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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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차주일
코뚜레에 멍에까지 쓴 소가 쟁기를 끌어
뒤집힌 흰 눈동자에서 길어난 실핏줄이 쇠뿔을 휘감아
죽을힘 다해 쌓은 塔 모시는 소의 몸에
牛角寺란 현판 걸어주고 싶어
쇠뿔의 고랑을 보며 연대를 가늠하던 사람이 있었지
소 목덜미에 風磬을 달아주던 사람의 자손이었지
뿔이 없는 그는 온몸에 고랑을 새겨 넣고
고랑에 씨앗을 놓고
고랑에서 자란 것을 먹으며
고랑을 숭배하는 종족이었지
농부라는 말로 그를 설명하던 사전은 폐기해야겠어
농부는 제 그림자 보습이 무뎌졌을 때 눈을 감지
생전의 그가 섬긴 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어
소가 흙에 박힌 제 그림자를 끌지 못하고 있어
뿔에 이르지 못한 고랑은 목덜미에 감겨 과녁이 되지
그때부터 뿔은 제 숨통을 조준하며 기울어
탑은 쓰러져도 기단은 발자국처럼 살아남지
바라봐, 땅거미가 끌려가고 있어
갈아엎은 산맥마다 날짐승들이 심겨
어둠의 보폭으로 한 줌 한 줌 뿌려놓은 마을
씨눈 같은 창틀마다 불빛이 움터
내일을 파종하는 저녁의 다리 근육을 만져봐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사는 칡소의 눈을 바라봐
달(月)에는 검은 눈동자가 없어
― ‘문학의문학’, 가을호
새로운 시간의식으로 파종하는 ‘오래된 미래’와 시대의 등고선
/김 륭
융에 의하면 “모든 개인무의식 아래에는 원초형의 바다인 집단무의식이 흐르고 있다. 신화적인 상황이 일어나면, 이것은 개인의 창작 에너지를 통해서 표출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차주일이란 텍스트가 흡인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언술에는 이즈음 젊은 시인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 현대시를 특징짓는 징표의 하나인 기존언어의 부정마저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흡인력이 강한 이 에너지는 그의 ‘새롭고도 치열한 시간의식’에서 발화되며, 희망을 파종할 수 없는 현재 나아가 미래를 부정하거나 갈아엎고 싶은 세계관과 맞물려 확장된다. 그리하여 차주일이란 텍스트만이 가질 수 있는 메시지는 다소 신화적인 자기지향성의 뼈대를 갖는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뜨거운 현실의식에 뿌리를 두고 꿈틀거리는 시대의 등고선으로 읽히며, 그 시선을 따라나서는 개성적인 언술은 다소 억압적이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더욱 견고해진 시대에 대한 회의나 냉소를 ‘화석화’시킬 만큼 주술성이 강한 그의 이번 작품은 과거로부터 반추해낸 오늘에 대한 절망과 내일로부터 역류하는 어둠, 나아가 그 어둠을 보폭으로 한 비극성을 테제로 하고 있다. “코뚜레에 멍에까지 쓴 소가 쟁기를 끌어/뒤집힌 흰 눈동자에서 길어난 실핏줄이 쇠뿔을 휘감아/죽을힘 다해 쌓은 塔 모시는 소의 몸에/牛角寺란 현판 걸어주고 싶어” 차주일은 도입부에서부터 영상이 선명한 극의 형태로 자신의 시간의식에 존재론적 영향력을 부여하며 암울한 분위기의 시적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를테면 그는 “쇠뿔의 고랑을 보며 연대를 가늠하던 사람”이자 “소 목덜미에 風磬을 달아주던 사람의 자손”으로, “뿔이 없는 그는 온몸에 고랑을 새겨 넣고/고랑에 씨앗을 놓고/고랑에서 자란 것을 먹으며/고랑을 숭배하는 종족”으로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나 혹은 수많은 당신들에게 먼저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소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아낸 시간들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는가?
결국 차주일에게 소는 인간들이 시간과 사투를 벌인 이 땅의 기록보관소이며 그의 시간의식은 현대문명이란 거대한 실존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처럼 과거로부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전통적 입장에 반기를 든다.
농부라는 말로 그를 설명하던 사전은 폐기해야겠어
농부는 제 그림자 보습이 무뎌졌을 때 눈을 감지
생전의 그가 섬긴 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어
소가 흙에 박힌 제 그림자를 끌지 못하고 있어
뿔에 이르지 못한 고랑은 목덜미에 감겨 과녁이 되지
그때부터 뿔은 제 숨통을 조준하며 기울어
탑은 쓰러져도 기단은 발자국처럼 살아남지
바라봐, 땅거미가 끌려가고 있어
갈아엎은 산맥마다 날짐승들이 심겨
어둠의 보폭으로 한 줌 한 줌 뿌려놓은 마을
씨눈 같은 창틀마다 불빛이 움터
코젤렉은 20년간에 걸친 역작 『지나간 미래』를 통해 시간의 차별화, 즉 자연적인 시간과는 차별적으로 인식되는 역사적 시간에 주목함으로써 시간구조의 변화를 구명해낸다. 새로움이 낡음을 지속적으로 청산하면서 경험은 점점 적어지고 기대는 점점 커진다는 것이 그의 테제이다. 차주일의 이번 시편은 코젤렉의 이 같은 테제를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독자들로 하여금 『지나간 미래』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혜안을 강요하고 있다. 코젤렉의 역사연구가 역사적 사실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역사의 운동구조에서 도출된 역사이론에 바쳐지듯 차주일의 미학도 단순한 시적 개념뿐만 아니라 문명, 억압, 진보 등 역사적 시간의 운동구조 안에서 준동한다. 예컨대 죽을힘을 다해 시간과 인간을 모신 소의 과거를 통해, 그리고 흙에 박힌 채 제 그림자를 끌지 못해 과녁이 된 소의 오늘을 통해 인간의 미래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차주일이 다소 억압적인 언술로 그려낸 이미지들 속에는 지나간 과거를 ‘지나간 미래’ 나아가 ‘오래된 미래’로 끌어올리거나 폐기하고 싶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이 충동하며 혼재되어 있다. 이처럼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킨 새롭고 치열한 시간의식은 소처럼 우직한 그의 진정성이 부리는 일종의 매직이며, 이때의 상상력은 단순히 기존 언어의 부정이 아니라 문명이란 이름으로 진화하는 세계를 부정하려는 통찰과 궤를 같이 한다.
내일을 파종하는 저녁의 다리 근육을 만져봐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사는 칡소의 눈을 바라봐
달(月)에는 검은 눈동자가 없어
차주일이 가진 새롭고 치열한 시간의식은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로 열려있다. 이는 그의 의식이 실존과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사는 칡소의 눈을” 통해 미래의 시간에 제동이 걸렸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한다. 문명의 비극을 예감하는 차주일에게 미래는 소처럼 코뚜레나 멍에를 씌울 수 없는 시간이 가진 어둠의 현상학이다. 어쩌랴. 어둠을 긍정하면서도 빛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차주일의 내면적 심리는 새롭고 치열한 시간의식으로 포장돼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달(月)을 매달지만 “검은 눈동자가 없”는 것을…. 농부라는 말로 그를 설명하던 사전을 폐기함과 동시에 문명이란 거대한 소에 코뚜레와 멍에를 씌울 때 밝은 미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그려 넣을 수 있다는 시인의 메시지는 첨단시대의 그 어떤 영상보다 강력하게 우리의 몸 깊숙이 와 닿는다. 그렇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희망은 시간이 멈춘 뒤에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현대시 2009. 11월호>
[출처]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차주일|작성자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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