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울음소리 (외 5편)/허영둘
이것은 한 마지기 꽃밭이다 이 꽃들은 허공에서 핀다 가지런히, 아니 산만하게 한 음조씩 다른 빛깔로 핀다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모두 뱉어낸다 꽃 피는 소리에 달빛이 노랗게 익는다 꽃은 향기와 함께 한 계절을 떠메고 갈 기세다 허공이 치밀해지고 살갗이 따갑도록 향기가 달려든다 나는 꽃을 피해 봄밤을 닫는다 꽃은 바람이 되어 밤을 잘게 부순다 냄비처럼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물속에 넣고 삶는다 꽃이 핀다 와글와글 너의 옛날도 한 마지기 두 마지기 조깨껍데기처럼
엉겅퀴
매혹을 생각한다
끈적하게 엉겨 붙는 쓸쓸함 혹은
영감靈感 어린 화가의 붓
빛깔로 보면 몽상가의 다락방 같고
폭죽처럼 부푸는 상상은
목청 다해 부르던 그녀의 노래
나는 붉고 달콤하던 여름의 상처를 떠올린다
빛 되어 사라진 소멸의 입술들
지극한 상실을 생각한다
하늘의 하늘로 음파가 번진다
자홍빛 눈물로 구름을 유혹한다
허공이 고요히 흔들리고
천 갈래 향기가 피어 사랑은 아득하다
무성한 계절은 그늘이 짙어
향기가 환히 드러나는 법
나에게 가까이 오진 마세요
이곳에선 이슬도 발톱을 세운답니다
매혹을 훔치려다 햇살에 발을 찔렸다 헛디딘 마음을 찔렸다 지상에 가시를 두른 뜻은 창공을 밟고 눈으로만 오라는 것이지 흙 묻은 발로는 딛지 말라는 당부, 함부로 허공을 꺾지 말라는 경고에
눈을 찔렸다
눈이 눈물이 될 때까지
파고드는
서릿발 같은 햇살 한 쌈
볕처럼 돋는 매혹
낡은 바퀴가 있는 오후
담 아래 멈춰 선 접시꽃 두 송이
저 바퀴는 또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나는 잘못 배달된 3월 눈송이로 창을 꾸미고
아침의 사과 같은 휴식을 좋아해요
달빛을 만돌린처럼 튕기는 풀벌레의 작은 손과
지구를 묶으며 사라지는 기적소리에 골몰하지요
가끔 마른 바람 채찍 삼아 사막을 내달리고
숲의 정수리에 참빗을 꽂아 머리를 손질해요
숲 속에는 헝클어진 영혼들이 칡넝쿨처럼 자라지요
휘파람 소리 내는 정오의 바다를 지날 때
오래전 익사한 구름을 생각하지만
허공 속으로 사다리를 세우진 않아요
이 도시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용맹정진하지요
누군가 내 거처를 물어오면 지상을 통과하는 구름의 은유와
쉽사리 해독되지 않는 강물의 파랑을 보여줄 거예요
그는 관성의 힘으로 달려온 수레바퀴
멈추지 않는 길은 속도를 만나 벼랑이 되고
바람은 습관을 조금씩 녹슬게 하네요
완고한 햇빛도 생각을 더디게 하지요
길에 짓밟힌 질경이가 개체 수를 늘리는 동안
끓어오르는 지열에 하오가 흘러내려요
밟고 온 페달은 전화기 속 잡음처럼 목이 쉬었네요
만찬 끝낸 저 접시는 이제 더 이상 향기를 만들지 못하나요
적막을 베어 문 그늘에 사선의 바퀴살만 흥건해요
立春
동면의 벌레들이 서로 기대어 보리뿌리점을 치며 꿈꾸는 사이 호수는 엎드린 채 겨울을 난다 발치에 선 상수리 가지가 투둑투둑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미동도 없다 숲이 거북이걸음으로 추위를 지나는 동안 호수는 갑골동물처럼 단단해진다 바람이 칼끝을 대 여기저기 균열이 보인다 단단하다는 말을 깊이 들여다보니 맑고 투명한 속을 가졌다 어미가 자식을 안을 때의 마음 멈추지 않는 물결을 품고 있다 안간힘이 보인다 저 안간힘으로 굶주린 겨울에 한 켜씩 살을 내주고 갑골의 등을 얹었으리라 따각따각 등을 깎는 바람과 몸을 던져오는 뭉치 눈에 찰랑거리는 살도 아낌없이 주었으리라 딱딱하게 굳은 등을 구름이 쓰다듬고 쑥새가 토닥인다 샛별이 글썽 다녀간다 수초 속에 산란을 시작할 별과 헤살 지을 어린 것들 생각에 해산 앞둔 어미처럼 설레는 호수, 돌아온 봄이 등피를 살살 벗기면 겹겹의 물결로 만개할,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불은 젖을 물리며 호수는 봄밤처럼 그윽하겠다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 들어가 보니
처마 끝에 달 기울어 물속처럼 밤이 깊다
이따금 물방울 튀기듯 풀벌레 우니
석류 익는 담장 너머로 파문이 청량하다
담 모퉁이는 비밀을 키우기 좋은 장소
초롱불을 들었으나 갸륵한 불빛은
두 사람의 밀회를 전부 들추지 않는다
