거쳐 인도로 갔다.

   그 뒤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727년에 당시 안서도호부가 있던 구자(龜玆) - 즉, 현재의 중국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 -를 거쳐 중국의 장안에 돌아왔다. 그 뒤 혜초는 신라에는 돌아오지 않은 듯하며, 오로지 중국에서 밀교의 연구에 몰두하다가 780년 산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열반했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 문학 사상 최초의 외국 기행문이며, 한국 문학사에서 완결된 도서의 형태로 전하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Pelliot, P.)가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에서 발견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권자(卷子) 형태-두루마리 형태로 된 필사본 1권이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요가(yoga, 瑜伽)---요가는 명상과 호흡,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 수련 방법을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서 ‘유즈(yuji, 결합하다)’에서 시작해서 ‘yoga’가 됐다. 음역하면 유가(瑜伽)가 되고, 의역하면 '상응한다'는 뜻이 된다.

   요가는 정신적인 도구상자이고 육체적인 건강과 안녕이다. 자세와 호흡을 가다듬어 정신을 통일 ? 순화시키고, 또는 초자연력을 얻고자 행하는 인도 고유의 수행법이다. 인도 고대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하는 상키아(S?mkhya:數論派)와 요가파(瑜伽派)로 발전했으며, 당시의 모든 학파는 그 실천방법으로서 요가를 수련했고, 불교에서의 무념(無念) ? 무상(無想) ? 무심(無心)의 참선이나 결가부좌(結跏趺坐)도 바로 요가에서 온 것이다.


*요사채(寮舍寨)---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이르는 말로서 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창고, 우물, 장독, 세탁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한데 모여 있다. 법당에 대웅전과 극락전 등의 이름이 붙듯, 요사채에도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붙는다.

       ? 심검당(尋劍堂) -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의미를 가진 요사채

       ? 적묵당(寂默堂) - 말없이 명상한다는 의미를 가진 처소

       ? 해행당(解行堂) 또는 수선당((修禪堂) - 올바른 행과 참선하는 장소

       ? 설선당(說禪堂) -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된 처소

       ? 노전(爐殿) - 의식을 집전하는 곳. 이곳에서 향을 피워 예불을 집전을 함으로 봉향각(奉香閣),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고도 한다. 

       ? 염화실(拈花室). 반야실 - 조실스님이나 노장, 대덕스님들이 머무는 처소.

       ? 향적전(香積殿) - 향나무로 땔감으로 해 법당에 올릴 공양을 짓는다는 뜻.


*요의경(了義經)---‘요의(了義)’란 명백하게 풀이된 궁극의 참뜻이란 말이고, ‘요의경’이란 특정 불경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대로 드러낸, 진실하고 확실한 불법의 도리를 이치를 완벽하게 나타낸 경전’이라는 보통명사이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사람과 말과 식(識)과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법과 뜻과 지혜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라.”고 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은 매우 체계적이고 이론적이어서 경이라기보다 논에 가까운 경전인데, 스스로를 요의경이라 하고 반야부 경전이나 소승경전들은 완전하지 않은 가르침이라 해서 불요의경이라 했다. 이와 같이 대승에서는 소승을 모두 <불요의경(不了義經)>으로 봤다.

   그리고 ‘아비달마’의 자기 논리에 의하면, 부처님의 법문이라 할지라도 그 법문을 듣는 이에 따라 중층적으로 설해졌기 때문에 거기에는 당연히 궁극적인 경(了義經)과 그렇지 못한 경(不了義經)이 있다. 그리고 요의경 역시 그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어떤 표준적 근거에 의해 정리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해석을 하는 그것이 바로 ‘아비달마’라고 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요(饒)는 넉넉할 요, 익(益)은 더할 익이다. 그래서 중생을 넉넉하게 이익 되게 하라. 남을 이익 되게 하면 나도 저절로 좋아진다는 말로서, 자리이타(自利利他)란 말과 같다. 즉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워야 하니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고, 남이 잘 돼야 나도 잘 된다는 뜻이다.---→견성성불 요익중생(見性成佛 饒益衆生) 참조.


*욕계(慾界)---욕계(欲界)란 5욕락(欲樂)의 탐욕(貪慾)으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거칠며 물질에 속박돼 사는 가장 어리석은 중생이 사는 곳이다. 다시 말해 감각기관으로 생기는 욕망의 세계이다. 욕계는 6천(天)이라 해 6개의 하늘이 있고 색계는 18계의 하늘이 있으며 무색계는 4개의 하늘이 있다.

   욕계삼욕(慾界三慾)이라 해서 식욕 ? 성욕 ? 수면욕 등의 욕망을 가진 중생들이 사는 세계가 욕계이다. 윤회 가운데 있는 6가지 존재 양태 가운데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 인간(人間) 등의 5가지와 욕계 6천(육욕천/六慾天)이 여기에 속한다.

     ※욕계(欲界) 6천(六天)---욕육천(欲六天)이라고도 한다. 욕계에 딸린 6종류의 하늘. 즉, 사천왕천(四天王天) ? 도리천(?利天) ? 야마천(夜摩天) ? 도솔천(兜率天) ?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등 여섯 하늘을 말한다.


*욕두(浴頭)---사찰에서 승려들의 목욕물을 준비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승려.


*용문석굴(龍門石窟)---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남쪽 14km에 있다. 북위(北魏) 시대인 5세기 말부터 초기 당(唐)시대인 9세기까지 조성된 석굴군이다. 중국의 불교문화뿐 아니라 빼어난 건축, 조각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돼 있다.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돼 있고, 내부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돼 있다.


*용수(龍樹)→나가르주나


*용화전(龍華殿)---미륵전의 다른 이름(미륵불을 모신 전각).


*우다나(優陀那, Udana)---불경 서술 형태를 구분한 십이분경(十二分經)의 하나. ‘우다나’란 감흥해 저절로 나오는 말을 가리킨다. 한역하면 자설(自說) 또는 무문자설(無問自說)이다. 우다나경은 부처님의 우다나를 모은 것으로, 팔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쿳다까니까야)의 세 번 째 경전이다. 모두 8장이며, 각 장은 다시 10경(經)을 담고 있으므로 총 80경이 된다.

   대개 게송으로 이루어지며, 앞부분에는 ‘거기서 세존은 이것을 알고, 그때 이 우다나를 발했다’라는 말이 반드시 붙는다. 그리고 끝에서 우다나가 왜 나왔는지를 산문으로 설명한다. 부처의 전기에 관한 것이 주된 내용이고 그밖에 사상적으로 중요한 교설도 포함하고 있다.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감흥어린 시구들을 그 인연담과 함께 들려주는 초기경전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위대한 경전이다.---→무문자설(無問自說), 십이분경(十二分經) 참조.


*우담발화(優曇鉢花)---인도, 스리랑카 등지에서 자생하는 뽕나무과의 식물에서 피는 꽃 이름. 나무 크기는 한길 남짓하며, 잎은 15cm 정도이고, 잎 모양은 뾰족한데 끝이 가늘다. 암수 다른 꽃이 피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은화 식물이다.

   인도 전설에서 여래(如來)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 피어난다는 꽃이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상상속의 꽃이다. 불경에서는 우담발화가 3천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고 해서 상서로운 일 또는 매우 희유한 일에 비유하는 예로 쓰인다.


*우두선(牛頭禪)---→법융(法融) 참조.


*우란분경(盂蘭盆經)---우란분이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을 음역한 말인데, 불교적 효도를 강조한 불교 경전이다. 원전은 전하지 않고, 중국 서진(西晉) 시대에 월지국 출신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이 원래 명칭이다. 이 경은 처음 <보은봉분경(報恩奉盆經)>이라는 이름으로도 누군가에 의해 한역됐으나 실전됐고, 현존하는 것은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것이다.

   중심 내용은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 승려들에게 공양을 함으로써 전생 및 금세에 돌아가신 어버이 일곱 분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목련(目連)존자가 아귀(餓鬼)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세존의 가르침대로 자자일(自恣日)에 여러 부처와 보살, 그리고 승려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지성으로 공양해 어머니를 제도했다는 효성을 설하고 있다.


*우란분재(盂蘭盆齋)--- 우란분공(盂蘭盆供)이란 죽은 사람이 사후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구하기 위해 후손들이 음식을 마련해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것을 우란분재(盂蘭盆齋)라 한다. 우란분재는 흔히 백중(伯仲)이라 부르는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 거행하는 불교 행사이다. 이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우란분(盂蘭盆)은 범어의 ‘Ullamana(울람바나 : 거꾸로 매달림)’를 음사(音寫)한 오람파라(烏籃婆拏)가 와전된 것이고, 이 단어는 이를 한문으로 의역하면 도현(倒懸;거꾸로 매달림)이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 신통력이 뛰어난 제자인 목련(目連) 존자는 어머니가 선행을 닦지 못해 아귀도에 떨어져 배가 고파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련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이 비통해하며 그 원인을 물으니 부처는 죄업의 뿌리가 너무 깊어 그렇게 된 것이므로, 시방의 여러 승려들의 위신력(威神力)만이 구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모든 승려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점검하는 자자(自恣)를 행하는 7월 15일에, 과거의 7세 부모와 현세의 부모 중에 재앙에 빠진 자가 있으면 밥을 비롯한 백 가지 음식과 다섯 가지 과일을 우란분(盂蘭盆)에 담고 향과 촛불을 켜서 승려들에게 공양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 수행하고 교화하는 모든 승려들이 이 공양을 받으면, 현재의 부모가 무병장수하며 복락을 누리고, 돌아가신 조상은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 끝없는 복락을 누린다고 했다.


*우바새(優婆塞, upasaka)---산스크리트 우파사카(upasaka)의 음역이다. 한역하면 거사(居士). 청신사(淸信士)이고, 근사남(近事男)이라고도 한다.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부처님을 신봉하는 남자로서 재가신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를 담은 불경. 팔리어 삼장에 있는 <선생경(善生經)>을 대승불교에 맞게 고친 경전이다. ‘선생’이라는 명칭은 이 경전이 ‘선생(善生)’이라는 장자(長者)를 위해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북량의 담무참(曇無讖)이 426년에 한역했는데, 산스크리트어본이나 티베트어본은 전하지 않는다. 모두 7권으로 구성돼 있다. 대승계(大乘戒)를 소개하고 있어서 중국불교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었다.


*우바이(優婆夷, upasika)---부처님을 신봉하는 여자 재가신자. 남자 재가신도인 우바새와 함께 불교 교단의 4부대중과 칠중(七衆)을 이룬다. 한역하면 청신녀(淸信女)이고, 근사녀(近事女)라고도 한다.


*우파니샤드(Upanishad)---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 현재 108가지 정도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에는 일찍이 BC 1000~600년경에 크게 활약했던 일련의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돼 있다. 후기 인도 철학의 많은 부분이 이 문헌에 기반을 두었다.

   우파니샤드엔 우주 유일의 근본원리로서 브라만(梵)과 개인 존재의 본체인 아트만(?tman, 我)이 상정되며, 결국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표명돼 있다.


*우팔리(優婆離, Upali)---석가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팔리는 계율에 통달해 ‘지계(持戒) 제일’로 불렸다. 석존 입멸 직후의 제1차 결집에서 ‘계율’ 부분은 우팔리존자의 송출에 의존했다고 한다. 우팔리는 석가족(族) 궁정의 이발사로 최하층인 수드라(sudra) 계급 출신이다. 


*우화서(雨華瑞)---세존께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삼매에 드셨는데 하늘에서 꽃이 비 오듯이 쏟아져 상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그래서 법당에는 꽃 장식이 많다.


*운강석굴(雲岡石窟)---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서쪽 15㎞ 지역인 운강진(雲岡鎭)에 있는 석굴사원. 무주천(武州川)의 남서쪽 벼랑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는 약 1km이며, 대굴 21개 중굴 20개와 무수한 소굴, 불감(佛龕)이 조성돼 있다. 석질은 밝은 색의 사암(砂岩)으로 거의 전부가 북위(北魏) 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벽에 직접 조각해 색을 칠했다.

       ※중국 3대 석굴---운강석굴, 둔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


*운력(運力)---스님들이 행하는 육체노동으로 울력이라고도 한다. 노동이 일반에게는 삶의 한 방편을 뜻하지만, 사찰에서는 수행의 하나로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중국 당 말에서 오대를 거쳐 북송 초까지 활약한 선승. 광진대사(匡眞大師)라고도 한다. 법명은 문언(文偃)이고, 운문종(雲門宗)의 창시자이다.

   그는 뛰어난 화두로 유명한데, 특히 ‘간시궐(乾屍厥) - 마른 똥막대기’라는 화두가 유명하다. 이처럼 운문선사 어록의 특색은 상대방의 질문의 포인트를 잡은 간단명료한 어구에 있다. 운문선사는 어록을 남기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스님이어 그의 설법은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막힘이 없었지만 누가 그것을 기록이라도 하면 반드시 야단을 쳤다. 헌데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종이로 만든 옷을 입고 그 옷에 몰래 받아 적었기 오늘에 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저서는 따로 없고 그의 말을 기록한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이 전해진다.

 

*운수(雲水) 생활---선승들이 물이나 구름이 흘러가듯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정처 없이 행각하는 것, 아무 뜻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는 생활이 아니라 선지식을 찾거나, 만행을 통한 구도의 행각을 뜻한다.


*운수납자(雲水衲子)---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를 묻기 위해 돌아다니는 승려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운판(雲板)---사찰에서 청동 판에 구름처럼 무늬를 아로새긴 것을 매달고 조석예불 때 치는 것인데,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들을 제도하고,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고통을 쉬게 하는 법구이다. 옛날 선방에서는 밥 때를 알리는 신호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원(願)---불교에서 ‘욕(欲)’이란 “갖고자 하는 마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람, 구함”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원(願)’이다. 그리하여 욕(欲)과 원(願)은 그 의미는 비슷하나 전자는 버려야하는 것으로, 후자는 가져야 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원을 세우다’라고 하면,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바, 즉 중생주제 혹은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세운다는 뜻으로 쓰인다. 무슨 일이나 목표가 분명해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 원이다.    

   모든 불보살의 본원(本願)이란 근본서원(根本誓願)의 준말로서 모든 부처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성불하고자 뜻을 세운 여러 가지의 서원을 말한다.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한 본원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며, 별원은 부처님마다 중생 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우신 아미타불의 48원, 약사여래의 12원, 법장비구의 48대원 등을 일컫는다.---→원력(願力) 참조.


*원각경(圓覺經)---원명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며,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으로 써 온 경전. <원각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등 12보살들과의 문답을 통해 대원각의 묘리와 그 관행을 설한 경전이다. 12보살들과의 문답을 각각 1장으로 했기 때문에 전체 12장으로 구성돼 있다. <원각경>은 실천 수행의 체계를 정연하게 갖추고 있는 경전으로서, 특히 선종 계열에서 중요시 여겼다. 그리하여 불교 전문 강원(講院)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693년 북인도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이다. 그런데 이것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어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원각(圓覺)---부처의 원만한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일컬어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한다.


*원광국사(圓光國師, 555년/진흥왕 16∼638/선덕여왕 7)---신라의 고승으로 중국 남북조시대 진(陳)나라에 가서 불법을 수학했으며 화랑도에게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고,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공헌했으며, 운문사(雲門寺)를 중창했다. 원광법사의 부도탑(浮屠塔)은 현재 경북 경주시 안강읍(安康邑) 두류리에 있다(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


*원교(圓敎)---원은 원만, 원융의 뜻이며, 원교는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 원만하고 완전한 교법을 이른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최종 진리를 가리킨다. 천태스님 이전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했으나 천태스님에 이르러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중심한 교학을 원교라 했다.---→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원력(願力)---원력 혹은 원이라는 말은 중생구제의 서원을 말한다. 보살은 자기 한 몸 해탈하는 데 머물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는다. 그 것을 원이라고 하고, 힘력 자를 붙여서 원력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불교를 신행(信行)하는 사람이 목적을 성취하고자 내적으로 수립하는 기본적인 결심과 그에 따르는 힘. 일반적으로는 원(願) ? 서원(誓願) ? 행원(行願) 등으로도 표현하지만, 내면적인 원은 결코 원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처럼 원과 힘은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보살의 기본적인 원은 부처가 되고자 맹세하는 원작불심(願作佛心)과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도중생원(度衆生願)으로 대별되며, 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원(上求菩提下化衆生願)이라고 한다.---→원(願), 역바라밀(力波羅蜜) 참조.


*원바라밀(願波羅蜜)---여기서 원(願)이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공에 바탕 한 이타적 중생구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요 순수의지이다. 중생의 구제를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서원(誓願)이다. 따라서 원바라밀이란 이러한 서원의 완성이라는 뜻으로 십바라밀(十波羅蜜) 중에 제8바라밀이다. 개인적인 욕망은 업(業)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거기엔 반드시 과보가 동반되기 마련이지만 원은 공(空)에 바탕 하기 때문에 업의 굴레에 저촉되지 않는다.


*원성실성(圓成實性)---유식 삼성설(三性說)의 하나. 원만히 성취된 참답고 실다운 성품이라는 말이다. 이 원성실성이 실상(實相)이고, 본성(本性)이고,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불성이 지금 보이느냐 하면, 우리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佛性), 진여(眞如), 부처, 여래(如來)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을 한다.

   하지만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원성실성이 우리들의 망정(妄情)으로는 보이지 않고 없다고 하지만 참다운 진리에서는 있다. 즉 우리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진여불성이 영원한 우주의 도리에는 있다는 말이다.---→유식삼성(唯識三性) 참조. 

      ※정무리유(情無理有)---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


*원시불교---초기불교(근본불교)를 이르는 다른 말이다. 여기서 초기불교란 부처님께서 생존시에 직접 설법을 하신 가르침, 부처님의 원음을 의미한다. 헌데 일부 한문불교와 대승불교의 우월성에 물들어있던 일본의 학자들은 초기불교를 애써 원시불교라고 불렀다. 영어로는 Primitive Buddhism이 된다. 아무래도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의 모습, 미개 상태의 불교라는 폄하하는 뜻이 은연중에 함축돼 있는 표현이다.---→초기불교, 근본불교 참조.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중국 송나라 때 선승. 간화선을 대성시킨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의 스승이다. 원오선사의 어록이 <원오심요(圓悟心要)>, <벽암록(碧巖錄)> 등인데, 그 중 <원오심요>는 선승들과 사대부들이 질문해 온 것에 대해 답한 편지 글을 모아놓은 서간집이고, <벽암록>은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이다.


*원융불교(圓融佛敎)---원융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불교 특유의 사상 가운데 하나. 모든 사상을 분리시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엮는 교리통합론. 이를 주창한 대표적인 고승이 원효(元曉)대사이다.

   원융불교는 초기 경전인 아함경을 비롯해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정토경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등장하는 여러 경과 논장들을 모두 포용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아우르며, 작금에 이르는 각종 종단의 소의경전(所衣經典)과 수행법들까지 망라해서 부처님 당시의 불교 교설에 근접하고자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녹여서 하나 된 불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원융회통(圓融會通)---‘원융’이란 원만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며, ‘회통’이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 ‘하나(通)로의 만남(會)’을 말한다. 따라서 원융회통 사상은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있는 사상과 논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무리 없이 통합하면, 그들 사상과 논리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조화적인 통일의 논리를 가리키는데, 원효대사의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원효(元曉) 참조.


*원이삼점(圓伊三點)---원이삼점은 보통 사찰의 지붕 합각에 그려진 것으로 큰 원에 점 세 개를 그린 것을 말한다. 큰 원은 우주법계를 의미하고, 점 세 개는 불 ? 법 ? 승 삼보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법신 ? 보신 ? 화신의 삼신불의 삼위일체를 상징하기도 하며, 열반 3덕인 법신, 해탈, 반야가 서로 상즉하고 있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원응국사(圓應國師, 1052~1144년)---고려 중기의 승려. 경북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중흥지조(中興之祖)이다. 선과 교(敎)를 섞을 수 없다 해서 천태종에 들어오라는 의천(義天)의 권유를 거절했다. 1099년(숙종 4년)에 왕명으로 법주사(法住寺) 주지가 됐고, 1122년(예종 17년)에 왕사가 됐으며, 1129년(인종 7년)에 운문사의 주지가 돼 허물어진 운문사를 중창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인종에 의해 입적 후 국사로 임명됐고, 현재 운문사에 원응국사비가 전한다(보물 제316호).


*원적(圓寂)---열반과 같은 말로서 번뇌와 잡념의 세계를 여의고 생사를 뛰어넘는 절대 청정한 경계를 뜻함. ‘원(圓)’은 모든 공덕이 원만하다는 뜻이고, ‘적寂)’은 적정해서 고요하다는 뜻이다. 원적은 입적(入寂), 즉 승려의 죽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원주(院主)---주지를 보좌하면서 절의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승려. 선원(禪院)의 사무를 감독하는 승려, 혹은 작은 절의 주지를 일컫기도 한다. 


*원증회고(怨憎會苦)---원한을 품어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으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의 하나.


*원측(圓測, 613∼696)----속명 문아(文雅). 신라 진평왕 때의 왕손 출신으로서 일찍이 출가해 경론을 학습한 뒤에 15세 때(627)에 중국에 유학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오교(五敎) 중에서도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한 법상종(法相宗)의 가장 대표적 승려였다.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 단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副佛殿)일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함.


*원효(元曉, 617년-686년)---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이다. 압량(押梁: 지금의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15세 무렵에 출가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돼 수도에 정진했다. 자기 집안의 재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했다. 다시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른 후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한 후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특정한 스승이 없이 여러 교학과 학승들을 편력해 혼자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과제로 느낀 것은 불교가 공인된 지 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일견 서로 모순된 듯이 보이는 불교이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 모순, 대립하는 이론들을 극복하는 데에 ‘화쟁(和諍)’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다. 요석공주와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고,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세계적 수준에 이른 유일한 사람이 원효였다. 다음은 원효대사의 중요사상이다.

     ? 일심사상(一心思想) - 원효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한마음(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통합하려 했다. 그것이 화쟁사상이다. 인간 각자의 일심은 계기에 따라 여러 심리적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단지 계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심리적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본래의 일심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일심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일심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도(道)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一心之原)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인간이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하나인 마음(一心)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일심사상이다.---→일심사상(一心思想) 참조.

     ? 화쟁사상(和諍思想) -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으로 신라시대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에서 비롯돼 원효(元曉)에 의해 집대성됐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론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리고 논쟁(諍)과 조화(和)의 양면성을 인정하면 경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상호 대립적인 쟁론을 지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화쟁사상(和諍思想) 참조. 

     ? 원융회통(圓融會通) - ‘원융’이란 원만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며, ‘회통’이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 ‘하나(通)로의 만남(會)’을 말한다. 따라서 원융회통 사상은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있는 사상과 논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무리 없이 통합하면, 그들 사상과 논리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조화적인 통일의 논리를 가리킨다.


*월장경(月藏經)---원명은 <대방등대집월장경(大方等大集月臟經)>임. 미래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의 예언 말씀이 기록돼 있는 경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얼마 전 가리야제 산중에서 불제자들을 모아두고 지장경을 설하시기 전에 미래를 예언하신 경전이 월장경이다.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이라는 경전이 있는데, 여기에 6세기 북제(北齊) 때 인도 사람 나랜드라야사(那蓮提耶捨)가 한역한 월장경이 포함돼 있다.


*월칭(月稱, 산스크리트어 찬드라키르티/candrak?rti)---600년경-650년경의 인물. 남인도 출신의 승려로 용수(龍樹)의 학설을 계승하고, 날란다사원으로 가서 좌주가 됐다. 월칭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중론(中論)>의 주석서인 <명구론(明句論)>이다. 그 외에 <오온론(五蘊論)>과 <입중론(入中論)> 등이 있다.


*위경(僞經)---위경은 말 그대로 명목상 부처님이 설한 것처럼 위조된 경전으로 인도나 티베트에서 전래된 것을 진경(眞經)이라 하고, 중국 등에서 새로이 제작된 경문을 위경이라 한다. 부처가 직접 설하지 않은 불교 경전이지만 석가모니가 직접 교설한 것처럼 ‘불설(佛說)’이라는 이름을 빌려 위조함으로써 정전(正典)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없는 의경(疑經)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4세기 중엽 이래 시대적으로 끊임없이 위경이 증가해 8세기 말엽에는 의경과 위경이 무려 405부 1,50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위경이면서 유명한 경전에는 다름과 같은 것이 있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능엄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불설대목련경(佛說大目連經)> 등이 있다.

   대승비불(大乘非佛說)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배척하기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굳이 위경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이를 가슴에 새기고 ‘참 나’를 구하는 참고서로 삼으면 되겠다.


*위앙종(?仰宗)---선종 5가(家) 가운데 가장 먼저 당나라 시대에 성립된 불교종파.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제자 남악 회양(南嶽 懷讓) 선사의 법손(法孫)인 위산 영우(?山靈祐, 771-853) 선사와 그 제자인 앙산(仰山) 선사가 창시(創始)한 종파이다. 송나라 때 쇠퇴해서 임제종에 합쳐졌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산스크리트어 아디붓다, Adi Buddha)---법화경에서 일컫는 최초의 부처님이다. ‘위음(威音)’이란 법화(法華)를 직접 설하는 음성을 표현한 것이며, 왕이란 이 부처님의 위풍과 음성에서 위대한 국가를 통솔하는 왕의 위력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위음왕불이 출현했을 당시 겁명은 이쇠(離衰), 국명은 대성(大成)이었는데, 고대(古代)를 표시하는 비유로 사용해 ‘위음왕불 이전’이라 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이니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음왕불을 경계로 해 그 이전을 실제이지(實際理地)라 하고, 이후를 불사문중(佛事門中)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위음왕불을 본초불(本初佛) 혹은 자성불(自性佛)이라 한다.


*위음이전(威音已前=위왕이전)----위음왕불(威音王佛)은 법화경에 나오는 최초의 부처이다. 따라서 ‘위음 이전’은 태초, 천지개벽 이전, 우주 생성 이전이란 말로서, 번뇌망상이 일어나기 전, 분별심이 생기기 이전을 뜻하며, 무분별의 세계, 본래면목을 뜻한다.

      ※비슷한 말

      ? 성주괴공(成住壞空) 이전 - 우주의 생성과 소멸 이전.

      ? 공겁(空劫) 이전 - 천지창조 이전.

      ? 부모미생전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이전.


*위제희부인(韋提希夫人)---석존과 같은 시대 마가다(Magadha)국 빈비사라(Bimbisara)왕의 비. 왕자 아사세(阿?世, 아자타샤트루이)가 빈비사라왕을 유폐해서 아사시키려고 했을 때, 몰래 살갗에 음식 진액을 바르고 장신구에 물을 채워서 감옥을 방문해 왕으로 하여금 핥아먹게 해 살렸는데, 발각이 돼서 자신도 유폐됐지만 감옥 안에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석존께서 나타나서 이 세상에 절망해서 아미타불의 정토를 기원하는 비(妃)에게 아미타불이나 그 정토를 관상하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가르침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라고 한다.


*위파사나(毘鉢舍那, 팔리어 Vipassan?, 산스크리트어 vipasyna, 비파사나, 觀)---위파사나 수행은 초기경전인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asatipatthaana Sutta)>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위파사나는 팔리어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복합어다. 위(Vi)는 ‘뛰어난’ 혹은 ‘다양성’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빠사나(Passana)는 알아차림, 꿰뚫어 봄, 자세히 살펴봄, 사물의 실상에 대한 지혜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면 뛰어난 관찰, 통찰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진리를 지혜에 의해 꿰뚫어보고, 열반에 이른다”는 뜻이다.

   불교는 인간을 온갖 욕망과 번뇌에 얽힌 존재라고 보며, 이 번뇌는 성불의 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방해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이란 한없는 번뇌의 응시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 즉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환경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설하셨다. 불교 수행법이 여러 가지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법으로서, 한역(漢譯)에서는 ‘관(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해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가령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면 인간의 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생각으로 관해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가능하면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서 자신의 마음을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데 집중해 이것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렇게 위파사나는 마음을 하나로 전심(專心)해 지혜로써 불(佛)과 법(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염(念)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위파사나 수행법은 50여 년 전 미얀마에서 새롭게 변형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위파사나 수행은 4념처(四念處) 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12연기의 하나. 유정(有情)으로서의 존재 또는 생존의 뜻을 지닌 불교 용어. 유(有:bhava)라는 말은 영어의 Be동사, 혹은 된다(become)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의 동사어 ‘bhu’라는 말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존재의 의미와 생성의 의미의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2연기에 있어서 유(有)를 오온(五蘊)으로 정의하고 있거니와 이는 개체의 형성을 말한다. 취(取)를 연해 유가 발생한다. 물론 정신 육체적 복합체인 개체의 형성은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유(有)는 애착에 의해 윤회의 동력을 가지는 존재, 혹은 다음 생을 요청하는 예비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유(有)는 사라짐이 아니라 변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시간적으로는 생유(生有) ? 사유(死有) ? 본유(本有) ? 중유(中有-중음/中陰)의 4유(四有)로 구분한다.---→사유(四有) 참조.


*유가(瑜伽, 산스크리트어 yoga)---상응(相應)이라 번역.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바른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으로써,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하는 수행. 밀교에서는 대일여래와 한 몸이 되는 체험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다.


*유가사(瑜伽師, 산스크리트어 yog?c?ra )---유식설(唯識說)을 받드는 사람들은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 즉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리었다. 따라서 그들 학파를 보통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한다. 요가(yoga)란 무엇인가.---→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참조.


*유가록(瑜伽錄)---불공삼장(不空三藏)이 지은 밀교에 관한 저서. 인도 출신의 밀교계 승려인 불공은 <유가록>에 “이 경전은 금강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연마하는 총체적 비결이니 금강은 법의 이치(理)요, 반야는 법의 실체(體)요, 바라밀은 법의 작용(用)이니, 유위법과 무위법 그리고 처음도 되고 끝도 되는 현묘한 공(空)이 비록 다 갖추어졌으나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실제로 깨닫기 어렵다”라고 했다.---→불공(不空: 705~774) 참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유가사지론>의 저자는 유식학파(唯識學派)를 연 남인도 파라나국 출신의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 270 ?~350 ?)이다. 그는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가사지론> 외에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유식학파 이론을 발전시켰고, 무착(無著, 300?~390?/世親의 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玄?)법사가 서역에 간 것은 바로 이 <유가사지론>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유가사지론>은 당나라의 현장이 번역해 천자문의 순서대로 백 권을 수록했고, 우리라엔 고려시대의 초조대장경에 실려 있어서 국보 제244호로 지정돼 있다. 유가사지론은 유가사(Yogacara = 요가수행자)의 실천단계를 의미하는데, 유가는 명상 ? 정신통일의 수행으로, 일반적으로 선 ? 삼매 등으로 불리는 것과 동일하다. 유가사(瑜伽師)는 이 명상수행에 진력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유가행파(Yogacara)라는 학파의 명칭은 이 유가사에서 유래한다.


*유가행파(瑜伽行派)---→유식학파(唯識學派) 참조


*유견(有見)---<나>라는 존재에 집착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극단적인 생각.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고, 유무견(有無見)에 사로잡힌 견해가 사견(邪見)이다.---→무견(無見), 오견(五見) 참조.


*유교(有敎)---불교철학을 세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삼시교판설(三時敎判說)이라 한다. 이 분류는 유식학(唯識學)을 석존의 교설 중에서 최상의 법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도 유식학파의 계현(戒賢, Silabhadra) 논사가 정립한 이론[중국에서는 법상종의 교판(敎判)]으로서 제1시 유교(有敎), 제2시 공교(空敎), 제3시 중도교(中道敎, 唯識敎)의 순서로 불법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유교(有敎)란 이 중 맨 처음 초기 법문을 말한다. 즉, 우리 중생 차원에서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범안(凡眼)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이 유교(有敎)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체가 다 공(空)이다’ 하는 단계인데 이를 공교(空敎)라 한다. 그런 다음 부처님께서 실상 그대로 하신 말씀인 중도교(中道敎)의 단계이다. 반야심경은 공교와 중도교를 합한 가르침이다.---→공교(空敎) 참조. 


*유교경(遺敎經)---가르침을 남기는 경전이라는 제목의 뜻처럼,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설법하는 광경을 담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전이나 티베트 본은 전하지 않는다. <불유교경(佛遺敎經)>, <불수반열반교계경(佛垂般涅槃敎誡經)>, <불수열반약계경(佛垂涅槃略誡經)>, <불임열반약계경(佛臨涅槃略誡經)> 등 달리 부르는 이름이 많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이 한역했다.

   붓다의 만년에 있었던 일을 적은 경전과 논서는 이 외에도 아함부 계통의 <열반경>, <불본행경>, 마명(馬鳴)이 지은 <불소행찬> 등 몇 가지 더 있다. 이들 저서도 이 경전과 유사한 문체로 쓰였다.

   내용은, 붓다는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멸할 것임을 밝히고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당부했다. 우선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스승으로 삼아서 계를 지키고, 오욕을 삼가며, 정적(靜寂)을 구하고, 정(定)을 닦아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최후의 가르침으로 해탈을 얻어 무명의 암흑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붓다의 임종이라는 극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간명하게 설명한 탓에 예로부터 널리 읽혔다. 그래서 주석서나 연구서가 많은 편이다.


*유나(維那)---도유나(都維那)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재(齋)의 의식을 지휘하는 소임. 또는 그 소임을 맡아 하는 승려. 혹은 선원(禪院)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승려.


*유루---→반대말 무루(無漏, as?srava) 참조.


*유루복(有漏福)---→무루복(無漏福) 참조.


*유루행(有漏行)---세속적 지혜는 유루지(有漏智)이고,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남이 없이 선악의 세속적 덕목으로 수행하는 것이 곧 유루행(有漏行)이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 행동도 때 묻은 유루행(有漏行)밖에는 못 된다.


*유마경(維摩經)---유마힐경(維摩詰經)이라고도 한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 원명이다. <반야경>에 이어 나타난 초기에 성립된 대승경전의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으나 티베트역이 있고 한역 본 중에서는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 널리 읽힌다. 유마경(維摩經)은 <미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과 더불어 희곡적(戱曲的)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어느 경전보다도 문학적인 소재가 많은 유명한 경전인 것이다.

   유마힐(維摩詰)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비말라키르티(Vimalak?rti)으로서 바이샤리의 부호 이름이다. 그는 이 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세속의 신자로 불교의 진수를 체득하고, 청정한 행위를 실천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그는 재가신자인 거사(居士)의 이상형이다. 유마힐을 모델로 해서 대승보살의 실천도(實踐道)를 강조하고, 세속에 있어서 불도(佛道)를 실천하고, 완성하게 됨을 설시(說示)하려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유부(有部)---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의 줄인 말임.---→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참조.


*유순(由旬)---팔리어 yojana의 음사. 고대 인도의 거리의 단위로서 확실한 거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혹은 40리(里) 정도라고도 함. 대유순 80리, 중유순 60리, 소유순 40리의 세 가지가 있다.


*유식(唯識,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유식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의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인데,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미륵(마이틀레야)가 부처님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위파사나 삼마지(毘鉢舍那三摩地) 중에서의 영상(影像)은 이 마음(心)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둘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식의 대상[소연(所緣)]은 오직 식(識)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위파사나(毘鉢舍那, vipasyana, 觀)는 요가(yoga) 실천법의 한 종류이다. 이처럼 요가 실천의 체험을 묘사하는 가운데 유식(唯識)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요가를 닦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자각적(自覺的)인 체험이야말로 유식설을 형성한 내면적인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유식설(唯識說)을 받드는 사람들을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yogacar-a)’ 즉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리었다. 따라서 그들 학파를 보통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한다.


*유식론(唯識論-사상으로서의 유식론)---인도 대승불교의 주요한 학설의 하나이다. '유식(唯識)'이란 일반적으로 외계라고 이해되고 있는 일체의 것이 마음에서 나오고 마음을 반영하는 표상(Vij?aptiㆍ識)에 불과하고, 외계의 존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상이다. 또한 이 표상이 나타내는 것은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인 식(識, vij??na)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맹아는 이미 초기 불교에도 있었지만,<해심밀교(解深密敎>,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比達磨經)>에서 비로소 이론적으로 설명됐다. 이 유식론의 이론적인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한 유가행파(瑜伽行派, Yog?c?ra)의 논사들이었다. 유식파라고도 하는 이 파의 아상가(無着)가 마이틀레야(미륵)의 가르침을 받아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저술해 유식론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동생이며 제자이었던 바스만두(世親)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등의 저작을 통해서 이것을 집대성했다.


*유식론(唯識論-책 이름)---인도의 논사 천친(天親)이 지은 것을 6세기 중엽 동위(東魏)에서 인도 출신의 학승 반야유지(般若流支)가 번역했다. 1권으로 된 이 논은 의식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교리를 논쟁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친(世親)이 지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의 다른 번역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유식설(唯識說)에서 식(識) 이외의 외경(外境)은 식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며, 외적인 세계를 부정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정신활동 뿐이고, 나무나 돌 등과 같은 외적(外的)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유식사상을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즉,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유식(唯識) 4분설(四分說)--- 4분이란 유식학에서 인식의 성립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다. 즉, 심(心)과 심소(心所)의 작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을 일컫는다.


*유식삼성(唯識三性)---유식학파에서 규정한 중생의 세 가지 성품을 말한다.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는 말 - 정유리무(情有理無)

        ※정유리무(情有理無)---범부의 망정(妄情)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 법성(法性) 자리인 리(理)에는 없다는 말.        

     2) 의타기성(依他起性) -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 삼라만상이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존재로 잠깐 가짜로 나툰 것이다. - 여환가유(如幻假有)     

     3) 원성실성(圓成實性) - 원성실성은 본래적인 것,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한다. 즉,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정무리유(情無理有) - 정무리유(情無理有)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세친(世親, 320∼400)이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함께 자신의 유식설(唯識說)을 완성한 저서. <해심밀경>과 <대승아비달마경>에서 출발해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을 거치면서 틀을 갖춘 유식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여러 서적에 나온 유식설을 30개의 송(頌)으로 표현했다. 563년에 진제(眞諦)가 번역했고, 그 후 현장(玄?)도 번역했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세친(世親:320∼400)은 미륵(彌勒)이나 무착(無着)의 저서를 많이 주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저서 중 하나이다. 유식설(唯識說)에 대한 여러 학파의 비평이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해 유식설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유식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함께 한 짝을 이룬다. 보리유지(菩提流支)가 6세기 초에 번역했으며, 7세기에 현장(玄?)도 번역했다. <유식론(唯識論)>, <대승유식론(大乘唯識論)>이라 하기도 한다. 


*유식학파(唯識學派)---유식(唯識, 산스크리트어 비즈납티마트라/vijnaptimatra)사상은 용수의 중관사상 또는 공(空)사상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4세기경에 대두된 사상이다.

   유식학이란 불교에서 마음의 역할과 구조 기능, 즉 마음현상을 밝히는, 불교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미륵(彌勒. Maitreyanatha: 270~350년)과 그의 제자 무착(無着. Assanga: 310~390년)과 세친(世親. Vasubandha: 320~420년) 등에 의해 성립됐다.

   유식학파는 수행방법으로서 유가(요가)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瑜伽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이는 소승불교의 부족한 교리를 보충하는 한편, 같은 대승불교의 중관파(中觀派)와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이 학파의 초기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이고, 그 후 미륵(彌勒, A.D 270~350)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켜 사실상 유식학파의 시조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유식종 불교의 주불은 미륵불이다.

   이러한 미륵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著, A.D 310~390)은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저술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구조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했다.

   그리고 무착의 동생이며 제자가 된 세친(世親, A.D 320~400)은 미륵과 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면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 많은 저작을 함으로써 유식사상을 대성시켰다. 또한 AD 6세기에 호법(護法, 530~600)은 이론과 실천 전반에 걸친 내용의 논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저술해 아뢰야식(alaya-vijnana, 阿賴耶識)의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선구적인 유가사(瑜伽師, 요가 수행자)들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자각한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 vijnapti=마음)일 뿐이라는 지각이 ‘유식(唯識)’이고, 이 유식에 바탕 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오직 표상식(表象識)일 뿐이라는 명제가 이 학파 학설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유식(唯識) 참조. 


*유신견(有身見)---중생이 고정불변하는 자아(혹은 실체)가 있다는 견해이다.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이다.


*유애(有愛, 팔리어 bhava-ta?h?)---갈애의 종류를 욕애(慾愛:감각적 욕망), 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 무유애(無有愛:팔리어 vibhava-ta?h? 무유(無有)는 허무를 뜻함. 허무에 얽매이거나 집착함. 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그 중 유애는 개체 존속의 욕망. 즉, 내세까지 이어지는 생존에 대한 욕망을 일컫는 말이다.


*유여열반(有餘涅槃)---수행을 통해 이승의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도 과거의 업보로 받은 몸이 멸하지 못한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한다. ‘유여’란 의존해야 할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 즉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는 상태이다.

   헌데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분함에 있어서 소승과 대승의 주장이 다르다. 소승에서는 열반을 번뇌가 다 없어진 상태라고 본다. 따라서 소승의 경우, 유여열반은 번뇌는 다했지만 육체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이고, 대승에서는 열반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을 갖추지 못한 소승의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열반의 원형은 현재 열반(現在涅槃)이라 할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봐야 하며, 열반을 윤회생사의 현실세계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존재영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무여열반(無餘涅槃) 참조.


*유위(有爲)---유위는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 모든 일, 모든 생각, 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도 연기법(緣起法)에 의하면 어느 하나 인연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은 유위행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 유위법이라는 것이다.


*유위공(有爲空)---십팔공(十八空)의 하나. 여러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에 대한 분별이 끊어진 상태. 인연 또는 인위적으로 된 모든 현상이 헛되다는 것,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란 말이다.


*유위법(有爲法; 범어 samskrta dharma)---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일부러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 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일컫는다. 즉,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언어, 교육, 창작, 학문, 정치, 경제 등 인위적인 활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4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현상까지도 유위법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는 것이나 자연이 하는 변화는 모두 유위란 말이다. 결국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다.

   따라서 불교 자체도 유위법이고, 사찰의 전각, 그 안의 불상, 마당 가운데 서 있는 불탑, 종각의 범종, 스님이 치는 목탁, 불교 경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고, 심지어 부처님의 설법 또한 유위법이다.---→무위법(無爲法) 참조.  


