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시인은 누구나 사랑의 날개가 있다 - 이 근 배(시인)

시치 2011. 12. 1. 00:48

시인은 누구나 사랑의 날개가 있다 - 이 근 배(시인)

 

아주 오래된 낱말 하나가 떠오른다. 동경(憧憬)이다. 그랬었다. 어린 날 나는 눈 붙일 곳이라고는 책밖에 없었다. 산골 소년은 문학의 바다를 생각으로만 헤엄치며 무언가 모를 무지개 같은 것, 심해에 자라는 진주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동경의 저쪽에는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문학(시)은 그렇게 사랑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나 이제 와서 돌아보면 무지개를 한 번도 손에 잡은 적이 없고 바다 깊이 숨어 있는 진주는 만나지 못한 채 여기까지 밀려와 있다.

 

시(예술)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언어로 사랑을 빚어내는 시인에게 있어 사랑은 농부에게 있어 흙이나 목수에게 있어 나무처럼 작품 생산의 원자재이다. 그러나 그 작업의 현장이나 목재더미는 좀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단테는 아홉 살에 만난 소녀 베아트리체를 위하여 불후의 「신곡」을 인류에게 바쳤고, 괴테나 하이네 같은 사랑시의 선수권자들도 작품으로만 사랑의 불빛을 비쳐주고 있다.

별만큼이나 많은 동서고금의 사랑의 시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은 겨우 낱알 몇 개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래도 으뜸의 시 한 편을 고르라 하면 나는 거침없이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시조를 쳐들고 싶다.

 

님 사랑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오리.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척화파를 이끌었던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며 그 자신도 우의정까지 오른 문신이다. 청나라 오랑캐가 쳐들어 올 때 세자, 왕자 등 궁실을 시중하고 강화로 피란을 갔다가 지킬 수 없게 되자 손자와 함께 남문루에 올라 폭약으로 순절殉節을 한 의인이기도 하다. 그런 기개 높은 선비가, 그것도 저 조선조의 남성 권능의 시대에 어찌나 지극한 사랑을 했으면, 어찌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졌으면 그토록 절절한 사랑시를 읊을 수 있었을까.

 

자주 내세우는 황진이나 이옥봉李玉峰도 이 시조에는 못 미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류 쪽에서는 그래도 나는 황진이보다는 이옥봉 쪽이다.

내 꿈의 혼이 발자취를 남긴다면 그대 문 앞의 돌길은 닳아서 모래가 되리.(若使夢魂行有跡門前石路半成沙)라든가 평생 이별의 한이 몸에 병이 되어 술을 마셔도 듣지를 않고 약을 써도 낫지를 않네.(平生離恨成身病 酒不能療藥不治)에 이르면 이미 이 나라 여인네가 쓸 만한 사랑의 시를 앞서서 남긴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의 시를 들춰내는 일, 어디 끝이 있으랴. 우리의 현대시사에 크고 빛났던 시인들의 숨은 사랑은 헤아릴 바 없고 드러난 그 어름산의 한 끝일 망정 뜬소문만으로도 가슴이 얼얼한 것을. 그 중에서도 내 눈으로 또렷하게 새겨보게 된 사랑이 있었으니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와의 애틋한 연분이다.

서울이 문단의 중심이던 때, 통영, 경주, 부산 쪽에서만 머무르면서도 시단의 우두머리가 되던 청마는 1967년 2월 13일 부산 미성극장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59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시인 박성룡은 그가 기자로 있는 《주간 한국》 두 쪽에 가득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와 사랑 이야기를 싣는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책 낼 거리를 찾던 출판사들은 청마, 정운과 각별했던 시인들을 내세워 출판 경쟁에 나선다. 어림없다고 손 흔들던 정운이 4월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부산으로 불러 아동문학가이며 《국제신문》 문화부장인 최계락과 나에게 편지 보따리를 내맡긴다.