지상은 혼곤한 잠 속에 들고 먼 하늘에 별들 아련한데
스치듯 비껴가는 여인과 나의 눈길
먼지 낀 세월 사이로 별이 쏟아진다
물빛 쓰개치마 쓰다듬던 달빛이
여인의 눈꼬리 근처에서 교태를 더하니
사내의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이 흔들린다
묶어 올린 치마폭은 연심으로 부풀고
보얀 속곳과 오이씨 버선 위에서
화원의 은밀한 떨림도 만난다
밤은 애틋하게 익어가고
연정은 어스름 달빛에 녹아
사위가 몽롱하다
아득한 세월의 봉인을 열어 그들과 조우했으나 내가 읽은 것은 담벼락에 담긴 몇 줄 글귀뿐, 두 사람의 비밀한 내력 한 자락 읽지 못했다
어디로 향하는 걸음인지 사내의 가죽신은
어느새 마음 이끄는 곳으로 향하는데
따를 듯 말 듯 몸을 튼 여인의 자태가 야릇하다
달은 두 사람을 비추는 일로 은근하고
나는 저무는 달이 위태로운데
적막 속 스며든 안개만이 무심하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부산일보 201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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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둘 /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2년 〈부산일보〉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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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허영둘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 속의 우울을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과 눈 맞추게 하는 행위다. 형체 없이 스며 있던 상처와 욕망이 육체를 얻어 활동하게 하는 작업, 나무속에 들어가 가지 따라 솟구치고 햇볕에 몸 비비며 잎으로 팔랑거리게 하는 일이다. 바람의 팔과 햇살의 눈으로 고루 세상과 마주하는 일. 오래 바라보면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세계는 평등하고 풀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한 개의 삶도 눈물겹도록 진지하다.
보송보송 마른 마음으로는 시가 오지 않는다. 무언가 아련하고 아릿한, 나는 그것이 오랜 세월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우울이라는 것을 안다.
눈부신 날개를 팔랑이며 나비가 돌아온 아침이었다. 당선통보의 벅찬 감동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던 내 시력(詩力)에 대한 절망감에도 환하게 해를 비췄다. 살아 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살 것이다. 언제나 최초의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동진 회원님들, 유진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을 붙들고 밤을 새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슬그머니 놓고 나가던, 내 시의 첫 독자이며 평자인 남편 이일상 씨,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해 준 동걸,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 같은 다영이, 행운을 물고 우리 집으로 날아온 나현.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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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_ 김종해·천양희·김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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