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유안진 시모음

시치 2008. 7. 3. 02:03
유안진 시모음 

 

동행

 

살 같이 빠르다는 한 세월을
그대 부리가 빠알간 젊은 새요

옛 어르신들 그 말씀대로
연약한 죽지를 더욱 의지 삼고
느릅나무 높은 가지 하늘 중턱에다
한 개 작은 둥지를 틀고

햇발이 모자라도록 웃음 웃어 살자
음악이 모자라도록 춤을 추어 살자


휘파람새

 

봄날 하루 해가
다아 저물도록
어디서 뉘 부르는 휘파람 소리

애국가 제3절 가슴 젖는 옛 곡조를.....

애국하다 요절한
총각귀신 새가
일본순사 칼 맞고 엎뎌진 학생
절대로 죽지 않는
뉘댁 삼대독자(三代獨子)가

어린 목청
돋워가며
거퍼 부는 휘파람.


떡 잎

 

조용히 門을 여는 한 왕조(王朝)를 본다

두 연인(戀人)이 일으키는 어린 왕국(王國)이여

저마다의 생애는 영광과 비극의 대 서사시(大敍事詩)

봄 아지랑이 황홀한 춤 앞세워

모든 인연(因緣)이 움돋았건만.


바다, 받아

 

우주의 첫 생명체가 시작되었다는
아폴리디데가 태어났다는
바다에, 밀물이 들고 있다
뜨거운 것이 짜거운 것이
뜨겁고도 쓰라리게 목젖까지 차 올라
어머니!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산에 묻힌 어머니(母)를 바다(海)에서 부르다니
하해(河海)같은 어머니라고 해서 그랬을까
세상의 강물이란 강물을 다 받아주어서
세상의 무엇이나 다 받아 주는
아무리 받아 주어도 넘치지 않는 바다는
천만 가지 세상높낮이들 가리지 않고
받아준다고 바다이지
천만가지 이름으로 천만번을 불러도
다만 바다일 뿐
받아주는 어머니(母)가 있어서
어머니의 눈물(?)이 있어서 바다(海)이지.


박수갈채를 보낸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뎅이를 쏟아내며 제 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 채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 속에도 겨울은 있었다

두 시대가 동거해야 하는 불운은 항상 앞선 자의 몫이었다
정작 봄이 무르익었을 때는 매화는 이미 꽃이 아니었다
앞서 가는 자는 항상 이렇다
불행하지 않으면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다

지탄(指彈)받는 수모(受侮)없이 완성되는 시대도 없다
춘설도 동백꽃도 꽃샘추위도
제 시대를 완성하고 죽는 후구자(後驅者)그 사람들.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묻은 기러기 죽지로
밤하늘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짱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橫財)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行人)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았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不協和)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같은 뒷모습의, 가고 있는 수묵 빛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 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안경, 잘 때 쓴다

 

자기 전에 안경을 닦는다
책 속에만 꿈이 있는 줄 알고
책 읽을 때만 쓰던 안경을
총기가 빠져나간 눈에
열정이 빠져나간 눈에
덧눈으로 씌운다

잠은 어두우니까
더 밝은 눈이 필요하지
감긴 눈도 뜬눈이 되어
지나쳐버리는 꿈을 놓치지 않게 되고
꿈도 크고 밝은 눈을 쉬게 알아볼 것 같아서
자투리 낮잠을 잘 때도 반드시 안경을 쓰는데

꿈이 자꾸 줄어드니까
새 꿈이 안 오니까
꿈을 더 잘 보려고
꿈한테 더 잘 보이려고
멋진 새 안경을 특별히 맞췄는데
새 안경이 없어졌다
다리는 새 걸로 바꾸지 말걸 그랬어.


그림자도 반쪽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은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라서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조금만 덜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 주시옵고
용서해 주시옵기를
지워서 잊어버려 주시옵기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해버릴 만큼은
저절로 다 잊어버릴 만큼은
마시옵기를
조금은 남겨 두시옵기를

용서 구할 거리를 또 만들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울 수 있을 만큼은
흐린 자국 몇이라도 남겨두시옵기를.


운동화, 두 귀에 신기다

 

암만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그럴 리가 없다는 수녀님은
기도할 때 두 귀에 운동화를 신겨보라고 했다

새 운동화에 신이 난 두 귀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금방 하늘문밖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때 문안에서 걱정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 글라라의 전화는 언제나 통화 중이라서
도무지 통화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가슴에는 빈틈이라곤 한치는커녕 반치도 없어서
응답을 보내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번번이 되돌아와 버리니 정말 큰일이야
저 잡념자루를 어쩐다? “


까마귀의 길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춥게 살아야 한다지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올 흴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얼어붙은 가지 끝을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울음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 밖에까지 몸서리치는 고독의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영민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손대지 마라

 

깨트려 파계(破戒)시키지 마라
돌팔이 땡초로 환속(還俗)시키지 마라
그저 한낱 돌덩이 바위로만 보이느냐
하늘이 지으신 바 이대로가 부처니라

창조의 손바닥 그 체온에 뺨 부비는 바람과
구름도 묵묵히 읽고 가는 섭리는
햇볕이 달궈놓고 눈서리가 식혀내는
불과 얼음의 길, 인생과 다르지 않아
밤마다 달빛 별빛에 씻고 말린 몸에
풀과 꽃이 향기 풍겨 재롱 떨고
풀버러지 나방 새들 알 까고 새끼 치는
무릎 정강이를 이불 덮고 뿌리 묻어 크는 나무
다들 함께 한 이 자리 이대로가
완벽(完璧)이니라
神의 비밀스런
온갖 말씀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