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장옥관 < 달과 뱀의 짧은 이야기 > 외 15 편

시치 2009. 10. 2. 16:51

  달과 뱀의 짧은 이야기

 

은빛 수레바퀴 밤새 하늘을 굴러다닌다는

전월사(轉月寺),

동짓달 북향의 골짜기는 옴팍해서 달빛 담기에

맞춤한 옹배기랍니다

 

도시 인근 흔히 보는 이 암자 주인은

올해 갑년을 맞은 비구니,

법명이 달풀(月草)이라 하시는군요

여섯 살 나이로 경주 함월산(含月山)에서

계를 받았다는데요

 

먹물옷 말고는 딴 맘 딴 옷 가져보지 못한 채

다 늙은 사람의 심정이사 뒷산 오리나무나 짐작할 뿐

제 잇속이나 셈하는 복장 시커먼 도둑이 알 바 아니겠지요

그러나 인연 닿는 곳마다 굳이 달을 갖다 붙이는

여자의 마음은 알듯 말듯 하구요

 

낯모모르는 사람이 내미는 찐빵 이천원어치에

빗장지른 마음 덜컥 열어젖히는 혼자 사는 늙은이,

해 짧고 달 긴 동짓달 속사정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서두

휘영청 초저녁에 뜬 달이 한잠을

자고 나와 봐도 그 자리,

다시 깨어 봐도 그 자리,

도무지 눈꺼풀 없는 밤이라는군요

 

그런 밤이사 얼음조각 머금은 듯

차고 시린 달이 어둑새벽까지 띠살문 밝혀서

안 그래도 가난한 우리 스님의

몸이 더욱 말라붙었겠구요

뒷산 솔숲 소쩍새 목쉰 소리에

마당 가슴팍 찬 우물도 덩달아 깊어졌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조금 아는 것이어서

세상의 일을 어찌 이루 다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지문 바로 건너

대웅전 마루 아래 뱀 소글이 숨어 있다는데요

법당이든  부엌이든 심지어 하루는 늦은 밤

티브이 위에 똬리 틀고 혀 날름대고 있더라는 이야기

 

생각건대 달풀 우거진 보름달 속에는

수천수만 실뱀 똬리 틀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그 달빛,

얼키설키 뒤엉켜 뭉쳤던

은빛 실뱀들 오리오리 풀려

날이면 밤마다 마룻장 아래 모여드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늦은 밤 법당 안이

이따금 해바라기처럼 환해졌던 것인가

 

이리 몸 섞고 저리 몸 뒤엉켜 겨울잠 자는

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동짓달 덩두렷이 보름달로 굴러가고,

어떤 못된 뱀은 아궁이 통해

불 꺼진 몸속으로 자꾸 파고들고,

그때마다 처마를 받든 두리기둥은

화들짝 뿌리가 굵어졌겠지요

 

그에 날 저물어 기어코 잡는 손길

뿌리치고 일어서다 보니 아뿔사,

기왓골 타고 굴러온 달.

달풀스님 목에 얹힌 달덩이에 혓바닥이

두,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려

 

 

하늘 우물 

  

한때 나는 새의 무덤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다


물고기의 무덤이 물 속에 있고


풀무치가 풀숲에 제 무덤을 마련하는 것처럼


하늘에도 물앵두 피는 오래된 돌무덤이 있어

 
늙은 새들이 거기 다 깃들이는 줄 알았다


피울음 깨무는 저 저녁의 장례


운흥사 저 절 마당 늙은 산벚나무 두 그루


눈썹 지우는 것 바라보며 생각하느니


어떤 죄 많은 짐승 내 뒤꿈치 감옥에 숨어들어


차마 뱉어내지 못할 붉은 꽃숭어리


하늘북으로 두드리는 것일까


하르르하르르 귀 얇은 소리들이 자꾸 빠져들고


죽지 접은 나무들 얼굴을 가리는데


실뱀장어 초록별 물고 돌아드는 어스름 우물에


누가 또 두레박을 던져 넣고 있다 

 

  공기 예찬   

                

  시인은 공기 도둑이라는 말도 있지만*

  공기 한 줌을 거저 얻어서

  온종일 넌출넌출 즐거움이 넝쿨로 뻗어간다

  물이나 햇빛, 공기 따위를

  런닝구 사 입듯 사고팔 수는 없겠지만

  눈썹 펴고 건네는 인사조차 이웃 간에 거저 얻기 힘든 터에

  허구헌 날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던

  동네 카센터

  이야기 나누던 손님 기다리게 해놓고, 모터 돌리고 호스 연결해 낡은 자전거 앞타이어에 탱탱하게 바람 넣어주고, 시키지 않은 뒷바퀴까지 빵빵하게 공기 채워주는데

  삯이 얼마냐 물었더니

  옥수수 잇바디 씨익, 그냥 가시란다

  햐, 공짜!