*유전문(流轉門)---부처님께서는,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의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파악 하셨다. 태어났기에 노병사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로 말미암는 것임을 아셨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던 것이다. 결국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깨달은 바를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문을 관하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관한다고 해서 순관(順觀)이라고 한다.---→환멸문(還滅門) 참조.


*유정(有情, sattva)---불교에서 유정은 생명체를 말하고,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중생(衆生)을 뜻하며, 인간도 물론 유정이다. ‘보리살타(보살)-bodhisattva’에서 보리(bodhi)는 깨달음, 살타(sattva)는 살고 있는 존재, 즉 유정(有情)을 뜻한다. 따라서 ‘보리살타’란 깨달은 유정, 깨달은 사람이란 말이고, 무정(無情)이란 돌멩이 같이 정신의 작용이 없는 무생명체의 총칭이다. sattva를 번역할 때 구마라습은 중생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유정이라 번역했다.

   유정(有情, sattva)이란 정(情)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정이란 정식(情識)이나 업식(業識)을 지칭한다. 정식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수용 능력을 의미하고, 업식은 업상(業相), 즉 무명업상(無明業相)을 의미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유정이란 ‘감각적 수용 능력을 지니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 즉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유학(有學)---소승불교의 수행 단계인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수행해서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했으며, 해야 할 바를 다했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무학위를 간단히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아라한과 이전의 단계를 통칭해 유학위(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유행경(遊行經)---부처님이 말씀하신 최후의 법문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여러 곳에 다니실[유행(遊行)] 때 일어난 온갖 사건을 인연으로 해서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가운데 두 번째 경전이다. 서기 418년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9권으로 번역해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라 했다.


*유행기(遊行期)---브라만교에서는 바라문이 평생 동안 밟아야 할 단계가 규정돼 있었는데 학생기[범행기(梵行期), 25세 이전], 가주기(家住期, 가장기, 26세-50세), 임서기(林棲期, 51세-75세), 유행기(遊行期, 76세 이후)의 네 가지 시기로 구분했다. 앞의 세 시기를 통해 인생의 필요한 수행과 의무를 다했을 때 그들은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치고 지팡이와 물통을 차고 목에는 두타(頭陀) 주머니를 걸고, 몸을 운수(雲水)에 맡기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활로 들어가는 시기를 말한다.


*유희(遊戱)---일반적으로는 즐겁게 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걸림이 없고, 자유 자재함을 뜻한다.

 

*유희야경(??耶經)---경명은 산스크리트어 ‘구히야(guhya)’를 한역한 것이다. 유희야경은 만다라작법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경전으로 밀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 경에 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라서 현 단계에서 성립시기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단 경전의 구성으로 볼 때 <대일경(大日經)>보다 약간 빠른 7세기 초반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대일경>의 선구적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이 언제 중국에 전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당나라 시대 중국 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공(不空, 705~774)에 의해 한역됐다.


*육근(六根) ? 6경(境) ? 6식(6識)---육근(六根)에서 ‘근(根)’은 산스크리트어 인드리야(indriya)의 한역어로서, 감각기관과 그 기관이 가지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근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여섯 기관인데, 바로 우리 몸 그 자체를 말한다.

   헌데 이 육근이 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결정한다. 이러하니 모든 나쁜 것을 접할 수 있는 근본 그 자체이므로 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 육근청정(六根淸淨)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육근(6根)이 육경(6境)을 만났을 때 각각의 감각 장소를 통해서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육식(6識)이라 한다. 6근 ? 6경 ? 6식의 관계를 보면,

     눈(眼)이 색(色)을 접촉하면 안식(眼識)이 일어나고,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 비식(鼻識)이 일어나고,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 설식(舌識)이 일어나고,

     몸(身)의 피부가 촉감(觸)에 접촉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나고,

     뜻(意)이 법(法)을 접촉하면 의식(意識)이 일어난다.

   여기서 법이란 생각의 대상, 혹은 뜻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사물)을 말한다.


*육근청정(六根淸淨)---육근은 안, 이, 비, 설, 신, 의(眼,耳,鼻,舌,身,意)로서 사람의 몸이 가지고 있는 여섯의 기본 기능을 의미하며, 청정은 글 그대로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다. 육근청정이 곧 법신이 되는 도리라서 육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념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무애(無碍)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육단심(肉團心, 산스크리트어 h?daya)---직역하면 심장, 마음이지만 수행이 부족한 욕심을 숨긴 거친 마음이다. 그래서 육단심을 비하해서 음식을 함부로 먹는 것 같은 물질적인 마음이라고 했다. 참선하다가 육단심(肉團心)이 생긴 이유는 역시 아는 생각에 마음을 두어 바른 의정(疑情)에 눈이 없으면 여지없이 급하게 이루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산만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온갖 잡심이 발동해 바른 공부를 등지게 된다. 이러한 오염된 마음이 육단심이다.

   헌데 불교에서는 마음을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練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의 4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우리의 육체적인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인 육단심(肉團心), 보고 듣는데서 분별해 내는 마음을 연려심(練慮心),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인 집기심(集起心), 본성으로서 부처님의 성품과 같은 불성을 견실심(堅實心)이라 했다. 이 견실심이 바로 부처의 마음자리이다. 바로 참선은 부처의 마음자리인 진여심(眞如心)이다. 참선은 이러한 여러 마음들을 고요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은 만법의 근본이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교법은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다.

   또 불경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감정에 따라서 나타나는 마음인 육단심(육團心)이다.

   둘째로 좀 더 깊은 곳에서 자리한 적취심積聚心이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서 형성된 마음으로, 지성이나 이성이라고 일컬어진다.

   셋째로는 적취심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진실심(眞實心)이 있다. 이것은 깊은 물속에 흘러 아무리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어떤 경우이든 육단심은 기피해야 할 마음자리이다. 마음가짐이 조급하면 육단심이 흔들려 혈기가 고르지 못하는 따위의 병통이 생겨날 것이니, 이것은 바른길이 아니다. 그래서 선을 하려면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하고, 육단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육도(六道, sad-gati)---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 무지한 중생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6가지 세계. 망자가 죽어서 가게 되는 곳 중에 가장 좋지 못한 곳인 삼악도(三惡道)는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이며, 삼선도(三善道)는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의 여섯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것을 육도라고 하며, 여기에 삼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가 더해져서 삼계육도(三界六道)라고 부른다.---→육도윤회(六道輪廻) 참조.


*육도만행(六度萬行)---육도(六度)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육도만행이란 보살 혹은 중생이 육바라밀을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하는 일. 육바라밀을 여러 가지로 실천하며 행하는 것을 말한다.---→만행(萬行) 참조.


*육도윤회(六道輪廻)---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라 한다.---→육도(六道) 참조.


*육도집경(六度集經)---<육도집경>은 부처님이 보살이었을 적의 이야기, 즉 전생담(자타카)을 모아 기록한 경전이다. 전체 91개의 전생담을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라는 육도(바라밀)에 각각 배당해 모았기 때문에 <육도집경>이라 한다. 육도(六度)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같은 말이다.

   AD 3세기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강승회(康僧會)가 번역했다. 강승회는 원래 강거국(康居國) 사람으로,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중국으로 이주했다.

 

*6바라밀(六波羅蜜, 산스크리트어 sat-paramita)---바라밀은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며,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한 것이고, 산스크리트어 최고라는 뜻의 파라마(parama)에서 파생된 말이어서 ‘완성, 완전한 상태, 구경(究竟)의 상태’를 뜻한다. 이루고자 애쓰는 것이 없는 경지, 몸에 배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이 바라밀이고, 이것이 제법이 공한 도리이다.  

   불교 교의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안에 도달한[parami]+상태[ta]>를 말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육도(六度)라고도 하는데, 6바라밀은 아래와 같다.

     ?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 보시는 베풂을 뜻한다. 베풂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서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풂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라 한다. 그리고 보시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즉 재시(財施) ? 법시(法施) ? 무외시(無畏施)이다. 재시란 재물을 주는 것이고, 법시란 진리의 말씀을 베푸는 것이며, 무외시란 두려움을 제거해 마음에 평화를 주는 보시이다. 이 외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해서 재시 외의 일곱 가지 보시를 제시하기도 한다.---→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무재칠시(無財七施) 참조.

     ?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 재가와 출가,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율(戒律)을 잘 지켜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지계(持戒, sila)란 말은 말 그대로 ‘계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계를 지킬 필요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가 바라밀이다. 

     ?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 인욕(忍辱, ksanti)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고, 인욕바라밀은 참는 실천행이다. 즉, 탐(貪) ? 진(瞋) ? 치(痴)의 마음 중에서 성내고 화내는 진심(瞋心)을 잘 닦을 수 있는 실천행이 인욕바라밀이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경지라야 인욕바라밀이라 할 수 있다. 억지로 참는 수준은 현인(賢人) 수준이지 바라밀은 아니다. 

     ?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 정진(精進, virya)이란 부지런히 노력해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의 실천이며 불퇴전의 노력이다. 즉,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과 바라밀을 힘써 실천해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저절로 정진이 돼야지 꾸준히 노력하는 것은 바라밀이 아닌 현인 수준이다.

     ?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 선정(禪定, dhyana)의 정(定)은 삼매(三昧)란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진리를 바르게 사색하는 것’을 뜻하며, 이를 정려(靜慮)라고도 한다. 정(靜)은 지(止)에 해당하고, 려(慮)는 관(觀)을 의미한다. ‘고요히(靜) 생각하는 것(慮)’이 선정이다. 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색계선정(色界禪定), 팔선정(八禪定) 참조.

     ?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의 번역이다. 반야(般若, prajna)란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고, 이때의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 지혜란  “공에 대한 지혜이며, 집착 혹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즉,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라는 말이다.

   이 중에서 지혜바라밀인 반야바라밀이 다른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그리고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은 머리, 지계바라밀과 보시바라밀은 양 팔,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은 마음(혹은 몸통)에 해당한다.---→바라밀(波羅蜜) 참조.


*육방예경(六方禮經)---<육방예경>은 초기불교에 있어서의 재가신자가 지켜야 할 실천 규범을 설한 경전이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인간관계에서 예의범절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경전으로 일상생활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육법(六法)---비구니가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 2년 동안 수행하는 자를 식차마나(式叉摩那)라 하는데, 그 식차마나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계율.

       1) 음란한 마음으로 남자의 몸에 접촉하지 않음.

       2) 남의 돈을 훔치지 않음.

       3) 축생을 죽이지 않음.

       4) 거짓말을 하지 않음.

       5) 때 아닌 때 먹지 않음.

       6) 술 마시지 않음.


*육성취(六成就)---모든 경전은 첫머리에 여섯 가지의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을 육성취라고 한다---‘6하원칙(6何原則)’과 비슷함.

     ※육성취의 내용

      -석존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성취(信成就 : 여시/如是),---이렇게

      -내가 직접 들었다는 문성취(聞成就 : 아문/我聞), -------나는 들었다

      -설법한 때를 명시하는 시성취(時成就 ; 일시/一時), --------어느 때

      -설법을 한 것이 붓다였다는 주성취(主成就 : 불/佛), --------누가

      -설법한 장소를 밝히는 처성취(處成就 : 재사위국/在舍衛國), ---어디서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를 밝히는 중성취(衆成就 : 여대비구/與大比丘).--누구에게

    그래서 모든 경전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與大比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육식(六識)---6근(六根) ? 6경(六境)을 연(緣)으로 해서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을 6식이라 한다.---→육근(六根) ? 6경(境) ? 6식(6識) 참조.


*육신통(六神通)---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 천안통(天眼通) -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

     ? 천이통(天耳通) - 보통 귀로는 듣지 못할 소리를 듣는 능력.

     ? 타심통(他心通) -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

     ? 숙명통(宿命通) - 과거 전생을 볼 줄 아는 능력.

     ? 신족통(神足通) - 자유자재로 몸을 변화시키거나 불가사의한 힘을 나툴 수 있는 능력.

     ? 누진통((漏盡通) -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고 열반에 이른 것.

    육신통 중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등은 아라한의 경지에서도 가능하지만 누진통은 오직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육신통과 관련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신통력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셨다. 왜냐하면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지 신통력은 수행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할 뿐, 그 자체가 본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세, 사주, 점술, 해몽 등 부처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신통력을 발휘해 뭍 중생을 현혹하는 행위는 수행자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육십심(六十心)---밀교계통의 경전〈대일경(大日經)>의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가 ‘육십심(六十心)’이다. <대일경>에는 범부의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향상시켜 가는 순세(順世)의 팔심(八心)과, 세간적인 육십심(六十心)을 설명하고 있다.

   육십심에 대해 〈불교학대사전-홍법원>에서는 “아집에서 생기는 탐심(貪心) 내지 수생심(受生心)이므로 견혹(見惑)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육십심의 종류는, “탐심, 무탐심, 진심, 자심, 치심, 지심…” 등 60 가지 마음을 열거하고 있다.

   헌데 그 육십심을 요약해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라 하기도 한다. 육체적인 생각에서 우러나는 것을 육단심이라고 하고, 보고 듣고 분별해 내는 마음을 연려심이라고 하며,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을 집기심, 본성으로서 부처님의 성품과 같은 불성을 견실심이라고 한다. 참선은 이러한 여러 마음들을 고요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禪)은 만법의 근본이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육입(六入, 산스크리트어 Sad-?yatana)---육처(六處)라고도 하며, 12연기에 있어서 명색을 연해 육입이 일어나는데, 육입은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6근(六根-眼, 耳, 鼻, 舌, 身, 意), 또는 그 작용을 말한다.


*육자진언(六字眞言)---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이른다. 한국어에서는 성철스님이 50여 년 전에  ‘옴 마니 파드메 훔’이라고 고쳤으나 아직도 ‘옴 마니 반메 훔’ 쪽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진언을 부르면, 여러 가지 재앙이나 병환, 도적 등의 재난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한다.---→옴 마니 반메 훔(唵???美?) 참조.


*육재일(六齋日)---불교에서 신자들에게 경건하게 보낼 것을 권하는 여섯 재일(齋日). 재일이란 부처나 승단에 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는 의식을 갖는 날을 말한다. 사부대중의 경우 한 달에 6일(매달 음력 8 ? 14 ? 15 ? 23 ? 29 ? 30일)은 소식(素食)을 하며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보내는 육재일이다. 이날은 사천왕(四天王)이 천하를 순방하면서 사람들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고, 또한 악귀가 사람의 빈틈을 노리는 날이라고 해서 계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


*육조단경(六祖壇經)---중국 선종 제6대조인 혜능(慧能)선사의 자서전적 일대기로서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근본 선서(禪書)이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경(經)일 수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으로 분류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박한 사상성과 간결한 문체 때문에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의 여러 나라에서 경과 같은 존숭을 받아 오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선사(禪師)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필, 보충한 형태로 편찬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둔황(敦煌)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오래돼 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선종도 중국의 남종선에 유래한 까닭에 일찍부터 이 책이 유행해 이제까지 밝혀진 목판 판각(板刻) 종류만도 20여종이나 되며, 주로 덕이본(德異本)이 유통돼 왔다.---→혜능(慧能) 참조.


*육진(六塵)---육경(六境)과 같은 말. 심성을 더럽히는 육식(六識)의 대상계(對象界)로서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하며,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한다. 즉, 6경은 6근을 통해 몸속에 들어가서 우리들의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함으로 진(塵)이라 한다.


*육처(六處)---육근(六根), 육입(六入), 육창(六窓과 같은 말.


*육통(六通)---육신통(六神通)의 준말이다. 불법을 열심히 닦아 어느 경지(아라한 수준)에 이르면 신통력이 생기는데,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한다.---→육신통(六神通) 참조.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이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서 선(禪)에 대해 모든 선정을 자세히 분별하는 여섯 가지의 묘문(妙門)이 있다고 하는 것. 천태의 사상체계는 이론체계인 교문(敎門)과 실천체계인 관문(觀門)으로 구성돼 있다. 교문과 관문을 하나로 하면서 완벽한 조화의 하모니를 이루어 거대한 대승사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든 사람이 천태대사 지의(智?)이다. 다음은 경봉(鏡峰)스님의 6묘문(妙門)에 관한 법문이다.

   가고 오는 것이 (道)가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이 도 아님이 없고, 잡고 놓는 것이 선 아님이 없는데 처음 배우는 이들은 이렇게 말만 듣고 알아도 안 된다. 날개도 나지 않은 새가 나르려 하다가 떨어져 죽게 되는 격이다.

   선(禪)에 대해서 여섯 가지의 묘문(妙門)이 있다. 이것은 참고삼아 들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지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화두를 들다가 화두를 버리고 이것을 하라는 말도 아니다. 참고적으로 한 번 들어두라는 말이다.


     1) 수식관(數息觀)----참선 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도 한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망상(妄想)이 복잡하게 일어날 때 숨을 고르면 망상이 어느 정도 잦아지기 때문이다.

   숨을 쉴 때 들여 쉬고 내쉬는 이것을 열까지 세고 버린다. 왜 열까지 세고 버리느냐 하면 열이 넘으면 망상이 생긴다. 들어가는 숨을 세고 나오는 숨도 세면 분별이 많아지니 들어가는 숨은 빼고 나오는 숨만 세는 수도 있다. 열 번씩 세다가 혹은 세 번이나 다섯 번이나 일곱 번까지 세다가 망상이 생기면 잘못 세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센다. 열 번까지 가지 말고 이렇게 숨을 세는데서 다른 생각이 들어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정신이 집중이 된다.

     2) 수문(隨門)---미세한 생각이 숨을 따라 들어가는데 들어가는 것도 알고 나오는 것도 아는데 길고 짧고 차고 더운 것을 이와 같이 안다. 그 모든 선(禪)이 이것으로부터 발하는 것을 수문이라 한다.

     3) 지문(止門)---이 숨 쉬는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히 하는 것을 지(止)란 한다. 즉 이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이지만 생각의 파도가 분주스럽다. 그래서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야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야 한다. 본래 고요한 자리이건만 자기 스스로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그 생각파도가 출렁인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서 그 마음이 밝고 밝아지면 편안해진다. 그래서 지(止)를 의지해 생각이 고요하고 요란치 않는 이것을 수(隨)를 버리고 지(止)를 닦는 문이라 한다. 마음에 파동이 없으면 모든 선(禪)이 정(定)해지니 이것을 지문(止門)이라 이름 한다.

    4) 관문(觀門)---관문이란 분별을 방편(方便)으로 끊는 것을 이름 해 관(觀)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지문(止門)을 인(因)해서 제선(諸禪)을 증득하나 지혜를 밝히지 못하면 밝지 못한 마음이 모든 선정(禪定)에 혼미해지나 마음을 관(觀)해 오음(五陰)의 헛됨을 분별해서 알면 전도(顚倒)가 이미 없어지나 샘이 없는 <무루(無漏)>방편이 이로부터 개발되므로 관(觀)으로써 문을 삼는다.

    5) 환문(還門)---환문이란 마음을 굴려서 돌이켜 비추는 것을 환문이라 한다. 수행자가 관조(觀照)하는 것을 닦더라도 만약 내가 능히 관(觀)하고 비추어서 전도심(顚倒心)을 파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의혹이 오히려 외도(外道)들보다도 더 큰 것이 남기 때문에 마땅히 마음을 굴려서 능히 마음을 관조해 헛된 가운데는 참됨이 없는 줄 요달(了達)하면 그 관조(觀照)함으로써 생기는 나를 집착하는 전도됨이 없어지고 샘이 없는 <무루> 방편의 지혜가 자연히 밝음으로 환(還)으로써 문을 삼는다.

    6) 정문(淨門)---정문이란 마음이 의지할 바가 없으면 망심(忘心)의 파도가 일지 않는 것을 정(淨)이라 한다. 수행자가 환(還)을 닦을 때에 능히 전도심을 관조(觀照)해 파하더라도 참으로 밝아 무루(無漏)의 지혜가 밝지 못하면 능소(能所)가 없는 곳에 머무름이니 곧 한 생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지혜가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나 이렇게 깨달아서 알면 머무름에 집착도 하지 않고 맑고 청정한 즉, 참되고 밝은 것이 이것을 말미암아 개발된다. 곧 삼계(三界)의 얽힌 의혹을 끊고 삼승(三乘)의 도를 증득함이니 이것이 정(淨)으로써 묘문(妙門)을 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육통묘문(六通妙門)이라 한다. 차례로 서로 통해 참으로 묘한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방편문(方便門)이다. 하지만 말과 글로써 하루 종일 말하고 십년 백년을 말하더라도 말은 말이요, 글은 글일 뿐이다. 어찌 이 도리를 거량(擧量)할 수 있겠는가.


*육화경(六和敬)이란---승려들이 공동체 수행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화합을 위해 상대와 마음이 합해지도록 공경하는 여섯 가지 원칙을 말한다.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로 들고 있을 정도로 승가는 화합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불교교단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사원 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불 ? 법 ? 승 삼보 가운데 승을 승가(僧伽)라 하고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육화경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이다.

     1) 신화경(身和敬) - 몸으로 부처님 행을 해 행동으로 서로 화합하고,

     2) 구화경(口和敬) - 입으로 부처님 말을 해 말로써 화합하고,

     3) 의화경(意和敬) - 뜻으로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 화합하고,

     4) 계화경(戒和敬) - 바른 행동을 해 계율로써 서로 화합하고,

     5) 견화경(見和敬) - 이념과 사상을 바로 해 바른 견해로써 서로 화합하고,

     6) 이화경(利和敬) -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충실해 정신적 ? 물질적 이익을 이웃에 회향해 화합하는 것.

    --------

     1. 신화공주(身和共住) - 몸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대중이 한 장소에서 같이 살라는 말,

     2. 구화무쟁(口和無諍) - 입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는 말,

     3. 의화동사(意和同事) - 뜻으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서로 협력해 함께 일하라는 말,

     4. 계화동수(戒和同修) - 계율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함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란 말,

     5. 견화동해(見和同解) - 바른 견해로 화합하라는 말이며, 이해하며 의견을 나누라는 말,

     6. 이화동균(利和同均) - 동등한 이익으로 화합하며, 삼보정재(三寶淨財)를 균등히 나누는 것.

 

*윤장대(輪藏臺)---경전 적은 길쭉한 통에 기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나 경전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지닌다.


*윤필거사(潤弼居士)---신라시대 의상(義湘)대사의 동생으로 불교에 입문한 거사로서 도력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경 공덕산(孔德山) 대승사(大乘寺), 문경 도장산(道藏山) 심원사(深源寺), 안양 삼성산(三聖山) 삼막사(三幕寺), 양평 용문산(龍門山) 상원사(上院寺) 등 여러 곳에 윤필거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윤회(輪廻, 산스크리트어 상사라/samsara)---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은 지은 업에 의해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즉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교사상으로, BC 600년경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의 문헌에서 비롯돼 대중에게 전파됐다. 불교에서는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세계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에 지옥,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天上)의 육도(六道)가 있다고 말한다. 이 3계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중생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된다.

       - 삼선도(三善道): 천상(天上), 인간(人間), 수라(修羅)

       - 삼악도(三惡道):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율장(律藏, vinaya-pitaka)---삼장(三藏)의 하나 석존(釋尊)이 제정(制定)한 계율(戒律)의 조례(條例)를 모은 교전(敎典)을 일컬음. 율장(律藏)은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i), 건도부(健度部, Khandaka), 부수(付隨, Pariv?ra)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간화선(看話禪)에서 화두의 하나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란 은으로 만든 산, 철로 만든 벽이란 뜻이다. 헌데 은산철벽은 단단해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이 높아서 오르기 어렵다는 말로서 화두를 참구해서 깨닫는 일이 그와 같이 어렵다는 말이다.


*음광승존(飮光勝尊)---빛을 마시는 뛰어난 존자란 뜻으로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을 존경해서 이르는 말임.---가섭(迦葉) 참조.


*응진전(應眞殿)---나한전(羅漢殿) 참조.


*의근(意根, 산스크리트어 mana-indriya)---제6식의 발생 근거임.


*의단(疑團)---의단이란 ‘의심 덩어리’, ‘의심 뭉치’라는 뜻이다.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의 자리, 즉 뜻풀이, 말할 길이 끊어지고,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서 분별망상의 명근(命根-생명력)이 끊어지도록 만드는 간화 장치는 ‘의단(疑團)’”이라며, “이 의단이 깨어질 때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이라 정의하고, 의단으로 발전되는 첫 단초로서의 의심은 공안(公案)에서 비롯되고,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이 곧 화두(話頭)라고 정의했다.---→의정(疑情) 참조.


*의리선(義理禪)---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말함. 즉 이치나 논리,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선을 말한다.---→문자선(文字禪), 구두선(口頭禪)과 비슷한 말.


*의문구족(義文具足)---여기서 ‘의(義)’는 말을 함에 있어서 조리(條理)나 의미란 뜻이고, 문(文)은 형식이나 표현을 뜻한다. 따라서 ‘의문(義文)’은 조리 있는 표현이 되겠고, 의문구족이란 ‘조리가 정연하게 표현함’이라는 의미겠는데, 석존께서 처음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법을 설함에 의문구족하라고 하셨다. 즉 논리 정연하게 법을 설하라고 당부하셨다. 


*의상(義湘)대사---신라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입적했다. 성은 김씨이며 진골 출신이다. 661년(문무왕 1) 당(唐)나라로 유학했다가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의도를 알고 이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급거 귀국했다.

   신라 삼국통일 후 676년(문무왕 16)에 문무왕의 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후 구례 화엄사(華嚴寺), 범어사(梵魚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걸립해 화엄대교를 전했다. 그리하여 화엄사상을 우리 풍토에 맞게 정리 해 낸 분이 의상대사이다.

   당시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쌍벽을 이룬 선지식이었는데, 의상은 주로 제도권에서 활동을 했고, 원효는 저자거리에서 민중을 상대로 재야적 활동을 주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조명으로는 의상은 보수적이랄 수 있고, 원효는 진보적이었다고 하겠다.


*의언진여(依言眞如) 이언진여(離言眞如)---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를 빌려 진리를 표현하지만 진짜 진리는 언어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의정(義淨)---중국 당나라의 학승(學僧)으로 20년 동안 인도 등지를 여행한 후 400부의 산스크리트어 불전을 가지고 돌아와 경전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인도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은 7세기 후반의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 사정이라든가 사회 상태를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의정(疑情)---의정이란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 물밀 듯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한다. 이 의정의 농도가 매우 진한 상태를 의단(疑團)이라 한다. 의단이란 ‘의심 덩어리’, ‘의심 뭉치’라는 뜻이다. 참선하는 데에는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화두는 의정이 생명이다. 의정이 일어나야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일어나지 않고 진실로 돌아간다.

   대분심(大憤心)을 일으켜보라. 그래야 큰 의정을 일으킬 수가 있고, 큰 의정을 일으켜야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을 통해 비로소 공안을 타파하게 된다. 진리는 개념이나 지식으로 알 수 없다. 이것이 의정을 통한 깨달음의 길이다.---→의단(疑團) 참조.


*의정돈발법(疑情頓發法)---의정돈발법이란 ‘의정을 문득 일으키게 하는 방법’을 뜻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의정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요인’이다. 즉, 실제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의정을 좀 더 잘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엔 세 가지 부분이 있다. 선지식, 참구자 및 화두가 그것이다. 즉 의심을 일으키도록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는 선지식과 그로부터 화두를 받아서 참구해 나가는 당사자의 노력, 그리고 바로 그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실제적 요령의 숙지 등의 세 가지이다.


*의천(義天)---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大覺國師). 중국 송(宋)에 유학, 귀국 후 개경의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 3대부>를 강의하면서 천태종을 개창해 선교일치를 주장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이라 할 회통불교의 맥을 계승했다.

   그는 초조대장경에서 제외된 중국 및 한국 학승들의 저술인 장 ? 소(章疏) 등을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작성하고, 이를 목판본으로 판각했다(통칭 속장경이라 잘못 일컬어짐). 그리고 국가의 이익과 민생의 복리를 위해 주전론(鑄錢論)을 주장 관철시켰다.

     ※교장(敎藏)---학승들의 불경에 대한 주석서인 장 ? 소(章疏) 등을 모은 것.


*의타기성(依他起性)---유식 삼성설(三性說)의 하나. ‘나’라는 것도 인연 따라서 잠깐 이루어지고 또 내가 미워하는 마음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 인연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라는 것이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마치 허깨비같이 가짜로 잠깐 존재하는 것이다.---→유식삼성(唯識三性) 참조.


*이고득락(離苦得樂)---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을 말한다. 중생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준다는 발고여락(拔苦與樂)과 같은 뜻이다.

   불교의 목적이란 중생이 고(苦)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것, 일상을 통해서 그 많고 많은 인생사 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장애물들, 온갖 병통들, 온갖 고뇌들, 온갖 번뇌들이 끊임없이 여름날 저 먹구름 일어나듯이 계속 일어나는 데, 이것으로부터 해탈하는 길 그것이 바로 이고득락이다.


*이공(二空)과 삼공(三空)---대승불교의 교의에서 공(空)을 크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공(二空)으로 나눈다.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문에 이공(二空)을 인법이공(人法二空)이라고도 한다. 이공(二空)의 교의는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교의가 됐다.

   또 아공(我空)을 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하며, 법공(法空)을 법무아(法無我)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칭해 이무아(二無我)라고 하는데, 이무아(二無我)는 이공(二空)과 같은 뜻이다. 이공의 교의는 후대에 이공에 구공(俱空)을 더해 삼공(三空)의 교의로 발전했다.

   아공은 자아의 실재를 공이라 한 것이고, 법공은 제법이 다만 인연에 의해 생기고 존재하며 연기에서 인정될 뿐, 불변하는 자성(自性)이란 있을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아공과 법공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공(空)마저도 다 공해져야 하는데 그 자리를 ‘구공(俱空)’의 자리라 한다.

   좀 더 살펴보면, 아공은 중생이란 오온이 임시로 화합한 것이므로 ‘나(我)’라고 할 실체가 없는 것, 즉 이치의 옳고 그름(是非)에 표준이 없이 자기의 의견만 집착해서 ‘아’를 고집하는 아집(我執)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법공은 오온의 자성도 공하다는 뜻, 즉 객관인 사물이나 마음 작용의 현상을 실재하는 것인 줄로 잘 못 알고 고집하는 법집(法執)을 벗어난 것이다.

   이공을 다시 아우르는 구공은 아집과 법집을 벗어나 이공과 법공에 대한 집착마저 다 없어져 본성에 계합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은 실체가 없어 텅 빈 것이 아니라 실체라는 집착을 넘어섰기에 꽉 찬 것이기도 하다. 아공, 법공, 구공의 세 가지 공의 자리를 드러내는 것을 ‘현삼공(顯三空)’이라 한다.


*이구지(離垢地)---모든 괴로움과 더러움에서 벗어난 모습.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가운데 제2지가 이구지이다. 즉 보살의 수행 단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을 보살 10지(地)라 하고, 이구지는 보살이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기쁨을 느끼는 10지 중 제2단계를 말한다. 제1단계는 환희지(歡喜地)이다. 이 이구지에 이르면 수혹(修惑=思惑-여러 가지 끓어오르는 번뇌)을 끊고, 범계(犯戒)의 더러움을 제거해 몸을 깨끗하게 하는 지위이다.---→십지(十地), 환희지(歡喜地) 참조.


*이근원통(耳根圓通)---<능엄경>에서 열거하는 25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25가지 수행법 중에서 관음보살이 사용한 이근수행법을 가리킨다. 이근수행법이 기타 수행법에 비해서 가장 원통(圓通)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이고, 다음에는 ‘듣는 놈을 돌리는(反聞聞性)’ 단계로 접어든다. 처음 과정이 끝나야만 반문문성의 과정으로 진입함은 물론이다. 소리를 집중하는 데 있어서도 다시 2가지 단계로 나뉜다. 내면의 소리(內耳聲)와 바깥의 소리(外耳聲)가 그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자기의 체내에서 내는 소리 즉 염불(念佛), 독경(讀經)소리 등을 듣는 것이다. 염(念)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큰 소리로 염하는 것, 작은 소리로 염하는 것(金剛念), 마음의 소리로 염하는 것(瑜伽念)이 있다. 염할 때에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깥의 소리란 어떤 소리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소리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나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되었을 때 능히 졸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이런 경지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바깥의 소리에 집중한다고 할 때 가장 보편적인 소리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이다. 이는 가장 쉽게 정(定)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근원통이란 북방 불교권에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수행법이다. 그리하여 그 일부가 염불선이라는 형태로 변용돼 내려왔다.


*이류중행(異類中行)---인간 이외의 부류 가운데서 수행한다는 뜻이다. 당나라의 고승 남전보원(南泉普願)이 주장한 수행법이다. 이류(異類)란 본래 인간과는 다른 생물, 즉 동물을 뜻하는 말이다. 남전은 30년 동안 산에서 밭을 갈며 수행했는데, 동물에게는 망상이 없으므로 이들 가운데서 도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곧 세상의 시비와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중생의 불성이 청정함을 깨닫고 이들 가운데서 수행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불 ? 보살이 자기의 본지(本地)에 머물지 않고, 생사윤회 속에 있는 다른 중생[異類] 속에 태어나 제도 사업을 벌이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이 뭣고?---“무자화두(無字話頭) = 이 뭣고 화두” = “이뭣고[是甚摩]”

   ‘이 뭣고’란 ‘시심마(是甚?)’를 경상도 사투리로 표현한 것으로, 선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公案)을 말한다. 사람마다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이 있는데, 중생은 그것을 일러 마음이다, 넋이다, 영혼이다… 라는 의심을 품는다. 그래서 ‘이 뭣고[是甚摩]’라는 화두인 공안(公案)이 성립됐다.

   공안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실마리를 주는 말로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시심마' 즉 '이 뭣고'란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따라,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이 마음가짐을 관찰하는 것으로, 행하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멈춘 가운데[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語默動靜)] 나를 움직이는 마음의 주인공 ‘이 놈이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뭣고[시심마]’의 유래---먼저 ‘시심마(是甚?)’라는 것은 오래된 글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흔히 백화체(白話體)라고 얘기하는 한문과 현대 중국어의 과도기에 속하는 구어식의 문체가 있는데 거기에 출현한다. 이때의 문장은 글자만으로는 도저히 풀이가 안 되는 관용적인 표현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그 중 다수가 현대 중국어에 쓰이고 있다. 

   지금 이 질문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몸인가? 입인가? 마음인가? 아니면 님의 그 귀하다는  불성인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말고 실제로 분명하게 들어내서 보여 보아라. 몸뚱이라면 죽은 뒤는 말을 못하니 송장일 뿐이오. 마음인가? 불성인가? 그런 것 같으면 한 번 들어내 보아라 … 이다.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시심마(是甚?)는 바로 달마대사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가리키는 것이다.---→시심마(是甚?) 참조.


*이법계(理法界)----화엄 사법계(四法界)의 하나.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 수행이 최고조에 달해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상태가 되는 경지.---→상수멸정(想受滅定), 사법계(四法界) 참조.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인도의 학승 세우(世友, 바수미트라/Vasumitra, 서기 1~2세기경)가 짓고 현장(玄?)이 번역한 것으로 소승불교 20부의 분파 상태와 교리의 요지를 기록한 책.---→세우(世友) 참조.


*이사무애법계(理事無?法界)---화엄교학의 4법계의 하나.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 ? 융합하는 것. 즉, 이와 사,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사법계(四法界) 참조. 


*이산혜연선사발원문(怡山慧然禪師發願文)---이산연선사발원문(怡山然禪師發願文)이라고도 한다. 이산 혜연선사는 중국 당나라 말기의 승려로서 중국 복건성 복주사람으로 장생산(長生山)에 거주해 장생 교연(長生皎然)으로도 불리고, 이산 교연(怡山皎然))이라고도 한다. 이산 혜연선사가 지은 발원문이 유명해 1964년 운허(耘虛)스님이 번역한 것과 성철(性澈)스님의 번역문이 있다. 이산 혜연선사발원문은 관세음보살의 크나큰 자비로 시방세계에 다니면서 많은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서원을 담고 있는 발원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다.

*이숙(異熟, 산스크리트어 vip?ka)---‘다를 이(異), 익숙할 숙(熟)’.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이다. 이숙(異熟: 다르게 익음)은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불교의 인과사상 또는 교의를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과보(果報)라고도 번역한다. 즉, 현재의 나 역시 전생에서의 업의 과보이므로 이숙으로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원인과 다른 성질로 성숙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즉, 가난뱅이던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아 기업체 사장이 됐다면, 그것은 멋진 이숙이다. 나아가서 삼라만상 자연생태계에 모든 동식물이 생겨나고 성장하며 소멸해가는 과정을 이숙이라 하기도 한다.


*이숙식(異熟識)---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모든 종자를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모든 업의 결과[果體]로서의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말해진다. 즉, 아뢰야식은 과거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일어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니 이숙식은 아뢰야식의 별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전변을 이숙전변(異熟轉變)이라고 한 것은 윤회의 주체로서 아뢰야식은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성립한 것이며, 이숙과(異熟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명언종자(名言種子)가 보존돼 있고, 그들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상태[無記]인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밝힌 것이 이숙전변이다.

     ※명언종자(名言種子)---언어 작용에 의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된 잠재력으로,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


*이심전심(以心傳心)---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뜻이 통한다는 말. 혹은 문자나 언어 없이 남을 깨닫게 한다는 말. 원래 이 말은 불교의 법통(法統) 계승에 쓰여 온 말이다.

   <전등록(傳燈錄)>은 송(宋)나라 사문(沙門) 도언(道彦)이 석가세존 이래로 내려온 조사들의 법맥의 계통을 세우고 많은 법어(法語)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부처님이 가신 뒤 법을 가섭에게 붙였는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했다”고 나와 있다. 즉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했는데, 이심전심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십오방편(25方便)---천태 지관의 25방편을 뜻한다. 중국 수나라 시대에 천태 지의(天台智?, 538-597)대사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추어야 할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출가자든 세간의 중생이든 모두 수행에 들기 전에 읽어보고 실천해야할 것들이다. 그리고 그 다섯 항목에 각각 5가지 실천항목이 들어 있어 25방편이 된다.

     1) 구오연(具五緣) -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의식(衣食)을 마련하고, 조용한 곳에 머물고, 잡무를 중지하고, 덕이 높은 스승을 앎.---→구오연(具五緣) 참조.

     2) 가오욕(呵五欲) -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함.

     3) 기오개(棄五蓋) - 탐욕(貪欲) ? 진에(瞋?) ? 수면(睡眠) ? 도회(掉悔) ? 의(疑)를 버림.

     4) 조오사(調五事) - 식(食) ? 면(眠) ? 신(身) ? 식(息) ? 심(心)을 조절함.

     5) 행오법(行五法) - 가르침을 원하고, 힘써 수행하고, 선정(禪定)을 소중하게 여기고, 선정에 의한 지혜의 즐거움을 알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하지 않게 함.

   이는 천태 지의대사가 그 이전의 여러 선지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분석 판별한 것을 지양하고 교학을 총정리해 새로운 체계를 세운 것이다.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 달마의 어록. 달마 이름으로 발표된 수많은 저술들 중 진짜 달마의 작품은 이 <이입사행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달마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이입사행론>은 둔황(敦煌) 막고굴에서 발굴된 것과 우리나라에 전하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보리달마사행론(菩提達摩四行論)>은 1464년과 1908년 간행된 두 종류가 현존한다. 내용은 달마의 선수행법으로 선정에 드는 두 가지 길과 네 가지 행동을 말한다. 달마의 제자 담림(曇琳)이 스승의 설법을 정리하고, 그 서문을 썼다. 

   이입(二入)은 도에 이르는 두 가지 길로,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이른다.

   ? 이입(理入)은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입문[방법]을 뜻하고, 행입은 수행을 통한 방법을 말함이다.

   ? 행입(行入)은 수행을 통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실천행이 있으니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이 그것이다.

     ? 보원행(報寃行)은 남으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의 전생에 저지른 원한 때문에 생긴 일이니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이며,

     ? 수연행(隨緣行)은 모든 일이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므로 성공이나 실패에 대해 인연에 맡기고 따르는 일이고,

     ? 무소구행(無所求行)은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 사물을 탐내지 않는 행위이다.

     ? 칭법행(稱法行)은 진리의 법대로 살아가는 실천행을 말함이니, 그런즉 모든 중생의 본래 성품이 청정하다는 것을 믿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수행법이다.


*이제(二諦)---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합쳐 이제(二諦)라 한다. 제(諦)는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하고, 진제는 절대적 진리를 말하며, 속제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진리,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현실 생활의 실상(實相)에 따라 알기 쉽게 설명한 진리를 말한다.

   진제는 여러 경전에서 승의제 ? 최승의제 ? 제일의제라고도 했으며 세속을 초탈한 세계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속제는 세속제 ? 세제라고도 하며 세간적인 진리를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으나 쉽게 말해 속제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 과(果)이며,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돼 있으며 생멸은 공의 상태이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진제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속제(俗諦, samvrti-satya) 참조.


*이장(二障)---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장(二障)이 있다. 번뇌장은 탐 ? 진 ? 치(貪瞋癡) 등에 의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 것이고, 소지장(所知障)이란 기왕에 조금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이다. 즉,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여러 가지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데, 이때의 알음알이(얕은 지식)에 집착해 더 깊은 공부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삼장(三障)과 소지장(所知障) 참조.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참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이참이고 하나는 사참이다. 사참(事懺)은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으로 지은 악업에 대한 참회를 절이나 염불, 독송 등을 통해 하는 것이다. 이참은 본래의 마음자리에서 볼 때 모든 죄가 본래 자성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봄으로써 참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참과 사참 두 참법 중, 사참은 이참이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될 때 온전히 이루어지고, 이참 또한 사참이 없으면 공중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곧 사참과 이참은 결코 둘이 아니다. 불교 교의의 진리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있음과 같은 맥락이다.---→사참(事懺) 참조. 


*이체자(異體字)---한자(漢字)는 수천 년에 걸쳐 사용돼 왔기 때문에 같은 글자라도 시대와 쓴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다르고, 서체에 따라 약자, 간체자, 초서 등이 있는가 하면, 전서(篆書)와 같이 다른 서체도 있어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글자가 있다. 같은 글자인데 이처럼 모양이 다른 글자를 통틀어 이체자 또는 변체자(變體字)라 한다.

