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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9년 상반기 시인세계 당선시-하여진. 노지연

시치 2009. 2. 26.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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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진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시속 80으로 넘겨주는 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 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 고르지 못함 고인물 튐 고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는 마음일랑 한번 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
나도 하마트면 길을 잃을뻔했든요.
산다는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 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

 

하여진:

1960년 광주출생 광주여자대학 문창과 중퇴. 방통대 국문과 수업

 

 


세상의 모든 저녁


-노지연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어지는 상점*이 있지
나는 따끈한 달과 별과 바람을 넣고 달콤한 구름을 만들거야
당신의 신전이 모든 어둠을 어둑어둑 집어먹기 전에

 

1복제품, 달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트려 먹는 맛!

움푹 패인 달이 휘청거리며
느릿느릿 자신의 늘어난 태엽을 감아 올린다
윤기 나는 밤이 감은 눈을 뻔쩍 뜨며
헐렁한 그림자들의 나사를 조인다
차곡차곡 진열된 어둠들이 짧게 흔들린다
복제된 달의 그림자들이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신전의 허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어둠의 입술에 흥건한 침이 고인다
복제된 달이 담쟁이넝쿨처럼 일제히
신전의 기둥을 휘감는다
어둠이 휘발성이 되어
비닐봉지처럼 붕붕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후드득 증발한다

 

2 바람의 신전

 

당신이 당신의 신전에 앉아 기도 할 때
나는 당신의 신전에 걸린 바람을 걸쳐 입고
당신을 복제하지

점점 달이 떠올라
나는 자꾸만 기침이 나와
사실, 이건 오래 전
우리 몸 속에 내재된 어둠의 본능이지

나는 당신을 입고
당신은 나를 입고
우리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들이
끊임없이 당신과 나를 복제하지
매일매일 당신과 내가 늘어나지

어둠이 늑대처럼 갸르릉
기침을 하며 몰려오지

 

3 구름 BASKIN ROBBINS 31

 

복제된 달을 좋아해
차가운 핏방울 냄새를 사랑해
이 세상 모든 복제품들을 구워줘
모락모락 피어나는 바람을 넣고
뭉텅뭉텅해진 구름을 먹을 테야
입 한 가득 번져오는 차가운 빗방울!

낡은 태양을 구워 넣은 체리주빌레와
그림자들을 노릇노릇 구워 넣은
파스타치오 아몬드를 먹어봐

점점 모호해지는 어둠의 경계
눈 녹듯 사라지는 구름들을
한 입 가득 털어 넣고

신전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

 

*김중일의 시 '구름이 구어지는 상점' 에서 인용

 

노지연:

1991년 출생.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중. 추계예술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장원. 명지대학교 고교생 박일장 차상. 전북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차상등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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