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23) - 겸허와 자제의 아름다움

시치 2008. 8. 18. 01:01
정진규의 시론(23) - 겸허와 자제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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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잇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 박남수, [훈련]

어떤 고도한 의식의 그것보다도 아주 일상적인 개인사의 그것이 온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만큼 진솔하기 때문이다. 나와 있는 그대로 죽기 직전의 아내가 보인 저 눈물겨운 배려와, 좀 민망하기야 하지만 늘어난 팬티 끈을 갈며 혼자 끙끙대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 그가 평생 기대고 살던, 사별한 아내와의 아득한 거리가 감지되는 순간, 누구나 가슴 가득 차오르는 눈물의 그 수위가 위태롭게 만져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의 화자는 1975년 이래 미국에 머물고 잇는 우리의 원로시인 가운데 한 분이다. 1939년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 오늘에 이르기까지 54년에 걸친 그의 문학적 삶과 시의 역정이 남달랐음을 이해하고 보면, 저 같은 사정은 더욱 짙게 우리를 적시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51년 월남, 다시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해 오늘에 이르렀다. 연속된 실향, 평생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그는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거기에다 이제 아내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통해 이승과 저승이라는 또다른 절대적 경계의 세계에 이르고 있다. 이제 여기서 더 어디로 갈 것인가.
위의 시는 최근에 나온 그의 시집 [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 1993.)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그간 그의 다른 시집들과는 좀 다른 면모의 것이다.
우선, 이 시집에는 <이 시집을 사랑하는 아내 강창희의 영전에 드린다>는 헌사가 붙어 있다. 흔히 이런 헌사는 수록된 내용에 관계 없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이 시집은 경우가 다르다. 이 시집에 수록된 48편의 시들은 시인이 책머리에 쓰고 있듯, 아내의 돌연한 죽음으로 받은 충격과 그로 인해 죽음과 그 이후를 생각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들로 일관되고 있다. 그런만큼 소재적이고 의식적이라는 점에서 시적 본질로서의 수용에 다소 방해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는 우리 시의 관습화된 발화양식, 흔히 삶의 지평보다 더 높은 곳에 시적 공간을 설정하고 잇는 데서 오는 그 공소성을 진솔한 언어로 지워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내의 죽음을 담고 있는 그의 담화양식은 일상적이며, 지시적인 표현에 더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시편들이 우리 내부에 형성하는 대중적 교감은 그러한 표혀들의 평면성, 단순한 전달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체험의 절실함과 통과의례로서의 진정성으로부터 온다. 이러할 때 우리는 일체의 수식을, 또는 의도적 장치를 거절한 자리에 가담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만든 비유가 아닌, 살아 있는 비유의 실체를 거기서 만나고 놀라기도 한다. 진정한 비유는 우리의 삶에 구속의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열어 주는 힘, 근원적인 자유를 허락한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더군다나 이 시인이 직면하고 잇는 죽음의 세계는 사랑하는 아내의 그것이다. 거듭 확인하지만, 거기에다 시와 삶의 남다른 시간의 굴절과 공간의 이동을 직접 체험해 온 노시인의 그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 시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울컥 가슴 차오르는 눈물의 수위> 그 자체뿐이었던가. 이 시에서 시인은 <불편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연거푸 사용하고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내의 죽음이 <불편하다>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느냐는 항변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눈물의 수위>를 가져왔는가.
겸허와 자제 때문이다. 젊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젊은 사람들은 기쁠 때 너무 풍선처럼 둥둥 뜨고, 슬플 때 지나친 비탄에 빠지는 과장과 노출을 일삼는다. 그래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한다. <불편하다>는 말 속에는 겸허와 자제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신의 상처를 혼자서 다스리려는 <염치>가 있다. 자신에게만 관대하고 남게는 예사로 상처를 주는 일들로 하여 얼마나 가슴 답답할 때가 많은 요즘 세상인가.
박남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생성의 이미지를 줄곧 추구해 온 시인이다.

죽은 나무 등걸에
푸른 좁쌀이 돋고 있다
한랭한 가지 끝에
발돋움하는 새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 [마른 풀잎이]부분

노시인은 필경 아내의 죽음만저 생성의 이미지로 자리바꿈하는 세계를 새롭게 제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