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김 륭
문득 눈을 떠보니 한 여자의 뱃속에서 울음을 꺼내고 있었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어디론가 떠내려갈 수 있을 듯 몸이 가벼워진 저녁이었지만,
아무리 벗어던져도 서 있는 바지, 벽에 매달리는 바지, 스스로 벌 받는 바지, 못 박히는 바지, 남의 살과 남의 피를 뱉어내는 바지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내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턱하니 사과나무가 서 있었네. 내가 누워 있어야 할 자리에 사과나무가 발을 뻗고 있었네.
바지 가득 잎을 매달고 살구나무라도 되고 싶었지만 입을 너무 많이 써버렸더군요. 나는 언제쯤이면 바지 속에 발 대신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저만치 늙은 사과나무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오네요.
그녀 몰래 바지를 내렸네. 뿌리를 놓쳐버린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있는 힘껏 오줌을 갈기면서 밤새 하늘을 올려다보았네.
평생 살아가면서 해야 할 고민이란 게 기껏 이런 거였네. 이를테면 슬그머니 내린 바지를 올릴까 말까.
달이 식기를 기다렸네.
—《현대시》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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