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1년 '올해의 좋은시賞
문장들 /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 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을 이어 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 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러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 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되다, 탁,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는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잇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단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始原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련한 未踏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고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 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끝내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문장은, 막막한 가슴들이 받아안지만
때로 저를 지운 심금 위에 얹힌다
늙지 않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면
언젠가는 수태를 고지받는 아침이 올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겊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혹,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오는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헤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원래 없었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 치의 신기루가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찾아든다
그 염소들,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계간 『세계의 문학』 2010년 여름호 발표
수상 소감
나의 사건
나의 사건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어 느닷없이 통보된 이 결과를, 나는 지금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소화하고 있다. 수상에 관여한 여러분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찬찬히 곱씹을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런 번거로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소문에도 지극히 둔감하므로, 이 일을 누가 일깨우지만 않았다면 나도 모르는 사건으로 지나쳐버리고 말았으리라.
지난 몇 년간 나는 시 쓰는 집중력을 제대로 모아보지 못했다. 직장 일이며 칭병(稱病) 등으로 내 게으른 시작(詩作)의 구실을 삼았다. 그러고 보니「문장들」은 시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함이 반영된 작품이다.
요즈음은 그동안에 밀쳐두었던 묵은 잡지며 시집들을 열심히 독파하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시들이 존재와 현실의 고통스러운 갈등보다는 관계나 형식 등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그 파편화된 기호들과 씨름하다보면 시를 음미하려는 다짐조차 희미하게 실종되어버린다. 읽히는 시라해도 사소한 일상사나 고답적인 풍경들과 자꾸만 마주치게 되니 내내 실망한다.
내 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방법이 아니라 삶의 그늘진 내력을 따라가 보겠다는 결심만이 여전할 뿐! 내 낡은 서정을 인내해주는 독자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김명인 시인
1946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동두천(東豆川)』(문학과 지성사, 1979), 『머나먼 곳 스와니』(문학과지성사, 1995),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문학과지성사, 1994), 『바닷가의 장례』(문학과지성사, 1997), 『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 1999), 『바다의 아코디언』(문학과지성사, 2002), 『파문』(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음. 1992년 제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1992년 제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0년 제45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1년 제13회 이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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