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 외 4편
갈기를 날리는 김씨는 도배사
손가락 하나 튕겨 말발굽 소리 나는 벽지를 고른다
오렌지 잔이 엎어지면 하늘이 되고
하늘거리는 금붕어꼬리 그녀 원피스가 되는 벽지
벽지 본향은 초원이다
풀 물 드는 풀밭에 앉아 편자를 갈아
역마살 낀 빗자루 슥 문지르면 마을이 생겨나고
슥슥 문지르면 그 사이 강물이 흐르는 편지
물을 차고 달리는 말 잔등 위에서
허리에 찬 총을 뽑아들고
먼지 보얗게 내달리는 도배사의 꿈
숨이 턱턱 막히도록 달리는 길은 언제나 벽
좁고 긴 걸상 위로 몸을 날리는 칼잽이
잽싸게 칼끝을 똑딱 분질러 놓고
단숨에 손가락 사이로 벽과 하늘 경계를 긋는 일
코 한번 씰룩이고 하늘을 푹 퍼서 어항에 붓고
금붕어 살짝 집어넣으면
벽 속에서 들리는 소리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나의 계보
나는 지금 바나나 씨알이다
어머니는 새콤달콤한 열대 과일이었고
전쟁 속에 길을 걸어 온 노래였다
할아버지는 원래 사냥꾼
숨어서 들소를 덮쳐야 제 맛이라고
자꾸 뛰라 재촉 하신다
암술과 수술이 만나 어머니는 돌고래를 낳고
나는 안테나를 언덕에 세운다
화면 속에서 걸어 나오시는 할아버지 호통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돌고래에 깔려
화석이 된다고 눈을 부라리신다
나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채널을 돌려 토크 쇼를 본다
밤하늘 별을 가리키는 할아버지
나는 손가락이 짧아 핸드폰 안에 별이 있다고 말한다
들판에 킁킁 바람 냄새 맡는 할아버지
나는 전광판 화살표가 풍량계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망고를 낳고 바나나를 낳고
사랑은 오묘하여 나는 오렌지를 낳는다
리모콘
2011년 가계부를 받았다 표지를 넘기자 꽃은, 가장 달콤한것을 주고
나비를 불러 열매를 맺는다고 쓰여 있다 가계부를 써 본 일이 없는 나는
우선 아들 군에 갔다고 아무 칸에나 써야겠다 계획 없이 산 블라우스는
월간계획표에 쓰지 말아야지 계획과 예산을 잡아 보는 독서실 볼펜이 나
왔다 안 나왔다 한다고 낙서부터 말아야지 리모콘이 혼자 채널 채널 돌리다 잠
드는 공제보험 들어야 할까? 수입과 지출이 불량한데 가계부라도 써야한
다고 마른억새 길을 걸어본다 전일잔액에 비가 와서 남편봉급 속에 속닥
거리던 여자들은 나오지 않고 가로등 아래 안개비만 훤하게 몸을 씻고 있
다 나는, 천연비누만들기를 특별지출계획으로 잡아본다 억새의 억센 손
바닥이 슬슬 비누를 문지르면 탄탄한 어깨가 드러날 비누남자, 매끄러운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거품 속을 나란히 걸어가면 비누남자는 특별수입이
되겠지 의료비지출란에서 왜가리 고개를 쑥 내밀고 왝왝 흉을 보면 모른
척 해야지 우산 끝에 떨어지는 빗물에 손을 씻고 녹색마이너스통장을 만
들 것을 생각한다 서른한 살 독서실 총무가 중 이학년을 통제 못해 쩔쩔
맨다고 집안행사란에 기록해야지 경조금지출란을 만나면 요즘은 아이를
낳지 않는 세태라 지팡이 대신 빈 유모차를 밀로 오는 할머니와 나비는
청산 갔다고 써야 겠는데... 연간결산표 마지막 칸에 딸도 없는 나는 리모
콘, 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리모콘
리모콘리모콘
건전지를 사야겠다
동행
왜 따라 다녀?
나 지금 열쇠를 잃어버렸어.
그래, 적도 사이로 콩이 갈려 나오는 맷돌 돌려 봤니?
콩이 두부 가족이 되는 건 참 싱겁지.
간수를 넣어야 외국인등록증이 나와.
짭잘한 인당수 건너 눈물엑기스와 칼슘을 넣으면 맛있는 두부가 되는
거야.
메주 만들어 봤니?
못생긴 얼굴을 메주 같다고 말하는 거야.
잘 생긴 메주장맛이란 베트남울보가 아이엄마 되는 것처럼 푹 삭는 일
이야.
김치 담가 봤니?
김치는 알람이 울 때 담그는 것이 좋아.
백김치가 좋아? 총각김치가 좋아?
난, 새우젓갈이 좋아,
꼬리한 세계는 손가락을 담가 쪽 빨아 보는 거야.
고소하지?
그게 종소리야.
집시치마폭에 척척 안겨 뼛속까지 물드는 그 맛이야.
저것 봐! 저녁노을이 물들지?
천연염색이란 노을에 발목을 푹 담그는 거야.
실핏줄을 타고 머리카락까지 물드는 일이야.
물들인 옷 입어봤니?
어머니는 도다리쑥국을 저녁밥상에 올려놓고
지구본을 돌려 세상을 푸르게 푸르게 물들이는 거야.
나 좀 따라 다니지 마!
층
층
대평에 출토한 청동기문화는 없다
인류가 최초 합금문자로 발전시킨 흔적은
구리의 색과 깨지기 쉬운 청소년기의 단단함을
알맞은 비율로 형을 뜨고 날을 갈아
날카로운 핸드폰으로 무우밭 아래 층을 내는 것이었다
7층 현대 밭 경작층
6층 홍수 범람 모래 퇴적층
5층 삼국시댜 아이스크림 먹는 층
4층 홍수범람 후 종이컵 모이는 층
3층 청동기시대 동영상 강의 듣는 층
2층 청동기시대 계단에 앉아 만화 보는 층
1층 기반퇴적 개미집 찌그러지는 깡통 층
주석 17%의 검을 빼들고 문자를 날린다
(짜아식, 몇 층이야! 빨리 안 내려오고!)
불법을 자행하는 반칙의 나라에는
땅 위에 묘석을 깔고 베드신을 즐기던
입술 튼 붉은 항아리가 있었고
알몸 투시기로 더 똑똑해진 과거를 살펴보면
돌 그물추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던 물고기가 있었고
숫돌에 돌칼을 쓱쓱 갈아 나비를 잡던 사나이도 있었다
환각제가 필요한 청동기 고인돌 층에서
사냥돌 하나를 날려 새를 잡았다는 문자메시지
난다
(안돼! 지금 엄마랑 무우 뽑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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