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저녁부터 불어오던 비바람도
어느 사이 조용해지고
그러므로 이제 가벼워져도 된다
까칠해진 껍질을 감싸던 엽록이며
무성한 말의 잎사귀도
이제 묻어두라
길들여지고 싶다고 시도 때도 없이
밑둥 흔드는 일은 없으리라
덜 마른 가지에 엉겨 붙어
덜컥, 생가지를 찢는일도 없으리라
2.
간밤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공사한다고 파헤쳐 놓은 골목 어귀에는
뻘밭 같은 삶의 이력들이 가득 넘쳐나고
그 옆에서는 잘못 내디딘 발걸음이
신열 오른 풍문들을 방목하고 있다
아직은 헐거운 인연의 뿌리여
다만, 그립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는 일이 담벼락의 낙서 같은 일임을
3.
저녁이 조금씩 두꺼워지자
새떼들이 노을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오르고 있다
저녁답은 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기 마련이고
창가에 오도카니 물러앉아 있어도
오늘은 흔한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그럭저럭 잘 버텨온 셈인가
가라, 이렇듯 멀리 뒤돌아 가라
알 수 없는 예감이 먼저 사막을 건너고 있다
4.
돌이켜보면 세상의 언약이란
그저 말의 약속이라는 것
밤새도록 창 밖에서는 느티나무가 게으르게
이파리를 흔들어 대고
모기 한 마리가 어느 지구별로
앵앵거리며 투신하고있다
저토록 저무는 골짜기여, 먹먹한 시간이여
너무 감동을 모르고 한 시절을 버텨왔구나
5.
한 때는 둥근 음표가 밤새도록
만조의 깃발을 세운 적도 있었지
나무 한 잎에 불던 바람이여
나무 한 잎을 연모하던 조바심이여
밤새도록 나를 연주하던
악보 같은 한 여자여
오늘 밤에는 차마 너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커피포트 가득 물을 끓인다
그 옆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시계추 소리가
낮은 포복으로 착지하고 있다
6.
너에게로 가는 길에는
늘 결 고운 진흙별이 반짝인다
다가갈수록 왈칵 쏟아지는 속살이다
환한 상처를 움켜쥐고
기억의 먼발치에서
세상의 가장 밝은 빛을 깜박이며
오늘 밤에는 너에게 가겠다
그러므로 밤늦도록 잎잎의 창문을 열어두라
나무에게 / 양현근
- 시집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에서
<출처;tong.nate.com/kkj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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