   이체자가 생긴 이유는 오늘날과 같이 통일된 활자가 없이 사람마다 붓 등의 필기구를 가지고 글씨를 쓰고, 지역, 시대에 따라 서체가 다양해짐에 따라 한 개의 글자도 그 원모양이 변해 이체자가 생겼다. 팔만대장경엔 이런 이체자가 약 8천종 2만여 자 이상이 있어서 컴퓨터 활자화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탐(離貪, viraga)---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탐이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애욕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 애욕의 소용돌이를 밀쳐버리는 것이 이탐인데,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은 욕망을 다 없애버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갈애를 없애라고 가르치셨다. 식욕, 성욕 등 기본적인 욕구는 넘치지 않은 한 인정하신 것이다.


 *이행(二行)---이행이라는 것은 이분법적 행동을 말한다. 좋다-나쁘다, 한다-안한다, 좋다-싫다, 예쁘다-추하다 등 모든 사항을 두 가지 생각, 두 가지 행동 패턴으로 나누어 좋고-싫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깨달음의 첫 번째 모습이 무엇인가 나누어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행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행을 극복하는 것이 깨달음을 향하는 첫 번째 과제이다. 


*이행도(易行道)---이행도는 부처님의 구제를 바라는, 부처님의 구제력에 의지하라는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이고 가르침이다. 즉, 아미타불의 타력본원에 의지하는 ‘신앙의 불교’로서 아미타불의 힘을 믿고 그에 의지하면 구제 받을 수 있다는 타력문(他力門)이다. 수행하기 쉽고, 해탈의 경지에 빨리 도달할 수 있어 이 길이 쉽다고 해서 이행도라 하며, 난행도(難行道)에 대응되는 말이다.---→난행도(難行道),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참조.

 

*이혹(二惑)---혹(惑)이란 마음의 미혹, 번뇌를 의미한다. 미혹(迷惑)의 장애(障碍)인 견혹과 사혹 두 가지를 말한다.

     ? 견혹(見惑) - 잘못된 견해. 사물에 집착하는 망상으로 일어나는 번뇌. 혹은 그릇된 도리를 분별함으로써 일으키는 아견(我見), 변견(邊見)… 따위 오견(五見)으로서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해 생기는 후천적 번뇌이고. 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론적인 번뇌이며, 사상적인 미혹이다.---→견혹(見惑) 참조.

     ? 사혹(思惑) - 탐 진 치(貪瞋痴)와 같은 타고날 때부터 갖는 태생적인 번뇌라서 끊기가 힘들고, 도(道)를 닦아야 끊을 수 있으므로 이를 수혹(修惑)이라 한다.---→사혹(思惑) 참조.


*인계(印契) = 수인(手印)---부처가 자기의 내심(內心)의 깨달음을 나타내기 위해 열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갖가지 표상(表象)을 말함. 시무외인, 항마촉지인 따위 수인이다.---→수인(手印) 참조.


*인과율(因果律), 인과업보(因果業報), 업인과보(業因果報)---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인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한다. 남이 내게 잘해 주면 나도 그에게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이 돼,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인과율(因果律)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인다라망(因陀羅網) = 인드라망산, 산스크리트어 인드라얄라(indrjala)---인드라의 보석 그물이라는 뜻이다. 불교 신화에 따르면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로서,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했다.

   이는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을 상징하며, 나아가서 절실하게 자신을 아는 개체는 전체를 안다고 하는 불교철학을 상징한다. 즉, 끊임없이 서로 연결돼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말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화엄철학에서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고 해서 부처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죽은 사람을 극락세계로 안내하는 보살.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죽은 사람이 타는 가마인 영가(靈駕)를 놓는 영가단이 있고, 그 뒤편에 탱화가 걸려 있다. 인로왕보살은 이 탱화 속에 등장해 죽은 이를 극락으로 인도하고 있다.


*인명(因明, 산스크리트어 hetu-vidy)---5∼6세기경에 성립한 불교논리학, 논증의 근거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인도의 불교도들은 인도의 학문을 내명(內明) ? 의방명(醫方明) ? 인명(因明) ? 성명(聲明) ? 공교명(工巧明) 등의 5명(五明)으로 분류했는데, 그중 하나가 인명이다. 인(因 hetu)이란 논증의 형식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뜻하는데, 이것은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因)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인명이라 했다.

   인도의 논리학은 니아야(Ny?ya)학파와 불교에 의해 체계화됐다고 볼 수 있으나 중국 등지에서는 특히 불교논리학을 인명이라 부른다. 그전에는 세친(世親) 등이 체계적인 논리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후 논리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디그나가(Dign?ga 陳那:400∼480?)이다. 그러므로 디그나가 이전의 불교논리학을 고(古)인명, 그 이후를 신(新)인명이라 한다. 이러한 인명에는 유가행유식학(瑜伽行唯識學)의 인식론이 기반이 됐으며, 그 기반 위에서 불교논리학이 발전했다.


*인상(人相)---4상(四相)의 하나. 부파불교 당시 독자부(犢子部)에서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한 뿌드갈라(pudgala)를 말한다.---→개아(個我), 사상(四相) 참조.


*인아견(人我見)---사람의 몸과 마음속에 불변하는 실체(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 마음의 진여를 회복하고자 하는 수행에 있어서 금기해야 할 사항은 그릇된 고집, 즉 사집(邪執)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집은 모두가 ‘나’라는 생각에서 생긴다. 이를 아견(我見)이라 하는데 이 아견을 다시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나눈다. 인아견이란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믿는 고집을 말하며, 법아견은 하나의 사물 그 자체의 존재를 믿는 고집을 말한다.


*인연화합(因緣和合)---사물의 생몰변화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보자. 즉,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소(?)가 되고 소는 제호(醍?)가 된다. 요즘 말로하면, 우유가 치스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유에 발효 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체적 인간의 업인(業因)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으면 안 된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에는 발효조건을 갖춰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과 연의 화합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 또한 기대될 수 없다. 따라서 인과 연이 잘 화합해야만 좋은 과(果)를 얻을 수 있다.


*인왕(仁王)---사찰 문이나 불전의 입구, 또는 불상의 좌우, 탑의 문 등을 지키는 한 쌍의 수호신 흔히 금강역사(金剛力士) ? 이왕(二王) 등으로도 불리며, 원래는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신이었는데, 불교에서도 받아들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변했다.


*인왕경(仁王經)---원명은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인데 줄여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또는 인왕경(仁王經)이라고 한다. 호국경(護國經)으로서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한 불경.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인왕반야바라밀경>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불공(不空)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있다.


*인천(人天)---인간과 신(神).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말한다.


*인천안목(人天眼目)---송나라 시대(1189년) 승려 회암 지소(晦庵智昭)가 당시 중국 선종의 위앙종(?仰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등 오종의 조사들의 행적과 기본사상 언구(言句)를 요약해 편집한 책으로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도 많이 읽히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강금강(姜金剛)이 이 책을 간행했던 것을 원본으로 삼아, 조선 태조 4년(1395)에 무학(無學)대사가 회암사에서 다시 새겨 펴낸 적이 있다(보물 제1094호).


*인행(因行)---원인이 되는 행위. 선인선과(善因善果)라 했을 때, 선과의 인행이 선행이다.


*일경사심(一境四心)---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법문이 있다. 똑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보면 물이지만, 하늘이 보면 장엄한 보배유리 대지고, 아귀한테는 흥건한 피고름이며, 물고기한테는 집이란다. 한 마리의 개를 두고, 부처님은 중생이라 하고, 사람은 개라 하고, 개는 동료라 하고, 강아지는 어미라 한다. 이와 같이 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일수사견(一水四見) 참조.


*일광보살 ? 월광보살---두 보살은 약사여래의 협시보살이다. 일광보살은 태양처럼 사람들의 번뇌를 비추어주고 무지의 어둠을 쳐부수는 지혜를 상징하면서 일륜(日輪)이 들어 있는 보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월광보살은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것처럼 자애로운 마음을 상징하며 월륜(月輪)이 들어있는 보관을 쓰고 있다.


*일념(一念)---일념에는 대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서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짧은 순간의 생각이라는 말로 쓴다.

   전자의 경우, 한결같은 마음, 지극한 마음, 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뜻한다. 한곳에 집중해 산란하지 않는 마음, 통일된 마음, 오로지 한 가지에 몰두하는 마음을 말한다. 마음을 한군데로 모은다는 것인데, 무엇을 하든 자기가 정한 방편을 일념으로 하는 자가 도를 이룬다.

   후자는 주로 불교에서 짧은 순간의 한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도 중생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고통도 되고 즐거움도 되며, 지옥과 극락이 나뉘기도 한다. 따라서 짧은 순간의 생각도 매우 귀중하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삶을 이루고, 다음 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한 생각’ 참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부처님이 극히 중대한 일을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말인데, 여기서 중대한 일[일대사(一大事)]이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부처가 인연을 맺어 세상에 나타나서 교화하는 일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 일체 중생들을 위해 진리의 문을 열기 위해서 오셨으며(開),

      ? 일체 중생들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오셨으며(示),

      ? 일체 중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悟),

      ? 일체 중생들에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入) 오신 것이다. 이 넷을 줄여서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의 핵심 내용이다.

 

*일련종(一連宗)---일본 니치렌(一連, 1222∼1282년)이 창시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 천태종의 성지로 유명한 히에이산(比叡山)에서 10년 동안 천태교의와 수행을 닦은 후, 대승경전인 <법화경>의 신앙을 일본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맞게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련종을 개창했다.

   그의 저서 <입정안국론(入正安國論)>에서 주종(主從)의 도덕, 조상과 부모에 대한 보은, 군주의 은혜, 아랫사람에 대한 보은을 강조해 오늘날의 군국주의 색채의 밑바탕이 됐다. 그의 재가신도에는 지방의 무사계급과 여성신도가 많았고, 오늘날 창가학회(創價學會)가 바로 일련종의 지파이다.


*일면불 ? 월면불(日面佛 月面佛)---<불명경(佛名經)>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월면이라는 이름의 부처는 수명이 일일일야(一日一夜)이고, 일면이라는 부처의 수명은 1,800세라고 씌어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가 병상에 눕자, 원주가 문안을 왔다.

   “스님 요즘 건강이 어떠하십니까?”라는 문안 인사에 대한 대답이 “일면불 월면불이야!”였다. 이 말은 병이 나아 1,800년을 살아도 좋고, 병이 악화돼 ‘밤새 안녕!’ 해도 좋다는 뜻이다. 즉 죽음을 초탈한 생사일여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티끌 하나 속에도 시방세계(우주)가 다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에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가 있다. 일체의 각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포함돼 있고, 그 시방세계의 티끌 속에도 또 다른 시방세계인 무한한 우주가 펼쳐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우주는 무한해서 끝이 없다는 것이다.---→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참조.


*일법인(一法印)---대승불교에서 설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란 말.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한다.

   소승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인(涅槃寂靜)의 삼법인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제법실상(모든 것이 그대로 진실이다)의 일법인(一法印) 곧 일실상인(一實相印)만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곧 부처님의 일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병식재(一病息災)---하나의 병을 가진 사람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 음식조절, 운동 등 자기절제를 통해 몸을 다스리는 덕에 다른 질병도 모두 다스리게 돼 장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일불승(一佛乘)---일승(一乘)이라고도 한다.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가르침을 뜻한다. 일불승이란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의 유일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결국 모든 가르침이 일체중생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한 가르침 하나라는 뜻이다.

   불교에는 가르침이 참으로 다양하다. 석존은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탈것(가르침)을 설하며 교시했다. 흔히 표현하기를 8만 4천 근기에 따른 8만 4천 법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가르침도 결국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종점에 귀결된다. 어쩔 수 없어서 근기를 따라 각양각색의 법을 펼쳐놓았지만 사실인즉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 종점이다. 그 게 일불승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것이 또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수한 생을 거듭하면서 수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으로 출발해 끝내 부처님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달리 다른 일은 없다. 처음도 부처님이요, 중간도 부처님이요, 끝도 부처님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말한 ‘유유 일불승 무이역무삼(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으로서 법화경의 종지(宗旨)이며, 대승불교의 핵심이고, 불교의 최고 종지인 일불사상이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의 유일한 가르침. 일불승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모든 가르침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부처님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일승(一乘, Ekay?na) 참조.


*일상관(日想觀)---지는 해를 보고 서쪽에 있는 극락정토를 생각하는 수행법. 16관의 하나. 관상염불의 첫 단계라 해서 제1관이라 하기도 한다. 지는 해를 보고 서쪽에 있는 극락정토를 관상(觀想)하는 방법이다. 수행에 함에 있어서 지관(止觀)을 통해서만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지관이 쉽지 않아서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오게 됐다. 묵조, 화두, 진언, 절, 사경 등이 등장했지만 어느 것도 온전치 못해 더러 기복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헌데 관상염불의 관법은 모두 형상을 보여 수행하도록 하는데, 형상을 상상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다고 한다. 일상관은 정토사상에서의 ‘서쪽’, ‘광명’ 등과 관련해 선택된 방법인 듯하다.

   석존과 같은 시대에 인도 마가다(Magadha)국에서 아사세(阿?世) 태자가 그 부왕인 빈비사라(Bimbisara)왕을 옥에 가두어 죽이는 참극이 있었다. 이에 절망한 빈비사라왕의 비인 위제희부인(韋提希夫人)이 부처님께 아미타불의 정토를 기원하는 바, 부처님께서 위제희부인에게 아미타불의 정토를 관상하는 방법을 <관무량수경>에서 제1관인 일상관(日想觀)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위제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비롯한 중생들은 응당히 오로지 한 마음으로 생각을 한 곳에 머물게 하여 서쪽 방향을 생각하라. 어떻게 상(想)을 지을 것인가? 무릇 상을 짓는다는 것은 일체중생이 자신이 눈먼자가 아니고 눈이 있는 무리는 모두 해가 지는 모습을 보아라. 마땅히 상상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바르게 앉아 서쪽으로 향하고, 해가 지려고 하는 곳을 자세히 관하라. 마음을 견고하게 머물러서 오로지 상상하고 움직이지 마라. 해가 지려는 것을 볼 때는 그 모습이 북을 걸어 둔 것처럼 하여라. 이미 해를 보았으면,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모두 명료하게 하여라. 이것을 일상(日想)이라 하고, 초관(初觀)이라 이름한다”하셨다. 이러한 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日想觀)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일상관을 보이신 뜻은, 중생으로 하여금 정토의 경계를 알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자, 방위를 가리켜 일정한 위치를 둔 것이다. 겨울과 여름의 두 계절을 취하지 않고, 오직 봄 가을 두 계절을 취한 것은 해가 정동(正東)에서 떠 올라 곧게 서쪽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정토는 해가 지는 곳이며 똑바로 서쪽으로 향하여 10만억국토를 지나서 있다.

   일상을 관하는 자세

    1) 처음에 마음을 머물게 하려는 때에는 가부좌로 바르게 앉는다.

    2) 오른 다리를 왼 허벅다리 위에 놓고 밖으로 나란히 한다.

    3) 왼손을 오른손 바닦 위에 놓고 몸을 바르고 곧게 세운다.

    4) 입과 치아를 합하되 꽉 다물지 않는다.

    5) 혀는 윗잇몸에 기대는데 목구멍과 코 중간의 기도(氣道)가 잘 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일상삼매(一相三昧)---일상삼매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상을 떠난 것을 가리킨다. 중생들은 이분적(二分的) 사고(思考) 속에 살고 있다. 많다 적다, 있다 없다, 더럽다 깨끗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 빈곤감이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마음의 벽(이분적 사고)을 깨나갈 적에 마음의 벽이 무너진 만큼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이와 같이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다 걷어내고 마음의 벽이 온전히 다 무너져 너와 내가 없는 하나가 됐을 때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한다. 즉, 모든 현상이 평등해 하나의 모습임을 주시하는 삼매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삼매의 상태가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속되는 상태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즉 일상삼매의 마음을 온전히 유지 할 적에 일행삼매라고 한다.---→일행삼매(一行三昧) 참조.


*일수사견(一水四見)---일경사심(一境四心)과 비슷한 말.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표상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내 마음에 비추어져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보는 이마다 그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므로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유리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자기 집으로 본다는 뜻이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잘 인용되는 말로서, 같은 대상이지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각각 견해가 다름을 비유한 말이다.---→일경사심(一境四心) 참조.


*일승(一乘, Ekay?na)---일불승(一佛乘)과 같은 말. 소승 불교에서의 성문승(聲聞乘) ? 연각승(緣覺乘) ? 보살승(菩薩乘)의 삼승(三乘)에 대해서 대승 불교가 스스로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에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의 삼승을 모아 가지고 성불이라는 일승불로 나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일승(一乘)이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은 유일(唯一)하니 이 가르침에 의해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성불한다는 것이며, 3승은 중생의 성질과 능력에 응해 성문 ? 연각 ? 보살에 각각 고유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일승(무상대도)이 진실이요, 2승 ? 3승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일불승에 이르게 해 성불하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일불승(一佛乘) 참조.


*일승사상(一乘思想)---일승(一乘)이란 말은 <법화경>에서 본격적으로 강조된 개념으로 성문 ? 연각 ? 보살들은 하나의 커다란 수레[일승(一乘)]로 귀일하게 된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은 방편이고, 일승은 진실이라 하셨다. 즉, 세존이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에는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三乘)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결국은 모두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 바로 일승사상이다.

   여타의 대승경전에서는 성문 ? 연각 등의 소승 성자들은 보살보다 한 단계 낮게 취급해 차별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법화경>에서는 이들을 모두 일승으로 포섭한 것이다. 일승, 그것은 모든 차별과 계급의식을 떠난 커다란 하나 됨이다.


*일승원교(一乘圓敎)---화엄종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원만하고 완전한 가르침을 뜻한다. 곧 <법화경> ? <화엄경>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말한다.


*일심(一心)---‘일심’을 일반적으로는 마음을 집중해, 한 마음으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일념(一念)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지만 불교에서는 보다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심’에 대한 불교적 해석도 종파에 따라 다소 다르다지만 대개 화엄종의 일심사상을 따르고 있다.

   <화엄경 10권, 야천궁보살설게품>에 “삼계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이루어졌고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다.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세 가지에는 차별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마음이 만유의 본질이며 블, 중생,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삼계는 오직 마음(일심)에서 이루어졌고, 마음 밖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화엄경>의 중심 사상으로서, 일체 제법(모든 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대승기신론에서 하나의 마음(一心)이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진여문(眞如門)은 변치 않는 ‘본마음’이고, 생멸문(生滅門)은 육근이 육경과 부딪칠 때 생멸하는 마음으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이는 번뇌 망상과 같은 마음이어서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려면 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는 마음의 찌꺼기들을 비워 내야 한다. 그렇게 아뢰야식이 ‘텅텅’ 비게 됐을 때, 즉 더 이상 생멸하는 번뇌 망상이 끊어졌을 때, 진여의 마음과 같아지기 때문에 결국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계란 불계(佛界), 중생계(衆生界), 심계(心界)의 세 가지, 즉 불 ? 중생 ? 마음을 말한다.


*일심사상(一心思想)---원효대사가 주장한 바,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원효대사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한마을(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통합하려 했다. 이것이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한 화쟁사상(和諍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

   원효는 일심사상에서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해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일심사상이란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해 있다는 말이다. 실 끝에 돌을 매달아 그 줄을 잡고 돌리면 그 중심이 우리 몸이 되는 것처럼 모든 진리도 결국엔 하나로 향하게 된다는 그런 뜻이다.

   불교에서 만물의 근본적인 이치가 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일심이고, 사람의 마음과 물건까지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이치와 진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일심의 특징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還歸一心)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의 강조’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만을 중시하지 않으며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다는 그런 화합정신도 보인다.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용수(龍樹)가 확립한 삼관의 법은 중국으로 전해져서 천태지관(天台止觀)의 모태가 됐다. 그리고 이에 바탕 해 수나라 때 천태지자(天台智者, 538-597)가 세운 천태삼관(天台三觀)을 ‘일심삼관’이라 일컫는다.

   일심삼관은 공(空), 가(假), 중(中) 세 가지의 진리를 한마음 가운데서 원만하게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의 3관이 일념 속에 즉성(卽成)됨을 뜻한다. 이 삼관법(三觀法)은 천태종의 기본교의이며 중요한 수행문인 것이다.

    ? 공관(空觀)이란 현상계의 일체법은 다 실체가 없는 공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우리들의 번뇌 또한 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고 관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을 깨닫고자 함을 말한다.

    ? 가관(假觀)이란, 현상계의 차별성에 대한 진리를 달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공의 진리에만 국한해 있으면 이것은 소승 나한도(小乘羅漢道)에 불과한 것이다. 즉 공의 원리밖에 모르는 데 떨어진 낙공(落空)의 경지에 불과한 것으로서 미완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중생계와 현상계의 일체법을 달관하고 대승의 진리인 보살도를 성취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관(假觀)이다.

    ? 중관이란, 불교의 최후 구경의 진리는 공의 진리와 가(假)의 진리를 별개적으로 체득하는 것이 아니고, 공(空)과 가(假)는 둘인 듯 하나이고 하나인 듯 둘의 원리를 체득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붓다 구경의 가르침인 중도(中道)이며 중관인 것이다.

   용수(龍樹)가 제창한 대승불교는 ‘대승선(大乘禪)’이라고 하는 수행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다. 대승선의 핵심이 바로 ‘중관(中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세워진 관법이다. 중(中)이란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경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자리를 말한다. 중의 자리는 본래 갖추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는 세워서 갖추어야 하는 자리이다. 중관이란, 그렇게 갖추어진 중의 자리를 관하는 것이다.

    ※ 천태종의 일심삼관법과 원각경의 삼관법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공관(空觀) - 정관(靜觀)

     가관(假觀) - 환관(幻觀)

     중관(中觀) - 적관(寂觀)


*일야현자(一夜賢者)---부처님 10대 제자 중 논의 제일이라는 마하가전연(迦?延, 산스크리트어 깟짜나, k?ty?yana) 존자가 부처님 게송을 해설한 내용 -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해라. 흔들림 없이, 동요하는 일 없이 잘 살펴서 실천해라.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라.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 지 그 누가 알겠는가. 실로 죽음의 대군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와 같이 잘 알아서, 마음을 다해 밤낮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실천하는 자, 이를 일야현자(一夜賢者 - 밤사이에 현명해진 사람)라고 한다. 또한 고요한 분 성자라 한다.

   지나가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충실히 살고 있을 그 안색은 생기에 넘쳐 맑아진다. 오지 않은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 중부경전(中部經典=Majjhima-nikaya/맛지마 니까야)의 제131경 <일야현선경(一夜賢善經, Bhaddekaratta-sutta)>”

   세상 사람들의 번뇌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망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쓸데없는 걱정으로 허송세월하며 괴로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의 글이다. 한번 가버린 과거사나 아직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걱정 근심을 앞당기지 말라는 것이다.

   

*일원상(一圓相)---일원상은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표현함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이 둥글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은 오직 청정원만(淸淨圓滿) 하시므로 그것을 원형으로 표시했다. 또한 일원상은 부처님의 마음인 동시에 근본 심체(心體)이다. 결국 차별도 대립도 없는 절대 평등의 진여의 상, 지혜, 진리, 참 자아를 상징한다.

   이 일원상은 6조 혜능(慧能) 선사의 제자인 남양 혜충(南陽 慧忠, ?~775)국사께서 항상 원을 그려 학인들에게 도를 깨닫는 방편으로 삼은 데에서 연유하고 있다. 그리고 원불교(圓佛敎) 교리의 궁극적인 표현을 일컫기도 한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날이 되소서"라는 뜻. 중국 당나라 고승인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께서 하신 말씀이다.


*일종식(一種食)---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을 말함.


*일주문 (一柱門)---절 입구의 첫 문을 일주문이라 한다. 기둥 넷이 일렬로 서있는 위에 정교한 건축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해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특유의 양식이다. 이 문의 뜻은 ‘一’이라는 데에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 만유를 일심(一心)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며, 법계(法界) 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에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하고,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심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결론짓는 것이 불교의 본질인 것이다. 이 문을 경계로 해서 문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문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마음을 촉진시키는데 그 뜻이 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말.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일체법(一切法, 諸法, 팔리어 sabbe dhamma)---일체법이란 일체의 존재, 모든 존재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초기 경전에서 법(法, dhamma)을 크게 둘로 나누어 정리를 해서,

    1)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2)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을 주석서에서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 부르고, 정신적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법을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a)이라 한다. 헌데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일체법으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금강경>은 ‘일체법이 곧 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제법’을 ‘일체법(一切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일체법에 대한 법문은 조금 다르다. 즉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왓차곳따가 여쭈었다.

   “고따마시여, 이른바 일체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왓차곳따에게 말씀하셨다.

   “눈으로 사물의 형체를 대하게 되면 사물의 형체를 분별하는 안식(眼識)이 생긴다. 귀로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소리를 분별하는 이식(耳識)이 생기고, 코로 냄새를 맡게 되면 그 냄새를 분별하는 비식(鼻識)이 생긴다. 혀가 맛을 대하게 되면 그 맛을 분별하는 미식(味識)이 생기며, 피부가 촉을 대하게 되면 그 촉감을 분별하는 신식(身識)이 생긴다.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그것들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다. 이처럼 우리의 내적 감각기관이 외적대상을 만날 때 여섯 가지 분별이 생기는데 이때에 좋다 나쁘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감각들을 일체법이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말하는 일체법을 부정하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일체법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언설일 뿐이요, 그것에 대해서 물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혹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잡아함경 제13권 <321.일체법경>


*일체종지(一切種智)---현상계의 모든 존재의 각기 다른 모습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참모습을 알아내는 부처님의 지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최상의 지혜이다. 이것을 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라 하고, 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정각을 성취했다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곧 성불이다.


*일체중생이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관찰해 보니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이 이른바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또한 우리 모두는 평등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일체함령 개유불성(一切含靈 皆有佛性)과 같은 말이다.


*일천제(一闡提, 산스크리트어 잇찬티카, Icchantica)---이의 본뜻은 ‘욕망을 가진 자’란 말로서, 쾌락주의자나 현세주의자를 가리키는데, 불교에서는 올바른 법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불의 소질이나 연이 결여된 자, 불교의 정법을 훼방하고 구원될 희망이 전혀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을 말한다. 결국 ‘선근(善根)을 모두 잘라 버린 자’이다. 그러나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일체의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해서 궁극적으로는 이들도 성불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법상종은 이를 부정하고, 천태종ㆍ화엄종 등 기타 대승의 여러 종은 이를 긍정한다.


*일행삼매(一行三昧)---‘진여삼매(眞如三昧)’ 또는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도 하는데,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혜로써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모습을 주시하는 삼매. 모든 현상은 평등해 하나의 모습임을 주시하는 삼매를 말한다.

   중생들은 이분적 사고(思考) 속에 살고 있다. 많다 적다, 있다 없다, 더럽다 깨끗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 빈곤감이다. 이러한 분별을 떠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일상삼매라 하는데, 이러한 일상삼매의 상태가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속되는 상태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즉 일상삼매의 마음을 온전히 유지 할 적에 일행삼매라고 한다.

   육조단경 정혜품(六祖壇經 定慧品)에 나오는 말을 살펴보자.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 일행삼매이다. 절을 할 때에는 그저 절만 해야 한다. 앉아 있을 때에는 그저 앉아 있기만 해야 한다. 사물을 바라볼 때 역시 그저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행동을 할지라도 항상 직심을 행하는 것이다.”---→일상삼매(一相三昧) 참조.


*임서기(林棲期)---노년기에는 산림에 은둔해 명상의 생활을 하는 행복한 시기. 브라만교에서는 바라문이 평생 동안 밟아야 할 단계가 규정돼 있었는데 학생기[범행기(梵行期), 25세 전], 가주기(家住期, 가장기, 26세-50세), 임서기(林棲期, 51세-75세), 유행기(遊行期, 76세 이후)의 네 가지 시기로 구분했다.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당나라 시대의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이다. 그의 문하에 유수한 승려가 많이 배출됐다. 임제종의 근본 경전이고, 임제대사의 어록집인 <임제록(臨濟錄)>은 제자 혜연(慧然)이 엮었으며, 예로부터 선(禪)을 사랑하는 지식인들이 애독한 책이다. 

   6조 혜능의 제자가 남악 회양(南岳懷讓)이고, 남악 아래 마조(馬祖) 선사, 그 아래 백장(百丈), 그리고 백장 선사 밑에 황벽(黃檗) 선사인데, 바로 그 아래가 임제 선사이다. 모두 도인 가운데 으뜸가는 도인이요, 밝은 도안(道眼)을 갖추신 분들이다.

   어느 젊은 수좌가 그에게 물었다. “스님 진정한 불법이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들은 임제는 그 수좌의 뺨을 갈겼다.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를 밀어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이것을 본 다른 수좌들이 맞은 수좌에게 말했다.

   “자네는 높은 법문을 듣고도 왜 절을 하지 않았느냐?” 높은 법문이란 바로 ‘철썩’하는 소리였다. 진정한 법문이란 ‘있는 그대로’란 뜻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얽매이지 말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살아라.’

   임제선사가 주장한 선(禪)이란 이념이나 사상, 진리 등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을 강력히 배제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얻고자 애를 쓰지만 곧 그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그런 집착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은 생각의 중지, 마음의 비움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온갖 망상과 부질없는 생각들을 내려놓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선이다.


*임제종(臨濟宗)------당나라 시대의 선승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을 개조로 하는 종파.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인도의 불교학자 적천(寂天, 산티데바/Santideva, 7∼8세기경)의 저술로 전해진다. 그러나 10세기에 천식재(天息災)가 번역한 한역본에는 용수(龍樹)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총 4권 8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들이 닦는 여러 가지 불도, 즉 6바라밀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시(詩)로 돼 있으며 후기 대승불교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티베트에서 애송돼 현존하는 주석서만도 8종이나 된다. 티베트본 제목은 <입보살행(入菩薩行)>이고, 한역본은 <보리행경(菩提行經)>이라 한다.


*입법계품(入法界品)---화엄경의 마지막 품이다. 선재동자가 남방으로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도를 구해 법계의 이치를 터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60권 화엄경에서는 제44권 이하이며, 80권 화엄경에서는 제61권 이하이다.


*입설단비(立雪斷臂)---2조 혜가(慧可)가 눈 속에서 서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했다는 말. 혜가가 달마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대사는 오로지 벽을 마주하고 수행만 할 뿐 외면하므로, 큰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눈 속에 서서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드디어 달마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입승(立繩)스님---절에서 대중의 기강을 맡은 직책. 대중의 진퇴와 행동을 지시하는 소임. 새벽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입승이 세 번 죽비를 친다. 이 죽비 소리를 신호로 입선(入禪)을 한다.


*잇찬티카’(Icchantika)---→일천제(一闡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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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보장(自家寶藏)---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 둔 보물이라는 뜻으로, 성품 ? 자성 ? 본래면목 ? 불성을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보물 중에서 자기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성품이 곧 불성이기 때문에 가장 큰 보물이며, 자기의 마음속에 감추어 둔 그 보물(자가보장)을 찾는 것이 수행인의 가장 크고 급한 일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대주 혜해(大珠慧海)선사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를 찾아뵀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일로 왔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 보배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집을 떠나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곳에는 일물도 없으니 무슨 불법을 구하겠는가.”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  “나에게 묻는 자가 너의 보장이노라.”

   자기 집에 있는 보물창고. 곧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 따라서 집에 있는 보물을 버리고 딴 곳에서 보물을 찾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부처님이 죽림촌(竹林村)에 안거할 때 제자인 아난다가 마지막 설법을 청함에, 부처님이 ‘스스로를 등불삼아 스스로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진리를 등불로 의지해 수행해서 스스로의 자성을 밝혀 깨달아라하는 뜻이다.


*자량(資糧, 산스크리트어 sa?bh?ra)---수행의 기본이 되는 선근(善根) ? 공덕(功德). 보리와 열반에 이르는 데 바탕이 되는 여러 가지 선근과 공덕.


*자량위(資量位=資糧道)---유식(唯識)에는 부처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도(道)를 닦는 과정이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수도5위(修道5位)라 한다.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견도위(見道位)ㆍ수행위(修行位)ㆍ무학위(無學位)의 다섯이고, 그 제1위가 자량위(資量位)로서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를 쌓는 단계이며, 나와 너가 서로 짝으로 존재하고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는 진리를 머리로 깨달은 상태다.---→오위(五位), 가행위(加行位) 참조.

   

*자력신앙(自力信仰)---외부의 힘이나 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헤엄쳐 나가 저 깨달음의 언덕에 도달하는 신앙을 자력신앙 혹은 자력종교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스스로 진리를 깨쳐 부처가 되는 자력신앙이다. 그러나 배움이 모자라거나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에게는 타력에 의한 구원의 길도 열어놓았다. 즉, 일심으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타력신앙의 길도 열려 있다는 말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대승불교에서 수행의 이상을 나타낸 말. 자리(自利)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노력하고 정진해 수도(修道)의 공덕(功德)을 자신이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이타(利他)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뜻하며,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닦는 공덕을 말한다.


*자문자설(自問自說)---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우다나(Udana, 優陀那)라 한다. 이것은 부처님이 중생들의 마음을 훤히 알아서 누가 무엇을 여쭈어 보지 않아도 부처님 스스로 물음을 일으키시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시는 형식의 경문을 말한다.---→우다나 참조. 


*자복사(資福寺)---조선 태종 7년(1407)에 국가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정한 사찰임. 각 지역의 주요사찰을 자복사로 지정했다.


*자비(慈悲, 산스크리트어 maitri-karun?)---자비는 자(慈)와 비(悲)의 합성어이다. 자는 사랑하는 마음(maitri)을 가지고 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이요, 비는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karun?)을 가지고 중생의 고(苦)를 없애주는 사랑이다. 이와 같이 자비는 사랑과 연민의 뜻을 함께 포함한 것으로, 이기적인 탐욕을 벗어나고 넓은 마음으로 질투심과 분노의 마음을 극복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자비는 철저한 무아사상(無我思想)을 바탕으로 해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며, 근본적으로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내주는 지극한 사랑이다.

   자비에는 중생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중생연(衆生緣)의 자비,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해서 일으키는 법연(法緣)의 자비, 대상이 없이 일으키는 무연(無緣)의 자비라는 3연(緣)의 자비가 있다. 그 중 무연자비가 평등·절대의 공(空)의 입장에 선 것이므로 최상의 것이다. 이러한 자비는 ‘반야(般若)’와 함께 불교이념의 2대 지주이다.


*자비희사(慈悲喜捨)---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자(慈)’는 즐거움은 주는 것.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 ‘희(喜)’는 남의 즐거운 일을 보고 기뻐하는 것. ‘사(捨)’는 마음이 평등한 상태를 말한다.


*자성(自性, 산스크리트어 svadhava)---모든 법(法)이 갖추고 있는 변하지 않는 본성 혹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성(體性)인 본성을 의미한다. 선종에서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뜻하기도 하고, 우리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성(眞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일컫기도 한다. 


*자성삼보(自性三寶)---자성의 각(覺)인 불(佛), 자성의 정(正)인 법(法), 자성의 정(淨)인 승(僧)을 말한다.


*자성신(自性身)---자성신이란 가공되지 않은 본래의 몸을 부르는 말이다.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세간에서 조작되지 않은 몸인 까닭에 그와 같이 부른다. 자성신은 실체가 없는 공성인 법신의 체(體)인 까닭에 유위(有爲)의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재신(自在神)과 동일 선 상에 있는 개념인데, 원칙적으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자심미타(自心彌陀)---자기의 본래마음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뜻. 아미타불이 십만 팔천 리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될 때가 곧 아미타불이라는 말. 염불은 마음속에 외불(外佛)을 구하거나 극락장엄을 그려내지 않고, 자심미타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이 나의 마음(自心)이며, 나의 본성(自性)이라는 자각 아래에 자심미타(自心彌陀)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염하는 염불 수행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자연법이(自然法爾)---불교적 해석은 저절로[자연히]라는 말, 즉 자연스런 행위를 이른다. 다른 어떤 힘도 빌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서 본래적으로 그러함을 뜻하는데, 불교에서는 불법 그 자체의 진리를 표현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옛 선사가 이르기를 "자연법이(自然法爾)"라고 했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가 진리라는 것이다. 산에 살다보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말로 실감나는 것이 이 말이다. 그래서 소동파는 이렇게 읊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의 설법인데, 저 푸른 산이 어찌 법신부처의 몸이 아니랴(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자연의 모습이 바로 부처이니, 설법을 따로 들으려 하지 말고 계곡의 물소리에서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에서 진리의 몸을 보고, 거기에서 부처의 설법을 듣는다면 더 이상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법신(法身)의 부처를 보고도 부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하 생략) ㅡ 백담사 오현스님의 글


   불교는 관념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며, 진리의 법 그대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란 말은 법 그대로 나타난 세계다. 자연법이(自然法爾)인 것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 이 세계요, 법 그대로인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이다.

   이 여여(如如)의 사상은 가장 인도적이면서도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如)는 '그대로' '그와 같이'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본래는 부사였으나 나중에 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

   이 여(如)가 불가에 들어 와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의 뜻으로 쓰이지 않고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으로 인용돼져 자연법이(自然法爾)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여(如)는 반드시 여실(如實)이며 진여(眞如)라야 된다. 깨달은 자, 즉 부처님을 다른 표현으로 여래(如來)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진여로부터 내생(來生)한 이>로 즉, 수행을 완성한 사람 - 인격 완성자를 말함이다. 진리는 결코 멀고 거룩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가까운 우리들 주변에 있다.


*자연지(自然智)---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부처님의 지혜.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존재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 이 마음에는 일체의 지혜와 무한한 덕행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을 자연지(自然智)라고 한다. 이 자연지는 우리 각자가 가진 끝없는 보물창고다.


*자이나교(Jainism, Jaina敎)---BC 6세기경 인도에서 불교와 같은 시대에 당시의 정통 베다(초기 힌두교) 의례에 반대해 창시된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이다. 교조인 바르다마나(Vardhamana)는 붓다와 동시대 사람으로 왕족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30세 무렵에 출가해 13년의 고행정진 끝에 크게 깨달아 지나(Jina: 勝者) 또는 마하비라(Mahavira: 大勇)라고 일컬어졌고, 지나에서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자이나교는 아힘사(불살생)와 고행을 강조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해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자(自恣)---스님들이 안거(安居)의 마지막 포살(布薩) 일에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대중생활 가운데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범한 잘못이나 죄를 지적해 달라고 스스로 자진해서 동료들에게 청하고 지적받는 참회의식을 말한다.


*자장율사(慈裝律師)---신라 진골 출신으로 성은 김씨이며, 신라가 삼국 통일의 과업을 지향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638년(선덕여왕 7)에 당(唐)나라로 건너가서 종남산(終南山)에서 주로 수도했으며, 신라에 화엄 사상을 최초로 소개했다. 그리고 통도사를 창건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은 것은 통도사가 우리나라의 불사리(佛舍利) 신앙의 중심을 이루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특히 신라에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을 펼치는 등 그의 행적은 신라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재(自在)---자유자재(自由自在)의 준말. 구속이나 장애가 없이 마음대로임. 막힘이나 걸림이 없고 자유로움. 마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될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


*자재무애(自在無碍)---자재무애란 아무 구속 없이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란 매사에 걸림이 없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제멋대로의 언행은 결코 무애행이 아니다. 자재무애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경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이다. 부처님의 성불 이후의 삶을 따라가 보면 당신의 고집으로 인한 투쟁이 전혀 없다.

   자재무애는 대상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도 걸림 없고 자유로워야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자재무애의 인물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켜서, 자재무애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자재신(自在神)---힌두교에서 신을 일컫는 일반적인 호칭인데, 주로 요가의 신인 시바를 지칭한다.

   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해 작성된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자재신(自在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원인과 결과에 따른 조건 지어져 발생되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재신은 ‘원인 없이’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자재신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연기 법칙으로 본다면 이런 자재신은 있을 수 없다.

   자재신이란 자기 스스로 존재 하는 신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자재신은 물론 창조신도 인정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오로지 상호의존해서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창조주 자재신(自在神), 영원하시면서도 불가사의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재신이 우주에 충만해 스스로 빛나지만, 모든 현상은 연기하므로 ‘무상’하고, 또 연기하므로 ‘무아’라고 보는 불교에서는 자재신을 인정할 수 없다. .

   

*자재천(自在天, 산스크리트어 이스바라/Isvara)---원래 인도 브라만교의 신으로 만물 창조의 최고신이다. 외도(外道)들은 이 신을 세계의 본체, 창조주라 하며, 이 신이 즐거워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화를 내면 중생이 고달프며, 온갖 물건이 죽어 없어지면 모두 이 신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고대 인도(印度)에서 대자재천(마혜슈바라/Mahesvara)이 세계 성립의 원인이며 조물주라고 믿는 종파가 있어 이를 불교에서는 자재천외도(自在天外道)라 불렀다.


*자타카(Jataka, 本生經, 本生譚)---니까야 5부 중 <소부경전(쿳다까 니까야)>에 실려 있는 팔리어로 써진 석가모니 부처님 전생의 생활을 묘사한 설화.

   자타카는 형식상 3부로 대별된다. 제1부는 현재세의 이야기로 석가 자신의 과거세를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는 일을 이야기하며, 제2부는 과거세 이야기로 현재의 과보를 낳은 과거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부분에는 운문시와 그 주석 등이 포함되며, 설화의 주요부를 이루고 있다. 제3부는 결합부로 “그때의 그는 즉 나였다” 등 제1부의 석가와 제2부의 설화의 주인공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로써 자타카는 단순한 설화문학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행위의 인과관계(업보)를 밝히는 교설이 돼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습은 천인(天人), 국왕, 대신, 장자(長子), 서민, 도둑 또는 코끼리, 원숭이, 공작, 물고기 등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동물 ? 조류 ? 신화 ? 전설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행하던 구비전승담(口碑傳承譚)은 모두 부처님 전생의 모습에 가탁(假託)해 본생 설화로 구성돼 있다.


*작복(作福)---복 짓는 일인데, 내 복을 내가 짓는 것이다. 따라서 작복은 실천이며, 행복은 그 과보이다. 부처님은 인과응보 논리에 따라 복을 받고 싶으면 먼저 복 받을 짓을 해야 한다고 하셨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강조하셨다.    


*작법(作法)---불교 의식에서 추는 춤을 일컫는다. 불교에서 작법은 신업(身業) 즉, 몸의 동작으로 공양드린다는 뜻으로서 불교의식의 골자인 재(齋)를 올릴 때의 모든 의식, 특히 춤추는 불교무용 등을 일컫는다. 


