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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0 경상일보 시조부문 당선작] 5월, 누에고치 - 이상선

시치 2010. 1. 20. 01:09

[2010 경상일보 시조부문 당선작]5월, 누에고치 - 이상선 

 

 

할머니 지문 찍힌 뽕잎마다 이랑진 삶     

넉 잠 든 잠실에 들면 반투명 누에들이

큰스님 넉넉한 손처럼 가진 것 죄 내줄 때.



이따금 명주실 같은 부드러운 바람결이

자디잔 물비늘을 은어 떼로 풀어놓고,

풀벌레 달빛 속에서 반짝반짝 울고 있다.



지는 꽃의 뒷등마냥 적막한 누에고치

길을 버린 누에들은 곡기마저 물리친다,

폭폭한 제 속울음도 다 퍼내지 못하고.



마분지 빛 흐린 날의 장막 한 겹 걷어낸다.

얼음 박힌 동치미국, 할머니 손맛 되새기며

시렁 위 채반에 올라 가만가만 숨 고른다.



호박벌은 귓전에서 풀무 소리 잉잉대고

가느스름 눈 뜬 채 장엄 열반 꽃 둥지 엮는,

한 살이 터억 매조지한 울 할머니 뒤태 같다. 



    

 

    

  당선소감

새로 태어난 것들은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새 아침을 여는 노을 붉은 동녘 하늘에 솟아 오른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면 까만 그림자로 하루를 위해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의 그 고운 날갯짓은 그지없이 아름답습니다. 그렁그렁한 눈물 같은 이슬방울 매달고 날개 저어가는 굳건한 모습에서 숨은 천리와 깊은 시학을 읽습니다.

어느덧 개울물소리가 귓전을 스치는 가을인가 하면 한 잎 오동에 지는 달그림자 처럼 스산한 겨울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과일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계절 가을을 탐하다 저 자연의 경이롭고 거룩한 가르침에서 새삼 옷깃을 여미며 걸어 온 지난 날들을 더듬어 봅니다.

한 해의 그 어떤 액운도 다접고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풋풋하고 청아한 기운만이 깃들어 새해가 희망차게 밝아오는 해돋이를 보는 듯합니다. 시조는 나에게 있어 두렵고 막막한 불모의 땅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모지를 옥토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도전 해볼 만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고통을 삼키고 깊은 사색의 늪지대를 헤쳐 나가는 것만이 우리 시조 문학의 길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길을 기꺼이 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늘 부끄럽지 않은 글을 소망하며 노력하는 나를 묵묵히 지켜봐주는 남편과 함께 경상일보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큰 절을 올립니다. 좋은 시로 갚아야 할 너무 큰 빚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감싸안을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상선

● 프로필

본명 이전안

광주 북구 문흥동

1966년 전남 영광 출생.

호남대 경영대학원 여성지도자과정 수료 

[심사평]말부림과 말 엮음 능력이 ‘탁월’ 


예심을 거쳐 선자의 손에 넘어온 작품은 59편이다. 부풀려 말하면 헤모글로빈 냄새 풍기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격전장을 방불케 한다. 저마다 다채로운 언어풍경을 펼친 작품 가운데 다섯 편을 놓고 적잖이 고민을 하였다. ‘황태’, ‘지슬리, 보리 베다’, ‘바다는 슬픔을 모른다’, ‘배다릿집 어부 아재’, ‘5월, 누에고치’가 그것인데, 이들 시편은 어느 작품을 골라도 좋을 만큼 색다른 개성과 성취를 보이고 있다.


‘황태’와 ‘지슬리, 보리 베다’는 시조의 형식미학과 구문법을 오롯하게 갖춘 빼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끌고 가는 힘이랄까, 저력은 유지하고 있는데 아직 내공(內攻)이 부족한 탓인지 강렬한 주제의식과 세련미를 엿볼 수 없다. ‘바다는 슬픔을 모른다’와 ‘배다릿집 어부 아재’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두 작품은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우며, 흡인력 또한 넘쳐난다. 하지만 상징과 은유가 때로는 겉돌며, 발상법이 기발하지만 그 재치가 경이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선작 ‘5월, 누에고치’는 ‘관조의 총혜(총명하고 슬기로움)’를 읽을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약간 예스런 정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이해가 녹아 있는 ‘5월…’은 ‘말 부림과 말 엮음 능력’이 탁월하다. 넉 잠 든 누에들이 “큰스님 넉넉한 손처럼” 가진 것 다 내주고, “한살이 터억 매조지한 울 할머니 뒤태 같다”는 대목은 시조 특유의 그윽한 맛을 우려내고 있는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오늘의 영광이 글쓰기의 피리어드가 아닌, 시조시학을 새로 경영하는 첫 삽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흔들림 없이 정진하기 바란다./윤금초



출처 : 시조사랑
글쓴이 : 올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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