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붓으로 황홀경을
이덕규
부드럽기 그지없는 털 고운 붓을 들어 손바닥에, 맨 무릎에 뜻 모를 글자를 쓰다가
느낌 참 좋다.
그대로 내 몸 위에 너에게 가는 편지를 쓰네
빈 붓으로 빈 몸에
육필의 간절한 몸편지를 쓰네
먹물을 흠뻑 적셔 마음만 짜잘하게 쓰고 그렸던 지난날의 흰 화선질랑은
구깃구깃 깜깜하게 구겨버리고
나 이제 몸만 가네
언젠가 네가
내 등판 위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아직도 몸으로 기억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몸글 배달 가네
살 살 맨살 위를
미끄러지듯 노니는 마른 붓을 따라 조금씩 뜨거워지는 달뜬 체온의
빼곡한 육필로 가네
가네, 온통 여백뿐인 길고 긴 백지의 몸 사연을 온몸에 두르고
캄캄하게 번져가는
이 황홀경으로 나 오늘 너에게 답장가네
—《현대시학》2010년 8월호
------------------
이덕규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밥그릇 경전』.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