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사월 (외 1편)/김형술

시치 2010. 9. 26. 00:55

사월 (외 1편)/김형술

 

 

 

   저녁 무렵 벚나무는 분홍 구름을 낳았다. 체육관 넓은 창문 너머 태어나는 둥근 구름의 행렬.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어둠이 구름을 키운다. 살진 구름, 구름들 몸피 점점 부풀자 어둠은 툭, 구름을 놓아버린다. 무겁다. 무겁다는 듯 등 떠밀어 하늘로 밀어 올린다.

 

   점, 점, 점

   허공으로 떠오르는 지상의 무게들.

 

   밤 까마귀 운다. 구름에서 날아 나온 까마귀 한 마리 창틀에 내려앉아 실내를 엿본다. 훠이훠이 손사래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눈을 마주쳐 온다. 사람을 들여다보는, 사람 너머 먼 곳을 응시하는 까마귀 눈 속 검고 아득한 허공.

 

   누군가 발을 헛디딘다.

   누군가 쿵 제 발등 위로 덤벨을 떨어뜨린다.

 

   날개를 펼친 커다란 까마귀들 창문 가득 거꾸로 매달려 있다.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리고 전속력으로 까마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젖은 어깨마다 검은 날개들 돋아난다. 발자국 소리,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 사이, 낮고 무거운 까마귀 울음소리 뒤섞이는

  

   늦은 밤 벚나무는 분홍 무덤을 낳았다. 까마귀 떼를 숨긴 둥근 꽃무덤. 밤이 깊을수록 선명해진다. 백열등 아래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들 하나둘 창밖으로 걸어 나간다. 무덤과 무덤 사이 허공을 걷고 달린다.

 

   텅 빈 실내 가득 수많은 까마귀 떼 날아와 앉아 있다.

 

 

                                          —《현대문학》2010년 8월호

 

 

안녕하세요! 물고기

 

 

 

물고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른 아침

거리마다 퍼덕이는 물고기들로 가득 찼다.

 

춤추는 물고기들을 우산 끝에 매달고 사람들이 집을 떠나자

가지마다 꽃처럼 반짝이는 물고기들을 매달고

나무들이 집 쪽으로 걸어왔다.

 

호주머니에서 물고기를 꺼내 꽃을 사고

물고기로 신문을 사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물고기를 가득 실은 비행기가

지붕 위를 천천히 날아갔다.

 

사람들이 눈웃음으로 물고기를 주고받는 동안

입을 벌려 물고기를 삼킨 아이들은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고

머리 위에 물고기집을 지은 노인들은

흔들릴세라 조심스런 걸음으로

처마 밑을 걸었다

 

어두운 벽들마다 물고기가 피었다.

비늘인 양 물고기를 매단 채

아가미를 단 듯 부드럽게 벽들이 숨을 쉬었다.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진 채

건널목을 건너오던 저녁이

오래 벽을 마주보며 서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물, 고, 기.

 

 

 

                        —시집 『물고기가 온다』(2004)

 

-----------------

김형술 / 1956년 경남 진해 출생. 199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의자, 벌레, 달』『나비의 침대』『물고기가 온다』등. 영화산문집 『영화 속의 詩』『詩네마천국』.

'좋은시 다시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비/이현승  (0) 2010.09.26
뱀 훑듯 /김영승  (0) 2010.09.26
병 속에 고양이를 키우세요 / 강인한  (0) 2010.09.19
소주/최영철  (0) 2010.09.19
물고기 / 김중일  (0) 201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