*잡밀(雜密)과 순밀(純密)---밀교(密敎)에는 순밀과 잡밀이 있는데, 티베트의 일부 불교가 잡밀이다. 잡밀을 좌도밀교라고도 하는데, 잡밀에서는 섹스가 지상 최고의 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다라도 육체적인 섹스를 그대로 묘사한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잡밀에 반해 순밀은 정신적 환희를 지향한다. 순밀은 지적인 깨달음을 통해 얻은 정신적 환희를 신앙의 목표로 하고 있다.---→얍윰(yab-yum) 참조.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4세기경 북인도의 건타라국(乾陀羅國) 출신 승려인 법구(法救Dharmatr?ta)의 저작임, 남송(南宋) 시대에 인도 승 승가발마(僧伽跋摩) 등이 번역.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충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리를 밝힌 저술.---→법구(法救),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참조.


*잡아함(雜阿含)---남방불교의 니까야는 ①장부(長部, 디가 니까야), ②중부(中部, 맛지마 니까야), ③상응부(相應部, 상윳따 니까야), ④증지부(增支部, 앙굿따라 니까야), ⑤소부(小部, 쿳다까 니까야)의 5부 니까야로 구성돼 있다.

   이에 비해 북방불교의 아함경은 ①장아함(長阿含), ②중아함(中阿含), ③잡아함(雜阿含), ④증일아함(增一阿含)의 4부 아함경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남방 5부 니까야 중의 상응부(상윳따 니까야)가 북방 4아함 중의 잡아함(雜阿含)에 해당한다. 헌데 얼핏 보기엔 같은 경이라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우선 명칭이 다르고, 경의 수도 다르다. 상응부경전은 7,762경이고, 잡아함은 1,362경이다.

   그러나 경의 수가 다르다는 것은 후대에 와서 불어났을 가능성이 있고(상응부경전 쪽에), 중요한 경은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명칭도 ‘잡아함경’을 ‘상응아함경’이라고도 부르는 점으로 보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잡염법(雜染法)---잡염법은 허망된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청정법은 진실된 원성실성을 말한다. 반대말 청정법(淸淨法). 아뢰야식은 모든 잡염법의 저장소 역할을 하며, 윤회의 주체이다.


*잡화엄식(雜華嚴飾)---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 화엄(華嚴)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Ganda-vyuha 라고 하는데 Ganda란 잡화라는 뜻이고, vyuha란 엄식이란 뜻이다. 잡화엄식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갖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이고, 이것이 곧 화엄이다.


*장경동(藏經洞)---둔황 막고굴 유적의 제17굴을 일컫는다. 송대까지의 경전이나 문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서하(西夏)가 지배했을 무렵에 봉쇄됐다가 1908년 왕원록(王圓錄)에 의해 5만여 점의 희귀한 불교경전이 발견됐다.

   그 후 영국인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의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해 약 7천여 점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고, 이어서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남은 대부분을 약탈해 갔으며, 그 나머지는 일본 러시아 등이 약탈해갔다. 혜초의 서역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도 둔황 막고굴의 제17호굴인 장경동(藏經洞)이다.

   둔황 석굴은 5호16국시대인 AD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며, 특히 당나라 시대인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성했던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둔황예술'을 창출했고, 그 후 원(元) 대까지 이어졌다.

    ※서하(西夏, 1032~1227)---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간쑤(甘肅) 지역에서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이다.


*장교(藏敎)---천태종의 교판(敎判)에서 나오는 말. 아함경을 비롯한 초기의 가르침. 즉, 소승의 가르침을 말함.---→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장아함경(長阿含經)---장아함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긴 길이의 설법을 모아 놓은 경전으로, 남전 팔리어 경장에는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에 해당한다. 가장 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비롯해 범망경(梵網經), 유행경(遊行經). 사문과경(沙門果經), 세기경(世記經), 선생경(善生經) 등 34개 경문이 실려 있다.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천태종의 제4조임. 천태종의 개조 지의(智?)의 문인으로서 스승이 죽을 때까지 시자로서 섬겼다. 천태 지의의 만년의 저술인 소위 천태3대부(天台三大部)인 <법화문구(法華文句)>,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을 비롯해 스승의 강설 대부분을 필사 ? 편집했다.


*장엄(莊嚴)---불타 ? 보살을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보이려고 꾸미는 것. 불상이나 불전 등을 채색 ? 문양 등으로 장식 미화하는 것.


*장엄문(莊嚴門)---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꾸미는 수단이나 방법을 일컫는다. ‘장엄’은 수식한다는 말이어서, 진수가 아니라 겉치레만 하는 불교란 뜻이다. 임제(臨濟)선사는 “제방에서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설하며 불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장엄문(莊嚴門)이고 불사문(佛事門)이지 불법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라 하셨다.


*장육존상(丈六尊像)---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왕의 발원으로 금동불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인연이 없음을 알고 금동과 불상의 그림을 배에다 실어 띄워 보내며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 불상이 완성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배가 500여 년 바다 위를 떠다니다가 신라에 와 닿았고, 신라에서 불상이 완성이 된다. 그 불상이 바로 신라 삼보 중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이다. 장육(丈六)이란 16자 높이로 약 5m 정도 높이를 말한다. 불상의 높이가 장육이 넘으면 대불(大佛)이라고 한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그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왕이 실패한 불상이 삼국 중 열세에 있던 신라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이는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토 사상과 삼국일통의 꿈을 나타낸 것이다.


*저거몽손(沮渠蒙遜)---중국 5호 16국시대에 북량(北凉)의 군주였던 인물. 인도 승려 담무참(曇無讖:385~433년)에 귀의해 호불 군주가 돼 담무참의 열반경 번역을 도왔으나 나중에 오해를 해서 담무참을 죽였다.


*적멸(寂滅, Nirvana)---열반과 같은 말. 번뇌를 완전히 해탈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높은 경지.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해 평온하게 된 열반의 상태인 적멸(寂滅)은 모든 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경지임. 범어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것이 열반이고, 의역한 것이 적멸이다. 부처님이나 고승의 입적(入寂)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적멸궁(寂滅宮)---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법을 설한 보리도량을 가리킴. 그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특히 자장율사가 조성했다는 5대 적멸보궁이 유명하다. 통도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이 5대 적멸보궁이다.


*적멸무이(寂滅無二)---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해 평온하게 된 열반의 상태인 적멸(寂滅)은 모든 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경지이므로 무이(無二)라고 함.


*적명위락(寂滅爲樂)---적멸이란 번뇌를 버린 경지로서 열반과 같은 뜻이다. 생사의 불안함을 뛰어넘은 적멸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란 말이다.


*적정음해주야신(寂靜音海主夜神)---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보살의 지혜와 행을 묻기 위해 방문한 선지식. 53선지식 가운데 36번째 선지식이다. 고요한 음성, 바다, 밤을 맡은 신 적정음해주야신은 선재동자에게 생각생각마다 광대한 기쁨을 내어 장엄하는 해탈문을 설했다.


*적취설(積聚說, Arambha-vada)---우주는 많은 원자의 결합ㆍ집적에 의해 다양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다원론적(多元論的) 세계관(世界觀) 내지 우주론(宇宙論)으로 다분히 유물론적(唯物論的)이다. 즉, 여러 요소가 쌓이고 모여 결합됨으로써 자연 발생적으로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상으로 부처님 당시 신흥사문인 자이나교(Jaina敎) 계통의 주장이다. 불교의 12연기설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는 배치되는 사상이다.---→전변설(轉變說) 참조.


*전과신라(箭過新羅)---‘화살이 신라 땅을 지나가버렸다’라는 말인데, 이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비유로 쓰였다.

   당나라시대 중국에는 비슷한 표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는 신라가 멀리 떨어진 변방이지만 동쪽에 떨어져 있는 신라는 중국과 더불어 ‘이쪽과 저쪽’이라는 양변을 동시에 가리킬 때에 등장할 만큼 신라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는 ‘당나라에서 북을 치니 신라에서 춤을 추고’라고 한 바 있다. 또 ‘불은 신라에서 났는데 발은 여기(중국)에서 데었다’라든지 ‘호남에서 발우를 폈는데 신라에서 씹으니’라는 말도 있었다는데,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도 신라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육조대사가 열반하신 이후 등신불로 모셨는데, 신라의 승려가 그 머리를 가지러 왔다는 기록이 양국에서 다 전하고 있다. 물론 중국 측 기록은 ‘시도했으나 들켜서 실패했다’라고 해서 미수에 그쳤음을 강조하지만, 신라 쪽 기록은 ‘거사에 성공해 지리산 쌍계사(雙磎寺)로 모시고 왔다’라고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의 부록에 씌어 있다.  


*전다라(?陀羅)---인도 4성 계급에서 최하위 천민 계급으로 백정 ? 옥졸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전도몽상(顚倒夢想)---뒤집힌 생각, 잘못된 생각을 말함. 즉 무상한 것에 대해 영원하다고 하고, 괴로움에 대해 즐겁다고 알고, 실체(아/我)가 없는 것에 실체(아)가 있다고 하고, 더러움에 대해 청정하다고 생각하는 따위를 전도몽상이라 한다.

 

*전등(傳燈)---등불이 등불에서 등불로 이어지듯, 불법(佛法)이 스승에서 제자로 계속 이어짐을 뜻함.


*전등록(傳燈錄)---원제목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고, 중국 송나라 시대에 고승 도언(道彦)이 1004년에 지은 선종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석가모니 이래의 역대의 법맥(法脈)을 체계화해서, 진리의 등불이 어떻게 전해지고 이어져 왔는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집했고, 역대 부처들과 인도의 조사들, 중국의 조사들과 선사들의 깨달음의 기연과 법어를 수록한 불서이다. 조선 시대 승과 과목에 들어 있었다.


*전등법어(傳燈法語)---‘전등(傳燈)’에서 ‘등(燈)’이란 법등을 뜻하니 곧 불법을 말하므로 전법(傳法)과 같은 말이다. 전등법어(傳燈法語)란 등(燈)이 차례차례로 켜져서 꺼지지 않는 것처럼 법(法)을 받아서 계속 전승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전등법어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가섭존자를 비롯한 많은 역대 조사님들의 가르침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법맥이 이어 내려오는 과정에서 법을 전했던 많은 법어(法語)들이 있었는데, 조계종은 이 법어를 근본으로 삼고 의지한다고 해서 <금강경(金剛經)>과 더불어 <전등법어(傳燈法語)>를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전등 법어의 핵심 내용은 일체의 사유와 언어분별을 끊게 된 각종 기연들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전륜성왕이란 차크라바르티 라자(cakravarti-raja)를 한문으로 옮긴 말로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생긴 무기를 굴려 세계를 통일시킨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 사전에는 ‘장애 없이 자기 수레바퀴를 어느 곳에나 굴리는 통치자, 세계의 제왕’으로 정의하고 있는 고대 인도의 전설적인 왕이다.

   차크라에는 천 개의 바큇살이 아주 완전하게 짜여 있는 바퀴라고 하며, 그 차크라가 나아가는 곳엔 모두 이에 굴복한다고 한다. 따라서 전륜성왕이 만드는 사회질서는 차크라처럼 잘 짜여 흠이 없을 만큼 완벽한 통치를 했다는 뜻이다. 통칭 아소카왕을 전륜성왕이라 일컫기도 한다.

   부처님이 법을 전하는 것을 전법륜(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바퀴를 굴려 천하를 통일 했듯이 법의 바퀴를 굴려 불법을 온 세상에 전한다는 말이다.


*전미개오(轉迷開悟)---미혹하고 어리석음에서 해탈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


*전법도생(傳法度生)---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동시에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의 오묘한 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불법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전법륜(dharmacakra-pravartana, 轉法輪)---불교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널리 펴 중생을 제도하는 일. 전륜(轉輪)이라고도 한다. 바퀴를 굴려 수레를 전진시키는 것과 같이 석가가 법(가르침)의 바퀴를 돌리는 일, 즉 설법을 가리킨다. 그래서 부처님이 행한 최초의 법문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했다.---→전륜성왕(轉輪聖王) 참조.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mudra)---수인의 한 종류. 부처님이 깨달은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와 중생들에게 최초로 설법할(초전법륜) 때 취했던 수인이다.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이다.


*전법보기(傳法寶紀)---초기 선종사를 담고 있는 불교서적. 1900년대에 돈황석굴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됐다. 현재 프랑스 파리도서관에 2종이 소장돼 있다. 북종선의 전성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서의 조사(祖師) 계통은 숭산 소림사의 법여(法如)를 오조 홍인(弘忍) 문하에 두었고, 법여에서 신수(神秀)로 법통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북조선 입장에서 써진 것으로 보인다.


*전변설(轉變說, pari nama-vada)---인도사상의 두 가지 큰 흐름엔 전통적인 브라만교(婆羅門敎, Brahmanism)의 사상인 관념론적(觀念論的) 전변설(轉變說)과 브라만에 반대한 자유사상가인 사문(沙門-특히 자이나교)들의 유물론적(唯物論的) 적취설(積聚說)이 있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취합(聚合)해 우주가 성립됐다는 것이 적취설(積聚說)의 입장이다. 반면에 전변설은 부처님 이전의 전통종교인 브라만교(婆羅門敎)의 주장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에 정신적 존재인 범(梵, 브라만)이 있어서 이것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변화를 일으켜 이 우주가 구성됐다고 봤다. 즉, 인생과 우주를 신(神)-범(브라만 Brahman)이 창조하고, 절대적으로 섭리한다는 주장이다. 불교의 12연기설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는 전혀 배치되는 사상이다.---→적취설(積聚說), 존우화작인론(尊祐化作因論) 참조.


*전식(轉識, 산스크리트어 pravartti-vijnana)---전식이란 활동하는 식을 말한다. 즉, 전식이라 이름 함은 마음이 찰나 찰나 전변(轉變)하면서 운행해가기 때문이다.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에다가 제7 말나식(末那識)을 더해 이들 7식을 통틀어 전식이라 한다. 이 7식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발생해 작용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즉, 7전식은 제8식 아뢰야식(藏識)이 토대가 돼 번뇌와 망상 같은 잡다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생멸 변화한다. 그러니 여기서 전변(pravartate)이라는 말은 심식의 성질이 선(善) 또는 악(惡) 등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며 또 여러 작용을 전생(轉生)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마음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5식, 즉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知識), 상속식(相續識)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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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득지(轉識得智)---유식사상(唯識思想)의 핵심임. 번뇌로 인해 오염된 망식(妄識)을 수행(修行)의 힘으로 정화하고 이를 다시 전환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에 오염된 8식(八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는 청정한 지혜이다. 수행을 해서 전식득지의 단계에 이르면 제8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청정하고 완전한 지혜로 변한다고 한다.


*전심법요(傳心法要)---임제종(臨濟宗)의 기초를 세운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선사의 어록으로 원제는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이다. 세속의 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편찬했다. 달마 선종의 정통사상과 육조 혜능선사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가장 투철하고 명료하게 나타낸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중요시해서 여러 번 출판됐고, 한글 번역본도 있다.


*전오식(前五識)---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육근(6根)이라 해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 대상인 육경(6境)을 만났을 때 각각의 감각 장소를 통해서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육식(6識)이라 한다.

   그 중에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것을 전5식(前五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전5식에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헌데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식이다. 그래서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한다.


*전정각산(前正覺山)---붓다가야(buddhagay?)의 맞은편, 네란자라(nera?jar?)강 건너편에 있는 바위산으로, 고행을 포기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려고 이 산에 올랐으나 주위 환경이 여의치 못해 네란자라 강을 건너 붓다가야로 향했다고 함. 그 후, 이 바위산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오른 산이라고 해 이와 같이 불리고 있다.


*절복(折伏)---나쁜 사람이나 외도(外道) ? 사도(邪道)의 기를 꺾어 굴복시키는 일. 상대를 설득하지 않고 비난을 해서 강제로 굴복시키는 일.---→반대말 - 섭수(攝受) 참조.


*절정수(絶情水)---스님들이 공양 때 마지막에 그릇을 가셔 마시는 물. 속세에서의 정분을 뚝 끊어내는 물이라는 뜻으로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점교(漸敎)---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행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 일정한 수행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점점 깨닫게 하는 가르침. 얕은 내용에서 점점 깊은 내용으로 나아가는 가르침. 점수(漸修)와 같은 맥락임.


*점수(漸修)---→돈오와 점수 참조.


*정거천(淨居天, Suddhavasa)---suddha(청정함)+vasa(거주)로 된 합성어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정거(淨居)로 한역했다. 이 정거천은 성문의 수행의 단계인 사과(四果) 중 제3단계에 이른, 즉 번뇌를 다 여읜 불환자(不還者=아나함/阿那含)들만이 태어나는 곳을 말한다. 이곳이 바로 극락(極樂)이다. 정거천은 다섯 가지 하늘로 구성되는데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자들은 여기에 태어나서 다시는 이보다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여기서 열반에 든다고 한다.---→아나함(阿那含) 참조.

  

*정견(正見, 산스크리트어 samyag-d???i)---팔정도(八正道)의 하나,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를 알고 제법(諸法)의 진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견해,

   붓다는 정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해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정견이란 명백하게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팔정도의 순서 중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온 이유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붓다가 설한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만약 어떤 이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가졌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해서 정견을 가장 앞에 두었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근(精勤)---원래는 ‘~따위에 부지런히 힘씀’을 뜻함이다. 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 ? 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즉, 기도는 마음을 잠시라도 흩뜨리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다.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하려고 부지런히 닦는 수행법.

   팔정도에서의 정정진(正精進)을 일명 정근(正勤)이라 하고, 정근(正勤)에는 4정근(四正勤)이 있다.---→정정진(正精進), 4정근(四正勤) 참조.


*정근(定根)---오근(五根)의 하나. 바른 선정으로 마음을 고요히 해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 것. 일체의 공덕을 낳게 한다는 뜻으로, 선정(禪定)을 이르는 말이다.---→오근(五根) 참조.


*정근기도(精勤祈禱)란---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다. 정근기도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외면서 산만한 마음을 한 생각으로 집중시켜 지금까지 지은 악업을 참회하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양하며, 그 가피력을 입어 원(願)을 성취시키고자 해야 한다. 여기서 원(願)이란 무엇을 얻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처님이나 보살님처럼 되겠다는 다짐이다.→정근(精勤) 참조.


*정념(正念, 산스크리트어 samyak-sm?ti)---팔정도(八正道)의 하나. 올바른 알아차림, 바르게 깨어 있기, 내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는 것. 사념(邪念)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해 수행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

   ‘올바른 알아차림’ 수행은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수행법이며, 수행을 해야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깨닫는 ‘올바른 견해[正見]’가 생겨 해탈하게 된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념정지(正念正知, 알아차림, 팔리어 사띠 삼빠잔냐, sati-sampajanna)---염처수행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염(念)의 원어는 'sati'로서 영어로 mindfulness(주의집중)이라는 말로 해석하며 기억하는 힘, 집중하는 힘, 알아차리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sati의 이해는 sati 단독의 이해만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sati가 현상을 바르게 기억하고 대상에 다가가서 집중하기 위해서는 장애의 요소로부터 벗어나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물리치는 선정의 요소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구비됐을 때 sati는 현상의 바른 앎(sampajanna) 즉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의 법들을 삿된 견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지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정을 구비한 정념정지의 작용인 것이다. 인식이 대상에 적확하게 맞붙어 일어날 때 sati는 근원적인 앎(sampajanna)을 일으키도록 하기 때문에 정념을 정지와 병용해서 정념정지로 사용한다.


*정덕(淨德)---번뇌가 조금도 없고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것.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정(淨)을 말한다.


*정려(淨呂)---때가 묻지 않고 깨끗하다는 말. 계율을 지키는 데 힘써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승려를 일컫기도 한다.


*정려(靜慮)---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생각함. 선정(禪定)의 다른 이름.


*정명(正命, 산스크리트어 samyag-?j?va)---팔정도(八正道)의 하나. 여기서 ‘명(命)’은 생업이란 뜻. 정정당당하고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생업을 찾아 그것에 충실히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업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삶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책임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법안장(正法眼藏)---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깨달음을 뜻한다. ‘정법(正法)’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바른 법이란 뜻이고, ‘안(眼)’이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 즉 사물의 실상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안목을 말하며, ‘장(藏)’은 부처님의 마음에는 모든 선한 불법(佛法)이 포함돼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법안장이란 올바른 불법(佛法)을 뜻하며, 모든 불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수를 일컫는 말이다.


*정변각(正遍覺, 산스크리트어 samyak-sa?buddha)---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정변지(正遍智)라고도 하는데 진리를 바르게 깨달음을 말한다. 그리고 등정각(等正覺)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평등하고 바른 깨침을 말한다.


*정변지(正遍知)---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임. 온 세상의 모든 일을 모르는 것 없이 바로 안다는 뜻이다. - 비슷한 말 - 정변각(正遍覺).


*정사(精舍)---깨끗한 집이란 뜻. 정사(精舍)는 산스크리트어 비하라(vih?ra)의 의역으로 역시 절을 가리킨다. 부처님 생존 당시 사찰이 생기기 전, 우기에 비를 피해서 스님들이 거쳐할 곳이 필요해서 세워진 건물과 생활공간을 비하라라 했고, 이것이 후에 발전해서 사찰(절)이 됐다. 최초의 정사가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죽림정사 참조.


*정사유(正思惟, 산스크리트어 samyak-sa?kalpa)---팔정도의 하나. 바른 생각. 탐 ? 진 ? 치 삼독심에서 벗어난 생각.---팔정도(八正道) 참조.


*정선문(定善門)---정토의 요문(要門:중요한 가르침)에는 정선문(定善門)과 산선문(散善門)이 있는데, 정선문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염불하는 것이요, 산선문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산란한 마음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닦으며 염불하는 것이라 했다. 정(定)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으는 것이요, 산(散)이란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이다.---→선도(善導:613-681) 참조.


*정식(淨識)---고요하고도 맑고 깨끗한 의식, 일체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의식. 반대말 - 망식(妄識), 염식(染識).

     ※망식(妄識)---구별하고 차별하는 마음, 그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망식이라 한다. 분별로써 모든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고 가상만을 탐함으로써 망식(妄識)을 자초한다.

     ※염식(染識)---자아의식으로 오염된 식, 번뇌에 물든 마음을 염식이라 한다.


*정식(精識)---정식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수용 능력을 의미한다. 즉, 정기(精氣)를 의미한다. 세존께서 정식(精識)이 있는 일체 유정들은 모두가 불성을 갖추고 있어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유정(有情)이란 정(情)이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 정이란 정식(精識)이나 업식(業識)을 지칭한다.


*정식(情識)---정식(情識)이란 감정적인 분별식을 말하는데, 범부의 망령된 의식이다. 그래서 만공(滿空)스님은 참선의 병폐는 정식(情識)이다. 정식을 떨쳐버리는 것이 조사관문(祖師關門)을 뚫는 요긴한 길이라고 하셨다.

   사물의 존재는 크게 정식(情識)이 있는 유정과 그것이 없는 나무 ? 풀 ? 돌과 같은 비(무)정으로 분류되며, 무정설법이란 나무 ? 풀 ? 돌과 같이 정식이 없는 무정물이 설법을 한다는 말이다.


*정심행처(正心行處)---산스크리트어 sam?dhi, 삼매(三昧), 심일경성(心一境性)과 같은 말. 마음의 작용을 바르게 해 산란을 멈추고 한곳에 집중함을 말한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정(定)으로, 또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등지(等持), 또 정수(正受) ? 정심행처(正心行處) 등으로 의역한다. 이는 불교의 수행 가운데 하나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내적, 또는 외적인 어떤 자극에도 동요됨이 없는 바르고 맑은 정신 상태를 말한다.


*정어(正語, 산스크리트어 samyag-v?c)---팔정도의 하나. 올바른 언어생활, 바르고 올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을 비웃고, 비방하고, 이중적인 말을 하지 말고, 순수하면서도 부드럽고, 분명하면서도 때에 맞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정어는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로 닦아진 고결한 마음을 나타내는 첫 번째 상(相)이다. 그리고 올바른 언어[正語]를 바탕으로 올바른 행위[正業])가 이루어지고, 올바른 행위를 바탕으로 올바른 생활[正命]이 실현된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업(正業, 산스크리트어 samyak-karm?nta)---팔정도(八正道)의 하나. 올바른 해위를 뜻함.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행하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업을 바로 해야 함을 말한다. 즉,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 상대방을 해치고, 속이며, 음란하며, 흐트러진 삶을 통해서는 바른 인간관계를 엮어낼 수가 없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정(正定, 산스크리트어 samyak-sam?dhi)---팔정도(八正道)의 하나. 바른 선정(禪定).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의 색계선정(色界禪定)을 제대로 잘 실천하는 것. 선정을 바로 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게 됨으로써 사물을 바르게 보는 정견(正見)이 나타나며, 정업(正業), 정명(正命) 등의 올바른 생활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팔정도(八正道) 참조.


*정정진(正精進, 산스크리트어 samyag-vy?y?ma)---팔정도(八正道)의 하나. 정근(正勤)이라고도 한다. 바르게 그리고 줄기차게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 일심 노력해 선법(善法)은 늘리고, 불선법(不善法)은 줄이는 것. 바른 생활과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에는 4정근(四正勤)이 있다.---→팔정도(八正道), 4정근(四正勤)  참조.


*정토론(淨土論)---세친(世親, Vasubandhu, 바수반두, 320?~400년경)이 저술한 불교서적. 원명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 줄여서 무량수경론 ? 왕생정토론 ? 정토론 ? 왕생론이라고도 한다. 5언(言) 96구(句)의 게송으로 돼 있고, 주요 내용은,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서원[본원(本願)]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 ? 보살과 감응하고, 불 ? 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도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 바, 이왕이수(易往易修)의 행법(行法)임을 찬양하고 있다.

     ※이왕이수(易往易修) - 닦기 쉽고 깨닫기 쉽단 말.


*정토종(淨土宗)---중국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성립된 불교 종파로서, 중국적 특징이라 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내세운 종파. 남북조시대 북위(北魏=동위/東魏)에서 활약한 담란(曇鸞)이 정토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실질적인 중국 정토교의 기틀을 확립했으므로 후세에 그를 중국 정토종의 제1조라 불렀다.

   인도인들은 현실보다 내세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에 중국인들은 현실에서 깨달음과 행복을 얻으려 했다. 이런 중국인의 성격을 반영해 중국 고유의 민간신앙까지 원용해 나타난 종파가 정토종이다. 오랜 영겁의 세상이 아니라 현세와 바로 이어지는 내세의 안락을 추구하면서 현세를 현세로서 자각하려는 종파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해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을 받아들여, 정토에 왕생하는 것도, 정토에서 보살행을 닦는 것도,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으며, 부처님의 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했다. 소의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정학(定學, 산스크리트어 sam?dhisikkh?)---불교 수행자가 닦아야 할 기본적인 세 가지 공부 방법인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을 삼승학(三勝學) 혹은 삼학이라 하는데, 그 중의 하나. 정학은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인데 마음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동요에 그 마음이 한결같음을 말한다. 즉, 정학은 탐 ? 진 ? 치의 삼독심 중 진독(瞋毒)을 순화하는 수행으로 선정(禪定)에 들어 삼매(三昧)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정해탈(定解脫)---정(定)에 의한 해탈, 요컨대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한 해탈이라 하겠는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선정의 ‘정(定)’을 실천함으로써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파동 등을 다스려,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게 돼, 이 세상의 온갖 다툼이나 증오, 욕망의 파동 등으로부터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자유롭게 해 가는 것을 정해탈이라 한다. 헌데 도인(道人)이라면 혜해탈(慧解脫)과 정해탈(定解脫)을 겸해야 참다운 도인이라 할 수 있다.---→혜해탈(慧解脫), 정혜(定慧) 참조.


*정혜(定慧)---불교적 수행방법을 말한다. 정(定)은 마음이 오롯해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선정(禪定)을 줄인 말이다. 혜는 지혜를 일컫는데,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라 반야의 절대적 지혜의 단계로서 정(定)의 상태에서 밝게 관조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은 정신 수행이고, 혜(慧)는 지혜의 연마이다. 정혜와 지관(止觀)은 같음 말로서, 언어나 이론 또는 사변을 넘어서, 사념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관(直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혜란 수행을 완성해 가는 보살 중에서도 거의 부처님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얻은 수승한 보살이 얻는 경지이다.---→지관(止觀) 참조.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고려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송광사(松廣寺)에서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할 때 그 취지를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지눌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 어째서 불도의 요체인가를 밝혀 자기의 소신을 명백히 했다


*정혜쌍수(定慧雙修)---정과 혜는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고루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선과 교를 함께 공부함, 선과 지혜를 함께 닦음을 말한다. 그래서 선교겸수(禪敎兼修)라고도 한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해 그릇된 폐단을 없애 올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했다.


*제관(諦觀)---→체관(諦觀) 참조.


*제도(濟度)---미혹해서 번뇌의 고해에서 괴로워하며 생사만을 되풀이 하는 중생을 구출해서 생사 없는 이상적인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의 저 언덕[피안]으로 건네주는 일을 말한다.


*제망(帝網)---제망(帝網)은 제석천의 그물이라는 뜻인데, 인드라망(=인다라망/因陀羅網)을 의미한다. 고대 인도의 신들 중에 강력한 힘을 지닌 신들의 제왕이 바로 인드라 신이다. 그가 하늘을 다스리는 무기가 인드라망이라 불리는 커다란 그물인데 그물의 크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그물망의 한 코마다 구슬이 달려있어서 하나의 구슬에 수많은 다른 구슬이 비춰져서 다함이 없이 상대방을 비춰주는 불교의 무한법계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제망중중(帝網重重)---제석천(帝釋天)은 ‘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원래 이름은 인드라(Indra, 因陀羅)이다.

   제망중중은 제석천의 구슬 그물 망(網)이 서로 빛을 반사해 무수한 아름다움을 몇 곱절로 배가 시킨다는 뜻이다. 이 그물의 비유는 우주 삼라만상은 한정되거나 고정된 게 아니고 중중무진하게 펼쳐져 있으며, 구슬 하나에 온 우주의 모습이 다 들어있듯이, 티끌 하나에도 삼라만상이 온전히 구현돼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인간 세상은 화엄의 핵심철학인 제망중중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제망(帝網), 인다라망 참조.


*제망중중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화엄의 핵심 철학은 한마디로 ‘제망중중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이다. 이 말은,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볼 때 세계는 본래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떼어질 수 없는 생명 공동체이다. 즉, 세계가 마치 살아있는 그물이라면 낱낱의 존재들은 그물코 같이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이다. 이렇듯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 한 생명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여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다.

     ※ 불일불이(不一不二)---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너와 나의 분별이 없다는 말. 그러므로 자비로 타인을 감싸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이다.


*제망찰해(帝網刹海)---여기에서의 ‘제망(帝網)’은 인드라망의 그물을 말하며, 중중무진한 연기법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찰해(刹海)’는 바다와 육지라는 뜻으로, 넓은 바다와 육지 모두에 깔려 있다는 말로서 법계(法界)를 뜻하며, ‘온 누리에 변함 없이’라는 뜻도 된다. 따라서 ‘제망찰해’는 부처님이 방방곡곡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상주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일컬어 ‘시방삼세 제망찰해’라고 표현한다.


*제바달다(提婆達多)---→데바닷타 참조.


*제바(提婆 산스크리트어 Kanadeva/카나데바)---일명 가나제바(迦那提婆) 혹은 아리야데바라고도 함. 2~3세기경 남인도 출신의 승려이며, 원래 이름은 <제바>이지만 한 눈이 멀어 애꾸라는 뜻의 ‘가나’라는 이름이 붙어 <가나제바>가 됐다. 용수(龍樹)보살의 제자이고, 용수와 함께 삼론종(三論宗)의 시조에 해당하며, 성천(聖天)이라고도 한다. 불행히도 이교도의 칼에 죽었다. 주요저서 <백론(百論)>, <사백론(四百論)>, <백자론(百字論)>, <광백론(廣百論)> 등이 있다. 


*제법무상(諸法無常, 팔리어 Sabbe sankhara anicca)---삼법인(三法印)의 하나. 모든 존재는 항상하지 않는다는 말. 이 세상에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삼법인(三法印) 참조.


*제법여의(諸法如義)---<금강경>에 나오는 말.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다’는 의미. 모든 여래의 법은 자연의 여여한 모습과 같다는 의미겠다. 즉, 우주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바로 부처라는 뜻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팔리어 Sabbe dhamma anatta)---삼법인(三法印)의 하나.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법(諸法)에서 ‘법’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가지가지의 만사’ 혹은 모든 존재라는 의미이고, ‘무아(無我)’에서 <내가 없다>는 말 중에 ‘나’라는 것은 ‘나’ 개인 뿐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사물까지, 이 세상의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제법무아란 고정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는 없다는 말, 즉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自我)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삼법인(三法印) 참조.


*제법상즉(諸法相卽)---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종합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것. 즉,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해 움직임을 말한다.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 없이 융합하는 묘용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해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두 가지가 하나로 융화하는 ‘즉(卽)’은, 물과 물결처럼 한 물건의 체 그대로가 다른 물건인 뜻으로 말하는 ‘즉’이다.

     ※ 상입상즉(相入相卽)-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으며, 상호개입과 상호연계 돼 있다는 존재양식을 일컫는 화엄사상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혹은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더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서는 종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용수(龍樹)의 경우엔 공(空)인 반야바라밀이 제법실상이라 했고, 중국 천태종의 개조 지의(智?, 538~597)는 중도(中道)를 제법실상이요, 열반이라고 규정했다. 아무튼 제법실상을 말로 규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고서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석천(帝釋天)---불교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고대인도 힌두교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파니샤드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모든 신을 주재하는 인드라(Indra)신이었다. 여기서 ‘천(天)’은 신(神)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에 수용된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利天)의 임금으로서 선견성(善見城)에 거쳐하면서 사천왕 32천을 통솔하며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한다.


*제일의제(第一義諦, 산스크리트어 param?rtha-satya)---진제(眞諦)ㆍ성제(聖諦)ㆍ승의제(勝義諦)라고도 한다. 제(諦)는 진리를 뜻한다. 산스크리크어 paramartha는 뛰어나다는 의미의 parama와 뜻이라는 의미의 artha의 복합 명사이다.

   열반ㆍ진여ㆍ실상(實相)ㆍ중도(中道)ㆍ법계(法界)ㆍ진공(眞空) 등 깊고 묘한 진리를 제일의제라 한다. 즉,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된 진리, 분별이 끊어진 후에 확연히 드러나는 진리를 말한다. 결국 제일의제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가리킨다.---이제(二諦), 속제(俗諦) 참조.


*제일의공(第一義空)---제일의는 궁극적 진리의 본체인 진여(眞如)나 열반 등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상도 사실은 공하다는 의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으로 해석하며, 진실공(眞實空) ? 진경공(眞境空)이라고도 하는데, 진실도 공이요 진경도 공이라는 것.


*제행무상(諸行無常)---삼법인(三法印)의 하나.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이라는 말과 k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행(行)’은 ‘만들어진 모든 존재’ 혹은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서의 ‘존재’란 뜻에 더 가깝다.

   그리고 무상은 산스크리트어 anitya를 번역한 말이고(팔리어 무상은 anicca), ‘항상(恒常)’이라는 nitya의 반대말이므로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 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삼법인(三法印) 참조. 


*조계산(曹溪山)---중국 광동성 곡강현에 있는 산. 육조 혜능(慧能)선사가 머물렀던 보림사(寶林寺, 지금의 남화사/南華寺)가 있는 산이다.


*조계종(曹溪宗)---조계종의 공식적인 초조는 신라 말의 도의국사(道義國師)이고, 중흥조는 고려 말의 태고보우(太古普愚)이다. 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休靜) 문하에서 태고보우를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조로 보기 시작했고, 휴정의 제자들이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태고보우 종조설이 정통설로 수용됐다.

   1941년 봄에 북한산의 태고사를 지금의 조계사 자리로 옮기고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통합해 이를 총본산으로 삼았으며, 그 후 종단 이름도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산태고사법'(朝鮮佛敎曹溪宗總本山太古寺法)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후 조계종은 31본산(本山)을 비롯한 전국의 사찰을 총괄적으로 관할하게 됐으며, 1945년 8 ? 15해방과 함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범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을 종지로 하고 있다. 즉, 선을 중심으로 하되 다른 교학과 염불, 주력(呪力)수행을 제한치 않는 한국불교의 전통인 회통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이다.

   헌데 태고 보우선사의 부도탑[원증국사부도탑(보물 제749호)]와 탑비]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는 원래의 북한산 태고사에 있다. 그런데 현재 이 태고사는 태고종 사찰이다. 그러니 태고종 사찰 경내에 조계종 중흥조의 탑과 탑비가 있는 셈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참된 자아를 상실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서 살아가도록 주의시키는 선불교에서의 경책(警責 -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음)의  선어이다.

   여기서 <고(顧)>란 돌아볼 고이고, <각(脚)>이란 다리 각이다. 그래서 자기 주위의 어떤 경계나 분위기 혹은 남의 일에 끄달려 엉뚱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자네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자네 다리 밑(코앞의 일)이나 잘 살피고, 정신 차리게! 라는 의미가 담긴 경책의 말이다.


*조론(肇論)---구마라습(鳩摩羅什)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승조(僧肇, 384~414)의 저서임. 그는 구마라습을 스승으로 모시고 역경 사업에 종사하면서, 대승의 공(空)사상을 깊이 이해해 교리에 으뜸이라 칭송됐으며, 이 책을 써서, 격의불교(格義佛敎)를 비판하는 등 중국불교계와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 불교 최초의 논문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승조는 불교의 기본명제라 할 수 있는 공(空), 반야(般若), 열반(涅槃) 등을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비교하면서 서술했다.---→승조(僧肇), 부진공론(不眞空論) 참조.


*조사(祖師)---석가모니 부처님의 정통 법맥(선맥)을 이어 받은 스님.---→법맥(法脈) 참조.


*조사선(祖師禪)---조사선은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으로 깨우침이 전해지는 것, 선은 마음을 닦는 수심법(修心法)인데, 조사선은 달마의 정전(正傳)인 석가의 마음을 마음으로 아는 참된 선을 말한다. 이 명칭은 당나라 후기에 나타났지만, 기초를 만든 것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의 문하, 하택 신회(荷澤神會)와 마조 도일(馬祖道一) 계통의 선사들이다.

   여기서 조사(祖師)란 달마를 비롯한 역대 조사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들 조사들에 의해 발달된 선을 조사선이라 하는데, 언어문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정에 들어 깨닫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조사선에서는 화두를 들지 않는다. 화두 없이 묵묵히 좌선을 통해 마음을 쉬어 자기 자신이 본래 깨달은 존재(부처임)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조사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敎)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을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 도리에 입각한 조사와 조사가 본래 전하는 선(禪)을 말한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의 이름에 대해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敎) 안의 미처 덜 된 선이라 하고, 조사선을 교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말씀이다.

   그러나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뜻이 여래선 가운데 안 들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여래선의 공덕 가운데는 일체상을 떠나고 생각을 떠난 도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여래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헌데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즉 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깨달았으나(여래선) 미흡함을 알고 좀 더 깊은 수행을 위해 찾아간 곳이 진귀조사(眞歸祖師)이고, 그 진귀조사가 석가모니에게 전한 선이 조사선이라는 것이다.---→여래선 참조.


*조심(調心)---좌선 시 주의해야할  3요소인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의 하나. 조심이란 마음의 컨트롤 하는 것. 마음이 조급해 들뜬 것을 조절하고 잡념을 없애고, 심신을 고르게 하는 것. 조심은 단전에 마음을 두면 적적(寂寂)해 지며, 단전에 둔 마음을 바라만 보며 성성(惺惺)해 지는 것이 좋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지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조복해서 지나치게 방일하게 하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느슨하거나 급하지 않는 네 가지 모습을 얻는 것이 마음을 조화롭게 함이다.---→‘좌선 시 주의해야할  3요소’ 참조.


*조어장부(調御丈夫)---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사람을 조어(調御), 즉 컨트롤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자라는 뜻임.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당나라 중기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5) 문하의 수제자이고, 남전은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다. 그러니 마조의 손제자인 셈이다. 조주 선사는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됐다. 특히 ‘무자화두(無字話頭)’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그리고 ‘판치생모(板齒生毛)’ 등이 유명하다. 그가 후세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참조.


*존우화작인론(尊祐化作因論)---존우론(곧 有神論)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사제들과 자재천외도(自在天外道)들이 믿고 있었던 사상으로서 절대자인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론이다. 즉 이 세계가 이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근본원인은 초월적인 유일신의 의지라는 주장이다.---→자재천(自在天, 산스크리트어 이스바라/Isvara), 전변설 참조.   


*종교와 철학의 차이---‘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철학은 머릿속이라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학문과 이론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진리의 믿음(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신행)을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종남산(終南山, 중난산)---중국 산시성 시안(옛 장안) 남쪽에 있는 산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인 김가기(金可記 또는 金可紀)와 그 외 신라 출신 승려들에 관련된 유적이 있고, 김가기에 관한 마애비문(김가기전마애각문/金可記傳磨崖刻文)이 전한다. 이 마애비문을 중국에서는 흥륭비(興隆碑)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료는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지식인들의 중국에서의 실제적 활동과 중국인들에 미친 영향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 자장율사(慈裝律師), 의상(義湘)대사와 신라 말의 도의(道義)선사도 이 종남산에서 수행을 쌓았다.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ija)---업력(業力)을 식물의 종자가 가진 잠재적인 힘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선악의 업에만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가 종자의 형태로 바뀌어 존속한다고 보았다. 그 종자가 저장돼 있는 곳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아뢰야식의 아뢰야란 ‘간직한다’는 뜻이다. 종자를 소장하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좌선(坐禪) 시 주의해야 할  3요소

     ? 조신(調身) - 참선의 몸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 -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들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 조식(調息) - 참선시의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 조식(調息)은 숨고르기이다. 그러나 조식은 단순한 숨고르기가 아니다. 이때 숨은 복식(服式) 심호흡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양생법(養生法)의 하나다. 조식을 십여 번만 해도 그 효과는 나타난다고 한다. - 초심자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이 권장되기도 한다.

