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스크랩] 100세 할머니 시집: 약해지지마

시치 2011. 2. 10. 00:19

 

100세 할머니 시집: 약해지지마

 

 

 

읽어본 시집으로 학창시절 김소월 시집 한권 정도였던 제가 50이 넘어 시집을 읽었습니다(번역본을 읽어보다 원본도 구입하여 봤지요).

 

 

약해지지마(挫けないで)

 

 

작년, 한 할머니가 99세에 시인으로 데뷔하여 처녀작 ‘약해지지마(挫けないで)’를 출판, 일본 대표 서점 아마존저팬,

기노쿠이냐, 도한서점에서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여 100만부가 팔렸다합니다. 일본에서도 시집은 1만부가 팔리면 히트라

하네요. 2010년 12월 31일에는 NHK에서 그녀의 삶이 특별 다큐로 제작되어 방송되었습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없는 나이, 친구들도 모두 사라져 ‘참말로’ 옆구리가 허전한 나이, 매일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이지만 초등 교육의 백수의 할머니는 추억과 감사를 통해 일상 생활의 소중함을 현해탄을 건너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저기, 불행하다며 한숨 쉬지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있는거야/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상상도 할 수없는 나이 아흔아홉. 산전, 수전, 공중전, 지하전까지 겪은 내공과 녹슬지 않는 감성으로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틀림없이 아침해가 비출거야”라며 위안을 줍니다.

 

 

‘뚝뚝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 끙끙앓고만

있으면 안 돼/ 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 단숨에 눈물을 흘려버리는 거야/ 자, 새컵으로 커피를 마시자’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네.’

 

 

믿지지 않을 정도로 또박또박한 글씨로 지금도 시를 쓴다.

 

 

99세의 할머니는 요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몸을 단장하고 집 안 정리를 합니다. 그러곤 7시30분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공과금 납부나 장보기, 병원 진료 등 그날의 소소한 일들을 챙깁니다. 움직일 땐 바퀴 달린 보조기구에

의지해야 하지만 그녀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 말이야,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외롭다고 느낄 때/ 그걸 꺼내/

힘을 내는 거야// 당신도 지금부터/ 저금해봐/ 연금보다/ 나을 테니까.’

 

 

배운 것도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 결혼에 한 번 실패했고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던 할머니. 할머니가 좋아했던 노래 ‘이별의 한그루 소나무別れの一本杉’를

들어봅니다.

 

 

 

別れの一本杉(이별의 한그루 소나무) sung by gasga hachiro

 

 

나케타 나케타 고라에기레즈니 나케닷케

泣けた  泣けた こらえきれずに  泣けたっけ

울었네 울었네 참지못하고 울었네

 

 

아노꼬또 와카레타 가나시사니 야마노가케스모 나이테이타

あの 娘と 別れた  哀しさに 山のかけすも  鳴いていた

옥이와 헤어진 슬픔에 산까치도 (함께) 울었다네

 

 

잇본스기노 이시노지죠상노요 무라하즈레

一本杉の 石の 地藏さんのよ  村はずれ

마을 어귀, 한 그루 소나무 옆 돌하루방에서

 

 

 

遠い  遠い 想い 出しても  遠い 空

멀고도 머나먼 생각만 해도 먼 하늘

 

必ず 東京へ  ついたなら 便りおくれと  云った 娘

잊지말고 토-쿄에 도착하면 편지하라고 말했던 그녀

 

りんごのような 赤い 頰っぺたのよ  あの淚

사과처럼 빨간 볼의 그 눈물

 

 

呼んで  呼んで そっと 月夜にゃ  呼んでみた

부르고 부르고 몰래 달밤에 불러봤네

 

嫁にもゆかずに  この 俺の 歸りひたすら  待っている

시집도 가지않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あの 娘はいくつ とうに 二十はよ  過ぎたろに

그녀는 (지금) 몇 살일까 이미 스무살은 넘었을텐데

 

 

작사:타카노 키미오高野公男、노래:가스가 하치로春日八郞. 1955년 발표하여 폭발적인 인기로 레코드 판매량

50만장을 기록하였다(이미자의 1964년 ‘동백아가씨’ 음반 판매량은 10만장이었다). 작사가였던 타카노 키미오는

다음해 1956년에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생애가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의 일본은

고도성장 시기였다. 시골 청년들은 꿈과 돈을 쫓아 무작정 동경으로 향했다(70년대 우리나라의 무작정 상경과 비슷).

 상경 시, 고향 마을 앞에서 옥이와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그리는 노래.

 

.........................

 

 

한세기를 살았습니다. 그동안 지진이나 공습 등 여러 가지 무서운 체험도 했습니다. B29(미국의 폭격기) 공습

때는 젖먹이 애를 안고 방공호 속에서 무섭고 무서워 죽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괴롭힘이나 배신,

외로움 때문에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44년 나를 처음 본 남편과 결혼.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너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스스로 노인 요양원에 입소한 어머니와의 슬픈

이별이나, 녹내장으로 '완전히 실명할지도 모른다"라는 얘기를 듣고 수술을 했던 일 등 불안한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혼자 사는 집에는 도우미가 일주일에 여섯 번, 64세가 되는 회아들 겐이치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 주는데,

솔직히 말해서 도우미나 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외롭고 슬퍼집니다. 특히 겐이치가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면

우울해지면서 말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다잡고 또 다잡으며 나 자신을 설득합니다. "약해지지 마. 힘내, 힘내" 라고.

