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이경림
첫 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지요
묵언처럼 곰곰
지나가는 당신을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지런한 속도로 가고 계셨지요
形容을 알 수 없는 쬐그만 얼굴로
털실 보푸라기 같은 다리로
끊어질 듯 가는 허리로
집채만한 空을 지시고
식탁 다리를 지나
의자 다리를 돌아
내용 없는 상자의 긴 모퉁이를 돌아
바싹 마른 걸레 위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지나
얽힌 전선들 사이로 난 끈적한 먼지의 길을
다만 지나가고 계셨지요
발자국 소리 하나 없었지요
한 번 뒤돌아보시지도 않았지요
아아, 당신!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하염없이, 거대한 은빛 냉장고 밑으로 사라지고 계셨지요
잠결이었어요
오줌 누러 갔다 오는 몇 발짝 사이
어떤 미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으로 달려가는 사이
글쎄 백년이 지나갔대요
—《詩로 여는 세상》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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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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