     ? 조심(調心) - 마음을 컨트롤해서 어지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조복해서 지나치게 방일하게 하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느슨하거나 급하지 않는 모습을 얻는 것. 마음이 조급해 들뜬 것을 조절하고 잡념을 없애고, 심신을 고르게 하는 것. - 정진(精進) 중에 일어나는 마장(魔障)을 경계해야 한다.---→흑산귀굴(黑山鬼窟) 참조.

 

*좌탈입망(坐脫立亡)---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도통한 선사, 법력이 뛰어난 고승 들이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 돼 있다. 죽음에 초연한, 생사를 초월한 자유인, 선승의 모습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력(呪力)---주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주문(呪文)의 힘이란 뜻이다. 긴 주문을 다라니(陀羅尼: Dharani)라 하고, 짧은 것을 진언(眞言: Mantra)이라 한다. 다라니는 총지(總持)라고 번역하는데, 무량무변하다는 뜻이 있으며, 외우는 이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한다는 믿음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언은 만트라의 번역이며 밀어(密語)라고도 번역한다. 참된 부처님의 말씀이며 비밀스런 깊은 뜻이 들어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일반적으로 쓰는 주문(呪文)과는 전혀 다르다.

   주력은 불 ? 보살님의 명호나 진언(眞言)을 일념으로 염송하는 것을 말한다. 재난을 없애고 복을 부르며, 어떤 재해로부터 몸을 지킨다는 진언 혹은 다라니를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고, 이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는 것이다.


*주련(柱聯)---사찰의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귀, 기둥마다에 시구를 연이어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주리반타가(周梨槃陀迦)---산스크리트어로 주다판타카(Cudapanthaka). 부처님 당시 가장 우둔한 제자여서 가르치면 금방 까먹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을 한 나머지 큰 깨달음을 증득, 아라한이 됐다. 16아라한 중 제16존(尊)임. 제10존(尊) 반타카(槃陀迦, Panthaka)의 동생이다.


*주지삼보(住持三寶)---불법이 후세까지 잘 전해지게 하는 삼보(三寶)로서, 불보(佛寶)=불상(佛像), 법보(法寶)=경전(經典), 승보(僧寶)=승려이다. ‘주지(住持)’는 머무르고 있다, 현존하고 있다라는 뜻이다.---→화상삼보(化相三寶) 참조.


*죽림정사(竹林精舍)---부처님 생존 당시 중인도의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에 있었던 최초의 불교 정사(精舍), 절의 시초이다. 산스크리트어 베누바나 비하라(Venuvana-vihra)의 번역어이다.

   가란타(迦蘭陀) 장자(長者)가 자기 소유의 베루바나(죽림원)을 헌상하고,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빈비사라, 頻毘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가 정사(精舍, vihra)를 건립해 불교 교단에 기증했다고 한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라자그리하/Rajagrha-지금의 라즈기르/Rajgir)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부처님이 가장 많이 이용한 사찰로서 불교 교단이 기반을 구축한 곳으로 유명하다.---→라자그리하(산스크리트어 R?jag?ha, 왕사성/王舍城) 참조.


*준제보살(准提菩薩)---준제보살님의 부처로서의 이름은 칠구지불모왕불(七俱?佛母王佛)이다. ‘칠구지(七俱?)’란 칠업겁이라는 오랜 기간을 말하니 칠업겁 동안 부처님을 길러낸 큰 보살이란 뜻이다. 모든 부처님은 부처 이름을 가지고 보살행을 할 때는 보살의 이름을 따로 갖는다. 옛 사람도 호, 아명을 가지고 있듯 그러하다.

   ‘제불(諸佛)의 어머니’ - 준제보살은 다보여래 부처 다음으로 불과를 이루신 부처님이다. 밀교에서는 모든 붓다들의 어머니 역을 담임하는 붓다이시고, 모성과 자비를 상징한다. 여인상이지만 여인은 아니고,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설명되지만 관세음보살과도 다른 부처이다.


*중---승려(僧侶)를 비하하는 말. 본래는 승려 무리(衆)를 이르던 말이었다. 그리고 무리 중(衆)은 곧 많은 사람. 적어도 3인 또는 4인 이상의 화합을 말한다. 그러니 원래 뜻은 중화(衆和)라는 말로서 사람과 사람이 평화와 사랑으로 어울려 산다는 말이고, 결국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간계(中間界)---죽음으로써 물질인 육체를 벗어난 후 영계(靈界-천국이나 지옥)로 귀환하기 전에  머무는 사후세계의 중간상태를 중음(中陰) 혹은 중유(中有), 중간계(中間界)라 부르는데, 티베트불교에서의 바르도(Bardo)나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煉獄, purgatory)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곳은 물질계도 아니며 영계도 아닌 곳으로 영혼이 잠시 영계로 귀환하기 전에 지상에서의 한 생애 동안의 피곤, 그리고 고통의 정화와 영계로의 귀향에 대한 적응, 점검 등을 거치는 중간 기착지라 할 수 있다. 그곳은 영계의 천상계도 아니며, 지상계도 아닌데,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영혼이 바르도에 머무는 기간을 49일이라 말하고 있다.

   결국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영혼이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중유(中有=中陰), 사유(四有) 참조.


*중강(中講)---불경을 배우는 사람들이 스승에게 묻기 전에 둘러앉아서 미리 토론을 하는데, 그러할 때 글 뜻의 질문을 받아 대답해 주는 사람.   


*중관(中觀)---천태종에서 관법(觀法)의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눈 것인 삼관(三觀) - 공관(空觀) ? 중관(中觀) ? 가관(假觀) 중의 하나. 공(空)이나,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는 현상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리를 주시함. 공(空)과,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는 현상은 둘이 아니라고 주시함. 즉, 중제(中諦)의 이치를 직관해 중도(中道)의 진리를 구명한다는 뜻이다.---→가관(假觀), 공관(空觀) 참조.    


*중관사상(中觀思想)---중관사상은 인간의 언어논리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언어논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인간 간의 교감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부처님도 언어논리에 의존함이 없이는 설법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깨달음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수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한 사물의 변별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갖는 것을 방편지(方便智)라고 한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깨달음을 직접 줄 수는 없다. 부처님의 말씀은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일 뿐이므로 인간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쉽게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지시해주는 안내판이나 이정표와 같은 것이며, 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지로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게 해주는 기차나 비행기와 같이 탈 것과도 같은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제시한 방편지에 의해 수행을 하고, 또 방편지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언설을 통한 가르침에 의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종교사상이다.

   그러므로 방편지 없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불교 교학의 중요성이 있다.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한 판별은 깨달음의 수단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해서 궁극적인 진리의 증득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중관사상이며, 궁극적인 깨달음의 수단으로 반야지(般若智)를 제시하고 있는 사상이다.

   대승불교에서 유식학파와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관철학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150경~250경)로부터 시작됐다. 중관사상이란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원시불교의 연기설에서는, 현상 세계는 연기의 이법(理法)에 따라 생기거나 사멸하거나 하는 개물(個物)의 집합에 지나지 않지만, 연기의 이법 자체는 불변의 법칙(달마)으로서 전제돼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용수는 연기의 이법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공(空)이라고 비판했다. 즉 사물이 존재한다(有)고 하는 판단도,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無)는 판단도 모두 연기=공의 입장에서는 부정되는 것이며, 이런 존재론적인 유와 무의 두 견해를 끝없이 부정해가는 바에 참된 중도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중관사상은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와 그 후의 월칭(月稱)을 거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 중관학파로 성립돼 가면서 대승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중관사상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의 성립을 가져왔다. 삼론종을 확립한 인물은 길장(吉藏, 549~623)으로서 그는 중관사상의 성격을 ‘잘못된 것을 타파해 올바른 것을 드러내는 것[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규정했다.

 

*중도(中道, 산스크리트어 madhyam?-pratipad)---부처님은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했다.

   이 중도를 중로(中路) 혹은 그냥 중(中)이라고도 한다. 팔리어 원어는 majjhima patipada(맛찌마 빠띠빠다)인데, 중도란 분별지(分別智)에 의한 인간의 극단적인 사고(思考)와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판단의 결과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여기서 중(中)은 정(正)을 의미한다.

   어리석은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는 이분법(二分法)의 논리(論理)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즉,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공간은 무한하다 또는 유한하다와 같이 이분법의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中道)사상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인간은 이분법적이 판단에 의존해서 사물을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분법의 논리에 의존해서는 사물의 실상(實相)을 증득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중도이고,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사변(思辨)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의 중도와 대승불교에서의 중도가 서로 다르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고락을 모두 체험한 결과 극단적인 수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체득하고 마음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실천적 중도였다. 즉,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는데 하나는 육체의 욕구대로 자신을 내 맡겨 버리는 쾌락의 길이요, 다른 하나의 길은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붓다는 이 두 가지 극단의 길을 가서는 아니 되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극단의 길을 걸어가, 놓아 버릴 것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즐겨야 한다” 쾌락의 길을 고집하거나, 도를 닦아 “사람 된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고행의 길에 집착해 고행의 길을 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중도의 길은 여덟 가지 바른길이라 해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그러나 대승불교, 용수(龍樹)의 중관사상에서 주장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이다. 그리하여 공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팔불(8不)의 중도를 내 세웠다. 그리고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팔불중도(八不中道), 중관사상(中觀思想) 참조.


*중도교(中道敎)---불교철학은 대체로, 세 단계로 시기를 나누어 전개되는데, 맨 처음 초기 법문은 중생 차원에서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이 유교(有敎)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체가 다 공(空)이다.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망령된 것이고 일체가 공이요 무상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높은 차원에서 모두를 다 부정하는 단계, 이것이 공교(空敎)이다.

   헌데 우리 목적은 ‘다 공이다.’ 하는 거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영원한 행복을 간직한, 상주부동(常住不動)하고, 안락무위(安樂無爲)하며, 청정무애(淸淨無碍)해서 언제나 청정한 참다운 진아(眞我)의 세계는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고[비유비공(非有非空)], 천지우주는 오직 부처뿐이라는 가장 높은 차원으로서,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이다.---→공교(空敎) 참조. 


*중동분(衆同分, 산스크리트어 nik?ya-sabh?ga)---인간과 인간이 서로 비슷하듯, 모든 생물을 끼리끼리 서로 비슷하게 하는 작용.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동일한 모습과 유사한 습관을 지녔다고 해서 이를 중동분(衆同分)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겐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여위 사람, 검은 사람, 흰 사람 등 가지각색이지마는 그래도 누가 봐도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침팬지나 고릴라로 보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을 중동분이라 한다.


*중론(中論,  Madhyamaka-??stra)---용수(龍樹)가 지은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는 논서. 중론은 449구(한역445구)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송(中頌,  Madhyamaka-karika)이라고도 한다. 한역으로는 청목(靑目/Pi?gala, 4세기 전반)의 주석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다소 가필해 409년에 번역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반야경(般若經)>에 기초한 대승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원시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해,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철학사상 일반도 비판했다.


*중생(衆生, sattva)---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이것을 구마라습은 중생(衆生)으로 현장은 유정(有情)으로 번역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생명이 있는 자[有情]’라는 말이다. 모든 중생은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온(五蘊)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오온은 변화무상해서 영원히 간직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러한 중생이 그러한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닦아 지혜로워져서 부처가 되려는 것이 불교이다.


*중생계(衆生界)---중생세간(衆生世間)이라고도 한다. 중생이 사는 세계. 인간 세계. 십계(十界) 가운데 불계(佛界)를 제외한 아홉 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인간ㆍ천상ㆍ지옥 등으로 존재양상에 차별이 있다. [비슷한 말] 삼계(三界).---→십계(十界) 참조.


*중생상(衆生相, 산스크리트어 sattva-sa?j??)---중생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일컫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매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둘째 천당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난다. 즉 별다른 수행도 없이 고(苦)가 없는 천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심이다. 비슷하게 기복 불교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다.

   셋째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이다.

   넷째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오온(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我相)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이다.

   다섯째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즉, 본래 하나인 자성을 각득하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퇴굴심을 내는 것이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 못 났다 하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有情-중생)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부처와 다른 실재가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기 비하적인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와 중생들을 분별해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 한다거나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부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 그것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4상(四相) 참조.


*중송(重頌)---산스크리트어 geya, 팔리어 geyya를 소리 번역하면 기야(祇夜)이고, 의역한 것이 중송이다. 여기서 중(重)은 무겁다는 뜻이 아니고 ‘거듭’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송이란 경전의 서술 형식에서, 본론의 산문 내용을 좀 더 자상하고 미세하게 표현해 산문에서 이야기 하지 못했던 내용을 운문체로 중복해서 부연 설명하는 게송이다. 즉, 산문체로 된 내용의 핵심을 압축해서 다시 운문체로 설한 것이다.---→게송(偈頌) 참조. 


*중송(中頌,  Madhyamaka-karika)---용수(龍樹)의 중론(中論)을 일명 중송이라고도 한다.---→중론(中論) 참조.


*중유(中有=中陰, 산스크리트 ‘antar?bhava)---사유(四有)의 하나. 중생이 죽어서 다음의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 중간의 존재로서 이를 중유(中有), 중음(中陰) 혹은 중온(中蘊)이라고도 한다. 육체의 주인인 아뢰야식은 육체란 허물을 벗고, 49일간 중음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모태를 만나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 죽음이란 영혼(아뢰야식)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중유, 영혼, 아뢰야식이 같은 개념이다.

   중생은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의 4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 생유(生有)-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존재,

     ? 본유(本有)-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생애,

     ? 사유(死有)-죽는 찰나,

     ? 중유(中有)-죽은 후에 다음의 생을 받을 때까지.

   중유의 존재는 일종의 영혼 상태로서 의식으로 성립되며, 향을 음식으로 하기 때문에 건달파(乾?婆:食香으로 번역)라고도 한다. 이 중유의 기간은 칠칠일, 즉 49일이라는 설에 근거해 사람이 죽은 후 그가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명복을 빌어 기도와 독경을 하는 풍습이 생겼다. 천도의식(薦度儀式)을 행하는 사십구재(49齋)가 그것이다. 이 49일 동안 유가족이 영가를 위해 재를 올리며 공덕을 지어주면, 나쁜 업을 지은 영가는 불보살님의 가피 덕분에 고통의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고, 영가들은 훌륭한 공덕을 이루어 보다 더 좋은 인연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사유(四有), 중간계(中間界), 중음세계(中陰世界) 참조.


*중음세계(中陰世界)---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 생과 사의 중간 상태인 중음신(中陰身)이 돼 떠돌면서 다음 생의 인연처를 정하게 된다. 이 사후(死後) 49일간 머무는 곳을 중음세계(中陰世界)라 하며, 중유(中有)라고도 하는데, 현세를 양이라 하고, 사후세계를 유명(幽明)이라 해 음으로 표시하는데, 판결이 끝날 때까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닌 가운데에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중음이라 한다. 이 기간에 죽은 이가 생전의 업(業)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에 49일 동안 천도의식을 행한다.  


*중정열반(中政涅槃)---수행자에게 고락의 양극단을 떠난 중정(中政)의 도(道)를 중도(中道)라 하고, 중도의 실천으로 얻는 열반을 중정열반(中政涅槃)이라 한다. 이는 삼세제불이 설한 진의의 열반이요, 실상의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의 종류에는 소승열반과 대승열반과 삼제진의의 중정열반(中政涅槃)이 있다.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인연의 겹치고 겹침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중무진연기란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이 세계가 무한한 연기의 세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중무진의 연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평명적인 연기가 아니다. 동 ? 서 ? 남 ? 북 ? 상 ? 하의 3차원 세계로 펼쳐지는 연기만이 아니다. 이  연기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계의 내면에까지도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즉 작은 티끌 속에도 시방세계는 물론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펼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티끌속의 우주의 티끌에도 또 다시 또 다른 우주가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우주는 무한해서 끝이 없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연기란 일미진중함시방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연기를 말한다.---→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참조.


*중집경(衆集經, Sa?g?ti Sutta)---중집경은 부처님 생전에 샤리푸트라(S?riputta, 사리자)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불전결집으로 형성된 불경으로, <장아함경>8권에 실려 있다.---→상기티수타(Sa?g?ti Sutta, 중집경/衆集經) 참조.


*즉색즉공(卽色卽空)---당나라의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의 저서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함이 돈오입니까?” “그러니라.”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며, 어떤 것이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색이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공이며,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범부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성인이니라. 또한 진공묘유이므로 곧 색이요, 색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곧 공이니, 지금 공이라고 말한 것은 이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은 아니니라. 지금 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요, 색이 능히 색인 것은 아니니라.”

   불교에서 성품(性品)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성(自性), 본성(本性), 법성(法性), 진성(眞性), 견성(見性) 등 성(性)에 관련된 용어가 매우 많다. 만일 절대 성품을 봤다고 하면 이는 아트만(atman)이 돼 외도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절대 성품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연기법에 맞지 않고 중도법에도 맞지 않는다. 연기법은 중도법으로서 있되 없음이요, 없되 있음인 즉색즉공(卽色卽空), 있는 그대로 색(色)이면서 바로 공(空)이요, 공이면서 바로 색이다. 절대 성품을 말한다면 피조물이 돼 “하나님, 하나님”을 외치고 있는 이교도와 다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만일 공에 집착해 버리면 허무주의에 빠져 버리게 된다. 상(相)에 집착해 버리면 그럴듯하게 썩은 놈들이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을 버는 묘한 세상이 돼 버린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을 절대성품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래서 즉색즉공(卽色卽空)이다.


*즉신성불(卽身成佛)---주로 밀교에서 일컬어지는 말로서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불리는 우주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통해 현재의 몸 그대로 성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행자가 신체로는 인계(印契)를 맺고, 입으로는 진언(眞言)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부처를 깊이 주시해, 부처의 삼밀(三密)과 수행자의 삼밀이 수행자의 체험 속에서 서로 합일됨으로써 현재의 이 육신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수인(手印) ? 주문(呪文) ? 만다라 등의 시청각 효과를 동원해 현재의 이 몸에서 바로 성불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삼밀(三密)---밀교에서 신체 ? 언어 ? 정신으로 짓는 신(身) ? 구(口) ? 의(意)의 삼업을 이르는 말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진리]라는 뜻. 그대의 마음이 곧 깨달아야할 대상이라는 뜻. 마음의 실체,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뜻.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같은 말이다.


*증도가(證道歌)---당나라 영가 현각(永嘉玄覺)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영가 현각스님은 천태(天台)의 지관(止觀)에 정통하고, 육조 혜능선사의 인가를 받은 제자이다. <증도가>는 그가 증득한 깨달음의 세계를 시로 표현한 것이며, 오도송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증상만(增上慢)---최상의 교법(敎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해, 교만하게 잘난 척하는 일. 못 깨닫고 깨달았다하는 것은 수행자로서는 가장 큰 병이다. 승려들은 그러면 결국 승적을 박탈당하고 쫓겨난다. 도인(道人)이 아니면서 도인인 척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이고, 자기는 물론 남까지 함정에 빠뜨린다. 사만(四慢) 혹은 칠만(七慢)의 하나.---→사만(四慢), 칠만(七慢) 참조.


*지(止, 산스크리트어 samatha)---지(止)와 관(觀)의 합성어 지관(止觀)으로 많이 쓰인다.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해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한다. 즉, 정신을 집중해 바깥 경계를 쫓아 일어나는 모든 잡념과 망상을 그치고, 마음이 적정적정(寂靜)해진 상태로서 적정을 뜻한다. 바로 삼매(三昧)를 말한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yna, 毘鉢舍那)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즉,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의 음사로서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 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는 지(止)는 마음의 동요를 누르고 본원의 진리에 정주(定住)하는 것, 관은 부동의 마음이 지혜의 활동이 돼 사물을 진리에 따라 올바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의 지는 정(定)에, 관은 혜(慧)에 해당한다. 즉, 지는 주체의 확립, 관은 이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 ?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지와 관은 서로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으며 지계(持戒) 등과 함께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돼, 원시불교 이래의 여러 불경에 실려 있다.


*지거천(地居天)---수미산에 있는 사왕천(四王天)과 도리천(?利天)을 말함.


*지공(指空)선사---14세기 초반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제108대 조사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Nalanda)에 출가했다. 19세 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元)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현재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지가 천축(天竺)의 나란다사와 그 지세가 같다고 해 당시 허물어졌던 회암사를 중창하게 한 동기를 제공했고, 따라서 그의 계승자인 나옹(懶翁)화상에 의해 고려 제일의 거찰이 됐다.

   그 후 중국(元)에 돌아가 거기서 입적했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27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다. 그리하여 현재 양주 회암사지에 지공선사 부도(指空禪師浮屠)가 남아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나옹화상(懶翁和尙)ㆍ백운화상(白雲和尙)ㆍ무학대사(無學大師)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그의 문도이다.


*지관(止觀)---정혜(定慧)와 같은 말로서, ‘지’와 ‘관’의 합성어로서 ‘지(止)’는 모든 망념(妄念)을 그치게 해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는 것, 즉 정신집중으로 마음이 안정된 적정(寂靜)의 상태인 삼매를 말하며, ‘관’은 진리 ? 실상(實相)을 제대로 직관(直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념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집중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재(自在)로이 대처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에 해당되고, 지와 관의 양자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 같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지(止), 정혜(定慧), 마하지관 참조.


*지관타좌(只管打坐)---조동종(曹洞宗)의 선법으로 묵조선의 입장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지관(只管)이란 ‘오직 한 길’의 의미이며, 타(打)는 ‘강조’의 의미이고, 좌(坐)는 ‘좌선’의 뜻으로,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으로 좌선할 따름이라는 말이다. 만사를 제치고 잡념을 조금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하게 앉아 마음으로 좌선하는 것.---→묵조선(默照禪) 참조.


*지권인(智拳印)---비로자나불(대일여래)이 결하는 수인이다. 그 형상은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올린 후,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이 서로 맞닿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며,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눌(知訥, 1158~1210)---지눌의 속성은 정(鄭),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난으로 인해 정변이 이어지고 사회적인 혼란 또한 걷잡지 못하는 때였으며, 불교계는 교선(敎禪)의 갈등이 심했을 때였다. 그러할 때 지눌이 나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해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어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이라 할 회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눌 이후 한국 불교는 새로울 것이 없고, 지눌에 의해 전개된 선종 운동은 언제나 한국의 불교 전통이 고수해온 단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중국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이 지은 <신심명(信心銘)>에 있는 글. “지극한 도를 체득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마을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드러난다”라고 했다.


*지루가참(支婁迦讖)---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2세기 중엽에 활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支)는 대월지국(大月氏國)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루가참(婁迦讖)은 산스크리트어 로칵세마(Lokaksema)의 음역이다. 안세고(安世高)보다 약간 늦게 AD 147년 후한의 뤄양(洛陽)에 가서 대승경전을 한역한 것으로 알려지며, 소승경전을 한역한 안세고와 대비된다. 183년(중평 3년)에 이르기까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번역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문(止門)---천태종에서 말하는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의 하나.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하는 수행법. 마음을 쉬고 생각을 고요히 하는 것을 일컬어 지문(止門)이라 한다.

   숨 쉬는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히 하는 것을 지(止)란 한다. 즉 이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이지만 생각의 파도가 분주스럽다. 그래서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야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본래 고요한 자리이건만 자기 스스로 분별망상을 일으켜서 그 생각파도가 출렁인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서 그 마음이 밝고 밝아지면 편안해진다. 그리하여 지(止)에 의지해서 생각이 고요하고 요란치 않게 되는 이것을 지(止)를 닦는 문이라 한다. 마음에 파동이 없으면 모든 선(禪)이 정(定)해지니 이것을 지문(止門)이라 한다.---관문(觀門),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 참조.


*지바라밀(智波羅密)---지바라밀에서 ‘지(智)’란 6바라밀의 반야바라밀에서의 지혜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지혜(반야)를 통한 실천행이 중요하지만, 중생의 일상생활에서는 구체적인 지식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강조하면서도 지식의 습득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분석적인 지식에 매몰돼 일방적인 행동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 ‘알음알이’인 지식을 뛰어넘는 무분별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보살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해 그것을 지혜의 힘으로 활용한다면 그런 지식은 지혜(반야)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므로 틀림이 없이 지바라밀일 것이다.


*지범개차(持犯開遮)---줄여서 개차(開遮)라고 한다. 지(持)는 계를 잘 지키는 것이고, 범(犯)은 잘 지키지 못하고 깨뜨리는 파계를 말한다. 개(開)란 방편(方便)을 연다는 뜻이고, 차(遮)는 막는다는 뜻이다. 지범개차의 본질은 ‘큰 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것을 범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요약 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자기의 이익이나 일신을 위해서는 안 되며 대승심에서의 발로여야 한다. 대승심을 가지면 그것이 설사 계를 범하더라도 보다 큰 것을 위해 범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작은 문제라도 자기의 이익과 일신을 위해 범한다면 절대로 안 된다. 그러니 지범개차의 기준은 대승심의 발로가 돼야 한다.---→개차(開遮) 참조.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지심(至心)’이란 ‘지극(至極)한 마음’을 말한다. ‘귀명(歸命)’이란 ‘생명(生命)을 바쳐’란 뜻이다. 따라서 지극한 마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던져 불교에 귀의하는 예절이라는 뜻이 되겠다.


*지엄(智儼, 602~668)---중국 수 ? 당 시대의 승려, 화엄종(華嚴宗)의 고승. 화엄종의 기초를 다지고 화엄종 제2대 조사(祖師)가 됐다. 신라의 의상(義湘)이 그로부터 화엄학을 배웠다.


*지엄(智儼)---생몰연대 미상,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승려. 출가한 뒤 인도에 유학했으며, 인도승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 359~429)와 함께 귀국했다. 보운(寶雲)과 함께 <보요경(普曜經)>, <광박암정(廣博巖淨)> 등 36권의 경전을 번역 출판하고, 만년에는 다시 인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주요저서로 <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이 있다.


*지옥(地獄)---산스크리트어 나라카(naraka)를 나락(捺落), 나락가(捺落迦)로 소리대로 번역하기도 하고, 의역해서 지옥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전생(前生)에 악한 짓을 많이 한 자가 그 과보로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곳을 말한다. 지옥의 지배자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이며 많은 옥졸을 거느리고 있다.

   땅 속 깊은 곳에 있다고 믿는 저승[(명계(冥界)]으로 팔한(八寒), 팔열(八熱) 등 여러 가지 지옥이 있다고 하나 보통 팔열지옥(팔대지옥)이라 하며, 맨 아래가 아비지옥(阿鼻地獄) 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는 곳이다.


*지음(知音)---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 지기지우(知己之友)와 같은 말. 친구의 연주하는 거문고의 소리(음악)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속뜻은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


*지의(智?, 538~597)---중국 천태종의 개조로 천태(天台)대사 혹은 지자(智者)대사로 불린다.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에 걸쳐 활약했다. 천태 3대부인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을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천태대사(天台大師) 참조.


*지장경(地藏經)---<지장본원경(地藏本願經)>의 약칭으로 당나라 시대에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역했다. 내용은 지장보살이 백 천 방편으로 육도(六道;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기에 노력하고, 동시에 죄를 짓고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해탈하도록 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것을 설한 것이다. 이처럼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부촉을 받으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셨다고 한다.

 

*지장보살(地藏普薩)---산스크리트어 이름은 크시티 가르바(Ksti garbha)이다. 크시티(Ksti)는 땅, 즉 지(地)를 의미하고, 가르바(garbha)는 태(胎) 혹은 자궁(子宮)으로 번역되는 함장(含藏), 저장(貯藏)의 뜻이다. 대지는 모든 생명의 씨앗을 간직해서 때가 되면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해주는 등 모든 삼라만상을 길러내고 품어내며 갈무리한다. 바로 이러한 땅과 마찬가지로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위대한 힘을 저장하고 있기에 지장(地藏)이라 한 것이다.

   그는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사찰에서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명부전(冥府殿) 혹은 지장전(地藏殿)의 주존으로서 이들 전각은 사자(死者)의 명목을 비는 전각이다.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지장 신앙을 설한 <지장본원경(地藏本願經)>,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의 셋을 말한다.


*지전(知殿)---선원(禪院)의 불전(佛殿)을 맡아서 돌보는 직책, 또는 그 일을 하는 승려. 예불을 주관하고 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을 말한다. 지전스님을 전주(殿主)스님이라고도 한다. 


*지전보살(地前菩薩)---십지(十地)란 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말하는데,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가 있다. 이 십지 이전의 보살을 지전보살이라 한다.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오른 보살을 등지보살(登地菩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보살을 지전보살이라고 한다.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세간은 세계의 의미로서, <화엄경>에는 기세간(器世間)ㆍ중생세간(衆生世間)ㆍ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으로 나눈다. 이 중 기세간은 중생을 수용하는 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뜻하고, 중생세간은 중생 또는 유정(有情)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지정각세간은 마음의 눈을 떠 무루지(無漏智), 즉 일체의 번뇌 망상을 떠난 지혜에 따라 정각(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세계, 즉 삼계윤회를 초월한 출세간(出世間)을 가리킨다.


*지제(支提, 챠이티야/caitya)---부처님의 사리를 넣어 높이 쌓아올린 무덤(범어로는 스투파/stupa)을 탑이라 하며, 팔리어로는 투파(thupa)라 했고, 투파가 음역해서 탑파(塔婆)라고 불리게 됐다.

   그런데 사리를 넣지 않고 기념될 만한 장소, 가령 부처님이 자취를 남긴 곳에 기념으로 세운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챠이티야(caitya=chaitya)라 불렀고, 한역해서 지제(支提)라 했다.

   이러한 사리탑이나 기념탑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구분 없이 다 같이 탑이라 했다. 더구나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그 많은 탑에 다 봉안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대의 탑은 사리탑이니 기념탑이니 구분할 필요조차 없게 됐다.

    ※전남 장흥의 천관산(天冠山;723m)을 일명 지제산(支提山)이라 한다.


*지혜(智慧)와 지해(知解)---불교에는 지관(止觀) 혹은 정혜(定慧)란 말이 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로서 언어나 사변을 넘어서 정신을 집중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직관을 통한 앎을 불교에서는 인식이라 하지 않고 깨달음이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앎을 지혜라 하며, 언어를 매개로 한 인지나 인식의 결과인 지식을 지해, 즉 알음알이라 한다. 이와 같이 지혜와 지해은 엄밀히 구별된다.---→알음알이 참조.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조계종의 종지(宗旨). 선원에서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좌선에 의해 사람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함을 이르는 말이다. 문자나 언어를 빌리거나 외적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음을 잘 응시해서 직접 단번에 마음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직지인심’이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본마음을 직접 파악하는 것을 ‘직지인심’이라 하고, 직지의 대상은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해야 한다. 마음 밖에서 찾는다면 외적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결과 망상과 미혹된 마음이 일어나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이 말은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곧바로 본심. 본성에 투철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로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밝고 바르게 보아 앎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면 성불한다는,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견성성불(見性成佛) 참조.


*진공묘유(眞空妙有)---허공을 잡아 낼 수 있을까?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공묘유’이다.

   참다운 비움으로부터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난다. ‘없음’이 없이는 무위도 없고 참된 존재도 없다. 참 존재는 ‘없는 상태’로부터 나온다. ‘없음’이야 말로 항상 거기에서 모든 것을 나타낸다. 진공묘유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보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장작에서 재를 보고, 재에서 장작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한 공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만물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임에 틀림없다. 공의 그러한 형성작용을 진공묘유라 한다. 그래서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는다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의미적으로 본다면, ‘진공은 적적(寂寂)이며, 묘유는 성성(惺惺)’이 된다.


*진귀조사(眞歸祖師)---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깨달았으나(여래선), 미흡함을 알고 좀 더 깊은 수행을 위해 찾아간 조사가 진귀조사(眞歸祖師)이다. 그리고 진귀조사로부터 전해 얻은 선이 조사선(祖師禪)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귀조사는 석가모니에게 조사선을 전했다는 조사이다.

   헌데 이것은 여래선을 폄하하려고 지어낸 말이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뒤에 진귀조사를 만나 무상정등각을 얻은 조사선 경지가 참된 깨우침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지고 있어서 오랫동안 진위의 논쟁이 돼왔다.


*진기약(陳棄藥, 산스크리트어 p?timukta-bhai?ajya)---부란약(腐爛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짐승의 대 ? 소변으로 만든 약, 소의 오줌에 하리이다키 열매를 넣어 이것을 흙 속에 묻어 발효시킨 엉성한 약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출가자들이 이 약을 먹었다. 출가자가 아프면 진기약(陳棄藥) 정도만 머고, 목숨을 마칠 때까지 수행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조선 선조~인조 때의 고승으로 전라도 김제군 만경면 출신이다. 서산 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 고승이었지만 깊은 산중에서 은둔하고 지낸 까닭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아 기행이 많은 전설상의 인물처럼 돼버렸다. 그의 부도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봉서사(鳳棲寺)에 있다. 저술은 없으나 조선 후기의 승려 의순(意恂=초의선사)이 구전돼오던 것들을 정리해서 진묵대사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라는 책을 남겼다.


*진사혹(塵沙惑=진사의 미혹)---진사혹이란 먼지와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현상의 다양한 사태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할 능력이 미흡함을 말한다. 진사(塵沙)란 미혹의 수가 티끌이나 모래와 같이 매우 많다는 것뿐만 아니라, 세세한 곳에 생각이 미치지 못함을 말한다. 보살이 자비행을 시도할 때도 이런 장애를 일으킬 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사의 미혹>은 깨달았다는 자들에게 곧잘 일어나기도 한다. 조금 깨달은 사람은 자기 혼자 깨달은 양,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고, 세상사의 자질구레한 것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 때문에 한량없는 차별 현상을 알지 못해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성문(聲聞)ㆍ연각(緣覺)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성문 ? 연각은 아직 부처님 경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미혹이 있으므로 그 미혹 역시 <진사(塵沙)의 미혹>이라고 하겠다.


*진언(眞言)---→만트라(mantra) 참조.


*진언종(眞言宗)---716년 당나라의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이 <밀종론(密宗論)>을 번역함으로써 중국의 진언종이 시작됐으며, 그 후 금강지(金剛智)과 불공(不空)이 계승, 확장했다. 밀교 종파의 하나로소 대일여래(大日如來)를 교주(敎主)로 하고,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진여(眞如,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 ‘그와 같은 것’을 말한다. 즉,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진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만유(萬有)의 본체(本體)를 가리킨다. 모든 존재의 본성은 대립이 없는 절대적인 것이고, 온갖 차별상을 초월해 있으므로 이것을 진여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의 법신 성품을 진여라고 하겠다.

    진실한 존재방식,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하여 ‘여(如)’, ‘여여(如如)’, ‘여실(如實)’이라고도 번역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과 거의 같은 의미의 말로 쓰이고 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법성(法性), 법계(法界), 법신(法身), 공(空), 여래장(如來藏),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이다.


*진여당체(眞如當體)---생각 이전의 자리인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부처의 자성인 법신을 말한다.


*진제(眞諦)---속제(俗諦)의 반대되는 말---→속제(俗諦), 이제(二諦), 제일의제(第一義諦) 참조. 


*진제(眞諦, 499~569년)---진제는 원명을 파라마르타(Paramartha)라고 하며, 서북 인도의 브라만 출신으로 불교에 귀의했다. 부남국(扶南國/캄보디아)에 왔다가 양 무제(武帝)의 초청을 받고 548년 다수의 불전을 가지고 건강(建康)으로 왔다. 그러나 양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다니느라 전전하면서 불우한 일생을 보내면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나라 때까지 활약했다. 특히 <섭대승론(攝大乘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유식론(唯識論)>,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 등을 번역해 인도 유식학파의 무착 ? 세친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유식학 연구의 단서를 열어 섭론종(攝論宗)의 개조가 됐다. 그는 9식설을 주장했다.--→섭론종(攝論宗) 참조. 


*진참회---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 - 죄의 자성은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 (心若滅時罪亦亡) - 만약 마음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망심멸양구공 (罪亡心滅兩俱空) - 죄의 마음 모두 없애 두 가지가 다 공해지면

               시즉명위진참회 (是卽名爲眞懺悔) - 이 경지를 진실로 참회라 이름하네

               천수경에 나오는 말임.


*집(集, 산스크리트어 사무다야/samudaya)---초집생기(招集生起)의 뜻을 줄여서 하는 말로, 불러 모아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혹은 어떤 결과를 발생케 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현실이 결과적으로 괴로움이라고 정의된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집성제(集聖諦)---집제(集諦)라고도 하며, 사제(四諦)의 하나.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집(集)은 집기(集起) ? 기인(起因) ? 원인을 한다.


*집착(執着)---집착을 팔리어로 우빠다나(upadana)라고 말한다. 우빠다나는 ‘강렬한’ ‘극심한’이라는 뜻의 우빠(upa)와 아다나(adana)의 합성어로서 ‘꽉 움켜쥠’이란 뜻이다. 따라서 우빠다나는 ‘극심하고 지나친 갈애’를 말한다. 갈애가 수십 수백 수천배 강화된 것이 집착이라는 뜻이다. 그런 집착은 한번 달라붙으면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남녀간의 애정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발전돼 소유하고 싶은 집착의 단계로 가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집착에도 네 종류가 있다.


*집금강신중신(執金剛身衆神)---절에 들어가는 문이나 전각의 입구 좌우에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잡고 서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 왼쪽은 밀적금강(密跡金剛)으로 입을 벌린 모습이며, 오른쪽은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으로 입을 다문 모습이다. 금강역사(金剛力士) ? 집금강(執金剛) ? 집금강신(執金剛身)이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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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叉手)---말 그대로 두 손을 자연스레 아래위로 교차해 공손하게 포갠 손 모양. 평상시 도량에서 손을 쓰지 않을 때 혹은 경내에서 걸어다닐 때 취하는 자세.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손가락 부분이 서로 교차되게 해 왼손의 손가락 부분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고 단전부분에 대고 있는 자세이다. 헌데 경우에 따라 손을 바꾸어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도 무관한데, 어느 손이 위로 가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편하게 하면 된다.


*차제설법(次第說法)---상대가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순서에 따라 행하는 설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일반인으로서 최초의 귀의를 받은 야사(Yasa)에게 차제설법(次第說法)을 했다.

   즉, 부처님은 야사에게 먼저 보시(布施)에 관한 설법을 하고, 이어서 계(戒)에 관해서, 그리고 천상(天上)에 관해서 설법을 하고, 다음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불행, 무익, 불결함에 대해서 설법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면 큰 이익이 있음을 설법했다. 그때 부처님은 야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잘 받아들이려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장애 없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신명난 마음상태가 돼 있고, 밝고 청정한 마음상태가 돼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부처님 최상설법(最上說法)]인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담마를 설법했다. 야사는 마치 때 없는 하얀 천이 매우 잘 물들듯이, 먼지가 없고, 때가 없는 법안(法眼)을 얻었다.

   이와 같이 알기 쉬운 순서로 설법을 하는 것을 차제설법이라 하며, 이러한 방식의 설법을 통해 부처님은 야사(Yasa)라는 청년을 교화함으로써, 그를 일반인으로서는 최초로 부처님에게 출가해 귀의한 제자로 삼았으며,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야사의 부모와 친구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야사의 아버지는 말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고 눈 있는 자 와서 보라고 하듯이, 석존께서는 갖가지 방편으로 법을 밝혀 보이셨습니다.”라고, 그리고 차제설법은 맨 처음 정립된 설법의 방식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대기설법 참조.


*차제연(次第緣)---4연(緣)의 하나. 등무간연(等無間緣)과 같은 말임. 구마라습은 차제연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등무간연이라 번역했다.

   연속하는 인과 관계에서 단절이 없이 직후에 발생하는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뒷생각은 앞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가 되는 것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차제연(次第緣=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 하고, 결과가 되는 것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인연(因緣)에는 시간의 선후로 펼쳐지는 차제연(次第緣)이 있고, 공간적으로 전개되는 증상연(增上緣)이 있다. 부자간의 혈연과 같은 것은 차제연에 해당할 것이고, 지연(地緣)과 같은 것은 증상연에 해당할 것이다.


*참문(參問)---스승을 찾아뵙고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함.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도(道)를 묻는 것.


*참선(參禪)---참선과 선(禪, 禪定)의 차이.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해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참선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고,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 ? 참 나’인 자성(自性) 자리를 밝히는 데에 있다.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 자신의 본성(本性)을 간파하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앉아서 거기에 몰입함을 말한다.  

   참선공부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오랜 기간 동안 일심으로 한결같이 정성을 기울여 공부해야 한다. 오랫동안 망상하던 습(習)을 극복하는 것이 참선이므로, 참선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성취되는 일이 아니다. 습관을 극복하고, 오랫동안 꾸준히 매달려 있을 때에 비로소 가까워 질 수 있다. 참선은 ‘알다, 알지 못한다’는 문제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참선에는 아무 이치나 도리가 없다. 선은 곧 마음이니, 분별할 수 있는 모습도 방법도 없다. 참선하는 사람은 어떤 세속적 가치보다도 공부를 우선시해야 하고, 이 공부가 자기 인생의 가장 큰 목표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이 문제에 매달려 있게 되고, 이와 같이 매달려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에 문득 전체의 체험이 찾아온다.


*참회(懺悔)---‘참(懺)’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앞으로 다가올 잘못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참회(懺悔)란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과 교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아주 끊어,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시이다. 이러한 참회를 통해 숙세의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회란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는 오욕심(五欲心)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올바른 삶의 가치에 대한 확신과 변화에서 비롯된다. 가치관의 전환이나 생활의 변화가 없는 참회는 허상에 불과하다.

   참회에는 사참회(事懺悔)와 이참회(理懺悔)가 있다. 사참회는 매일 짓는 죄를 모두 참회하는 것이요, 이참회란 죄의 본성(本性)이 본래 공(空)해 죄가 붙을 자리가 없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으로, 이것이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있다. 사참(事懺)은 부처님께 절을 하거나 독경을 하거나 참회의 진언을 외우는 등 행위와 동작으로 참회하는 것이며, 이참(理懺)은 지은 죄의 실상을 깨달아 다시는 재범하지 않는 참회를 말한다.


*참회진언(懺悔眞言)---「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은 ‘진언의 왕’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항복, 조복, 섭복’ 등 여러 가지 의미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의 정형구에 해당한다.

    <살바>는 ‘일체’라는 뜻이며,

    <못자>는 ‘붓다’의 다른 표기이다.

    <모지>는 ‘보리’의 뜻이며,

    <사다야>에서 <사다>는 ‘살타’이며,

    <야>는 ‘~에게’라는 뜻이다.