 

 

아들의 입학식 날. 마흔살. 아들의 기뻐하던 얼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더부살이를 하던 집에서 괴롭힘을 당하면 자주 가던 다리가 있습니다 행복이 온다는글자그대로

'행래교幸來橋‘. 그다리 옆에 웅크리고앉아울고 있으면 '후짱'이라는 친구가 와서 "힘내자'라고 웃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울음을 그치고 둘이서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로부터 80여 년.

90세가 넘어서 쓰기 시작한 시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슬픈 일이 있어도 부모님과 남편,

아들, 며느리, 친척, 지인, 그리고 많은 인연이 있는 분들의 애정 어린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둘이서 강에 빨래를 하러 갔던 일이나 남편, 아들, 며느리와 넷이서 웃으며 화투를 쳤던 일, 아들과 둘이서

 목욕탕과 영화판,온천에 갔던 일이나 친한 사촌자매와 매년 여행을 갔던 일 등 즐거운 추억도 많이 있습니다.

 

나는 1911년,아버지 모리시마 토미조,어머니 야스의 외동딸로 도치기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쌀집을 하는 유복한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성이 게으른 아버지 탓에 서서히 가세가 기울었고, 제가 10대 때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서 작은 연립주택에 부모님과 셋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어지와 달리 부지런해서, 가사를 돌보면서도 여관 일을 돕거나 부업으로 바느질을 하며 생활을

꾸리고 나를 키워 주셨습니다. 10대 시절 나는 그런 어머머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스무 살 때 일입니다. 친척의 소개로 맞선을 봐서 결혼했 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집에 돈을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서로 애정도 없었지요. 그 사람이 무섭기도 해서 대리인을 통해 반년 남짓 지나 이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 질린 것일지도 모르지만,10여 년간 여관이나 음식점 일을 돕고 부업으로 어머니께 배운 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부모님과 셋이서 사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33세 매였습니다 제가 일하던 온천 마을의 음식점에 가끔 식사를 하러 오던 주방장이 있었는데,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입리다. 두 살 연상의 남편, 에이키치 였습니다. 만년에는 조리사 학교에서 가르쳤을 점도이니 실력은

좋았던 듯합니다. 그때부터 전국의 여관이나 음식점을 돌아다녔습니다. 남편은 도박을 좋아해서 저금은 하지 못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고,생활비는 확실히 갖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까지 돌봐 주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다른사람들도 잘 보살피는 성격이었습니다.

 

남편은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누나와 남동생 셋이서 친척 집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집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해 주고 가족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1945년,겐이치가 태어났습니다. 남편과둘이서 '건강이 최고‘라는바람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쓴 것이 '추억 ll'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때의 물푸레나무

향기와 떠들썩한 거리, 흘러나오던 멜로디가 떠오릅니다.

겐이치는 당시 남편이 평소 집에 없었던 탓인지 마마보이였습니다. 아들이 초등학생 때, 저는 1년 정도 매일 겐이치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급식까지 챙겨주고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들은 성격은 상냥하지만 성급한 면이 있어, 어른이 되자 종종 남편과 싸움이 나곤 했습니다 둘 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도박을 좋아했습니다. 또 둘 다 닭띠여서 서로 부딪쳤던 것일까요. 종종 입씨름을 했습니다. 가운데서 저는 항상

조마조마했지만 재밌기도 했습니다 역시 부자는 부자. 두 사람은 닮았습니다.

 

중화요리 전문 요리사였던 남편은 겐이치를 주방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겐이치는 영화나 독서를 좋아했던

제 영향이었을까요. 중학생이 됐을 무렵부터 문학에 흥미를 갖고, 문예잡지 등에 투고해서 입선했습니다. 며느리인

시즈코도 동인지 동료입니다. 시즈코는 겐이치와의 신혼 시절, 2년 정도 여기서 함께 살았는데 아들의 일 때문에 따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병석 에 눕게 되어 남동생도 함께 돌보고, 또 몸이 약한데도 일을

하면서 나를 보살펴 줍니다. 야무진 며느리여서 안심하고 아들을 맡겼습니다.

 

 

삼십년 전에 남편, 아들과 함께. 며느리 시즈코가 찍어준 사진입니다.

 

 

제가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아들의 권유였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취미였던 일본무용을 할 수 없게 되어 낙담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들이 글쓰기를 권했던 것이었습니다. 90세를 넘긴 나이였지만,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는 침대에 누워 있을 때나 TV를 보고 있을 때처럼

주로 밤에 태어납니다. 떠오른 주제를 연필로 메모해 두었다가 매주 토요일 잘 있나 보러 오는 아들에게 보여 주고,

낭독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완성시킵니다. 그래서 한작품에 일주일 이상의 제작시간이 걸립니다.

 

나는 처녀 시절부터 독서나 영화감상,그리고 동향 출신의 작곡가, 후나무라도오루 씨의 가요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후나무라 도오루 씨가 작곡한 '이별의 한 그루 삼나무'의 가사를 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다카노

기미오 씨의 시에는 몹시 감동하여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시 쓰기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인생에 괴롭고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은 정말 괴롭습니다.

그래도 나는 힘을 내서 침대에서 일어나, 버터나 잼을 바른 빵과 홍차로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날 도우미가

줄 청소나 빨래를 정리하거나 장 볼 목록을 만듭니다. 또 공공요금 수납 등을 포함한 가계부와 통원 스케줄 등을

생각합 니다. 상당히 머리를 살는 셈으로,바쁜 편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외로워도 평소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이란 언제라도 지금부터야. 누구에게나 아침은

반드시 찾아온다'라고 말입니다.

 

혼자산지 20년.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출처 : 4050우리세상
글쓴이 : 중년만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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