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모든 걸 꽃피우신다.外/김형술
금붕어가 야위었구나
강아지 발톱도 깎아야겠고
난분은 방에 들여라 일렀지 않았느냐
나팔꽃 아이비 물나무 들일랑
비님 오시는 날 바깥 구경 좀 시키지 않고……
이대로 두면 모두 돌아가시고 말겠다.
두 주일만에 들리신 어머니
짐보따리 미처 풀기도 전에
집안 구석구석 잊고 있던 것들 먼저 챙기신다.
산 것들을 이리 허술히 하다니 죄도 큰 죄다
말갛게 닦아 신은 흰고무신 아랑곳 않고
짐보따리 여기저기 넣어 오신 깻묵이랑 흙거름으로
시들어가는 것들에게 자꾸 말을 거신다.
늙은이와 고목은 자리를 옮기면 못 쓰게 되는 법,
며칠만 더 하고 잡는 말문 단호하게 막으시며
빈보따리를 들고 헹하니 시내버스 오르신다.
어머니 다정한 말들 모두 알아 들었는지
거짓말처럼 집안은 생생하게 반짝이고,
창틀을 타고 오르며 줄기줄기 진청색 꽃 피워
아침을 불러내던 나팔꽃, 슬며시 고개 내밀어
어머니 돌아간 골목길 내다본다.
풍경
그릇집에 가서 종을 샀다.
밥 담을 그릇을 사러갔다가 엎어놓은 밥그릇같은 유리종을 샀다.
제 속에 투명한 기둥 하나를 세워두고 있는 그릇,
넌 왜 태어났냐 묻기도 전에 딸그락 딸그락 비닐봉지 속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이상한 밥그릇
창 틀에 빈 그릇을 매달았다.
거꾸로 매달린 그릇 하나 쟁그렁 쟁그렁 허공을 흔든다.
쟁그렁 쟁그렁 웃음소리를 내며 밥과 국과 찌개들을 태어난 곳으로 되돌려보낸다.
향기로운 밥이 들판으로 날아간다. 밥과 국과 반찬을 날려보낸 빈 그릇 속으로
시리게 향기로운 하늘이 슬그머니 와 담긴다
향기로운 구름이 천천히 걸어온다
방안에, 창 밖에 가득한 청결한 냄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릇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제 속의 밥을 퍼서 무장무장 겨울풍경들을 먹여 살린다
라디오나 켤까요
라디오를 켤까요 차창 너머
빠르게 지나가는 별들 무심하고
황급히 어둠 쪽으로 숨는 나무들
하나도 불러 세울 수 없으니
라디오나 켤까요 지상 어느 집으로든
가 닿아 있을 이 길의 끝까지
꽃을 뿌리듯, 못을 뿌리듯
미친 말들을 흘려놓을까요
내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또 내 것이며 모든 이의 것인
속삭이는 비수들
나, 섣불리 말을 가져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어느 집도 환해지지 않았고
어느 상처에서도 꽃 피지 않아
귀를 닫고 혀를 베어버린 채
말들의 집인 세상을 떠나는
바람을 좇아 떠도는 길
딱딱한 확신으로
키가 자란 말의 얼굴 들여다보며
내 안에서 낯설게 거닐고 있는
말 저편의 말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며
겹겹 어둠 위에 바람이 새기는
침묵의 문장을 해독하려 하는데
슬픔을 끌까요 헛된 꿈을 지울까요
차를 세워 길을 멈추고
서늘히 천상의 말 다스리고 있는
별들이나 모두 불러 내릴까요
그저 라디오나 끌까요
웃는 물고기
물고기들이 물어뜯어 부드럽게 풀린 물의 힘살이 얼굴에 와 닿는다
눈을 감으면 귀를 휘감는 먼 울음소리, 바다 속 물풀을 흔드는 건 파도가 아니다.
정적을 부르는 울음, 눈물이 없는 마른 울음들
바람에 깎인 달의 파편들이 떨어진다 물 속에 수천의 달을 옮겨놓는 건 바람의 힘이다.
물고기. 아름다운 달의 후손들은 제 몸 가득 달을 매달아 스스로 반짝인다.
물 속 갚은 정적을 깨뜨리지 않는 푸른빛의 비늘들.
조그마한 달의 아이들이 꿈결처럼 물 속을 떠다니고
물 속의 울음들은 모두 투명하다.
제가 가진 크기만큼 제가 가진 이력만큼 울음들은 모두 지느러미를 달고 있다.
뿔을 가진 울음, 꽃으로 핀 울음, 독을 지닌 채 숨어있는 울음
물고기는 운명을 가지지 않는다.
제가 만난 물의 흐름만을 영역으로 가질 뿐, 물고기는 노래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웃지 않는다.
오직 한 번 물 밖으로 나왔을 때만 하, 하, 입을 벌려 혼신을 다하여,
파ㆍ안ㆍ대ㆍ소, 제 삶의 끝을 스스로 자축할 뿐
바다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눈을 뜬다. 그 많던 빛들,
울음들을 삼킨 검푸른 어둠이 미동도 없이 몸에 와 얹힌다.
워낭소리
너를 잃어버리고
내 어린 하늘은 자주 무너졌다
온 식구가 찾아 나서고
온 마을이 찾아 나서던 너는
어두운 숲 가운데 묵상으로 서 있거나
낯선 집 외양간에 매여 우렁우렁 울거나
억수장마 흐드러진 저녁
스스로 고삐를 끌며 산을 넘고
등 굽은 들길 혼자 오래 걸어
지쳐 잠든 사람들의 한숨 속으로
돌아오곤 했다
시간에 밀리고 시절에 밀쳐져
더러 잊혀지고 지워진
네 우직한 걸음, 발자국
어느 혼곤한 새벽 등걸잠을 깨우며
뚜벅뚜벅 걸어 내게로 온다
어제 잠시 길을 잃고 헤메다
지금 돌아온다는 듯 무심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한 눈
쩔렁쩔렁 선명한 워낭소리로
분홍고양이
분홍고양이가 나타났다
어디 어디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를 향해
사람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할 때
노점상의 과일은 시들고
보도블록 밑 하수구는 끓어오르고
분홍고양이가 날아간다
저기 저기
광장을 지나 공장지대를 건너 산복도로
보랏빛 저녁 노을을 향해
분홍고양이가 태어난다 여기저기
검은 비닐봉지를 찢고
플라스틱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깔깔깔 웃음을 입에 문 채 기어나오면
어느 곳의 집들이 갈라지고
강철구름 재빨리 어디로 날아내리나
랄라 랄라 비명이 되어
가슴마다 십자가로 꽂히는 건 누구의 노래인가
분홍고양이가 버려진다 사방팔방
찢겨진 약속들, 은밀히 살해된 주검들이
집집마다 문밖에 쌓여가고
세상의 모든 쓰레기통이 넘친다
악취들이 세상을 들어올린다
분홍빛은 악몽의 빛깔
썩지 않는 꿈들이 피워 올리는 향기
괜찮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쓰레기통은 은밀하고 아름다운 성전
날마다 부활하는 가벼운 몸을 가진
분홍고양이 떼지어 날아간다
하늘 가득 뒤엉킨 시간들을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김형술 시인
199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 『나비의 침대』
『물고기가 온다』
『월요시』,『시.바.다-금요일의 시인들』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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