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의 「가을밤」감상 / 황인찬
가을밤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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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태양의 열기는 한풀 꺾였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삽상한 바람은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린다. 고즈넉한 가을밤, 문득 발견한 마늘꿀절임 한 통. 형(形)과 질(質)이 사라진 채 마늘이 꿀이고, 꿀이 마늘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연히 유리병을 발견했고 뚜껑을 여는 순간 목이 메었죠. 한참을 멍하니 있었지요.”
보통 사람이면 변질된 마늘꿀절임을 쓰레기통에 넣었겠지만 시인은 곁에 두고 지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나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었다. 곰곰이 그 맛을 느끼며 불교의 연기(緣起)를 떠올렸고, 세상 모든 것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시인은 그 사유를 시에 담았다. 마늘꿀절임이 담겼던 유리병은 비었지만 시는 풍성해졌다.
“일상을 살면서 시적 정황은 수도 없이 많지만 마늘꿀절임 같은 시적 순간은 쉰 번에 한 번 맞기도 어렵다”고 조용미 시인은 말한다. 4년 전 가을밤의 마늘꿀절임은 사라졌지만 시인은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 머물며 새로운 시적 순간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요. 3년 전 가을도 여기서 보냈는데, 이곳의 가을이 참 마음에 드네요.”
시 ‘가을밤’은 지난달 출간된 시집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에 수록했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1990년에 등단한 조 시인은 주변에서 흔히 스치고 지나가는 색깔과 소리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사유를 확장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는 서정시를 선보이고 있다.
손택수 시인은 추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마늘과 꿀의 경계가 무너진 이 시간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내 안에 새로운 대상을 탄생케 하는데, 사랑은 가을밤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경험케 한다.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 잔잔히 일렁이는 그 깊은 방에 잠시 앉아 있고 싶다. 가을에 잎을 떠나는 물소리 곁에서 중얼거리고 싶은 시다.”
이원 시인은 서늘한 서정시의 매력에 대해 언급했다. “서정시라고 하면 대개 따뜻한 서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조용미의 시는 서늘한 서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흔치 않은 시적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 장석주 시인은 “조용미 시인은 이미 1급 시인”이라고 짧게 평했다.
조 시인은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보낸 시작(詩作) 메모에 “몸이 차가운 사람에게 좋다는 마늘꿀절임을 담가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유리병을 발견하고 보니 담근 날짜와 그날로부터 두 달 후에 먹어야 한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두 해가 훌쩍 지나 있었다. 마늘과 꿀은 스미고 스며들어 서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걸 들여다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던가. 시적 순간이란 문득 그렇게 찾아온다. 목이 메고, 마음이 사무치는 소소한 깨달음과 슬픔의 순간에.”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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