    <사바하>는 앞의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도록 하는 종결어미로 사용되며, ‘구경(究竟), 원만, 성취, 맡긴다, 귀의한다.’ 등의 뜻이 있다. 그래서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붙여서 해석해보면, ‘일체의 불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천도재(薦度齋)---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회 ? 독경(讀經) ? 시식(施食) ? 불공(佛供) 등을 베풀어 죽은 영혼들로 하여금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기원한다. 말하자면, 망자의 영혼을 좋은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의식인데 이를 천도재(薦度齋)라 한다.

   사람이 죽은 지 49일까지를 중음(中陰) 혹은 중유(中有), 중간계(中間界)라고 부른다.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이다. 7일마다 시왕을 바꾸어 가며 심판을 받는데, 49일 안에 일곱 번 심판을 받는 셈이 된다. 이때의 영혼을 흔히들 중음신(中陰神)이라고 하며, 아직 사후 인생이 결정 안 된 불귀의 혼인 셈이다.

   그래서 천도의식은 사람이 죽은 지 1주일마다 한 번씩 7 ? 7재를 가지게 되며, 7주째에 행하는 천도의식을 49재라 한다. 그러나 7 ? 7재의 여섯 번은 생략하고 49일째만 행하기도 한다.

   천도재(薦度齋)란 생전의 업식(業識)으로 인해 생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영가에게 무상(無常), 무아(無我)로 일체가 공(空)하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일러주고, 참주인공 마음자리는 너와 나, 부처님 마음자리가 서로 하나임을 바로 깨치게 해 생전의 업식에 끄달려 집착하지 않고 밝은 지혜를 얻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을 말한다.---→중유(中有), 49재(四十九齋) 참조.


*천류(遷流)---천(遷)은 옮는다는 것이고, 유(流)는 흐른다는 말로서, 곧 시간이 흐른다, 잠시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혹은 생멸의 유전과 변화를 뜻한다.


*천부(天部)---신들이 사는 수미산 위의 천계(天界)를 일컫는다. 천계에 사는 신들은 과거 선업의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 수명도 매우 길고 천계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다닌다. 

   불교에서는 불, 보살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에 해당하며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인왕(仁王 ; 금강역사),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팔부중(八部衆) 등이 천부 가운데 대표적 신이다. 이들은 인도 고대신화에서는 천계에 사는 신들이며, 불교에 수용된 후 호법신이 됐다.


*천상(天上)과 극락(極樂)---천상(천당, 천국)과 극락은 다르다. 천상에는 욕계 중생이 머무는 천상(6욕천으로 사왕천 , 33천, 야마천, 도솔천 , 화락천, 타화자재천)과 색계 중생이 머무는 천상(색계 1선천, 2선천, 3선천, 4선천)과 무색계 중생이 머무는 천상(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 등 천상은 모두 26곳이다.

   그 중 극락이라는 곳은 ‘색계 4선천(禪天)’ 중에 정거천(淨居天)을 일컫는 말로서, 이곳은 불환과의 도과를 얻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으로 이곳에 태어나면 그곳에서 나머지 수행을 완성해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끊을 수 있다. 26계의 천상 중 오직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은 정거천 뿐이다.---→정거천(淨居天) 참조.


*천수경(千手經)---<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崖大悲心大陀羅尼經>의 줄인 이름이다. 이 경은 옛날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음역(音譯)해 읽는 밀교 경전이고, 경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관음신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천수경의 주인공은 관세음보살이며,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사상을 담고 있다. 천수경은 대승불교의 총론에 해당하는 경으로서, 당나라 때 가범달마(伽梵達磨) 등이 한역했다.---→가범달마(伽梵達磨) 참조.


*천식재(天息災)---북인도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출신의 밀교 계통 승려로 980년에 중국 송(宋)에 와서 982년에 칙명으로 역경원(譯經院)에서 번역에 종사해 <대승장엄보왕경(大乘莊嚴寶王經)>,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 총 18종을 한역했다.


*천왕문(天王門)---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 : 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 불(佛) ? 법(法) ? 승(僧) 삼보가 계시는 사찰을 수호하는 뜻으로 천왕의 모양을 나투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그 뜻이 있다.


*천이통(天耳通)---육신통의 하나. 천이통이란 세간의 좋고 나쁜 모든 말과 멀고 가까운 말, 여러 나라 각 지역의 말, 나아가 짐승과 귀신의 말에 이르기까지 듣지 못할 것이 없는 신통한 능력인데, 붓다들은 천이통 등 육신통을 갖추고 있다.---→육신통 참조.


*천인사(天人師)---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신(神)들과 인간의 스승, 곧 하늘과 사람의 스승. 인천(人天)의 대도사(大導士)라는 뜻이다.


천제(闡提)---‘일천제가 (一闡提迦)’의 준말. 불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천책(天?)---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승려. 자 몽저(蒙且), 시호 진정국사(眞靜國師). 소년으로 과거에 급제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무상을 느끼고 강진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로 출가해 천태종의 원묘국사(圓妙國師)의 제자가 됐고, 이후 백련사의 제4대 조사(祖師)를 지냈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됐다. 저서에 <동해전홍록(東海傳弘錄)>,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등이 전해진다.


*천친(天親)---세친(世親:320∼400)을 천친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세친(世親) 참조.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천태란 원래 산 이름이다. 천태산(天台山)은 중국 절강성 태주부에 위치한 산으로서 지의(智?)대사가 이곳 에서 수행한 이후로 불교의 성지가 됐다. 그래서 지의대사를 천태대사라 하는데, 일명 지자대사(智者大師)라고도 한다. 중국 천태종의 개조로, 남북조시대에서 수(隋)나라에 걸쳐 활동했다. 저성에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가 있다.---→지의(智?), 천태종(天台宗) 참조.


*천태사교(天台四敎)---천태종의 교리. 석가모니의 설법과 교화의 형식에 따라 나눈 화의사교(化儀四敎)와 교리의 내용에 따라 나눈 화법사교(化法四敎)가 있다.---→화의사교(化儀四敎) 참조.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천태교관(天台敎觀)의 대강(大綱)을 간추려 해석한 것으로 고려 체관(諦觀)의 저술. <천태사교의>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천태학의 입문서로서는 물론, 불교개설서로도 널리 사용돼 왔고, 특히 일본에서는 가장 많은 주석서를 낼 정도로 아낌을 받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체관은 고려 광종(950~975) 때의 고승이었으나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다.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 538~597)의 대표적인 저술 3부작으로서,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을 일컫는다.

   천태(天台)의 교학에서는, 이론(敎)과 실천(觀)의 이른바 교관2문(敎觀二門)이 서로 합치될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참다운 불법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3부 중 <법화현의>와 <법화문구>의 2부는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이론적으로 해설한 교상문(敎相門)이며, <마하지관>은 <법화경>에 바탕을 둔 실천문(實踐門)을 역설하고 있다.


*천태종(天台宗)---천태란 중국에 있는 천태산에서 온 말로서 이곳에서 수행한 천태대사 지의(智?, 538~597)에 의해서 개창된 불교의 분파로서 화엄종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이다. 천태종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법화경)이며, 이들의 특성은 초목과 와력(瓦礫)에도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까지 전개했다.

   천태교학은 용수(龍樹)에 의해 발단돼 북제(北齊)의 혜문(慧文)과 그의 제자 혜사(慧思, 515~577)를 거쳐 수의 지의(智?)로 이어져 종파로 성립됐다. 혜문은 용수의<중론>과<대지도론(大智度論)>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어, 이때 깨우친 바를 제자들에게 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태종의 제1조는 바로 용수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계보상 천태종의 개조는 혜문(慧文)이고, 지의는 제3조라 한다. 이러한 기조에서 천태종이 출범하지만 실질적인 교의의 완성은<법화경>을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천태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 신라의 현광(玄光)은 지의에게 법을 전한 혜사(慧思)에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으며, 신라의 연광(緣光), 고구려의 파약(波若) 등은 직접 지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특히 고려 체관(諦觀)의 저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는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교종(敎宗)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天台宗)이 한국에서는 선종(禪宗)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됐다는 점이 해동 천태종의 특징이다.

   오늘날의 천태종은 1960년대에 성립된 신흥종단으로서 과거 중국에 있었던 천태종의 전통이 그대로 이식된 것은 아니다. 해방 후 삼척 출신의 상월원각(上月圓覺, 속명 朴準東)에 의해 소백산 구인사(救仁寺)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일반 사찰 법당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에 먼저 삼배를 드리는데 천태종 사찰에서는 조사스님 사진에 먼저 삼배를 드리고, 염불기도만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으며, 금강대학교와 금강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대중화에 대한 노력이 돋보이고, 자리이타의 보살사상을 이념의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제창하고 있다. 천태 사찰은 신도회를 중심으로 사원 운영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기복(祈福)불교에서 수복(修福)불교로

     둔세(遁世)불교에서 구세(救世)불교로

     산중(山中)불교에서 사회(社會)불교로

     관념(觀念)불교에서 실천(實踐)불교로

     소비(消費)불교에서 생산(生産)불교로


*청규(淸規)---총림(叢林)에서 쓰는 규칙. 당나라 백장 회해(百丈悔海, 720~814)선사가 천하의 총림에서 시행할 규칙을 만들고 청규라 했고, 그 뒤에는 여러 스님들이 각기 그 절에서 시행할 규칙을 마련하고 모두 청규라 했다. 곧 청정한 규칙이란 말이다.


*청량 징관(淸凉 澄觀 : 738~839)---중국 화엄종의 제4조. 청량 징관 선사가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돼 있으나 너무 방대하고 난삽한 점이 있다.


*청목(靑目/Pi?gala, 4세기 전반)---인도 출신의 논사로서 <중론(中論)>의 저자. 용수(龍樹)가 지은 449구의 간결한 게송인 <중송(中頌)>에 청목(靑目)이 주석을 달아서 논서인 중론(中論)을 저술했다.


*청신녀(淸信女)---우바이(優婆夷), 우파시카(upasika)를 한역한 것이다. 여자 재가 신도를 말하며, 근사녀(近事女)라고도 한다.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5세기 중엽에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간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이 팔리어 삼장에 대해 집필한 주석서이다. 붓다고사 스님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하나마왕(Mahanama. 406∼428) 시대의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상좌부 불교의 교리와 학설을 집대성한 붓다고사 스님의 저서 <청정도론(淸淨道論>은 오늘날까지도 남방 불교계의 가장 권위 있는 논서로 꼽히고 있다. <청정도론>은 상좌부 불교 교리의 집대성인 동시에 완전한 청정, 즉 열반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의 커다란 획으로 평가된다.---→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 참조.


*체관(諦觀, ?~970)---<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를 지은 고려 광종 무렵의 고승. 제관이라고도 한다. 고려 천태종(天台宗)의 의적(義寂)의 법(法)을 이어 받았고, 960년(광종 11) 송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공부하다가 사망했다. 자기가 지은 <천태사교의>를 상자에 간직해 두었는데 죽은 후 상자 속에서 빛이 비치므로 의적이 열어보니 <천태사교의>가 들어 있었다. 이로부터 널리 사방에 전파돼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했다.


*체관(諦觀)---사물의 본체를 충분히 꿰뚫어 봄, 또는 사물을 상세히 살펴본다는 말임.


*체징(體澄)---신라의 승려, 염거(廉居)의 제자. 도의(道義)의 손제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도의의 법을 배운 체징은 837년에 당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펼쳤다. 이로써 선종 9산의 일파인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됐다. 이렇게 해서 9산 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초기불교---초기에 부처님께서 생존 시에 직접 설법을 하신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는 Early Buddhism이다. 시기적으로는 석존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부터 100년 내지 200년까지의 대략 150년 내지 250년 동안의 불교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고 원음이 그대로 전해오던 시기이다. 초기불교는 원시불교라는 표현처럼 비하적인 의미도 없고, 근본불교처럼 교조적인 의미도 없으며, 부처님의 원음을 말하는 것이어서 현재 ‘초기불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근본불교 참조.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화엄경 법성게에 나오는 말이다.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맨 처음의 결심이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뜻. 처음 발심할 때, 초발심을 했을 때가 문득 정각이다, 이미 구경각을 이루었을 때라는 말, 처음 시작할 때 가진 마음가짐이 곧 부처의 마음이란 뜻이다. 그만큼 처음 결심했을 때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초선천(初禪天)---색계(色界)의 사선천(四禪天)의 첫째 하늘. 여기에 범중천(梵衆天) ? 범보천(梵輔天) ? 대범천(大梵天)이 있다.---→색계(色界) 참조.


*초전법륜(初轉法輪)---부처님이 행한 최초의 설법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Varanasi, 현재의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 미가다야/Migadaya, 현재 지명은 Sarnath)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을 만나 최초로 설법을 했음을 의미한다. 즉 최초로 법의 바퀴[법륜(法輪)]를 굴렸다는 말이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고려시대 최초로 조성된 대장경을 말한다. 고려에서는 현종 때 불력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중국 송나라판 대장경(개보판/開寶板)을 저본(底本)으로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목판대장경을 조성했다. 현종 2년(1011년)에 시작해 선종 4년(1087년)에 완성했는데, 이 대장경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던 것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불타버렸고, 현재 그 인쇄본 일부가 남아있다.


*초지보살(初地菩薩)---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10지(地)라 하는데,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가 있다. 이 10지 중 맨 처음이 환희지(歡喜地) 혹은 초지(初地)라 하는데, 이 초지를 닦는 보살이 초지보살이다.


*촉(觸, Samspars′a)---12연기법에 있어서 육입(六入)을 연해 촉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六根) 중의 신(身)이 그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신식(身識)이 생긴다고 했다. 이처럼 단순하게는 내 몸이 다른 그 무엇과 접촉함으로써 어떤 인식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내 피부에 다른 사람의 몸이 닿았을 때 좋다든지 싫다든지 하는 어떤 인식이 일어난다는 말인데, 이런 단순한 접촉이나 자극이 아니라 더 넓게는, 인식(認識) 성립의 원초적 형태이며 인식론적 경험의 현실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총림(叢林)---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우리나라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대 총림이 있다.


*총상염주(總相念住)---삼현(三賢)인 오정심관(五停心觀), 별상염주(別相念住), 총상염주(總相念住)의 하나. 신체와 느낌이나 감정과 마음과 현상은 모두 변하며, 괴로움이며, 공(空)이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주시하는 수행법이다.---→오정심관(五停心觀), 별상염주(別相念住) 참조.


*총주(總呪)---부처님의 공덕과 모든 착한 법을 갈무리하고 있어서,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뜻한바 모든 일이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주문이란 말이다. 즉, 악업의 때를 모조리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일이 순조로워지게 하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모든 불보살이 의지하는바 신령스러운 진언이란 말이다.


*총지(總持)---다라니(陀羅尼)를 의역해서 총지라고 한다. 부처의 말을 외어서 모든 법(法)을 가진다는 뜻.---→다라니 참조.


*총지종(總指宗)---비로자나불을 교주로 하고,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하는 밀교계통의 불교종파. 소의경전은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고려시대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없어졌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5년(665)에 혜통대사(惠通大師)가 처음 개종했으며, 우리나라 밀교(密敎)의 시초(始初)이다.


*총카파(Tsong?kha?pa, 宗喀巴, 1357~1419)---티베트 정통파 불교의 개혁자로서 현교와 밀교를 융합한 신교도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반야중관(般若中觀)사상을 기초로 해서 이를 밀교와 융화시킴으로써 티베트불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 결과 라마교 황교(黃敎)의 개조가 됐다. 그의 종파를 황모파(黃帽派:게룩파)라 하며, 그 전의 종파를 홍모파(紅帽派:닝마파)라고 한다.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총카파의 제자 중 겐둔그룹(1391∼1475)이 초대 달라이라마, 즉 법왕(法王)이 돼 현재 14대에 이르고 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며, ‘라마’는 덕이 높은 스승을 가리킨다. 티베트인은 자신의 국가를 관음의 정토라 생각하며, 그 통치자인 달라이라마를 관음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최상승선(最上乘禪)---“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지성(智性)을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으며, 이 마음이 부처와 결국에는 다르지 않음을 돈오(頓悟)하고서 이에 의지해 수행한다면, 이것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며,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며, 일행삼매(一行三昧)며, 진여삼매(眞如三昧)이다. 이것은 모든 삼매의 근본이므로, 생각 생각에 수습(修習)해 나아간다면, 점차 저절로 백 천 가지 온갖 삼매를 얻을 것이다. 달마(達磨) 문하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바로 이 선(禪)이다.”


*최상승심(最上乘心)이란---① <금강경(金剛經)>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에 나오는 말 - “수보리여, 간추려 말하건대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다. 이 경은 여래가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사람을 위해서 설한 것이요, 최상승심(最上乘心)을 발한 자를 위해서 설한 것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능히 수지하고 독송하며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면 여래가 이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알고, 다 보고 있어서 모두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도 없으며 끝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소법(小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해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해설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이 경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일체 세간의 천(天)과 인(人), 아수라(阿修羅)가 마땅히 공양할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즉 탑이 돼 모두 공경해 예배드리며 모든 꽃과 향을 그 속에 뿌리게 되리라.”


   ②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 나오는 말 - “ 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의 뜻은 어떠합니까? 대승이란 보살승(菩薩乘)이요, 최상승이란 불승(佛乘)이니라. 어떻게 닦아야 이 승(乘)을 얻습니까? 보살승을 닦음이 대승이니 보살승을 증득하여 다시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닦을 곳이 없음에 이르러 담연히 항상 고요하여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이 최상승이니 곧 이것이 불승이니라.”


   ③ 육조(六祖) 혜능선사의 삼승(三乘)에 대한 말씀 - 어떤 학인이 육조에게 “부처님이 삼승법을 설하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셨는데, 제가 이것을 모르겠으니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라고 했다. 삼승(三乘)은 소승(小乘), 중승(中乘), 대승(大乘)이다. 이에 대해 육조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보고 듣고 읽고 외우고 하는 것[見憫誦]은 소승이고, 법을 깨달아서 뜻을 아는 것[悟法解義]은 중승이고, 깨달은 법에 의해 닦고 행하는 것[依法修行]은 대승이다. 그리고 생각 생각이 머무는 데가 없으면[염념무주(念念無住)] 그것이 최상승이다. 자기 본성 자리를 보아서 만법이 다 통하고 만행이 다 구비해서 일체를 꺼리지 않는다. 경계를 보면서도 보는 상[견상(見相)]을 모두 여읜다.”

   간단하고 쉽고 분명한 말씀이다. 소승은 범부들이 하는 것이고, 중승은 중등 근기가 하는 것이고, 대승은 보살같이 근기가 높은 이들이 하는 것이다. 그 위에 최상승이란 삼승을 훨씬 뛰어넘는 상근기를 말함이다. 견성을 해서 만법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은 버리고 저것은 취하고 그럴 일이 없는 것이 최상승이다. 육조의 말씀이다.


*추선(追善)---죽은 사람의 기일(忌日)에 불사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사상으로 보자면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지만 인과가 삼세에 걸쳐 이루어지는 까닭에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일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축법도(竺法度)---5세기 남북조시대 주로 송(宋)에서 활약한 역경승. 담마야사(曇摩耶舍)의 제자이다. 그는 인도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났고, 범어(梵語)와 중국어를 잘해 번역 사업에 종사했다. 축법도는 소승만이 부처님의 진짜 교설이라 해서, 그는 “오로지 소승(小乘)을 배워야 한다. 대승경전을 읽는 것을 금한다. 오직 석가만을 예불하라.”고 했다.


*축법란(竺法蘭)---중국 후한(後漢)의 효명제(孝明帝; 58~75재위)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에 불교를 전한 대월지국(大月氏國) 출신의 역경승이다. 67년 가섭마등(迦葉摩騰)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와서 중국 최초의 절로 건축된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며 포교에 힘쓰는 한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 5부의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한역 경전이다.


*축법아(竺法雅)---4세기 전반 서진(西晋) 말엽에 활동한 인도 출신 승려로 그는 풍부한 중국고전의 교양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격의불교(格義佛敎)를 주장했다.


*축법호(竺法護, 231~308)---월지국의 후예로서 돈황(燉煌)에서 출생했으며, 8세에 출가했고, 서역을 순례하고 왔다. 그 후 돈황에서 장안으로 들어가 265년부터 308년 78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40년간을 오로지 역경에만 종사해 <광찬반야경>, <정법화경>, <무량청정평등각경> 등 모두 154부 309권을 번역함으로써 중국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축법호가 산스크리트어와 서역어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관음(觀音)’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가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번역한 이후의 일이다.


*춘다(純陀, Cunda)---본명은 춘다-캄마라푸타(Cunda-Kammraputta), 음역해서 순타(純陀)라고 한다. 파바성(베살리성)에 살던 대장장이의 아들로 열렬한 불교신자였으며, 부처님에게 마지막 공양을 한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파바마을에 도착하시어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소유하고 있는 망고동산에 머무셨는데 거기서 춘다가 바친 버섯요리를 드신 후 식중독으로 열반에 드시게 됐다.


*춘성(春城, 1891~1977년)---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통리 출신. 은사는 한용운이다.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고, 문인이다. 거침없는 육두문자와 풍자를 해서 불교계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했다. 그는 기독교 광신도들을 조롱해 "한번 죽었다 살아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내 좆은 골백번 죽었다가 부활했으니 내 좆을 믿으면 구원 받지 않겠느냐"라고 했고, 경찰서에 끌려가서 “내 고향은 우리 엄마 보지이고, 본적지는 우리 아버지 자지이다.”라고 한 풍자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가의 종류

     ? 육친출가(肉親出家) - 가족과의 세속적 인연을 끊는 것.

     ? 오온출가(五蘊出家) - 일체의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떠남을 의미함.

     ? 법계출가(法界出家) - 번뇌와 업보, 무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출리심(出離心)---고(苦)가 구역질나도록 싫어서 고(苦)로부터 떠난다는 뜻. 염리심(厭離心)과 같은 말.---→염리심 참조.


*출세간(出世間, lokuttara)---생멸 변화하는 미혹한 세계를 벗어나 해탈 경계에 들어가는 것. 세속의 번뇌를 떠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    


*출세인(出世人)---“어떤 사람이 죽으려 할 때 오온(五蘊)이 공(空)한 것이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四大)로 된 몸도 내가 아니라고 관하라. 그리고 진심(眞心)은 모습이 없는 것이고 가고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출생할 때 성품이 온 것이 아니고 사망할 때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잠연(湛然)하고 원만해 고요한 마음에는 경계가 동일한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것을 깨달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구속됨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출세인(出世人)이라 하는 것이다.”  ※잠연(湛然 - 고요히 고임, 물이 깊고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음)


*출정후어(出定後語)---일본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1715∼1746)가 지어 1744년에 발간한 불교서적. 이 책에서 불경을 문헌학적으로 비평해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했다.

   대승경전은 불멸한 지 500년 뒤에 차례로 만들어진 것으로 결코 불설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의 가탁(假託)이라 주장함으로써 엄청난 문제제기를 했다.

 

*취(取, Upa-da-n.a)---12연기법에서 애(愛)를 연해 일어나는 취, 취득해 병합(倂合)하는 작용을 말한다. 애(愛)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취(取)는 보통 범부들이 인식하는 것을 취라고 하는데 집착의 뜻이 들어 있다. 취(取) - 촉에서 발생한 오온가운데서 갈애의 대상을 취착하는 의식이다.

 

*츄라판타카(周利槃特)---→주리반타가(周梨槃陀迦)와 동일 인물.---→주리반타가 참조.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七星信仰)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북극성(北極星)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 북극성은 절대불변의 진리, 우주의 중심 등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熾盛光)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의 재래 민간신앙을 흡수한 예로, 다른 나라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찰에서는 다른 불상처럼 조각상으로 꾸민 예는 드물고, 칠성각 또는 삼성각에 후불탱화로 모신다.---→칠성각 참조.


*치의(緇衣)---스님의 옷. 인도 사람들은 흰색을 숭상해 승려를 제외한 일반인들은 모두 흰 옷을 입기에 출가하지 않고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백의라고 하고, 이와 대응해 사문(沙門), 즉 출가한 사람의 옷을 치의(緇衣, 검은 물들인 옷) 혹은 염의(染衣, 물감을 들인 천으로 지은 옷)라고 한다.


*7각지(七覺支, 산스크리트어 sapta-bodhy-a?ga)---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며,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일곱 가지의 수행 방법을 말한다. 37조도품에 포함된다.

      1) 택법각지(擇法覺支) - 진실 된 것을 선택하고 거짓된 것을 버리는 것, 지혜로써 바른 가르침만을 선택하고 그릇된 가르침은 버림.

      2) 정진각지(精進覺支) - 불법 수행에 일심(一心)으로 정진하는 것,

      3) 희각지(喜覺支) -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기쁨,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평온한 기쁨이 생기는 것.

      4) 경안각지(輕安覺支) - 몸과 마음을 가볍고 쾌적하게 하는 것, 평온한 기쁨이 생긴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경쾌해짐.

      5) 사각지(捨覺支) - 온갖 집착을 버리는 것, 집중 ? 통일된 마음을 평등하게 잘 응시함.

      6) 정각지(定覺支) - 마음을 집중해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7) 염각지(念覺支) - 정혜(定慧)를 잊지 않는 것. 가르침을 명심하여 마음챙김.


*칠견(七見)---7가지 잘못된 견해.

      1) 사견(邪見) - 선악, 인과, 윤리를 부정함. 사악한 견해.

      2) 아견(我見) -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 아집이 있는 견해.

      3) 상견(常見) - 몸과 마음이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4) 단견(斷見) - 세간(世間)과 자아는 사후에 없어진다는 견해. 즉 유정(有情)의 신심(身心)은 일기(一期)에 한정돼 단절한다고 보는 견해.

      5) 계도견(戒盜見) - 잘못된 계에 집착하는 견해.

      6) 과도견(果盜見) - 그릇된 행위로 얻은 결과를 바른 것이라 하는 견해.

      7) 의견(疑見) - 바른 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잘못된 견해.

   중생은 이 7견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점점 멀어진다.


*7관음은(七觀音)---관음보살은 자유로이 몸을 여러 가지모습으로 바꿀 수 있어서 다양한 변화관음들이 성립되는데, 6관음, 7관음, 33관음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칠관음은 성관음(聖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提觀音)을 말하는데 이들은 각기 그 표현되는 모습이 다르다.


*칠만(七慢)---일곱 가지 자만하는 것을 말함. <구사론(俱舍論)>에 나오는 말.

       1) 만(慢) - 못한 것을 보고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2) 과만(過慢) - 같은 것을 보고도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

       3) 만과만(慢過慢) - 잘하는 것을 보고도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4) 아만(我慢) - 내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5) 증상만(增上慢) -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우쭐대는 것.

       6) 비하만(卑下慢) - 남보다 훨씬 못한 것을 자기는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7) 사만(邪慢) - 아무 덕(德)이 없으면서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7부대중(七部大衆)---4부대중(四部大衆)에 + 아래의 세 가지를 포함한 것.

     - 사미---20세 이전의 나이로 사미 10계를 받은 남자스님

     - 사미니--- 20세 이전의 나이로 사미니계를 받은 여자스님

     - 식차마나---사미니로서 비구니에 이르는 2년 동안 특별수행을 받는 예비 비구니. 보통           18세∼20세의 2년간, 정학녀(淨學女)라고도 한다.

         ※4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칠불통계(七佛通戒)---부처님은 석가모니 이전에도 여섯 분이 있었고 석가모니는 일곱 번째 부처님이신데 과거칠불이란 이 부처들을 일컫고, 칠불통계란 이 일곱 부처의 공통된 훈계라는 뜻으로 불변하는 진리라 하겠다. 이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상징하며, 어느 한곳이나 한때에 그치지 않고 동서고금을 통해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불변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계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제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불교니라.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法]”라는 것이다.


*칠성각(七星閣)---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 그리고 보통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를 함께 모신다. 칠성각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나라 절에만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천과 하늘을 숭배했다. 칠성각의 존재는 이런 토착 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데, 사찰에서의 그 역할은 수명장수, 자손번창,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믿음에 바탕을 두며 가람 수호의 기능까지 맡는다.---→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참조.


*칠청정(七淸淨)---청정(visuddhi)에 대한 일곱 가지의 주제를 말함. 초기경전인 중부아함(맛지마니까야)의 제24경이 역마차경(驛馬車經)(Rathaviniitasutta)인데 거기에 실려 있으며, 지혜 제일 사리불존자와 설법 제일 부루나존자의 대화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왕이 다른 지역으로 갈 때 일곱 대의 역마차를 갈아타고 그곳에 당도하는 것에 비유해서 7청정이 설해져 있으며, 유명한 <청정도론(淸淨道論)> 저술의 배경이기도 한데, 초기불교의 수행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경이다. 7청정은 아래와 같다.

     ① 계 청정(戒淸淨)  ② 마음 청정(心淸淨)  ③ 견 청정(見淸淨)

     ④ 의심을 제거함에 의한 청정(渡疑淸淨)  ⑤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견청정(知見淸淨)

     ⑥ 도 닦음에 대한 지견청정(知見淸淨)  ⑦ 지와 견에 의한 청정(知見淸淨)

   여기서 순서에 따라, 계의 청정은 마음의 청정을 위해서, 마음의 청정은 견청정을 위해서, 견청정은 의심을 제거하는 청정을 위해서, 의심을 제거하는 청정은 도와 도가 아님을 지견하는 청정을 위해서, 도와 도가 아님을 지견하는 청정은 도 닦음의 청정을 위해서, 도 닦음의 청정은 지견의 청정을 위해서, 지견의 청정은 취착이 없는 완전한 열반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결국 7청정은 완전한 열반을 위해서 닦는 수행이란 말이다. 


*칭명염불(稱名念佛)---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 불교의 정토신앙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것을 칭명이라고 하고, 아미타불을 간절한 마음으로 상기하는 염불은 번뇌를 방지하기 위한 대중적인 신앙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염불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부처님을 기억 또는 상기하는 것이며, 부처님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염불이다.

   <아미타경>에서 설하는 바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이름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해 한 가지로 통일시키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죽은 후에 아미타불의 세계인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후의 왕생은 차후의 문제이고 마음이 통일된 그 자체로 이미 왕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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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슈카(Kaniska)왕---고대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의 북부와 서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토로 했던 쿠샨 제국(대월지국/大月氏國)의 대왕. 왕의 즉위 연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나 AD 2세기 중엽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를 보호한 왕으로서 특히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지방에서 네 번째 경전 편찬회의가 열렸다. 다만 제4결집은 삼장(三藏)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 때문에 제4결집에서 경. 율. 논장의 주석서(註釋書) 30만송(頌) 660만언(言)의 대주석서(註釋書)를 만들었다. 후에 이때의 주석서에 덧붙여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200권으로 집대성됐다.

   한편 왕의 통치시대에 간다라(Gandh?ra) 미술과 마투라(Mathur?) 미술이 번영해 왕의 불교 예술에의 기여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교외에는 카니슈카 대탑지와 사리용기(페샤와르 박물관소장)가 발견됐다.


*카일라스(Kailash)산---티베트의 서쪽 지역에 있으며, 신령한 산으로 추앙받고 있다. 불교, 힌두교, 자이냐교와 티베트의 토착 종교인 본(Bon)교가 모두 경배하는 곳이다. 카일라스 산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은 아니지만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봉우리가 주변의 산들 사이로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의 높이는 6,638m이다.

   카일라스 산과 굴라만다타 산의 봉우리 사이에는 성호(聖湖, 마나사로바 호수)와 귀호(鬼湖, 락샤스탈 호)가 있다. 마나사로바 호수는 담수호인데 비해 락샤스탈 호수는 염호이다. 수 세기 동안 순례자들은 정기적으로 이 산을 돌며 고행을 했는데, 평생의 업보를 지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카일라스 순례과정에는 반드시 마나사로바 호수를 도는 의식과 딜타푸리 온천 방문이 들어간다. 티베트 사람들은 카일라스 산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수미산(須彌山, Sumeru, Mount)이라 일컫는 곳이다.---→마나사로바(Manasarovar)호수 참조.


*카트야야니푸트라(Katyayaniputra, 迦多衍尼子)---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의 비구로서 아비달마인 <발지론(發智論)>를 썼다. 발지론은 아비달마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그는 이 발지론에서 설일체유부 학설 전반에 걸쳐 조직적인 논술을 했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은 이 <발지론>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이기도 하다.---→발지론 참조.


*카필라밧투(가비라성, 迦毘羅城, Kapilavastu)---히말라야의 기슭에 있던 나라. 현재 네팔 영토의 동쪽, 인도와 국경을 맞대는 곳이며, 석가족이 다스리는 조그마한 부족국가였다. 기원전 6세기 초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숫도다나(정반왕, Suddhodana)왕이었고, 왕비는 마하마야(마야부인, Mahamay)였다. 이들 사이에서 석가세존이 태어났다. 성씨는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칼리유가(Kali-yuga)---고대 인도에서의 신화적 시대구분의 명칭. ‘말세(末世)’라는 말에 해당한다. 고대 인도의 시대구분(유가)에는 4개의 구분(유가)이 있어, 정법(正法)과 진실을 완전히 갖춘 황금시대를 크리타 유가(krta-yuga 혹은 Satya Yuga)라 하고, 트레타 유가(tret?-yaga)와 드바파라 유가(dv?para-yuga) 시대를 지나 마지막 칼리유가(kali-yuga)에 이르러서는, 정법과 진실이 크리타 유가의 1/4에 불과하게 되는 암흑시대라는 것이다.


*쿠시나가라(Ku?inagara, 拘尸那揭羅/구시나갈라)---부처님이 열반한 곳. 인도 힌두스탄 평야에 있는 지금의 카시아(Kasia) 지방이다.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외딴 곳으로서 당시는 마라족(族)이 살았다. 부처님께서 그곳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열반에 들어간 후 화장(火葬)한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 생애와 관련되는 4대 성지의 하나이다. 현재 5세기경의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열반상을 안치한 열반당(涅槃堂)이 있다.


*쿤달리니(Kundalini)---쿤달리니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쿤달리니’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쿤달(Kundal)’, 즉 “감겨 있는-코일(coiled)”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똬리를 틀고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뱀의 모양으로 상징되고 있다. 뱀과 쿤달리니의 유사성은 그 움직임, 즉 나선형(螺旋形)으로 똬리를 튼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척추 기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이나 용수철과 같은 똬리의 이미지는 개발되지 않은 잠재 에너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쿤달리니는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영혼이나 리비도(libido)적인 에너지의 풍부한 원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쿤달리니는 호기(呼氣-날숨)와 흡기(吸氣-들숨)를 이용해 인체 내의 모든 생명체들을 유지시킨다.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니까야 5부 중 하나. 다른 4부에 들지 않은 나머지 경들을 모은 것으로, 이 쿳다까 니까야 안에는 법구경, 자설경, 본생경, 수타니파타(경집/經集), 장로게(長老偈) 등 15개의 소경이 들어있다. 이 쿳다까 니까야는 한역 4아함(阿含)에는 없다.---→‘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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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Tara, 多羅)보살---‘타라’는 산스크리트어 이름이고 티베트어로는 ‘돌마’라고 하며, 돌마는 티베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여성 보살이고, 티베트에서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이기도 하다. ‘타라’라는 명칭은 “얽매임으로부터 풀려난 여성”을 뜻한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이 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연못을 이루고, 그 연못에서 연꽃이 한 송이 피어났는데 그 연꽃 속에서 태어난 것이 타라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도록’ 도와주는 자비와 구원의 보살이다. 이 보살은 깨달음을 향한 정신적 여행의 수호자인 동시에 해로(海路)와 육로(陸路) 여행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불교는 원래 자신의 힘으로 수행해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려는 철저한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종교였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하면서 보편적인 구원의 이념에서 부처와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타력구원(他力救援)의 사상으로 전환됐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토사상(淨土思想)이다.

   이것은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法燈明自燈明)”는 석가모니의 유언과는 분명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력에 의해 구원되는 경지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중생이 모두 자력으로 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타력신앙은 '자리(自利)가 곧 이타(利他)'라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성장한 대승불교의 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인도에서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의 발생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착안해 타력본원(他力本願)설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중국의 정토사상가인 담란(曇鸞:476~542)이었다.

   담란은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타력으로 왕생(往生)과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와 보살도(菩薩道) 세 가지를 완성한다는 타력본원설을 주장했다. 모두 아미타불의 대원(大願)의 작용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타력의 본원을 단적으로 잘 말해 준다. 불보살의 이타적 구원의 원력에 의지한다. 이러한 부처의 본원설의 사상적 기반이 된 불경은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이다. 그리고 자력구원(自力救援)의 대표적인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면 타력본원(他力本願)의 대표적인 부처님은 아미타불이다.


*타력신앙(他力信仰)---자신의 힘이 아닌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신)에 의지하는 신앙을 타력신앙 혹은 타력종교라 한다. 대표적인 타력신앙이 기독교, 그리고 굿, 점과 같은 주술, 대승불교의 정토종 등이다.


*타심통(他心通)---육신통의 하나. 타심통이란 남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을 말한다. 깊은 선정을 이해하는 수행자는 일정한 단계에 가면 자신의 고정된 의식을 비우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 혼령, 자연의 정령과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육신통 참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욕계 6도 중 최상이 천도(天道)인데, 그 천도 육천(六天) 중 가장 높은(좋은) 제6천이 타화자재천이다. ‘타화천(他化天)’이라고도 하며, 욕계의 가장 높은 하늘이다. 이곳에서는 남의 즐거움도 자신의 즐거움으로 변화시켜 그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타화락천(他化樂天)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성욕이 만족하고, 아들을 낳으려는 생각만 내면 아들이 무릎 위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 타화자재천의 우두머리가 파순(波旬)이라는 마왕(魔王)이다.---→파순(波旬) 참조. 


*탁발(托鉢)---도를 닦는 승려가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동냥하는 일을 말한다. 가장 간단한 생활을 표방하는 동시에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해서 부처 당시부터 행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우리나라엔 탁발하는 승려를 볼 수가 없다. - 비슷한 말 - 행걸(行乞).


*탄트라(Tantra, 딴뜨라, 密法)---밀교를 영어권에서는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라 한다. 여기서 ‘탄트라’는 힌두교의 성력(性力) 숭배에서 나온 말로 남녀의 합일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남녀의 성력을 숭배하는 밀교는 티베트의 좌도밀교(左道密敎)이다.

   좌도밀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시하고 인간의 본능을 긍정해 남녀간의 합일에 의한 최고의 경지를 지향한다. 지혜(여성)와 방편(남성)의 혼합, 즉 남녀 간의 교합을 큰 기쁨이 넘치는 경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는 진언승(眞言乘)과 대비된다고 해 금강승(金剛乘)이라 한다.

     ※참고---티베트의 우도밀교(右道密敎)는 <대일경>에 의거해 온전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데, 진언에 의거해 대일여래와 합일을 추구하기 때문에 진언승이라 한다. 


*탐 ? 진 ? 치(貪瞋癡)---탐욕(貪欲)과 진에(瞋?)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화내는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심(三毒心)이라고도 한다.


*탑파(塔婆)---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세운 불가의 독특한 건축물로서 속칭 탑(塔)이라 하며,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Stupa라 하고, 팔리어 Thupa의 소리번역(음사/音寫)이다. 그런데 불교의 역사적 전개와 교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부처님 사리 이외에 부처님 유물 내지는 부처님 법문인 법사리(法舍利)의 숭배 목적으로 쌓아 올린 건물을 지제(支提?Chaitya)라 했는데, 이것까지도 중국에 와서는 함께 탑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즉 지제란 사리를 넣지 않고 기념될만한 장소 혹은 다라니와 같은 법문을 넣어서 세운 탑을 산스크리트어로 챠이티야(caitya)라 불렀고, 한역해서 지제(支提)라 했는데, 이것 역시 사리탑과 함께 탑이라 지칭했다는 말이다. 

   또 거기다가 승려의 사리를 봉치(封置)한 것까지도 넓은 의미로 탑파라 부르게 됐다. 이러한 탑은 불가의 신앙을 상징하는 표치(標幟)이자 기념물로 숭상됐다. 중국에는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우리나라엔 석탑, 일본엔 목탑이 발달했다. 

                      

*탕카(Thanka)---티베트어로서 탱화를 뜻한다. 라마교 사원의 벽이나 본당의 정면에 걸어 승려와 신도들의 일상 예배에 사용하는 탱화. 10세기경에 티베트에서 처음으로 그려졌고, 현존하는 것은 17~19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다. 탕가는 그 형식에 따라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1) 만다라 형식을 취한 것. 2) 존상을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 3) 그냥 다수의 존상을 그린 것. 4) 붓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것 등이 있다.


*태고종(太古宗)---대처승들이 1970년 박대륜(朴大輪)을 종정(宗正)으로 해서 발족한 불교 종파. 고려 말 불교를 원융회통의 정신으로 통일한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통불교(通佛敎) 전통을 계승한 종단으로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일제시대 대처승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불교 유습의 흔적이 많다. 기이하게도 비구 승단인 조계종에서도 중흥조로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을 모신다.


*태생학적연기설(胎生學的緣起說)---삼세양중인과설이 태내 오위설(胎內五位說) 등과 결합해 태생학적 연기관을 낳았다. 태내 오위설이란 사람이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 즉 모태에서 자라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설명이다. 그러니까 12연기를 사람이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태어나서 죽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해석이 태생학적 연기설이다.


*태장계(胎藏界, garbha-dhtu)---→금강계(金剛界, vajra-dhtu)와 태장계(胎藏界, garbha-dhtu) 참조.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태장계 만다라는 법신여래의 본체를 어머니 뱃속의 태(胎)에 비유해 도형화한 것이다. 태장계 밀교는 대일여래의 이성(理性)을 어머니 뱃속의 5장 6부 외에 아이를 키우고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태에 비유해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영원한 깨달음[본각(本覺)]을 그림으로 도형화한 것이다.

   태장계 만다라는 본래 태아의 9가지 단계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한 것이었으나 후에 섹스를 형상화한 춘화(春畵)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본래의 밀교 만다라는 불법 진리를 설명하는 도형화이고 그림이었는데 마치 춘화인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대일경(大日經)>이 태장계 만다라가 성립하는 사상적 근거가 됐다.