 

청마가 정운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이 되던 다음해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45년 대구의 동인지 《죽순》에 시조 「제야」, 「바위」 등을 들고 나온 신인 여류시인이며 갓 서른에 홀몸이었던 정운의 아름다움과 요조숙녀의 자태에 청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로부터 스무 해 동안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편지였으니 그 길이는 얼마이며 깊이는 또 얼마이겠는가.

등록서류에 잉크도 안 마른 새내기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자리를 겨우 잡은 내게 정운은 정말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동래 금호장 호텔에서 편지 보따리를 대충 추려서 서울로 가져온 나는 거듭 추려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펴냈더니 서울의 종이값을 올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마와 정운, 그 문단사적 사랑의 역사는 모든 편지를 원본으로 읽었던 내가 두 시인 말고는 가장 세세하게 꿰뚫어보는 행운(?)을 누렸던 것이다.

 

청마의 서한집이 불티나게 팔릴 무렵 나는 영운 모윤숙의 회고록 『회상의 창가에서』를 편집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춘원, 우남(이승만), 메논 등의 이야기가 보다 상세하게 씌어 있었다. 영운은 내게 귀띔해주었다. 나도 그런 편지가 있어, 언젠가는 세상에 내놓을 날이 오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야, 이건 시한폭탄이구나 했다. 왜냐하면 영운이야말로 우리 문단사의 가장 화려한 스캔들 메이커가 아니었던가. 그가 스물세 살 때 첫시집 『빛나는 지역』을 낼 때 춘원은 여사는 조선의 땅을 안으려는 시인이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허리를 매고 조선의 제단에 횃불을 켜놓으려는 시인이다. 조선의 시인인 것을 감사한다. 등으로 서문을 장식 춘원에 의해 캐낸 진주가 되었었다. 그 후 1939년 조지훈이 졸라서 영운이 일기와 서간문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구인가는 밝히지 않은 채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뜨거운 물살로 씌어진 『렌의 애가』가 출판된다. 렌은 아프리카 숲속에서 혼자 우는 새의 이름이란다. 그 이름을 따서 자신은 렌으로,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옛이름 시몬을 상대의 이름으로 애절하게 부르는 긴 노래였다. 출판 닷새만에 매진되었고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유진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렌(영운)이 영혼과 육신을 태우며 그리는 시몬은 누구일까? 영운은 연령이 높은 스승격인 분에게서 신비로운 감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렌의 애가』에서도 시몬이 소개해준 혜명이란 남자와 결혼한 뒤, 시몬에게 끌리는 마음을 혜명에게서는 가질 수 없어 파경에 이른다. 실제로 영운에게 남자를 소개해준 사람이 춘원이었고 영운의 결혼이 파탄을 빚었기에 시몬을 춘원으로 떠올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영운은 구구한 억측도 많지만 난 그대로 침묵할 뿐이라면서 세상의 소문들에 대해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런 영운이 쌓아놓은 편지 보따리가 풀린다면? 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영운은 끝내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다.

 

산골 소년이 전설처럼 까마득하게 책 속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시인 모윤숙은 어느 날 내 손등에 입맞춤도 해주었었다. 이것만도 내 어린 날의 동경은 이루어진 셈인가. 나는 그런 세상을 흔드는 사랑의 반열에 오를 잡이가 못되니 꿈도 꾸지 말 일이나, 문학동네, 시인마을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소문 하나가 목월木月의 「이별의 노래」에 얽힌 이야기였다.

