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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 하여진

시치 2009. 2. 24. 14:37

 

 

 

 

 

 

                    제13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 하여진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나면 시속 80으로 넘겨주는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 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이 고르지 못한 고인 튐 과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은 마음일랑 한번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리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 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

 나도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거든요.

 산다는 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 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

 

 

 

                     - 1960년 광주 출생. 방송통신고 졸업.

                       광주여대 문창과 중퇴. 방통대 국문과 재학.

 

 

 

출처 : 폴래폴래
글쓴이 : 폴래폴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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