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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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여래좌상에게 쓴다/박미라
들키기 위해서 나선 길이다
이게 나야 내 얼굴이야 눈썹을 그리고 코를 풀고 이빨을 닦으면서 작은 꽃밭 가꾸듯 정 붙이고 살았는데
거울을 보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내 꽃밭을 헤치고 불쑥 솟아나 한참씩 울먹이는 그대를 숨기고 사느라 나는 늘 숨을 헐떡인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는 그대를 세상천지에 대놓고 들켜버리려고 나선 길이다
누가 봐야 할 텐데 저것들 기어이 만나고야 만다고 허긴 기다림을 당할 게 천지간에 있겠느냐고 모두 수근거려야 할 텐데
천 년쯤은 찰나라고 우기며 솜털 하나 변하지 않았다지만 오른쪽 넓적다리 움푹 파인 걸 보면 밤마다 무릎걸음으로 헤매는 게 분명해
여기 그대의 목을 가져왔어 오늘은 꼭 돌려줄 거야 다시 나를 부려 세상을 보려 하지 마 그대가 본 것을 내가 봤다고 착각하게 하지 마
나는 이제 무서워 그대의 목이 내 가슴까지 뿌리를 내렸어 더 망설이다가 나는 통째로 먹혀버릴 거야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돋아나는 그대의 목을 나 세상에 들켜버리고 말 거야 꾸역꾸역 피를 토할 거야 내 몸에서 올라오는 피를 그대 목으로 토할 거야 마음이 정한 주인은 마음의 것일 뿐 이름이야 없어도 그만이야
그대 목을 돌려주고 나 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갈 거야 마음에 머무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 끄덕이며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기를
먼지 풀썩이는 맨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돌아간다
― ‘현대시’, 10월호
몸, 하나밖에 없거나 천개가 넘는 책 /김 륭
나 자신을 부인해볼까?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도 괜찮아. 나는 크고, 수많은 나를 담고 있으니까…….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中에서
그러니까, 정답은 애당초 없으므로 자유다. 당신은 지금 길 위에 있다. 소처럼 몸이 이끄는 대로 갈 것인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갈 것인가? 예컨대 수많은 박미라는 마음에 고삐를 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인 박미라는 몸이다. 이때의 몸은, 경주남산의 석불좌상처럼 목이 없는 ‘시의 몸’이며 당도하지 않은 죽음까지 친절하게 읽어주는 책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슬픈 연대의 내면풍경을 손으로 만져보라는 듯 물질화시켜 꺼내놓는 박미라의 지층은 무척 고통스러우면서도 황홀한 텍스트다.
박미라의 세계가 발화하는 지점은 몸이며 그 시적울림은 발화된 시의 몸이 가진 사유의 매뉴얼에 있다.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부족』 등의 작품집을 통해 몸과 마음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 나아가 존재의 기원을 찾아 나섰던 박미라는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시세계가 한층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몸을 박차고 나가려는 영혼의 울림통까지 움켜쥐고 다시 한 번 길을 나서는 것이다.
숨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키기 위해 나선” 이 길은 지금까지 박미라가 보여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의지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미라라는 ‘시의 몸’이 길을 나서기 전 먼저 들려주는 아포리즘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내 몸이란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다.’는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이게 나야 내 얼굴이야 눈썹을 그리고 코를 풀고 이빨을 닦으면서 작은 꽃밭 가꾸듯 정 붙이고 살았는데
거울을 보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내 꽃밭을 헤치고 불쑥 솟아나 한참씩 울먹이는 그대를 숨기고 사느라 나는 늘 숨을 헐떡인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는 그대를 세상천지에 대놓고 들켜버리려고 나선 길이다
육화된 몸에 대한 시적 울림이나 자각은 사유가 깊어질 때 가능하다. 결국 박미라의 몸은 자신의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한권의 유일한 책이다. 그렇다. 휘트먼은 『풀잎』을 두고 “이것은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손을 대는 사람은 인간을 만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결국 박미라가 석불여래좌상에게 쓰는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오로지 의식적이라는 것이다.’는 르 클레비오의 『물질적 황홀』과도 내통하며 우주적 생명력을 전통 서정시의 언술로 이식한다. 박미라의 몸속에 내장된 기억의 흔적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내면세계의 어떤 물질적 황홀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것은 그녀의 깊은 사유와 큰 호흡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곳에서 생의 의미, 즉 우주에서 발아한 자신의 존재를 독자들로 하여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 아니라 마법이다.
여기 그대의 목을 가져왔어 오늘은 꼭 돌려줄 거야 다시 나를 부려 세상을 보려 하지 마 그대가 본 것을 내가 봤다고 착각하게 하지 마
나는 이제 무서워 그대의 목이 내 가슴까지 뿌리를 내렸어 더 망설이다가 나는 통째로 먹혀버릴 거야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돋아나는 그대의 목을 나 세상에 들켜버리고 말 거야 꾸역꾸역 피를 토할 거야 내 몸에서 올라오는 피를 그대 목으로 토할 거야 마음이 정한 주인은 마음의 것일 뿐 이름이야 없어도 그만이야
박미라는 자신의 몸에 들어와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목 잘린 석불좌상에게 쓰는 게 아니라 ‘싸우는’ 것이다. 시작부터 그랬다. “거울을 보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내가 아닌 내 얼굴과 “내 꽃밭을 헤치고 불쑥 솟아나 한참씩 울먹이는” 내가 내 얼굴과 싸우기 위해 박미라는 길을 나섰던 것이다. 박미라의 이 같은 시적사유는 문학평론가 김홍진의 해설처럼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고 전자를 죄악시하는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반발로 읽혀지기도 하는데 이는 곧 월트 휘트먼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동등성’과 궤를 같이 한다.
그대 목을 돌려주고 나 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갈 거야 마음에 머무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 끄덕이며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기를
경주남산 삼릉의 아름다운 소나무 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것이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으로 부르는 이 부처의 얼굴은 바라보는 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그려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처럼 필시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까? 무슨 상관인가. 휘트먼의 『풀잎』을 빌리자면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나는 만족해서 앉아 있다. 그리고 모든 이가 알아본다 하더라도 역시 나는 만족해서 앉아 있다. 무엇보다도 큰 한 세계가 알아보고 있으며 그것은 나 자신이다.”
휘트먼이 그랬듯이 박미라 역시 그녀의 몸은 개인이지만 우주속의 수많은 인간들과 함께 하는 개인이다.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인 인간이 아닌 사회 속의 인간이며 남과 더불어 생활하는 현실의 인간이다. 따라서 각자가 가진 우리의 몸은 곧 우주이고 신이다. 작가 마크 리틀턴이 휘트먼에게 들려준 말처럼 “(…)당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으므로.” 그리하여 박미라라는 텍스트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명상하는 시적인 인물이 아니라 쉼 없이 아파하고 방황하는 방목적인 인간이다. “그대 목을 돌려주고 나 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갈 거야 마음에 머무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 끄덕이며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기를” 기원하는 박미라의 언술이 하나밖에 없거나 천개가 넘는 책의 물질적 울림으로 읽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미라가 펼쳐놓는 몸이란 책은 깊고 아득한 지층에서 붉게 번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듯 살이 다 닳거나 타버려야 얻을 수 있는 노래이자 울음이다.
<현대시 2009 .11월호>
[출처]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박미라|작성자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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