 

플라톤은 사람은 사랑을 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고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느 글에서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 묻는다면,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 쓴 일이 있다. 그 사랑에 빠져서 피워낸 한 송이의 시가 「이별의 노래」라고 나는 듣고 있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 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김성태 곡으로 널리 불리워지는 이 시는 목월이 한 여대생과의 짧으나 깊은 사랑의 헤어짐에서 샘솟은 것이란다. 1953년 대구로 피난을 내려간 목월은 어느 인사의 집에 기식寄食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집의 큰딸이 목월의 시와 사람에 이끌려 남모르는 사랑의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환도와 함께 목월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언니의 사랑은 묻혀지고 동생 H가 대학 진학으로 서울에 와서 목월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문학소녀와 시인의 아름다운 관계였던 것이 차츰 H의 가슴에서는 사랑의 싹으로 움이 트기 시작했다. 목월은 그것을 경계하고 후배 시인에 일러서까지 잠재우려 했지만 끝내는 목월도 H의 순열한 불꽃에 눈이 먼다. 두 사람이 제주도로 잠행하기에까지 이르렀고 그때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큰 미덕은 문단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시인의 사랑이 어디 여기서 끝나겠는가. 해금 이후 그것도 바로 몇 해 전에야 드러난 백석의 숨은 여인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거금을 희사했다. 백석에게 있어 그 여인이 어떤 강물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이 땅의 많고 많은 문학상 중에 숨겨진 사랑의 헌금으로 만들어진 문학상이 하나쯤 있다는 것만으로 시인은 행복하다 하겠다.

 

이상이 스물세 살 때 폐가 나빠져 배천온천에 갔다가 일곱 아래의 기생 금홍錦紅을 만나서 서울로 올라와 다방 <제비>를 차린 일도 문단사의 한쪽을 차지한다. 이상의 대표작품인 「날개」, 「봉별기」 등이 곧 금홍과의 사랑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게 정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영랑은 스무 살 안팎의 나이로 여고 4학년의 최승희崔承喜와 결혼까지 가려고 할 만큼 사랑을 했었다. 뒷날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으니 예술의 혼이 사랑을 빚는 것인가, 사랑이 예술의 혼을 더 불지르는 것인가.

 

외롭게 홀몸으로 살다가 간 노천명의 사랑도 글감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노천명이 스물일곱 살 때 극예술연구회에서 안톤 체홉의 「앵화원」을 공연하면서 주인공의 딸 아냐로 출연했는데, 연극을 보러 왔던 보성전문 교수 김광진金光鎭의 눈에 들어 결혼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광진은 아내와의 이혼이 늦어져 두 사람은 헤어지는 바 되었고, 유진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이혼』을 쓰기도 했다.

 

내게 시집으로 시를 가르쳐 준 시인으로 정지용, 서정주, 그 다음에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이 있다. 시골 랴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시 「나는 마지막 농촌 시인」을 쓰기도 했던 그는 러시아 혁명기에 기린아처럼 등장하여 시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스물일곱 살 시의 전성기에 순회공연차 러시아에 온 미국의 무희 이사도라 덩컨을 만난다. 열일곱 살 연상의 덩컨과 예세닌은 언어 소통도 안 되는 사이였지만 사랑은 국경을 넘고 언어를 넘어 곧바로 결혼식을 올린다. 미국까지 따라갔던 예세닌은 거울을 깨뜨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술, 마약, 창녀 등 처절한 몸부림을 치다가 서른 살 나이로 덩컨과 첫밤을 밝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스로리아 호텔 그 방에서 권총자살을 한다.

오장환 번역으로 읽은 예세닌이 준 시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다. 두 차례나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었는데 한번은 빛 돔이 태양처럼 빛나는 성 이삭 성당의 지붕 밑에 올라가 예세닌이 목숨을 끊은 호텔을 한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모스크바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길 위에 / 내가 죽는 것은 / 아무래도 전생의 인연인 게다 / 아 너무나 크게 날려던 이 날개 / 이것이 나의 크나큰 슬픔인 게다―그의 대표시 「모스크바 술집」은 이렇게 끝맺는다. 예세닌이 크게 날려던 날개는 사랑이었을까! 나의 날려고 해보지 못한 그 날개는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이근배

-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1961~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조집 『동해 바닷속 돌거북이 하는 말』. 시집 『노래여 노래여』 『한강』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