  공으로 얻은 공기 채운 마음

  공처럼 둥글어져서

  푸들푸들 가로수가 강아지처럼 마냥 까부는데

  페달 밟으니 바퀴 버팅기고 있던 상대가 모조리 지워지고 동그라미 두 개만 떠오른다

  비눗방울처럼 안팎이 두루 한겹 공기로 채워진

  무게 없는 것들

  발목 잡는 삶의 수고와 중력 벗어나 구름과 나와 자전거는 이미 한 형제가 되었으니

  텅텅 속 비운 지구가

  공기 품은 민들레 씨앗처럼 한껏

  위로 위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 러시아 시인 만젤슈탐(O. Mandel'shtam)의 시구.


장마

 

   놋 세숫대야 위로 뚝뚝 떨어지는 꽃잎. 다알리

아가 머리 속에서 폭발했다. 핏줄 속을 소용돌이

치는 붉은 꽃잎. 아버지 머리 위로 여름비가 흘러

내렸다. 소용돌이치는 세월 위로 종일 비가 내렸다.

 

  나팔꽃은 벙어리. 아무리 흔들어도 소리나지 않

는 종. 징소리에 잠을 깬 새벽. 어머니 대를 잡고

떨고 계셨다. 칼그림자 번뜩이며 떨어지는 마루

위. 징징징 징소리. 빗줄기를 감고 울려 퍼지고.

 

   물대접 속에 갇힌 식구들의 얼굴. 어머니는 놋

그릇을 챙겨 흙 속에 묻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녹은 불꽃처럼 일어나고. 땅 속에서 불꽃은 불꽃

을 끌어당기고. 장마가 그친 수성천에는 흙탕물이

소리치며 흘러내렸다.

 

   장마 속 봉오리를 맺은 해바라기. 여물어야 할

앞날이 까만 씨처럼 촘촘하게 박혀들었다. 긴긴

여름이 시작됐다. 묵은 빨래를 널어 내는 장독대.

어머니의 소금 그릇이 하얗게 빛이 났다.

 

붉은 꽃

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 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비언어적 누설이다.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냄새처럼 도무지 잠글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누이가 쑤셔 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
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수크령,
대지가 흘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나는 고것들을 고양이라 부르련다*


오늘 아침에, 음력 정월 숫새벽에, 모처럼 엘리베이터 타지 않고 걸어 내려왔는데 말이지요 햐, 기막힌 것 봤어요 아파트 2층 현관문에 붙은 찢어진 탁상 캘린더 석 장,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쉿!조용하시오
우리집고양이가잠들어슴
명희

괴발개발 글씨의 엄중 경고문
한 대여섯 살쯤 되었나? 막 한글을 깨친 싱싱한 필치!
갸르릉갸르릉, 흰 이빨 촘촘한
갓 태어난 고양이들
시멘트 덩어리에 숨겨진 차고 시린 샘물
한 두레박 뒤집어쓴 느낌이라니-
아파트 화단의 사다리를 타고
새끼 고양이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앞니 빠진 눈발이 뛰어내리고 있었어요

*김혜순 시인의 시 제목에서 빌림

 

쥐면 꺼지는 봉곳한 뽕브라처럼

 

소줏집에서 등골 안주가 사라졌다 광우병 탓이다 광우
병의 잠복 기간은 5년, 올해 86세 친구 아버지 광우병 파
동 뉴스 본 뒤엔 퇴근길 아들이 자주 사들고 오던 등골에
젓가락 일절 대지 않더라고,

또 이런 이야기: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는 게 유일한 낙
인 82세 장모님 며칠째 칩거하시는데 사연인즉, 말기암에
걸린 그 할마씨 점심상에서 얼굴 마주하면 도무지 밥덩이
가 넘어가질 않아서,

아흔을 넘기고는 끼니마다 밥공기에서 밥 덜어낸다는
시인의 외할머니, 며느리 볼일 보러 나간 밥상에서는 식
은밥 한 공기 말끔히 비우신다는 할머니,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아, 그랬던가 무릇 생(生)이란
쥐면 꺼지는 봉곳한 뽕브라처럼 속이 비어서
산수국 헛꽃에 죽자고
달려드는
저 겹눈의 허기에 바닥은 없다

-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랜덤하우스

 

입술
두 장의 나비 날개, 비로드 같은 붓꽃 이파리, 새빨간 피 머금은 통통한 찰거머리, 썰어놓으면 
두 접시는 너끈할 것 같은 두툼한 간 천엽, 컴컴한 구멍을 감싸고 있는 두 장의 검붉은 꽃잎 
하수구에 떨어진 벌건 햇덩이처럼, 혼곤한 꿀샘에 고개 처박은 나비 주둥이처럼, 한번 달라붙으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씹어도 씹어도 물리지 않는다, 살강살강 씹히는 육질 좋은 내 생각은, 
[현대문학]-2008년 2월호

 

 아마 긴 시간이

킬로만자로 산록의 암보셀리 평원에서

한 떼의 코끼리를 만났다.

