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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의 약속 / 문태준

시치 2010. 11. 19. 02:45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 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년 혹은 백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