*태장계(胎藏界, garbha-dhtu)와 금강계(金剛界, vajra-dhtu)---태장계와 금강계는 밀교의 2대 교의(敎義)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본래 불성(佛性)인 ‘이(理)’와 번뇌를 깨뜨리는 ‘지(智)’의 양면이 있듯이 그것 그대로 대일여래에게도 ‘이’와 ‘지’의 양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자를 이법신(理法身)의 대일여래 또는 태장계, 후자를 지법신(智法身)의 대일여래 또는 금강계라고 한다.

   밀교에서는 우주 전체를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현현(顯現=나타남)이라고 하는데, 대일여래의 이성(理性=본래 가지고 있는 영원한 깨달음의 본질)을 나타내는 쪽을 태장계, 지덕(智德)을 나타내는 쪽을 금강계라 말한다.

   태장계는 대일여래를 자비의 측면에서 설한 것이다. 마치 태아(胎兒)가 모태(母胎)에서 보호 양육되는 것과 같이, 대비(大悲)에 의해 깨달음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뜻에서 태장(胎藏)이라 한다. 그리고 태장계는 여래(如來)의 ‘이(理)’, 즉 이성이 모든 중생 가운데 포함 ? 내장돼 있다고 하는 밀교의 세계상(世界像)을 말한다.

   그리고 금강계는 밀교의 본질인 대일여래의 지덕이라는 측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금강’은 견고함을 의미하는데 대일여래의 지덕은 견고해 그 어떤 번뇌라도 모두 부셔버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태장계는 <대일경(大日經)>, 금강계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의 설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보통 그림으로 도형화된 만다라로 표현된다. 역사적으로 태장계는 반야(般若) ? 중관(中觀)사상, 금강계는 유가행 유식학(瑜伽行唯識學)의 발전으로 생각된다.  


*탱화(幀畵)---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를 만들어서 걸게 돼 있는 불화(佛?)의 한 유형. 그냥 줄여서 ‘탱(幀)’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사찰은 어디든지 신앙대상으로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뒤에 탱화가 걸려 있게 마련인데 일본이나 중국 등지의 사찰에는 이와 같은 탱화가 없다.


*테라와다(Theravada, 上座部)---불멸 100여년이 지나고 계율 문제로 근본분열이 일어났을 당시에 전통을 고수하려던 장로들의 모임을 테라와다[상좌부(上座部)]라 했다. 대중부와 더불어 소승불교의 2대 부문이었다. 이들 상좌부 불교를 테라와다불교라 하는데, 현재의 남방불교이다.


*통교(通敎) 10지(地)---십지는 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말하는데,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와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위까지의 10지가 있다. 천태종의 통교 10지와 화엄종의 10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천태종의 경우, 통교란 천태종 교판(敎判)인 화법사교(化法四敎)에 나오는 말로서, 성문 ? 연각 ? 보살에게 공통되는 가르침을 말하며, 이에 아래와 같은 통교 10지(地)가 있다.

     1) 건혜지(乾慧地) - 지혜는 있지만 아직 선정(禪定)의 물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 경지.

     2) 성지(性地) -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며 지혜와 선정이 함께 하는 경지.

     3) 팔인지(八人地) - 팔인(八人)은 팔인(八忍)과 같음. 곧, 욕계의 사제(四諦)와 색계 ? 무색계의 사제를 명료하게 주시해 그것에 대한 미혹을 끊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경지.

     4) 견지(見地) -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어 다시 범부의 상태로 후퇴하지 않는 경지.

     5) 박지(薄地) -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경지.

     6) 이욕지(離欲地) -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경지.

     7) 이작지(已作地) -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경지.

     8) 벽지불지(?支佛地) - 스승 없이 홀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주시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경지.

     9) 보살지(菩薩地) - 보살이 처음 발심해 깨달음을 이루기 전까지의 수행 과정.

     10) 불지(佛地)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부처의 경지.---→화엄 십지(華嚴 10地), 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통달위(通達位)---유식설(唯識說)에서, 수행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도 5위(修道5位) 중의 셋째 단계.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이치를 체득하는 단계. 즉,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우주의 진리를 체득하는 단계이다.---→오위(五位) 참조.


*통불교(通佛敎)---한국불교는 통칭 통불교 혹은 회통불교(會通佛敎)라 한다. 한국에는 불교의 모든 게 있기 때문이다. 즉 참선으로 대표되는 선(禪)과 강학(講學)으로 대표되는 교(敎)를 아우를 뿐 아니라 밀교적인 수행법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처럼 중국이나 일본불교처럼 어느 한 경전을 중심으로 종파를 형성해서 그것만을 신봉하고 다른 경전과 신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의 틀 속에 조화시켜 불교 전체에 통하는 교리를 추구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이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의 불교를 원천불교라 하고, 각 분파가 생겨난 중국의 불교를 종파불교라고 할 때, 우리나라 불교는 어느 한 종파나 경전에 국한하지 아니하고 여러 불교사상을 종합했으므로 통불교 혹은 회통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함은 물론 <화엄경>에서 일컫는 조화와 융화의 원리가 작용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특수성을 함의하고 있다. 그리고 화엄에 기반을 둔 통불교의 틀을 다지고 발전시킨 인물이 원효(元曉)대사이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한국의 불교사상으로는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교관겸수(敎觀兼修), 정혜쌍수(定慧思想) 등이 있다.


*통인(通印)---부처의 수인 중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시무외인(施無畏印) 참조.


*통저탈(桶底脫)---몸과 마음이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을 물통의 밑이 빠짐에 비유한 말이다. 주로 깨닫는 순간을 통저탈이라 표현한다.


*퇴마사(退魔師)---악마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물리쳐서 원한을 품은 혼령들의 한을 풀어줘서 성불하게 해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사람을 일컫는다. 퇴마사의 목적은 세상의 원한을 품은 혼령들과 악귀들을 성불케 해서 중간계(中間界)와 영계(靈界) 사이의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모든 영혼을 영계로 보내는 것이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인 셈이다.


*티베트불교(Tibetan Buddhism)---라마교(喇?敎/Lamaism)라고도 한다. 손챈감포왕(松贊岡保, ?~649) 때 중국 문성공주와 브리쿠티 데비 두 왕비가 중국계와 인도계의 불교를 도입했다. 이들 불교는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를 배척하지 않고 혼합된 형태를 지니고 토착화해 갔다. 그 후 8세기 중엽, 인도의 파드마 삼바바(蓮華上座師/Padmasambhava)와 샨티 락시타(shantiraksita, 寂護, 티베트 이름은 시바쏘, 700~762)가 밀교(密敎)를 전한 뒤부터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탄트라불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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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삼바바(蓮華上座師, Padmasambhava)---8세기 인도의 종교가. 인도 우디야나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출가해 나란타 불교대학에서 전통 불교를 전수받았고, 오늘날의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여러 스승을 따라 수행했다. 인도 밀교(密敎)의 석학(碩學)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 747년 티베트의 티송데첸왕의 요청으로 티베트에 입국해 티베트 불교의 대성인으로 추앙됐고, 티베트 탄트라불교(밀교) 개조(開祖)가 됐다.

   티베트 밀교 역사상 최고의 성인으로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문수보살, 금강수보살, 관음보살 세 존자가 합일한 화신으로 믿고 있다. 또는 제2의 붓다라고 칭하기도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뛰어난 비밀 교법을 여럿 남겼는데, 이것들을 주로 바위틈이나 동굴 등에 숨겨놓았다. 교법을 통한 깨달음에는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그때까지 경전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숨겨진 경전을 ‘복장’이라 하고, ‘테르퇸(티베트어로 보물을 찾아내는 자라는 뜻)’이라 불리는 전문 발굴자가 시기에 맞게 경전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파드마삼바바의 경전 중 가장 잘 알려진 <티베트 사자의 서>는 14세기에 카르마 링파에 의해 처음 발굴됐고, 티베트 일대 국가에 전파됐다가 20세기 초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에반스 웬츠(Evans Wentz)에 의해 서구사회에 소개됐다. 이 비밀의 경전을 접한 심리학자 카를 융은 ‘가장 차원 높은 정신의 과학’이라고 극찬하며 직접 장문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완전하고 순수한 법력으로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는 여전히 티베트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파사닉왕(波斯匿王, 프라세나지트, 파세나티, Prasenajit)---석존 생존 당시 중인도 사위국(舍衛國, 코살라국)왕으로 부처님의 제자였다. 왕비는 말리부인(末利夫人)이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왕녀가 아유타국(阿踰他國)의 우칭왕(友稱王)에게 출가해 유명한 승만(勝?)부인으로 불리었으며, <승만경(勝?經)>의 주인공이다. 사위성(舍衛城)은 코살라국의 수도인데, 원명이 시라바스티(혹은 슈가바스티)로서 신라 서울을 서라벌이라 한 것은 바로 이 시라바스티를 음사(音寫)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사위국 재상이 아나타핀디카(급고독, 給孤獨, 須達多, sudatta) 장자로서 그는 마가다국의 제타태자(기타태자, 祇陀太子)와 더불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께 바쳤다.


*파사현정(破邪顯正)---삿된 것을 파하고, 올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말. 부처님 이후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용수(龍樹) 보살께서 <중론(中論)>을 지으심에 그 핵심을 ‘삿된 것을 파해 올바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에 두었다.


*파상론(破相論)---일명 ‘관심론(觀心論)’이라고도 한다. 종래는 보리 달마(菩提達磨)의 저술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대통 신수(大通神秀)의 저술임이 밝혀졌다.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것이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무심(無心)에 이르는 길이고, 집착을 놓는 일, 방하착(放下着)의 길이며, 나아가 본성을 살피는 길이기 때문이다.


*파순(波旬)---산스크리트어 파피야스(papiyas)의 음사이고, 악한 자 혹은 살인자라 번역하는 마왕(魔王)이다. 파피야스는 붓다와 그의 제자들의 수행을 방해한 마왕으로서 욕계에 속하는 천상 중에서 최고의 곳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우두머리인 왕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 천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상계로 오욕락이 충만한 행복의 세계이다. 거기서 그는 스스로를 우주의 창조자라고 착각을 하면서 세상을 자신의 지배권에 넣으려 한다.

   그는 중생들을 욕망의 세계로 이끌어 감각적 쾌락에 빠지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 특이한 점은 악마 파피야스는 인간들이 욕망에 의해 행복을 누리는 삶을 크게 기뻐한다. 반면에 부처님과 같이 오욕락(五慾樂)을 벗어난 해탈의 삶을 사는 모습을 극히 싫어한다. 파피야스는 인간들을 오욕락에 빠져 타락의 길을 걷게만 할뿐 인간을 직접적으로 괴롭히거나 죄를 짓도록 유도하지는 않는다.


*판도방(判道房)---고승들이 거처하는 큰방의 둘레에 있는 절간의 작은 방.

 

*판치생모(板齒生毛)---조주(趙州)선사(778~897)의 유명한 화두의 하나로서 달마대사의 별명이 ‘판치노한(板齒老漢)’이고, 판치는 판대기 모양의 앞니를 말하는데, 달마대사는 앞니가 없었다고 하며, 120살까지 장수한 조주선사도 살아가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치아부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께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으로 온 뜻입니까?” 이 말은 달마조사가 서쪽(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뜻이다.

   이에 조주선가 답한 것이 “판치생모(板齒生毛)”이다. 헌데 있지도 않는 달마의 앞니에서 털이 나오다니, 그 도리가 무엇인지? 바로 그 의문을 깨치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란 <판치생모>, 즉 언어도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음을 뜻한다.---→조주 종심(趙州從?, 778~897) 참조.


*팔각(八覺)---온갖 번뇌를 끌어 일으키는 8종의 나쁜 생각. 1) 욕각(欲覺)-욕심. 2) 진각(瞋覺)-성냄. 3) 뇌각(惱覺)-미워하는 마음으로 남을 해롭게 하려는 생각. 4) 친리각(親里覺)-고향ㆍ친척 등을 기억하는 마음. 5) 국토각(國土覺)-자기 나라만 생각하는 마음. 6) 불사각(不死覺)-부자가 재산 때문에 죽기 싫어하는 것. 7) 족성각(族姓覺)-문벌이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 8) 경모각(輕侮覺)-자기의 재질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


*팔경법(八敬法=八敬戒)---비구니(比丘尼)가 비구스님에게 지켜야 하는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

     1) 보름마다 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함.

     2) 비구의 지도에 따라 안거(安居)해야 함.

     3) 안거(安居)의 마지막 날에는 비구를 초청해 그 동안에 저지른 자신의 허물을 말하고 훈계를 받아야 함.

     4) 식차마나(式叉摩那)는 비구 ? 비구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함.

     5) 비구를 꾸짖어서는 안 됨.

     6) 비구의 허물을 말해서는 안 됨.

     7) 무거운 죄를 저질렀을 때는 비구에게 참회해야 함.

     8) 수계(受戒)한 지 100년이 지난 비구니라도 방금 수계한 비구에게 공손해야 함.

   최초의 비구니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가 출가를 하며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아래에서 이루어졌기에 남녀불평등요소가 매우 심한 내용이다. 그나마 부처님 법 아래는 누구나 평등하며, 위아래 계위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한 차별이 심할 때라서 이런 내용인데, 최근 이 부분의 개정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식차마나(式叉摩那)---팔리어 sikkha m?n?의 음사. 정학녀(正學女) ? 학법녀(學法女)라고 번역하는데, 비구니가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에 2년 동안 육법(六法)을 지키며 수행하는 여자 출가자를 말한다.

      ※육법(六法)---→육법(六法) 참조.


*팔계(八戒)---출가하지 않은 신도가 육재일(六齋日)에 지켜야 하는 여덟 가지 계율. 중생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꽃다발 쓰거나 향 바르고 노래하고 풍류 잡히지 말며 가서 구경하지 말라, 높고 넓고 큰 잘 꾸민 평상에 앉지 말라, 때 아닐 적에 먹지 말라는 내용이다. 원어는 팔관재계(八關齋戒), 팔재계(八齋戒)이다.---→육재일(六齋日) 참조.

 

*팔고(八苦)---생 ? 로 ? 병 ? 사(生老病死) 4고(四苦)에다가 애별리고(愛別離苦=회자정리/會者定離),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오취온고/五取蘊苦))의 네 가지를 합해 팔고(八苦)라 한다.


*팔관회(八關會)---우리 민족의 고유 민속신앙과 불교가 습합된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가적 행사. 삼국시대에 시작돼 고려시대 국가행사로 치러졌다. 특히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의례(佛敎儀禮)였으며,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였다. 연등회(燃燈會)처럼 팔관회도 국왕의 장수 기원과 왕실의 조상숭배 의례로서의 기능이 있었다.


*팔달(八達)---세속에서는 주요도시를 잇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를 팔달(八達)이라 했으나 불교에서는 총명해서 여러 학문에 통달함을 일컫는다.


*팔리어(巴里語, P?li)---부처님 당시 산스크리트어는 교양 있는 지배계급의 언어인데 비해 팔리어는 서민들의 언어였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서민층을 위해 팔리어로 법문을 설했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팔리어였고, 그것이 <팔리어 삼장(三藏, Tipi?aka)>으로 일단 완성됐다. 소위 ‘패엽경(貝葉經)’이 그것이다. 따라서 고대에 스리랑카(세일론)ㆍ미얀마 등의 남방불교경전에 쓰인 말이다.

   산스크리트어의 근원인 “프라크리트”어 계통에 속하며, 자모(字母)의 총수는 39로서, 모음(母音) 8ㆍ자음(子音) 31. 산스크리트어에 비하면 수량이 매우 적고, 음조(音調)의 변화도 적으며, 문법은 간단하고 쉽다고 한다.


*팔리어 삼장---팔리어 경장은 장부(長部, D?gha-nik?ya), 중부(中部, Majjihima-nikaya), 상응부(相應部, Samyutta-nikaya), 증지부(增支部, Anguttra-nikaya), 소부(小部, Khuddaka-nikaya) 등 5부로 구성돼 있고, 율장은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i), 건도부(健度部, Khandaka), 부수(付隨, Pariv?ra)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논장에는 법취론(法聚論, Dhamasa?ga?i), 분별론(分別論, Vibha?ga),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atti), 논사(論事, Kath?vatthu), 계설론(界說論, Dh?tukath?), 쌍대론(雙對論, Yamaka), 발취론(發趣論, Pa??h?na) 등의 7론이 있다.---→‘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 참조.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고려시대 처음 만든 대장경(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년)에 시작해 76년간에 걸려 1087년에 완성했는데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하여 불력을 빌어 몽고군을 몰라내기 위해 다시 고종 23년(1236)에 시작해서 고종 38년(1251)∼1248)에 완성한 목판본이 팔만대장경이다. 전체 분량이 81.258판(16만면)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해서 8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국보 제32호의 <고려대장경>이다.


*팔부중(八部衆)=팔부신중(八部神衆)---불법을 수호하는 8가지 신, 원래는 고대 인도의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돼 10대 제자와 함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천룡(天龍) 팔부중이라고도 한다.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羅迦)를 가리킨다.


*팔불정관(八不正觀)---여덟 가지 바르지 못한 견해를 바로잡는 정관(正觀). 팔불중도(八不中道)의 관법. 모든 법의 참모습은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같은 것(一)도 아니고 다른 것(異)도 아니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어서, 유(有)를 여의지 않고, 무(無)에 떨어 지지 않는 중도(中道)라는 것이다.---→아래 팔부중도(八不中道) 참조.


*팔불중도(八不中道)---중도(中道)는 불교의 중요한 교의로 대소승을 막론하고 널리 중시되고 있으며, 각 종파에서는 모두 중도를 교리의 핵심으로 하고 있다. 각 종파의 중도설 가운데 가장 알기 쉬운 것은 팔불중도로 대승불교의 중관학파와 삼론종의 중요한 이론이며, 팔불중관(八不中觀), 팔불정관(八不正觀)이라 하기도 한다. 팔불중도의 ‘팔불(八不)’은 아래와 같다.

    ?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 불상역불단(不常亦不?) -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 -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중론(中論)>의 첫머리에 있는 이 귀경게(歸敬偈)가 전체 내용의 요지이다.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은 영원한 것도 끊어짐도 아니며,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서로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어디로 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로 향해 간 바도 없다는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용수(龍樹, Nagarjuna)가 말한 중도이론이다. 성철스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셨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중도는 이와 같은 팔불중도가 아니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팔사파(八思巴, 1235~1280)---파스파라고도 하며, 티베트 후기 밀교 샤카파[살가파(薩迦派)]의 승려 빠끄빠(Hphags-pa)를 음역한 이름이다. 빠끄빠는 중국 원나라 세조의 스승(帝師)이 돼 중앙정치에 공헌했고, 그는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국사가 됐으며, 몽고제국 내에 전 불교계를 통섭하는 한편, 당시 원나라에는 글자가 없었는데 위구르 문자에서 차용해 처음으로 몽고문자 -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를 만들었다.


*팔상전(八相殿, 捌相殿)---석가여래의 생애를 극적인 장면으로 압축해서 묘사한 그림을 팔상도(八相圖)라 하고, 이 팔상도를 봉안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전각을 팔상전이라 한다. 따라서 팔상전의 주불은 석가여래 부처님이고, 좌우협시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특히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이 유명하다.


*팔선정(八禪定)---계(戒) ? 정(定) ? 혜(慧) 삼학 중에 정학(定學)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번뇌를 정화시키는 실천법으로 선정수행, 혹은 사마타(Samatha, 止)수행, 또는 삼마디(Smamadhi)수행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定)은 삼마디를 가리키는 말로, 마음이 하나로 집중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삼매(三昧)를 의미한다. 이러한 삼매를 닦게 되면 그 삼매의 힘에 의해 번뇌가 그치게 되는데 이렇게 번뇌가 그친 것을 사마타라고 한다.

   그래서 한역경전에서는 이 사마타를 그친다는 의미를 지닌 ‘지(止)’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흔히 지관쌍수(止觀雙修)할 때에 지(止)란 바로 이 사마타의 경지를 두고 하는 소리이다.

   이 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어 차원이 높아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으로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은 아직 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색계선정(色界禪定)이라 하고, 공무변처선 ? 식무변처선 ? 무소유처선 ? 비상비비상처선은 물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아직 정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라고 한다. 따라서 팔선정(八禪定) - 줄여서 8정(八定)은 색계의 4선정과 무색계의 4선정을 합친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사마타 팔선정은 부처님 이전에 벌써 정립돼 있었다.---→색계4선정, 무색계4선정 참조. 


*팔식(八識)---6식에 제7식 말나식(末那識)과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


*팔심(八心)---<대일경(大日經)>에서 선심(善心)이 점점 높아져 가는 -  마음이 점점 착해져가는 8가지 단계를 말함.

     ① 종자심(種子心) - 선업의 종자가 일어나는 마음, 절식(節食), 지재(持齋) 등의 행위를 함.

             ※지재(持齋)---정오를 지나서는 밥을 먹지 않는다는 계법을 지키는 것.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② 아종심(芽種心) - 선업의 종자가 싹이 터서 나오는 자리, 부모, 친척 등에 보시(布施).

     ③ 포종심(疱種心) - 싹이 부풀어서 크게 되는 것과 같이 보시하는 마음이 친척 이외에 까지 파급되는 자리.

     ④ 엽종심(葉種心) - 싹에서 잎사귀가 나오는 것과 같이, 덕행이 있는 사람에게 공양하는 자리.

     ⑤ 부화심(敷華心) -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이 보시하는 마음이 덕이 높은 사람에게 미치는 자리.

     ⑥ 성과심(成果心) - 과일의 열매가 맺혀서 성숙하는 것과 같이 친애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는 자리.

    ⑦ 수용종자심(受用種子心) - 과일이 실제로 널리 퍼지는 것 같이 계를 지켜 이익을 얻어 사후에 생천(生天-천상세계에 태어남)하는 자리.          

    ⑧ 영동심(?童心) -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팔왕분골(八王分骨)---열반하신 부처님을 다비했을 때 사리가 3섬 8말이 나왔다고 하며, 그것을 8명의 이웃 국가 왕이 나누어 가졌다고 해서 팔왕분골이라고 한다. 당시 이웃나라 왕들은 단 한 분뿐인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이처럼 국왕들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집착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지 못할 경우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국왕들 자신이 불교신자였으므로 신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한 것이다. 거기에다 ‘위대한 성인의 유골을 보유한 나라’라는 국가의 명예에 관련된 점도 있었고, 부처님의 사리로 왕권강화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리를 가져다가 각기 탑을 세웠다.


*팔재계(八齋戒)---→팔계(八戒) 참조.


*팔정도(八正道, 팔리어 Ariyo a??ha?giko maggo, 산스크리트어 Aryastangamarga)---‘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팔정도는 성인이 되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의 길을 말한다. 영어로는 The Noble eightfold Path라 해서 ‘성스럽다, 고귀하다, 숭고하다’라는 뜻의 ‘출세간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팔정도를 계 ? 정 ? 혜 삼학과 견주어 분류할 수 있는데, 계(戒)에 해당하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 있고, 정(定)에 해당하는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으며, 혜(慧)에 해당하는 정견, 정사유가 있다.

     ① 정견(正見, 범어 samyak-drsti) - 바른 견해이다.

     ② 정사(正思/正思惟, 범어 samyak-samkalpa) - 몸과 말에 의한 행위를 하기 전의 바른 의사 또는 결의를 가리킨다. 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범어 samyak-vac) -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언어적 행위이다. 망어(妄語:거짓말) ? 악구(惡口:나쁜말) ? 양설(兩說:이간질 하는 말) ? 기어(綺語:속이는 말)를 하지 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을 하는 일이다.

     ④ 정업(正業, 범어 samyak-karma-anta) - 정사유 뒤에 생기는 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 ? 투도 ? 사음을 하지 않으며, 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 범어 samyak-ajiva) - 바른 생활이다. 이것은 바른 직업에 의하여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도 포함된다.

     ⑥ 정근(正勤/正精進, 범어 samyak-vyayama) -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 범어 samyak-smrti) - 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되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 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잊지 않는 일이다.

     ⑧ 정정(正定, samyak-samadhi) -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고, 정신통일을 말하는 바른 선정(禪定)을 가리킨다.

   초기불교의 팔정도에서 정견(正見)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실천덕목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용어가 그 사상의 핵심적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팔정도에 정견이 먼저 나오지 않고 나머지 실천덕목을 먼저 언급 한다면 크게 빛을 바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반야사상이 형성된 시기는 대체로 BC 100년경~AD 150년경인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이다. 이 경전은 179년 최초로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한 것 외에, 구마라습 역의 <소품반야경> 등 전후 5회에 걸쳐 한역됐는데 산스크리트어 본 및 티베트어 역도 현존한다. 내용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공관(空觀)’의 입장을 밝히고,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육바라밀’의 실천, 특히 ‘반야바라밀’의 체득이 강조돼 있다.


*패다라(貝多羅, 패엽(貝葉, pattra)---다라수(多羅樹)의 다른 이름임.---→다라수(多羅樹) 참조.


*패엽경(貝葉經)---BC 1세기 중반 스리랑카 알루비하라(Alu Vihara, 알루위하라) 석굴사원에서 대대적인 불전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7년에 걸쳐(BC94~80경)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전승되던 모든 가르침을 경 ? 율 ? 론의 <팔리어삼장(三藏), Tipi?aka>으로 완성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완성된 <팔리어대장경>이 성립된 것이다.

   이때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불경 일체를 패다라 잎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것을 패엽경이라 하며, 불경이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일이다. 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다라수(多羅樹) 참조.


*평등지(平等知)---차별지(差別知)에 대칭되는 말로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간택의 마음이 사라지는 평등심의 지혜. 곧 해탈로 이끄는 꿰뚫어 보는 통찰의 지혜를 말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도심(道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道)라는 가르침. 중국 당나라 때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가 한 말이다. 한 승려가 도일선사에게 어떤 것이 도인가라고 물었을 때 ‘평상심이도’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세상 사람은 도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 생활하는 그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의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상심시도’를 매우 중요시해 도의 궁극적인 경지와 수행의 과정을 이 평상심에 두고 있다.


*포대화상(布袋和尙, ?~916)---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로 이름은 계차(契此)이고, 호는 정응대사(定應大師). 당시의 사람들은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사(布袋師)라고 불렀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는 모습으로 커다란 자루를 등에 메고 다녀 포대화상이라 했다. 포대화상을 우리말로 옮기면 ‘복 할아버지’ 정도가 될 것 같다.

   포대화상은 미륵불의 화현으로 여겨지고 자비와 복을 상징했다. 화상이 짊어진 포대 속에는 중생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어서 예배, 공양, 찬탄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주는 다자대비 보살로 여겼다.

   포대화상에 대한 예불 방법은 경건함이 배제되고, 장난기가 발동한 것처럼 하면 된다. 먼저 예배한 다음 젖꼭지와 배꼽으로 부터 아랫배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복자루까지 세 번 돌리고, 포대화상처럼 웃으면서 그를 칭찬하면 된다. 그러면 무병장수 부귀영화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 


 *포살(布薩)---부처님 당시부터 시행된 승가의 의식으로서, 보름과 그믐에 대중들이 한곳에 모여 계본(戒本)을 낭송하고 각자 반성과 참회를 하는 의식이다. 즉, 스님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동안 계경(戒經)에 맞게 생활을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 있을 경우 이를 참회하는 의식이다. 매 보름 동안 지은 죄가 있으면 참회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대중 앞에 드러내고 고백하는 발로참회(發露懺悔)를 행한다.


*포행(布行)---포행(布行)의 본뜻은 좌선(坐禪) 중 졸음이나 피로한 심신을 풀기 위해 일정 시간 일정한 장소를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볍게 걷는다는 뜻으로 ‘경행(輕行)’이라고도 하고, 걸으면서 선을 한다 해서 ‘행선(行禪)’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속세간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포행방법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배를 내밀지 않은 상태에서 턱을 당기고 목을 바로 세운 채 자연스럽게 걷는다. 이때 눈은 전방 15도 정도를 향하고 발은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게 걷는다. 산에 사는 스님들도 각기 즐겨 찾는 산길이 있다. 흔히 ‘포행’이라고 하는 수행 중 매일 갖는 가벼운 산행시간이 있는데, 이 포행 길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정해진다.


*표업(表業)과 무표업(無表業)---업은 몸[身]으로만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입[口]과 뜻[意]으로도 짓게 되므로 신업 ? 구업 ? 의업이란 3업의 개념을 성립시켰다. 그런데 몸과 입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남에게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작용이므로 표업(表業)이라 하고 외부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대로 상속하게 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한다. 즉, 불교교리에서는 생각도 하나의 행위[의업(意業)]로 보지만 이것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업이라고 해서 무표업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는 훔치고 나면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도둑질의 행위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중요한 약속을 해도 그 약속의 말은 찰나에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 말은 보이지 않는 힘을 뒤에 남기고 있기 때문에 약속은 지켜야 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추궁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행위 - 불교에서는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다고 한다 - 에는 보이는 부분(表業)과 뒤에 남아 보이지 않는 부분(無表業)이 있는데, 이 양자를 합한 힘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한다.---→무표색(無表色)과 표색(表色) 참조.


*풍번문답(風幡問答)---육조 혜능(慧能)선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자 두 승려가 입씨름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맞섰다. 혜능이 나아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움직이는 것은 너희 마음이니라.”


*프라나(Prana, 氣)---태초부터 존재해 온 힘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으며 삼라만상을 이루는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의 실체가 있어, 이를 말한다. 따라서 이를 설명하는 것은 신(神)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 마디로 전 우주의 모든 차원에 걸쳐 스며들어 있는 에너지로서 이를 ‘프라나’라 한다. 우리말의 기(氣)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피안(彼岸)---산스크리트어 ‘para(波羅)’를 음사한 말로, 번뇌의 강 건너 편 언덕, 깨달음의 세계를 뜻한다. 그리하여 도피안(到彼岸)은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며,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로 건너감을 뜻하며,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 바라밀)을 말한다.---→도피안(到彼岸) 참조.


*필경공(畢竟空)---십팔공(十八空)의 하나. 모든 현상에 대한 분별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모든 것은 종국에는 공이 된다는 뜻이다.

   당나라 시대의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선사는 그의 어록집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 “공함도 없고 공함이 없음도 없음을 곧 필경 공함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즉 이것은 만유가 공이라면 다시 공 자체에 얽매이기 쉬우므로 공에 대한 집착까지도 떠남으로써 공마저 공한 것이라고 보아 더 이상 부정할 것이 남지 않은 최후 완전한 절대 공을 뜻한다는 말이다.


*핍팔라나무(보리수)---핍팔라나무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장소에 있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보리수로 더 잘 알려진 나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자 시작한 극단의 고행을 버리고 네란자라강을 건너 보드가야 언덕으로 갔는데, 그때 부처님의 정각을 고요하게 지켜본 나무가 핍팔라나무이다. 핍팔라나무는 밤에 이산화탄소를 뱉어내는 다른 나무와 달리 하루 종일 신선한 산소를 내뿜는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인도 수행자들이 핍팔라나무 그늘에 앉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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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下心)---자신의 몸과 마음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허와 겸손을 의미한다. 불법을 닦는 수행자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심과 묵언(默言) 수행이다. 절은 하심(下心) 즉 마음을 낮추는 것이다. 나를 낮추며 참회를 할 때 절로써 그 업이 가벼워질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하심(下心) 하는 자에게는 만 가지 복이 생기느니라.”라고 한다. 금오(金烏, 1896 ~ 1968) 스님 같은 분은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 동안 거지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심(下心)의 5가지 덕목> - 성철(性澈) 스님의 말씀

     1) 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같이 존경하며,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2)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극히 존경한다.

     3)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해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4)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5)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먼저 한다.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남의 허물을 보지 마라.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6조 혜능의 제자로 혜능선사의 선법을 확실히 다지고, 조사선(祖師禪)의 기초를 열였다. 그는 북종선의 점수(漸修)의 법을 방계라 하고, 돈오(頓悟)의 법을 남종선이라 해 정법이라 했다.


*하택종(荷澤宗)---6조 혜능(慧能, 638-713)의 제자 하택 신회(荷澤神會, 684-758)를 개조(開祖)로 한 종파. 집착이 없어 텅 빈 공적심(空寂心)을 종지(宗旨)로 했다.


*하해어별(河海魚鱉)---강과 바다의 물고기와 자라.


*학인(學人)---강원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승려를 이르는 말.


*‘한 물건’---선가에서 추구하는 구극의 근본자리를 일컫는다. 즉,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진여(眞如), 우리의 본성(本性)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어두움을 모르는 밝고 그 작용함이 너무나 신령스럽다.

   우리의 신체 구조와 그 작용들이 얼마나 신령스러운 일인가. 저녁이 되면 자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는 일상생활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령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이 바로 일체 중생의 본성이고 참되게 여여하게 존재하는 것이라 해 진여(眞如)라 부르고, 그 게 바로 ‘한 물건’이다. 바로 불교에서의 진리 그 자체를 일컫는다. 


*한산습득(寒山拾得)---당(唐)나라 정관시대(貞觀時代=태종시대)의 두 사람의 승려를 이름. 모두 절강성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풍간선사(?干禪師)의 제자로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됐으며, 특히 한산은 대표격 시인이다.

    ※한산시(寒山詩)---한산(寒山)과 습득(拾得), 그리고 그들의 스승 풍간(豊干)의 작품이 실려 있는 시집. 한산은 천태산 국청사 부근의 한암(寒巖)에 숨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산은 시와 선(禪)을 일치시켜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들은 대개 선을 탐구하는 내용이며, 세상 풍자가 심하고 인과응보의 내용을 담은 특이한 형태의 시들인데,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선가에서 많이 읽혀졌다. 한산이 지은 시는 314수이고, 습득의 시는 57수이며, 풍간의 시는 2수로 모두 373수가 전한다. 그의 시는 흥에 겨워 나뭇잎이나 촌가의 벽에 써놓은 것을 모은 것이라 한다.

   

*‘한 생각’---깨달음에 관련된 말인데, 고정관념 또는 집착을 말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자체를 말하기도 있다. 전자의 경우, 한 생각을 돌리라! 하는 말이 있다. 그리하면 우리들 업이 아침 햇살에 구름 걷히듯, 따스한 햇볕에 봄눈 녹듯 할 것이란 것이다.한 생각을 돌이킬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극과 극의 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한 생각 내려놓고 쉬면 그게 바로 도(道)의 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한 생각’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바로 한 생각을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즉, 제 행함이나 제 판단이 옳다고 믿고 행했던 일이 잘못(전도몽상)이었음을 어느 순간 확 알아차리게 되거나 내내 의심하던 화두가 탁 트이고, 묵은 업장이 마치 꽉 막혔던 물고가 트이듯이 해소되는 것이 바로 ‘한 생각’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다음의 ‘한 소식’과 비슷한 말이다. - 일념과 비교할 것


*‘한 소식’---‘한 생각’과 비슷한 개념이다. 여기서 ‘소식’이란 일상용어인 ‘들은 소문’이 아니라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중생은 속된 일상의 삶을 아무 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살다가보니 제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혹시 알아차렸다고 해도 바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습관적(무의식적)으로 그릇되게 살며 범한 바를 잘못임을 깨닫고, 애써 알고자 했던 것을 깨쳐 알아서 본래성품 그대로 여실지견하는 것을 ‘한 소식’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한 소식은 여실지견 깨닫고, 안팎을 하나로 쓰는 언행일치에 있다 하겠다.


*한암(漢岩, 1876년(고종 13)∼1951)---법명은 중원(重遠)이며, 한암은 법호이다. 성은 방(方)씨로, 강원도 화천 출신이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를 시작했고, 지눌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후 전국의 고승을 찾아 구도의 길에 올랐다. 경허(鏡虛)로부터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도를 깨달았다. 1905년 통도사의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돼 후학을 지도했고, 1925년 봉은사 조실을 그만두고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간 이후 27년 동안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1941년 조계종이 출범하자 초대종정으로 추대돼 4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한암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25전쟁 때 상원사를 지켜낸 일이다. 1 ? 4 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절을 불태우려 하자 법당에 머무른 채 불을 지를 것을 권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 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됐으나 상원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할(喝)---선승(禪僧)들 사이에서 수행자를 책려하기 위해 쾅! 하고 발하는 소리 또는 행위. 중국 당나라 이후 참선하는 수행자를 이끌기 위해 선승들이 사용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을 표현할 때, 수행자를 호되게 꾸짖을 때, 법회에서 설법을 끝낼 때 할을 발한다.


*‘함이 없는 함(無爲)’---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생멸의 변화를 떠난 것. 즉 원인, 조건에 지배돼 생기는 유위에 대해 ‘함이 없음’은 원인 조건을 초월한 형태를 말함인데, 결국 깨달음, 열반, 진리, 적멸, 공을 말한다.

   무위의 반대말은 유위(有爲)이다. 함이 있는 마음이다. 무위심은 함이 없는 무위자연의 마음이다. 준다는 생각, 베푼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피곤하고 힘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힘이 고갈돼버리고 만다. 무엇을 해 준다는 생각도 없고, 베푼다는 생각도, ‘나’라는 생각도 없는 무자연의 마음은 끊임없이 베풀 수 있는 마음이다. 그래서 무위란 가장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내는 세계이다.

   경전에 무위복승(無爲福勝)이란 말이 있다. 이 세상에 무위복 이상의 복은 없다고 했다. 누구에게 해 준다는 생각 없는 무위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무한한 세계란 말이다.

   헌데 ‘함이 없는 함’이란 무생법인(無生法忍)과도 관련이 있다. 함이 없는 함이란 어떤 것을 보아도 보지 않는 것이요, 어떤 것을 들어도 듣지 않는 것이요, 무슨 말을 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요, 무슨 생각을 해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곧 무생법인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예를 든다면, 상대가 진심(嗔心-화)을 내다가도 그를 보면 저절로 진심이 없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된다면 그는 무생법인을 갖춘 자라 하겠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냥 가만히 있지만 화를 내다가도 그를 보면 진심이 가라앉았다면 나름의 ‘함’이 있다 하겠으나 그 ‘함’은 ‘함이 없는 함’, 즉 무생법인이다. 화를 내지 않도록 노력하고, 진심(嗔心, 화내는 마음)을 늘 참회하는 습관은 만사성취의 근본이다. 그러나 상대로 하여금 화를 낼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 ‘함이 없는 함’이라 하겠다. 한없이 인자한 어머니의 마음, 그 게 바로 무생법인이다. 아무리 못된 놈도 인자한 어머니 앞에서는 화를 가라앉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함사(hamsa)---신라 유물 중에 인면유리구슬에 브라흐마의 4개 얼굴과 미륵불을 상징하는 용화수(龍花樹)라는 나무, 그리고 하얀 물새가 새겨져 있는 것이 있다. 그 중에서 하얀 물새가 브라흐마의 이동수단이며, 해탈을 의미하는 함사(hamsa)라 불리는 새이다.  


*함허(涵虛, 1376년~1433년)---고려 말~조선 초기의 승려. 속성은 유씨(劉氏). 법명은 기화(己和), 호는 함허(涵虛) 혹은 득통(得通).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운악산 현등사(懸燈寺)를 중수했으며, 말년에 문경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머물다가, 1433년 입적했다. 저서에 <현정론(顯正論)>, <원각경소(圓覺經疏)> 등이 있고, 부도는 봉암사와 현등사에 있다.


*합장(合掌)--- 스님과 스님 사이, 스님과 신도 사이에 의례로서 손을 모아 인사하는 일종의 예법(禮法)이다. 두 손바닥을 맞대고 마음이 한결같음을 나타내는 인도의 예법에서 유래한 인사법으로 오늘날까지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베트남 등에서도 일상적인 인사법이 됐다. 인도에서는 오른손은 신성하고 왼손은 부정한 손이라고 구분해 사용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런 양손을 합하는 것은 인간 속에 잠재된 신성한 면과 부정한 면을 합일함으로써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열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두 손을 모아 진실하고 지극함을 표현하는 한편,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생각과 마음을 집중시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 위에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인간의 진실한 모습으로 배례를 하는 것이다.

   손바닥은 밀착해 빈틈이 없어야 하며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서도 안 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그래서 합장(合掌)은 예불, 법회 등 불교 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쓰이는 예법이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부처님의 수인 다섯 가지 중 하나이다. 모습은 결가부좌한 채 선정인(禪定印) 상태에서 왼손은 선정인 그대로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은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어 손가락 끝이 가볍게 땅을 향하고 있다. 석굴암 부처님의 손이 전형적인 항마촉지인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려는 순간 마왕 파순(波旬, 파피야스/papiyas)이 방해를 하므로 이를 굴복시키기 위해 취한 수인이다.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은 나와서 이를 증명하라’고 하면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땅에 대었다. 그러자 지신이 홀연히 뛰쳐나와 이를 증명했는데, 이때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다. 따라서 이 수인은 석가모니만이 취할 수 있다.


*항하(恒河)---인도의 성하(聖河). 영어명 갠지스(Ganges)강.


*해심밀경(解深密經)---인도의 중기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유심사상(唯心思想)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어서 유식사상(唯識思想) 흥기에 많은 영향을 기친 경전이다. 원래 명칭은 상디니르모차나 수트라(Samdhinirmocana­sutra)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으며, 한역으로는 전역(全譯)의 2종과 부분역 2종이 있으며, 티베트역으로는 전역 1종이 있고, 이 티베트어역을 통한 프랑스어역이 있다. <해심밀경>은 AD 300년경에 성립됐다고 보며, 중기 대승경전에 속하고, 문답형식으로 논술돼 있어서 경(經)이라기보다는 논(論)의 부류에 속한다. 인도의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과 중국 등지의 법상종(法相宗)의 근본경전 중 하나이다. 신라의 고승 원측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지었다.


*해오(解悟)와 증오(證悟)---해오(解悟)란 이치적(理論)으로 깨달은 것이고 증오(證悟)란 이치적으로 깨달은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깨달음을 해오한 사람들은 많아도 증오한 사람은 희귀하다. 그만큼 증오는 어렵고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출가자들도 증오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손쉬운 해오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론이 증명돼야 이론과 증명이 원만한 깨달음이 된다. 그래서 성철스님도 깨달음은 해오가 아닌 궁극적인 깨달음인 증오라야 옳다고 했다.


*해인(海印)---법을 관조(觀照)함을 바다에 만상(萬象)이 비추는 것에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즉 바다가 잔잔하면 삼라만상이 그대로 해면에 나타나 그것이 마치 바다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해인이다.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면 우주의 모든 만물의 실상을 깨달아 알게 됨을 의미한다.