코가 유난히 길었다. 아마 긴 시간이 코를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그 긴 시간이

몸집을 부풀린 모양이었다. 공포가 몸집을 키운 것이다. 빠른 발 대신 큰 몸집을 선택한 것이다.

슬픈 몸집 탓으로 그들은

쉼 없이 먹고 또 먹어야 했다.

자본주의 같았다.

코끼리는 똥도 무지 컸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 풀냄새가 났다. 포슬포슬했다.

입으로 들어간 풀이 몸을 통과해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가 가져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시작을 모르는 바람이 나를 어루만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긴 호흡, 발 아래 놓인 검은 돌을 들었다가

제 자리에 가만히 내려 놓았다.

참 긴 시간이 흘렀다

봄 외출 

 

고삐를 풀어놓았다

 

몸집 작은 까만 개가 살여울처럼 뛰쳐나간다 치켜든 꼬리 아래 아, 항문이 복사꽃 같다
영문 모르는 벚꽃이 놀라 몸을 움츠린다
노란 민들레꽃 지린내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오줌을 갈긴다 앞서 달려나가던 개가 찔끔 오줌을 갈기니 따라가던 다른 놈이 그 자리에 다시 갈긴다
나무가 움찔 진저리친다
지린내 노랗게 뿌리로 스며들어 숨 가쁘겠다
가쁜 숨결,
소용돌이치는 하늘 팽팽하게 괄약근이 조여든다

 

씨방 속 씨알 둥그스름 굵어지겠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다

 

문득 내가 그 산에 들어섰을 때

비릿한 물비린내 속 여름 굴참나무들

번쩍이는 은갈치를 달고 있었다

후득이며 떨어지는 빗방울

억수 속에서 산은 점점 물이 차올라

어머니의 바다

내 아가미로 들락거리던 깨꽃 같은 별똥별

자꾸 등줄기를 간질이던

불가사리, 해파리의 작은 움직임

꼬리지느러미 아래 초록의 비늘이 번뜩이고

둥근 봉분 속에 숨겨 놓은 비밀

오래 입 다문 비단조개가 제 몸을 연다

퇴적암 속 양치식물 움이 돋고

내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물고기 알

어린 치어들이 빗줄기를 거스른다

굴참나무 떫은 도토리 실하게 맺히고 있다

 

병든 사내

 

    어둠이 습지처럼 그의 희망을 빨아들인다

 

    붉은 나트륨등 아래 검은 덩치의 히말라야시더가 천천

히 흔들리고

    무겁고 짧은 기계 소리가 간단없이 이어진다 여름밤은

    녹아내린다 궤양의 위가 퉁퉁 불어난다

 

    끈적이며 손가락에 달라붙는 자판기의 검은 액체

    때 묻은 삶을 얼룩지게 한다

    희미한 형광등이 그의 이마에 번지는 땀을

    집요하게 비춘다 눅눅하고 푸른 공기는 황폐한 그의 내

부를 가득 채운다

    짧은 도둑고양이의 울음이

    원사 더미의 그림자를 찢으며 그를 어둠 속으로 떠다민다

 

    욕망이 빠져나간 육신은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한숨을 쉬며 그는 종이컵을 구겨뜨린다 흰 연기를 꿀럭

꿀럭 토해 내는

    굴뚝, 그는 돌아갈 집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히말라야시더 검은 둥치가 쿵, 그에게 기대 온다

    마침내 그는 중얼거린다

    저 히말라야시더와 몸 바꿀 수 있다면!

 

 

 추상화 보는 법

한사코 보는 것만 보려 한다
수석 취미 가진 사람은 알리라 강바닥에서 주워온 돌에 박혀 있는 온갖 무늬
우리는
한사코 무언가를 떠올리려 한다
누가 말릴 것인가 국화빵에서 국화를 피우려는 그 집요함을,
신기한 것은
제목 붙이고 설명 곁들이고 난 뒤에는
누구든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어르고 쥐어박아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사실
뭐든 보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데...

