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유심작품상〉 시부문 수상작
희명 외 1편/강은교
희명아,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너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감은 눈을 위해
나는 보지 않기 위해
산 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워어이 워어이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고
희명아 저 노을 앞에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
종잇장 같아지는 흰 별들이 떴다
우리의 기도문을 실어 갈 바람도 부는구나
세월의 눈썹처럼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희명아, 오늘 밤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자
워어이 워어이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세계의 문학》 2010년 겨울호
2011년 〈유심작품상〉 시부문 수상작
설씨녀의 수틀
설씨녀의 수틀을 슬쩍 들여다보았어요, 그 여자, 오늘은 먹구름을 바느질해요. 먹구름의 한 귀를 잡아 분홍 색실을 감아 꿰매네요, 먹구름의 한 귀를 잡아 탁탁 털기도 하네요, 먹구름에 무수한 별들이 내꽂히네요, 어둠을 끄고 보세요.
신라 처녀 설씨녀의 수틀을 슬쩍 들여다보았어요, 그 여자, 오늘은 청천벽력을 바느질해요. 청천벽력의 한 귀를 잡아 분홍 색실을 감아 꿰매네요, 청천벽력의 한 귀를 잡아 탁탁 털기도 하네요, 청천벽력에 무수한 별들이 내꽂히네요, 어둠을 끄고 보세요.
설씨녀의 수틀을 슬쩍 들여다보았어요, 그 여자, 오늘은 번갯불을 바느질해요. 번갯불의 한 귀를 잡아 분홍 색실을 감아 꿰매네요, 번갯불의 한 귀를 잡아 탁탁 털기도 하네요, 번갯불에 무수한 별들이 내꽂히네요, 어둠을 끄고 보세요.
먹구름과 청천벽력 사이, 청천벽력과 번갯불 사이, 먹구름과 번갯불 사이, 그 여자와 나 사이, 사이가 낳는 별, 생의 눈짓, 그리운 그대가 나에게 보내는 눈짓.
—《시와 사상》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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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허무집』『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벽 속의 편지』『초록거미의 사랑』외 다수. 현재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신라 경덕왕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란 여자 아이가 난지 5년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그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 천수관음 앞에 나아가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뜨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 관음 앞에 나아가 비오나이다
일천 손과 일천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 얼마나 크시리이까?
참으로 슬프고도 애달픈 노래다. 자비와 지혜의 화신인 관세음 보살, 일천개의 도와 줄 손과 일천개의 이웃의 고통을 살필 눈을 가진 위대한 자여!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이 고통과 슬픔의 씨앗을 보소서. 어쩔수 없는 욕망을 안고 궁글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괴로워해야 될 인간으로서의 운명, 눈먼 몸으로 구원을 비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무것도 모르고 이 땅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채 터벅 터벅 죽엄을 향해 걸어 가는 이 끝없는 행렬, 나도 그 속에 있구나, 나도 그속에 있구나
설씨녀(薛氏女)와 가실(嘉實) -삼국유사
설씨녀(薛氏女)는 신라 경주의 민가 여자로 비록 평범한 가문과 가난한 집안 사람이었으나, 안색이 단정하고 행실이 바르므로 보는 사람마다 곱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진평왕(眞平王) 때 설씨녀의 아버지는 이미 연로(年老)했는데, 마침 정곡(正谷)을 방위하는 당번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노쇠(老衰)한 아버지를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여자의 몸이므로 함께 가서 모실 수 없음을 한탄하며 수심(愁心)에 싸여 있었다. 이 때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집이 가난하고 외모 또한 볼품이 없었지만, 그 뜻은 곧게 수양한 남자였다. 그러나 감히 설씨녀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설씨녀의 노부(老父)가 종군(從軍)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설씨녀를 찾아가서 청하기를,
"나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마는 일찍부터 의지와 기개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니, 비록 불초한 몸이나 아버님의 병역을 대신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설씨녀는 매우 기뻐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이를 알리니, 그 아버지는 가실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늙은 내가 가는 것을 대신한다 하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네. 그대의 소원대로 은혜를 갚을 생각이다. 만약 그대가 어리석고 누추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가실은 두 번 절을 하며 말하기를,
"감히 바라지 못한 일이오나 그것은 저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은 물러나와 혼기(婚期)를 청하니, 설씨녀는 말하기를,
"혼인이란 인륜 대사(人倫大事)이므로 창졸(倉卒)히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어기지 않을 것이오니, 원컨대 그대는 방어하는 곳으로 나갔다가 교대하고 돌아온 후, 날을 가려서 성례하더라도 늦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곧 거울을 꺼내어 반을 갈라서 각각 한 조각씩을 나눠 가지며 말하기를,
"이것을 신표로 하는 것이오니 뒷날에는 마땅히 이를 합치기로 합시다." 하였다.
가실에겐 애마 한 필이 있었는데, 설씨녀에게 말하기를,
"이는 천하에 드문 양마(良馬)로 뒷날에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간 다음에는 기를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이 말을 맡아서 길러 주시오." 하고 작별한 다음 곧 목적지로 향하였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연고가 있어 사람을 뽑아 보내어 교대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가실은 6년이나 머물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설씨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 가실은 3년을 기약하였는데 이미 그 날짜가 넘은 지금도 돌아오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야 되겠다고 하였다. 설씨녀는 말하기를,
"먼저 부친을 편안히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혼하였습니다. 가실은 이를 믿기 때문에 오랜 동안 종군(從軍)하여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황차(況且) 적경(賊境)에 임박하여 있으므로 손에 무기를 놓을 사이도 없고,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서 늘 적에게 씹힐까 근심입니다. 그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言約)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감히 부친의 명령을 좇지 못하겠사오니 청컨대 두 번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늙어 90세에 이르고, 또 그 딸의 나이가 과년해 가므로 배우자가 없을까 염려하여 강제로라도 그를 시집 보내려 하였다. 그래서 몰래 마을 사람과 약혼을 해 놓고 잔칫날을 정하고, 그 사람을 맞이하려 하였다. 설씨녀는 굳게 이를 거절하여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외양간에 이르러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고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가실이 돌아왔으나, 형상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도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딴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가실은 곧 앞으로 나가서 몸에 지녔던 거울조각을 던지니 설씨녀는 이를 받아 들고 기쁨에 넘쳐 소리내어 울었다. 그 부친과 집안 사람들도 기뻐하며, 드디어는 다른 날을 가려 서로 만나 결혼하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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