*해인삼매(海印三昧, 산스크리트어 sgaramudr-samdhi)---<화엄경>에서 해인삼매란 광명의 부처님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의 삼매 속에서 펼쳐진 세계를 말한다.

   즉,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에 취했던 삼매(三昧) 상태에서 일체의 것(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이 마음속에 나타남을 말한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고요한 바닷물에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心) 가운데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하게 나타나는 것을 해인삼매 혹은 해인정(海印定)이라 한다.

   내 마음의 바다가 출렁이고 비뚤어 있으면 삼라만상이 비뚤게 비쳐 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내 마음의 바다를 고요하게 해야 만상을 바로 볼 수 있다.  

 

*해탈(解脫, Moksha)---불교에서 인간의 속세적(俗世的)인 모든 속박과 장애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무애자재(無碍自在)] 즉,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불교는 이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중생은 탐(貪) ? 진(瞋) ? 치(痴)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돼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쌓아 밝은 지혜로 반야(般若)를 증득함으로써, 즉 깨달음을 얻어 이루어진다. 해탈에는 혜해탈과 심해탈이 있다.---→혜해탈(慧解脫), 심해탈(心解脫) 참조.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일제 강점기 생존했던 금타(碧山金陀)스님(1897-1948)께서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라든가 여러 가지 밀교의 계위를 합해서 비교해 가면서 보살 10지를 근간으로 회통시킨 수행체계이다.


*해탈지견(解脫知見)---해탈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진실된 지혜로써 자신이 참으로 일체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자재한 몸인 줄을 아는 견해. 나는 해탈했다라고 확인할 수 있는 지혜로 혼자서 해탈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 혹은 알고 있는 것.


*행(行)---불교에서 ‘행(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산스크리트어로는 samskara, 팔리어로는 sankhara이다. 이 상카라는 sam(함께)+√kr(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r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는 행(行)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상카라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경전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경들에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상카라’ 참조.

      ?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nkhata-dhamma)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n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nkhara), 생명의 상카라(jivita-sankhaa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 행고성(行苦性)이라 할 때 ‘행’은 천류(遷流), 즉 모든 것은 흘러간다. 일체는 옮아간다고 하는 뜻의 존재의 무상함을 말한다.     

      ? 12연기에서의 행(行)---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 ‘업 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業, kar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신행(身行) ? 구행(口行) ? 의행(意行)은 각각 신업 ? 구업 ?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한다.  

     ? 오온(五蘊)에서 행(行)---오온에서 색, 수, 상, 행, 식 할 때 ‘행’은 행온(行蘊)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인다. 여기서 ‘행’은 의지작용 및 그 밖의 정신작용을 말한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생활을 할 수 있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현상이다. 즉, 행위를 낳는 의지작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심적 작용 ? 심리 현상을 말한다.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작용이다.

   이와 같이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의미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행을 의도적 행위 즉 업 형성 하나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행의 행과 오온의 행온은 제대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제행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일체 유위법들을 뜻하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됐다. 그리고 행온은 수(느낌)와 상(인식)과 식(알음알이)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심리현상들을 뜻하므로 두 번째로 넓은 의미로 사용됐다고 할 수 있다. 12연기의 행과 신 ? 구 ? 의 삼행은 의도적 행위들(업)을 뜻하므로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됐다. 


*행각(行脚)---선 수행을 위해 여러 곳을 다니는 것. 여러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고승들에게 묻고 배우는 것.


*행고(行苦, sankhara-dukkha)---삼고(三苦)의 하나. 여기서 ‘행(行)’은 천류(遷流), 곧 생멸의 유전과 변화를 말하는데, 이것에 의지해 일어나는 고통을 행고라 한다. 즉, 일체 세간의 유위법은 과거, 현재, 미래 세(世)를 덧없이 표류하며 한순간도 상주(常住)하는 편안함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데, 이 괴로움을 행고라 한다.---→삼고(三苦) 참조.

  

*행선(行禪)---각처로 돌아다니며 선(禪)을 닦음. 걸어가며 하는 참선, 행동하면서 하는 참선. 선(禪)의 실천을 뜻함.


*행원(行願)---수행과 서원. 신행(信行)과 심원(心願)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바람과 그 실천의 서원(誓願)을 말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걷거나 서거나 않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또는 움직이지 않거나 오직 하나만을 생각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에서도 바라는 것이 되고, 숙면일여(熟眠一如) 깊은 잠을 자면서도 원하는 것을 놓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가 늘 한결 같다. 즉, 공부(工夫)의 최고 경지다.

   항상 구도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깊이 억념(憶念, 마음속에 단단히 기억하여 잊지 아니함)하고, 일어나는 번뇌와 슬픔, 분노, 원망 등을 지워나가야 한다.


*허공 꽃(幻華)---공화(空花)와 같은 뜻. 중국 송대(宋代)의 장졸(張拙)은 말했다. ‘진여(眞如)다, 범성(凡聖)이다’ 함이 모두 허공에 핀 꽃이다(眞如凡聖是空花)라고, 진여니 범성이니 하는 게 다 공이라는 말이다. 붓다께서는 이 우주법계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해서 12연기법으로 설명하시면서 오직 연기생이요, 환화(幻華)의 허상임을 말씀하셨다는데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선사는 말했다. “과거와 미래는 환화(幻華)와 같아서 오직 이름만 있을 뿐 실체는 없다네. 그대의 참 마음이 우주만물의 근본이며 주재자임을 명심하고, 그 참마음이 오염되지 않는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엇이 걱정인가.”라고, 이 모두 공(空)의 진수를 지적하고 있다.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허공장이란 ‘허공의 모태’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보살이란 말이다.

   후기의 대승불교를 이끌었던 밀교의 만다라(曼茶羅)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데,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에서는 허공장원(虛空藏院)의 중심불이 됐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며, 오른손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칼을, 왼손에는 복덕을 상징하는 연꽃, 또는 공덕을 나타내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잡고, 머리에는 오지보관(五智寶冠)을 쓰고 있다.

     ※허공장원(虛空藏院)---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의 한 부분으로, 허공장보살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덕을 나타냄.


*허운(虛雲, 1840~1959)---중국 근대의 고승, 저서에 <방편개시(方便開示)>, <참선요지(參禪要旨)> 등이 있다.


*혁범성성(革凡成聖)---평범한 사람을 변화시켜서 일약 성인(聖人)이 되게 함을 뜻한다. 


*현교(顯敎)---불교(佛敎)는 크게 비밀불교(秘密佛敎)와 현로불교(顯露佛敎)로 나눌 수 있으며, 비밀불교를 줄여 밀교라 하고, 현로불교를 줄여 현교라 한다. 밀교의 교주는 법신(法身) 비로자나 부처님이시고 현교의 교주는 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현교는 명료한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인 불교를 뜻하고, 밀교는 비공개적이며 비밀스런 교의와 의례를 지닌 불교를 말한다. 


*현량(現量)과 비량(比量)---불교의 인식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새말로 바꾸면 현량은 ‘직관’이고 비량은 ‘추리’다. 예를 들어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을 통한 것이고, 먼 산에서 연기가 날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불이 있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을 통한 것이다.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현수소(賢首疏)---원래 이름은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로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해설서이다. 그런데 저자인 법장(法藏, 643~712)의 별명이 현수(賢首)이므로 <현수소>라고도 한다. 법장(法藏)의 조상은 서역의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다. 그래서 법장을 강장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현식(現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제시한 마음의 구조이론(構造理論)에서 마음을 다섯 가지로 나누는 5식(五識)의 하나이다. 5식은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知識), 상속식(相續識)이다. 이 중 현식은 경계(境界)를 나타내는 식(識)이라는 뜻. 다시 말해 아뢰야식이 온갖 세계의 모든 현상을 나나타냄을 말한다. 따라서 현식은 제8식 아뢰야식의 별명이다. 그리고 현식(顯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굳이 현식(現識)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모든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맑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나타내듯 현식도 그러해 다섯 가지 경계(色聲香味觸)를 상대하면 곧 앞뒤가 없이 나타난다. 마치 맑은 거울이 여러 가지의 color와 영상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아뢰야식이 근본심식(根本心識)으로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업식(業識), 전식(轉識), 상속식(相續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참조.


*현애상(懸崖想)---산이 높다 해서 올라보지도 않고 포기하겠다는 것처럼 어떤 현상이 너무 어렵다고 지레 겁을 먹고 퇴굴심(退屈心)을 일으키는 생각을 말함. 반대말 - 관문상(慣聞想) 참조.


*현장(玄?, 602?~664)---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 그는 인도에 유학했으며, 17년 동안의 인도와 서역 일대를 여행(629~645년)했다. 경(經) ? 율(律) ? 논(論)의 모든 불교경전에 정통해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렸고, 인도에서는 목샤데바(Mok-?adev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해 막대한 양의 불교경전을 가지고 돌아와 한역함으로써 한역사업이 진일보했으며, 중국 불교를 한층 풍부하게 살 찌웠다. 구마라습이 구역의 대표적 인물이라면 현장은 신역의 대표적 존재였다. 

   그의 천축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당시의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이고, 중국에 유식학(唯識學)을 기반으로 한 법상종(法相宗)을 여는데 기여했고, 그는 9식설을 주장했다.


*현학(玄學)---중국 위(魏)ㆍ진(晋) 시대에 나타난 철학 사조로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유가의 경서들을 해석하며, 형이상학적인 철학논변을 전개했다. 3현(三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道德經)>ㆍ<장자(莊子)>ㆍ<주역(周易)>의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한 데서 현학이라는 명칭이 비롯됐다. 현(玄)은 노자(老子)의 <도덕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인식을 초월한 우주 생성의 근원으로서 도(道)의 현묘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학은 후한(後漢) 말기부터 비롯된 오랜 정치적 혼란을 배경으로 나타났으며, 노장사상은 도가사상의 시작이고, 현학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불리는 사상가들로 대표되는데. 지나치게 사색적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현실 세상과는 동떨어진 현학자들만의 학문으로 발전해, 유희적 궤변(詭辯)에 가까우나, 공교롭게도 불교의 <공(空)>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혜가(慧可, 486(?)~593(?))---달마(達磨)대사의 첫 제자인 중국 선종의 제2조. 원래 이름은 광(光), 나중에 ‘신광(神光)’으로 고쳤다가 다시 ‘승가(僧可)’로 개명했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입설정(立雪亭)’ 앞에서 제자가 되기 위해 달마와의 오간 대화는 선문답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는 ‘안심법문(安心法門)’과 제자가 자기 팔을 자르는 - 입설단비(立雪斷臂) -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달마가 벽력같은 소리로 혜가를 힐책했다.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고 이렇게 눈 속에 서 있는가?”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감로의 법문으로 중생을 구하사 제게도 불법을 깨우쳐 주시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놈! 정법(正法)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하느니라! 그런 부질없는 소리로 나를 현혹치 말거라! 만약 붉은 눈이 내리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그때였다. 눈 속에 파묻혀 꼼짝을 않던 혜가가 몸을 움직여 자신의 옷섶을 뒤적이니 호신용 단도를 끄어냈다. 순간 햇살에 반짝이던 칼날이 혜가의 왼쪽 팔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치솟는 선혈이 눈 위로 방울져 떨어져 번져 나갔다. 잘려진 팔이 순백의 눈 위로 떨어졌다.

   혜가의 행동을 바라보던 달마가 그때서야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던졌다.

   “진정한 도를 구하는 자라면 몸을 몸으로,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말 것인즉, 너의 행위가 합당하구나. 그렇다면 네가 구하는 도는 무엇이더냐?” 

   “저의 마음이 불안하오니 저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시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의 그 불안한 마음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찾고 있었으나 그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멱심요 불가득(覓心了 不可得).” 

   “비록 네가 찾았다 해도 그것을 어찌 너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했음을 알겠느냐? 하하하.”

   순간이었다. 혜가는 40년 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 불안함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음을 느끼고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달마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혜공(惠空, ?~?)---일명 부궤화상(負?和尙), 신라 선덕왕 때의 기승(奇僧)으로 승려가 된 후에도 술과 춤을 좋아했다. 신라 10성(聖)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아명(兒名)은 우조(憂助), 천진공(天眞公)의 여종 소생이다.


*혜관(慧灌)---고구려 승려. 그는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영류왕 8년(625)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이 됐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됐다.


*혜능(慧能, 638 ~ 713)---당나라시대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5조 홍인(弘忍, 601~674) 문하의 2대 선사로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됐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해진다.---→육조단경(六祖壇經) 참조.


*혜자(惠慈)---고구려 승려. 영양왕 6년(595)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됐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일본 불교의 동량이 됐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해 법화경, 유마경, 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다.


*혜초(慧超: 704~787)---신라의 밀교계 승려.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다시 인도에 들어가 인도의 여러 곳을 두루 순방하고, 당으로 돌아온 후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와 그의 제자 불공(不空, Amoghavajra)에게서 밀교를 배우며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그리고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1910년 둔황(敦惶) 명사산(鳴沙山) 천불동 석실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알려지게 됐다. 혜초의 이 기행문은 동서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의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종교, 풍습 등을 알려주는 희귀한 문헌자료 중 하나이다.---→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참조.


*혜총(惠聰)---백제 승려, 일명 혜총(慧聰). 백제 위덕왕 35년(588) 일본으로 건너가 불사리(佛舍利)를 전했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상신(相臣) 소가 우마꼬(蘇我馬子)가 세운 호코사(法興寺)가 완성되자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와 함께 이 절에 있으면서 불교를 널리 포교하는 데 힘썼다. 그는 혜자와 함께 일본 불교계의 중진으로서 크게 활동했다.


*혜통(惠通)---신라 승려. 당나라에서 인도 밀교승 선무외(善無畏)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해서 크게 교풍을 일으켰다. 후대에 혜통을 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을 정도로 그의 밀교 전파에 대한 공로는 컸다. 혜통 이전까지 전래된 밀교는 잡밀교(雜密敎)여서 주술적인 면이 강조된 반면, 혜통은 불가사의의 순밀교(純密敎)를 처음 신라에 전했다.


*혜편(惠便)---584년 최초로 일본에 건너가서 포교활동을 한 고구려 승려. 그는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으며, 당시 일본의 세력가 소가 우마꼬(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선신(善信) ?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켜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됐다.


*혜학(慧學, 산스크리트어 adhipanna-sikkha)---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 삼학의 하나. 혜학은 통찰지(洞察智), 곧 반야(般若)의 개발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혜학은 마음의 밝은 빛을 드러내 바르게 쓰는 지혜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그 행실에 계행(戒行)이 없으면 마음이 흔들리고 거칠어져서 고요하고 맑은 본성을 보지 못하게 되며, 마음(定)이 흔들리고 맑지 못하면 지혜(慧)가 없어 옳고 그름과 선악 을 분별 못하며, 수행은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혜학은 치독(痴毒)을 치유하는 수행으로 법문을 공부해서 연기(緣起)와 중도(中道)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혜학은 계학과 정학을 바탕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며, 팔정도에 있어서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가 혜학(慧學)에 속한다.


*혜해탈(慧解脫)---해탈의 길에는 신해탈(信解脫; 신앙에 의한 해탈), 심해탈(心解脫; 정에 의한 것), 혜해탈(慧解脫) 등 세 가지가 있다. 혜해탈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일컫는다. 즉, 혜해탈은 두뇌적인 면, 즉 혼(魂) 속의 마음의 영역으로서의 지성적 판단의 부분, 이성적인 부분에 의한 해탈이다.

   따라서 혜해탈은 ‘무명(無明)의 극복’이 중심이 돼 있다. 지혜의 측면에서 알고 있으면 헤매지 않아도 되는 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는 일, 그리고 그 결과, 마음에 독이 생기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모르기 때문에 갖가지 사건에 휘말려 들어 세상사에 고뇌하고 번뇌하고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하여 마음이 자유로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지혜, 깊은 지식을 얻음으로써, 어리석게 헤매는 것을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 일, 이것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혜해탈은 상당히 이성적인 측면을 포함한, 이성적인 해탈방법이다. 신해탈(信解脫)이 만인에 대해 열린 문이라고 한다면, 혜해탈은 다소나마 지적인 사색능력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문적인 영역에 들어가며, 다소 지도자적인 사람이 배워야 할 해탈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무명(無明)으로부터의 탈출, 무명을 극복하기 위해 혜해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상당한 지식이나 경험도 필요하다. 혜해탈에도 깊이가 있다. 특히 ‘반야의 지혜’를 얻는 단계가 되면 상당히 고도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즉, 혜해탈의 상태에까지 오면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들어간 상태에 와 있는 것이다. ---→신해탈(信解脫), 심해탈(心解脫) 참조.


*혜현(慧顯)---백제 위덕왕~무왕(570~627) 때의 고승. 일명 惠現, 惠顯, 慧現 등으로 적기도 한다. 어려서 집을 떠나 불도에 전념해 법화경(法華經)과 삼론(三論)을 깨우치고 수덕사(修德寺)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에게 강론을 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차차 번잡한 생활이 싫어져 강남(江南)의 달라산(達拏山)에 들어가 세상을 잊고 정좌해 일생을 마쳤다. 다른 승려가 시체를 운반해 석실 안에 안치했던바 호랑이가 와서 그 시체를 다 먹어버렸으나 다만 혀를 남겼다. 그 뒤 혀는 3년을 두고 추위와 더위를 겪어도 그대로 붉고 연하더니 나중에 돌같이 굳자 중들이 공경해 석탑에 간직했다고 한다. 당(唐)ㆍ서역 등지에 유학한 일은 없으나 그의 이름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당나라에서는 혜현의 전기를 꾸미기까지 했다.


*호궤(胡?)---불교에서, 양쪽 발을 구부리고 양 무릎은 나란히 땅에 닿게 하며, 경(敬)과 예(禮)의 뜻을 나타내는 꿇어앉는 좌법이다. 호(胡)는 인도와 서역을 일컬음. 인도와 서역인들의 무릎을 꿇는 예법. 장궤(長?)라고도 함.


*호마법(護摩法)---재를 지낼 때 불을 피우고, 그 속에 공물을 태우는 의식으로서, 베다 이래로 전통적인 브라만교의 주술의식이었는데, 힌두교에서 이어받은 것을 다시 밀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호마에는 밖으로 하는 외호마가 있고 안으로 하는 내호마가 있다. 내호마는 안으로 지혜를 불로 상징해서 지혜의 불로써 어두운 마음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이고, 외호마는 밖으로 제사지내는 불길을 통해서 나쁜 운수를 몰아내고 좋은 복덕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호법(護法, 530~561, 산스크리트어 다르마팔라/Dharmap?la)---달마바라(達磨波羅)로 음역한다. 인도 대승불교 유가행파(瑜伽行派)의 학승이다. 6세기 중기 드라비다국 대신(大臣)의 아들로 태어나, 그 나라 공주와의 결혼 첫날밤에 신방을 몰래 빠져나와 출가했다. 그의 학문은 대소승(大小乘)에 모두 정통했고, 특히 유식학(唯識學) 연구의 대가였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주석을 가해 세친의 사상 해석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다. 호법의 학설은 현장(玄?)을 통해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그의 저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바탕으로 법상종(法相宗)이 성립됐다.


*호신주(護身呪, Paritta)---몸을 보호해 주는 주문, 악귀와 불행, 질병 그리고 액운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호주(護呪) 혹은 호신주(護身呪)라고 불리는 파리타(Paritta)를 밀교에서는 주다라니(呪陀羅尼)라 해서, 재난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보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세속의 주술이나 밀법(密法)을 행하는 것을 엄금했으나, 실제로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이미 호신주(護身呪)가 쓰였고, 대승불교 초기에 부분적으로 다라니가 채택돼 차츰 증대돼 갔다.


*홍인(弘忍, 601~674)---당나라 시대 중국 선종의 제5조로 달마(達磨) ? 혜가(慧可)로 시작되는 중국 선종의 실제적인 확립자이다. 제자인 신수(神秀) ? 혜능(慧能)으로 하여금 남북 각지에서 선(禪)을 펴게 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온갖 욕망과 번뇌에 더럽혀 있기 때문에 불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믿지 못하고 있다. 불보살이 이와 같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들과 같은 위치로 내려가서 먼지에 오염돼 가면서 중생을 선도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 화광동진이다. 예를 들면, 관세음보살이 33개의 몸을 나타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도 화광동진이다. 


*화광여래(華光如來)---<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나오는 여래, 부처님께서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사리불(舍利弗;Sariputra)에게 수기(授記)하시기를, 미래세에 부처가 돼 이구국(離垢國)에 화광여래(華光如來)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화남(和南, 산스크리트어 반다나/vandana)---계수(稽首)ㆍ경화(敬化)ㆍ공경(恭敬) ? 경례(敬禮)한다는 등을 의미한다. 즉, 경건한 마음으로 인사함, 합장하고 머리 숙여 안부를 물음 등의 뜻이다.


*화두(話頭)---화두란 참선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데 제시되는 문제를 일컫는다. 즉,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나 핵심주제이다. 그리하여 화두를 통해(들고) 수행자가 큰 의심을 일으키고[참구(參究)], 스스로 그 의심삼매에 들어 무심의 경계에 든 후 홀연히 무엇을 보거나, 혹은 무엇을 듣는 찰나에 화두를 타파(打破-깨달음)하게 되는데, 그런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다만 화두란 일종의 암호에 불과하므로 이를 분석해서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서툴게 분석하고 억측하는 것이 바로 수행에 큰 장애인 알음알이임을 명심해야 한다. 간화선에 있어서 그 핵심인 공안(公案)과 화두(話頭)를 두고 그동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엄격히 다른 것이다.---→공안(公案),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참조.

  

*화락천(化樂天)---욕계 6천 중 제5천임.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스스로 즐거운 생활을 누리기에 화자재천(化自在天)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서로 마주 서서 웃기만 해도 성욕이 만족된다.


*화법사교(化法四敎)---천태종의 교판(敎判)에서, 붓다의 가르침의 내용, 즉 설교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1) 장교(藏敎) - 아함경을 비롯한 초기의 가르침. 즉, 소승의 가르침을 말함. 

     2) 통교(通敎) - 성문 ? 연각 ? 보살에게 공통되는 가르침. 즉, 대승과 소승에 두루 통하는 가르침.---→삼승통교(三乘通敎) 참조.

     3) 별교(別敎) - 보살만을 위한 가르침. 즉, 대승만을 설교한 가르침을 말함.---→별교일승(別敎一乘) 참조.

     4) 원교(圓敎) - 붓다가 체득한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가장 완전한 가르침. 즉, 모든 것을 포함하는 원만한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법화경이 여기에 해당함.---→오시교판(五時敎判), 화의사교(化儀四敎) 참조.


*화상(和尙)---화상은 역생(力生)으로도 번역되는데, 스승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화상은 제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책을 읽히고 가르치기 때문에 친교(親敎)라고도 한다. 이 화상은 불교의 3사(師)인 은사(恩師) ? 법사(法師) ? 계사(戒師)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나, 특히 은사의 의미가 가장 크다. 화상은 구족계 (具足戒)를 받은 뒤 10년 이상 됐고, 신심(信心)이 돈독하며 정진(精進)이 깊어 헛된 생각이 없는 자라야 한다.


*화상삼보(化相三寶)---부처님과 관련된 불(佛) ? 법(法) ? 승(僧)을 세 가지 보물을 말함. 불보(佛寶)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리의 모습으로 그대로 나타나기 어려우니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석가족의 이름을 빌려서 오셨고, 변화해서 오신 분이라 화(化)자를 쓴다. 법보(法寶)는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다. 그리고 승보(僧寶)는 성문, 연각,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리불존자 등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수행하던 스님들이다.


*화생(化生)---사생(四生) ― 태생, 난생, 습생, 화생 ― 의 하나. 다른 물건에 기생하지 않고 스스로 업력에 의해 갑자기 화성(化成)하는 자를 이른다. 낳는 자 없이 업력(業力)에 의해 홀연히 태어나는 것. 즉, 천신이나 귀신, 아수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헌데 화생의 본래 취지는 자신의 업력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보다 ‘진리를 깨달아서 거듭 태어남’을 의미한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의 사람은 겉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속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도 전과 같지 않게 달라져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즉 깨닫게 되면 자기의 업력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과보도 달라지며,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새롭게 진정한 불자로 거듭 태어나는, 이 게 진정한 화생이라 하겠다.---→사생(四生) 참조.


*화엄(華嚴)---화엄(華嚴)’은 ‘잡화장엄(雜華莊嚴)’의 줄임말이다. 화(華)는 부처님의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꽃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화엄(華嚴)이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의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서 불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화엄이란 바닷물이 육지의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이 화엄법문이 모든 다른 제경의 법문을 수용해 융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엄법문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만법을 조화 통일한다는 것이다. 분파적인 분열을 극복 총체적인 하나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사상의 보편적인 가지의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가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普賢行願)으로 설명된다.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계를 증득한 비로자나의 경계를 실천적 체험으로 얻어내는 것이 보현행원이다.  


*화엄경(華嚴經)---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한국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이다.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현재 한역본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동진역본(東晋譯本) 60화엄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당역본(唐譯本) 80화엄, 반야삼장(般若三藏)이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지가 있다.

   60화엄과 80화엄은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없으나 40화엄은 60권 본과 80권 본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화엄경의 완역본이 아니다. 화엄경은 각장마다 독립적으로 발전하다가 4세기 경 집대성된 것으로 보이며, <십지품(十地品)>은 1~2세기 경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화엄경의 한역본이 나타난 이래 그 회통적인 철학성은 동양사상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다.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경전이며, 화엄사상(華嚴思想)은 매우 심오한 사상이다. 화엄경은 궁극적으로 연화장세계(連華藏世界)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이다. 그리고 중중무진으로 연기된 법계는 사법계(四法界),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의 성질을 가지고 연기돼 있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해 끝없이 전개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연화장 세계에서는 항상 화엄경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이 대광명을 비추어 모든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대교(大敎) 혹은 원교(圓敎)라 한다.

   이러한 화엄사상을 우리 풍토에 맞게 정리해 낸 분이 의상(義湘)대사이고, 이 화엄사상을 우리나라 불교에 적용시켜 우리나라 불교로 하여금 회통불교를 지향하게 기반을 다진 분이 원효(元曉)대사이다.


*화엄경 법성게(法性偈)---중국에 가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한 의상(義湘)대사가 화엄경의 핵심 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게송으로, 의상대사의 탁월한 안목과 지혜, 간절한 자비심이 담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는 <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이다.


*화엄경 약찬게(華嚴經 略纂偈)---용수보살이 화엄경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게송. 화엄경의 내용과 분량이 너무 광대해 용수보살이 약찬게로 집약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화엄경의 마지막 품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남방으로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도를 구해 법계의 이치를 터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60권 화엄경에서는 제44권 이하이며, 80권 화엄경에서는 제61권 이하이다. <입법계품(入法界品)>이라는 품의 뜻을 풀어 보면,

    “법계에 들어가는 품”이라는 말이다. 공부를 많이 해 마음이 밝아져서 미혹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깜깜한 마음이 환한 마음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들어간다(入)는 의미이다. 그리고 법계(法界)는 법의 세계를 뜻한다. 즉 진리의 세계이다. 진리의 세계는 바로 우주적인 나를 의미한다. 온 우주와 혼연히 하나가 된 나의 몸이, 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본래 나는 우주와 하나인 존재이다. 그래서 ‘입법계(入法界)’란 본래 이 우주와 하나인 내가 다시 개인과 사회 전체와 나아가 사물 하나하나에 통철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입법계품’이란 진리의 세계인 법계로 들어가는 것을 밝혀놓은 경문이라는 뜻이 되겠다.


*화엄 사법계(四法界)---→사법계(四法界) 참조.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산림법회(山林法會)란 사찰에서 불경을 강설하는 모임을 말한다. 화엄산림은 화엄경을 설하는 법회가 일정기간 계속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엄’은 경전의 제명을 줄인 것이고, ‘산림’은 ‘최절인아산 장양공덕림(?折人我山 長養功德林)’에서 따온 말로서 아만심을 없애고 공덕의 숲을 키워나간다는 뜻이다.

   이 같은 화엄법회는 신라시대부터 있어왔으며, 지금의 화엄산림법회는 1927녀 12월 8일부터 1928년 1월 3일까지 21일 동안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鏡峰)스님이 출가자와 재가신도가 동참해 화엄의 바다에서 함께 수행하는 화엄법석을 마련한 것이 시초이다. 매일 화엄신중의 명호를 외고, 신중께 치성 기도드리는 신중기도를 하며, 108예참을 한다. 또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독송한다.


*화엄삼매(華嚴三昧)---해인삼매는 존재의 세계관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지표를 말한 것이 화엄삼매이다. 다시 말해서 해인삼매로서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드러나고 이를 사회에 실현하고, 또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화엄삼매이다.


*화엄성중(華嚴聖衆)---화엄신장(華嚴神將), 화엄신중(華嚴神衆)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전면 중심을 보면 상단(불단), 중단(신중단), 하단(영단)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중단에 화엄성중(華嚴聖衆) 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모신 탱화를 볼 수 있다. 즉, 신중(神衆)탱화는 신중단인 중단에 불법을 호위하는 신장님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신중(神衆)은 화엄경에 나오는 104분의 성현, 신장들, 8금강, 4보살, 10대명왕, 대범천왕, 제석천왕, 사천왕 등 각 천왕과 천자, 호법선신 등을 말한다.

   신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 불법을 옹호하고 불자들을 보호해주는 선한 신으로 화엄신앙의 대상이다. 화엄신중의 예를 들면,

      ? 금강신(金剛神)- 절에 들어가는 문이나 전각의 입구에 서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

      ? 신중신(身衆神) - 중생을 마음대로 이익하게 하는 신 등 39位, 104位의 신장이 있다.


*화엄 10지(華嚴 10地)---십지보살(十地菩薩) 참조.


*화연(化緣)---화연은 쓰임에 따라 몇 가지 다른 뜻이 있다.

      ?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 불보살의 출현은 이 때문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곧 열반에 든다.

      ? 교화를 받아들일 인연이 되는 중생의 근기(根機).

      ? 스님들이 탁발을 하는 것. 즉, 탁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절집의 말임.


*화의사교(化儀四敎)---천태종의 교상판석(敎相判釋)에서 세존의 가르침을 형식에 따라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나누었다. 5시란 화엄시, 녹원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 ? 열반시로 구성돼 있고, 이것을 또 오미(五味)라고도 한다. 8교라고 하는 것은 돈교 ? 점교 ? 비밀교 ? 부정교와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이다. 이 중 돈교 ? 점교 ? 비밀교 ? 부정교의 4교를 화의사교(化儀四敎)라 하고, 나머지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의 4교를 화법사교(化法四敎)라고 한다.

     1) 돈교(頓敎) - 진리를 그대로 설법한 것. 점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가는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깨달음의 경지에서 그대로 중생들에게 표명하는 가르침의 방법이다.

     2) 점교(漸敎) - 중생의 기근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설법한 것.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얕은 가르침으로부터 깊은 가르침으로 또는 작은 것에서 점차 큰 것으로 순서를 밟아가며 중생을 교화시키는 방법이다. 녹원시 ? 방등시 ? 반야시에서 차례로 설한 경전이 여기에 해당함.

     3) 비밀교(?密敎) - 똑같은 가르침이라도 기근에 따라서 각각 다른 이익을 받고, 그러면서도 서로는 그것을 모르는 것. 곧 비밀스러우며 일정하지 않은 교화방법이며, 이는 밀교(密敎)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지 교화방법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의 형태를 말한다. 즉 대중들이 같은 설법장소에 있더라도 받아들이는 가르침의 상태를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비밀교라 한다.

     4) 부정교(不定敎) - 같은 내용을 설하지만 듣는 이들이 근기에 따라 이해해서 각자 다른 이익을 얻게 하는 가르침. 비밀교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에서 각기 능력이 다른 중생이 있는 경우에 불가피하게도 능력이 모자란 자에게는 대승을 설하거나 능력이 있는 자에게 소승을 설하게 되지만, 부처님의 부사의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청중들은 그들의 능력에 맞게 소승의 가르침을 듣고도 대승을 이해하게 되고, 또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도 소승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교’라는 명칭은 일정한 교화방법이 아니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화법사교(化法四敎) 참조.


*화장세계(華藏世界)---→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참조.


*화장찰해(華藏刹海)---화려하고 장엄한 경인 화엄경의 말씀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삼천대천세계에 화려하게 장엄되는 것과 같이 되시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찰해(刹海)는 바다와 육지라는 뜻으로, 삼천대천세계의 법계(法界)를 뜻한다.


*화쟁(和諍)---원효대사의 사상. 화쟁은 여러 사상과 논쟁 가운데 그 핵심을 파악해 곡해와 대립을 낳고 있는 부분을 서로 통하게 해 원융(圓融)을 이루는 사상체계이다. 즉, 원효대사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한마을(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통합하려 했다. 이것이 화쟁사상이다. 그리하여 원효대사는 화쟁사상으로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넘어섰다.


*화주(化主)---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 ? 물건 ? 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승려. 사찰의 불사 비용을 담당하는 사람. 화주승이라고도 한다.


*화택(火宅)---불이 일어난 집이라는 뜻으로,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속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화화삼매(化火三昧)---몸을 불태움으로써 삼매에 드는 것을 말함.


*환멸문(還滅門, 빠띠로마/pa?iloma - 逆觀)---적멸(寂滅)로 들어가는 문. 곧 수행한 공덕으로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향하는 인과(因果)이다.

   12연기를 설명함에 있어서 “무명(無明)에 연(緣)해 행(行)이 있으며, 행에 연해 식(識)이 있으며,……”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거나, 혹은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곧 식이 멸하고, ……유가 멸하면 곧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곧 노사의 우비고뇌(憂悲苦惱)가 멸하느니라.”라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후자의 설법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며…”로서, 이는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을 멸해 없앰으로써 가능할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형식이 환멸문(還滅門)의 연기, 역관(逆觀)의 12연기이다. 즉, 이 경문의 설법형식은 미혹된 생존의 소멸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무명의 멸(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이 과정을 환멸문(還滅門 - 逆觀)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 - 順觀)이라 한다. 유전문(流轉門)이 고통의 원인을 밝힌 데 반해 환멸문은 깨달음의 세계를 보이는데 그 목적이 있다.---→유전문(流轉門), 12연기 참조.


*환희불(歡喜佛)---남성이 여성을 껴안고 있는 부처, 즉 ‘합체존(合體尊)’의 도상을 티베트 밀교에서는 ‘얍 윰(yab-yum)’, 또는 ‘환희불(歡喜佛)’이라 한다. ‘얍(yab)’은 ‘우주父[시바에너지]’이며 ‘윰(yum)’은 ‘우주母[샤크티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우주에 넘치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만남 또는 ‘시간’과 ‘공간’의 결합은 깨달음의 성스러운 모습이라 해서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티베트 밀교의 합체존(合體尊)은 ‘부처’와 ‘인간’이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또한 너와 나, 시바와 샤크티가 하나로 융합될 때, 이 세계는 대락(大樂) 구현의 환희의 나라가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남녀 교합상은 좌도밀교(左道密敎)에서 불교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남녀 교합상에 대해 밀교에서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해 인간의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를 오히려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성스러운 것과의 합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육체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신비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데는 환희가 따르게 된다. 이 환희의 고양감을 수행 정도에 따라 환희(歡喜) ? 최상환회(最上歡喜) ? 이환희(離歡喜) ? 구생환회(俱生歡喜)의 4환희로 나누고, 4환희가 성취된 모습을 환희불(歡喜佛)이라 한다.---→‘얍 윰’ 참조.


*환희지(歡喜地)---<화엄경> 십지품(十地品) 가운데 제1지가 환희지이다. 즉, 보살의 수행 단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을 10지(地)라 하고, 환희지(歡喜地)는 보살이 처음으로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기쁨을 느끼는 10지 중 제1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行)을 이루어서 마음에 기뻐함이 많다 해서 이르는 말이다. 보살이 환희지에서 느끼는 기쁨이란 곧 부처님을 믿고 공경할 때 생겨나는 마음이며, 모든 번뇌를 떨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십지(十地), 이구지(離垢地) 참조.


*황교(黃敎)---라마교의 한 파, 라마교의 일파인 홍교(紅敎)라마는 원(元)왕조의 보호를 받아 타락했으므로, 명(明) 초기(15세기)에 나타난 총카파(宗喀巴)가 이를 개혁해 황교(黃敎)라마의 신종파를 창립했다. 홍교 혁신을 위해 세웠으므로 계율이 엄격하고 도덕적 교의를 중요시했다.---→총카파(Tsong?kha?pa, 宗喀巴) 참조.


*황벽 희운(黃壁希運, 776~856)---황벽 희운은 당나라 시대의 선사로 백장 회해(百丈悔海)의 제자이다. 평소 활달한 천성에 사소한 일에는 집착하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7척의 키에 이마가 튀어나와 육주(肉珠)라는 별명이 있었다.

   스님의 저서〈전심법요(傳心法要)>는 선(禪)의 개론서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남종선의 정통 선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의 선법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스님은 설파했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 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한 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해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황천(黃泉)---고대인에 의해 지하에 있다고 상상되던 세계. 사자(死者)들이 산다는 암흑의 타계(他界)이다. 구천(九泉) ? 황토(黃土) ? 명도(冥途) ? 저승이라고도 한다. 황천이라 함은 중국 오행(五行)에서 땅 빛을 노랑으로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자신을 반성해서 곧바로 자기 심성의 신령한 성품을 비쳐 보는 것.

   이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는데,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한 번 번쩍 생기고,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한다.’는 의미이다.


*회삼귀일(會三歸一)---<법화경(法華經)>의 비유품(臂喩品)에 나오는 세 수레의 비유가 회삼귀일을 상징한다. 세존이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에는 성문 ? 연각 ? 보살의 삼승(三乘)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모두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뜻. 온갖 주장과 입장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룰 때 부처님의 세계로 통하게 된다는 말이다. 원효대사의 화쟁(和諍) 사상의 연원이기도 한 말이다.


*회상(會上)---대중이 모인 법회. 설법하는 모임. 설법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자리.


*회자정리(會者定離)---<유교경(遺敎經)>에 나오는 8고(八苦)의 하나.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돼 있다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나타내는 말. 즉,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별의 아쉬움을 일컫는 말.---→팔고(八苦) 참조.


*회통불교(會通佛敎)---통불교(通佛敎)와 같은 말임.---→통불교(通佛敎) 참조.


*회향(廻向)---되돌린다는 뜻. 회향이란 스스로 쌓은 선근(善根)과 공덕(功德)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어 자타(自他)가 함께 불과(佛果)의 성취를 기하려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가 쌓은 공덕을 중생들에게 되돌려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거나, 모든 중생들도 깨닫게 하는 자비의 실천을 말한다. 사홍서원(四弘誓願)에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는 것이 회향심의 표현이고, 대승불교의 기본 정신인 자리이타(自利利他)나 요익중생(饒益衆生) 역시 마찬가지이다. 크게 깨닫게 하는 것 외에 작게는 물질적으로 함께 하는 회향 방법도 있다. 예컨대, 재를 지낸 후 그 음식을 나누는 것도 작은 회향의 한 방법이다.


*효봉(曉峰, 1888~1966)---평양출신.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돼 법조계에서 일했다. 1923년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회의에 빠져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출가했다.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부터 10여 년간 송광사 삼일암에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구도관을 확립했다. 1947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方丈)으로 추대됐고, 1954년 경상남도 통영군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조계종 종회의장에 취임했다. 1957년 종무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종정에 추대되고, 1962년 통합종단 종정에 오르는 등 우리나라 불교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후득지(後得智)---보고, 듣고, 배워 익힌 지(智), 세속사를 이해하는 얕은 지혜를 일컫는다. 불성[본래심]에 구족된 지혜를 근본지(根本智)라 하고, 다양한 사건과 시련, 그리고 수행과 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를 후득지(後得智)라고 한다. 인간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일어나는 다양한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은 근본지라기보다는 시련의 극복과 수행을 통해 체득한 체험의 지혜인 후득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근본지의 기반 없는 후득지도 곤란하지만 후득지 없는 근본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근본지(根本智) 참조.


*후유(後有)---열반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미래에 받는 미혹의 삶. 후세의 유(有), 즉 유는 과보가 있다는 뜻으로, 아직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 다음 생에서 받는 몸과 마음을 후유라 한다. 이는 내생(來生)에서 윤회를 되풀이하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결국은 미망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말이다.


*흑산귀굴(黑山鬼窟)---참선을 할 때 눈은 반안반개(半眼半開-반쯤 가볍게 뜸)하고 시선은 자기 앞 1m 전방에 자연스럽게 놓아야 한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입정(入定)하는 것을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들어간다 한다. 참선에 서툰 초학자는 눈을 감기 쉽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듯하지만, 어느덧 혼침(昏沈)에 떨어지기 쉽다. 금세 잠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눈 감고 참선을 하는 것을 흑산귀굴이라 한다. 따라서 참선할 때 반드시 눈을 떠야 한다.


*흔구정토(欣求淨土)---깨끗한 땅을 찾아 나서다는 말. 더럽혀진 세상을 피해 떠난다는 염리예토(厭離穢土)와 짝을 이룬다. 곧 더럽혀진 세상이 싫어서 속세를 떠나 이상적인 극락세계에 갈 것을 갈망함을 이르는 말이다.---→염리예토(厭離穢土) 참조.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흥법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에 고려 태조 20년(937) 당시 왕사였던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이 입적하자, 태조 23년(940)에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공대사가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에 소속된 스님인 점을 감안하면 선종사찰임에 틀림없으며, 고려 태조는 진공대사(869~937)를 왕사로 임명하고 흥법사를 중건해주는 등 극진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 선 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 명에 달하며 번창하게 됐다. 이후 대사가 71세로 입적, 태조는 시호를 진공(眞空)이라 내렸으며, 흥법사에 부도를 세우고 손수 비문을 짓는 등 예우를 다했다.

   원래 흥법사지에는 전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부도탑(보물 제365호),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가 있었으나,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됐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진공대사탑비는 비신의 중간부분은 없어진 채 깨어진 조각 4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절터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으며,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이 남아 있다.


*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ca)---용수(龍樹)가 쓴 <중론(中論)>에 나타나는 개념으로, 허구적인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전도된 인식이다. 예컨대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할 때 마치 그 말에 따라 어떤 영속적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이런 허망한 언어, 무의미한 말, 헛소리에 가까운 말장난을 희론이라 한다.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은 바로 이런 망상(희론)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망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이덕호(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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