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애송 동시

[스크랩] [애송 동시 - 제 43 편] 귤 한 개

시치 2008. 7. 1. 23:51

[애송 동시 - 제 43 편]

귤 한 개-박경용

 


한 개가
방을 가득 채운다.

짜릿하고 향긋한
냄새로
물들이고

양지쪽의 화안한
빛으로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맛으로
물들이고


한 개가
방보다 크다.


↑ 일러스트=양혜원

 

시평

방안을 가득 채운 귤 향기

시는 심오한 시적 전언 없이 감각의 향연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귤 한 개〉는 오감을 활짝 열고 읽어야 할 동시다. 특히 후각·시각·미각을 풍요롭게 하는 감각적 암시로 넘친다. 무르익은 귤은 방을 "짜릿하고 향긋한/ 냄새로/ 물들"여 채운다. 냄새와 기억 중추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냄새와 함께 주어진 정보는 쉽게 각인되고 오래간다. 냄새들은 무의식의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억들을 깨우고, 마치 추억들에 끈이 달린 것처럼 잡아채어 솟구치게 한다. 냄새는 아주 강력한 생각의 단초이고, 추억과 몽상의 폭발을 일으키는 매질(媒質)이다.

햇빛을 받은 귤은 "양지쪽의 화안한/ 빛으로" 물들어 황금색으로 타오른다. 시각은 원거리에 있는 사물에까지 미치는 촉각이다. 황금빛에 물든 이 남국의 향을 가진 과일은 미량의 염분을 머금은 바람과 가보지 못한 토양과 아열대의 모호한 쾌락들로 우리를 이끈다. 귤 한 개에서 촉발한 상상력은 후각의 유혹에서 시각의 애무를 거친 뒤 미각으로 직격(直擊)한다. 황금색으로 타오르던 귤은 입안으로 들어와 이빨 아래에서 으깨지며 "사르르 군침 도는/ 맛으로" 점화한다. 귤에서 흘러나온 시고 달콤한 즙들은 혀의 미뢰들을 충분히 적신다. 넘쳐흐르는 즙으로 범벅이 된 입술, 혀, 입천장들은 귤의 풍미로 가득 차고, 귤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이상한 허기와 관능을 자극하며 아찔한 감각적 흥분을 일으킨다.

박경용(68)은 경상북도 영일(迎日)에서 태어났다. 1958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 시 〈청자수병〉과 〈풍경(風磬)〉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동시와 시조 창작을 겸업하는 시인이다. 1969년에 첫 동시집 《어른에겐 어려운 시》를 낸 뒤 여러 권의 동시집을 펴냈다. 귤 한 개에서 질펀한 감각의 향연을 이끌어낸 〈귤 한 개〉도 수작이지만,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길동무.// 말 건네려다/ 발길로 돌 한번/ 걷어차고.// ― 어디 가니?/ ― 몰라 !/ 말은 안 해도/ 속말은 한다.// ― 이름이 뭐니?/ ― 몰라 !// 또 말을 건네려다/ 돌 한 개 집어선/ 멀리 멀리 던지고.// 갈림길에 이르러/ ― 잘 가 !/ 속말만 나직이 건네고/ 헤어진 길동무."(〈길동무〉)와 같이 아이들의 속내를 잘 포착한 동시도 마음을 울린다.

[장석주·시인] 조선일보,2008.6.30


 

출처 : 골든모티브
글쓴이 : 솔체꽃{모티브} 원글보기
메모 :