디자인이 좋아 사온 로가디스 기성 양복

굵은 몸통 기오코 끼워 넣으려는 나의 정신은,

살색 의수에 끼워놓은 꽃반지 같다

 

걷는다는 것

 

장옥관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곤충의 울음이 아니라

 

이를테면 오르가즘이 아닐까

팔월 대낮 녹음 짙은 왕벚나무에 달라붙어 핏줄 속 피란 피, 검

붉게 졸라붙게 만드는

저 소리는

 

곤충의 울음이 아니라, 나무의 교성

 

아니라면 지난 봄 꽃떨기, 꽃떨기

펑, 펑 터져오르던 그 지독한 꽃멀미를 어찌 납득할 수 있으랴

숯덩이 삼키듯 온몸 불 붙어도 실토막 같은 신음 한 마디 뱉지 않

그 지극한 고요를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이 귀따가운 소리는 말 그대로 아리따운 소리[嬌聲],

일찍 혼자된 큰언니 귀 얇은 한옥 건너방에 둔 신혼의 이모네 낮

밤처럼

 

세상 모든 짝 없는 것들 위해

속 깊은 나무는

한 번은 귀로 한 번은 눈으로 두 번

꽃을 피우는 것이다

 

* 200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현대문학

 
        단풍
 
화투장 쥐고 함부로 몸 부린 다음날 아침은 오줌색이 진하다 신문지 덮어
복도에 내어놓은 짬뽕 국물처럼 졸아붙은 빛깔,
몸이 일기를 쓰는 셈이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몸이 시끄럽고 시끄러운 소리 시끄럽게 쌓이고 쌓이면
이윽고 단풍이다
 
쥐면 금세 바스러질 듯
녹물 든 마음
 
버캐 낀 변기처럼 짜디짠 얼굴이 지금
거울 속에 갇혀 있다

 시는 감정의 소산이다   / 장옥관

 

 열목어라는 물고기가 있다. 눈에 열이 많아서 찬 곳을 찾아가 눈을 식힌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광고, TV, 영화,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들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 따지고 보면 열목어의 눈이 아닌가. 영상매체의 영향 탓인지 오늘날 사람들은 지나치게 시각에만 모든 걸 걸고 있다. 이러다간 인류가 파리처럼 눈알만 커다랗게 진화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문제는 시각이 인간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대중 영상매체에 빠져 있는 동안 몸의 감각은 무뎌지게 마련이다. 보름달이 떠도 뜬 줄 모르고, 여린 풀벌레소리 밤새 귓가를 간질여도 들을 줄 모르는 굳은 감각. 발뒤꿈치 같이 굳은살 박인 마음의 눈. 숫자와 속도와 말초적 쾌락에 빠진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삶, 느끼는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각의 회복이 우선이다. 시는 온몸의 감각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든다.


굳은 감각만큼 현대인에게 심각한 문제는 닫힌 감성이다. 앞으로 인류가 망하게 된다면 핵무기가 아니라 굳은 감각과 닫힌 감성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학교 앞에 파는 병아리를 사와 아파트 옥상에서 멀리 날리기 장난을 하는 아이들, 여기에서 인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병은 그 병을 일으키는 특별한 병원체가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을 느끼는 통점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정강이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이 곪아도 축구공을 찰 수 있는 게 나병이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니 몸이 썩어가도 제 때에 치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병들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고칠 수가 없다. 시는 이기심에 병든 마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싸안고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곧 연민의 마음,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무화되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아무리 뜻이 숭고하다 하더라도 시 읽기에 즐거움이 없다면 누구도 선뜻 시집을 손에 쥐지 않을 것이다. 커피 한 잔을 즐기듯 시를 즐기는 방법을 학교교육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시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입시공부는 시를 죽여 놓고 이게 간이고, 이게 염통이고, 이게 신장이라고 가르친다.


시 감상의 핵심은 상상의 힘. 되도록 말을 줄이고 뜻을 넓히는 것이 시다. 짧은 말이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우리의 뇌리에 기억된다. 짧은 형식으로 많은 뜻을 담기 위해서는 상상을 통한 독자들의 의미생산 작업이 필수적이다. 달리 말해 시인의 입장과 처지에서 시인의 발언을 음미하는 일. 여기에서 정서적 공감이 이루어진다.


시는 감정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시의 과학성이다. 따라서 시를 읽는 일은 감성과 이성의 종합적 정신능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갓 여기로서의 시가 아니라, 정서순화교육 차원의 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이해와 삶과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게 하는 시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할 것이다. 그 첩경이 몸을 통한 시의 감상과 이해다. 왜냐하면 시는 무용처럼 몸으로 느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모든 사람의 몸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못 믿겠거든 지금 당장 왼손바닥을 심장 아래 대고 오므려 펴보기 바란다.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가. 어린아이 필체로 비뚤비뚤 적혀 있는 단어, '시!'

 

출처 : 말더듬이의 편지
글쓴이 : 체스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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