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슬그머니/김 륭

시치 2012. 2. 7. 13:35

슬그머니/김 륭

 

 

 

   문득 눈을 떠보니 한 여자의 뱃속에서 울음을 꺼내고 있었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어디론가 떠내려갈 수 있을 듯 몸이 가벼워진 저녁이었지만,

 

   아무리 벗어던져도 서 있는 바지, 벽에 매달리는 바지, 스스로 벌 받는 바지, 못 박히는 바지, 남의 살과 남의 피를 뱉어내는 바지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내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턱하니 사과나무가 서 있었네. 내가 누워 있어야 할 자리에 사과나무가 발을 뻗고 있었네.

 

   바지 가득 잎을 매달고 살구나무라도 되고 싶었지만 입을 너무 많이 써버렸더군요. 나는 언제쯤이면 바지 속에 발 대신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저만치 늙은 사과나무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오네요.

 

   그녀 몰래 바지를 내렸네. 뿌리를 놓쳐버린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있는 힘껏 오줌을 갈기면서 밤새 하늘을 올려다보았네.

 

   평생 살아가면서 해야 할 고민이란 게 기껏 이런 거였네. 이를테면 슬그머니 내린 바지를 올릴까 말까.

 

   달이 식기를 기다렸네.

 

 

 

                           —《현대시》2012년 2월호

'必死 筆寫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가 새를 집어던지는 시간 / 김 륭   (0) 2012.04.06
개구리 울음소리 (외 5편)/허영둘  (0) 2012.02.07
의심/우대식  (0) 2011.12.26
수월(水月) (외 1편) / 조성국  (0) 2011.11.29
조율/서화  (0) 2011.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