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 박서영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당신의 얼굴은 한때 아름다운 장화를 신었고
장화는 점점 주름살이 늘어나 밑창부터 늘어지기 시작했다
경주박물관 뒤편 목 잘린 불상들 앞에서 이렇게 속삭인 적 있다
얼굴이 장화를 신고 어딘가 가버렸다고,
갑작스레 달려온 햇빛이 당황해 꿀처럼 목둘레에 엉켜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꿀을 한 숟갈씩 퍼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관棺 뚜껑이 닫히기 전에 내가 마지막에 해야 할 일
목 뒤 감첬던 주름살과 약점들
지상의 눈꺼풀 속으로 침몰해버린 사랑들
지상을 떠나야만 맛볼 수 있는 안락함들
심장이 목을 통과해 얼굴에 당도할 때 낯빛으로 알 수 있었던 것들
얼굴에서 본 심장의 빛깔!
긴 목을 통과해서 별, 꽃, 나무, 달이 뜬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들이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몸의 지옥을 견디는 가느다란 목
얼굴이 피 묻은 장화를 신고 어딘가 가버렸다
『현대시』 2009년 9월호
평일의 극장
- 박서영
십 년 동안 사귀었는데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얼음처럼 녹고 흘러내리고 지나간 마음들
눈송이처럼 사라져버린 대화對話
잡으려고 한 적 없으니 사라진 건 당연하다
때때로 내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내 손이 스카프처럼 그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으리라
관람객 없는 평일의 극장에서 잠깐 졸았을 때
지나가버린 것은 청춘
남은 것은 패배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깜박하는 사이 시체들이 골짜기에 버려지고
깜박하는 사이 꽃밭이 태어나는 평일의 극장 안
프라하와 아우슈비츠, 박쥐와 마더
맨 뒤 구석자리가 나의 영토일 것
그곳에서 예의를 버리고 그대의 입술에 키스한다
가장 나중까지 남아서
누군가 나를 들어내 버릴 때까지
『현대시』2009년9월호
-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1995년『현대시학』등단.
시집<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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