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 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의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 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채송화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커다란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수염으로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꽃밭에서
송찬호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들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겠다
바지랑대 끝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나비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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