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홍일표
저 아래 한 사람이 지나간다
백 년 전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이 그를 알아보고 따라간다 발자국은 바람을 안고 날아가다 몇 십 년 후 도착할 땅에 제 목소리의 문양을 미리 벽화로 그려 놓거나 꽝꽝나무 열매로 뿌려 놓기도 하지만
저 아래 개 한 마리 지나간다
수백 년 밖인 듯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귀 밝은 낮이다 열 살 때 죽은 개와 저 개의 거리를 헤아리다 나는 개를 향해 짖어대는 어둠이 되기도 하고 무성영화나 어항 속을 떠다니는 지느러미 달린 노래가 되기도 하지만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도 목에서는 깨진 유리조각과 숨 죽인 휴지뭉치만 꾸역꾸역 넘어오는 저녁
발을 잘라 먹은 눈 위의 발자국이 서둘러 녹고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 행렬처럼 발 없이 걷다가 공기 속에서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들
공중에 찍혀 있는 발자국처럼 명백하고 사뭇 모호하게
—《문장웹진》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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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58년 충남 입장 출생, 1988년 《심상》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안개, 그 사랑법』『혼자 가는 길』『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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