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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회사원 외 4편/금은돌(김석)

시치 2013. 4. 21. 02:06
제27회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회사원 외 4편/금은돌(김석)|


1.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가는데 엎질러지는 시간이 흔들린다 시간은 책상에 앉을 때까지 혀를 날름거리고 자판을 두드릴 때 엎질러질 것이가? 흘러내릴 것인가? 고민한다


  누군가 팔꿈치를 밀쳤을 때 엎질러지려는 시간이 솟구친다 엎질러진 시간이 되기 직전 엎질러지려는 시간이 비행접시 문양으로 미끄러지고


  나는 서둘러 엎질러지려는 시간을 결재 서류에 입력한다
  잔속의 출렁이는 시계들이 확, 뒤집힐까, 한다


2.
   덜컹거리는 퇴근버스, 엎치락뒤치락하던 시간이 앞사람 머리카락에 들러붙는다 구둣발에 짓밟히다가 신경질에 휩쓸리다가 한 템포를 놓친 욕설이 튀어나온다


  난데없이 엎질러진 후회가 뛰어든다

 

  아차차, 급브레이크 엎어지고자 하는 시간이 바퀴 밑에 달라붙는다 바퀴는 미끄러지며 관성의 법칙으로 흐를까, 한다 엎어졌던 시간이 튀어나와 엎질러지려는 시간을 추돌한다 엎질러지려는 시간이 엎어졌던 시간의 멱살을 틀어 잡는다


  엎지락뒤치락하던 것들이 서로에게 피해보상액을 따지고 있다

  확, 창밖으로 뛰어내릴까,한다 엎질러지지 못한 내가 정류장에 도착한다

 


말하는 고양이


  이별을 할 때마다 물음표를 핥아먹는 고양이가 생긴다고 하자 그때마다 꼬리 달린 말풍성이 늘어난다고 하자 "잘 가"라고 인사도 하지 않은 당신을 향해 풍선을 던진다고 하자 파닥파닥 풍선이 터지고 혹이 돋는다고 하자 그 혹에 모자를 걸고, 매일같이 모자를 바뀌 쓴다고 하자 사라진 애인들이 모자에 달라붙는다고 하자 요리조리 골라내어 애인을 바꿔 쓴다고 하자 지루한 모자를 벗을 때마다 내 혹에서 능구렁이가 튀어나온다고 하자 그 능구렁이가 당신의 연락처를 날름거린다고 하자 "꺼져"라고 말할 때 내 입속으로 능구렁이가 들어온다고 하자 몸 안을 떠돌다가 겨드랑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다고 하자 구멍을 뚫고 나와 2인용 식탁에 앉는다고 하자 아침엔 사랑의 물음표를 저녁엔 증오의 대답을 내민다고 하자 "먹을 수 없다니까" 능구렁이와 내가 밤마다 싸운다고 하자 하, 하, 하, 하자하자가 있는 것끼리 절망을 나누어 본다고 하자 모든 세상의 의심을 진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자

 


상자를 들다


  발자국을 떠온다 얼음 구덩이에 박힌 '어디로 가려 한 것이었나'가 들려 나온다 움푹 파인 흉터까지 따라온 것인가

 

  왼쪽으로 축이 기울어진 복숭아뼈가 아리다 발자국이, 그 발자국 위의 발자국이 또 그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걷고 있다 걸음은 걸음을 불러들이고 습관은 고집스레 산을 오르려 하는데

 

  부서지지 않게 상자에 집어 넣는다 입김 한줌 넣어 밀봉을 하고 돌아서버리려는데

 

  걸음새는 그가 당도한 허공을 무너드리고 네쌈삐리리네쌈삐리리* 안나푸르나의 노래 속에 아이젠을 박는다

 

  나는 걸음을 가둔 것인가, 혀를 가둔 것인가

 

  상자를 들고 내가 첫발을 뗸다 삐져나온 후렴구가 산 자의 손등을 할키고 지나가고

 

  그가 박아놓은 걸음은 만년 동안 되살아나는 메아리일 것이다

 


화분

 

  잘려진 발목을 올려놓는다
  그녀는 아이의 발목을 뒤집어 심는다 꽃이 필때까지


  잘 걷고 있니 족문足紋은 어디다 버리고 왔니 엄마 발이 허전해요 벌레가 자꾸 기어 들어와요 벌레가 내 허벅지를 갉아 먹는 꿈을 꿨다고요 물구나무 선채 눈만 껌뻑거려야 해요 내가 뭐랬지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고 했잖니 그냥 엄마 신발이나 사 줘요 애야, 발은 꽃이 아니란다 다 네 책임이란다 처음부터 하얀 피 빨아 먹는 거머리를 삼킨 건 너잖니? 후회하지 마라 난 그러라는 적 없었다 가만 내버려 두세요 그 대신 하늘을 걷고 있잖아요 어디다 옮겨 심어야 만족滿足하겠니 도데체 네 발목을 어디끼자 잘라내야 멈춰 서겠니 내 계단은 멈추지 않아요 19층에 올라선 복숭아뼈가 가려워요 난 혼자가 아니었다니까요 누군가 내 등 위에 따갑게 달라붙어 있잖아요 좀 떼어주실래요 애야, 그럼 나를 몽둥이로 쓰거라


  아이가 화분을 올려놓는다 안테나처럼 자라는 선인장, 거봐요! 나에게 맞는 신발이 없잖아요

 


키스 1초 전


  밤은 비약을 좋아하지


線이-나를 침범하고-나는 가위로 線을 자르려 하고-너는 線을 뛰

어넘지 못해-너의 몸에 線을 긋고-나의 몸에 금을 쳐놓은 線으로-나

는 빗살무늬 방패를 만들고-시간은 몰래 탁자 아래서 초를 치며 뛰어

가고-천둥소리가 엉큼하게 구름 속에서 뒤엉키고-나는 목덜미를 타고

빗줄기로 단단해지는 척-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주룩주룩 흘러내린

線들이 너를 향해 널름거리고-담장을 타고 도망치려는 네 눈빛이-線이

사라지는 바닥에 미끄러져-너와

                                                                                     나, 순간의

 

 


김석(필명 금은돌):
경기도 안성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 박사 졸업.
저서:『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 (국학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