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는 울고 있다. 절망적인 세계에서 절절하게 절망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자리는 절망의 한 가운데다. 절망의 현장에서 가장 큰 소리로 울어버릴 때, 시적 울림도 깊어진다.
허수경(47)의 시편은 울음의 미학 위에 견고하다. 그가 고고학을 공부하겠노라 독일로 떠난 게 19년 전이다. 모국어로부터 뚝 떨어져 살아온 탓에 울음의 농도가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울음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다. 문학의 본업이 절망과 울음에 있다고 믿는다.
“문학이 어떤 절망의 현장을 포착해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죠. 절망의 순간을 읽는 독자에게 그것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희망이라는 거대한 단어 앞에서 저는 속수무책입니다. 희망이란 말 뒤에 숨겨져 있는 위선이 저는 무섭습니다.”
시인은 2006년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고학 공부를 끝낸 뒤 줄곧 문학의 자리로 되돌아오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는 올 여름에도 발굴 현장에 있었다. 인터뷰를 청했을 때 “발굴하러 터키로 떠날 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e-메일로 답변을 보내왔다.
“고고학 작업은 이미 시작한 것을 마무리하는 겁니다. 먼 길을 에둘러 드디어 문학으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의 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곳곳에 고고학적 사유가 웅크리고 있다. 시에서 시간을 다루는 솜씨가 딱 그렇다. 이를테면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는 꿈’이란 시에서 소녀와 노인의 시간은 엉켜있다. 소녀는 노인이 사는 곳을 일러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라고 증언하고, 노인은 소녀를 일러 ‘그 아이가 땅으로 들어간 건 아주 오래 전 일’이라고 일러준다. 시적 화자는 혼돈스럽다. 그래서 이렇듯 절망의 노래를 부른다.
‘누가 우는지 밤은 길고도 습했고 깨어나니/방에도 포도넝쿨이 들어차서 나갈 수가 없었다.’
“발굴을 하다 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층이 눈 앞에 드러납니다. 어제처럼 생생하게요. 수천 년의 시간과 마주하다 보면 시간 개념이 들쑥날쑥 해집니다. 다른 나이, 다른 시간대 등이 얽히고설키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지요.”
온갖 매체들이 부질없는 희망을 외칠 때, 어떤 시인은 마지막까지 울기를 멈추지 않는다. 허수경 시인은 잘 울고 잘 절망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 ‘사랑의 그림자를 쫓기 위해 당신을 방문한 후기’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바타유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인의 목소리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쓴다, 마치 우는 아이처럼’
◆허수경=1964년 경남 진주 출생. 독일 뮌스터대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혼자 가는 먼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 등.
나는 춤추는 중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는 춤 추는 중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 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 당한 것처럼
나는 춤추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