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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8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 배옥주

시치 2008. 12. 22. 01:13

2008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신인상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

                                       

고스트, 고스트  외 3편

 

짙은 구름 위로 죽은 자들의 말이 떠오른다

열아홉에 자살한 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치매로 떠난 할머니는 어린애가 되어 칭얼거린다

산모롱이를 휘감는 안개비에

나 밖을 떠다니는 내 뒷모습이 녹아내린다

 

낯선 새들이 자귀나무를 쪼아댄다

분홍화관을 접은 가지들이 웅성거리고

내 눈에서 흰 개미들이 기어나온다

 

한 차례 구름 떼가 쏟아지고

백 년 동안 외로웠던 나무들이 날아오르자

더 늙어버린 언니가 달려온다

잦은 오한에도 천사의 날개 따윈 기대하지 않는다

 

없는 다리에 재빨리 신을 신기는 순간

배고픈 할머니가 나를 쪼아 먹는다

하얀 시트 위로 눌린 가위들이 흩어진다

 

자귀나무 그늘 아래 실종된 아이들이 수건돌리기를 한다

팔이 잘린 아이와 손을 잡고

내 몸을 빌려 입은 할머니와 혼곤한 오후를 논다 

입구가 통로이며 출구인 내 눈동자의

구름 속에서 나는,

등 뒤에 떨어진 흰 손수건을 더듬는다                                                                                                                    

 

달맞이꽃

 

엄마가 돌을 던져요

돌팔매질은 번번이 내 슬픔을 비켜가요

포플린 치마 속으로 강물이 흘러가고

따라오지 마!

갈라터진 손등 같은 엄마 목소리가

어린 노을의 귓바퀴를 흔들어요

엄마는 저 둥근 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머뭇거리는 울음이 길바닥에서 자꾸 넘어져요

눈물에선 왜 강물 냄새가 나는 걸까

굳어버린 내 발등 위로 기적소리가 달아나요

쉰 목구멍은 기차를 삼킨 터널마냥 아득해져요

골목어귀 흩어진 돌멩이들의 반짝이는

그 별을 툭툭 걷어차며 나는 집으로 돌아와요

 

아버지는 술병처럼 마루에 엎어져있어요

거친 잠꼬대에 파르르 떨리는 사금파리들이

꽃잎처럼 피어나요 나는

불빛 아래 흩어진 아버지를 닦아내요

무릎에 가슴에 몽우리가 맺혀요

고개 숙인 달빛이

담벼락에 암각화를 새길 때

한 무더기의 바람이 강둑을 흔들어요

나는 쇠비름처럼 돋아나는 엄마를 죽여요

달의 언덕은 노란 피를 흘리고

수만 송이 마른 내가 태어나요

                                                             

구름을 수리하다    

 


도무지 안 읽혀요, 꼭 복원해야 합니까?

해부하던 구름을 심드렁하게 밀치는 Y씨

 

자꾸 다운되던 아버지의 징후가 왠지 불안했어요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리곤 할 때

백업하지 않은 건 제 불찰

햇무리아버지 새털아버지 안개아버지

새 폴더마다 그려진 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떠다닐 거라 믿었죠

 

머리 위에서 운석이 충돌했나?

마른번개 번득이는 날

프로그램 깨진 아버지의 동공을 뒤적이지만

먹통구름에 매달린 산소호흡기 떼어내기 전까지

하드의 기억은 압화처럼 생생할 거라 생각했죠

 

빗나간 일기예보의 파일 경로를 추적하는 구름수리공 Y씨

천둥소린 공허해!

중얼중얼, 감염된 데이터를 해체하네요

 

복제 개 스너피의 새끼처럼

사학자들이 발굴한 왕의 자서전처럼

재생하고 싶어요 *한 줄기

빛의 입맞춤으로 하늘의 꽃이 될 수도 있을 저 구름을

 

구름의 장기를 이식한 하늘에서

진화한 추억이 우박처럼 쏟아져요

 

*타고르: 먹구름은 한 줄기 빛의 입맞춤으로 하늘의 꽃이 된다네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카페 사바나에 앉아 

가젤의 눈빛을 읽는다 수사자가 되어 

툭툭 바람의 발자국을 털어낸다

  

바위비단뱀의 혓바닥 같은 

찻잔 위로 검은 유목민들이 떠다니고

소용돌이로 끓어오르는 암갈색 눈알들

야자나무 그늘이 내려오는 창가로

말굽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이 달려온다

  

성인식을 치른 힘바족 처녀들이

내 두 개의 덧니 사이로 걸어 나오고

유두 같은,

검은 향기를 혀끝으로 음미한다

 

폭풍우 지나간 손바닥 위에

블루마운틴 한 잔을 올려놓으면

대륙의 어디쯤에서 깃털의 영혼이 나부끼고

아라비카 전생의 내가 보인다 하얀 손바닥과

희디흰 눈자위를 가진 처녀가

유르트 같은 찻잔 속에서 어른거린다

 

이제 막 흑해의 붉은 달이 떠올랐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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